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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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남아메리카에서의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에 대한 내용은 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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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Pacific War
太平洋戦争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425px-Pacific_war_tile_picture.png
날짜
1941년 12월 7일[1] ~ 1945년 9월 2일[2]
장소
남아시아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일대
원인
중일전쟁
일본의 확장 정책에 따른 연합국의 경제 제재
일본의 대미 무력 도발
교전국
연합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필리핀 국기.svg 필리핀 자치령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 파일:중국 공산당기.png 중국 공산당 변구정부
파일:영국 국기.svg 대영제국
*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인도 제국
*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캐나다
* 파일:호주 국기.svg 호주
*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뉴질랜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네덜란드(네덜란드령 동인도)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비에트 연방(1945.8.8~)
파일:몽골 인민 공화국 국기.svg 몽골 인민 공화국(1945.8.8~)

연합국의 지원국
파일:멕시코 국기.svg 멕시코 합중국
파일:자유 프랑스 국기.svg 자유 프랑스(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친 연합국 성향의 공동체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기.svg 대한민국 임시정부



추축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png 왕징웨이 정권
파일:몽강연합자치정부 국기.svg 몽강연합자치정부
파일:태국 국기.svg 태국
파일:필리핀 제2공화국 국기.svg 필리핀 제2공화국
파일:베트남 제국 국기.svg 베트남 제국
파일:라오스 왕국 국기.svg 라오스 왕국
파일:버마국 국기.png 버마국[3]
파일:캄보디아 왕국(괴뢰국) 국기.svg 캄보디아 왕국

추축국의 지원국
파일:비시 프랑스 대통령기.svg 비시 프랑스(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파일:나치 독일 국기.png 나치 독일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1943)

친 추축국 성향의 공동체
파일:자유 인도 임시정부 국기.png 자유 인도 임시정부

지휘관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헨리 L. 스팀슨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랭크 녹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랄프 오스틴 바드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제임스 포레스탈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윌리엄 리히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조지 C. 마셜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어니스트 킹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헨리 아놀드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체스터 니미츠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윌리엄 홀시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홀랜드 스미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마크 미처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랭크 플레처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커티스 르메이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조지프 스틸웰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알레이 버크
파일:대만 국기.svg 린썬
파일:대만 국기.svg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허잉친
파일:대만 국기.svg 천청
파일:대만 국기.svg 리쭝런
파일:대만 국기.svg 쑨리런
파일:대만 국기.svg 바이충시
파일:대만 국기.svg 탕언보
파일:대만 국기.svg 쉐웨
파일:중국 공산당기.png 마오쩌둥
파일:중국 공산당기.png 펑더화이
파일:영국 국기.svg 조지 6세
파일:영국 국기.svg 윈스턴 처칠
파일:영국 국기.svg 클레멘트 애틀리
파일:영국 국기.svg 루이 마운트배튼
파일:영국 국기.svg 브루스 프레이저
파일:영국 국기.svg 제임스 서머빌
파일:호주 국기.svg 존 커틴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피터 프레이저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빌헬미나 여왕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피터르 슈르츠 헤르브란디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윌렘 셔머혼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헤인 터르 포르턴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이오시프 스탈린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로디온 말리놉스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히로히토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고노에 후미마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도조 히데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고이소 구니아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스즈키 간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스기야마 하지메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야마모토 이소로쿠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야마구치 다몬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나구모 주이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자와 지사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야마시타 도모유키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무타구치 렌야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도미나가 교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카무라 야스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우메즈 요시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나가노 오사미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시마다 시게타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오이카와 고시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타가키 세이시로
파일:만주국 국기.svg 아이신기오로 푸이
파일:몽강연합자치정부 국기.svg 데므치그돈로브
파일:자유 인도 임시정부 국기.png 찬드라 보세
파일:태국 국기.svg 라마 8세
파일:태국 국기.svg 쁠랙 피분송크람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png 왕징웨이
파일:왕징웨이 정권 국기.png 천궁보
결과
연합군의 승리
영향
일본 제국 멸망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병력 (중일전쟁 전선 포함)
10,000,000명 이상
7,800,000명
피해 규모
미국
161,000 전사, 실종
248,316명 부상
중국
3,800,000명 전사
민간인 1700만명(가량) 사망
소련
68,407명 전사 및 실종
24,425명 부상
영국
최대 240,000명 사상
82,000명 전사
오스트레일리아
51,000명 이상 사상
17,501명 전사
프랑스
20,000명 전사
필리핀 자치령
27,000명 전사
70,000명 이상 포로
네덜란드
9,400명 전사

일본 제국
2,100,000~2,500,000명 전사 및 실종
300,000~900,000명 (가량) 민간인 사망
1. 개요
1.1. "대동아 전쟁"과 명칭에 관하여
3. 전개
4. 군사력
4.1. 일본군의 한계
5. 종전
6. 인명 피해
7.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
7.1. 열악한 지역
7.2. 열악한 보급
7.3. 문화권이 다른 전장의 야만성
7.4. 이성의 증발
7.5. 일본군 스스로의 문제
8. 인용구[4]
9. 참고 동영상
10. 참고 자료
11. 관련 문서
11.1. 교리
11.2. 사건사고
11.3. 전쟁 범죄



1. 개요[편집]


태평양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선 중 하나[5]로,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태평양 일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무대로 일본 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중앙 태평양 전선과 국민혁명군이 주도한 중국 전선 및 영국군이 주도한 버마 전선,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주공을 맡은 남서태평양 전역을 포함한다.

일본 극우 세력은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를 일본이 몸소 이끌어주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놈들이 방해하니까 정의를 위해 반격했다는 것이 일본 우익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대동아 전쟁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내륙 전선까지 포함되어 있는데(근데 어차피 대부분 태평양에 인접한 국가들이다)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태평양 전선 개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기습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전멸당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거듭한 결과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후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태평양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유럽 전선과 달리 이 지역의 전투는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었으며, 전후 미 육군[6], 미 공군(당시는 미 육군 항공대)[7], 미 해군, 미 해병대는 세계 최강으로 거듭난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선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일본 제국 해군 주도하에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과 나아가 상륙전, 대규모 합동작전이 벌어졌다. 특기할 점은 문명화된 지역에서 어느정도 선을 지키며 대결했던 유럽의 서부전선과는 다르게[8] 야만인이라 칭해도 모자랄 정도의 일본군의 비이성적 행동(식인, 포로 학대, 민간인 살해)으로 인해 미군 및 호주군, 영국군은 박멸 식의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고, 2차대전 내에서도 상당히 처절했던 전장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민들이 큰 희생을 당했다.


1.1. "대동아 전쟁"과 명칭에 관하여[편집]


전후 GHQ(General Headquarters)는 '신도 지령'을 통해 당시 일본이 사용한 대동아 전쟁(大東亜戦争/たいとうあせんそう)이라는 명칭을 금지하였다. 미 군정 당시 일본 매체들은 GHQ의 엄격한 검열로 대부분 이전 전쟁이라던가 제2차 세계대전 등의 표현을 사용했지만, GHQ가 물러나고 해당 지령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는 명칭을 옹호하는 입장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게 된다. '일본이 싸운 것은 아시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흔해빠진 주장부터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전쟁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오래전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어일 뿐이며 해당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이다.'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다만 여기에서도 '일본이 동남아와 인도의 독립 운동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대동아 공영권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라는 의미도 있다.'라는 주장을 덧붙였다. 솔직히 일본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는 건 소위 말하는 대동아 공영권과 연관된 것이다. 이 외에도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사상적인 의미가 아닌 단순히 전쟁이 일어난 지역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GHQ가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폐지한 것은 단순히 위처럼 사상적인 의미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입장인 이들 중 일부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현 일본 정부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타내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라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본 식민통치를 기억하는 90대 이상의 세대들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한 경우가 많은 듯하다. 이는 중일전쟁을 일컫는 지나사변이라는 표현과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젊은 시절을 보냈을 당시에는 일제 식민당국이 그런 명칭으로 많이 선전해댔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군함행진곡' 같은 유명 군가를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한자 문화권이든 어디든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국가는 일본뿐이며, 당연하게도 한국과 중국은 대동아 전쟁이라는 표현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전쟁 목적을 미화하는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8.15 광복 직후 조선에서는 미일 전쟁(米日戰爭)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


2. 배경[편집]




3. 전개[편집]










4. 군사력[편집]


미국, 일본 제국의 군사무기 생산력 비교 (1939-1945)[9]


미합중국
일본 제국
전차자주포
88,410
2,515
야포
257,390
13,350
박격포
105,054
미공개
기관총
2,679,840
380,000
트럭
2,382,311
165,945
전투기
99,950
76,320
폭격기
97,810
15,117
수송기
23,929
2,110
항공모함[10]
141
18
전함[11]
8
2
순양함
48
9
구축함
349
63
잠수함
203
167

파일:항공모함 취역2.png

태평양 전쟁 당시 취역한 미-일 항공모함의 평형. 보시다시피 격차가 어마어마하다.

