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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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芳遠),[6] 자는 유덕(遺德).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
《태조실록》 1권, 총서 中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1398년(태조 6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그 친형인 무안군[7] ,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 뿐 아니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냉정하게 숙청하였으며, 이는 자신의 후계자인 삼남 세종의 훌륭한 치세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의 상황을 잘 수습하고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며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그 책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쌓았다.
2. 묘호와 시호[편집]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8]
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恭遜)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聰明)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開拓)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9]
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平安)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10] 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篤實)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優愛)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嚴肅)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精誠)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大王統)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奉量)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11]
을 남기십니까?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 이름과 지위를 세상 높이 드높이는 일)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령(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子孫)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計策)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리옵니다."
-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11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12]
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태종이란 묘호 자체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 영예의 묘호이다. 사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가 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절대적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13]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달리 불러 성종(聖宗)[14] 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의 별호는 '성조(聖祖)'였었다.
3. 이름과 작위[편집]
자기 이름에 대한 애착이 있긴 했었겠으나, 피휘는 왕의 권위에 훨씬 더 중요한 예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비와 양민들 불편하지 말라고 피휘 관리를 과감히 포기한 걸 보면 시원한 인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7]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권위에 자신감이 넘쳐 후대가 감히 자신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과시적 행위일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시기 이전 왕조들에 비해 강력한 군주권으로 유명했던 명나라 황제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역시 흔한 한자로 된 이름을 가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을 시작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한자가 들어간 두 글자 이름을 여러 세대에 걸쳐 잘만 썼고, 이에 따른 낱글자 피휘 금지도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자기 아들들의 이름은 비교적 흔하지 않은 부수를 사용한 외자로 지음으로써 본인의 사례를 관행으로 만들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이방원이 독보적인 사례가 되었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18]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태조 7년) 9월 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어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이 되었다. 이에 《정종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1401년(태종 원년)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이 된 사람들은 정종을 제외한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태종의 아들들인 효령대군, 충녕대군은 관례를 마친 후인 1412년(태종 12년)에 대군으로 봉해졌으며, 1414년(태종 14년) 태종은 여덟살의 아들을 성녕대군으로 봉하며 왕의 아들로서 왕비 소생은 대군(大君), 후궁 소생은 군(君)으로 호칭을 완전히 법제 확정하였다.[19] 따라서 이방원과 이방과는 '정안군 / 정안공', '영안군'이었지 '정안대군', '영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와 이방간은 1401년(태종 원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 이방과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20] 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 자체도 옳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태조의 왕자들은 조선시대의 야사집이나 사적인 자리에서 옛날 일을 말할 일이 생기면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친아들을 대군이라고 하는 것이 후대에는 자연스럽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이성계의 직계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나머지 왕자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으로는 이미 왕이 된 정종과 태종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딱히 없었다. 이는 이미 더욱 높은 자리인 왕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일반적으로 아무개 임금이라고 하지 아무개 왕자라고 하지 않는 데다, 어쩌다 왕자 시절의 호칭을 언급하더라도 대군 호칭 사용 이전의 과거 발언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과정에서만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중 인물의 대사로 나오면 고증 오류.
4.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일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일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직접 쓴 글과 시[편집]
명나라 영락 황제에게 바치는 시
자줏빛 봉황 편지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먼 지방의 기쁜 기분 노래로 감응하네
오랫동안 숨어 있던 용과 범은 소리로 응대하고
죽지 않은 고래들은 기세 오히려 씩씩하네
만 리 강산에 정통성이 돌아왔고
백 년 인생이 맑은 조정을 보네
노안에 황제의 명령으로 새로운 변화 보게 되니
백발에 너그럽지 않음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1390년(공양왕2)에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쓴 시 두 편이다.외진 지역 인적 드문 곳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밤낮 재계한다
국화꽃은 우물물을 내려다보고
흰 이슬은 섬돌 이끼에 스며든다
장수 기원함이 얼마나 절실한가
샛별 응당 자연히 배열하리라
봄가을 제사 기일 어기지 않아
임금의 덕 또한 생각나는구나
열성어제[21]
마니산 제단
왕명 받들고 이 재궁에 다다르니
눈에 가득한 가을 산 비단에 붉은 수놓았다
소나무 창가 꿇어앉아 하는 일 하나 없는데
휘영청 달빛 성 동쪽에 빠져있구나
열성어제[E]
1402년 음력 12월 2일 형인 회안대군 방간에게 보낸 글이다. 이방간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인물로 태종 이방원과 마찰이 있었다. 글을 보면 태종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부터 이방간을 잘 보호하려고 했다고 한다.회안대군 방간에게 내려준 글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백형 부자가 순천으로 옮기던 날에 말을 달려서 피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경진년(1400년, 정종 2년) 봄[22]
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형을 보전하려고 하는 마음이 날로 두터웠습니다. 근래에 김여생과 중 묘봉 등이 망령되게 "백형이 난을 꾸몄다."라고 일컬었으므로 이미 조사하여 밝혀서 반좌율[23] 에 처하였고, 또 일전에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군대를 일으키자 백관들이 대궐에 나아와 백형을 제주로 내치자고 청하였는데, 내가 제주는 바다를 사이로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청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백형께서는 의혹을 품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성어제[E]
8. 기타[편집]
- 메뚜기 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24] 메뚜기를 삼켜버렸고 깜짝 놀란 신하들이 혼비백산하며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태종 본인은 멀쩡했으며 이후 메뚜기떼는 사라졌다고 한다.[25] 중국 당태종[26] 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는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둘 다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27] 가 있다.
