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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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윌리엄스의 주요 수훈 /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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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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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테드 윌리엄스
Ted Williams

포지션
외야수
득표수
1,125,583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Williams%20Ted%20Plaque_NBL.png
테드 윌리엄스
헌액 연도
1966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93.38% (1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6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할 뉴하우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루 보드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필 리주토
(뉴욕 양키스)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타자 트리플 크라운

조 메드윅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37년)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1942년)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1947년)

파일:MLB 로고.svg 메이저 리그 타자 트리플 크라운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1942년)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1947년)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1956년)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1년 ~ 194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루크 애플링
(시카고 화이트삭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7년 ~ 194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미키 버논
(워싱턴 세네터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지 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57년 ~ 1958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
미키 맨틀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하비 쿠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1년 ~ 194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루디 요크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알 로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3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지미 폭스
(보스턴 레드삭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루디 요크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7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행크 그린버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테드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49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타점왕
조 디마지오
(뉴욕 양키스)

테드 윌리엄스
번 스티븐스
(보스턴 레드삭스)

월트 드로포
번 스티븐스
(보스턴 레드삭스)

보유 기록
최다 출루율 1위 시즌
12회
통산 최고 출루율
0.482
통산 최고 BB%
20.6%
연속 경기 출루
84경기
최다 타격 트리플 크라운 시즌
2회[1]



보스턴 레드삭스 등번호 9번
벤 채프먼
(1938)

테드 윌리엄스
(1939~1942)


조니 피콕
(1944)
할 와그너
(1944)

테드 윌리엄스
(1946~1960)


영구결번
워싱턴 세네테스 /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9번
프랭크 하워드
(1965~1968)

테드 윌리엄스
(1969~1972)


조 로비토
(1974)



보스턴 레드삭스 No. 9
테드 윌리엄스
Ted Williams

본명
시어도어 새뮤얼 윌리엄스
Theodore Samuel Williams
출생
1918년 8월 30일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사망
2002년 7월 5일 (향년 83세)
플로리다 주 인버네스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허버트 후버 고등학교
신체
190cm / 92kg
포지션
좌익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37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BOS)
소속 팀
보스턴 레드삭스 (1939~1942, 1946~1960)[1]
지도자
워싱턴 세네터스-텍사스 레인저스 감독 (1969~1972)

1. 개요
2. 선수 시절
2.1. 타격 스타일
2.2. 까다로운 성격
2.4. 참전
2.5. 이루지 못한 우승
3. 평가
4. 연도별 성적
6. 은퇴 후
7. 이모저모
8. 어록
9. 외부 링크
10.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static.flickr.com/90644623_cd18eb8dd4.jpg

남자라면 그날의 목표,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내 목표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저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지나간다."

A man has to have goals — for a day, for a lifetime — and that was mine, to have people say, "There goes Ted Williams, the greatest hitter who ever lived."


타자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타석에 가서 미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미치고, 투수에게 미쳐라.

There's only one way to become a hitter. Go up to the plate and get mad. Get mad at yourself and mad at the pitcher,


미국의 전 야구 선수. MLB 4할 타자[2]로 유명하다.


2. 선수 시절[편집]


파일:external/coololdphotos.com/ted-babe_0.png
신과 함께. 1943년. Colored History.[3][4]

파일:external/blog.nj.com/large_tedwilliams2.jpg
MVP 경쟁을 2번이나 벌였던 당대의 라이벌 조 디마지오와 함께.
윌리엄스는 17세 때 마이너리그 퍼시픽코스트리그 소속의 고향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5]에 입단했다. 보스턴은 1939년 만 19세인 윌리엄스를 샌디에이고에서 사왔다.

데뷔시즌이었던 1939년부터 .327 31홈런 145타점을 기록했으며 MVP 투표에서도 4등에 들었을만큼 떡잎부터 달랐었다. 최초의 신인 타점왕 기록이었고, 이로 인해 'The Kid'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듬해에도 .344 23홈런 113타점을 기록하며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개나 주라는 듯한 활약을 한다.

1941년 프로 3년차였던 그는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9회말 2아웃에서 역전 끝내기 쓰리런을 쳤으며 그 해 정규시즌 타율 4할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교타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도 장타력도 뛰어나 통산 홈런이 521홈런이며, 30홈런을 넘긴 시즌이 8시즌이나 된다.[6]

1941년 마지막 날 더블헤더를 앞두고 4할이 인정되는 .39955[7]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테드를 감독이 빼고 라인업을 구성하자 당장 감독을 찾아가서 내가 오늘 안타를 못치면 4할 타자가 아닌거지. 그렇게까지 해서 4할을 달성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하고는 경기에 출장했다. 결국 그는 그날 8타수 6안타를 기록, 4할 6리의 타율로[8] 4할 타율을 달성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해에는 동시기에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뉴욕 양키즈의 강타자 조 디마지오도 56경기 연속안타라는 전설적 기록을 세웠던 시즌이었고, 결국 그해 MVP는 디마지오에게 돌아갔다.


전쟁 참전 등의 공백도 우습게 씹어주면서 쾌조를 보였던 그는 1950년 시카고 코미스키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랄프 카이너의 타구를 잡다 펜스에 부딪혀 팔꿈치를 다쳤다. 윌리엄스는 이 부상으로 60경기를 결장했고 타율도 생애 최저인[9] .317로 떨어졌다. 양키스와 우승경쟁을 했던 보스턴은 결국 4경기 뒤진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 부상은 이후 윌리엄스의 고질병으로 남았다. 테드 윌리엄스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사건으로 밀어치는 능력이 약화되어 타격 능력이 떨어 졌다고 한다.[10] 그 뒤 1959년 만 41세의 윌리엄스가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에 실패하자(.254) 톰 야키 구단주는 은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를 거부했고 1960년 .316의 타율을 기록한 후에야 비로소 옷을 벗었다.

윌리엄스는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521번째 홈런을 날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홈런임을 안 펜웨이파크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그라운드를 돌았으며 답례도 하지 않았다.[11] 그가 오랜 고집을 꺾고 모자를 벗으면서 답례한 것은 한참 뒤인 1991년 4월, 테드 윌리엄스 데이에서였다.


2.1. 타격 스타일[편집]


옮길테면 옮겨봐라. 어차피 빈 자리는 많다. 아니면 넘기면 된다.”