일본 제국 측의 무기 생산량 중 미국과 조금이라도 비교해볼 여지가 있는 것은 전투기로 미국 생산량의 76.36%에 달한다(잠수함은 82.27%). 하지만 폭격기와 수송기 등으로 항공기 생산 능력을 배분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사실상 전투기 하나에 올인하였음에도 미국의 76%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다. 미군 전투기는 P-51 머스탱, F4U 콜세어, F6F 헬캣, P-38 라이트닝 같은 전투기였고, 일본군은 초기부터 개량해서 운용한 제로센이다. 제로센은 초반에는 우세하였지만, 중반부터 더 좋은 성능의 미군 전술기들이 등장하면서 종이비행기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살 돌격 전술로 숫적인 우세마저 잃었다. 게다가 파일럿의 생존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야 하는 상황에 베테랑 조종사, 숙련된 조종사들이 소모되었다. 여기에 형편없는 공업력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보수, 수리뿐 아니라 전술기 양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물론 종전까지 제로센만 운용한 것은 아니라 시덴카이와 같은 신예기가 훌륭한 전과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생산량 때문에 대규모로 편성하지도 못했고[13], 대량으로 생산했어도 숙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해서 힘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 제국이 올인을 하는 분야에서조차 생산량에서 미국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으며, 질적 차이는 더더욱 컸다. 전투기의 질적 차이는 그나마 약과인데 미국이 9만대 가까이 생산한 전차 및 자주포 상당수는 M4 셔먼이지만 겨우 2,500대 생산한 일본의 전차라는 물건은 치하가 대부분이었다. 미국이 1944년부터 양산한 M26 퍼싱 중형 전차는 44-45년간 생산량이 약 2,800대로 대전 시기 일본 제국이 생산한 모든 전차, 자주포 총량보다 많았다.[14]

이러한 생산량의 격차는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더욱 커졌다. 일본 제국의 무책임한 징병 정책으로 숙련 기술공이 대부분 징집되면서 일본의 생산 능력은 떨어져만 갔고, 미국의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남방에서 들어오는 원자재도 충분치 못했으며, 그나마 1944년 이후로 끊겼다. 1945년부터는 일본 본토 공습으로 그냥 공장들이 초토화되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안전하여 전시 산업 시설이 충분히 가동될 수 있었고, 숙련공도 넉넉했고, 이들을 징병하는 뻘짓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미국이 일본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유례없는 양면전쟁을 진행 중이었기에 위의 물자가 모두 태평양에 집중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생산물자 상당수를 영국, 프랑스, 소련 등 동맹국에게 랜드리스로 퍼줬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 전차 및 자주포 생산량의 대부분은 유럽전선과 그 동맹국에게 집중되었고, 태평양에 할당된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트럭이나 야포 같은 지상장비 전반에 공통되는 문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주 전장은 바다였고, 해군 전력의 90%는 태평양에 투입되었다. 그 10%도 절대다수가 U-Boat로부터 대서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구축함이고, 주력함들은 레인저 정도를 제외하면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다.

그리고 이 장비들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석유, 석탄, 철강[15]과 같은 연료 및 원자재의 생산량, 수송 능력의 격차도 매우 컸다. 이들 원자재 대부분을 식민지와 남방 점령지에서 조달하던 일본 제국은 해상교통로가 차단되자마자 바로 산업 능력과 전투력 유지에 위기가 닥쳤다. 일본이 원유를 공급받던 유전은 팔렘방과 브루나이, 쿠칭 등에 있었는데 미국은 전쟁 후반에 브루나이, 쿠칭 유전 지대에 상륙했고, 영국은 코코스 제도에서 전투기를 띄워 계속해서 팔렘방을 두들겼다.[16] 한 마디로, 일본은 안심하고 석유를 퍼올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극심한 석유난으로 인해 전쟁 막바지에는 소나무에서 뽑아낸 송근유를 동원하여 전투기를 가동하려 했을 정도였다.

그 밖에도 당시 일본 제국은 세계 최대의 텅스텐 산출국(식민지 조선의 상동광산)이었으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텅스텐은 포탄용으로 사용되는 자원인데, 일본 제국은 텅스텐 가공 기술이 부족해서 조선의 텅스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같은 시기 동맹국 나치 독일은 고철더미를 뒤져가며 텅스텐 재활용을 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중립국에게서 수입을 해오긴 했는데, 동부전선에서 소모하는 포탄의 양이 워낙 대규모다 보니 수입 물량으로는 도저히 요구량을 맞출 수 없었다.

미국은 자원의 부족을 우수한 산업 능력으로 해결했다. 개전 초 동남아시아가 일본에게 넘어가면서 미국도 여러 가지 천연 자원들, 특히 천연 고무의 부족에 시달렸다. 이는 바퀴 달린 모든 것들의 생산에 지장을 초래했기에 개전 초에는 미국도 전 민간에서 안 쓰는 폐타이어 등을 회수하는 식으로 고무를 충당했는데, 나중에는 합성 고무를 만들어서 천연 고무를 완전히 대체시켜 버렸다. 나머지 자원인 석유, 석탄, 철 등이야 미국뿐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동맹국 캐나다에서도 쏟아지는 것들이었다. 이런 전략자원 레벨은 아니지만 DDT 역시 동남아시아에서 수출하는 살충제 원료인 제충국을 입수하지 못하게 되자 미국이 산업 능력으로 생산한 화학 살충제였다.

이런 직접적인 전투 장비(무기) 및 전략자원 문제 말고도 양국의 산업력과 기술력의 차이는 이 전쟁에 크게 작용했다. 당장 전황이 아직 불리하지 않던 개전 초인 1942년에는 알류샨 열도 전역을 위해 자국의 고양이들을 죄 공출해서 방한복 만드는 소재로 사용(#)할 정도로 일본은 전 분야에서 기술력, 산업력, 자원보유량 모두 압도적 열세였다. 고양이 한 마리 잡는다고 모피가 얼마나 나오겠는가? 홋카이도에서 곰 사냥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을 듯 또 다른 예로 불도저가 있다. 일본군이 전쟁 기간 내내 인력을 동원해 삽과 곡괭이로 활주로를 만들었다. 막대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지사. 반면 미군은 불도저를 이용하여 단시간에 활주로를 뚝딱 만들어냈다. 과달카날에서도, 알류샨 열도에서도, 전쟁 후반기 괌과 사이판,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도 말이다. 일본 제국은 전쟁 초기 노획한 불도저를 본국으로 가져간 후 그 효율성에 주목하여 고마쓰 중공업에서 카피해내긴 했으나 성능이 제대로 안 나오고, 수량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4.1. 일본군의 한계[편집]


일본군은 황실 회의록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듯 스스로도 미국에 비해 압도적인 열세임을 인지하였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전략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정확하고 신속해야 하며 모든 것이 계획에서 크게 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과 일본 해군의 대립은, 비록 당대 거의 모든 군대에서 각 군간 대립이 있었다고 하나[19], 일본군도 이에 지지 않을 정도로 육해군간 대립이 심각했다. 서로 교전까지 벌이려 한 적도 있을 정도로. 뿐만 아니라, 해군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던 연합함대조차 해군 본대와는 따로 놀았을 정도로 일본군은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일본 육군은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해 해전(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의 그 중대한 결과조차 뒤늦게 해군으로부터 통보받거나, 심지어 스스로 알아내야 했을 정도. 나중엔 육군이 자체적인 항공모함과 잠수함을 운용하는 비범함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은 영상매체에도 반영돼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도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20]이 나중에야 연합함대의 전멸을 소문으로 듣고 허탈해하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자신들이 완벽한 협력과 통제 아래 진행되어야 승기를 잡을 수 있을까말까한 어려운 작전을 눈 앞에 두고도 일본군의 육해군은 서로 손발이 안 맞다 못해 서로 방해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을 개전할 당시 중일전쟁에서 철수하던가 미국과의 양면전선을 만들던가의 선택지만이 주어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군 스스로도 미국과 일본의 국력차이는 명백하며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할 시 일본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위에 언급된 황실 회의록의 기록만 보아도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미국이 연합국과 함께 유럽에 최우선적인 역량을 쏟고 있고, 대부분의 물자가 유럽방면으로 투입된다는 사실을 주목하였으며, 미국의 필리핀 점령에 대하여 동남아시아에서 반미국정서[21]와 미국 내에서도 탈식민지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하여 미 해군의 심각한 전력공백 상태를 야기한다면 자신들이 유리한 협상위치 정도는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미 해군을 크게 약화시킨 뒤 지속적으로 미 해군의 소모시키고 태평양에서의 패전소식이 지속되면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큰 부담이 될테고, 그렇다면 미국 내 여론도 점점 태평양에서 손을 떼고 유럽쪽에 집중하자는 쪽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22] 따라서 일단 미 해군을 섬멸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력공백을 야기한 뒤, 점감요격작전으로 지속적인 미 해군의 피해를 강요하여 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부담을 받고 있는 미국을 단기간 내에 협상테이블로 끌고 나와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용인하게하거나[23] 적어도 동남아 식민지들을 유지시키는 댓가로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을 재개하게 만드려는 심산이었다.[24]

물론 결과적으로는 선전포고 전 기습공격의 문제와 당시 미국 내 만연하던 인종차별적 성격이 가미된 반일감정에 불을 붙여 결과적으로는 전쟁수행의지를 더 불태우게 만든 꼴이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도 미국은 어디까지나 참전국의 위치에서 유럽의 반인륜적인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 원정간 구원자의 입장이었는데,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갑자기 미국 영토가 공격받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인들은 극렬하게 분노하였고, 정치권 역시 만장일치에 가깝게 참전 결의안에 동의하면서 일본의 계획이었던 치명적인 공격을 통해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를 꺾는다는 목표는 첫 발부터 어긋나게 되었다.

