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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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작위적인 운명론과 미신적인 요소
3. 역사학적 자질 문제
3.1. 창작 여부에 대한 표기
4. 문법 및 시대에 맞지 않는 대사
5. 상투적인 대사
6. 화수를 늘리기 위한 무리한 전개
7. 지나치게 평면적인 주인공
9. 과도한 삼국지연의 오마주
11. 제국 표현에 대해
12. 중복 출연자
13. 후백제 관련 논란
14. 기타


1. 개요[편집]


태조 왕건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였고 종영 이후에도 많이 회자되고 있으나, 한편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주로 작위적인 전개, 화수 때우기용 에피소드, 지나치게 단순한 캐릭터 등이 주로 지적받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환경 특유의 극 구성 구도가 난잡하게 서로 충돌을 하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작품이 시작이다. 태조 왕건을 시작으로 해서 이환경이 집필하는 극 구성 구도의 단점이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게 폭발한 게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을 말아먹고 몇 년 동안 절치부심하다가 내놓은 무신에서는 문제점이 조금 수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주인공은 무조건 선이라는 이환경 특유의 기본 대명제는 변하지 않았고 다른 부분에서 문제를 나타내며 폭망. 2012년 MBC 드라마 무신을 끝으로 이환경은 드라마 각본가에서 은퇴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2. 작위적인 운명론과 미신적인 요소[편집]


태조 왕건 드라마내에 운명론, 도술같은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많으며, 이런 요소가 드라마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맡기까지 했다. 도선대사의 중요 예언이나 경문왕의 초상화가 피를 흘리고 왕건이 궁예가 꽃은 칼을 빼고 궁예가 독화살을 맞고 박유가 데려온 금강산 도인의 도 치료로 살아나는 것이 그 예인데, 이런 류의 예언은 사전에 미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련 인물들이 모의하고 일이 이루어지면 그제서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경우가 잦았다. 게다가 그 시대에는 미신적 요소를 관장하는 유명인이 많았고 난세에 한다 하는 세력가들은 그런 인물 하나쯤은 초빙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게다가 그 유명인이 유명세를 이용하여 적대 세력에게 어그로를 끄는 것도 흔했다. 그리하여 특정 유명인이 추종하는 세력이 대업을 이루면 그 인물은 예언가로 칭송받기 마련이었으며, 실패했을 경우는 잘 해야 잊히는 정도이고 심한 경우에 적대 세력에 의해 격하당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선후관계가 바뀐 것으로, 정통성이 있어 대업을 이룬 게 아니라 대업을 이루어 정통성을 세운 격이다.

물론, 다른 사극들에서도 초자연현상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용의 눈물에서 도선대사가 무학대사에게 한양 궁궐터를 알려주는 장면이나 무인시대의 두두을이 도술을 부리면서 가끔 떠보는 내용, 드라마 정도전에서 공민왕이 시해당하기 직전에 환청을 듣는 장면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용의 눈물의 경우 그 장면을 넘긴다 해도 '드디어 한양 궁궐 터를 찾았구나?' 이해하면 그만이며, 두두을의 경우 정말로 도술을 부리는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심리전이었는지 모호하게 묘사되었다. 정도전의 환청은 애초에 초자연현상이라 하기 애매할 뿐더러[1], 극 초반에 잠깐 나왔을 뿐 우왕 즉위 이후로는 전혀 묘사가 없었다.

하지만 태조 왕건은 판타지 사극도 아닌 정통 사극임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사건 전개의 복선을 깔아두는 정도가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 장면들[2]이 여럿 등장한다.

3. 역사학적 자질 문제[편집]


나레이션을 통해, 학계 일부의 견해를 '학계에서는 ~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라며 정설 내지 중론인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진태봉이라는 국호에 대한 문제인데, 극중에서는 '대동방국을 뜻한다' 라고 못박았으나 이것은 일부의 견해일 뿐이다. 이 밖에 궁예가 순행 중에 경문왕의 화상을 검으로 친 것이나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와 잠자리를 했다는 대목에서도 이와 비슷한 나레이션이 나온다.

비단 본작 뿐만 아니라 무풍지대, 야인시대, 연개소문 등에서도 이러는 것을 보면 작가의 고질적인 문제점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


3.1. 창작 여부에 대한 표기[편집]


그나마 이 드라마가 작가의 다른 작품 및 이후 사극 보다 나은 점을 뽑자면, 내레이션을 통해 어떤 점이 창작인지 언급을 해준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 이후의 사극들은 갈수록 기록의 사실과는 다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에 사실이면 사실, 픽션이면 픽션이라고 적절하게 설명을 해줘야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런 설명도 없이 전개가 흘러가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그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고 볼 수 있다.[3] <태조 왕건>은 기록이 불분명하거나 석연치 않은 부분에는 픽션이 가미되었는데, 이에 대해 나레이션으로 그러한 픽션을 가미한 이유를 적절히 설명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역사적 기록에 대한 지식과 드라마로서의 재미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궁예의 최후인 죽음 장면이다. 기록엔 궁예가 왕건의 반란에서 도망친 후 보리이삭을 주워먹다가 지나가던 백성들에게 발견되어 맞아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한 나라를 마치 사이비 종교 주무르듯 하던 엄연한 지도자가 그와 같이 허무한 이유로 죽었다는 건 석연찮은 점이 맞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그같은 픽션을 더한 뒤, 나레이션으로 실제 기록과의 차이점이 있다는 걸 분명하게 밝혔다.


4. 문법 및 시대에 맞지 않는 대사[편집]


대본에 비문이 상당히 많이 쓰였다. '~라 보여지옵니다'와 같인 이중 피동은 물론이요, '도선 대사께서 쓴 책이시옵니다' 와 같은 사물존칭에 '신이 듣건대 ~라 들었사옵니다' 처럼 같은 말을 불필요하게 되풀이하는 경우도 많이 보인다. 대사의 한 문장이 길어지다 보면 주술 구조가 맞지 않는 경우도 아주 많고, 뜻을 중복해서 쓰는 경우도 정말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속히 서둘러라'나 '엄히 엄벌을 내릴 것이다', '전장터'[4] 등. 'XX말이다. XX말이야.'처럼 했던 말을 또 하는 구조의 대사도 엄청나게 많다. '기다려 보십시다'와 더불어 이환경 작가의 입버릇 같은 표현으로 야인시대등 다른 작품의 각본에서도 아주 자주 등장한다. 또한, '아니 그런가, ○○○?'도 수없이 쓰였다.

높임법도 엉망이다. 예를 들어 극 후반에 박영규의 아내인 국대부인이 신검의 쿠데타를 비판하는 대목에서 신검 등이 견훤을 '가두시고' 금강을 '죽이셨다'라 했는데, 견훤을 언급하다 보니 높임말을 쓴 모양이지만 그녀는 신검 등을 '아우들'이라 부르는 등 전혀 높이지 않았다. 즉 견훤에게는 존대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신검은 국대부인 기준으로는 분명 아랫사람이기 때문에, '가두고', '죽였다'라고 해야 한다.

'형님 폐하'라는 정체불명 호칭도 자주 등장한다. '형님'은 사적인 존칭이고, '폐하'는 공적인 호칭인 만큼 둘 중 하나만 써야겠으나, 드라마 상에선 이 둘을 붙여쓴다. 차라리 사석에서는 형님이라 부르고, 공식 석상에서는 폐하라 부르기라도 했다면 드라마 상의 허용으로 봐줬을 부분이다. 임금과 자식, 또는 임금과 장인, 임금과 사위 관계에서는 그냥 폐하라고 부르거나 아바마마 등의 표현을 쓰는 등, '형님 폐하'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데, 특이하게도 형제/의형제 관계에서만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이환경 작가는 태조 왕건 이전에 각본을 담당했던 용의 눈물에서도 "형님 전하" 또는 "형님 저하" 라는 괴상망칙한 호칭을 극중 중요한 장면에서 잊을만 하면 남발해서 작품의 분위기를 깨는데 일조했는데, 태조 왕건에서도 이런 정체불명의 표현을 여전히 남발하는 바람에 몰입감을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래서 유튜브 스트리밍에선 해당 표현이 등장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또님폐하'라면서 비꼬는 경우가 불문율일 정도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원 간섭기 이후 몽골어에서 들어온 수라간(水剌間)이라는 말도 간혹 나오며, 궁예가 마시는 독한 술을 가리켜 '소주'라고 하는데, 소주 역시 원 간섭기에 들어온 술이다.

진성여왕을 가리켜 '여왕 폐하'라고 하고 진성여왕 스스로도 자신을 가리켜 여왕이라 하는데, 이런 표현은 삼국사기는 물론 고려사에도 나오지 않으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에 한 번 나올 뿐이다. 또 삼국사기를 찾아보면 '선덕여왕'이 아니라 '선덕왕'이라 되어 있다[5]. 다만 "여주(女主)" 라는 표현은 고려사와 삼국사기에 한 번 씩 나오긴 한다.

극중에서 '황후마마'라는 등 '마마'라는 용어가 계속 쓰이는데, 이는 조선 중기 들어온 중국어 '媽媽('엄마'라는 뜻)'의 영향을 받아서 생긴 말이다. 마마 대신 폐하라 하는 것이 옳은데, 동일 작가의 후속작 제국의 아침에서도 시정되지 않았다.

또한 2차 조물성 전투에서 의원이 돌림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군사 태평을 보며 고려 왕과 장수들에게 병균이 옮을 수 있다는 말을 했는데, 병균이라는 것은 이 의원이 근현대에서 타임슬립과 전생을 한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로 알 수 없는 개념이다. 세균과 같은 미생물의 존재가 증명된 것은 현미경이 발명된 17세기 후반이며, 이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이미 기원전부터 미생물의 존재에 대한 가설은 있었지만 증명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며, 그마저도 서양 측의 가설이었지, 이 극의 배경이 되는 10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가설은 커녕 미생물의 개념조차 없었다. 심지어 세균, 병균 할 때의 이라는 한자는 조선시대까지도 버섯을 뜻하는 한자였다.[6]

그리고, 고려군이 공산을 향해 전진하는 장면에서 "신라의 황도를 점령한 점령군이 쉽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흥청망청 하고 있겠지요" 라는 김언의 대사가 나오는데, 흥청망청은 연산군 시절에 나온 용어이다.