테드 윌리엄스는 극단적인 당겨치기(풀 히팅)를 고수했고, 이 때문에 처음으로 특정 타자를 겨냥한 수비 대형인 '수비 시프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194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수 겸 감독 루 보드로가 좌타자인 테드를 아웃시키기 위해 필드 왼쪽에 좌익수만 남기고 모든 야수들을 필드 우측으로 옮겨버리는 엽기적인 시프트를 시도한 것.[12] 테드가 밀어치기를 한다면 무조건 안타가 되지만 끝내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이 시프트에 대항해 밀어치기를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는데, 테드 본인은 "바깥볼은 반드시 밀어 쳐야 하며 맞출때는 공의 윗부분을 노린다"고 썼던 것처럼 자신의 밀어치기 능력을 공공연히 어필했기 때문에 이 내용만큼은 추종자 등이 날조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인 당겨치는 타자가 된건 상기의 부상전력으로 바깥공을 밀어서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해석할 수 있다. 테드는 자신의 타격이론서에서 역대급 선구안과 엄청난 훈련에 의한 타격 메커니즘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순간순간의 팀배팅보다는 타자 스스로가 더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한 타격을 설명한 것으로써 "좋은 타자란 자기의 스트라이크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나쁜 공에는 배트가 나가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로 설명 가능하듯이 그는 배드볼히팅이나 정황상 밀어치기하는 팀플레이어가 아니라 이상적인 타격을 연습하고 연구하는 구도자적 신념을 가진 선수였기에 나온 이야기다.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2루수 조 모건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프레이 히팅과 레벨 스윙보다는 풀 히팅과 미세한 어퍼컷 스윙이 훨씬 더 고차원적인 스윙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곧 테드 윌리엄스의 타격과 일맥상통한다. 수십년 후 현재 스탯캐스트의 시대가 열리고, 투수들의 강속구에 맞선 타자들의 뜬공혁명으로 재조명되었다.

파일:williams9.jpg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3]

파일:external/www.hardballtimes.com/williamsgraphic.png
스트라이크 존 77분할 타율 (테드 윌리엄스의 저서 '타격의 과학(The Science of Hitting) 중)


2.2. 까다로운 성격[편집]


윌리엄스는 아무도 못말리는 괴팍한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방망이를 관중석에 집어던지는 사고를 치는 등 19년 내내 팬, 매스컴과 충돌했다. 특히 언론과의 사이가 매우 험악했는데, 기자들에게는 '키보드의 기사(knight of keyboard)'라는 별명도 지어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린이 암환자를 돕는 등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걸 보면 그저 기자들과의 관계만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14]

사실 기자들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윌리엄스는 펜웨이파크 홈경기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린 후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하지만 다음날 보스턴 신문에서 윌리엄스는 '건방진 신인'으로 묘사됐다. 이후 윌리엄스는 팬의 환호에 두 번 다시 모자를 벗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불거진 기자들과의 갈등은 1942년 보스턴 신문에 윌리엄스에 대한 '비운의 가족사'(부모의 이혼과 형의 투옥이 그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기사화)가 소개되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테드는 기자에게 침을 뱉은 적도 있다.)

얼마나 기자들과의 사이가 나빠졌나면, 1947년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와 MVP 경쟁을 했을 때 보스턴 기자들은 테드가 아닌 디마지오에게 표를 던졌을 정도였다. 특히 결정적인 것이 스프링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었던 어떤 보스턴 지역 기자였는데, 그는 10위표 한 장조차 테드에게 주지 않아 조 디마지오의 MVP에 결정적인 수훈갑을 달성했다. 성적은 .343 32홈런 114타점(테드)과 .315 20홈런 97타점(디마지오)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테드 윌리엄스는 MVP를 3회 놓쳤는데, 윌리엄스는 통산 MVP만 2회이며 하나만 더 추가해 3회 수상했을 시 본즈(7회)에 이은 역대 공동 2위다.

파일:external/cfs8.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MzNWJAZnM4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zEuanBn&filename=31.jpg

테드가 얼마나 기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최훈의 만화.


2.3. MVP와 뉴욕 양키스[편집]


테드 윌리엄스는 커리어 대부분의 시즌들이 MVP 컨텐더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15] 의외로 MVP의 수상 회수는 2회 (1946, 1949)가 전부다. 흥미롭게도 그가 MVP 급 시즌을 보낼 때마다 그의 앞길을 막은 것이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 이유는 간단하다. 기자들이 언론을 기피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테드 대신 비교적 온화하고 사교적인, 그리고 테드가 뛰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숙명적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의 선수들을 MVP 투표 때마다 몰표를 주었던 것. 특히 스프링 캠프 때 테드에게 욕을 먹은 보스턴 지역의 기자들은 테드의 미친 듯한 시즌 성적에도 불과하고 10위표 한 장 테드에게 주지 않아 테드를 여럿 물 먹인 전력이 있다. 이후 알버트 벨 역시 기자단과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MVP를 모 본에게 뺏긴 전력이 한 번 있지만 테드는 적게 잡아도 자그마치 세 번이나 뺏겼다. 아래는 그렇게 MVP에서 물을 먹었던 사례.[16]

1. 1941시즌
테드 윌리엄스 : .406/.553/.735/1.287 홈런 37 타점 120 조정OPS 235[17]
조 디마지오 : .357/.440/.643/1.083 홈런 30 타점 125 조정OPS 184

4할 테드 윌리엄스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조 디마지오. 당장 겉으로 보면 압도적인 스탯의 테드 윌리엄스였으나 MVP는 여지없이 온화하고 사교적인 뉴욕의 신사 조 디마지오가 가져갔다. 뭐 당시에는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 안타가 빅 이슈였고 윌리엄스 역시 인정한다는 인터뷰를 했으니 뭐 그렇다 치더라도...

2. 1942시즌
테드 윌리엄스 : .356/.499/.648/1.147 홈런 36 타점 137 조정OPS 216
조 고든 : .322/.409/.491/.900 홈런 13 타점 103 조정OPS 154

이듬해도 조정OPS가 200이 넘는 가히 신급의 성적을 올린 테드였지만 MVP는 역시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2루수 조 고든이었다. 심지어 테드는 이 해 커리어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 시즌이었지만 여지없었다.

