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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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1](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 (생몰년도: 1754년 2월 2일 ~ 1838년 5월 17일)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
4. 음식 외교
5.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프랑스 혁명기부터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왕정복고 시기까지 활약한 프랑스정치인이자 외교관. 동 시대 라이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영국의 캐슬레이 자작 로버트 스튜어트와 더불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더 나아가 유럽 외교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외교관으로 평가받으며[2]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총리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 • 외정에 두루 능통한 인물로 여겨진다.

또한, 과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인데, 프랑스 혁명 당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단위계 대신 미터법의 규격[3]을 제정함으로서 지금 전 세계가 m와 kg을 단위로 쓸 수 있게 하여 과학, 특히 물리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4]


2. 생애[편집]


본래 귀족 집안의 자제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명문가였으나 탈레랑은 선천적으로 다리를 저는 몸이었기에 일찍이 성직자의 길에 입문했다. 집안도 좋고 본인도 능력이 있었기에 34세가 되는 1788년 오툉(Autun)의 주교로 서품되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등 혁명정부를 지지하였다. 1790년 7월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을 기념하는 미사를 집전했다가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

1796년 귀국해 총재정부의 외교를 담당하다가 나폴레옹을 도와 그의 정권 획득과 함께 외무장관에 취임하였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이 독일과 스페인을 침략한 것이 프랑스의 외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와 내통하며 나폴레옹의 정책을 방해하다가 1810년 사임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루이 18세의 외무장관, 루이필리프 정부의 런던 주재 대사로 일하면서 오랫동안 프랑스 외교의 중심에 섰다. 특히 유럽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에서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프랑스는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영토 재편 과정에서의 손실을 최소화하여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계속 남을 수 있었다. 이는 나폴레옹 이후 또 다른 단일 패권국가가 등장하여 유럽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꺼리고, 절묘한 세력균형의 형성과 유지를 선호했던 주요 참가국들의 의도를 간파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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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의 풍자도.[5]

1838년 향년 84세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는데, 죽기 몇 시간 전 과거 자신에게 내려졌던 파문 조치를 용서받으면서 종부성사[6]를 받았다.


3. 미디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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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제작된 프랑스의 TV 전기영화 <나폴레옹>에서 존 말코비치가 탈레랑 역으로 열연했다. 외모상의 싱크로율도 대단했지만, 속을 알 수 없을 듯한 표정, 능수능란한 언변, 교활함 등 탈레랑 특유의 모습들을 훌륭히 재현해 냈다. 극중 역할과 비중은 중국 초한지장량, 삼국지제갈량에 결코 뒤지지 않는 책사.

일본 작가 아토다 다카시(阿刀田 高) (1935년 ~ )가 쓴 단편 <나폴레옹광>에서는 일본의 부유한 사업가가 나폴레옹광이라서 나폴레옹에 대한 걸 거액을 주고서라도 사 모으는 내용이 나온다. 하림 사장인가?[7] 그가 나폴레옹에 대한 걸 소설 속 화자인 주인공에게 말하면서 탈레랑을 황제 폐하(나폴레옹)를 배신한 매국노라고 분노하는 것을 들은 화자가 "탈레랑은 프랑스에선 프랑스에 큰 이득을 안겨준 인물로 높게 평가하지 않느냐."며 나폴레옹을 배신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하자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전략 게임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의 나폴레옹 시나리오에서 프랑스 진영이 사용할 수 있는 보너스 카드 중 하나로 등장하여 한 턴 동안 국가 간 강제로 전쟁이나 동맹을 맺을 수 있게 한다.