183화에서 운주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왕건이 이치의 공을 평하며 공신으로 책봉하고 이름을 이도(李棹)로 바꾸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레이션이 아니라 왕건의 대사로 나오는데, 여기에 '시호를 성절이라 할 것이며' 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당장 링크를 타고 들어가도 나오지만 시호는 이미 죽은 사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붙이는 것으로, 시호를 운운한다는 건 멀쩡히 앉아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라는 대사까지 친 이도를 죽은 사람 취급한다는 소리다.

또한, '호족'도 문제. 이는 오늘날에나 쓰는 용어로, 당시 사료에는 '장군', '성주'로 되어있지 아무리 찾아봐도 '호족'이라 부른 사례는 없다.

후백제의 신검이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 견훤과 마지막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나 이미 역성혁명의 불길이 올랐으니 죽을 수도 없게 됐다'라 한탄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신검의 반란은 왕조의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일 뿐이지, 왕조 자체를 새로 새우는 것이 아니었다. 역성이란 말 자체가 성이 바뀐단 뜻인데, 신검은 견훤의 친아들이다. 차라리 신덕, 능환 등이 말하는 대로 '혁명'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5. 상투적인 대사[편집]


높으신 분들이 휘하 병졸들이나 부하, 또는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에는 항상 "○○들은 뭘 하는가!"라고 외친다. 처음 지시를 듣지 않았을 때 반복해서 지시하는 상황이거나, 높으신 분이 몸소 나서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정작 부하들은 가만히 쳐다 보고만 있거나, 누군가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도 부하들이 이를 제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이런 발언이 자연스럽지만, 맨 처음 지시를 내릴 때조차 이렇게 말하니 태조 왕건 세계관의 아랫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뭔가 알아서 실행해야 하는 억울한 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국문장에서 죄인에게 형을 집행하거나 연회에서 악공들이 음악 연주를 하기 전 등, 반드시 윗 사람이 명령을 내려야만 아랫 사람들이 그 다음 행동을 할 수 있는 경우에도 저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들은 뭘 하는가!"무인시대 같은 다른 사극에서도 등장하는 발언인데, 태조 왕건에서는 지나치게 남발이 되었기에 문제가 된 것이다. 같은 작가가 비슷한 시기에 맡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들은 뭘 하는가!"를 남발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게 말이옵니다.'나 "그러게나 말이오."라는 대사를 남발하는데, 작가의 말버릇인 듯하다. 이 밖에 입버릇처럼 나오는 대사로는 '신을 보내 주시오소서[7]!' 나 '지금쯤 ○○○[예]' 등이 있다. 게다가 고전소설도 아니고, 드라마에서 다음 번 대사나 패턴을 뻔히 예측할 수 있는 전개가 지속된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또 그밖에도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우리가 우려하던 일들이 현실로 들어나고 있사옵니다~'도 많이 쓰이고,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도 심심찮게 나온다.


6. 화수를 늘리기 위한 무리한 전개[편집]


중반부 넣을 내용이 없다 싶으면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시트콤식 개그장면이나 왕건의 친족, 부인들이나 견훤의 부인인 박씨 부인이 정세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시간을 때웠다. 하도 시간 때우는 패턴이 뻔하다보니 이런 분석까지 나올 지경.

그래도 몇몇 부분은 변호를 해줄 만한 부분이 있는데, 일단 아자개의 경우, 극 중반부까지만 등장[8]하는데다가 정통 사극인 관계로 시종일관 진지하고 경직되어있는 분위기를 완화하는 데 적지 않게 활약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다. 실제로 아자개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현재 상주 지역의 영농조합법인의 이름은 아자개의 이름을 따지어졌다.

왕건의 부인들이 걱정하는 장면은 물론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기는 하지만, 드라마의 큰 틀에서 해설과 화제전환용 나레이션을 맡으며 극의 흐름을 부드럽게 하는 장치 역할을 하였다. 전장에 나가 있는 왕건의 상황을 황궁에서 볼 때의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요약 겸 해설해 주며 빠진 부분이나 앞선 화면들에서 전달이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해준다. 그러나 강의나 학습만화도 아니고, 드라마에서 이런 식의 부자연스러운 요약을 남발한다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구성이다. 또한, 갑작스럽게 공간적 배경이 전환될 경우에도 쓰인 장면이 많은데, 예를 들어 신라의 조정이 등장해야 할 경우 곧바로 신라로 넘어가기보다 왕건의 부인들이 신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넣고, 그 다음에 서라벌 왕궁을 비추는 식으로 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궁중 내부의 암투나 권력 다툼이 아니라 후삼국 간의 전쟁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본 작품에서, 이런 장면을 넣지 않는다면 왕건의 부인들이 등장할 기회가 없다는 변호도 있긴 하다. 즉, 드라마의 성격상 왕비들을 모조리 극에서 중도하차시키거나 이런 장면들을 넣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존재감을 어필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작가는 후자를 택한 것.

하지만 주요 사건의 개연성을 보강해주는 장면이나 주요 캐릭터들의 특색을 부각 시키는 장면 대신, 중요하지도 않고 지루하기만 한 대화씬으로 분량만 때운 부분이 많았다는 점은 비판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유튜브 스트리밍에서 왕실 친족, 부인들이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담배타임", "한 대 피우고 와라", "화장실 다녀와라" 같은 비난 섞인 드립이 매번 올라온다.

7. 지나치게 평면적인 주인공[편집]


일단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왕건을 담당한 최수종의 연기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는 여러가지 사극이나 드라마 등에 꾸준히 출연하여 연기력을 이미 입증한 배우이다. 어쨌든 이 작품 이후로 한국 정통 사극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완전 무결점의 주인공 캐릭터가 등장했다. 물론, 사서에서도 왕건 찬양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방식이기는 했으나,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이나 욕망에 휘둘리고 번뇌하며 나쁜 면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용의 눈물[9][10]과는 달리, 태조 왕건은 자신과 동료는 진지한 능력자, 주변인들은 개그 캐릭터 같은 패턴만 남았다. 최수종의 연기 자체는 호연이었지만 왕건이라는 캐릭터 자체는 성인군자로 고정되어 실제 행적과는 상관없이 욕망에 초탈한 선인이 되고 악행은 본인이 꺼리는데 주변 사람들이 밀어붙인 걸로 처리되거나 아예 생략해버리는 전개가 많아졌다.

예를 들면 환선길의 반란만 해도 그렇다.환선길이 궁예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복지겸은 "환선길을 변방에 유배를 보내자"고 했고 유금필은 "아무 공은 없는데 숟가락만 얹은 궁예파"라고 복지겸의 의견에 동조한다. 특히 선심써주는 척하면서 환향식을 내군에 들이기는 했으나 실상은 환선길을 감시하고자 한 계략이었으며 내군은 복지겸을 중심으로 장일, 장수장, 신방 같은 전부터 왕건의 거사에 적극 지지했거나 왕건에게 우호적인 장수들이 주축이 되고 환향식에게는 늙고 병든 군사 약간만 주어졌을 뿐이었다. 이는 사실상 반란을 대놓고 유도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이 때문에 참다못한 환선길은 부인의 뜻을 받아들여 백제의 사신이 올 때 결국 반란을 일으켰는데 일이 이지경까지 흘러가는데도 왕건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면 그건 무능 그 자체이며 장수장 덕에 위기를 모면한 후 일이 이렇게 됐음에도 처벌받는 신하는 한 명도 없다.

그나마 왕위에 오른 태조의 왕건은 '후사를 정하는 문제', '유금필과 다른 장수들간의 갈등' 같은 이런 저런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임금으로서 자질을 보여주었으나, 그 이전 드라마 전반기 궁예 수하때의 왕건은 유능한 장수로서의 모습만 보여줬을 뿐이었다. 도선,석총,형미는 왕건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자질 또는 미륵이라 드높이지만, 정작 왕건은 그때까지 야망은 커녕 하다못해 궁예를 도와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태조 왕건에서 왕건 및 고려측 인물들이 대체적으로 삼한통일을 위해 일치 단결된 식으로 좋게 묘사[11]하다 보니 바로 다음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 장성한 고려의 왕자들과 호족들,왕식렴 등이 피튀기는 권력투쟁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라이벌인 궁예견훤이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묘사된지라 이들이 작품 내 부족한 캐릭터성을 보완할 수 있었다. 궁예는 얼마 안 되는 기록 속의 복잡한 면모가 배우의 호연과 합쳐져 제법 잘 드러났고, 견훤도 저돌적이고 대가 센 모습이 대부분이었지만 용맹하고 호탕한 무장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왕건의 경우, 태조 왕건의 세 주인공중 가작 매력이 없어보이는 캐릭터로 정착되어 페이크 주인공 취급으로 내몰리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12]

주인공을 고결한 먼치킨으로 묘사하는 경향은 이후로 많은 사극들에 충실하게 계승되어,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되었다.그나마 태조 왕건처럼 매력적인 라이벌을 내세움으로서 평면적인 주인공을 보완하는 사극들도 있었으나, 천추태후, 광개토태왕, 기황후와 같이 주인공을 무리하게 미화하거나 반대로 라이벌을 멍청이 악당으로 묘사한 끝에 실패한 사극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8. 캐릭터 붕괴[편집]


태조 왕건 등장인물들 캐릭터 진행 설정에 일관성이 없이 특정 면모가 갑자기 튀어나와 강조되거나 극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전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 보면…

  • 김총: 극 초반부에 견훤이 수달을 의형제로 받아들이는 장면에서 의형제들을 주욱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김총은 의형제들 중 막내로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면 이후 견훤이 김총을 의형제로 대하거나 김총 스스로 수달이나 추허조 등이 차례로 죽어나갔을 때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한다거나 하는 장면이 일절 안 나온 것.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취급이 딱 '꾸준히 보이기는 하는데 특별한 점은 없는 후백제 장수 1'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습은 2차 조물성 전투가 다루어진 147회에서 정점을 찍는데 여기선 김총이 신덕의 '부장'으로 나온다.[13] 그런데 김총은 극 초반부부터 나오는 후백제 개국공신인 반면 신덕은 한참 뒤에야 등장하므로, 신덕이 고속 승진이라도 한 것이 아닌 이상 오히려 신덕이 김총의 부장이여야 한다.