3. 1947시즌
테드 윌리엄스 : .343/.499/.634/1.133 홈런 32 타점 114 조정OPS 205
조 디마지오 : .315/.391/.522/.913 홈런 20 타점 97 조정OPS 154

사실상 상대가 되지 않는 성적이었으나 기자들은 여전히 언론과의 전쟁 상태이던 테드 대신 조 디마지오를 선택했다. 이전 1941시즌은 4할 대 56경기 연속 안타의 대결이라도 있었기에 디마지오의 수상이 납득이 되었지만, 이 시즌은 그런 상징적 대결조차 없어 역사상 가장 아쉬운 MVP 선정으로 꼽히는 시즌이다. 참고로 이 시즌 테드는 커리어 두 번째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했는데 역시 홈런 타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볼넷 득점 총루타의 8관왕이었지만 MVP 그런 거 없다. 당시에 출루율이나 장타율을 중시하는 개념은 없었어도, 타율이나 홈런, 타점은 계속 중시하던 시기인데 그것만 따져도 압도하는 테드가 못 받은 건 야구 기자들의 꼬장이라 할 밖에 없었다.


2.4. 참전[편집]


파일:external/patriotden.com/TJI_TedWilliams-vi.jpg
출격 준비 완료!

메이저리그 프로야구 선수였던 테드 윌리엄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5.22일 야구선수와 병행이 가능한 미 해군 예비역[18] 병으로 입대했다. "이 정도면 이혼하신 어머니를 부양하기 충분하다." 테드가 참전을 선언하며 외친 말이었다. 그는 해군 예비역 병으로 복무 중 해군 예비역 항공 사관후보생 과정에 지원하여 조종훈련을 받았다. 테드는 1944.5.2일 조종 훈련 이수 후 미 해병대 예비역 소위로 임관하여, 해군 비행교육대에서 F4U 콜세어 전투기 비행훈련 교관으로 해군과 해병대의 전투조종사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19] 2차대전 막바지에는 동원소집되어 진주만에서 실전 배치를 기다리던 중에 종전을 맞았다. 종전 후에도 동원이 해제되지 않아 1946년까지 복무했고, 동원 해제 후에도 계속 해병대 예비역으로 군에 남았다.[20] 그는 선수 생활의 절정이었던 만 24세에서 26세 사이에 군생활과 선수생활을 겸했고, 그 중 1년은 동원소집되어 현역처럼 복무했던 것이다. 그러다 해병대 예비역 대위로 진급하고 14개월 뒤인 1952.5.1일에는 다시 동원령이 떨어져서 한국전쟁에 파병되었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사실 한국전에 참전했을 때 재입대를 일부러 감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뜬금없이 해군에서 신체검사를 실시하더니 덜컥 동원소집 영장이 나와버렸고 테드는 지난 8년간 비행기를 몰아본 적이 전혀 없고, 교관 노릇만 실컷 했을 뿐 실전 경험도 없는 예비역을 뭣하러 끌어가려드냐며 투덜댔으나 예비역으로 계속 복무하는 것보다는 동원소집되는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8주간의 재교육을 받고, 한국 포항 K-3 비행장에 주둔한 미 해병대 제33해병항공전대 311해병공격비행대대에서 팔자에도 없는 F9F 팬서 제트 전투기를 조종하게 되었다. 당시 대대에는 나중에 해병대 소장까지 진급한 랄프 스팬저와 우주비행사와 상원의원이 된 존 글렌이 있었는데, 존 글렌이 테드 윌리엄스의 윙맨이었다. 1952년 4월 30일 보스턴은 다시 군복을 입게 되는 테드 윌리엄스를 위해 'Ted Williams Day'를 정했고, 이날 그는 디지 트라웃으로부터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통산 324호 홈런을 뽑아냈다. 모두가 이를 테드의 마지막 경기이자 마지막 홈런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후일 알게 되지만 그것은 모두의 오판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테드 윌리엄스 대위는 해병 항공대의 F9F 팬서 조종사로 복무하며 총 39회의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한번은 평양에 폭격을 퍼붓고 오는길에 적군의 대공포에 맞아서 망했어요가 될뻔 하다가 수원 공군기지에서 위험천만한 동체 착륙을 하기도 했는데, 당시 일화에 따르면 동체착륙 직후 테드는 걸레가 된 자신의 비행기를 뒤로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밥먹으러 가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테드는 전투조종사 자격이 정지될 정도로 빡세게 복무했고[21] 전쟁이 끝나기 몇 달 전 1년간의 동원소집을 무사히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비행 자격을 상실할 정도로 빡세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테드였기에 야구에 대한 훈련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테드처럼 달팽이관이나 전정기관 근처에서 귓병이 발병하면 야구에 있어서도 크나큰 장애가 될 수 있었던 터. 그러나 그렇게 걸레짝이 된 몸을 이끌고 복귀한 테드는 37경기에서 .407의 타율에 13홈런 34타점이라는 신들린 타격을 선보였다. 그의 나이 만 34세였다.

테드 윌리엄스는 전성기 나이였던 1943~45년, 1952~53년을 군대에서 보냈다. 그가 만약 전쟁으로 인해 잃어버린 5시즌을 온전히 뛰었을 경우 그의 통산 성적은 어떻게 되었을까? 참고로 테드 윌리엄스의 참전 전후의 5시즌을 평균 내면 연 183안타 34홈런 124타점이 나온다. 3500안타, 700홈런, 2400타점의 기록이 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잃어버린 기록은 훗날 1991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이란 명예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ed_Williams_and_John_Glenn_1998.jpg

노년의 존 글렌테드 윌리엄스. 글렌이 우주왕복선 임무에 참여했던 1998년의 사진이다.

한편, 테드 윌리엄스는 한국전쟁 시기에 존 글렌과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고, 복무 후반기에는 글렌과 함께 비행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글렌은 훗날 테드 윌리엄스를 최고 수준의 파일럿이었다고 회고했다.


2.5. 이루지 못한 우승[편집]


MLB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들을 많이 남겼지만, 정말 불운하게도 월드 시리즈 우승은 한 번도 못했다.[22] 1946년에 그나마 한번 진출했지만, 세인트루이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당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가 브루클린 다저스와 단판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동안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과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여기서 윌리엄스는 팔꿈치에 공을 맞았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월드 시리즈에서 타율이 2할에 불과했고 보스턴은 패했다. 결국 1946년 포스트 시즌이 선수로서 치른 유일한 포스트 시즌이었다.[23] 포스트 시즌 성적은 7경기 30타석/25타수 5BB/5K 5안타 1타점 2득점 .200/.333/.200 .533OPS.