사실 일본군이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미국 상대로 유리하게 전장을 끌고 갈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진주만의 피해도 과소평가되는 감이 있긴 해도, 이것이 장거리에서 항공모함의 함재기로만 이루어진 공습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고[25], 미국도 국채를 발행하고 렌드-리스 정책을 통해 전시 경제 체제로 돌입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양의 전력을 단기간에 보충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긁어모은 전력으로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 2개를 수장시키고 일본 해군의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때까지는 지속적으로 수세에서 작전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26]

수송선과 달리 군함은 당장 발주한다고 해도 시간이 필요했고[27]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 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작전했다면 태평양 전쟁의 판도가 다르게 돌아갈 가능성 역시 존재하였다. 더군다나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의 미 해군의 F4F 와일드캣에 대항하는 제로센도 이 당시까진 미 해군기에 비해 일장일단이 있는 기체였다. 거기다가 일본 해군은 전함세력이 건재하였던 반면 미 해군의 경우 비교적 구형의 펜실베니아급 전함 USS 펜실베니아(BB-38)만이 진주만 공격에서 살아남았다. 테네시급 전함 USS 테네시(BB-43), 콜로라도급 전함 USS 메릴랜드(BB-46) 및 네바다급 전함 USS 네바다(BB-36)는 1942년까지 수리되어야 했고, 나머지 전함은 이미 미국이 완전히 승기를 굳힌 대전 후반에나 수리를 받고 동원되거나 그대로 폐기되어야 했다. 이처럼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공세가 꺾이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이 완전히 미 해군에 의해 섬멸되기 전까지는 미 해군에 대하여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태평양 전쟁의 전개와 일본군의 실책 등을 모두 고려하니 내가 맛깔나게 싸대기를 때리면 미국이 협상하겠지?라는 일본의 방침은 그저 비웃음거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당시 그 개념 자체는 "미국이 정신을 차리고 여러 지역을 점령한 뒤 병력을 증강시키기 전에 한 번의 기습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줌으로써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인 막대한 규모의 함대를 무력화 시키고 증원되는 미국 함대를 각개격파하여, 태평양에 국한시키면 일본 해군이 미 해군에 비해 지속적으로 전력상 우위 서게 할 경우, 미국은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는, 꽤나 합리적인 수준의 대전략이었다. 당장 하와이가 먹히고 미 서부 해안까지 위협받았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갑갑한 일이었을 것이다.[28] 물론 일본군이 굳이 하와이를 점령할 필요도 없이, 미 해군이 수세에서도 분전으로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투에서 승리하여 미국 국내의 전쟁여론을 반전시키지 못하였다면 일본군이 이루려고 했던 부분이 일정부분은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거 왠지 이거랑 데자뷰가...

결국 일본군은 개전초기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웃음거리로서의 일본군이 아닌 명백한 태평양에서 미국과 연합군에 대한 현존하는 위협이었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일본군의 이미지 중 잔인성을 제외[29]하면, 멍청하고 무능하며 전근대적인 정신론만 고집하는 일본군의 이미지는 미국의 전쟁수행의지에 대한 오판과 이후 미 해군의 결사항전 등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장기전이 되면 질 것이라 예상하였던 전쟁이 장기화되어 막장이 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결국 일본군은 완벽하게 적은 오차도 용납하기 힘든 어려운 전쟁을 벌여두고는 자신들의 손발도 제대로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20세기 이후 항상 세계 최대의 패권국가의 자리를 놓은 적이 없는 국가인 상태에서, 적인 미 해군의 분전으로 원하던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하였고, 금수조치 및 일본 자체의 경제력의 한계로 인하여 그에 대처할 계획조차 없었기에 그 한계로 인하여 전쟁이 자신들의 계획에서 틀어지자마자 스스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5. 종전[편집]


일본의 항복 문서 참조.


6. 인명 피해[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6만 여명이다. 전투 행위에 의한 직접 전사자의 경우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160,000명의 병력손실을 입었고,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30] 일본으로선 참담하게도, 미국이 이 전쟁에서 잃은 총 병력 피해는 일본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잃은 병력과 비슷하다.

전투 환경 자체는 유럽에 비해 훨씬 열악했음에도, 중국 전선을 제외한 태평양 전쟁 미군 전사자 15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는 유럽 서부전선 미군 전사자 28만여 명을 포함한 연합군 사상자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적은 편이었다. 이는 유럽에 비해 태평양 전쟁이 주로 들을 빼앗는 국지전으로 진행된 것도 있고, 미군이 징검다리 작전으로 일본군의 방어 거점을 우회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승기를 잡은 1943년 이후 내내 태평양 전쟁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고립된 섬에서 방어로 일관하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모습으로 전개되었고, 유럽 전선의 개활지에서처럼 대규모 회전은 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군도 해군 함대를 제외한 전투병력 중 사상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일본군, 특히 지상군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건 필리핀 탈환전과 오키나와 전투 등 전쟁 말기의 일. 그래서 태평양 전쟁 말기를 묘사한 지도를 보면, 분명히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임에도 겉보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 말레이, 인도네시아, 중국 등에서 여전히 점령지가 상당히 넓어 보이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지역을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점령, 경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는 둘째치고, 이 시점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넓이 따위는 전략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태평양 전쟁 내내 미군이 쓰던 징검다리 작전은 꼭 필요한 이 아니면 우회해 버리고, 대신 남겨진 섬들을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이 전략이다. 그래서 개구리 뜀뛰기라 불렸다. 맥아더를 위시한 미육군은 '이건 미해군만의 창의적인 작전이 아니야!'라고 까고, 미 육군 전사에는 '개구리 뜀뛰기'가 아닌 '우회 작전'이라고 써 놨지만 어쨌든 전후에 대단히 현명한 전략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많은 요새화된 섬들을 일일이 점령하려고 했다면 손실이 엄청나게 늘어났을 것이기에... 그리고 일본군이 단단히 방어하고 있는 섬 주위의 섬을 미군이 점령하고 보급로를 끊어버리니, 일본군의 요새 작전은 자기들이 알아서 몰락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단점도 존재한다. 우회한 지점은 충분한 전력을 남겨 지속적인 타격을 해야 하는 것. 이는 대량의 물자가 소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전략의 기초마저 씹어 먹는 이 짓은 보급로가 바다였고 강력한 해군으로 제해권을 먹은 미군이니까 할 수 있었던 작전이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42년까지 누적 사상자가 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 때까지의 피해 대부분은 중일전쟁의 수렁 속에서 입은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본격적으로 쇼미더머니를 치고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입은 피해는 전사 및 실종자. 포로 사망자만 도합 150만여 명에 달했다.[31] 그 전까지는 총력전 체제하에서 어떻게든 감내할 만한 피해였다면, 본격적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그냥 병력이 투입하는 족족 녹아났다는 소리. 거기다 본토가 안전했던 미국과 달리 일본의 본토는 1945년 3월 이후 커티스 르메이가 지휘한 폭격으로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이는 안 그래도 동원 능력에서 차이나는 양국 상황을 감안하면 더더욱 크게 작용했다. 일본제국식민지 조선대만을 합쳐 1억 운운했지만,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본국의 인구는 7,000만 명. 반대로 미국의 경우 본국의 인구가 1억 3,000만 명으로 거의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났고, 질적으로도 그 차이가 엄청났다. 일본이 병력 동원 측면에서 반란의 우려 때문에, 언어문화가 다른 조선대만 출신 병사를 매우 꺼리며 받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며 태평양 전쟁의 전역이 점점 넓어져가던 1943년까지도 식민지 조선과 대만 출신의 일본군 입대 자원자 중에 실제로 선발된 인원의 비율은 채 5%가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선발한 식민지 출신 병사들도 전투병과에는 철저히 배제시키고 비전투병과 위주로 배속시켰다. 내선일체, 일선동조론 운운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키는 식으로 적극적인 동화 정책까지 펴놓고도 반란을 우려해서 입대를 불허하는 모순의 극치였던 것이다. 물론 대전 말기가 되어 일본 본토에 대한 위협이 턱 밑까지 다가오자 결국 방침을 바꿔서 조선인, 대만인들도 강제징집해 전선에 밀어넣고 의무교육제도 및 선거권 도입도 추진하는 등 적극적인 동화 정책에 나섰으나, 너무 늦어버렸고, 그 시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난다.

