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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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
太平天國
파일:태평천국 국기.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Seal_of_the_Taiping_heavenly_kingdom.svg.png
국기
국새
1851년 ~ 186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청나라
위치
중국 남부
수도
천경(天京)
정치 체제
신권정치 군주제
국가원수
천왕
주요사건
1851년 건국
1853년 천경 천도
1856년 천경사변
1864년 멸망
언어
한어(관화, 광둥어)
문자
한자
민족
한족, 좡족
종교
배상제회(拜上帝會)(국교)[1]
통화
천국통보(天國通寶)[2] → 성보(聖寶)[3]

1. 개요
2. 역사
2.1.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
2.2. 쇠퇴
3. 경제 정책
4. 사회
5. 외교
5.1. 서양 열강
5.2. 청나라
6. 주요 적들
8. 동시대 종교지도자들
9. 군사력
10. 직위체계
11. 권력다툼
12. 매체에서
13. 역대 천왕과 지도자



1. 개요[편집]


청나라 말기 홍수전이 창시한 종교 비밀 결사 '배상제회(拜上帝會)'에서 비롯한 봉기로 건국된, 한국사의 태봉(처음에는 아님)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드물었던 신정국가이다. [4]


2. 역사[편집]



2.1.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편집]


1851년 광시 성 구이핑현(桂平縣)에서 건국하였으나 사실상 그 지역 근방을 중심으로 세를 키워나가기 시작한 것뿐이었고, 실제로는 1853년 3월 남경을 점령한 후 남경을 '천경(天京)'으로 개명하고 수도로 지정해 본격적인 신국가 건설에 착수한다. 자세한 경과는 태평천국 운동 문서 참조.

봉기의 주축이었던 배상제회는 주로 계속된 기근, 비적의 약탈,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압박에 시달리던 광시성 산촌 농민과 일부 소지주·광부·실업자층에 기반하여 조직을 넓혀갔다. 주요 세력을 살펴보자면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지역인 광시성의 빈민과 객가인, 그리고 좡족과 천지회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사회의 혼란과 모순 속에서 비참하게 살던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천지회는 조직으로 현재 삼합회의 기원 중 하나로 여겨진다


2.2. 쇠퇴[편집]


이처럼 초기엔 급속히 세를 불리며 청의 진압군을 격퇴할 정도로 강성했다.1855년에 당시 산둥성의 남쪽으로 흐르던 황하 하류의 둑이 무너지면서 하도가 제수와 합쳐져 오늘날처럼 산둥성 북부로 흐르게 변경되는 천재지변으로, 강 줄기가 안정될 때까지 수년간 지속적인 범람이 일어나며 직례 부근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한 진압 차질은 당연지사. 참고로, 한 세기 가량 후대인 1938년 국민당군이 일본군의 진격을 막으려 황하의 둑을 무너뜨려 황하를 수년간 남쪽으로 흐르게 만들었을 당시 발생한 이재민이 약 1250만 명이었다.

초기의 급성장도 시간이 지나면서 쇠락한다. 내부 분열과 남부 지역에 퍼진 흑사병,[5] 열강의 견제로 약화되었다. 종국에는 신사[6] 출신인 이홍장의 회군(북양군의 전신)에게 결정적인 대패를 당하면서 패퇴했다.

결국 점차 왕조적인 체제에 의한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기울고, 지도부의 내분과 부정부패 속에 빠르게 와해되기 시작해 1864년에 구심점인 홍수전이 사망(자살 또는 병사)한 직후 2대 천왕 즉위 2달여만인 개국 13년만에 수도 천경(남경)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개국한 직후부터 줄곧 구호와는 동떨어진 행태를 보여왔으며, 뭔가 정책적인 방향이 바뀔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홍장은 청 조정 내에서 급속하게 세력을 얻었다.

태평천국이 패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초반의 상승세를 수뇌부 스스로가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홍수전은 남경을 점령하자 그 안에 틀어박혀 수천 명의 궁녀들과 음탕한 짓을 벌이거나 혹은 다른 수뇌부와 권력 다툼을 하는데만 골몰했고, 승리한 여세를 몰아 주력 부대가 북쪽으로 올라가서 청나라 정권을 타도하는 작업을 소홀히 했다. 이를 두고 태평천국의 전략가인 나대강(羅大綱)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찌 이곳(남경)에 안주한단 말인가. 그래서 오래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겠구나."라고 한탄했으며(출처: 태평천국의 일류전략가, 나대강), 얼마 후 그의 말은 현실이 되어 세력을 회복한 청나라에게 결국 태평천국은 패망하였다.


