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베너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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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베너블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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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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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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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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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3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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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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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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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25대




첼시 FC 역대 주장
로이 벤틀리
(?~?)

테리 베너블스
(?~1969)

론 해리스
(1969~1979)


테리 베너블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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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수상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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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잉글랜드의 축구감독


이름
테리 베너블스
Terry Venables
본명
테렌스 프레데릭 베너블스
Terence Frederick Venables
출생
1943년 1월 6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대거넘
사망
2023년 11월 26일 (향년 81세)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
직업
축구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감독
소속
선수
첼시 FC (1960~1966)
토트넘 홋스퍼 FC (1966~1969)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1969~1974)
크리스탈 팰리스 FC (1974~1976)
감독
크리스탈 팰리스 FC (1976~1980)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1980~1984)
FC 바르셀로나 (1984~1987)
토트넘 홋스퍼 FC (1987~1991)
잉글랜드 대표팀 (1994~1996)
호주 대표팀 (1997~1998)
크리스탈 팰리스 FC (1998~1999)
미들즈브러 FC (2000~2001 / 공동 감독)
리즈 유나이티드 FC (2002~2003)
국가대표
2경기 (잉글랜드 / 1964)

1. 개요
2. 선수 시절
3. 감독 시절
4.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잉글랜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가수.[1]


2. 선수 시절[편집]


도허티 감독의 지도아래 유스 팀을 통해 퍼스트팀으로 올라왔다.

그는 17번째 생일이 지난 후인, 1960년 2월에 데뷔를 했고 그해 주전이 되었다. 첼시는 1962년에 베너블스가 부상으로 12경기 밖에 뛰지 못하자 강등되고 말았지만 1년 후, 베너블스와 함께 다시 1부 리그로 돌아왔다.

그는 첼시가 1부 리그에서 5위, 다음 시즌 3위, 그 다음시즌에 5위를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미드필드를 지배했고, 강력한 태클을 할 수 있는 훌륭한 패서였다. 또한 그는 득점 감각이 좋았는데, 1965년 인터-시티 페어스컵 로마전에서 첼시 역사상 가장 멋진 골들 중 한 골을 넣었다. 프리킥 상황에서 날아오는 공을 10야드 밖에서 슛으로 연결시켜 골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베너블스는 리그 컵 결승에서 골을 넣어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것은 그가 첼시에서 이루어낸 유일한 성공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베너블스는 1965년 4월 블랙풀과의 경기를 앞두고 통금시간을 어긴 8명의 선수들중 1명이 되어, 토미 도허티 감독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그해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3. 감독 시절[편집]


크리스탈 팰리스로 이적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출장이 많지 않은 상태였고, 마침 전임 감독이던 말콤 앨리슨이 승격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팀을 떠나게 되자 선수에서 바로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감독 승격 직후 팀을 잘 추스리고 유망주들을 잘 키워내서 폭풍 승격을 이뤄내며 3부리그에 있던 팀을 3년만에 1부 리그까지 승격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최상위 리그에서의 두번째 시즌에 영입한 선수들이 망하면서 크리스탈 팰리스는 하위권으로 처지게 되고, 10월 경에 QPR의 부름을 받아서 다시 2부리그 팀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그리고 베너블스가 통수치고떠난 후 크리스탈 팰리스는 8년동안 1부리그로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1980년에 팬들의 환영을 받고 2부 리그 팀인 QPR의 감독으로 돌아와서는 게리 워독, 밥 헤이즐, 클라이브 앨런 등을 축으로 1982년에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FA컵 결승전까지 팀을 캐리했으나 결승전에서 토트넘 핫스퍼를 만나서 패배하였고, 1983년에는 클라이브 앨런의 공격력을 바탕으로 다시 팀을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팀의 1982/83 시즌의 최종 승점은 2위인 울버햄튼 원더러스보다 10점이나 앞설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승격 직후인 1983-84 시즌에는 데뷔 2년차인 앨런 맥도널드를 적극적으로 중용하면서 팀을 5위까지 팀을 끌어올리고 오랜만에 UEFA컵 진출권을 따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FC 바르셀로나의 부름을 받고 또 다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에도 팀과의 이별이 썩 깔끔하지는 못한 편.

베너블스는 바비 롭슨 경의 추천으로 바르셀로나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우승컵 1개와 코파 델 레이 1개를 획득하는 모습을 보였고 1985-86 시즌 유로피언 컵 결승전까지 팀을 올리는 공헌을 하였으나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사연뻥을 시전하여 자멸하였고, 1987년 UEFA 컵에서 만난 던디 유나이티드에게는 홈/어웨이 모두 패하며 결국 짤렸다.

1달의 휴식기간 후 토트넘 핫스퍼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FC 바르셀로나 시절에 같이 지내던 게리 리네커를 토트넘으로 불러들여서 토트넘의 약진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잉글랜드 산 악마의 재능인 폴 개스코인을 토트넘으로 불러들여 포텐이 터지게 한 것도 베너블스 시절의 업적. 1990/91 시즌 토트넘의 마지막 FA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1994년에는 잉글랜드가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해버리자 전임 감독인 그레이엄 테일러를 대신하여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망가진 팀을 재구축하여 유로 1996 당시까지 팀을 잘 끌고 왔다. 유로 96이 잉글랜드에서 열리기도 했던 터라 영국인들의 유로 96 우승에 대한 열기는 매우 높은 편이었는데, 4강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서 1:1로 비겼고, 페널티킥에서 6:5로 지고 말았다. 한국으로 치자면 홈에서 벌어진 월드컵 4강에서 일본에게 진 것과 같은 모양새였던 터라, 이 패배 이후로 베너블스는 국가대표팀을 사임하게 된다. 하지만 이 독일전 패배가 베너블스가 이끈 삼사자군단의 23경기 중에서 불과 두번째로 패배한 경기였다.[2]

1996년에는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원정경기 1:1 무승부로 비겼고, 홈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2:0으로 앞서던 와중에 이란이 추격골 두 골을 넣어버리면서 원정골 규칙에 의해서 본선행 티켓을 놓치게 된다.[3] 이로 인해 다시 국가대표팀에서 사임하게 된다.

