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르 지프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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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서기장이자 국무회의 주석이자 총리.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한 인물이며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역사는 사실상 그와 같은 길을 걸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정권 붕괴 후 총살당한 이웃나라 루마니아의 전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는 달리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축출된 후에도 부정부패 혐의로 인한 재판 참석과 가택 연금 이외에는 커다란 처벌을 받지는 않았으며 실권한 후인 1998년 5월 노환으로 자연사했다.
2. 생애[편집]
1911년 소피아 근교의 한 마을인 프라베츠(Правец, Pravets)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난한 가정 사정으로 인해 대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 졸업 학력[1] 으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28년 공산주의 청년 동맹에 가입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친 소련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였으며 그 공로로 종전 직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에 의해 불가리아가 공산화되자 공산당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어 농업 집단화를 이끌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자 강경한 스탈린주의자였던 벌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가 소련의 압력으로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하고 자신은 수상에만 남았으며 온건주의자였던 그가 1954년 3월 4일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니키타 흐루쇼프를 적극 지지하며 불가리아 내에서 탈 스탈린 움직임을 주도하던 그는 권력을 서서히 강화하면서 1956년에 수상직을 차지하고 여전히 권세를 휘두르던 체르벤코프를 개인숭배자로 비판하여 실각시키는 데 성공해 마침내 집권했다. 1962년에 이르면 1인 지배 체제를 사실상 굳혔다. 1인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나서 1964년 흐루쇼프의 축출 후에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자 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원국으로서 진압군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친소 노선을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1965년 촐로 크리스티프[2] 를 위시한 불가리아의 몇몇 정치인들이 온건파 지프코프를 몰아내고 민족주의, 스탈린주의 정권을 설립하고자 했으나[3] 발각되기도 했다.[4]
경제 면에서 농업 집중 육성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시장 경제 요소를 어느 정도 도입하여 코카 콜라의 불가리아 진출도 허용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취했지만 동시에 불가리아 인구의 약 1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던 튀르키예인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하고 민족의 다수를 차지하는 불가리아인들을 우대하는 불가리아 민족 중심의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고 정치 민주화를 억압하는 등 독재자로서의 면모도 드러내기도 했었다. 이 때의 탄압으로 불가리아를 떠난 터키인 중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역도 선수 나임 쉴레이마노을루(Naim Süleymanoğlu, 불가리아식으로는 Наим Сюлейманов)가 있었는데 1986년 터키로 망명하여 불가리아식 성인 술레이마노프를 터키식인 쉴레이마노을루로 바꿨다. 실제로 구 공산권 국가들의 공산주의 독재자들 중 의외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은 말 할 것도 없고 불가리아와 인접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도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을 거부하고 제3세계의 지도국을 자처하면서 독자적인 사회주의, 민족주의 체제를 구축하며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했고 북한의 김일성이 정치적 지지를 위해 주체사상이라는 명분 하에 민족주의를 이용한 전례도 있었다.
3. 몰락[편집]
그러나 이 같은 개방 정책은 폴란드, 헝가리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말에 이르면 석유 파동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이 동구권을 덮치면서 한계에 다다르고 불가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시행한 개혁 개방 정책의 영향으로 불가리아도 난국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지프코프는 고르바초프식 전면 개방 및 정치 개혁에는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특히 정치 개혁은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1989년 들어 민주화 바람이 전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을 강타하자 지프코프의 힘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날 불가리아 공산당이 지프코프를 공산당 서기장과 총리직에서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페터르 믈라데노프를 임명함으로서 지프코프는 35년 간의 독재자 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1990년 1월에는 당에서도 제명당하고 사기와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1992년 법원은 그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으나 이미 노령인 데다 건강 악화를 이유로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고 대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자서전 집필에 열을 올렸다.
4. 사망[편집]
그는 폐렴에 걸려 1998년 8월 5일 수도 소피아의 자택에서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당시 불가리아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넌 가운데 노년층,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지프코프 시절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꽤 강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장례식에는 상당한 수의 인파가 몰려들었지만 공산 독재로 인해 그를 증오하는 여론도 아주 강했기 때문에 불가리아 정부는 유족 측의 국장 요구를 거부했고 가족장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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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당시 불가리아에서 고졸은 결코 저학력이 아니었다. 1925년 불가리아 문해율이 60.3%, 1935년 문해율이 68.6%였다. 고등학교 졸업만 해도 지식청년 취급받던 8.15 광복 직후의 한국을 생각하면 된다.[2] 전직 주북한 불가리아대사[3] 참고로 이들이 롤모델로 삼은 대상이 무려 김일성이었다고 하는데 만약 쿠데타가 성공했으면 불가리아는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도 따위로 만드는 생지옥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 사족으로 이들을 체포하기 위한 작전의 암호명은 '바보'였다고 한다.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체계를 수립하기 전에도 북한은 공산권 국가들에게도 추종하는 것조차 바보로 여겨졌을 정도로 한심한 취급을 받았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