3. 경제 정책[편집]


태평천국 정부는 '평등'에 의거한 국가적 이상향을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로 구체화하여 발표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논을 품질에 따라 아홉 단계로 나누고, 질에 따라 남녀불문하고 논을 분배한다. 생산물은 개개인의 소비분 이외는 국고에 보관하며, 사유(재산)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결혼이나 장례식 같은 의례비용, 고아, 노인 부양에 대해서는 국고에서 지출한다. 그리고 25 가구당 양사마(兩司馬)라는 관리와 예배당을 두어 관리시킨다는 것이다. 양사마는 군수(軍帥)에게 공동 창고에 저축 된 양을 보고하며 군수는 지출과 분배, 토지 분할을 담당했다.

왕망신나라와 함께 "공산주의적 색채를 띄는 나라"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허나 소련을 위시한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폐지한 사유재산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재산이 아니라 자산이었다. 1848년에 출간된 공산당 선언에서도 언급되었을 정도로 "개인이 재산을 가질 권리를 박탈한다"는 얘기는 공산주의에 관한 가장 뼈대 있는 오해 중 하나이다. 게다가 현실사회주의는 토지를 자본의 일종으로 해석했기에 균등분배에 의한 소자영농 사회가 아니라 콜호즈가 대표하는 토지 집단소유를 지향했다. 오히려 태평천국 운동의 특성들은 여타 종교 집단에서 생각보다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사유재산에 대해 이런 입장을 가졌다.

게다가 상단에서 언급된 이념들은 실제로는 민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시행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 지역에서는 토지를 많이 보유한 유력자를 ‘향관’(郷官)이라는 직에 앉혀 소작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의 안정과 식량 확보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 사회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만큼 향관들에 대해서 관대히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태평군이 보급을 위해서 향관이 가진 땅의 수확을 상당히 가져갔다고 한다.

또한 천조전무제도는 땅의 분배를 논했으나 그러한 용도의 땅을 어떻게 확보할지에 대해서는 조항이 없었고,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엄격히 사유가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땅의 환수 과정도 없었고 생산물의 향유권이 신분에 따라 나뉘었기 때문에 제도는 유명무실했고, 실제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기존의 지주층은 어느 정도 유지됐고 심지어 소작농의 투쟁을 엄히 금하는 조항이 있었다. 물론 이는 앞서 말한 대로 거둬들일 세금이 있어야 군대의 유지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4. 사회[편집]


정통적인 요소 외에도 엄격한 우상숭배 부정, 유교와 공자에 대한 날선 비판, 유일신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라는 평가를 듣는다. 처음에는 홍수전이 고향에서 우상숭배를 막는답시고 사당을 부수는 등 과격히 행동했지만 나중에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하기도 했다. 태평천국에서 간행한 성경만 인정하고 보급했고, 기존의 육경 등도 적당히 기독교적 색채를 넣어서 인정하는 등 인심 장악에도 노력했다. 다만 전족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었다. 거병 초창기에 전체 2만 정도인 태평군의 3할 정도만이 성인 남자였기에 보급, 운송 등에는 여성의 참여가 필수였고 따라서 전족은 엄금됐다. 게다가 태평군의 주 병력들은 객가, 좡족 등의 밑바닥 출신이라 청나라 풍습인 전족을 따르는 자도 그다지 없었다.

또한 태평천국이 반포한 교리서 등을 보면 다른 종교의 이론을 취합한 것도 많았다. 홍수전은 과거 시험을 치러가던 중 유학자 주차기(朱次琦)를 만나 예기의 예운(禮運)과 대동(大同)에 대해서 배웠었고 태평천국의 교리에도 상당히 흡수됐다. 또한 성경 역시 어느정도 조정을 했는데 대표적으로 과 딸들의 근친상간 같은 요소는 당시 중국 윤리상 도저히 용납될 것이 아니여서 태평천국의 성경에는 빠져 있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특징 중의 하나는 병농일치 및 군사 위주의 사회 분위기였다. 우선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단위를 편성하여, 표식과 깃발을 통해 각 부대를 구분했다. 오장(伍長)이 4명을 통솔하고, 양사마(兩司馬)가 오장 5명 및 그 휘하의 부하들을 합쳐 25명을 통솔하며, 양사마는 가로 세로 75cm의 깃발을 들고 있다. 양사마 4명 및 그 부하를 합친 104명은 조금 더 큰 깃발을 가진 졸장(卒長)의 명령을 받고, 이러한 등급은 여수(旅帥), 사수(師帥), 군수(軍帥)에까지 이르게 되어, 군수는 휘하에 총 1만 3,155명을 이끈다.

