탁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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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문헌 요약
3. 탁순국 관련 인물


1. 개요[편집]


卓淳國

한국 사서에는 안 나오고, 유일하게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흠명기에만 나오는 (후기) 가야 연맹의 소국 중 하나다. 위치에 대해 과거에는 대구의 옛 지명인 달구벌의 달구가 의 듯으로 탁과 발음상 통용된다는 것을 근거로 대구에 비정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경상남도 창원시에 비정하는 의견이 통설이다.[1] 의령군설도 있는데 이 쪽은 탁순국의 국력에 걸맞는듯한 고분군은 남아있지만 그 위치나 정황상 안 맞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2020년 9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제2안민터널 공사 중 대규모의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어 탁순국의 위치로 창원시 일대가 더 힘을 얻게 되었다.


2. 역사[편집]


탁순국의 행적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건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그러나 신공기는 왜곡의 농도가 짙어 일본서기에서도 좀 더 뒷 시대 기사보다 신뢰성이 특히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공 왕후 46년 봄 3월 을해삭(1일)에 사마숙녜(斯摩宿禰 : 시마노스쿠네)를 탁순국(卓淳國)에 파견하였다[2]

. 이때 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년(甲子年, 일본서기 기년으로는 244년이나, 이주갑인상을 하면 364년이다.) 7월 중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세 사람이 우리 나라에 와서 ‘백제 왕은 동방(東方)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왕이 구저 등에게 ‘본디 동쪽에 귀국이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바닷길이 멀고 파도가 거칠어서 큰 배를 타고서야 겨우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길이 있다고 해도 어찌 능히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구저 등이 ‘그러면 지금 당장은 건너갈 수 없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선박을 준비한 다음에 왕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만약 귀국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 알려주십시오.’라고 당부하고 이내 돌아갔다.” 사마숙녜는 곧바로 겸인(傔人) 이파이(爾波移 : 니하야)와 탁순인 과고(過古) 두 명을 백제국에 파견하여 그 왕을 위로하였다. (후략)

일본서기 권 제9 신공 왕후 46년조


이 신공기 기록은 곧이곧대로의 역사로서는 신빙성이 낮고, 국내 사학계에서는 '주체교체론'+'이주갑인상'으로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의 남방 경략의 주체를 근초고왕에서 신공왕후로 바꿔 기록한 것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여기서 탁순국왕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고 거절했지만, 실제로는 정보를 수집하여 한반도 남부의 정세를 파악하고 가야 지방의 각 소국과 교섭을 시도하는 등 사전 정지 작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369년 근초고왕은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곱 나라를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에도 탁순국으로 추정되는 '탁국'을 포함해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다.# 훗날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父兄子弟)의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5세기에 대가야가 성장하고, 개로왕이 살해되고 수도를 고구려에 빼앗기는 등 혼란에 빠진 백제의 변방 섬진강 유역을 대가야가 차지하면서 탁순국도 이때 대가야가 주도하는 가야세력에 일단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6세기 시기인 흠명기에서 다시 탁순국이 등장하는데, 6세기 가야는 한때 강성하던 반파국(대가야)이 백제에 밀려 지금의 호남 동부를 빼앗기고, 백제와 신라라는 거대한 고래에 끼인 새우꼴이 되어 이래저래 간섭을 받는 상황이었다. 529년에 탁순국 왕 아리사등의 행적이 등장하는데, 522년의 혼인 동맹 등 친신라 노선을 펴던 반파국(대가야)에 반발해 결혼 동맹을 깨트린다. 신라는 분노해 탁기탄국(啄己呑)[3] 등을 깨트렸고 탁순국은 자기들이 괜히 강하게 반신라로 나가다가 결과적으로 신라와 너무 가까워져 오히려 안보에 위기가 왔다. 왜국에 직접 넘어가 지원군을 요청한 기능말다간기가 아리사등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왜국은 오미노 케누(近江毛野)를 탁순국에 보내 중재를 시도했지만 왜군도 신라군을 이끄는 이사부의 무력 시위에 꼬리를 내렸다. 아리사등은 왜국이 보낸 오미노 케누가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왜국에다가 얘 좀 다시 데려가라고 했는데 오미노 케누는 왜왕의 명령에도 돌아가지 않고 가야 땅에서 눌러앉아 횡포를 부렸다. 결국 아리사등은 방해만 되는 오미노 케누를 쫓아내기 위해 구례사기모를 백제에 보내 성왕에게도 지원군을 요청한다. 성왕은 오미노 케누를 격퇴해 줬지만, 탁순국의 영역에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쌓아 탁순국을 부용국으로 만들어버렸다.