  • 박술희: 극 초반에 왕건과 처음 만났을 때 '소인은 무쇠 철퇴를 애용합지요!' 라고 소개했는데 문제는 이후 철퇴를 쓰는 장면이 거의 없다.[14] 물론 배우들이 부상 당할 것을 염려할 수 있겠지만, 저 대사 자체를 넣지 않거나 쇠사슬 끝에 철뭉치가 달린 형태가 아니라 곤봉을 들려줬으면 문제가 없었을 부분이었다. 또한 머루주와 관련해서도 오류가 있는데, 이 술은 원래 박술희가 아자개의 생일에 축하 사절로 방문했을 때 아자개가 답례로 준 것이었다. 또한 박술희는 마침 순행 중에 상주 전선을 방문한 궁예에게 머루주를 바치면서, 상주는 머루가 아주 많은 고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이후로는 아자개가 박술희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박술희가 아자개에게 주는 선물로 바뀌었다.

  • 신숭겸: 평산에서 기러기를 쏘아 떨어뜨리는 일화가 나오는 대목에서 왕건이 '아우가 신궁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을 줄은 미처 몰랐다' 라며 감탄하고 신하들도 '능산 장군의 활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사옵니다' 라며 동의한다. 그러나 신숭겸이 활을 쏘는 장면은 이 장면이 유일하다. 대본 작가가 다르긴 하지만 약 2년뒤에 방영된 같은 KBS 드라마에서 활을 주로 쓰는 캐릭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조연으로서 등장한 바 있고, 활 쏘는 장면을 간간이 넣어 명궁임을 충분히 어필한 사례가 있었다.[15] 즉, KBS 사극의 연출로 명궁 컨셉은 불가능한 묘사가 아님에도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특징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은 것.

  • 양길: 작중 은부의 언급에 의하면 중증의 의심병 환자로 그 의심 때문에 수 많은 일을 그르쳤다고 한다. 양길 스스로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난세를 살아가는 길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정작 극중 모습은 명주를 손아귀에 넣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궁예와 은부를 지나치게 믿는다. 심지어 복지겸이나 명길 같은 주변 인물들이 궁예를 의심하고 양길을 만류하더라도 양길은 그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궁예를 믿었고 결국 궁예와 은부에게 통수를 맞고 말았다. 또한 이렇듯 어리석고 소견이 좁은 모습으로 한참 묘사되다가 정작 궁예와 무력 충돌을 일으킬 때에는 분위기가 급반전하여 사위와 장인 간에 전투를 벌인다는 상황을 한탄하거나 여생을 편히 보내라는 궁예의 말에도 스스로 죽음을 청하는 등 군웅다운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극과 극의 캐릭터' 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양길 역시 궁예를 1년동안 지켜본다거나 궁예에게 갑자기 회군을 명령하거나 복지겸을 딸려 보내는등 나름대로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은부를 믿은건 한참 전부터 자신의 부하였으니 신뢰해서 그런다고 변명 할수도 있겠으나 한참 특정한 면모를 보여 놓고 서는 별로 설득력 있는 전개 없이 그와 전혀 다른 이미지가 나온다는 것은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 용검: 중반 이후에 들어서야 '지금까지는 소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라는 나레이션과 함께 갑툭튀했는데, 갑툭튀한 이후 비중이 컸느냐고 하면 그것도 애매하고 정말로 소개할 기회가 별로 없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 초반부에는 양검은 물론이고 신검의 비중도 그리 크지는 않았으므로 딱히 대사를 줄 것 없이 배경에 세워 놓기만 해도 충분했으며, 이때는 아역이 대신 나왔기 때문에 출연료 걱정도 크다고 하기 어려웠다.

  • 은부: 극 초반에는 복지겸과 절친한 사이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궁예가 양길에게서 최종적으로 독립해나왔을 때[16] 궁예의 독립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등은 물론, 궁예가 복지겸을 얻을 때에는 '친구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 운운하며 설득했을 정도.그러나 두 인물의 친분이 여기까지라는 설정이라도 있는지 궁예가 철원성을 함락하고 나라를 선포한 이후 은부와 복지겸이 엮이는 부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뒤로 두 사람을 엮을 만한 장면이 전혀 없었다면 그나마 납득이 되지만 그것도 아니다. 복지겸은 오랫동안 병부령으로서 중앙에 머무는 것으로 묘사되며 은부도 내군 장군으로서 궁예의 곁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으므로 충분히 여러 번 마주칠 수 있었다. 궁예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가 종간이 고경참문을 위조하는 사건을 일으킬 무렵에 종간과 최응이 이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있는데 복지겸과 은부가 이런 식으로 활용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

  • 장화왕후 오씨: 극 초반 나주 공략전에서는 단신으로 마진으로 향해 왕건을 만나러 가는가 하면 전투에도 직접 나서는 것으로 그려지고 태평이 남동풍을 불러와 수달이 생포되는 부분에서도 자청하여 왕건과 떨어져 나주에 남아 나주의 태수인 아버지 오다련을 여러모로 돕는 것으로 나온다. 이에 오다련이 '내 딸이지만 장수들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맡아 하고 있다' 라고 불평을 섞어 평할 정도였으며, 나레이션으로도 '당찬 성격이었던 것 같다' 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왕건이 즉위한 이후 후반부 황후로 책봉되고 왕궁에 들어앉은 뒤로는 신명순성왕후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날때마다 남편과 태자인 아들을 걱정하는 유약한 모습만 보인다.

  • 최응: 극 중반부부터 후반부까지 왕건의 책사로 등장하지만 궁예 시절과 왕건 즉위 당시에는 정치적인 판세를 보는 식견이 뛰어나고 각종 경전에 해박한 모습으로 등장했을 뿐, 전략과 전술에 능하다는 근거는 전혀 없었고 이에 대한 사전 언급도 없었다. 그런데 태평이 조물성 전투에서 병사할 무렵부터 작전 참모로서의 면모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비슷한 정치가, 책략가 캐릭터인 종간과는 좋은 대비를 이루는데, 그에게는 병법을 공부한 적이 있다는 설정[17]을 깔아 놓고 전략가의 면모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즉, 거창하게 묘사할 필요 없이 그저 간단한 장면이나 사전 언급 등으로 설정을 깔아놓을 수 있음에도 드라마는 이를 무시한 것이었다. 또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고 정윤 문제가 잠시 나온 이후나 태평이 병사하고 최응이 고려의 유일한 책사로서 부각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종간마냥 관복을 입지 않고 평복 차림으로 왕건 앞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종간은 적어도 극중의 묘사로는 궁예에게 관직을 받지 않았으니 그나마 변호할 여지가 있으나[18] 최응은 내봉성령과 병부령이라는 관직을 멀쩡히 제수받고 조정에 있던 상태였으므로 작중내 관복을 입지 않는 것은 처벌받기에 충분한 사유가 되는 일이다.

  • 허월: 궁예가 무리하게 철원 천도를 추진할 때 석총은 허월에게 명주성을 궁예에게 주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을 했는데 문제는 그에 대한 답이라는 것이 궁예가 진짜 미륵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저 진짜 미륵이 오기 전에 세상을 잠시 맡겼을 뿐이라는 것. 그런데 이건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드라마 초반부에 보여준 행동과도 맞지 않는다. 드라마 상의 허월은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과 사람의 진면목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도선대사처럼 사람의 미래를 보고 진정한 패자를 대비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명주성을 주기 전에 허월이 궁예의 욕망을 언급한 부분도 어디까지나 궁예의 숨겨진 결점을 언급하고 스토리상으로 훗날의 전개를 암시하는 것일 뿐이다. 그 시점에서 허월이 궁예는 그저 다음 세상을 예비하는 자일 뿐, 참미륵은 따로 있다고 여기는 장면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석총에게 한 변명이 그나마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 전에 도선 같은 이로부터 계시를 받는 장면이 있거나 '설마 궁예가 이렇게 타락할 줄은 예상 못했다'[19] 식이어야 했다.

  • 형미: 강비와 왕자들이 궁예의 명으로 처형되자 그들의 상여를 만들어 행렬을 하는 등 짧지만 비중있게 등장한 인물인데, 문제는 첫 등장이 갑툭튀라는 것. 물론 나레이션으로 고승이라고 나오고 왕건도 '참으로 몰라뵈었사옵니다…' 하는 식으로 인정해주는 장면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래봐야 갑자기 튀어나온 캐릭터라는 느낌을 지우지는 못했다.석총이나 허월도 마찬가지 아니었느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데 등장부터 비범하게 묘사된 허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석총도 궁예가 미륵인지 아닌지 의심했다가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을 굳히는 등, 궁예에게 반감을 갖는 과정이 충분히 묘사되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왕건의 군대에서 군법사를 맡았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으니 실제 역사와 극의 흐름 모두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裔라는 이름 때문인지 극 초반부에 활을 잘 쏜다는 뜻으로 소개되었던 궁예가 정작 활을 쏘는 모습은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았거나 궁예가 기초적인 의학 지식은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음에도 정작 자신이 병에 걸리자 병을 고치려 노력하기는 커녕 미륵이라며 독주로 병을 억누르는 짓거리를 한다든가,[20] 궁예의 관심법을 두려워하여 아지태의 역모를 고발했던 신방이 공산 전투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다거나 초반부에 양길과의 전투에서는 상당한 지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던 왕건이 황제가 된 이후 견훤과 본격적으로 대결할 때에는 그러한 면모가 증발하는 등[21] 세세한 것까지 꼽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9. 과도한 삼국지연의 오마주[편집]


작중 소설 삼국지연의와 비슷한 부분이 여럿 있으며, 모티브를 따온 수준을 넘어서 아예 대놓고 베낀 듯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정사 삼국지에도 나오는 내용이라면 후삼국시대 수백 년 전의 일이고 한반도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 인물들이 따라했다는 설정으로 퉁칠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정사가 아닌 삼국지연의에나 나오는 내용들을 따라하거나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삼국지연의는 작중 시점에서 약 400년 이후에나 나오는 소설이기 때문에 이는 오류이다.

  • 문신이 참모가 되어 전쟁상황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계략을 짜는 것도 삼국지연의의 군사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승우나 태평, 최응 같은 문신들이 제갈량, 곽가[22]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극중 최승우는 학우선 비슷한 부채까지 들고 코스프레를 했으며, 와룡처럼 은거하고 있는 최승우를 견훤이 나서서 영입하는 과정은 삼고초려 그 자체. 심지어 극중에 견훤에 의해 이 말이 언급되기까지 한다.