남경을 점령한 후에는 사상을 발전시켜 군에서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천경'에서도 네 집의 가족이 오장의 가족과 연결되어야 하고, 25개의 가족 단위가 양사마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도록 했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공동의 곡물창고를 건설하고, 예배를 위한 예배당도 세워야 하며, 양사마는 이 예배당에 거주했다. 안식일이 되면 오장은 자기 가족과 나머지 네 가족을 예배당으로 인솔해 와서 예배를 보게 했다. 남녀는 따로 떨어져 앉아 양사마의 설교를 듣고, 천부(天父)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만 했으며 일곱번째 안식일마다 모든 고위급 장수들은 자기 휘하 양사마의 교회들 중 한 곳을 방문하여 신도들에게 설교를 해야 했다.

또한 태평천국의 군율은 거병 초기부터 매우 엄한 것으로 유명했으며 이는 반란 진압에 종군한 청나라 장수들의 회고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온다. 우선, 민가에 함부로 침임하거나 약탈하는 자는 예외 없이 처형이었다. 민가에 발을 들이면 발을 자른다라는 군령이 있었다. 심지어 사소히 군사의 일을 논하거나 함부로 모여서 떠드는 일도 엄하게 다스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군율로 인해서 왠만한 태평군 부대는 전투시에 유대가 강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

다만 부정적인 부분들도 있었는데, 태평천국 정부는 부부가 함께 병사로 들어와도 서로 만나거나 성관계도 못하게 막을 만큼, 남녀 간의 연애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정확히는 모든 백성들을 남자만 있는 남영(男営)과 여자만 있는 여영(女営)으로 나눠서 관리했다. 나중에는 결혼한 남녀 병사들끼리 만나거나 부부관계를 할 수 있도록 약간 완화시켰으며 1855년부터는 새로운 점령지에서만 위의 규칙을 적용시켰으나, 태평천국 병사들 중에서 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성관계를 가지다가 적발되면 모두 처형당했다.

그래서 태평천국 병사들은 모두 자신들이 직접 옷가지를 빨래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태평천국의 남성 병사와 여성 병사들이 서로 만나서 연애를 하거나 성관계를 벌이는 핑계로 옷가지를 여성 병사들한테 맡겨서 빨래를 부탁한다고 댔는데, 이걸 태평천국 지도부가 알아차리고는 "남성과 여성 병사들끼리 서로 빨래를 한다고 만난다면 모두 처형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태평천국 병사들 중에는 성욕을 참지 못해 남자들끼리 동성애를 벌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성관념에서 태평천국군의 수뇌부는 예외였다. 홍수전의 아들인 홍천귀복의 증언에 따르면 홍수전의 부인은 모두 88명이나 됐다. 또한 양수청 같은 고위 지도부들 중에서는 아예 어린 소녀들을 좋아하여 으로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5. 외교[편집]



5.1. 서양 열강[편집]


상당히 특이한 외교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태평천국 스스로는 상하이 등의 조계에 주둔하는 열강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여겼다. 이유는 당연히도 그들이 기독교를 믿기 때문이었고 서양 형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태평천국에 가담하는 서양인들도 드물지만 있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린들리.

