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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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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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개국공신 동구양무왕(東甌襄武王) 탕화 湯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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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26년(태정 3) |
호주(濠州) 종리현(鍾離縣) (現 안후이성 추저우시 펑양현) | |
사망 | 1395년 8월 30일[1] 율리우스력 8월 22일. (음력 홍무 28년 8월 7일) |
작위 | 신국공(信國公) 추봉 동구왕(東甌王) |
시호 | 양무(襄武) |
성씨 | 탕(湯) |
이름 | 화(和) |
자 | 정신(鼎臣) |
1. 개요[편집]
탕화(湯和)는 명나라의 군인, 장군으로 명나라의 개국공신이다.
2. 생애[편집]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이모네 집에서 자랐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주덕흥, 서달과 함께 지주의 소를 치는 목동 노릇을 하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을 비롯한 농민 반란이 들끓자 1352년(지정 12) 곽자흥 휘하 홍건적에 들어갔다. 이때 탁발로 전전하던 주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홍건적 가담을 권유했다고 한다.
1353년(지정 13)부터 주원장 밑에서 장군이 되어 만호(萬戶), 관군총관(管軍總管) 등을 지내다, 1356년(지정 16) 진강을 점령하고 서달과 함께 회흥익원수부(淮興翼元帥府)의 통군원수(統軍元帥)가 되었다. 서달과 함께 상주를 점령하고 1357년(지정 17) 추밀원 동첨(同僉)이 되어 상주에 주둔한 뒤 서달, 상우춘 등이 서쪽의 진우량 전선에서 활약하는 동안 동쪽의 장사성 전선을 지켰다. 1363년(지정 23) 중서좌승(中書左丞)으로 승진하고, 석산(錫山)[2]
오늘날 장쑤성 우시 시.
1368년(홍무 1) 명나라가 세워진 이후 오늘날 푸젠성 일대의 원나라 세력을 마저 정리한 뒤, 도독 풍승(馮勝)의 군대에서 오늘날 산시성(산서성) 일대를 정벌했다. 1370년(홍무 3) 영하를 함락했다. 같은 해 있었던 개국공신 논공행상에서 중산후(中山侯)로 봉해졌다. 1371년(홍무 4) 오늘날 쓰촨성 일대에 있었던 명하를 정벌하여 명승을 항복시켰다.
이후 북벌에 마저 종군하다 1378년(홍무 11) 정1품 대도독부 좌도독(左都督)으로 오랜만에 승진하고 신국공(信國公)으로 봉해졌다. 이후로는 주로 군사 행정 업무에 종사하며 북, 서, 남쪽을 두루 다니다, 1388년(홍무 21) 옛 고향의 바뀐 이름인 봉양(鳳陽)에 지어진 새 저택으로 은퇴했다. 1395년(홍무 28) 죽고 동구왕(東甌王)이 추봉되었다. 시호는 양무(襄武)다.
3. 여담[편집]
탕화는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서달, 상우춘 등에 비해 지나치게 박하게 대우받은 측면이 있다. 이는 탕화가 상주에 주둔하며 장사성을 방어할 때, 술에 취해 자기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지 떠들다가 들뜬 나머지 경솔하게도 장사성에게 붙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탕화는 개국공신 논공행상에서 공작이 되지 못 하고 후작 가운데 첫 번째가 되는데 그쳤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복이 되었다. 탕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근신했고, 결과적으로 홍무 연간에 있었던 숙청을 모두 피해 부귀영화를 누리며 죽을 수 있었다.
주원장이 탕화가 낙향한 후 뭘 하고 있는지 보려고 금의위를 파견했는데, 평범한 어부의 차림으로 사람들과 낚시를 다닌다는 보고를 받고 안심했다는 일화가 있다.[3]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침을 질질 흘리거나 흙을 먹었다는 설도 있다.
여러모로 주더와 비슷한데, 주군보다 몇살 더 많은 군부의 큰형님 격이었던 것과 처세를 잘해서 와석종신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 있다.
묘는 고향 근처의 벙부시 시내 근교에 있다.
4. 대중매체[편집]
2006년작 드라마《주원장》에 등장했다. 배우의 이름은 양홍우(양홍무: 楊洪武)인데 공교롭게도 주군인 홍무제의 그 홍무와 한자까지 같다.(...)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2019년 12월 5일에 심장질환으로 고인이 되었다고 한다.
2022년 중국 드라마《산하월명》에 등장한다. 홍무 말기에 시골 농사꾼의 행색으로 황궁에 방문해 홍무제에게 고향 근황을 전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 홍무제는 탕화를 형제로 불렀고 "태자에게 인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태자는 탕화 같은 검소한 신하가 조정에 있었다면 나라가 더 잘됐을 거라고 평가했다. 홍무제는 경성 내에서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오직 탕화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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