3. 평가[편집]


통산 성적은 타율 .344[24], 출루율 .482[25] 장타율 .634[26] 2,654안타, 521홈런, BB/K 2.85개,[27] 1,839타점, 2,021볼넷(통산 4위)라는 경이로운 수치를 기록했으며 2,000볼넷을 기록한 선수들 중 유일하게 1,000피삼진 미만에 20년 이상 뛰지 않은 선수이기도 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트리플 크라운을 두번이나[28] 달성했던 두 선수 중 일원이다.[29] 또한 메이저리그 3년 선배이자 4살 선배였던 조 디마지오와의 경쟁은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들 중 하나로 꼽히며, 1941년 기록한 0.406의 타율로 인해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미국 최고의 훈장으로 꼽히는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은 13명의 야구인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30]

또 12번의 출루율 1위와 9번의 장타율 1위, 10번의 OPS 1위에 올랐으며, 통산 성적에서 역대 출루율 1위(.482) 장타율 2위(.634) OPS 2위(1.116)[31], wRC+ 2위(188), 순장타율 6위(.289)를 지키고 있다. 타율에서는 역대 7위이지만 앞선 6명은 모두 1920년대 이전 데드볼 시대에 데뷔한 선수들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선수로서의 최전성기인 24~26세 시즌과 32~34세 시즌을 2차 세계대전한국전쟁에서 군복무로 빠졌다는 것. 선수 경력의 4분의 1인 약 5년 반을 군대에서 보낸 결과 2,500안타 500홈런 1,800타점 2,000볼넷에 그쳤다. 팬그래프스에서 전쟁이 없었다면 하는 가정하에 1943~1945년, 1952~1953년 예상 성적을 분석한 결과 9,976타수 2,387득점 3,445안타 679 2루타 98 3루타 648홈런 2,369타점 2,665볼넷 195 OPS+ 177.3 WAR 로 타점 역대 1위인 행크 아론의 2,297타점, 볼넷 역대 1위인 배리 본즈의 2,558볼넷, 득점 역대 1위인 리키 헨더슨의 2297득점을 누르고 타자의 기록이란 모든 기록은 거의 다 테드 윌리엄스의 이름으로 도배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삼진은 882개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32]

그가 활동할 당시의 리그 수준이 낮아 테드 윌리엄스가 타격지표에서 이득을 보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가 데뷔한 이후 리그 평균 타율은 2할 5~6푼정도로 떨어졌으며 그가 활약한 시기동안 리그 방어율은 3점대 중후반정도를 유지했다. 한마디로 그의 무대는 1920~30년대의 불꽃같던 타격시대 이후로 오히려 투고타저현상이 두드러지던 시기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리그의 상황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비율 성적으로 베이브 루스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이며, 참전으로 수년 동안의 공백을 겪었음에도 역대 통산 타격기록에서 10위 이내에 들어가고, 투고타저 흐름에서 다른 선수들보다 타율이 1할 이상을 앞섰던 윌리엄스의 타격 능력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할 수 있다.

상술했듯이 기록 면에서 보면 베이브 루스, 타이 콥과 함께 MLB 최고 타자 중 하나로 꼽힌다. 힘과 정교함이 모두 뛰어났으나, 루스는 장타와 어울리는 풀히팅 타격 기술(통산 장타율 1위, 통산 홈런 3위, 통산 출루율 2위), 콥은 탁월한 스피드를 활용할 다양한 배드볼 히팅 기술 및 주루 능력(통산 타율 1위, 통산 안타 2위, 통산 3루타 2위, 통산 도루 4위), 그리고 테드는 특출난 선구안을 이용한 타격 및 출루능력(통산 출루율 1위, 통산 장타율 2위)을 특징으로 가진 대타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테드 윌리엄스의 진가라고 할 수 있는 출루율 기록은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 이후에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고 통산 2위를 자랑하는 OPS도 1980년대 중반에나 나왔던 기록측정법이라, 한동안 그 실력에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참전 때문에 누적스탯이 타이 콥[33]이나 베이브 루스[34]에 비해 부족하기도 하고 보통 야구 관련 사이트에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를 뽑는다면 5위 안에 이 3명은 꼭 들어가는 편이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테디는 누적 스탯이 부족해서 저평가를 당하는 경향이 강한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4~5위에는 꼭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자리는 로저스 혼스비, 루 게릭, 스탠 뮤지얼, 윌리 메이스, 호너스 와그너, 행크 애런 등이 나눠먹는다.

경이적인 통산성적[35]


4.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테드 윌리엄스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39
BOS
149
675
185
44
11
31
131
145
2
107
64
.327
.436
.609
1.045
7.1
6.7
1940
144
661
193
43
14
23
134
113
4
96
54
.344
.442
.594
1.036
6.7
6.6
1941
143
606
185
33
3
37
135
120
2
147
27
.406
.553
.735
1.287
11.0
10.4
1942
150
671
186
34
5
36
141
137
3
145
51
.356
.499
.648
1.147
11.6
10.5
1943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복무)
1944
1945
1946
BOS
150
672
176
37
8
38
142
123
0
156
44
.342
.497
.667
1.164
11.8
10.6
1947
156
692
181
40
9
32
125
114
0
162
47
.343
.499
.634
1.133
10.5
9.5
1948
137
638
188
44
3
25
124
127
4
126
41
.369
.497
.615
1.112
8.5
8.3
1949
155
730
194
39
3
43
150
159
1
162
48
.343
.490
.650
1.141
9.9
9.0
1950
89
416
106
24
1
28
82
97
3
82
21
.317
.452
.647
1.099
4.3
3.9
1951
148
675
169
28
4
30
109
126
1
144
45
.318
.464
.556
1.019
7.1
7.1
1952
6
12
4
0
1
1
2
3
0
2
2
.400
.500
.900
1.400
0.3
0.3
1953
37
110
37
6
0
13
17
34
0
19
10
.407
.509
.901
1.410
2.3
2.0
1954
117
526
133
23
1
29
93
89
0
136
32
.345
.513
.635
1.148
8.4
7.5
1955
98
416
114
21
3
28
77
83
2
91
24
.356
.496
.703
1.200
7.1
6.9
1956
136
503
138
28
2
24
71
82
0
102
39
.345
.479
.605
1.084
6.3
6.1
1957
132
547
163
28
1
38
96
87
0
119
43
.388
.526
.731
1.257
9.7
9.7
1958
129
517
135
23
2
26
81
85
1
98
49
.328
.458
.584
1.042
4.5
4.0
1959
103
331
69
15
0
10
32
43
0
52
27
.254
.372
.419
.791
0.0
0.2
1960
113
390
98
15
0
29
56
72
1
75
41
.316
.451
.645
1.096
3.4
3.1
MLB 통산
(19시즌)
2292
9788
2654
525
71
521
1798
1839
24
2021
709
.344
.482
.634
1.116
130.4
121.8


5. 명예의 전당 통계[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테드 윌리엄스
122
326
354
72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Left Field (2nd)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테드 윌리엄스
123.1
69.2
96.2
좌익수 HOF 입성자 평균
65.2
41.5
53.3


6. 은퇴 후[편집]


은퇴 후 어부 생활을 하던 윌리엄스는 1966년 첫 투표에서 93.38%의 높은 지지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36]. 헌액식에서 윌리엄스는 명예의 전당이 니그로 리그 선수들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발언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37] 정작 그의 친정팀인 보스턴은 흑인선수를 가장 늦게 받았으며, 밤비노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던 것도 이것 때문이라는 의견도 분분했다.