처음에는 태평천국은 서양으로 부터의 사절단을 받아들였는데 대표적인 일이 1853년 4월, 영국 공사 본햄이 난징에 방문하여 석달개, 위창휘와 접견한 일이었다. 중국 최초의 명함 전달이 이때라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중립적으로 서양은 태평천국과 청나라 모두에게 무기를 팔았지만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은 베이징 조약 이후는 태도가 변했다. 우선, 태평천국이 주장했던 '홍수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예수는 그의 형이다' 라는 괴상한 기독교 교리는 범상한(?) 이단 수준조차 한참 벗어난 것으로, 결코 용납될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이런 교리를 접한 영국인들은 "만약 로마 교황이 홍수전을 다스릴 권한이 있었다면 그를 화형시켜 버렸을 것이다."라고 부정적으로 여겼다. 또한 태평천국은 아편 사용을 금지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었고 만약 태평천국이 득세하여 대등한 외교를 바랄 경우 경우 열강이 기존 청나라와 체결한 톈진 조약, 베이징 조약 등의 사항이 무효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연히 계산기를 두들겨 본 열강들은 태평천국을 갈수록 적대하게 됐다.

그리하여 태평천국 수뇌부 2기인 이수성이 주도권을 잡을 무렵에는 항저우, 상하이 공략에 열강의 용병단이 이끄는 양창대에 물을 먹은 후라 당연히 서양도 적대하게 됐다.


5.2. 청나라[편집]


홍수전이 떠들고 다닌 말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청나라는 싫어하다 못해 혐오의 대상이었다. 특히 기독교를 믿어도 점령지에서 만주족에 대한 학살은 일반적이었다. 물론 태평천국 역시 이런 행동의 결과상 잡힐 경우 끔살 당하는걸 알고 있었고 당연히 죽기 살기로 싸웠다.


6. 주요 적들[편집]


우선 태평천국이 처음에 상대한 청나라 군은 대다수가 녹영인데 이들은 한족이 주류가 된 일종의 보조병이다. 처음에는 팔기군을 보조하며 어느정도 성과를 가진 군대였으나 청나라 말기에 가면 세습된 군직으로 인한 기강 해이, 아편의 복용 등으로 전투력은 급강하한 상태였다. 특히 백련교도의 난에서 녹영은 반란군에 고전했고 전투력은 유명무실한 상태였음이 드러났다.

청나라의 주력은 전통적으로 기병이 주축이 된 팔기군이었는데 이들 역시 당시에는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팔기군들은 녹영처럼 군적이 세습됐고 한족과 영합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철저히 격리하여 주둔했는데 이것은 팔기군의 전투력 하락을 불러왔고 훗날 상대하는 승격림심이 이끄는 몽골팔기를 제외하면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태평천국을 가장 위협하는 군대는 증국번이 조직한 상군리훙장이 이끄는 회군이었다. 이들은 풍운산을 전사시킨 강충원이 이끄는 초용(楚勇)과 같은 향용(鄕勇)에서 시작된 무리였는데 각 지역의 유력자가 지역민을 동원하여 만든 민병대에서 기원한다. 대다수는 같은 지역 출신이라 유대의식이 컸고 아편에 쩔어있는 녹영 등과는 달리 주로 시골 출신의 청년을 위주로 징집해 전투력이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태평천국에 위협이 되는 군대는 외국인 용병이 주축된 상승군(常勝軍) 및 상첩군(常捷軍)이었다. 이들 중 상승군 같은 경우 처음에는 양창대(洋槍隊)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상하이 및 남부 대도시 거상들의 자본을 지원받아 화력과 사기가 높았고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 찰스 조지 고든 등의 우수한 지휘관을 갖추고 있어서 태평천국의 호적수가 됐다.

또한 의외로 반청조직인 소도회(小刀會), 천지회(天地会) 등의 조직과도 사이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런 조직들은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워 명나라의 부활을 이야기했는데 태평천국은 새로운 질서를 갖춘 새 국가를 만들 생각이었기에 사상적 대립이 있었다. 또한 상당한 반청조직 구성원들은 아편을 복용하고 태평천국의 군령이나 교리를 이질적이며 엄격한 것으로 받아들여 대립했기에 맞서는 경우가 잦았다.


7.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와의 비교[편집]


태평천국의 존재 시기는 브리검 영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몰몬교)의 대관장(1844~1877)으로 재직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브리검 영과 홍수전이 모두 전제적으로 각자 자신의 영역을 통치했던 점도 흡사하다.


8. 동시대 종교지도자들[편집]


태평천국이 존재하던 시기의 종교지도자로는 로마 교황 비오 9세(1846~1878)가 재임하고 있었고 캔터베리 대주교로는 1848년부터 1862년까지 존 섬너가, 1862년부터 1868년까지는 찰스 롱리가 재임하고 있었다. 이슬람 칼리파오스만 제국 술탄 압뒬메지트 1세(1839~1861)였다.