4. 음식 외교[편집]


빈 회의마리앙투안 카렘이라는 희대의 학구파 천재 요리사와 같이 음식외교를 펼쳐서, 미스터 초밥왕 같이(...) 음식으로 외교를 풀어나갔다. 당시에 이미 유럽 최고의 명성을 가진 요리사였던 카렘의 명성과 명성에 걸 맞는 그의 요리, 추가로 탈레랑 본인의 쩌는 말빨이 결합하여, 나폴레옹 전쟁의 뒷처리를 담당하는 회의에서 패전국인 프랑스가 조각 나지 않고 영토를 거의 온존하여 이후에도 유럽의 강대국일 수 있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8]


5. 이야깃거리[편집]


  • 그가 커피를 두고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유명한데, 실은 탈레랑 본인의 발언은 아니다. 애당초 탈레랑은 홍차파였고.
"Noir comme le diable, chaud comme l'enfer, pur comme un ange, doux comme l'amour."[9]

"악마처럼 까맣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천사처럼 순수하고, 사랑처럼 달콤하다."
하지만 이 일화가 원체 유명한 탓에, 이걸 가져다 써먹은 소설이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이다.

  •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라 불렸던 그의 외교술을 함축해주는 그의 발언. 외교적 수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외교관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고려해보죠."라는 의미이고, "고려해보죠."라고 말하는 건 "안 됩니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자는 외교관이 아니다.[10]

  • 프랑스 혁명 당시, "우리가 승리했다!"라고 외치는 대중들의 환호성을 듣고 한 말.
"우리란 건 누구일까요?", 제 대답은 "쉿! 간단하게 말할 순 없어요. 내일 알려드릴께요."랍니다.
일생을 음모와 배신, 변절로 일관한 그다운 답이지만, 사실 정치인, 그 자체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 1830년 루이필리프가 즉위했을 때, 탈레랑이 그에게 충성 서약을 하면서 했다는 말.
폐하가 13번째이십니다.
즉 일생동안 주군을 12번 바꿨고, 본인은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충성 서약이 아니라 불충 서약. 그러나 이 일화는 안타깝게도(?) 정확한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배신을 밥 먹듯이 했다는 사실을 최소한 겉으로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 당시 이런 소문이 돌았음은 놀랍지 않다. 혹자는 이를 두고 "그는 오직 프랑스에 충성했을 뿐이다."라는 감동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여자 관계를 비롯한 다른 측면에서도 그다지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 어쩌다가 아주 커다란 넙치를 2마리나 입수했는데, 당시에는 큰 부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손님에게 대접하기로 했지만, 2마리를 한번에 식탁에 내면 너무 부자 티를 낸다며 사람들에게 욕 먹을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자랑을 안 하기는 그렇고(...) 해서, 탈레랑은 일단 2마리를 다 요리하고 1마리를 먼저 내가도록 한다. 그리고 탈레랑의 지시를 받은 하인이 일부러 넙치 요리를 손님들 눈 앞에서 떨어뜨려 못 쓰게 만들었다. 손님들이 "저렇게 큼지막한 넙치 요리를 못 먹게 되다니."라며 안타까워할 때, 탈레랑은 손님들을 위해 2번째 넙치 요리를 바로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손님들은 "저런 넙치 요리가 곧바로 다시 나오다니 역시 탈레랑은 쩐다."라고 감탄했고, 탈레랑은 재수없다는 평판을 피하면서 교묘하게 커다란 넙치 2마리를 입수한 자신의 수완을 자랑할 수 있었다. 속으로 욕했을지 누가 아냐

  • 비밀경찰의 수장 조제프 푸셰와 함께 초기 나폴레옹 집권에 도움을 준 인물이지만, 정작 나폴레옹은 그들을 견제하고 싫어했다. 심지어 루머였지만 푸셰와 탈레랑이 공모해 나폴레옹을 몰아내는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탈레랑을 질책했고, 비단 양말에 든 똥 같은 인간이라고 모욕을 주었다. 탈레랑은 침착하게 이 상황을 넘겼지만 나폴레옹에 앙심을 품었고 훗날 정말로 푸셰와 손 잡고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정작 푸셰와 탈레랑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가 나폴레옹을 같이 까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둘 다 가톨릭 종교인 출신이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한 계몽주의자였다는 공통점도 있었다.[11] 하지만 나폴레옹을 몰아낸 후 푸셰가 몰락하는 데에 탈레랑이 기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친분이라기보다는 이 역시 정치적인 동맹이었던 것 같다.

