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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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랄부의 추장
야율살랄적

야율아보기

요나라 건국





거란 초대 황제
太祖 | 태조

파일:辽太祖.jpg}}}
묘호
태조(太祖)
시호
대성대명신열천황제(大聖大明神烈天皇帝)
연호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거란어
야율(耶律)[1]

거란어
아보기(阿保機)[2]
중국어
억(億)
신장
9척[3]
부황
덕조(德祖)
모후
선간황후(宣簡皇后)[소(蕭)암모콘]
생몰 기간
872년 ~ 926년 9월 6일 (향년 54세)
재위 기간
거란 가한
907년 2월 27일 ~ 916년 3월 17일 (9년 1개월)
초대 황제
916년 3월 17일 ~ 926년 9월 6일 (10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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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동상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사후
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요나라창업군주.

요나라의 초대 황제이기 이전엔 일개 부족이었던 질랄부의 추장이었고, 아버지 덕조를 계승해 추장이 된 이후 술수를 써 모든 거란족을 질랄부에 복속하는 방식으로 통일한 후, 종신 세습제 가한에 취임해 실질적인 제정을 성립시켰다. 이후 916년 황제 칭호를 사용했고, 서쪽의 탕구트와 동쪽의 발해를 복속해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자체적인 문자인 거란 문자를 만드는 치적을 남겼다.

태조 생전 요나라의 국호는 거란(계단, )이었다. 이후 태조를 계승한 태종대에 국호를 거란에서 현재 잘 알려진 (遼)로 변경한다.


2. 생애[편집]


872년 출생으로 당시 거란 사회는 8개의 큰 부족들이 요련(遙輦)씨를 연맹장으로 하여 느슨하게 연합한 형태였다. 어린 시절 거란 사회 내 갈등으로 질랄부(迭剌部)의 부족장이었던 조부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이 피살당하여, 아버지 야율살랄적(耶律撒剌的)과 삼촌들은 달아나고, 아보기는 할머니가 숨겨 키우는 등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다. 키는 9척 장신이었다.#[4][5]

후에 야율살랄적은 질랄부의 부족장이 되었고, 아들 야율아보기도 그 뒤를 이어 질랄부의 부족장이 되었으며, 거란 연맹군의 총사령관인 우월(于越)이라 불렸는데 이는 그가 거란 연맹의 제2인자가 됐음을 의미했다. 야율아보기가 태어닌 872년부터 중원의 당나라는 붕괴의 조짐을 보였고 906년 당나라가 쇠락하면서 전 중국 대륙에 몰아닥친 대혼란을 틈타 야율아보기는 반대파인 부족장들을 잔치에 초대하여 모두 죽이고, 심복인 술률노속과 야율갈로 및 여타 7개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연맹장이었던 가한 요련흠덕(遙輦欽德)의 뒤를 이어 전 거란족의 가한에 올랐다.

이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해 영토를 급속도로 넓혔다. 여진 세력 일부를 물리쳐서 요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고, 908년 요동 남쪽으로 진출해 중국으로 통하는 발해의 주요 교통로를 끊어버렸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요사》에서는 거란 태조가 20여 년을 힘들게 싸워 발해의 요동 지역을 얻었다는 대목이 나오므로 903년에서 918년 사이 시점에 거란이 요동 일대를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916년황제라 칭했고, 요하 상류인 임황에 도읍하여 국호를 '거란'이라 했으며,[6] 그해 7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서쪽의 돌궐, 탕구트, 사타족 부락을 평정하고, 8월부터 11월 사이에는 중국 황하 이북을 원정해 큰 전과를 거뒀다.

922년에는 막 태봉궁예를 몰아내고 세워진 신생 국가였던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7] 그는 주위의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며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한자를 본따 거란 문자를 창제했고, 농업을 발달시켰으며, 황제를 종신제로 하여, 유목민의 한계를 청산하고 요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이때 후당의 장종 이존욱과 충돌했으나 이존욱 역시 만만치 않은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큰 성과 없이 물러났다.