9. 군사력[편집]


태평천국은 과거의 황건적과 같은 무리와는 상궤를 달리하는 군사력을 보유했는데 이것은 태평천국 특유의 시스템에서 비롯됐다. 우선 홍수전은 처음에 금전촌(金田村)에 단영(團營)이라는 군사조직을 설치해서 남녀를 분리하고 모두 입대시켜 군사훈련을 강행했다. 이들은 고향인 광서성에서 시작하여 수 많은 전투와 포위를 뚫고 호남성, 호북성 등지를 전전하며 자연히 실력은 상승했다. 거기에 반란 초기 합류한 나대강 등이 이끄는 천지회는 수전보급의 지식을 더했다. 이런 요소들에 힘입어서 태평천국은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태평천국군의 주 전술은 부교를 설치한 후 대포를 통한 폭격이었다. 또한 난민을 성에 잠입시키거나, 주로 광서와 호남 출신의 광부를 동원하여 땅굴을 만들고 화약으로 성벽을 파괴하거나 참호를 통해서 저항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거기에 태평천국의 난 당시 상하이와 같은 조계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은 무기를 청나라말고 태평천국에도 팔아서 태평천국군은 총기와 같은 무기를 많이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태평천국을 따르는 대다수 사람들은 가난한 빈민이 많았고 이런 이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에 심취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당대 청나라 장수들의 보고나 기록에 포로가 된 태평천국 하급 병졸도 배신하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경우가 적었다고 적혀있다. 또한 얼치기 반란과는 달리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여 태평천국군은 사기가 높았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했는데 군을 통솔하고 지도할 최고 사령부최고사령관이라 할 만할 존재가 없었다.
거병 초기에는 홍수전이 중심을 잡고 양수청이 군사의 일을 통제했지만 천경사변 이후 양수청, 위창휘, 진일강이 죽고 석달개가 이탈하면서 확실한 구심점이 사라졌다.

이에 태평군은 후기 지도자인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등의 지도력 및 군재로 버텼지만 확실하게 군정권, 군령권, 통수권을 쥔 지휘관이 없어서 작전의 전개는 각 사령관들이 회합하여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다.


10. 직위체계[편집]


태평천국 4왕

북왕 위창휘

서왕 소조귀
천왕 홍수전
동왕 양수청

남왕 풍운산


우선 홍수전, 양수청, 소조귀, 풍운산, 위창휘, 석달개는 거병 초기의 간부로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각자의 위계는 이름이 나열된 순서와 같았고 모두 야훼의 가족이라 인식된 특권층이었다. 그 중 위창휘까지는 군사(軍師)라는 작위를 가져서 좀 더 높았다. 위의 6인은 초기의 공헌도와 교단 내의 입지가 탄탄한 자들이었다. 홍수전의 형인 홍인발(洪仁發),홍인달(洪仁達)이나 사촌형제인 홍인간, 처남인 뇌한영(賴漢英) 및 그의 일족도 초반에는 왕 자리를 달지 못했다.

그 밑으로는 후(侯)를 봉했는데 처음에는 후를 받은 사람들 모두 승상(丞相)이었다. 물론 일반적 의미에서 승상은 아닌데 이는 당시 태평천국의 행정체계를 봐야한다. 태평천국은 육방관속의 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에 대응하도록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부서를 설치했다. 또한 우정승상(又正丞相), 부승상(副丞相), 우부승상(又副丞相)의 자리를 매 부서마다 설치하여 모두 24명의 승상이 존재했다. 모든 관직의 경우 기존의 자리에 우정(又正), 부(副), 우부(又副)의 명칭이 붙은 자리가 따로 존재했다. 최초의 승상은 영안을 점령한 시기에 임명한 천관정승상(天官正丞相) 진일강(秦日綱)과 춘관정승상(春官正丞相) 호이황(胡以晃)이었다. 처음에는 귀한 자리였건만 나중에는 계급을 퍼주다시피 하다보니 500명이 머무는 병영에 승상만 10명이 나올정도였다.

그 밑으로는 검점(檢點), 지휘(指揮), 장군(將軍), 총제(總制), 감군(監軍), 군수(軍帥), 사수(師帥), 여수(旅帥), 졸장(卒長)과 양사마(兩司馬)의 자리가 존재했는데 검점의 자리 정도면 중요한 성의 책임자를 할 수 있었다.