- 쑥갓을 싫어했었다.
- 코끼리를 처음으로 길들여본 왕이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에서 바친 코끼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 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28]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전서인 이우(李禹)가 코끼리를 보고 추하게 생겼다며 대놓고 놀려댄 데다가 침까지 뱉는 바람에 화난 코끼리가 그를 밟아 죽였다는 거다. 이에 놀란 태종은 처음에는 코끼리를 살처분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선물해준 것이라 외교상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결국 전라도 순천도호부 장도(獐島)[29] 로 코끼리를 귀양보냈다. 그러나 코끼리가 섬에 귀양간 뒤부터 미역과 풀 등의 모든 먹이를 거부하고 슬프게 울기만 하여 뼈와 가죽만 남을 정도로 말라버려서 이를 불쌍하게 여긴 태종이 결국 1년 만에 귀양을 풀어주라고 했으나 먹이를 워낙 많이 먹어대는 터라 결국에 전국에 돌아가며 사육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이후 세종 집권기에서야 관찰사의 상소로 다시 섬 가운데의 목장 지역으로 가게 되고 이후에 실록 내에서 코끼리의 기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기록상으로 보면 코끼리는 조선 입장에서는 식량만 축내는 큰 애물단지였다.[30][31]
- 고려가 원나라에 그랬듯 조선 역시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들이고 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는 자들에게는 왕명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엄벌에 처하며 가산까지 전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자를 44명으로 압축했다가 5명으로 최종 결정되었는데 태종은 환궁한 후 대신들에게 대상자들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무슨 인물이냐?"라고 불평했다. 공녀 차출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혹시나 자살 시도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중종과는 정반대.
-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실록(實錄)'으로 만드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말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심지어 낙마한 것을 사관에게 비밀로 하라고 말한 그 사실까지 전부 기록했다. 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걸려 잡혔을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사관들을 몰살하거나 제도를 없애는 일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당시 사관들이 워낙 극성맞은 면이 컸을 뿐이다. 특히 민인생은 그 중에서도 특출난 인물로, 왕의 사적공간(사생활 공간)까지 침입한 정신나간 인물이라 당대 사관을 통틀어서도 매우 괴팍한 편에 속했다.
- 여말선초 시대에 왕실의 많은 인물은 초상화가 남아있다.[32] 그러나 태종 이방원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때 이미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았고 대신 외모에 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남아있는데 아버지인 태조의 용모와 서로 닮았다는 것과 태종 이방원 본인의 피셜 차남 효령대군이 자신의 외모와 닮은 꼴이라고 언급한 적이있다.[33] 한편 효령대군 초상화 기록에 의하면 양녕대군, 세종과 닮았다고 전해진다.
- <태조실록>에서 태조가 명나라 사신을 보낼 때 아들 이방원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고 묻는 것을 보아서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졌다고 추정된다.
- 자신이 직접 목숨을 빼앗은 정도전은 그 과정과 결과를 감안할 때 의외로 사후 처분은 관대하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치 숙청을 단행할 때는 역모 혐의를 적용해서 가문과 명예를 박살내고 다시는 복권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매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태종은 정도전 본인에게만 '종친 모해죄'라는 다소 어정쩡한 죄목을 붙이고 명예를 추탈했을 뿐 부인 및 자녀들은 잠시 노비로 전락했다가 몇 년 뒤에 복권시켜서 정도전 가문이 정상적으로 벼슬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1차 왕자의 난 당시 두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자살했다.[34] 이후에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연산군 대에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정승이 되기도 했다. 사림이 정문형의 정승 취임을 반대할 때에도 정도전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공적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했다. 물론, 정도전 본인은 국적이어서 선조 때 기축옥사에 휘말린 진주의 선비 최영경은 "그대가 혹 길삼봉이냐?"라는 물음에 "역적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峰)인데 어떻게 삼봉이라는 이름을 쓰겠느냐"고 답했다. 광해군 때 허균을 고발한 기자헌의 아들은 그 사유 중 하나로 정도전을 현인(賢人, 어질고 현명한 사람)이라 칭했다는 것을 들었다.
-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새어머니의 무덤을 박살냈지만 형제들과 자식들은 굉장히 아꼈다. 자기에게 반기를 든 형 이방간도 박포에게 꾀임을 당한거라고 감싸주며 유배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며 양녕대군이 온갖비행을 저지르며 패악질을 부렸어도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폐세자만 시켰다.[35]
- 《용재총화》의 저자 성현(成俔)은 태종을 "문관(文官)으로 패업(覇業)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다만 크롬웰과는 사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다른데, 철저한 금욕주의자인 크롬웰과 달리 태종은 사냥이며 여색이며 놀고 싶은 건 칼같이 챙겨서 놀았다.
9. 가족 관계[편집]
10.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태종(조선)/대중매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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