  • 양길궁예의 관계를 마치 원술손책의 관계로 비유했다. 궁예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양길로부터 독립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 그렇다 쳐도, 양길이 황제의 관을 쓰고 그대로 황제를 칭하는 장면은 누가 봐도 원술을 연상시키게 한다.[23]

  • 왕건과 신숭겸, 박술희가 맺은 의형제도원결의와 너무 흡사하며 심지어 이미지도 비슷하다. 포지션은 왕건=유비, 신숭겸=관우[24][25], 박술희=장비가 된다… 이 경우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에서는 의형제가 너무 많이 나온다. 왕건은 신숭겸, 박술희와 별개로 궁예와도 의형제를 맺어서 궁예가 왕건을 왕건 아우, 왕건이 궁예를 형님 폐하라고 부르는 장면들도 여럿 나왔다. 견훤도 능환, 추허조, 능창, 김총[26]과 따로따로 의형제를 맺었다.

  • 왕건군이 나주 공략 시, 화공(火攻)을 성공시키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남동풍을 끌어왔는데 자연히 왕건의 책사 태평은 제갈량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시청자들의 비판이 있자, KBS는 기상청까지 동원해서 나주에는 동남풍도 불기 때문에 표절은 아니다라고 했다. KBS의 해명은 의도적인 논점 이탈인데, 초점은 동남풍이 불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동남풍을 빌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삼국지연의와 똑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중에서는 당시 시기적으로 삼국지연의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태평이 남동풍 건을 두고 왕건이 묻자, 태평의 대답도 "삼국지를 보면 제갈공명이…"라는 식으로 대놓고 삼국지연의 패러디임을 말하고 있었다.[27] 다만 화공 파트가 전부 표절이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내레이션으로도 소개되듯이 덕진포 전투에서 왕건이 화공을 써서 견훤군을 격파했고 견훤이 작은 배를 타고 겨우 도망쳤다는 기록 자체는 고려사에 있다. 제사를 지내서 바람을 끌어오는 부분이 표절인 것.

  • 나주 전투 이후, 갈대밭에서 견훤이 고려군의 매복을 만나 고생하는 장면은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에 화용도에서 겪은 그 고생과 판박이인데, 견훤이 퇴각하면서 자기라면 그 갈대밭 즈음에 매복군을 두겠다고 하며, 거기까지는 왕건이 생각하지 못했는가라고 말하고 나서 곧이어 신숭겸이 이끄는 매복군을 만난 것은 완전히 적벽대전에서 퇴각하는 조조의 행동과 판박이 수준이다. 차이점이라면 연의의 조조는 함정에 완전히 걸려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구걸해서 겨우 벗어났지만 견훤은 통나무 들고 무쌍을 찍으며 자력으로 탈출했다는 것 정도.

  • 144화에서 견훤의 아들 금강은 공성전 도중에 화살에 눈을 맞자, 화살을 빼 촉에 박힌 눈알을 먹었다.[28] 심지어 부모에게 받은 것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소리까지 한다. 이쪽은 아예 '하후돈이 그랬다는데 맞는 말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정작 하후돈이 그 말을 한 것은 연의 한정이고 드라마의 배경인 후삼국시대에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은 있지도 않았다.[29]

  • 161화에서 팔공산 전투 도중에 전사한 신숭겸의 수급을 견훤이 보는데 수급이 담긴 상자의 뚜껑을 열자, 눈을 부릅뜨고 견훤을 노려다보는 신숭겸의 수급도 삼국지에서 조조가 관우의 수급을 보고 식겁하는 장면과 같다. 심지어 옆에서 최승우가 속았다며 하는 말이 '고려 왕은 언월도를 잘 쓰지 않는데 어젯밤 고려 왕은 줄곧 언월도를 들고 있었사옵니다.'였다. 극 중반부터 신숭겸이 언월도를 주로 사용하긴 했지만, 어쨌든 시청자 입장에서는 "신숭겸 = 관우"로 인식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부분에서도 의문점이 남는데 이 장면 전까지 신숭겸은 언월도가 아닌 검을 주로 썼다. 언월도를 쓰는 모습이 등장하기는 했으나 공산 전투 직전부터였다. 게다가 초반에 '능산'일 때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던 길이의 수염이 어느 순간부터 점점 길어지기 시작한 걸 보면 관우의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세부적인 상황은 다르기는 하다. 연의에서 조조가 놀란 이유는 죽은 관우가 살아있는 사람마냥 생생하게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그 자체 때문이었지만, 견훤이 신숭겸의 목을 보고 놀란 건 사실 그것보다 틀림없이 왕건의 목일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 전혀 엉뚱한 사람의 목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적국의 왕이나 장수를 베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수급을 베어오는 것이고, 적국 왕의 목을 기대하고 열어봤는데 예상과는 달리 엉뚱한 하급자의 수급이라면 놀라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른 부분의 차용이야 기록이 적어서 부실한 캐릭터들에게 캐릭터성을 주기 위한 이유라고 치더라도, 이 부분은 자체적인 이야기의 재미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여기다가 왜 굳이 관우의 이미지를 억지로 끌어와 붙였는지가 오히려 의문일 따름이다.

또한 어느 무장은 어느 무기만 애용한다는 것부터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중국 고전 소설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다. 무기는 상황에 따라 유불리가 있어서 특정 무기만 주구장창 쓰지 않고 왕건이든 신숭겸이든 마상돌격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언월도를 쓸 수도 있기에 왕건이 언월도를 든 게 이상하다는 극중 대사는 실제 전투의 상식을 무시한 중국 고전 소설속 고정관념에 빠진 대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실제 맹장 기록에서도 주로 쓰는 무기는 무엇이며 특기는 궁술, 창술, 쌍검이었다 하는 식으로 주 무기를 묘사한 기록은 있기 때문에 반드시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장수들도 사람인 이상 더 잘 다루고 못 다루는 무기가 있었는데 모든 장수가 모든 무기를 비슷한 실력으로 다루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근대 무인들은 출신 지역에 특화된 무술(병장기술 포함)을 배우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므로 예를 들면 (창술, 검술을 안 배운 건 아니지만)유독 활을 잘 쏘고 웬만해서는 활로 상대를 제압한 이성계가 대표적이다.

위의 예시 말고도 수많은 오마주가 있다. 예를 들어 초기 견훤능창을 영입하기 위해서 3번이나 능창과 싸운 것은 칠종칠금과 유사하다.

물론 실제 역사상의 유사점을 굳이 찾자면 중국의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의 몇 가지 부분이 비슷하기는 하다. 큰 나라가 깨져서 시작된 군웅할거가 3개의 나라로 정리되는 배경부터가 흡사하다. 삼국지의 위촉오 삼국이 후한이 망하면서 갈라져 나왔듯이 후삼국시대의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 반기를 일으키고 나왔다. 북쪽에 위치했으면서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궁예의 태봉이 조조의 위나라와 비슷한 포지션이고, 이를 뒤집어 엎고 건국한 왕건의 고려는 사마의의 서진과 비슷하며, 고려에게 잡아먹힌 신라는 위나라에게 잡아먹힌 촉한과 대비되며 제일 마지막에 망한 후백제는 손권의 오나라와 배치되기는 한다. 또한 처음엔 궁예와 같은 편이었으나, 나중에 틀어져버린 양길은 원소의 포지션이며, 나중에 중부지방의 패권을 두고 양길과 자웅을 겨룬 비뇌성 전투는 마치 관도대전과 같은 포지션의 전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유사점들을 들어 아예 무리수는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작가의 상상력 부족이나 게으름을 무리하게 변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구도가 비슷하다고 해서 다른 고전소설의 설정들을 대놓고 빌려온다면 같은 시대를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는 죄다 똑같은 클리셰의 반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말선초 시대도 여러 번 드라마화되었고 같은 인물들의 같은 사건을 다루었지만 이야기를 다르게 가공해서 각자 다른 재미와 개성을 인정받았으며, 중화권의 실제 중국 삼국시대 배경 사극들 또한 마찬가지로 같은 인물들의 같은 사건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작품마다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는 후삼국시대가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행간을 채워넣기 위해 삼국지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나, 문제는 너무 지나치게 따라하다 보니 눈에 밟히는 부분과 모순이 적지 않고, 작품의 창의성 및 작가의 자질까지 문제될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해도해도 너무 삼국지연의를 우려먹은 것.'

번외로 무력(武力)과 인덕(人德)의 대비가 극명한 견훤과 왕건의 대립은 삼국지보다는 초한지와 닮았다. 실제로 후삼국시대 말기인 920년대말~930년대에 신라는 그저 경주 일원만이 강역인 상태였고, 기록에서도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서로를 북군/남군으로, 왕건과 견훤은 서로 북왕/남왕으로 기록했으니…,이 점에 대해서는 초한지도 일부 차용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초한쟁패기나 후삼국시대 모두 완벽한 양자의 대결이 아니라 수많은 군소세력이 난립해 그 세력들이 양강 중에 어느쪽에 붙느냐에 따라 패권의 향방이 결정된다는 것도 비슷하다.

10. 창작물의 반영 오류[편집]


재현 측면에서도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신라 말이라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가까운 건축양식[30]을 보이며, 시대와 국가의 양식이 뒤섞인 데다가 허술해보이는 재질의 갑옷이나 인건비를 아끼려다 보니 지나치게 늘어난 야간 매복 전투[31], 창 대신 검을 휘두르는 기병이 등장한다.[32] 진형의 개념은 무시되었고, 공성전에서 기병성벽을 향해 어택땅함은 물론, 기병들이 죽고 싶어 환장한 듯[33] 전투 마다 난전이나 삼국지연의를 연상시키는 일대일 대결 장면으로 해결하는 장면 등은 먼저 방영된 삼국기, 용의 눈물 등의 전투신보다 퇴보한 것이다. 이것은 태조 왕건의 영향을 받은 다른 사극들이 고치지 않고 답습하여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게 된다. 게다가 전투 대부분이 전술[34]이 아니라 초인적인 영웅 한둘이 나서서 날아다니면서 해결하는 비현실적인 묘사로 때웠다. 이때마다 "아주 날아다니는구만."하고 감탄하는 적장의 추임새는 덤. 군사들은 있으나마나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으며, 대부분 영웅들의 칼질에 나가떨어지는 역할밖에 못한다, 조금 보다보면 대체 병졸을 왜 모으고 투입하는지를 모를 지경이다.