전쟁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나라는 역시 중국. 중국은 당시 심각한 혼란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평소에도 굶주리는 빈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까지 받아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으니 얼마나 많이 죽었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일본의 전쟁범죄와 무차별 폭격, 전쟁 기간 기아와 질병 등으로 군인 375만 명을 포함하여 최소 1,200만 명에서 최대 2,200만 명이 사망,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만, 영국령 버마에서 25만, 포르투갈티모르에서 5~7만,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유럽 전쟁의 참혹함에 묻히는 경향이 있지만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과 인명피해는 유럽의 전쟁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특히 독소전쟁을 제외하면 주로 전투 사망자가 다수인 유럽 전선과 달리, 태평양 전선은 아프리카 지역의 내전만큼이나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해 대부분이 유럽 강대국이 아닌 중국이나 동남아 식민지에서 발생한 것, 홀로코스트처럼 체계적인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게 아니라 전국시대임진왜란처럼 전근대의 전쟁처럼 점령지에서 약탈/살해/강간하고 잊어버리는 식으로 일본 자신조차 전쟁 범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 점, 그리고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태평양 전쟁만큼은 아니라도 수백만 명씩 죽고 다친 국공내전한국전쟁베트남 전쟁 등 동아시아에 새로운 전쟁이 계속 터지면서 정확한 피해 집계나 통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최근에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이 강해지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참상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 역시 국력이 강하고 볼 일이다

반면에 태평양이 차라리 양호한 모습도 있는데 그건 포로 사망률. 소련군 포로는 30~57.5% 이상이 사망했고[32] 미군 포로는 27%가 사망했다. 단, 중국군 포로가 들어가면 최대 40%까지 올라가므로 나치가 죽인 포로보다 많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일본군에게 다소 묻힌 감은 있으나, 나치 독일도 위안소 설치와 강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확인된 건수만 1942년 한 해의 수치만 1,000만에 달한다고 한다.[33]


7. 태평양 전쟁의 참혹함[편집]


미국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인간성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고, 얼마나 참혹한지를 잘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분명 물적, 인적 피해는 유럽 전선이 더 컸으나 유럽 전선은 전쟁으로써 참혹했을지언정 어느정도 말과 문화가 통하는 지역이었고, 나치가 패망하면서 보여준 참극은 소련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면서 가장 많이 경험하였지, 미군은 절멸 수용소 등 그 잔재를 보았을 뿐 직접적으로 경험한 바가 적기 때문이다.

그에 반하여 일본군은 당연하지만 언어의 장벽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고, 문화의 차이 때문에 양 측 모두 항복이라는 개념이 배제된 채 서로가 처절하게 그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만 싸웠다. 거기다가 일본이 패전에 가까워지면서 보여준 참상들을 최우선적으로 겪으면서 그 비인간성에 더 학을 떼었던 면도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참혹함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서유럽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는 주로 승리의 영광을 다루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 반면 태평양 전선의 미군을 다루는 매체에서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다루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 퍼시픽>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아버지의 깃발>을 비교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7.1. 열악한 지역[편집]


개발도 잘 되어 있고 평탄한 지역이 많았고 문화권도 비슷했던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매우 덥고 습한 기후에 상상을 뛰어넘는 빡빡한 정글과 험준한 산악 등 '문명'과는 거리가 먼 걸 넘어 아예 천만 광년은 떨어진 곳들이었다. 후일 미군이 전쟁을 치른 지역 중 가장 낙후된 아프가니스탄조차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인 서구 문명에서 산 사람이 거주하기 힘든 격오지에서 전투했다는 이야기다. 유럽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을 몰아내고 도시들을 해방시키면 현지 주민들의 호의를 받든 거래를 하든 해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벌이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지만, 태평양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병사들에게 돌아오는 건 미군과 일본군 할 것 없이 진흙과 말라리아, 그리고 만연한 전염병 뿐이었다.

그리고 현지 장기 거주자나 원주민이 아닌 이상 인간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극한의 기후에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당장 시간당 100mm 정도의 폭우(스콜)는 일상에 가까우며, 어딜 가나 축축한 진흙탕, 늪, 뻘, 그리고 모기, 거머리 등의 독충 뿐. 더 퍼시픽에서는 이런 극한의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권총 자살해 버리는 "장교"가 나오며,[34] 실제로도 유럽에 비해 대단히 높은 비율로 전투 피로증 환자가 속출하였다.


7.2. 열악한 보급[편집]


게다가 서유럽과 달리 태평양의 섬들은 보급도 어려워 장병들의 생활마저 매우 열악하였다. 아무리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아들에게 본토에서 구운 초콜릿 케이크까지 수송해주는 미군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유럽에서 자체 보급도 어느정도 되고 있었던 지라 미군의 여유로운 보급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럽이었다면 점령한 도시에서, 하다못해 중동이라 해도 곳곳에 소도시와 마을이 있으니 정 안되면 징발이라도 할 수 있다. 대테러 전쟁 당시 아프간/이라크에서 미군도 본격 주둔 이전까지는 보급이 고속 진군하는 부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현지인 마을에서 이렇게 징발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35]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빵 한 조각, 휴지 한 장조차 전부 보급선에만 의지해야했던 전장이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양군이 모두 극도로 열악한 보급 상황에서 싸워야 했던 대표적인 전장. 아마존 오지나 다름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외딴 섬에 보급품을 생산할 수 있는 곳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원주민을 약탈했다가는 협조를 받을 수 없었기에[36] 결국 모든 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랬기 때문에 태평양 전구에서 미군이 체험한 보급 난이도는 아주 헬게이트였다.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장기간 지속적인 보급 계획 수립이 필수적이었고, 보급 부대의 규모도 유럽 전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방대하고 컸으며, 보통의 문명 사회에서 쉽게 징발 가능했을 가장 기초적인 소모품 물자도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조달한 물품들도 있었지만 큰 비중을 차지하진 못했다.

게다가 1942~1943년 등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에 비해 지원 규모상으로 크게 나을 게 없었고, 미 해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꺾기까지는 항상 수세에 있었으므로 일본 해군에 의해 수송선단의 보급계획에는 항상 차질이 발생했다. 특히 과달카날의 해병대는 외부 화력 지원까지도 일본군 우세였으니, 결국 감투 정신으로 싸워야 했다. 그리고 싸움 상대인 일본군, 협력 상대인 원주민은 문화권도 완전히 달랐다. 이렇다보니 전쟁 초에는 동남아 일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쪽 섬들이 주요 전장이라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원을 받았는데도 유럽과는 비교가 힘들정도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렇게 미군 장병들도 보급품 부족으로 심한 고생을 하고, 때때로는 진짜 정신력에 의존해야 했다. 과달카날 전투 초기 미 해병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비행장을 짓고 일본군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등 정신력으로 버텼다. 애초에 육군보다 보급 순위도 밀려서 개전 초에는 사용하는 제식 소총부터 일본군 99식 제식 소총과 별로 다를 거 없는 스프링필드였고, 보급 사정이 나빠지면 식량 보급이 안 되어서 일본군이 패주할 때 남기고 간 쌀과 간장 같은 생소한 식재료만 가지고 상당 기간 배식을 해야했어서 타군에 비해 굶주림이 일상일 지경이었다. 그렇다보니 일부 해병대 병사들이 기회가 되면 육군 보급품을 훔치는 경우가 상당 부분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은 기록도 존재할 지경이었다. [37]

전쟁 중반 이후 보급선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일본군의 경우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미군이 손실을 줄이기 위해 개구리 뜀뛰기 작전에 의해 건너뛰어진 섬에 남겨진 본토로부터의 보급이 끊긴 일본군들은 실제로 식량확보를 위해 둔전, 사냥낚시가 중요한 일과였다. 그나마 라바울(Rabaul)처럼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한 곳도 있긴 있었다.[38] 하지만 라바울 같은 사례는 극히 드물며, 부겐빌(Bougainville) 섬처럼[39] 전 병력의 1/3 이상이 굶어 죽어버린 곳도 존재하였다.