2년 여름 4월 (중략) 성명왕 (백제 성왕)은 "(중략)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중략)"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19 흠명 천황 2년조


이렇게 여기저기 돌려막기식으로 겨우 버티다 못해 어느 순간 신라에 복속을 선택함으로써 멸망하였다. 멸망 시기는 541년 이전 어느 시점으로 보이는데,[4] 멸망하는 과정은 신라에 저항했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금관국처럼 자진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비회의에서 성왕은 신라가 '약속을 어기고 탁순을 멸망시켰다'라고 말했는데, 백제와 신라 모두 탁순을 일종의 완충지대로 두는 상태로 대치하다 신라 측에서 먼저 수를 썼던 것일수도 있다. 물론 성왕의 발언은 백제 측의 일방적인 주장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튼 금관과 탁순의 멸망은 나머지 남아있는 가야사회에 큰 안보 불안과 충격을 가져왔으며, 안라회의(고당회의), 웅진회의, 제1차, 제2차 사비회의 등 가야권을 지키기 위한 국제회의가 여러 번 열리게 된다.

아리사등(阿利斯等)이 탁순국의 마지막 왕으로 나온다.


2.1. 문헌 요약[편집]


367년 왜국과 통교했다. 369년 왜왕이 탁순을 거쳐 가야를 평정 후 신라, 백제, 마한, 고구려 등 한반도의 국가들을 귀속시켰다.[5]

525년 탁순의 아리사등이 신라의 종자들을 내쫓았다. 그 결과 529년 탁기탄이 멸망하고 혼인동맹이 결렬되었다.

538년 아리사등이 신라에 항복해 멸망했다.


3. 탁순국 관련 인물[편집]


일본서기에 기록된 탁순국인은 다음과 같다.

  • 말금한기: 이주갑인상을 적용하면 4세기 중반-후반에 재위한 탁순국의 왕이다.
  • 과고(인물): 탁순국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 아리사등: 탁순국의 마지막 왕.
  • 일라: 아리사등의 아들이다.
  • 기능말다간기(?): 탁순국의 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 530년 아리사등이 청병사로 신라로 파견한 인물.
  • 노수구리(奴須久利): 530년 아리사등이 청병사로 백제로 파견한 인물이다.

[1] 탁순국 대구설은 사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이 신라가 오랫동안 경주분지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는 후진적인 체제였다고 설정한 데서 성립했지만 수십년간 고고학적 성과가 쌓이면서 신라권이 4세기 이후 경주를 벗어나 낙동강 동쪽 지역 전체+낙동강 상류 경북 전역을 아우른 것으로 밝혀지면서 탁순국이 대구에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다만 창원을 탁순국으로 비정하기에는 창원에서 고분군이 확인되지 않는 것이 문제. 아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듯 탁순국은 후기 가야권 안에서 대가야나 안라국에는 못미치더라도 그럭저럭 이름을 남긴 강호였기 때문이다.[2] 사마숙녜는 어떤 성(姓)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다.[3] 지금의 창녕군 영산면 혹은 김해시 진영면 일대[4] 이 시기는 신라 법흥왕이 승하하고 열 살도 안 된 어린 진흥왕이 막 즉위해, 지소태후섭정한 시기다. 신라 내부는 대단히 어수선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신라의 국정노선은 분명하게 잡혀 있어서 가야 공략을 계속했다는 것이다.[5] 물론 이건 일본측 기록으로, 한국 사학계에선 근초고왕 시기 업적을 일본이 가로챈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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