그리고 전투는 거의 항상 야간만 고집하는 게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 대낮에 전열을 다 벌여놓고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말도 안 되는 묘사가 수시로 등장한다. 나중엔 아예 "이제 해가 지면 전투가 시작될 것이오"라는 대사까지 넣어서[35] 밤에 싸우는 걸 거의 상식 수준으로 만들어놓는다.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유는, 전근대 전쟁에서는 기습 같은 특수한 작전을 제외하면 야간전투는 굉장히 드물었다. 오히려 야간전투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야말로, 기습 같은 특수작전이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략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밤은 현재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어둡다. 조명 확보도 안 되고, 전열 유지도 안 되고, 피아간 구분조차 어렵기 때문에 밤이 되면 전투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싸우다가도 멈춰야 되는 게 상식이었다.[36]

심지어는 58화에서는 왕건과 수달이 낮에 결투를 벌이는데, 왕건이 승리하자마자 공격 명령을 내리자 갑자기 밤으로 변하면서 전투가 전개된다. 다만, 이 부분은 배경을 잘 보면 해질녘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노을이 진 것처럼 하늘이 붉은 데다 해당 장면 맨 마지막 쯤 가면 어두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결투가 벌어진 직후에 전투가 벌어지리라는 법도 없고 오히려 문제를 삼는다면 작중에서도 성격이 당차다고 했지 무술을 연마했다는 소개나 묘사가 전혀 없었던 장화왕후가 전투에 참가한다는 부분을 걸고 넘어져야 한다.

도자기 재현 또한 개판이어서 신라 말이란 시대배경상 평민은 신라토기 쓰고 지배층은 초기형 청자, 백자, 흑유자 및 중국에서 수입한 당삼채 정도가 맞을 텐데, 극중에는 원 간섭기 이후에나 개발돼 들어올 청화백자나, 거의 천 년 뒤 청나라 때에나 나올법한 오채자기 등이 수시로 등장한다. 구석기 시대에 민무늬 토기에다 밥 먹는 격으로 이는 이후 제국의 아침이나 무인시대 등에서도 변함없는 면모를 보인다.

또한, 세트 구현의 문제는 사실 세트장을 문경시안동시에 거창하게 지어놨는데 제대로 재현하지 않는다고 또 허물고 다시 지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후 사극들은 잘(?) 지어놓은 기존의 세트장을 이용하게 되고, 재현의 문제는 고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두는 무한반복의 형태다.

파일:TheGoryoface.png
위 사진은 드라마 제작 당시 갑옷으로 인터넷에 고려 패딩이라느니 노수패이수 혹은 머리에 이글루를 쓴 고려 장수라고 돌아다니는 짤이다. 1화의 장면으로 궁예군(미륵군)의 철원성 함락을 다루었는데, 정확히는 철원성 전진방어 기지의 신라측 장수들이다. 중앙의 장수분은 항복을 권하러 온 사신을 활로 쏴죽여 궁예군의 분노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다. 이후에 닥돌해오는 궁예군에게 '활을 쏴라', '공격하라!'를 외치며 방어하다가 불타는 세트장과 함께 사라지고, 이후로 후백제능환이 작중 초반에서 이 갑옷을 착용하다가 어느새 나타나지 않는다.[37] 그 외에도 찰갑옷을 묘사했지만 자세히 보면 고무조각을 붙여놓거나 비닐을 네모나게 꿰매서 찰갑 모양을 내서 만들어 놓는 등, 부족한 예산의 비애를 여러 번 엿볼 수 있다.

사실, 제대로 현실을 반영하고 싶어도 부족한 예산의 압박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앞서 언급된 고무 찰갑은 배우들의 체력 부담을 줄여주고자 무게를 가볍게 한 고육지책이었다. 이전에 방영한 용의 눈물 때도 재현한 금속 갑주는 이성계 역의 김무생이 입고 연기하기에 부담이 되어 바꾸었다.[38][39] 방영 당시에는 한국 사극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연히 소품 면에서 들어가는 비용이 적었을 뿐더러 경험이나 노하우가 여러모로 모자랄 수 밖에 없었고, 실제 일부 소품은 삼국기 때 썼던 것을 재활용 하기도 했다. 그런 소품 재활용은 비용적인 문제 때문에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거기다 이글루 투구나 어설픈 신라의 갑옷도 재질과 색상 문제 때문에 그럴 뿐,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재현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최소한 주몽이니 태왕사신기광개토태왕이니 하는 후대에 만들어진 드라마에 등장하는 판타지 RPG스러운 갑옷들에 비하면 최소한 실존하던 과거 갑옷의 모양을 내려는 노력은 했다는 점에서 무작정 비판하기는 어렵다.

사실, 이 문제는 방송 시작 전부터 방송국 측에서 밝히고 넘어간 것이기도 하다. 담당 PD는 삼국기 때 쓰던 갑옷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수급을 맞출 수 있었다고 언급했었다.

능환과 최승우의 관직 경력도 문제다. 이들은 후백제가 세워진 그 순간부터 이찬, 파진찬으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으며 도중에 파직 내지 강등되었다가 자리를 회복했다는 묘사도 전혀 없는데, 이 말인즉 능환 같은 경우 40년 가까이 최고위 관직을 지켰다는 말이다. 제아무리 국왕과 친밀한 관계라고 해도 탄핵을 받는 등의 이유로 관직이 이리저리 바뀌어야 정상인데, 수십년 동안 관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어색하다[40] 능환은 이찬 이외의 관직을 역임했다는 기록이 없지 않느냐는 반론을 할 수 있는데, 견훤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따랐다거나 후백제의 건국에 참여했다는 기록도 없다[41]. 거기다 최승우야 전략이 거의 100프로 정확했고 처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 만큼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능환은 수없이 많은 실수를 범했고 견훤에게 미운 털도 박힐만큼 박힌 상탠데도 관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변명해 주기도 힘들다[42].

용어 사용에서도 오류가 있다. 먼저 나레이션에서 자꾸 '실록' 드립을 치는데,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실록이 아니라 정사(正史)이다. 전통적인 사서에서 실록과 정사는 분류 자체가 다른데, 사서라고 분류되는 책 가운데 정사라는 것도 있고 실록이라는 것도 있다고 보면 된다. 비유하자면 스타크래프트워크래프트 모두 블리자드의 게임이기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가 곧 워크래프트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또한 공허의 유산에 보면 아서스 메네실이라는 왕자가~' 하는 드립이 계속 나오는 셈. 그리고 당대에는 용어가 성립되지 않았던 사서오경 드립도 본 작품에서 나오는데, 사서삼경이니 사서오경이니 하는 분류는 송대 성리학의 산물이다.

기록 해석의 오류도 있는데, 가령 견훤의 이복 여동생인 대주도금의 경우 극중에서는 '삼국유사에 보면 장군이라고 했음' 하면서 장수로 묘사하는데, 실제로 찾아보면 오빠인 용개나 소개 등은 장군이라고 나와도 대주도금은 그런 기록이 없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예성강 전투를 다룬 편에서 고려 황궁 공략을 끝낸 신검의 병력들이 철군하는 길에 '대우도'라는 곳을 공략하기로 하였는데,[43] 자막에 괄호를 치고 '평북 용천'이라고 해 놓았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예성강 하구에서 평북 용천까지는 해안선을 따라 450km 이상, 최대한 직선으로 항해해도 380km 이상 떨어진 머나먼 곳이며, 철군하는 병력이 그 먼곳까지 북상을 한다는게 말이 안 되거니와, 애초에 그곳은 고려 땅도 아니었다. 심지어 작가는 대우도로 가는 길에 유금필의 병력과 교전한 곳인 곡도(백령도)의 위치조차 몰랐다.# 아무리 대우도의 위치를 모른다고 해도 황해도의 수많은 섬들을 놔두고 어째서 당시 고려 땅도 아니었던 압록강 하구 쪽을 지칭하는 무리수를 뒀는지 의문이다.

시대와 맞지 않는 역사 의식도 나오는데, 가령 종간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외세를 끌어들인 통일'이라 평가하며 민족 운운하며, 궁예에게 '이제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라 하고 궁예도 그에 동의를 표하는 장면까지 있다.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근대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고 후삼국이라는 용어는 근래에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물론 조선왕조실록까지 탈탈 털어 봐도 이런 표현은 안 나온다.

인물들의 생사도 뒤죽박죽이다. 원래 927년에 대야성 전투에서 고려 김락 장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됐어야 할 추허조가 배우 사정상 역사보다 11년 앞선 2차 대야성 공략 때 신검을 지키다가 화살 받이가 되어 전사하는 걸로 출시되었다.[44][45]

그리고 극중에서 높지는 않고 부장 정도로 묘사되는 후백제의 형제 장수인 부달과 소달이 고창 전투에서 박술희와 애술이 일기토를 벌이던 중 애술이 밀리는 것을 본 신검에 명령에 따라 나가서 3대 1로 싸우려다 이걸 보고 달려나온 유금필과 대적하다 순식간에 죽는 걸로 묘사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소달과 부달은 백제가 멸망하기 바로 직전의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까지 참여해서 싸우다가 능환 등과 함께 항복하였다.

아마 비중이 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엑스트라 급은 아닌 애매한 부장 급 장수들이면서 기록도 많지 않아 나중에 신검 쿠테타 등, 사건들에서 연관을 지으려면 여러모로 꼬이고 제작진 입장에서는 힘들 수 있기 때문에 나올 만큼 나왔다고 판단했을 때 쯤 일찍 하차를 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극중에서 종간이 궁예에게 국제정세를 말하면서 "주전충이 후당을 멸망시키고 양나라를 건국했다"라고 하는데, 주전충이 멸망시킨 나라는 이연이 건국한 통일왕조 당나라고 '후당'은 이존욱이 세운 나라인데다 실제 역사에선 그 '후당'이 주전충의 양나라(후량)을 멸망시킨다. 또한 '후당'이라는 이름도 당대에 쓰였던 국호가 아니라 후세에 편의상 붙인 것일 뿐이다.

11. 제국 표현에 대해[편집]


KBS 대하드라마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제국, 폐하, 황제 등의 표현을 사용한 작품이다.