7.3. 문화권이 다른 전장의 야만성[편집]


당시 유럽 서부전선의 나치 독일군은 인종주의에 찌들었지만, 일단 영국인과 미국인[40]에 대하여는 그저 전쟁에서 적으로 만난 자들일 뿐, 유태계 등 자신들이 열등 인종으로 분류한 집단들과 달리 절멸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화권에 어느정도 공통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화가 어느정도 통하다 보니 비인간적인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애를 상기시킬 수 있는 극적인 이벤트 등이 벌어지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가 완전히 달라 일선의 병사들간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했던 태평양 전장에서는 서로 야만성의 극치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41]

또한 헤이그 조약을 통한 교전권의 개념과 제네바 조약을 통한 포로, 비전투원 및 민간인의 지위에 대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서양문화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일본군의 문화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다. 패색이 확실하면 발악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교전수칙을 따라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도록 세뇌받아왔고 대화도 통하지 않으니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항복하는 척하고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들었다.[42]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지만,[43] 일본군에게 잡히면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개전 초기에는 미군에 포로로 잡히면 자신들의 가족이 본토에서 불명예자의 가족으로 멸시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전쟁 후기에는 미군도 일본군 못지 않은 잔혹성을 보이면서[44] 그러한 귀축영미의 이미지가 일본군의 머리속에 굳어져 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온갖 참상이 발생하였는데, 일본군은 정식 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해낸다던가[45] 아니면 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극한 상황에서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그 잔인성은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다. 오죽하면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위는 동시대의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연합국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언어나 문화가 다르니 민간인들 역시 이를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로 받아들였다.[46] 그렇기에 대전 후기에 이들을 집단 자살하게 만들거나, 패배하여 똑같은 처우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식으로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일본인들[47]과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은 인간성을 유린당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한 피해도 컸다.

더군다나 점령군인 일본군은 자신들의 점령지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아[48][49] 많은 숫자의 원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착취당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나이 90 이상의 원주민들은 JAPS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을 하기 바쁠 정도로 악화되었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극히 드물다. 오죽하면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국, 영국, 호주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으로 도왔다.[50][51]


7.4. 이성의 증발[편집]


위와 같은 전장이다 보니 장병들에게 '이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도 우생학과 왜곡된 무사도정신이 군대에 퍼져있고 미군에 대한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포로로 잡히느니 미군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동귀어진하려는 집단이었고,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리가 없었던 미군들은 그런 일본군의 행태에 아연실색하여 일본군에 대해 더더욱 적개심을 키우며 잔혹해져갔다. 양 전장에서 서로를 같은 인간이 아닌 자신보다 열등한 무언가로 보고, 전술 및 전략적 목표를 위해 공방전을 벌이는 것이 아닌 섬 하나 내부의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위해 서로 싸우다 보니 태평양 전역에서는 서유럽 전선에 비해 이성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특유의 잔혹성으로 인하여 부비트랩과 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약 위반을 매우 자주 저지르는 집단이었고, 비록 전쟁포로 생환율은 유럽전선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 생활에 있어서는 훨씬 열악하다보니 미군 역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것은 상정 외로 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여기에 미군 소대장, 중대장 등 지휘관들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휘하 부대에 항복하거나 잡히지 말라고 말하고 나서 전투를 시작했는데, 이 명령을 내린 배경에는 쪽바리같은 인간 이하에게 잡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미군들의 전투의지를 더 고양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일본군 역시 사정이 낫지 않아서 기존에 존재하던 사이비 무사도에 따라 포로로 잡히는걸 수치로 여긴다던가, 일본군 대본영의 프로파간다로 인하여 자신들이 무너지면 본토에 있는 자신들의 가족이 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고 여자는 강간당할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일반 병사들의 입장에서 미군은 말도 통하지 않고, 비록 일본군 스스로에 의해 조장되었다고는 하나 특유의 호전성과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이는 미 해병대를 보며 마찬가지로 귀축영미에게 잡히면 뼈도 못 추릴 것이다라는 공포심 하에 더더욱 잔혹하게 죽을때까지 싸웠다.

그러다보니 태평양 전쟁에서는 고대의 전쟁터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마경이 펼쳐졌다. 일본군은 포로를 잡아먹거나, 산 채로 해부하거나, 생체실험과 같은 행위까지 저지르고, 미군 포로에 대해 처참한 대우를 하면서 바탄 죽음의 행진등 상당수의 전쟁포로들이 끔찍하게 사망하였다. 거기다가 종종 기록으로도 발견되지만 일본군 장교들이 미군 포로들에 대한 학대 등은 그 참상이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상당수의 미군 포로들이 아사하거나 아사하기 직전에 섬을 탈환한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등 태평양 전역의 부족한 보급 문제 때문에 일본군의 포로학대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졌다. 거기다가 민간인을 부비트랩으로 사용하고, 미군의 의무병조차 사살하거나 부상병과 자폭시키는 등 일본군의 비이성적인 행보는 태평양 전쟁이 진행될수록 심화되기만 하였다.

미군 역시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성을 상실하자 일본군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이 일선의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에게 만연하였다. 이들의 주도하에 포로 학살이 잦았으며 이에 대한 기록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전쟁 후반부에는 미 해병대와 미 육군의 야전 지휘부에서 포로는 필요 없다를 명령하며 일본군에 대한 박멸을 지시한 기록조차 남아있고, 이에 대해 미군 상층부가 제지시키는 노력을 기울어야 했을 정도로 빈번했던지라[52] 태평양 전쟁은 그야말로 서로를 죽이기만 위한 전쟁으로써 아비규환이었다. 거기다가 일본군을 같은 인간이 아닌 인간 이하로 보고 있던 일선 병사들에 의해 일본군 시신의 두개골을 떼어내거나, 살아있는 일본군 포로의 신체 부위를 절단하여 기념품으로 챙기기도 하였다.[53]그리고 이러한 무한한 적개심이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쳤고, 그 결과 도쿄 대공습 같은 통상적인 전쟁이라면 상상도 못 할 대규모 공습을 가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이들이 속출하고[54] 결국 파일럿들이나 폭격병들이 공감 능력 결여 증세를 호소하며 정신병으로까지 이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7.5. 일본군 스스로의 문제[편집]


일본군 역시 전쟁 초기의 성공에 의한 오만과 군국주의 교육 하에 이루어진 인종주의 교육관에 의해 야만성이 높은 군대였다. 특히 식민지의 주민으로써 2등 시민 취급이라도 하였던 조선인에 비해 중일전쟁 점령지의 주적인 중국인에 대한 대우는 더욱 더 처참하여 난징 대학살 및 참수시합 등 그야말로 인면수심의 태도를 보여주었으며, 패전색이 짙어질수록 이들의 야만성의 정도는 광기와 더불어 더더욱 심각해져갔다.

심지어 전쟁 후반부의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 중에는, 당시 일본의 우방국 시민도 있었다. 1945년 필리핀 탈환전 당시 마닐라의 일본군은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에 쳐들어가서 민간인 50여명을 학살하고 건물에 방화했다. 이 사건 때문에 1945년 4월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버렸다. 더군다나 나치가 수용소에서 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점령지인 하얼빈에서 731 부대를 운영하면서 중국인과 러시아인 임신부를 상대로 혹은 갓난 아기와 애 엄마를 같이 생체 실험을 하는 인면수심을 보였다.

또한 일본군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까지도 이를 옹호하거나 부정하려는 극우세력이 존재하는 것도 문제다.[55][56]

8. 인용구[57][편집]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쇼와 덴노


"1억의 일본인들[58]

은 이제 조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희생해야 한다. 세계의 평화라는 제국의 목적을 위해 이러한 우국충절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미국도 영국두렵지 않다." 두렵지 않다고 했지 지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도조 히데키, 진주만 공습 후 미국,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 중


"지금은 새벽이다. 밤 3시다. 오전 3시다. 아아! 죽고 싶지 않다. 외롭다. 왜 이리 외로운 걸까."

- 하야시 타다오, 교토제국대학 재학 중 카미카제 징집


"우리의 근성은 대단하고, 적의 정신력은 나약하므로, 우리는 백전백승이다."[59]

츠지 마사노부


"천황 폐하 만세!"

히로타 고키를 제외한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 사형당하기 직전


"드디어 우리 황국백인놈들지배하겠구나!"

히라누마 기이치로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달려 있다."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제독,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미 결정것 같은데?"

노부히토


"만약 미국과 전쟁을 하라고 하신다면 처음 1년에서 1년 반 정도는 승산(남방작전, 싱가포르 전투)이 있겠습니다만, 전쟁이 2~3년 이상으로 길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60]

"

야마모토 이소로쿠[61]

[62]


"대일본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그 근거! 그것이 듣고 싶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기름 때문에 전쟁하는 병신들도 있냐?"'