그러다 잠시 포츠머스의 구단주를 역임하기도 하고, 옛 소속팀이자 감독으로 첫 커리어를 밟은 크리스탈 팰리스로 돌아가서 팀을 안정화시키긴 했으나 구단 보드진과의 불화로 인하여 1년만에 사임하게 되었고, 2000년 12월부터 브라이언 롭슨 감독을 보좌하기 위해 미들즈브러의 공동 감독으로 부임하여 14위로 잔류시키는 데 공헌했다가, 시즌이 끝난 뒤 롭슨이랑 같이 떠났다.

잠시 야인 생활을 하다가 리즈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리오 퍼디낸드만 팔고 나머지 스쿼드는 최대한 보존한 상태의 선수단이었기에 팬들의 기대감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리그 컵과 유에파컵에서 모조리 광탈하고 리그 순위도 하위권으로 쳐지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팬들은 그야말로 멘붕. 당시까지만 해도 팬들에게 리즈 유나이티드의 심각한 재정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탓에 팬들의 주 까임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2003년이 시작되면서 리즈 유나이티드는 감독과 상의없이 선수를 팔아댔다. 특히 당시 잉글랜드의 최고 수비수 유망주 중 하나였던 조나단 우드게이트를 뉴캐슬로 팔아버린다는 이야기가 돌자 베너블스가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으나 구단주 피터 리즈데일은 그런 거 없이 그냥 팔아버리면서 시즌을 시작하게 시켰다. 당연하게도 팀 분위기는 개판에, 우드게이트 뒤를 이어서 몇몇 선수가 '감독의 승인 없이' 팔려나갈 수 있다는 루머까지 떠돌게 되자 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을 달려버리는 상황. 결국 팀을 강등권으로 떨궈버리는 상황에서 베너블스는 팀을 떠나게 된다. 다행히도 이 시즌 감독대행이던 피터 리드가 아스날 FC를 잡아내는 기적을 보이면서 간신히 잔류에 성공하게 되지만...그 다음시즌에는...망했어요

2005-06년부터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수석 코치로 활동하게 된다. 그 당시 감독이 스티브 맥클라렌인데 대체로 자신의 나이보다 어린 사람을 수석코치로 쓰는 경우가 많은 축구계에서 자신보다 경력이 많고 전임 국가대표 감독으로까지 활동하였던 베너블스가 수석코치로 활동하게 되니 당시 팬들과 언론이 많이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당시 팬들의 반응은
1. 맥클라렌이 아무래도 나이가 어리니 맥클라렌의 경험 부족을 채워줄 노회한 감독급 인재를 영입한 것이다.
2. 맥클라렌이 못하면 바로 베너블스로 갈아치우려는 것 같다.

라는 의견이 많았으나, 잉글랜드가 유로 2008 예선에서 졸전 끝에 광탈해 버리자 맥클라렌과 함께 같이 짤려나갔다.

그러고 난 후 논 리그의 웸블리 FC에서 기술이사로 근무하며 노년을 보내고 있다.

현지 시각 기준 2023년 11월 26일, 향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이야깃거리[편집]


2014년에 스페인에 La Escondida라는 호텔과 레스토랑을 오픈하였다고 한다.

풋볼 매니저에서 보면 리즈 유나이티드 구단에서 싫어하는 감독으로 나올 정도로 리즈 유나이티드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감독 몰래 선수를 판 것 때문에 보드진과 충돌이 생긴 것이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고, 2002 월드컵 직후의 그나마 쓸만한 스쿼드를 가지고도 팀을 하위권으로 꼬라박아서 팬들에게도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편. 리즈시절에 구단주인 피터 리즈데일과 짝짜꿍하면서 돈을 신나게 질러댄 후에 사임해버린 데이비드 오리어리 감독과 비교해보면 재정 위기가 슬슬 드러나는 불리한 상황에서 팀을 맡은 부분은 감안해야 하지만 비슷한 스쿼드를 가지고 리그 4위를 기록한 데이빗 오리어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이 나빴다. 게다가 02-03시즌의 강등권 성적으로 인해 EPL에서 나누어주는 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리즈의 몰락이 조금 더 빨리 이루어지기도 했던 것도 있기에 리즈 팬덤에서는 강하게 비판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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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곡의 싱글을 발표한적이 있다. 2010년엔 엘비스 프레슬리'If I Can Dream을 커버하였는데, UK 차트 23위에 오르는 저력을 보여주었다.[2] 승부차기 패배이기 때문에 공식 기록은 무승부로 기록된다. 즉 공식 기록에 따르면 베너블스의 국대 감독 커리어 유일한 패배는 한 번 뿐인데, 1995년 친선 컵대회에서 브라질에게 당한 1-3 패배가 그것이다.[3] 호주가 월드컵 본선에 가장 가까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