  •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블뤼허는 파리의 예나교(Pont d'Iéna)를 폭파하고 싶어했다. 다리 이름이 본인의 역대급 흑역사 예나 전투[12]를 땄기 때문. 파리 시장이 어떻게든 블뤼허를 말리려 했지만 실패하자 탈레랑에게 SOS를 보냈는데, 탈레랑의 해답은 간단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 예나교를 사관학교교(Pont de l'École militaire)로 개명하려 하는데, "직접 와서 행사를 집전해 줄 수 있느냐?"고 요청한 것. 차마 러시아의 차르가 직접 이름을 내린 다리를 폭파할 수도 없어진 블뤼허는 결국 폭파계획을 철회했고, 나중에 사관학교교는 루이필리프 집권기에 예나교로 다시 이름을 바꿨고,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 프랑스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센 정도를 넘어서 다른 나라 요리를 가지고 시비를 걸어 어그로를 끈 적도 있다. "영국은 종교는 300개인데 요리는 3개뿐"이라 한 적도 있으며 존 애덤스가 보낸 대사들에게 "미국은 땅덩이는 그렇게 넓으면서 요리는 그것밖에 안 되냐?"는[13] 비아냥과 거액의 뇌물 요구를 하는 바람에 미국이 프랑스와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굳이 실드를 치자면 독립 직후의 미국은 영토도 국력도 초라한 신생국가였거니와, 프랑스는 영국을 골탕먹이겠다는 생각으로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가 재정이 궁핍해져 왕정이 몰락하는 상황까지 간적이 있었기에, 영국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먼 미국을 지원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점을 감안해도 저렇게 대놓고 어그로를 끎은 문제가 있다.

  • 탈레랑은 호색한이라 여러 정부들을 두었었는데, 상대의 나이도 국적도 신분도 가리지 않았다. 마지막 정부는 무려 자신의 조카며느리.[14] 그답게도 남몰래 밀회한 것이 아니라, 아예 공식 외교석상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적자는 하나도 없는데 추정되는 사생아는 20명이 가볍게 넘는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정식 부인과 사이에 낳은 딸조차 사생아. 즉 불륜상대와 결혼했고 아이도 불륜하던 시절에 낳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인과는 결혼 후 곧바로 별거. 그럴 거면 왜 결혼했냐고 하겠지만,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라서...[15]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애인인 플라오 백작 또한 탈레랑의 사생아이다. 나폴레옹 3세의 친부가 루이 보나파르트가 아니라는 소문이 퍼지자 플라오 백작이 자연스럽게 친부로 의심받았다. 물론 백작 본인은 부정했지만.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빈 체제 구성에 참여한 탈레랑은 제정을 부활시킨 나폴레옹 3세의 친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막후에서 지휘한 모르니 후작[16]은 플라오와 오르탕스의 공인(...)된 사생아였는데, 당대에는 이부형제라고 알려졌지만 그냥 친형제였던 셈. 유명한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또한 탈레랑의 사생아라는 추정이 있다.

  • 그가 구상한 국민교육의 청사진은 현대 프랑스공교육 시스템의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근대적인 교육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국민교육 보고서 속에는 늘 소년들을 어떻게 가르칠까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으므로, 이에 반발하여 영국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교육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여성의 권리 옹호》 를 저술하여 탈레랑에게 읽어주십사 헌정하기도 했다.