우선 몽골 간섭기 이전에 한국 왕조에서 임금에게 ‘폐하’라는 호칭이 ‘전하’라는 호칭보다 익숙했던 칭호인 것은 사실이다.[46] 또한 황제라고 불린 명시적인 기록이나 정황 등이 꽤나 많이 남아있다.[47] 조선시대 실록을 봐도 고려시대에 (조선시대 시각에서) 지나치게 높은 칭호들을 사용했다고 비난하거나 역사서를 편찬할 때 칭호를 깎아 기록했다는 사실 역시 남아있다.[48]

또한 극중에서 후고구려, 후백제에서 자기 국가 안에서 황제, 제국 등의 호칭을 사용하면서 타국의 군주에 대해서는 왕으로 낮추어 지칭하는 것은 상술된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 적당한 표현이다. 실제로 웬만큼 동등하게 인정해주지 않는 이상 상대방의 연호와 극존칭 등을 그대로 반영하지는 않고 왕이나 그 이하의 호칭 등으로 깎아서 기록한다.[49]

하지만 황제라는 칭호가 드라마에서와 같이 일관되게 통용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장에 고려 당시의 금석문을 봐도 황제와 더불어 대왕 등의 단어도 혼용된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왕건은 천자를 칭했을지언정 황제를 칭하진않았다. 또한 궁예가 대왕전주라고 칭해진 용례도 남아있다. 또한 견훤은 독자적인 연호와 백제가 천자국이 었으니 후백제 역시 천자국 이었을 것이다. 또한 백제를 계승했으니 어라하, 걸긴지 같은 군주칭호 또는 대왕이라는 표현이 더 잘어울린다.

거기에 더해 당시로서 한국에서 ‘황제’라는 단어가 익숙한 단어였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에는 ‘왕중왕’이라는 단어가 ‘황제’로 매우 익숙하게 사용되지만 고대시대에는 황제 뿐만 아니라 천왕, 태왕, 가한 등 황제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단어가 여러가지가 있었다. 또한 대왕이나 왕 등의 단어 역시 단순한 제후왕의 경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황태후황후를 두고 왕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서 지존의 위상을 충분히 대변하곤 했다.

또한 신라의 경우에는 나당연합군 이후 금석문에 황제와 왕의 위계가 어느정도 나타나는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고 왕이라는 단어가 통용되는 등 설사 왕건, 궁예, 견훤 등이 칭제를 했다 한들 드라마에서와 같이 여러 세력들이 일괄적으로, 일관되게 황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태조 왕건이나 이후 고려시대 3부작인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은 황제국에서 쓰는 높은 칭호가 충분히 통용될 만한 시대가 배경이지만 이후 몇 년간 조선시대를 제외한 다른 시대에 대해서도 일괄적으로 같은 격식을 넣는 사극들도 나타나는 바람에 ‘황제병’, ‘제국병’ 등의 조롱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12. 중복 출연자[편집]


워낙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사극 중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쏟아져나온 후삼국시대를 다룬 탓인지 다른 사극에 비해 유독 단역 연기자들의 중복출연 장면이 많이 나타나 방영 당시에도 시청자 의견으로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남해 호족 중 한 사람/대야성 성주/김율, 궁예 암살자/백제 정찰병/마의태자, 또는 양길의 부하/입전/박영규의 집사장, 나종례(나총례)/나주 태수[50]처럼 출연 회차가 멀리 떨어져 있어 큰 무리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견훤의 서남해 부임 초기에 추허조 배역 배우와 같이 있던 장교차림으로 나온 배우가 최승우가 서남해의 포구를 통해 후백제로 처음 올 때, 졸병복장으로 나왔다가 나중에는 방장군으로 나온다. (장교가 일개 병사로 강등되어서 포구를 지키다가 나중에 장군급으로 된 것이라면 중복출연이 아닌 인생 롤러코스터이지만...극중 견훤도 일개 군관에서 서서히 왕이 된 사람이다. 능력이 뛰어나 초고속 진급 했다고 생각하자.)

이 링크(#)에 언급된 고경참문을 바친 당나라 상인 왕창근과 아자개를 치료한 의원을 연기한 배우인 김창봉의 경우, 견훤이 서남해에 갓 파견되었을 당시 서남해 지방의 호족 가운데 한 사람을 연기하기도 했고 궁예가 순행을 하는 동안에는 내령군의 태수로도 등장하며, 극 중반부에서는 궁예의 두 아들을 가르치는 스님으로도 나오고 극 후반부의 고창 전투 때에는 고창 지방의 호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또 등장했다. 그야말로 1인 6역의 위엄. 여담으로 김창봉은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는 대전 내관 역으로 다시 나왔다. 단연 압권은 김동석으로 1인 13역을 맡았다.

이에 대해 담당 PD는 워낙 길게 촬영된 사극이었고 필요한 연기자도 많지만 그에 비해 연기자 숫자가 워낙 부족하며 한번만 단역으로 쓰기 미안할 정도의 경력이 있는 배우거나 말을 탈 줄 아는 단역 여자 연기자가 급하게 필요했었던 것 등 여러가지 피치 못할 사유가 있었다고 해명하였다.

사실 이 건은 태조 왕건만 욕할 필요도 없는게 다른 사극이나 외국이라고 해도 별다르지 않은데 왕좌의 게임에서도 중복 출연한 배우들은 매우 많다. 더군다나 왕좌의 게임은 시즌제로 진행된 드라마라서 주요 인물이라고 해도 배역이 바뀌는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레고르 클리게인.

또 다른 예로 중국84부작 삼국지 역시 돌려 쓰기가 많다. 이를 테면 조운 역의 배우가 공손찬을 맡는다든지, 초반 원소를 맡았던 배우가 나중에는 주유로 등장한다든지..., 손견과 손권은 아예 같은 인물인데 수염만 다르기도 하다.

13. 후백제 관련 논란[편집]


후백제의 후계 구도 갈등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좀 있었는데 가령 고창 전투에서 신검 형제가 대놓고 패륜을 저지르는건 물론 핑계를 대며 전장에 안나서는 이적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후백제의 조정 신료들과 선비들 사이에서 신검 형제를 처형하거나 하다못해 목숨은 거두지 않더라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해 '폐서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청이나 상소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신검 형제의 행동은 유교의 가르침을 강조했던 동아시아의 봉건 왕조 시대 상식상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로, 서양에서 조차 이런일이 있었다면 말이 안나올수가 없고 정말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신검이 정변을 일으키기 위한 지지 세력 자체가 단번에 소멸했을 것이다. 물론 견훤은 그래도 자식이라는 이유로 신검 형제를 용서했고 금강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순간에서까지 형제들을 부탁할 정도로 자식들을 나름 아끼고 있었으니 죽일수 없었다고 옹호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여기에 부합하는 케이스가 바로 양녕대군세종대왕이지만 그건 견훤 개인의 이야기고 신료들이 하나같이 태자들을 죽이라 했는데 견훤이 그래도 자식이라 용서하는 세종대왕의 사례 같은 전개면 모를까 국가적으로 볼때 아무리 적장자가 우선인 시대라지만 저렇게 큰 죄를 지은 신검 일파를 비판하는 신하들 조차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하다.[51]

당장 조선은전군만 해도 본인이 직접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역모를 꾸민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말그대로 억울하게 반역 세력에게 추대 된것임에도 대신들이 극렬하게 사형을 주장했고 결국 사형당했는데 태조 왕건에선 신검을 죽이라는 상소는 커녕 신검도 나름 잘싸웠다며 쉴드 쳐주는 사람들만 한가득이며 이 이후로도 이상할 정도로 신검에 대한 신료들의 지지는 굳건하며 기껏해야 매부인 박영규의 마음이 금강에게 돌아선것 정도밖에는 없고 그 박영규도 원래는 중도 내지는 신검파에 가까웠으나 신검이 일부러 견훤이 죽도록 방치하여 지원오지 않은것도 있고 신검의 뻘짓때문에 잘나가는걸 말아먹거나 본인도 휘말려 죽을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 신검으로는 고려를 절대 이길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바꾸었다는걸 감안하면 사실상 신검이 실책을 했어도 드라마상 백제 신료들은 신검 일파를 다 지지하고 있었다고 봐도 좋다.

14. 기타[편집]


뜬금없이 왜색이 드러나는 부분도 있었다. 가령 견훤이 패한 신검을 비난하는 장면에서 할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한국에는 당연히 없던 문화이며 일본에서도 이 드라마에서 다루어지는 시대보다 200여년 뒤인 헤이안 시대 중기에서야 시작되었다. 또한, 궁예의 명을 받은 은부가 궁예를 베는 장면에서 금대가 은부를 베고 다 자결까지 하는데, 자결이야 고구려의 해명태자호동왕자를 시작으로 한국사에서도 간혹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나 순사. 즉, 집단으로 자결하는 것은 700여년 뒤인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야 성했던 것이다.

인물들의 이름을 엉터리로 표기한 경우도 있었다. 가령 장화왕후 오씨의 아버지 '오다련' 을 '오다린' 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나총례' 는 '나종례' 가 되었고 '야율아보기' 는 작중내 '아율라보기' 라는 해괴한 발음으로 불렸다.

상당수 전투가 공성전이 아닐 경우 야간 매복전으로만 묘사되는 문제가 있다. 병력차가 얼마나 되든, 지형이 어떻건, 오로지 매복만 성공하면 무조건 전투에서 이길 정도로, 매복은 작중에서 무적의 전술처럼 묘사된다. 벽진군 전투, 공산 전투, 삼년군 전투, 고창 전투 등이 매복전으로 승리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매복전은 그 성공사례가 매우 적으며, 그 효과도 일종의 게릴라 전술로서 적에게 소소한 타격을 입히는 것이 대부분이지 작중에서처럼 성공만 하면 무조건 적을 몰살시킬 정도의 만능 전술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처럼 매복전이 많이 나오는데도 작중 인물(특히 신검)들은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행군하고, 수풀 속에 수많은 병사들이 숨어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다 매복에 걸려 몰살당하는 등,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후 사극들에서 매복, 기습이 만능으로 묘사되고 정작 전면전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 부작용 까지 발생하였다.

나레이션으로 사건 설명을 할 때마다 "단기 000년, 서기로는 000년의 일이다." 식으로 마치 당시 기년법으로 단기를 사용한 것처럼 표현하는데, 정작 단군기원은 500년도 더 뒤에 동국통감이 편찬된 뒤에야 정립된 것이고, 정식으로 사용된 것은 1909년 대종교의 창시 이후이다. 참고로 단기 기년을 극중 해설로 자주 사용하는 것이 이환경 작가의 특징이다.