왕(王)의 자리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는데 1855년 경에는 간부 기준으로 홍수전부터 석달개까지의 주요 간부와 진일강, 호이황, 양립태(梁立泰), 나대강(羅大綱), 주석곤(朱錫琨)만이 가진 자리였다. 왕들 중 풍운산, 소조귀는 왕 자리에 오른 후 전사. 양립태, 나대강, 주석곤은 전사하여 사후 추증됐고 호이황은 진일강과 함께 초반에 왕에 오르지만 이전에 병사. 하지만 천경사변을 계기로 홍수전의 두 형인 홍인발(洪仁發)을 안왕(安王)으로, 홍인달(洪仁達)을 복왕(福王)에 임명하고 사촌동생인 홍인간이 간왕(干王)에 오르는 등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홍인달, 홍인발의 왕 자리가 떨어진 다음에는 홍수전이 주요 장수에게 다시 왕 자리를 주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왕의 자리는 각 방면군을 이끌 수 있는 주요한 사령관의 위치라고 보면 된다.

대표적으로진옥성은 영왕(英王)에 봉해지고, 이수성은 충왕(忠王)에 봉해진다. 양보청(楊輔淸)은 보왕(輔王)이 되고, 이세현은 시왕(侍王)이 된다. 왕들끼리도 서열은 존재했고 주요한 왕들은 다른 왕을 부장으로 삼아서 전장을 누비고 했다. 이런 왕의 제도는 태평천국 중반기까지는 전공이 있는자만 왕으로 삼는 등 체면을 유지했지만 나중에는 열왕(列王)이라 하여 수십명에게 왕작위를 뿌리니 말기 태평천국에는 왕만 2700여명이 존재했다.

또한 이수성 등이 왕에 오르기 직전부터 태평천국의 왕의 아래에 6등급의 작위가 생긴다. 의, 안, 복, 연, 예, 후가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책봉할 때, 기본적으로 중간에 천(天)자를 넣는다. 앞에는 다시 길상(吉祥)의 의미가 담긴 글자를 넣는다. 예를 들어, 진옥성(陳玉成)이 전군주장(前軍主將)이므로 성천의(成天義)가 되고, 이수성은 후군주장으로 합천의(合天義)가 된다.

왕들의 수가 많아진 다음에는 천장(天將), 조장(朝將), 주장(主將)등의 자리도 왕 아래 천의 위로 설치됐는데 워낙 작위가 많고 종교성이 섞여 있어서 상당히 복잡하고 계급 인플레이션이 심해져 갔다.


11. 권력다툼[편집]


초반에는 종교운동의 성격이 강했지만 본격적인 반란을 계획한 후 부터는 정치성 및 권력다툼의 성향이 짙어져 갔다.

우선 태평천국이 발행한 다양한 교리 및 행적을 말하는 서적을 보면 초반에는 홍수전풍운산의 권력이 절대적이었다. 훗날 체포된 홍인간의 진술에 따르자면 홍수전은 종교의 절대적 상징으로 어디를 가나 환대받고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로 인식됐다. 또한 풍운산은 교리의 전파 및 선전을 담당하여 2인자 노릇을 했다. 실 권력은 풍운산이 좀 더 높았지만 풍운산이 홍수전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둘의 조합이 잘 맞았기에 그럭저럭 돌아가는 형편이었다. 물론 이 때에도 간부들의 휘하에는 각 세력이 있었지만 통제를 못할 정도는 아니였다.

하지만 풍운산이 잠시 체포된 후 홍수전이 금전촌의 본부 자리를 비우자 권력의 중심은 급격히 소조귀, 양수청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둘은 무당신내림을 모티브로 삼아서 천형하범과 천부하범을 시전했고 교단 내에서 지위는 급격히 상승했다. 특히 소조귀와 양수청이 풍운산 석방과 흔들리는 교단의 정비에 공을 세웠고 종교라는 특성상 신의 말씀을 전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기 어려워서 홍수전도 그들의 권위를 인정했다. 소조귀와 양수청의 권위에 밀린 홍수전과 풍운산은 당시 태평천국이 마련한 근거지 중 본영인 금전촌에 머물지 못하고 산인촌에 머무는 등 밀리는 양상을 보인다.