  • 성직자로서 1789년 11월 2일에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1790년 9월에 성직자민사기본법(Constitution civile du clerge)을 제안하여 통과시킨 게 탈레랑이다. 그리고 이 법들은 이후 방데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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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드탈레랑페리고르'가 되지만 워낙 '탈레랑'으로 잘 알려져 있어서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다만 대내적 정치 사안에 있어서 탈레랑은 반동적인 메테르니히보다 훨씬 리버럴했다.[3] 특히 m의 규격을 의미한다. 당시 프랑스 혁명 위원회에서는 길이의 단위로 크게 3가지의 제안이 올라왔는데, 하나는 누가 봐도 부정확할 가능성이 있어서 제외되었으며, 다른 두가지가 각각 주기가 1초인 단진자의 길이, 다른 하나가 적도에서 북극점까지의 자오선의 1000만분의 1이라는 길이였다. 탈레랑은 이 중에서 단진자의 길이는 1초를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이유로 측량을 통해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자오선의 길이에서 길이단위를 정의하는 것으로 지정하여 지금의 미터법을 낳았다.[4] 자세한 내용은 앙투안 라부아지에 참고.[5] 그림 맨 오른쪽이 탈레랑. 왼쪽에서 두 번째가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메테르니히이다.[6] 이때 손바닥에 성유를 바르는 대신 손등에 바르게 했다고 한다. 상대는 신부였고, 탈레랑 본인은 그래도 주교였으니까. 게다가 당시 가톨릭 신부를 탄압하던 혁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이 신부가 서품받은 지 얼마 안 된 미숙한 신부였던지라 성사 집전이 서툴었기에, 한때 정통 신학교육을 받은 주교 탈레랑이 선배이자 경험자로 따끔하게 충고를 했다고 한다.[7] 닭고기 도매업으로 유명한 하림 회장이 나폴레옹광이라 프랑스에서 경매로 올라온 나폴레옹이 쓰던 모자를 무려 26억원이 넘는 거액을 주고 사서 화제가 된 바 있다...[8] 사실 나폴레옹이 탈출하여 부랴부랴 대충 마무리 된 덕이 더 크지만.[9] '누아르 콤 르 디아블, 쇼 콤 렁페르, 퓌르 코 머낭쥬, 두 콤 라무르.' 대중적으로 익숙한 한국어 외래어표기법 표기상으로는 ㄹ이지만 현대 불어(정확히는 탈레랑이 살던 18세기부터)의 r은 모두 구개수음으로 한국인의 귀에는 ㅎ발음에 훨씬 가깝게 들린다. 굳이 쓰자면 '누아-ㅎ 콤므 르 디아블르, 쇼 콤므 렁페-ㅎ, 퓌-ㅎ 콤므 어낭주, 두 콤므 라무-ㅎ'. 잘 보면 r표기로 끝나는 단어가 앞으로갔다 뒤로갔다 하며 운율을 만들고 있다.[10]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에서 이 대사가 패러디가 됐는데, "정치는요, "그렇다." 하면 그건 "그럴지도 모른다."는 뜻이고, "그럴지도 모른다."는 뜻은 "그거는 마 안 된다."는 뜻이고, "그거는 안 된다." 카는 놈은 마, 그런 놈은 정치인도 아입니더."라고 나왔다. 작중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태종 무열왕과의 약속대로 당나라신라에게 대동강 이남을 신라 영토로 인정해 주겠다고 한 당고종의 발언에 대해서 김유신문무왕에게 이렇게 조언한 것. 실제로도 그렇게 흘러갔다.[11] 게다가 성직자 출신이어서(푸셰는 수도자 출신) 나폴레옹이 로마 교황과 정교 협약을 맺고 실로 오랜만에 성당에 나와 미사를 드릴 때, 나폴레옹의 부하들 중 미사를 올릴 줄 알았던 사람은 푸셰와 탈레랑뿐이였다. (프랑스 혁명정부 시절 가톨릭과 성직자들은 탄압을 받았고, 나폴레옹과 그의 부하 장군들도 종교를 깊이 믿는 사람이 적었다.)[12] 블뤼허가 사단장 달고 처음 출진한 전투였는데, 나폴레옹에게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리고 본인도 포로가 되었다.[13] 당시 미국은 땅도 크고 영국 외 이민자들도 있었지만 아직 현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후 미국 요리는 영토를 넓히고 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이며 다채로워진다. 물론 현재 미국에서도 프랑스 요리를 고급으로 치지만.[14] 그리고 그 조카는 탈레랑의 상속자였다.[15] 불륜상대가 황후 조세핀 드 보아르네를 통해 로비를 했다고 한다.[16] 알퐁스 도데의 후원자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