아보기는 먼저 몽골 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서방 정책을 실시했다. 924년 5월 조바심을 느낀 발해 국왕 대인선이 거란 동부를 공격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마침 서방 정책이 마무리가 된 때인 925년 9월 야율아보기는 발해 침공을 준비하여, 같은 해 12월에 출정명령을 내리고 발해를 기습 공격했다. 거란의 발해 공격은 상경용천부와 가깝고, 거란도의 거점이었던 부여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여부는 3일 만에 함락되었고, 계속 진격하여 수도인 상경이 1월 9일 포위되었으며 발해는 3일이 지난 1월 12일에 항복했다. 참고로 이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해(奚), 회흘(回紇), 토번(吐蕃), 당항(탕구트), 실위(室韋), 오고, 신라(新羅)[8]가 있었다.

926년 1월 14일 발해는 정식으로 항복하면서 멸망했다. 아보기는 그곳에 '동쪽의 거란국'이라는 뜻의 동란국을 세웠다.[9]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거란으로 귀환한 후 곧바로 붕어했다. 그의 장남 야율돌욕동란국 인황왕(人皇王)으로 봉해졌으나 차남 야율요골(태종)과의 제위 다툼에서 패배하자 후당으로 망명을 갔다가 거기서 죽었다. 요나라는 야율아보기 사후 순흠황후 술률평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다가 차남인 야율요골에게 물려주었다.


3. 여담[편집]


중국의 땅을 영유하기를 몹시 원했다. 중국 후당의 사신한테 황하 이북을 할양한다면 다시는 중국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제안했지만 당연히 거절당하자 진주, 정주와 유주(북경)만 할양해도 좋다고 했으나 당연히 또다시 거부되었다. 그의 야망은 요 태종 때 연운 16주로 실현되었다.

한 고조소하에게 매우 큰 감명을 받았는지, 야율아보기는 갑자기 유방의 뒤를 잇겠다고 하더니 황실의 성인 야율씨를 중국식 성인 유씨로 개성하면서 다른 부족의 성을 죄다 소씨로 바꿨다. 뜬금없이 자기 조상들을 버리고 중국식 성을 황제가 쓰자 당연히 황실과 신하들은 크게 반발했고[10] 이에 야율아보기는 황제의 성을 야율씨로 환원했지만 소씨는 끝까지 남겼는데 그 이유가

"난 유방은 아니지만 소하를 거느리고 싶다."

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거란 8부족 중 황실 친족인 3부족은 야율씨로 남고, 나머지 5부족은 죄다 소씨가 되어 버렸다. 요나라 건국 이후로는 거란의 인물들[11]이 죄다 야율씨 아니면 소씨를 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하는 죽은 후 졸지에 수많은 거란인들을 후손으로 입양하게 되었다. 중화문명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어떤 면에서는 좀 황당한 구석도 있었던 인간인 모양이었다.[12]