1969년 윌리엄스는 워싱턴 세너터스(현 텍사스 레인저스)의 감독을 맡아 리그 꼴찌였던 팀을 지구 4위로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감독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윌리엄스는 1972시즌 후 해임됐으며 이후 다시는 감독을 맡지 않았다.

[38][39]

1999년의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은 테드 윌리엄스의 친정팀이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열렸다. 20세기의 끝자락에 있었던 1999년이었던 당해, 메이저리그에서는 200만 명이 넘는 팬들의 온라인 및 오프라인 투표를 거쳐 20세기를 수놓은 역대 최고의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100명을 선정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최다득표자 및 별도 패널의 선정으로 구성된 Major League Baseball All-Century Team을 선정하였으며 [40] 이 멤버들 중 올스타전 당시 생존해 있던 멤버들 대다수 및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들은 펜웨이 파크에 초청되어[41] 경기 전 내야에 모여서 영화배우 케빈 코스트너의 소개 속에 경기에 참석한 모든 현역 선수 및 펜웨이 파크 관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 전대미문의 화려했던 경기 전 이벤트의 화룡점정은 다름아닌 보스턴 레드삭스 역대 최고의 선수인 테드 윌리엄스의 등장이었다. 현역시절부터 당시까지 본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유서깊은 윌리엄스 버그의 우측 담장에 위치한 출입구를 통하여 메이저리그 올센추리 팀 멤버들 중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영원한 등번호 9번, 테드 윌리엄스가 올스타전 시구를 위하여 등장하던 당시 펜웨이 파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로 자신들의 영웅을 환영하였다. 테드 윌리엄스가 시구를 위하여 마운드 앞에 도착하던 시점에는 양 팀의 올스타 멤버와 내야에 모여있던 올센추리팀 레전드 역시 윌리엄스 곁으로 모여 잠깐의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후 내셔널리그 올스타 팀 멤버였던 토니 그윈[42]의 도움 속에 레드삭스의 레전드 포수였던 칼튼 피스크의 미트를 향해서 시구를 하였다. 2002년 세상을 떠나기 전 테드 윌리엄스가 야구팬들에게 가장 주목받았던 마지막 순간이었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의 선발투수였던 레드삭스의 에이스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내셔널 리그 올스타팀의 첫 타자였던 배리 라킨부터 2번 타자 래리 워커, 3번 타자 새미 소사, 4번 타자 마크 맥과이어 네 명의 타자를 연속으로 삼진아웃으로 잡아내는,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역사에 길이 남을 투구를 보여주었다.[43] 자세한 것은 페드로 마르티네즈 항목 참조.

2002년 7월 5일 심부전으로 끝내 그의 저주를 깨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사망 이후 시신은 알코어 생명 연장 재단냉동 보관되었다.

7. 이모저모[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살때 테드.jpg}}}||
6살 때의 테드 윌리엄스.
  • 지상에서 7m까지 솟았다가 스트라이크존 위를 살짝 통과하는 립 서웰(피츠버그)의 마구인 '이퓨스(eephus)'를 공략하여 펜웨이파크의 담장을 넘겨버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사실 배트 박스을 벗어나 타격을 했다고 실토했다고 한다.[44]

  • 펜웨이 파크의 우측 펜스 뒤에서는 윌리엄스 버그라는 불펜 피칭 장소가 있다. 극단적인 당겨치기를 좋아했던 테드의 홈런 개수의 증가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후에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었던 거포 중에서는 좌타자가 꽤 있다(칼 야스트렘스키, 데이빗 오티즈 등이 있었다). 하지만 우중간이 짧아 보이는 건 착시에 가깝고, 실제로 펜웨이 파크는 좌타자가 홈런 치기 가장 힘든 구장 중 하나다. 베이브 루스를 위해 우중간을 당긴 양키 스타디움과의 비교는 솔직히 공정치 못하다.

  • 펜웨이 파크의 우측 외야석에는 "The Lone Red Seat"라고 불리는 유일한 붉은 좌석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테드 윌리엄스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투수 프레드 허친슨을 상대로 쳐낸 비거리 502ft(약 153m) 초대형 홈런이 떨어진 곳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는 본 내용 작성 시점인 2023년까지 펜웨이 파크 역사상 최장거리 홈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 영구결번 되기 까다로운 팀 중 하나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영구결번된 케이스. 하기야 어느 팀에 가더라도 이 정도 성적을 내고서 영구결번을 안준다면 더 이상한 것이겠지만.

  • 1984년에 제작된 미국의 야구영화 <내추럴>의 주인공 로이 홉스(로버트 레드포드 분)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다. 등번호가 같은 9번이고, 극중 자신의 소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본 항목의 맨 위에 인용된 "저기 최고의 선수가 지나간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라고 말한 점 등이 근거다.

  •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유대인 병사 도니 도노위츠, 일명 ‘곰 유대인’이 야구방망이로 나치 장교의 머리를 후려치며 이 사람을 언급한다[45]. 그 때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좋은 대사.

  • 엄청난 기부천사다. 그리고 아이들을 끔찍히 사랑했다. 소아암 치료 후원을 열성적으로 했고, 은퇴 이후에도 여전했다. 박동희 칼럼,기사삭제로 MLB 파크사이트로 대체함[46]

  • 윌리엄스 사후, 그의 도움으로 암을 극복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윌리엄스 씨의 미소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미소를 봤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완성된 미소를 보여주고자 여러분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사내입니다.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면 우리의 얼굴을 봐주십시오. 그가 곧 우리입니다.


  • 그의 별명으로는 'Splendid splinter'가 있다. 우리 말로 바꾸면 '화려한 파편' 정도로 윌리엄스가 치는 타구들을 묘사한 별명이다.