174화에서 최승우가 주역으로 자기 자신과 최응, 견훤 등의 점을 치는 것으로 묘사되는 부분도 문제. 극의 흐름상 이 부분은 최응이 곧 숨을 거둘 것이며 후백제의 명운도 기울고 있음을 시청자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최승우 본인이나 최응은 모를까 군주인 견훤의 점을 쳤다는 것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역모죄를 적용받을 수 있는 짓이다. 조선 초기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참찬문하부사 박위가 옛 고려 왕족들과 이성계의 점을 쳤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으며,[52] 단순히 점을 쳤다는 사실만으로 무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금강이 눈알을 빼먹는 장면을 내보내[53] 방송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으며[54], 강비 역의 김혜리용의 눈물, 왕과 비에 이어 연달아 투입시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외에도 연달아 출연한 배우들은 많은데, 국대부인 역으로 나온 임경옥은 그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 초선, 무인시대에서 부용 역을 맡아 KBS 1TV 대하사극에 3연속으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각간 김위홍 역을 맡은 배우 김주영은 용의 눈물, 왕과 비,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에 5연속 출연하는 대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견훤의 경주 공격 에피소드를 찍으면서 포석정 유적을 실제 밟고 다니며 촬영을 해서 비난을 듣기도 했다.

한국 녹차의 효시를 보성인 것처럼 표현한 극중 대사 문제 때문에 2001년 6월 30일 하동군 주민 최영욱(당시 건설업)씨로부터 정정보도와 손배소를 당하기도 했다. 다만 이 부분은 변호를 해줄 수 있는데, 녹차의 효시를 보성인 것처럼 표현한 적이 없기 때문. 문제(?)의 대사는 122화에서 '박유' 가 한 말인데, 원문은 '삼한 땅 곳곳에 차밭이 많사오나 신이 들어본 중에 백제땅 보성에서 느껴본 차 맛이 그중 향이 맑고 좋았던 것 같사옵니다.'로, 녹차의 효시가 보성이 아니라 보성의 차가 최고라는 뜻이다. 실제로 보성의 차가 유명한 것도 사실이며 결국 최영욱씨는 하동군 2만 818가구에 가구당 1만원씩 모두 2억 818만원을 보상할 것을 KBS에 청구해야 했다.
[1] 항목에도 있지만 그냥 현상이나 정신 질환에 가깝다.[2] 독화살을 맞은 궁예를 금강산 도인이 기 치료로 겨우 깨우거나, 오랜 궁예의 심통을 도인이 100일동안 달인 탕약으로 단번에 치료한다거나, 천 년 묵은 산삼으로 아자개의 병을 치료하는데 쓰이는 과정, 백제군의 훈겸이 견훤의 조상이라는 도인의 도움으로 역병을 치료할 지렁이 약을 만드는 장면.[3] 끽해봐야 <선덕여왕>마냥 1회가 시작할 때 "역사적 사실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딱 한 번 보여주고 끝나는 것이 전부다. 시청자 중에는 1회부터 마지막회까지 모두 본 사람도 있을 테지만, 1회를 놓치고 보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심지어 1회를 봤더라도 하필이면 그 문구만 못 본 사람도 소수나마 있을 것인데, 이들 모두는 결국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드라마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이 사실인 것으로 착각하여 왜곡된 지식을 갖게 된다. 그런 점을 고려해 진짜로 픽션임을 분명히 알리고 싶었으면 <공주의 남자>처럼 매회마다 그러한 문구를 띄우는 노력이라도 보였어야 하는 것이 맞다.[4] 장(場)이 '터'를 의미하므로 '전쟁터터'(…)라고 하는 셈이 된다. 중복되지 않게 '전장'이라 하거나 '전쟁터'라 해야 한다.[5] 이래서 삼국사기에는 선덕왕이라고 불리는 임금이 둘이다. 선덕여왕과 37대 선덕왕.[6] 지금도 버섯은 분류법상 '균류'에 속하지만, 인간이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병균과 같은 미생물과는 거리가 멀다.[7] 임무를 자청할 때. 너도 나도 다 외친다는 게 포인트.[예] 지금쯤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옵니다, 지금쯤 연회가 한창이겠네 그려. 현실적으로 전혀 알 수 없는데도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처럼 알아맞힌다는 게 포인트.[8] 물론, 최후반부. 견훤이 고려로 귀부하는 장면에서 잠시 재등장한다. 다만, 이때는 '시트콤식 개그장면'과는 거리가 멀기에 논외.[9] 용의 눈물이방원은 업적도 잘 묘사되지만 이거이를 협박하기 위해 방석의 기생첩을 죽이는 등 필요하다면 죄 없는 사람도 죽였고, 누구도 믿지 못한 나머지 독화살을 맞은 것을 이용해 주변인들을 떠보기도 했다. 또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비의 친정은 물론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친정까지 절단을 냈으며,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사사할 때에는 억지로 사람을 잡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할 정도였다.[10] 사실 그 작품 내의 이방원의 캐릭터성은 주인공임에도 선역이라기보단 대의를 위해 더러운 일을 자처하는 다크 히어로에 가깝고, 이는 세종을 꾸짖으며 모든 악행은 자기가 짊어지겠다는 대사에서 나온다. 이를 통해 그는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어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훌륭한 군주이기도 했는데, 정치싸움이 묘사가 많이 되어 민생을 살피는 부분의 업적은 오히려 축소된 부분도 있다.[11] 아예 없는 건 아니고 정윤(후계자) 책봉 문제가 불거졌을 때나 후반부에 왕식렴, 홍유, 유금필의 갈등이 나온적이 있으나 갑자기 뜬금없이 등장했다가 적당히 화해하고 마무리되었다.[12] 1부는 태조 궁예, 2부는 태조 견훤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주인공인 왕건에게 돌아가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궁예와 견훤이 에피내 다 가져가버린 영향이 크다.[13] 병사들이 피곤하니 장수들끼리 겨루자고 합의가 된 뒤 신덕이 '우리 쪽에서 부장을 내보내겠으니 그쪽도 부장이 나와라!' 라고 외치는데, 그 다음 장면에서 달려나가는 게 김총이다.[14] 굳이 있다면 아자개가 고려로 가면서 호위할 때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용.[15] 가령 활 연습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든지 이의민의 매를 활로 쏴 맞춰 죽인다든지 활로 자객을 제압한다든지 등등.[16] 명주성 공략을 앞두고 양길이 궁예를 북원으로 소환한 뒤, 환선길, 이흔암 등을 딸려서 되돌려 보내는 시점이다.[17] 양길 휘하에 들어갔을 때 복지겸이 병법을 공부한 적이 있냐고 묻자, 종간은 육도삼략 등 병서를 공부한 적 있다고 답변한다. 그리고 후고구려 건국 이전까지 종간은 군사참모 역할을 맡았다.[18] 다만 어거지로라도 변호하자면 그렇고, 왕에게 심한 결례를 저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대학 교수보고 청와대로 오라고 초청했다고 가정해 보자. 국가원수를 만나러 가는데 티셔츠에 청바지 입는 게 맞겠는가, 정장을 입는 게 맞겠는가? 관직이 없어서 관복을 입을 수 없다면, 평복을 입을 것이 아니라 관복은 아니되 그와 비슷하게 생긴 옷을 입는 게 맞다.[19] 실제로 궁예는 아지태를 만나기 전과 독화살 맞고 사경을 헤매기 전까지는 미향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 것 이외에는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고, 양길을 죽이기 보다는 화친을 맺으려 하거나 가능하면 살려 주려고 하는 등, 어질고 현명한 성군이자 살아있는 부처나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설정할 경우 더 설득력을 높여준다.[20] 작중 왕건이 궁예에게 독주를 계속 마시면 몸을 상하게 될 거라고 간언하는 장면이 있으며 술이 병을 악화시킨다는 언급이 가끔 등장한다. 여기서 작중 인물들은 독주가 몸을 망친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21] 조물성 전투,공산 전투 직전에는 최응이 친정할 것은 없다고 충분히 설득했는데도 철저히 무시했으며 삼년산성 전투 때는 한술 더 떠서 태자 왕무와 최지몽이 나란히 옆에 붙어서 가지 말라고 설득하는데도 역시 아는 길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했다가 신검에게 당하고 말았다. 견훤의 선전포고와 서라벌을 급히 구원해야 했다거나 신숭겸의 전사 때문에 견훤에 대한 복수로 눈이 멀었다거나 하는 이유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양길군과의 첫 전투 당시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어 끝날 것인지 점쟁이처럼 알아맞히며 은부와 장수들을 감탄시켰던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22] 최응은 실제 35살의 이른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이 때문에 곽가와 캐릭터가 겹쳐보인다.[23] 사실 황제의 복색을 하고 철없이 희희낙락 하면서 김칫국 마시는 장면은 신봉승이 비하해서 표현한 이징옥의 모습과 흡사하다.[24] 신숭겸은 대놓고 언월도를 사용한다. 사실 왕건의 장수들 중에서 신숭겸 외에 홍유도 언월도를 쓰고(여담으로 또 홍유의 언월도가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더 비슷하다.) 또한, 신숭겸이 언월도 말고 다른 무기()를 사용한 적도 몇 번 나오지만 신숭겸이 언월도를 사용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다가 신숭겸이 마지막으로 나오는 장면에서도 언월도를 썼으니 이는 신숭겸을 관우처럼 꾸미기 위한 설정이 맞다.[25] 심지어 후백제가 예성강을 공략하러 올 때, 평양에 있던 왕건의 꿈에 죽은 신숭겸이 나온다. 이 또한 관우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사실 처음 능산으로 나올때는 관우를 그리 닮지 않고 무기도 검을 썼지만, 갈수록 관우의 대중적인 이미지에 맞게 변해간다. 수염도 처음엔 일반적인 수준에서 점점 길어지더니, 막판에 죽을때는 녹색옷까지 입고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극 전체로 보면 신숭겸은 그렇게까지 관우를 많이 닮진 않았는데, 죽기 전 몇화부터 '긴수염/녹색옷/언월도 콤보로 관우화가 되어버린다.