요사》에 의하면 야율아보기가 황제를 칭하기 이전인 915년 고려(이때는 고려가 아닌 태봉)가 보검을 진상한 기록이 나오는데 아무래도 궁예가 후삼국 통일에 앞서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거란에 친교적인 제스처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발해를 멸망시켜 한민족의 만주 지배를 끝낸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사에 있어서는 원수격인 인물. 그래서인지 훗날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후삼국을 통일한 이후, 거란 사신을 유배하고 선물로 받은 낙타 50여 마리들을 강제로 굶겨 죽인다.[13][14] 다만 발해 멸망 이후 만주 지배를 상실한 부분은 발해가 지나치게 빨리 무너졌기에 방어를 제대로 못 한 것 아니었냐 혹은 심각한 내부적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니었냐는 평가도 있긴 한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내부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 극복될 수도 있었기에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주체는 거란족이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야율아보기를 비롯한 거란족은 발해 후기 때부터 발해를 원수로 여겼는데(물론 처음부터 우호적 관계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적대적 관계는 더욱 아니었다) 이 부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추측된다. 발해가 아직 강성하던 시절 거란족이 발해에게 핍박을 받았거나, 야율아보기의 할아버지 야율균덕식이 피살되었을 당시 배후자 중 하나로 발해가 지목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며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사실 거란과 발해는 발해 말기인 900년대가 아닌 이상 딱히 원수라고 여길 정도의 흔적은 없는데 발해 내에도 거란인들이 일부 있었고(다만 고구려계 및 말갈계만큼 발해에 친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옛 고구려 때처럼 거란을 쥐어팬 것도 아니었으며 수와 당 또는 돌궐과 위구르처럼 거란을 광범위하게 복속시키고 조공관계를 맺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았더라도 전성기 이후 몰락해가던 발해와 급격히 성장하던 거란 사이에는 요동지방을 둘러싼 상당한 긴장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기록상 발해 멸망 후 발해인과 여진족도 상당히 사이가 나쁜 것으로 나타나는데 요나라 치하에서 발해인이 여진족을 향해 배신을 밥먹듯이 한다고 까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실제로 여진족은 금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유목민족으로 때로는 거란에 붙기도하고 때로는 고려에 붙기도 하는 등 줏대가 없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그러니 발해입장에서는 배신을 밥먹듯이 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훗날 고려도 여진족을 토벌하기도 하고 받아주기도 하는 등 여진족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여진이라는 민족이 이 시점에서는 부족단위로 구성이 되어있었던 점이 그 요인일 수도 있다.


4. 사후[편집]


야율아보기가 붕어한 직후 쇼킹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야율아보기의 장례식 도중 황후였던 순흠황후 술률평(述律平)[15]이 야율아보기가 유언으로 신하들을 순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반발했지만 요나라 풍습상 순장은 해야 했기에 명분이 필요했는데 이때 한족 출신이던 조사온(趙思溫)이 술률평이 야율아보기와 가장 가까웠으니 황후 먼저 순장하자고 주장했고, 이에 술률평은 아들이 어려서 본인이 수렴청정해야 하므로 아직 자기가 죽을 순 없고 대신 팔 하나를 순장하겠다며 진짜로 자기 팔을 잘랐다. 결국 신하들은 술률평의 팔 하나와 같이 순장당해 버렸고[16] 술률평은 '단완태후'(斷腕太后, 팔을 끊어버린 태후)라는 별명이 붙는다.[17]


5. 대중매체[편집]


  • KBS 대하드라마《고려거란전쟁》에서 등장하며, 1화의 해설 장면에서 잠시 나온다.