이 때의 기록을 보면 파편적이지만 소조귀의 권위가 조금 더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조귀는 홍수전의 계모 집안인 왕씨 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홍수전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사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또 소조귀가 교단에서 키워 준 위창휘의 입지가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추에 도달했다. 처음 위창휘를 포섭한 것은 풍운산이지만 소조귀가 그의 권위를 키웠다.

하지만 이런 양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변하는데 영안을 점령한 후 청군과의 전투에서 소조귀가 부상을 입으면서 천형하범이 끊기게 된것이었다. 심각한 부상 혹은 양수청의 압박으로 소조귀의 천형하범이 끊기고 양수청은 독보적인 천부하범을 통해서 권력을 차지했는데 홍수전도 양수청을 정군사(正軍師)에 임명하고 각 왕들의 감독권을 주면서 양수청은 천경사변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종교, 정치에서 절대적 권력을 차지했다.

천경점령 후 천경사변으로 양수청, 위창휘, 진일강이 죽고 사태를 수습한 석달개가 이탈하면서 다시 권력은 변동한다. 홍수전은 그간 양수청, 소조귀에 시달려 왔기에 자신을 중심으로 권력 개편을 시도했고 이에 자신의 형인 홍인발, 홍인달을 왕으로 삼고 사촌 동생 홍인간 역시 왕으로 삼는 등의 시도를 한다. 또한 몽득은, 임소장을 고위관료에 임명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전공이 없는 홍수전의 형제 및 친척들의 왕 등극과 그들의 석달개에 대한 견제는 석달개의 이탈을 불러왔고 자연스럽게 홍수전은 다른 자를 불러와 석달개의 자리와 빈 자리를 채워야 했다. 또한 전공 없는 자들이 왕에 오르니 각 방면군의 주장들은 반발했고 그들을 달랠 필요가 있으니 그리하여 임명된 왕들이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이다. 이들은 거병초기에 10대 중반의 나이로 참전해 온 짬밥이 있었고 군재도 상당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왕들의 입장에서는 별 경력도 없는 홍씨 일가의 권력 영위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들과 홍씨 일가의 대립 역시 심화됐다. 특히 인척 관계인 이수성, 이세현은 홍인간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인간의 개혁안이 성급하고 현실성이 없는 것 역시 반발을 불러왔다.

또한 왕들 역시 상호간의 대립이 심했다. 이수성, 진옥성, 이세현, 양보청이 왕에 오른 후 태평천국은 왕의 작위를 뿌리기 시작했는데 막판에는 왕들의 수가 약 2700여 명에 달했다. 상당수의 왕들은 허울뿐이었으나 부장급이나 사령관 정도의 왕들은 어느정도 권력이 있었고 작위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상호간의 협조를 잘 하지 않고 합의된 계획 등에 대해서도 절대적 가치는 두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이수성은 진옥성과의 사이가 좋지 못했고 안경(安慶)이 훗날 점령될 때 양보청진옥성의 지원군을 잘 돕지 않았다.


12. 매체에서[편집]


영화 명장에 주인공들이 토벌하고자 하는 적성 세력이 바로 이들이다.

게임 Victoria의 1861년 시나리오에서는 반란군으로만 등장했지만 Victoria II에서 플레이가 가능한 국가로 구현되었다. 대체로 청나라가 진압하지만 가끔은 태평천국이 승리하기도한다.


13. 역대 천왕과 지도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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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천왕 홍수전
동왕 양수청
서왕 소조귀
남왕 풍운산
북왕 위창휘
익왕 석달개
후기
천왕 홍수전
충왕 이수성
영왕 진옥성
예천왕 홍천귀복
시왕 이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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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수전이 창시한 종교 집단 겸 비밀 결사. 배상제회는 대외적으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정작 서구 열강들한테는 사이비 종교, 이단으로 찍혔다.[2] 링크 참조. 1853~1855년 발행[3] 천국성보, 태평성보 등. 1856년부터 발행[4] 일본 제국국가신토 교리에 따라 천황을 신성시한 점에서 신정국가로 보는 의견도 있다.[5] 청나라에게 패배한 결정적 이유중 하나[6] 중국 , 조 때 사회의 지배층을 담당했던 계층. 이후 영국 상류사회 남성인 '젠틀맨(Gentleman)'의 역어로 쓰이면서 현재의 뜻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