  • 2023년 6월 30일 대한민국 국가보훈부는 미 해병대 소속으로 참전한 테드 윌리엄스를 7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하였다. ##

8. 어록[편집]


꿈에서 난 랜디 존슨을 상대로 타석에 들어섰지.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외쳤어. '상대는 랜디 존슨이야. 밀어치라고, 밀어쳐'. 동료들에게 대답했지. '난 한번도 밀어쳐본 적이 없는걸'.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어.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초구가 날아왔고 난생 처음으로 밀어쳤지. 깨끗한 좌전안타였어. 허허허"

ㅡ 죽기 전 기자들을 상대로 옛 이야기를 풀어가듯 말했다고 한다.


이보게, 만약 스트라이크였다면 윌리엄스씨가 자네에게 알려줬을 걸세.

ㅡ 스트라이크가 아니냐고 따지는 포수에게 주심이 한 말. 이는 로저스 혼스비의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반개를 허용한다면 스트라이크 존은 무려 33%의 넓이가 늘어난다.

ㅡ 선구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나는 매일 밤마다 알코올로 배트를 닦곤 했다. 배트를 우체국으로 들고 가서 그 무게를 달아보기도 했고, 나중에는 레드삭스 클럽하우스에 저울을 들여놓기도 했다. 배트는 아주 짧은 시간에 30그램 정도 무게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지금 삼진을 당하러 가는 게 아니다. 이 나무 방망이로 야구공을 저 멀리 날려 보내러 가는 거다.


나는 거의 8,000번 가까이 타석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 8,000번은 나에게 하나하나 기억하고 되새길 수 있는 설레는 모험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가 300홈런을 칠 때까지 상대 투수가 누구였고 볼 카운트는 어떠했는지 구종과 코스가 무엇이었는지를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타격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관찰력의 문제고 경험과 실수로부터 얼마나 배우느냐의 문제다.


어떤 타자도 모든 것을 갖추지는 못한다. 완벽한 타자란 없다. 베이브 루스도 홈런보다는 삼진을 훨씬 더 많이 당했다.[47]


위대한 타자가 되어 꽉 찬 공을 안타로 만들기보다, 좋은 타자가 되어 홈 플레이트를 통과하는 공을 안타로 만드는 것이 세 배는 수월하다. (I have said that a good hitter can hit a pitch over the plate three times better than a great hitter with a questionable ball in a tough spot.)


자, .250짜리 타자는 40번 타석에 들어서 안타를 열 번 친다. 만약 이 타자가 나쁜 공은 버리기로 했다면 5번 정도 볼 넷을 얻을 수 있겠지. 이러면 타수는 5개 줄어들고, 35타수 10안타가 되며, 그는 .286짜리 타자가 된다. (Now, if a .250 hitter up forty times gets 10 hits, may be if he had laid off bad pitches he would have gotten five walks. That's five fewer at-bats, or 10 hits for 35, or .286.)


심판에게 따지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첫째는 그래봤자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길게 놓고 보면 심판들의 판정이 계속 틀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괜히 판정에 신경 쓰느니 다음 공이나 다음 타석을 준비하는 것이 낫다.


야구 경기를 보게 된다면, 초구를 치는 타자의 타율이 어떤지 살펴보라. 아마도 1할도 안 되거나 기껏해야 2할쯤 될 것이다.[48]


배트를 크게 휘두르는 타자는 큼지막한 안타를 치는 선수가 아니라 큼지막한 타구를 날리는 선수일 뿐이다.


만약 이제까지 타자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다.


누군가 빨리 4할을 쳤으면 좋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4할을 친 사람에 대한 질문을 그 선수에게 쏟아낼 것이며 그를 괴롭힐 것이다.

ㅡ 테드 윌리엄스, 타격의 과학에서.


마지막으로 저는 너무나 행복하였으며 제가 미국에서 태어난 것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인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게된 것이 태어난 이래 얼마나 크나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ㅡ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당시 연설의 마지막 부분.


사첼 페이지 같은 니그로리그 선수도 명전에 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첼 페이지와 조시 깁슨처럼 단지 기회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니그로 리그 선수들의 이름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ㅡ 1966년 첫 투표 당시, 그리고 사첼은 이후 1971년에 헌액되었다.