이시와라 간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만 한다. 병기가 없어서, 탄환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63]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다."

무타구치 렌야


"나라가 초토화되더라도 만주국을 승인한다."

― 우치다 고사이 외무대신


"이제 일본은 망할 것이다. 너희들은 다다미 위에서 죽지 못한다. 그 각오를 해둬라."

사이온지 긴모치


"폐하는 도조에게 속으셨다. 만주사변 중 폐하는 군부에 반대 의향을 표명하셨다. 전쟁은 덴노도 모르는 사이에 또 덴노의 허가도 없이 시작되었다."[64]

- 루스 베네딕트(1887 ~ 1948), 저서 국화와 칼 제2장 전쟁 중의 일본인 中에서


"쉬운 길을 가십시오. 동생어려운 길가겠습니다."

왕징웨이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65]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 총통)


"3천년동안 한번도 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 번 되었군."[66]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


"우리는 3,000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영국⋅미국⋅네덜란드⋅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및 기타 제국(諸國)의 대일(對日) 선전 포고를 삼가 축하한다. 이것은 일본을 쳐부수고 동아시아를 재창조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대일 선전포고 서문.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진주만 공습 직후 의회에서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하며 한 연설,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 서두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어니스트 킹이 부관에게서 진주만 공습 보고를 듣고 한 말


"다시 돌아오겠다."

더글러스 맥아더


"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라는 언어는 이제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윌리엄 홀시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초토화된 해군 기지를 보고.[67]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조지고! 쪽바리들을 더 죽이는 겁니다!"

윌리엄 홀시가 과달카날 시찰에서 앞으로의 전략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46년에는 오지에서 벗어나기, 47년에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48년에는 골든 게이트로."[68]

― 태평양 전쟁 당시 미 해병대슬로건


''일본 놈들은 정말 정이 안 가는 놈들이야... 정말 나치와 비교될 만하군. 스테드포드 중위, 그렇지 않나?"

― 제이미 스터딜슨 (필리핀 미군정의 소령)


"태양에서 나오는 힘이, 이제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옥좌가 있는 땅 일본 전체를 일식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해리 트루먼


"나와 함께 있었던 해병대원들은 18~22살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나는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 것임을."

― 존 포드.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를 촬영하는 중 미드웨이 섬에서.


"내 진정한 바람이자 모든 인류의 소망은 이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과거의 피와 대학살을 벗어나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의 항복 조인식 후 미주리호 갑판에서의 연설


9. 참고 동영상[편집]




(태평양 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NHK 라디오 임시뉴스 방송)

10. 참고 자료[편집]


태평양 전쟁의 지상/해상/공중전의 공간전사를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 미국 등 외국의 전문 웹문서/서적을 번역하여[69] 전투/전역 별로 연재한다.
각 전투에서 의미 있는 움직임이라면 소대분대, 나아가 일개 기관총, 박격포반 단위까지(!) 서술하는 디테일이 돋보인다. 더욱이 함대 구성/군수 보급/야전건설/민사전 등 군사 행정과 전투를 전후한 배경 설명(장군들의 정치적 갈등 등)까지 대단히 꼼꼼하게 서술되어 있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서는[70] 2009년경부터 꾸준히(주 2~3회) 이런 연재를 해온 터라 나이도 적지 않고 내공이 풍부한 밀덕 단골 이웃들이 달아대는 부연설명 등 많은 댓글들도 볼 거리. 한국어 웹문서 중 이 정도 퀄리티의 태평양 전쟁사 포스팅은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옛 글이라도 의문이나 오류를 지적하면 바로바로 수정하거나 대답을 해준다.

미 해군과 해병대 공식간행물을 중심으로 사진, 전문, 지도 등 많은 1차 사료를 찾아볼 수 있다. 홀랜드 스미스 해병중장[71]의 자서전 "산호와 장성(Coral and Brass)" 등 일부 단행본도 전재되어 있다. 태평양 전쟁사 밀덕이라면 꼭 둘러봐야 할 곳.

노나카 이쿠지로 외 공저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원제: 《실패의 본질 - 일본군의 조직론적 연구》)
-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육·해군이 벌였던 미드웨이·과달카날 등 6개 작전을 분석하면서 일본군이 조직론적 관점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서술
이노세 나오키 저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미국과 총력전에 나설 때 그 예상 경과와 결과를 연구한 총력전 연구소의 시뮬레이션 과정과 실제 일본 정책 결정자들의 전쟁 결정 과정을 서술
야마모토 시치헤이 저 《어느 하급 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
- 일본 문화론의 대가로 알려진 야마모토 시치헤이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포병부대의 초급장교로 참전했던 경험을 기록
조너선 파셜, 앤서니 털리 저 《미드웨이 해전》
- 원제 "Shattered Sword: The untold story of the battle of Midway". 미드웨이 해전의 전개 과정을 기술하면서 해전에 대해 그 동안 잘못 알려졌던 신화들을 하나하나 논파. 해군의 전쟁인 태평양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의 결전인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설.
우가키 마토메 저 <전초록>
- 'Fading Victory: The Diary of Admiral Matome Ugaki, 1941-1945'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다. 한동안 절판이었으나, 2008년에 다시 출간되었다.
해군반성회
- 전후에 군령부와 연합함대의 의사결정에 참여한 상급 지휘관과 함장들이 비공개 학술대회를 열었고, 녹취 기록으로 남겼다. 이름답게 각자가 이기적인 판단을 한 부분에 대해서 죽은 이와 살아남아 참석한 이들에게 사과하는 내용이 많다. 당사자들의 증언이어서 해군선옥론의 느낌이 나는 것은 사실이나, 전술/전략 면에서 계파간의 접근 방식이 어땠는지를 확인하는데는 문제가 없다.


11. 관련 문서[편집]




11.1. 교리[편집]



11.2. 사건사고[편집]




11.3. 전쟁 범죄[편집]