[26] 김총의 경우, 앞 단락에도 나오듯이 의형제 설정이 거의 무시되어서 그거대로 비판을 받았다.[27] 게다가 이 부분은 삼국지의 패러디라는데 잠시 눈을 감는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데, 당시 왕건은 송악에서부터 남하한 함대를 이끌고 견훤의 함대를 격파했기 때문에 바람을 불러온다면 남풍이 아니라 오히려 북풍이 필요한 상황이었다.[28] 너무 잔혹한 장면이라서 방송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29] 실존인물 하후돈도 애꾸가 됐지만, 정확히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는 불명이다. 당연히 눈에 직격으로 화살을 맞거나, 저런 말을 하고 눈알을 씹어먹는 일 따윈 없었다. 애초에 화살을 직격으로 맞았다면 말랑말랑한 안구 정도는 바로 뚫어버리고 뇌까지 관통하며, 운좋게 뇌를 피했다고 해도 눈알에만 박힐리가 없다. (아주 먼데서 쏴서 운동에너지를 거의 잃고 떨어진 화살이면 조금 가능성은 있겠지만).[30]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극 초반 신라시대의 왕궁이 등장하는 장면은 다름아닌 문화재청 등의 협조로 창경궁창덕궁에서 촬영된 것이다. 실제로 각 회차 엔딩의 "장소협조"에 창경궁관리사무소와 창덕궁관리사무소가 나온다. 그리고 이는 후속작 제국의 아침에서도 일부 반복된다.[31] 상당수의 전투가 야간 매복 전투인데, 적군의 매복 공격으로 패배를 경험한 신검이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패하는 상황마저 벌어진다. 이는 재현 문제라기보다는 삼국지를 차용해서 생긴 문제일 확률이 높은데, 삼국지에서도 매복은 빈번히 등장하기 때문이다.[32] 이 또한 연기자들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마냥 부정적으로 볼 문제는 아니다. 마상 창술은 예나 지금이나 무진장 어려운 무예인데, 전문적으로 무예를 배우지도 않은 연기자들이 마상 창술을 제대로 하길 바란다는 것은 너무 욕심이 과하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왕좌의 게임에서 보여줬는데, 2차 윈터펠 전투 당시의 혼잡함을 CG와 배경으로 커버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라고 보면 된다.[33] 공성전에서 기병들이 돌격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해자를 빨리 매우거나 도하용 사다리를 부설하는 등, 전투를 보조하는 역을 맡기도 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그런 역할을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무기를 빼어들고 닥돌한다.[34] 전술이랍시고 보여주는 것은 고작 매복 정도로 실제 전쟁보다는 삼국지연의 류 고전소설의 재현에 더 가깝다.[35] 이 대사도 수십 번 우려먹는다.[36] 야간 전투 장면이 주구줄창 나오는 것은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한데, 첫 번째로 대규모 병력이 회전을 벌일 정도의 촬영지를 찾는 것 부터가 난제이며 용케 찾아냈다고 해도 대낮에 풀샷으로 화면을 잡기엔 주변에 있을 전봇대나 주변인들이나 촬영 스태프들의 차량 그리고 멀리서도 확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이를 방해해서 재현 오류가 지적되기 쉽다. 산중에서 촬영해도 시멘트길과 배수로가 훤히 보일 정도니 개활지에서 촬영하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 공교롭게도 이환경의 다른 작품인 야인시대에서도 세트장을 부천 공터에 지었으나 몇 번이나 화면에 아파트가 나온 적이 있었다. 두 번째 이유으로는 제작비를 줄이려는 꼼수다. 주간에 촬영하면 주변이 환하기 때문에 인원을 많이 동원해야 전투다운 모습이 연출되는데, 야간에 촬영하면 주변이 캄캄해서 적은 인원으로도 전투를 묘사할 수 있기 때문. 물론 1회 철원성 전투처럼 야간에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사례도 있다. 이런 제작비 문제 때문에 꼼수를 쓴 건 비단 태조 왕건뿐만이 아니라 전투 장면이 많은 불멸의 이순신도 마찬가지로, 세트장에서 조선과 일본 진영별로 각각 배 한 척씩만 만들어놓고 같은 배 안에서 배역을 번갈아가며 계속 촬영했다.[37] 이 외에 오른쪽의 지휘관이 입고 있는 황금 갑옷은 후에 양길이 다시 입고 나온다.[38] 그래서 나중에 이방원으로 분한 유동근도 왕자의 난에서는 비닐티가 많이 나는 찰갑을 입었다.[39] 사실 촬영 당시 만으로 50대 중후반이던 해당 배우들의 연령을 생각해보면 NG로 인한 동일 장면 반복이 필수적인 드라마 촬영을 실제 철갑옷을 착용해 철갑의 무게까지 추가 부담된 채 수행하는 경우 체력 문제로 배우들이 난색을 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40] 한참 후대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영의정 같은 경우 황희가 18년 동안 재임한 것이 최장 기록이다.[41] 항목에 나오듯이, 견훤의 동지가 아니라 신검과 같은 세대가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있다.[42] 일이 이렇게 된 건 남아 있는 기록이 부족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기록이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고려 측의 최응 같은 경우, 작중에서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관직이 몇 번 바뀌는 게 묘사되기 때문. 다만 기록이 없어서 그랬다면 애초에 태조 왕건이라는 사극 자체가 나올 수가 없고, 전쟁 위주의 작품이라 묘사하기 어려웠다고 할 요량이라면 그럼 최응의 관력은 왜 언급된 것인가?[43] 실제 역사에서는 예성강 전투와 대우도 침입이 텀을 두고 2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것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묶은 것이다.[44] 이 문제는 극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의 문제다. 2차 대야성 전투를 촬영할 즈음 견훤 역의 서인석씨와 추허조 역의 강재일씨가 회식 도중 싸움을 벌였고 이 때문에 더 이상의 촬영이 불가능해지자 제작진 측에서 불가피하게 추허조를 전사시키는 선에서 하차 시킨 것이다. 극의 또다른 주인공인 견훤을 극 중반부로 넘어가는 2차 대야성 전투에서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45] 추허조말고도 담당 배우의 사정으로 인해 사라진 캐릭터가 3명이 있는데, 바로 신강, 공직, 신덕이다. 원래는 2명 다 견훤이 고려에 망명한 후에도 생존하는 것으로 나와있으나 신강은 담당 배우인 태민영씨가 간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증발해버렸고, 공직 또한 담당 배우인 이정웅씨가 건강 악화로 인해 고창 전투 이전 하차하면서 원래는 고려로 망명하고 그로 인해 빡친 견훤이 공직의 자식들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리는 혹형을 가해야 했으나, 담당배우가 중도 하차함에 따라 전사처리 되어 아들들 혹형도 생략되었다. 신덕 역을 맡은 배우 임병기씨는 최종화 이전 촬영 도중 낙마로 인한 부상으로 급작스럽게 하차한 바람에 일리천 전투 항복장면에선 등장하지 못했고, 파달 역을 맡은 배우 기정수씨가 처형당하는 장면에서 원래 임병기씨에게 배정되었던 대사를 대신 처리했다. 원래 우락부락한 행동을 했던 배역이 마지막에 퇴장 전 갑자기 의연한 모습을 보인 게 이 때문.[46]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시대 사극에서 유명한 ‘주상 전하’ 따위의 단어가 상당히 기형적인 조합이다. 본래 上이라 하는 단어 자체가 황상, 주상, 성상, 금상 등 모두 제후, 황후, 태후도 아닌 제왕에게만 쓸 수 있는 지존의 호칭이다. 몽골 간섭기 때 칭호의 격하가 이뤄졌다가 부분적으로 격식이 복구되다보니... 묘호와 비슷한 사례[47] 예를 들어 백제 군주의 칭호 중에는 마한황제라는 용어가 있으며 의자왕 역시 (당나라 입장에서) 멋대로 황제를 칭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문서의 해당 항목에도 많다.[48] 정도전등이 편찬한 초창기 고려사가 그러했다. 제후국 주제에 묘호를 쓰는 것이 참람되다 여겨 원 간섭기 이전까지 ~조,~종으로 되어있는 고려국왕들의 묘호를 죄다 ~왕으로 바꿔버리는 역사 왜곡을 저질렀다. 고려실록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고려에 대해 남은 기록이라고는 고려사와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밖에 없는 상황에서 역대 고려국왕의 명칭이 태조, 혜종, 정종, 광종...대신에 태왕, 혜왕, 정왕, 광왕...으로 불릴 뻔 했으며 이 드라마 이름도 태조 왕건이 아닌 태왕 왕건이 될 뻔 했으나 다행히도 세종대왕구라치지 말고 사실대로 써라!고 엄명을 내리고 몇번이나 빠꾸를 먹인 덕분에 역대 고려국왕의 명칭이 제대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49] 중국측의 기록이긴 하지만 정사 삼국지조위정통론을 기본으로 하여 서술하였는데 그나마 유비, 유선의 경우엔 선주, 후주로 칭하여 어느정도 인정은 했으나 동오는 그런것 없이 그냥 손권, 손휴등의 이름을 적었다.[50] 총례는 왕건의 나주 공략 작전 1차전 이후 태수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고 오다련에게 넘겨주는 것을 끝으로 등장이 없다. 극 최후반에 견훤이 고려로 귀부할 때 총례를 맡았던 배우가 다시 나오기는 하는데 '나주 태수' 라고만 언급이 될 뿐이고 총례에게는 존대를 하던 오다련이 '나주 태수' 에게는 하대했으므로 동일인물로 보기 어렵다...만 이 작품에서의 잦은 캐붕을 생각하면 그렇게 무리도 아니긴 하다.[51] 차라리 단순히 싸움을 못했다, 그냥 전투에서 졌다, 일기토에서 패배했다 같은건 변명의 여지라도 있지,신검은 단순히 싸움을 못하는걸 넘어 황제의 자질이 의심되는 수준이였고 나중가면 자질 논란을 넘어서 고창 전투때 일부러 아버지인 견훤이 죽도록 방치하고 구원 오지도 않은 건 물론 아버지의 뜻조차 무시하며 운주성 전투를 고집했다가 다 말아먹고 견훤도 죽을뻔 한걸 생각하면 도저히 쉴드칠수가 없는 행동이 있다.[52] 심지어 이 부분은 같은 작가의 바로 전 작품인 용의 눈물에서 아주 충실하게 재현해서 나온다.[53] 당연히 삼국지연의하후돈 오마주.[54] 그래서인지 연개소문에서는 이세민이 똑같이 하는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잔혹성을 줄였다. 물론, 이 역시 당연히 삼국지연의의 하후돈 오마주. 이환경의 극 쓰는 방식이 전혀 발전 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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