9. 외부 링크[편집]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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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3~1945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1952~1953년의 일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군대에서 복무했기에 야구선수로서 뛸 수 없었다.[2] MLB 마지막 4할타자 였지만 2020년 12월부터 MLB 사무국이 니그로리그의 기록도 메이저리그의 기록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MLB의.마지막 4할타자는 조시 깁슨이다.[3]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말한다.[4] 훗날 이 장면을 테드 윌리엄스의 딸인 클라우디아와 베이브 루스의 손녀인 린다가 재현해내기도 했다.#[5] 현 MLB 팀과는 다르다.[6] 그가 참전으로 수백경기를 날렸다는걸 기억하도록 하자.[7] 3할 9푼 9리 5모 5사[8] 당시에는 희생플라이가 따로 집계되지 않았다.(1954년부터 집계) 현재 기록으로 환산하면 .411[9] 1950 시즌 기준[10] 테드윌리암스는 미세한 어퍼스윙에 로테이션히팅, 즉 허리를 돌리면서 방망이를 끌어안는 타격스타일이라 잡아당기는 능력이 좋았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을보면 밀어치는 방법등이 자세히 기술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편집증적인 당겨치는 타자는 아닌걸로 보인다.[11] 작가 존 업다이크는 “신은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법(Gods do not Answer letters)”이라며 윌리엄스의 태도 논란을 재치있게 표현했다.[12] 보드로가 자서전인 '선수 겸 감독(Player-Manager)'에서 밝히기를, 원래 윌리엄스 시프트 자체는 전략적 판단보다는 테드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아보려는 목적으로 생각해 냈던 것이라고 한다.[13] 그의 통산 핫 존 9분할 타율. 모든 존의 타율이 .380 ~ .400 사이인 만큼, 어디다 던져도 일정한 타격을 보장한다.[14] 사실 베이브 루스도 기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타이 콥과 비슷하게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적은 득표를 기록한 게 이 때문이었다. 문제는, 베이브 루스 쪽은 선수생활 중 진짜 사생활의 잘못이나 문제가 많아서 기사가 나고 이에 예민하게 대응하면서 나빠진 건데, 테드 윌리엄스는 사생활의 문제같은 것도 없는데 그냥 보이는 태도 가지고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15]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의 통산 OPS는 1.116으로, 그의 현역 기간 (1939~60년)동안 한 시즌이라도 테드의 통산 OPS를 넘은 선수는 지미 폭스(1939), 미키 맨틀(1956,1957), 스탠 뮤지얼(1948), 조 디마지오(1939) 단 4명 뿐이다. 맨틀, 뮤지얼, 디마지오는 당 시즌에 모두 MVP를 수상했고, 폭스는 같은 시즌에 MVP를 탄 디마지오와 리그가 겹치는 바람에 2위에 그쳤을 뿐 다른 시즌이었으면 MVP를 충분히 타고도 남을 성적이었다. 게다가 그의 fWAR 를 보면 MVP급, 즉 6+ fWAR 가 아닌 시즌은 1950년, 1958년~1960년 밖에 없었다. 22저지가 거의 순수 타격만으로 WAR 10을 찍어내는 역대급 시즌을 보냈는데, 그런 22저지의 OPS가 1.111이다. 역사에 남을 역대급 시즌을 보냈음에도 테드의 통산 OPS조차 넘지 못한 것이었다.)[16] 그 외에 당시 레드삭스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것 또한 한 몫한다. 예나제나 투표권을 가진 기자들은 MVP투표에서 팀 성적을 일정부분 반영하였는데, 테드가 뛰었던 기간동안 레드삭스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1946년 단 1회 뿐이다. 이 시기는 흔히들 일컫는 올드-그레이트 양키스의 2기가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도맡아 하던 시기였다.[17] 출루율 .553은 배리 본즈가 2002년 .581로 갈아치우기 전까지 60년간의 세월동안 역대 1위였다. 홈런1위는 덤.[18] 미군의 예비역은 처음부터 민간에서 바로 예비역으로 입대하고, 주말에만 출퇴근 근무하며 연간 2주 소집훈련을 받는 역종으로 우리로 치면 상근예비역에 가깝다.[19] 테드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에 레드삭스 동료였던 자니 페스키도 해군 비행훈련에 입교하여 군복무를 했다. 비행 훈련 시절 함께 콕핏에 올라서 찍은 사진도 있다.[20] 출퇴근 하는 파트타임 예비역은 복무기간 중 최대 24개월까지 동원소집이 가능하고, 동원소집 기간은 특별볍으로 연장이 가능하다.[21] 한국전쟁 말기에 폐렴에 걸려 입원했다가 귓병이 발견되어 비행 자격이 정지되었다.[22] MLB 선수들 대부분은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번도 못하거나 한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포스트시즌에도 한번도 진출해보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도 많다.[23] 30개 팀 중 40%에 해당하는 12개팀이 포스트 시즌 진출권을 얻는 지금과 달리, 윌리엄스가 선수로 뛰던 시절은 16개팀 중 양대리그 우승팀이 바로 월드시리즈를 가졌기 때문에 플레이오프 진출의 난이도가 훨씬 까다로웠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권 확대의 역사를 말하자면, 1969년 각 리그가 동부/서부 디비전으로 개편되면서 리그챔피언십시리즈가 창설되면서 (기존의 2장에서) 플레이오프 자격이 4장으로 확대되었고, 이후 1994년에 중부 디비전이 새로 창설되면서 8장(각 디비전 챔피언 + 와일드카드 1장), 2012년 10장 (와일드카드 2장으로 확대), 2022년 12장(와일드카드 3장으로 확대)의 순서로 증가했다.[24] 역대 6위[25] 역대 1위[26] 역대 2위[27] 쉽게 말해 볼넷 3번 얻을 때 삼진 1번 당했다는 것이다.[28] 1942, 1947년. 안타깝게도 이 해들의 MVP는 뉴욕 양키스 소속의 조 고든, 조 디마지오에게 내주었다. 모두 명예의 전당 헌액자.[29] 나머지 한명은 역사상 최고의 2루수이자 사고뭉치로 악명높은 로저스 혼스비.[30] 조 디마지오, 재키 로빈슨, 테드 윌리엄스, 행크 애런, 로베르토 클레멘테, 프랭크 로빈슨, 벅 오닐, 스탠 뮤지얼, 어니 뱅크스, 요기 베라, 윌리 메이스, 베이브 루스, 마리아노 리베라.[31] 그 위는 당연 베이브 루스[32] https://blogs.fangraphs.com/zips-time-warp-ted-williams/ 참조. 1942년 이후가 아닌, 1942년 이후 3년, 1952~1953년 기록 참조. 맨 마지막에 있다.[33] 각분야 타격 성적이 매시즌 10등 안에 드느냐, 1등을 몇번 하느냐로 누적 점수를 매기는 명예의 전당 Gray Ink나 Black Ink에서도 테드가 두 사람에게 조금 부족한 편이다. 그것은 메이저리그 Gray Ink 역대 1위가 타이 콥이기 때문이기도 하며(베이브 루스 7위, 테드 윌리엄스 11위)[34] Black Ink 역대 1위가 베이브 루스이기 때문(타이 콥 2위, 로저스 혼스비 3위, 테드 윌리엄스 4위)이기도 하다.[35] 베이스볼 레퍼런스의 해당 페이지는 해당 년도 1위를 기록한 스탯을 볼드체로 표시하고 있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22세부터 32세 시즌 중 2차대전 군복무 3년/부상 1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6년의 타격 기록 대부분이 볼드체. 그후에도 한국전쟁 시기를 제외한 39세 시즌까지 타율, 출루율, OPS에서 거의 1위를 놓치지 않았으며, 이혼 조정 때문에 첫 한달을 날려먹고 5월 13일부터 출전했던 1955년 시즌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탓에 고의사구 1위 외에는 공식 1위를 기록한 스탯은 없지만 장외 타격, 출루율, 장타율, OPS, OPS+ 1위를 쓸어담았다.