[1] 진주만 공습이 발생한 날, 미국은 다음 날인 12월 8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이른바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을 통해 대일 선전포고를 행했다.[2] 시게미츠 마모루 대사가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서에 조인한 날. 일본 제국의 공식적 종전 선언은 1945년 8월 15일의 쇼와 천황옥음방송이다.[3]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본 제국에 협력했으나, 이후 일본 제국군의 잔혹한 통치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영국에 협력하여 일본 제국군을 몰아낸다. 당시 일본 제국이 필요 이상으로(?) 잔혹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웅산 열사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이 활약했으며, 이 독립군 소속 인물들은 현대 미얀마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4] 인지도가 높은 인용구만 서술한다.[5] 보통 2차세계대전하면 서양사람들은 독일과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이거 어쩔수 없는게 세계가 백인위주의 사회가 보니.. 2차세계대전하면 독일이 나오지 일본은 잘 나오지 않는다. 보통 2차세계대전중 일본과의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고 따로 부르는경우가 많다. 물론 2차세계대전이라고 검색해도 일본은 나오지만 서양인들 머리속에서의 일본은 거리감이 있다.[6] 미국 육군 또한 태평양 전선의 주역이고 이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십분 활용했다. 상륙전이 지상군의 메인 전장 양상이었고 전쟁 특수로 미 해병대가 팽창했지만, 6개 사단 규모에 불과했고 대부분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 활동했다. 이에 반해 미 육군은 태평양 전선에 20개 사단을 파병했고, 이들은 주로 맥아더 장군의 구역에서 일선 병력으로 활동했으나,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 해병대의 가용병력이 부족할 때 대타로 흔히 활용되었고, 오키나와 전투 시점에선 육군 4개 사단(제7, 27, 77, 96 보병사단), 해병대 3개 사단(제1, 2, 6 해병사단)의 투입으로 육군이 주력이 된다. 태평양 전선의 육군과 해병대는 서로의 장비를 적극적으로 운용하면서, 전쟁 후반엔 육군과 해병대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서로가 닮아간다.[7] 1947.9.18 미 의회의 'National Security Act of 1947 법안'에 따라 미 육군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되기 전까지는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United States Army Air Force)였다.[8] 물론 동부전선은 문명인끼리의 전쟁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다. 독일군소련군이 서로 주고받은 전쟁범죄만 봐도 태평양 전선과 별다를바 없다.[9] 출처 : John Ellis, World War II: A Statistical Survey (New York: Facts on File, 1993), 277-80, 링크[10] 호위 항공모함 포함이다. 그러나 호위항모를 제외해도 정규 항공모함은 에식스급 항공모함 20척이 기본적으로 넘어간다. 일본군은 여객선으로 건조 중이던 선박항모로 개조한 것도 있다. 저 두 선박은 애초에 항공모함으로 개조할 것을 전제로 건조되었다.[11] 이 수치에는 진주만 공습 때 파괴되었다가 수리해 복귀시킨 전함들은 제외되어 있다.[12] 제로센은 속도와 선회력으로는 미군 전투기를 압도했지만, 미군 전투기에 비해 무전 시설이 조악했다. 때문에 미군은 우수한 무전 시설의 장점을 살려 제로센 한 대에 미군 전투기를 두세대씩 붙여서 무전으로 끊임없이 서로 약점을 보완해주며 다구리치게 만드는 전술을 채택, 제로센을 하나씩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13] 당시 일본은 전투기 쪽의 생산 속도와 생산 가능량이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우세했다. 전투기 쪽에 올인하고 또 많이 써먹기도 했던 만큼 초기에는 영국과 소련조차도 능가했으며, 나치 독일이나 이탈리아보다도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세계관 최강자 미국이었다. 미국의 생산속도와 생산량에 비하면 일본의 그것은 새 발의 피, 아니 그 피의 적혈구 하나만도 못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미국에게 끊임없이 전투기를 상실하고[12]전쟁 후반부에 들어서자 본토공습으로 공장시설까지 상실하면서 격차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만다.[14] 사실 저 숫자도 독일군을 얕본 미군 수뇌부에 의해 퍼싱의 본격 양산이 늦어져서 그런 거다.[15] 워낙에 철이 모자라서 경북선 등 한반도에서 장사 안 되는 철도를 죄다 뜯어가버리고, 통영대전고속도 모체가 된 대전-삼천포 철도 노선 공사를 중단시키는 등의 막장스런 모습도 보여주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일본 본토에서도 절이란 절은 다 돌아다니며 종들을 떼가고 있질 않나, 동전따위 만드는데 쓸 금속은 없다며 1944년에는 엔보다 아래 단위인 5전, 10전을 주화가 아닌 지폐로 발행했다. 전쟁을 벌이면서 무기 등을 제작하기 위한 철이 모자라다는 것 자체가 암담한 전황을 나타낸다.[16] 팔렘방 방공전에는 한국 공군 건군의 주역 중 한 명인 김정렬이 일본군 소속으로 참여하기도 했다.[17] 여기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배경에서도 드러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도 언급된다.[18] 해군의 에리히 레더 제독이 물러날 때 히틀러에게 '총통께 부탁드리는데, 해군의 적인 괴링에게서 해군과 제 후임자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었고, 카를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실화를 밝히면서 타 군의 실패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를 히틀러에게 서둘러 한다며 괴링을 비판했다.[19] 독일도 비슷했던지 히틀러의 수기에도 나온다. 나치 독일도 국방군(Wehrmacht)과 SS 간의 갈등도 엄청나게 심각했고[17], 국방군 내에서도 육해공군간의 대립이 있었으며[18],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이나 공군 야전사단 같은 편제가 존재하는 등 엉망인 면도 있었다. 연합국도 이러한 면은 있는데, 미 해군과 미 육군항공대가 폭격의 우선 순위 문제로 갈등했고, 영국 공군은 영국 해군과 해군 항공대의 처우를 두고 갈등한 것처럼 타군과 경쟁과 자존심 싸움이 치열했던데다가, 미군의 경우 육군항공대와 해군항공대가 서로 간에 어깃장을 놓는 바람에 지원이 늦어져 애꿎은 해병대만 피를 보는 바람에 양측에 해병대가 이를 간적도 있었다.[20] 배우 와타나베 켄이 연기하였다.[21] 태국도 추축국에 가담한 근본적인 원인은 독재자인 쁠랙 피분송크람의 의지이지만, 송크람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연합국들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점령등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22] 결과적으로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이 전쟁의지를 불태움으로써 오판이었으나, 진주만 이후에도 미국이 확실하게 공세로 돌아서는 미드웨이 해전까지 미국 내 태평양 전쟁에 대한 여론은 지속적으로 나빠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제대로된 선전포고 등이 이루어졌다면 반드시 오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미국은 다시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태평양 전쟁에서 구르는 해병대와 함께 찍은 다큐멘터리를 무료로 상영해야할 정도로 전쟁수행의지가 떨어져가고 있었다.[23] 일본은 당시 석유와 고무 등 천연자원이 지나치게 부족했다.[24] 1941년 11월 5일자 황실 회의록에서도 휴전하면서 전쟁 이전 수준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많은 석유 수출을 보장받을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는 부분이 있다.[25] 미군 전함 전력을 일정기간 동안 공백으로 만들어버렸다. 살아남은 배들 대부분도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26] 이후 엔터프라이즈가 대활약을 하면서 태평양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 전설의 배가 된 화려한 이면에는, 진주만 공습 이후 여러 격전을 거치며 손상을 입은 미국의 항공모함들이 수리를 위해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믿을 만한 항공모함이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서 얼마 되질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그 정도로 43년까지는 미군도 고군분투를 거듭한 전역이다.[27] 일주일에 한 척씩 진수했다고 하여 무슨 배 한 척 만드는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주문 수량이 워낙 많아서 거의 동시에 건조되기 시작한 것이 일주일에 한 척씩 진수되었다 보는 것이 옳다. 리버티선의 경우도 용골을 올리고 블록들을 조립하는데 4일이 걸린 것이지, 블록들의 생산에 걸리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당연히 일주일 내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 말이다.[28] 물론 당시 일본이 하와이를 점령할 능력이 있었냐면 사실 그럴 능력이 없었다(...) 당시 요새화된 하와이를 점령하기에 일본 해군의 보급선 유지능력도 안 되었고 일본 육군의 상륙능력 역시 모자랐다. 그렇기에 애초에 하와이 침공을 주장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과 야마구치 다몬 소장의 주장은 황실 회의에서도 묵살당하였고, 그럴 만한 구체적인 계획도 안 세워졌다.[29] 일본군은 개전초부터 나치독일 저리가라할 정도로 잔인한 군대였다. 애시당초 나치와 마찬가지로 우생학을 믿던 인간들이라 다른 민족은 노예로서 지배하거나 절멸시켜야할 동물로 밖에 여기지 않고 있었다.[30] 참고로 더 많은 포로가 잡혔던 유럽전선에서 미군 포로 사망자는 1,124명에 불과하다. 이는 독일이 서방측 포로에 한정해서 국제법을 준수하는 합당한 포로 대우를 해준 덕분. 사망자 대부분은 부상 악화, 질병, 아군 폭격에 의한 것으로 전쟁범죄에 의한 사망은 극히 드물다. 대신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를 인간 취급도 안했다.[31] 대부분의 피해는 미군과 싸우다 발생한 것. 민간인 사망, 실종자는 50만여 명 정도.[32] 70%까지 잡는 견해도 소수 있으나 러시아측 학자들도 대부분 57% 이하로 본다. 70%까지 잡는 경우는 포로로 잡혔던 사람 중 독일의 항복 이후 소련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죽은 사람도 상당수가 포함되어서 나온 수치라는 이야기도 있다. 소련군이 독일에 항복한 포로들을 포로가 아닌 반역자로 취급해서 자국 범죄자나 형벌부대 처분 대상자보다도 더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 물론 그것을 감안해도 일본보다 높은 수치인 건 맞다.[33] 참고로 이건 독일측 보고서에서 나온 수치인데, 이런 범죄 행위를 가해자가 고의로 부풀릴 가능성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실제로도 저 정도가 벌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범죄로 인식을 했다면 말이지만[34] 르벡이라는 퀘벡 출신의 캐내디언 장교다. 코만도 출신으로 디에프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던 엘리트 장교로 묘사되는데, 그럼에도 환경의 가혹함을 견디지 못해 샤워 중에 권총으로 머리를 쏴 버린다. 