[1] yaruud. '야루드'라는 발음에 가까움.[2] 이 이름의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설들이 있다. 이 단어의 발음을 당시 한자의 중고음대로 재구해 보니 칭기즈 칸의 먼 조상이자,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드 씨족의 조상 이름이기도 했던 '암바가이'라는 발음 정도로 추측되고 있으나, 일설에는 이 단어가 한국어 '아버지'에서 차용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만주어의 조상이 되는 여진어거란어가 자신들이 속한 퉁구스어족몽골어족의 기초 어휘들을 보존하면서도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그것들에서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한 어휘들이 발견된다는 점을 보면 어느 정도 신뢰가 가는 설이다.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도 거란어에 고대 한국어에서 차용된 다수의 단어가 발견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편 '阿保機'는 현대 관화로 '아바오지' 정도로 발음되는데, 관화 자체가 중고음이 원나라의 지배 및 북방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아 변화한 형태이고, 거란족을 위시한 북방 유목민들은 아보기가 살았던 시기에도 중고음을 현대의 관화와 유사하게 발음했을 것으로 추측되므로 더욱 설득력이 높아진다.[3] 출처 《요사》에 키가 9척(九尺)이라 나온다. 당시 통용되는 당척 송척 1척 기준은 30cm 정도였다고는 하지만 워낙 비현실적인 키가 나와서 요의 척단위가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소(蕭)암모콘] [4] 당시 척 단위인 30cm로 계산하면 270cm가 되지만 요나라 척의 단위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사실 확인은 불명이다.[5] 확인되는 차원에서 한 척의 가장 적은 수준인 23cm로 계산해보아도 신장 207cm에 이르는 거인이다. 동양 고대인의 행장 등에서 '구척장신'이란 표현은 (자세한 설명이 없다면) 단순 '기골이 장대하였다'라는 수준의 미사여구로 이해하는 편이 낫다.[6] 947년 요 태종 때 국호를 '대요'로 바꾼다.[7] 당시는 아직 후삼국시대였으며, 왕건의 고려는 남쪽에서 후백제, 신라 및 반독립적 제호족 세력과 대치하고 있었다.[8] 다만 당시 경애왕이 통치하고 있던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방비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형식적인 정도였거나, 또는 920년대 신라의 안보 상황을 감안하여 지지 선언 정도로 하고, 실제로는 도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9] 하지만 발해는 중심부만이 궤멸되었고, 아직 각 지방 세력들은 온전했기에 멸망한 이후에도 정안국 등 발해의 계승국들이 생겨났다. 이 발해 부흥세력을 수십년 동안 정리하고서야 그 너머의 고려 공략을 시작해 여요전쟁이 시작된 것이다.[10] 특히나 요 태조는 고제와 너무 인연이 없었다. 후한의 튀르크계 사타족 출신 유지원도 유방과 인연이 없긴 마찬가지였지만 같은 유씨라는 명목으로 유방의 후손을 자칭했으며, 그 성씨도 기록을 신뢰하고 보면 상당히 오랫동안 써온 성이다. 사타족 출신임을 감안하면 뻥이다.[11] 고려에도 쳐들어온 소배압, 소손녕 등이 있다.[12] 지구 반대편 유럽에선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프랑스 덕질을 했던 일화가 있다.[13] 실제로도 고려 말기에는 이게 논란이 되어서 아예 충선왕(제26대)이 낙타 받기 싫으면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 있었냐고 말했고, 이제현에게도 중국에서도 키우는데 우리라고 한두 마리 못 키우리란 법 있냐고 말하자 이제현은 이에 뭔가 깊은 뜻이 있었을 거라는 말만 했을 뿐 그 이상은 못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그래도 말 못하는 동물을 굶겨죽인 건 좀 아니지" 라고 생각한다. 현대에는 당시로서는 발해 유민을 향한 퍼포먼스를 위해 필요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14] 조선시대에는 바치거나 온 동물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면 곱게 돌려보냈지 굶겨죽이진 않았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이 일본에서 원숭이를 바치자 나라에 무익하니 돌려보내라고 명한 바 있다.[15] 성이 술률씨. 위구르 계통의 성씨이다. 요 태종을 옹립하며 황실의 어른이 되었지만 훗날 자신이 몰아낸 장남 야율돌욕의 아들 세종에게 패배한 후 남편 야율아보기의 능묘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결국 황족인 야율옥질(耶律屋質)의 중재로 세종은 화를 거두었고 이후 자신이 황제로 세우려던 3남 야율이호(耶律李胡)와 함께 조주로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953년 씁쓸히 생을 마감했다.[16] 위키백과에 따르면 다른 신하들이 먼저 순장당한 뒤 조사온이 이렇게 말했고 그래서 결국 목숨을 건졌다고 나온다.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도 조사온은 살았다고 나온다.[17] 참고로 중국에서는 몽골족의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한족 국가였던 명나라에도 순장이 잔존해서 명나라에서도 순장 관련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가령 황후가 순장 대상이 되어 신하들이 순장을 요구하자 황후가 "그럼 니들이 먼저 순장당해봐라"라고 하고 신하들은 다 같이 데꿀멍해버려 결국 순장당하지 않았다는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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