[36] 최초의 5인월터 존슨을 제외한 4명, 밥 펠러에 이어 첫 투표에 90% 넘는 지지율로 헌액된 6번째 선수이다. 테드 다음으로 이 조건을 충족한 선수는 동시대의 또 다른 강타자 스탠 뮤지얼.[37] "...그리고 언젠가는 사첼 페이지조시 깁슨처럼 단지 기회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니그로 리그 선수들의 이름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and I hope some day the names of Satchel Paige and Josh Gibson in some way can be added as a symbol of the great Negro players who are not here only because they weren’t given a chance.)" 그리고 그의 언급이 영향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1971년부터 니그로 리그 위원회를 통해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들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첫 해인 1971년에 페이지가, 그 이듬해인 1972년에 깁슨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38] 영상 초반 테드 윌리엄스의 등장 속에 시작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는 22년간 레드삭스의 유니폼을 입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4년 반 이상을 미 해병대의 유니폼을 입고 뛰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위대한 구장의 좌측 담장 앞을 지켰지요. 58년 전, 그는 역사상 마지막으로 시즌 4할 타율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521개의 홈런을 쳤으며 그 중 하나는 그의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나왔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현존하는 역사상 최고의 타자이자 등번호 9번에 빛나는 명예의 전당 멤버, 전설적인 야구선수인 테드 윌리엄스를 환영해 주십시오.'[39] 이 영상 속에 나오는 올스타전 팀 선수들 중 일부는 이 글이 작성된 시점인 2021년 쿠퍼스타운 멤버이기도 하다. 토니 그윈, 데릭 지터, 마이크 피아자, 제프 배그웰, 칼 립켄 주니어, 랜디 존슨, 켄 그리피 주니어, 조 토레, 이반 로드리게스 등등. 여담으로 이 때 올스타전에 참가한 당시 64명의 현역 선수들 중 2021년 현재 쿠퍼스타운에 입성한 명예의 전당 멤버는 11명이다.[40] 이때 선출된 선수들을 투표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투수는 놀란 라이언, 샌디 쿠팩스, 사이 영, 로저 클레멘스, 밥 깁슨, 월터 존슨, 워렌 스판, 크리스티 매튜슨, 레프티 그로브가 뽑혔으며 포수로는 쟈니 벤치, 요기 베라가 뽑혔다. 1루수에는 루 게릭과, 마크 맥과이어, 2루수에는 재키 로빈슨로저스 혼스비, 3루수에는 마이크 슈미트브룩스 로빈슨이 뽑혔으며 유격수에는 칼 립켄 주니어, 어니 뱅크스, 호너스 와그너가 뽑혔다. 외야수에는 베이브 루스, 행크 애런, 테드 윌리엄스, 윌리 메이스,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 타이 콥, 켄 그리피 주니어, 피트 로즈, 스탠 뮤지얼이 뽑혔다. 멤버 구성을 보면 알겠지만 이 리스트에 있는 선수들 중 스테로이드 시대를 상징하는 로저 클레멘스와 마크 맥과이어, 도박사건으로 영구제명을 당한 피트 로즈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이 문서가 작성된 2022년 현재 모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들이다. 그리고 이 선수들 중 로저 클레멘스와 마크 맥과이어, 칼 립켄 주니어, 켄 그리피 주니어 네 명의 선수는 투표 당시 현역으로 뛰었던 선수들이며 워렌 스판과 크리스티 매튜슨, 레프티 그로브, 호너스 와그너, 스탠 뮤지얼은 투표 순위에서는 밀렸지만 패널들의 선택으로 올 센츄리 팀에 이름을 올렸다.[41] 여기에 초청되어서 내야라인에 선 선수들의 면면도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스티브 칼튼, 로저 클레멘스, 데니스 애커슬리, 밥 펠러, 롤리 핑거스, 밥 깁슨, 후안 마리샬, 로빈 로버츠, 톰 시버, 워렌 스판, 칼튼 피스크, 하먼 킬러브루, 에디 머레이, 조 모건, 조지 브렛, 폴 몰리터, 브룩스 로빈슨, 마이크 슈미트, 어니 뱅크스, 아지 스미스, 로빈 욘트, 행크 애런, 루 브록, 리키 헨더슨, 레지 잭슨, 알 칼라인, 랄프 카이너, 윌리 메이스, 스탠 뮤지얼, 프랭크 로빈슨, 칼 야스트렘스키가 있다. 이 문서가 작성된 2022년을 기준으로 보면 로저 클레멘스를 제외한 모두를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이며 1940년대를 현역으로 보낸 레전드급 선수들이 공식석상에 함께 모인 건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42] 토니 그윈은 1994년, 테드 윌리엄스의 마지막 4할타율 달성 이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타율인 3할9푼4리의 타율을 남겼고 이 글이 작성된 시점인 2021년까지도 통산타율 3할3푼8리로 2차대전 이후 테드 윌리엄스 다음으로 통산타율 2위에 빛나는 레전드 선수다. 2차대전 시대의 타격의 신과 90년대 타격의 신이 한 자리에서 만난 격.[43] 이 때의 올스타전 첫 4타자 연속 삼진 기록은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이 시작된 역사로 최초로 수립된 기록이었다. 더군다나, 상대한 타자들 중 3, 4번 타자는 스테로이드 시대를 상징하는 타자이자 당시 압도적인 홈런레이스를 벌였던 새미 소사와 마크 맥과이어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때의 페드로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 따로 없었다.[44] 물론 등록되지 않은 배트를 썼다든가, 배트에 코르크심을 심었다든가, 이물질을 묻힌 손으로 배트를 잡았다든가 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배트 박스를 벗어나 타격한 것은 규정상 부정타격이다.[45] 테드 윌리엄스가 장외 홈런을 쳤다! 펜웨이파크가 열광의 도가니구나! 공이 담 넘어 랜스다운거리까지 날아갔어.[46] 해당 칼럼의 본론은 윌리엄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김동주의 선수 외적인 행실들에 관한 우회적 비판이다.[47] 물론 예외는 있다. 바로 라이벌 디마지오. 디마지오는 마지막 시즌 직전인 1950년까지 349개의 홈런을 쳤고 그보다 적은 333개의 삼진만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은퇴 시즌에 홈런은 12개에 그친 반면 무려 36개의 삼진을 당하며 최종적으로는 361홈런 369삼진이 되고 말았다.[48] 간혹 초구의 타율이 리그 평균 타율보다 높게 형성된다는 것을 이유로 테드 윌리엄스를 야알못 취급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초구의 타율이 높은 것은 전형적인 통계의 함정이다. 물론 블라디미르 게레로 같이 초구 좋아하는 명전급 강타자의 사례를 들어서 초구 타격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식으로 소수의 예외를 들어서 우긴다면 톰 글래빈이 300승 찍고 명전갔으니까 투수가 구속 좀 낮아도 명전가는데 별 상관없다는 논리 또한 성립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초구 좋아하는 강타자보다 초구 안 좋아하는 강타자를 찾기가 훨씬 쉽다. 예를 들어 현역 최고의 타자 마이크 트라웃의 경우 2019시즌 종료 시점 기준으로 통산 5273타석에 들어왔는데 그 중 초구를 타격해서 인플레이 상황으로 만든 타석은 268타석으로 약 19.68 타석 당 한 번의 비율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