그리고 이 모습을 상관에게 반항한 벌로 설거지를 하고 있던 로버트 레키가 보게 된다. 다만, 이건 픽션이고 실제로는 부상을 입었고, 펠릴레우에서 교전 중 전사했다.[35] 물론 강제로 징발한 게 아니라 당연히 돈을 주고 구입했다. 물자 가져가는 형식이 징발이었다는 얘기다.[36] 이런 동네에서 원주민과 척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일본군이 우생학에 빠져 이러한 관계를 등한시했기에 미군이 적당한 원조+일본군으로부터 보호만 약속해도 원주민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고, 덕분에 미 육군과 해병대는 일본 육군에 비해 정보력에서 항상 우위에 설 수 있었다.[37] 실제로 더 퍼시픽에서 이러한 기록들을 기반으로 과달카날 섬에 미 육군이 상륙하자 미 해병대 병사와 간부들이 미 육군의 보급품을 약탈하는 장면이 나온다.[38] 개구리 뜀뛰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일본의 최정예 비행대였던 '타이난 항공대'도 이곳에 본거지를 오래 두었으며, 최대 20만 명 이상의 육/해군 정예 병력을 배치했을 정도로 일본군의 남태평양 최대 전략거점이었다. 병력이 워낙 많아 우회를 결정했으며, 종전 후 이는 대단히 현명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39] 이 섬은 호주군이 섬의 중앙 부분만 차지한 채 대치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40] 영국계로 출발하고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았던 만큼, 독일처럼 순수하지는 않지만 앵글로 색슨 역시 고대 게르만족의 한 일파로서 우수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41] 유럽 전선의 아비규환은 서유럽 전선이 아닌 동유럽 전선에서 벌어졌다. 냉전 당시 자유진영의 적국이었던 소련이 겪었던 참상에 대해서는 자유진영이 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은폐했다. 그러다가 소련이 무너지고 과거 소련측 기록들이 기밀해제되면서 그제서야 동유럽 전선도 태평양 전선 못지 않은 아비규환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42] 일본군 군부의 입장에서는 이래서 야스쿠니 신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더 자세히는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에 가서 영령이 되지만, 항복하면 그는 죽고 가족은 강간당한다는 식으로 세뇌를 지속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일본군 군가중 하나인 '동기의 벚꽃(同期の桜: 도키노 사쿠라)'만 봐도 알 수 있다.[43] 본국에서 적국의 아군 포로들을 위해 식품이나 의약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야사에 따르면 모노폴리 보드게임(...)에 탈출장비를 숨겨 보내서 포로를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해 포로들에게도 보드게임과 의약품 정도 제공은 해 줬다는 소리다.[44] 물론 일본군의 잔혹성에 격분해 더 잔혹해진 면이 크지만, 상술했듯 열악하고 처참한 환경의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니 그 스트레스는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일본군과 미군 모두 마찬가지로, 양측 모두 더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장소는 더 가혹한 환경의 전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45] 독일도 말메디 학살이나 유태인들을 이동시키면서 낙오하는 자들을 굶어죽이거나 쏴죽이는 등 참상이 벌어졌다.[46] 더군다나 미 해병대 특유의 호전성으로 인한 시체 훼손 등에 대한 자료는 그런 프로파간다를 가속시키기에 더할나위 없는 재료였을 것이다.[47] 위안부는 식민지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자국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나마 식민지 출신에 비해 처우가 조금 나은 정도였다.[48] 이는 일본이 대규모 식민지를 장기간 경영한 경험이 없어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몇백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대학살 수준의 탄압만 보고 자란 덕분에 대부분의 식민지에 무작정 그렇게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 식민지배의 과정도 참 어이없게 시작부터 총칼 앞세워 무작정 찍어 누르다가(처음 식민지를 만들었을 때는 유화정책을 펼쳐서 식민지배에 굴종하게 만드는 것이 공식이다) 어마어마한 반발을 겪은 뒤에는 또 완전히 다 풀어줘서(이간질이나 친일파 양성이 목표였고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운동 세력의 제압도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할 환경을 조성해줘 버리는(...) 바보같은 수순을 밟았다. 덕분에 15년 가까이 민족말살통치를 시행하는데도 조선을 일본화하는 데에 실패했다.[49] 식민지배에서 식민지인들이 대규모로 저항 활동을 한번 벌이면 최소한 백 년은 잡고 제압해야 한다. 저항활동을 총칼로 때려잡고 나서도, 저항에 참여했던 식민지인들이 "우리 그때 대단했지" 식으로 생각하면서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50] 예를 들어서 과달카날에서 해안 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 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Jacob Charles Vouza)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관보 링크[51]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52] Niall Ferguson, "Prisoner Taking and Prisoner Killing in the Age of Total War: Towards a Political Economy of Military Defeat", War in History, 2004, 11 (2): p.150[53] 심지어 이걸 몰래 집까지 갖고 와 창고 따위에 처박아놓기도 했다. 이는 전후에 참전용사가 사망한 이후 유산 정리를 하던 자손들이 우연히 이 '기념품'을 발견하고선 기절초풍해서 경찰을 부르는 촌극을 유발하기도 했다.[54] 전쟁의 승패 혹은 작전의 성공과는 별개로, 아무튼 대규모 민간인을 상대로 대학살극을 자행했으니 정상인이라면 양심의 가책 정도는 느끼며 그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실제로 일부 지휘관이나 폭격병들은 PTSD에 시달리기도 했다.[55] 일본 극우세력 중에는 당시의 일본의 위세에 취해 이 전쟁을 '대동아 전쟁', '백인의 압제, 착취로부터 아시아 해방을 위해 일본이 총대를 멘 정의로운 성전'이라 부르며 온갖 미화를 일삼으며 현재까지도 어그로를 끌고 있다. 한 대 남은 가이텐야스쿠니 신사에 전시 중. 그리고, 이 때의 전범들을 일본에서는 영령이나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을 사실 역시 문제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참배를 하면서도 참배를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곳도 많다는 게 더 문제이며, 한 독일인 기자가 참배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참배를 하던 일본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 독일인 기자에게 욕을 했다.[56] 다만 일본의 많은 신사가 전범을 일부러 모신다고 왜곡하는 국내의 일부 견해도 잘못된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나 몇몇 주요 신사들을 제외하면 많은 일본 신사들은 그저 그 사람이 그 지역 출신 인물이기 때문이거나, 일본군의 군사력 증강에 공헌했다는 이유 만으로 전범이 된 사람을 신사에 모신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야스쿠니처럼 일괄적으로 보아 일본 전역 곳곳에서 아직도 전범을 기린다고 하는 것 역시 사실을 왜곡한 호도에 가깝다. 이런 것은 오히려 위의 일본 극우들이 자국민을 선동하기에 좋은 자료만 제공할 뿐이다.[57] 인지도가 높은 인용구만 서술한다.[58] 순수 일본인 약 7천만과 나머지 조선인, 대만인, 만주, 류큐인 합쳐서 나왔다. 웃긴 건 식민지인들은 같은 일본인 취급도 안해주고 온갖 차별과 약탈을 일삼았으면서, 필요한 때만 일본인으로 끼워버려서 같이 죽자고 호소하는 꼴이다.[59] 물론 전쟁에서 정신력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지만(병사가 전쟁중에 엄마 보고 싶다고 주저앉아서 찡찡대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수행에 도움이 되는 부분일 뿐이다. 중일전쟁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기술력과 전투력이 적들보다 우월했고, 덕분에 정신력만 다듬어도 신속하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에서는 기술력과 전투력 전반이 미국에 비해 후달렸고,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부족했다.[60] 도쿄 대공습, 필리핀 탈환전, 펠렐리우 전투, 과달카날 전투,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오지마 전투, 레이테 만 해전, 대만 항공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임팔 작전, 구레 군항 공습 등을 참조.[61] 실제로도 야마모토는 미국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기에 미국의 실상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62]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장군도 주미 일본 대사관 주재무관으로 일했던 적이 있어 비슷한 예측을 한 적 있다.[63] 용병술에서 이 세 가지는 전투를 포기할 가장 큰 이유다.[64] 아주 사실이라고는 하기 힘들지만, 도조 히데키 내각의 압력 때문에 덴노가 전쟁을 승인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65] 일본의 문헌화된 역사는 3,000년은커녕 2,000년도 안 된다(...). 게다가 일본이 2,000년간 전쟁에서 뚜렷한 패배를 겪지 않은 까닭은 전쟁을 잘 안 해서다. 일본 본국의 정부가 한반도나 중국에 쳐들어갈 수준으로 공고해진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러자마자 쳐들어왔었고 목적이었던 명나라 침략도 조선 점령도 실패했다. 즉 졌다.[66] 전쟁의 승패는 사상자 수로 따지는것이 아니라 전쟁의 목적을 이뤘는지 못 이뤘는지에 따라 갈린다. 일본 본토를 외국 군대가 처음 점령한 것은 태평양 전쟁 종전후 미군이 처음이다.[67] 이 때 홀시 제독 휘하의 항공모함 중 하나가 후에 한 척의 배가 역사를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낸 USS 엔터프라이즈다.[68] 미군은 일본 본토로의 진격을 사실상 염두에 두고 있었으므로 48년까지 내다본 듯하다.[69] 대체로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 제독의 태평양 전쟁사 및 육군/해군/해병대 각군의 공식 공간전사가 기본 역본이 되고, 여기에 이후 학계의 최신 연구를 반영하여 기술한다. 2005년 출간된 "Shattered Sword"의 내용이 대거 반영된 미드웨이 해전 연재가 대표적인 예. 이 책은 2019년에 일조각에서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 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70] 그 이전부터 각종 밀덕 사이트에 기고되기는 했다.[71] 5상륙군단장, 태평양함대해병단장(FMFPAC)을 역임한 현대 상륙작전의 아버지. 사이판 전투에서 27보병사단장 랄프 스미스 육군소장을 보직해임한 소위 Smith vs Smith 사건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