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팔레올로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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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아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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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없음

팔레올로고스(Παλαιολόγος)

토마스
생몰년도
1409년 ~ 1465년
재위기간
1453년 ~ 1460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마누일 2세아들이자, 요안니스 8세콘스탄티노스 11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동생으로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군주.


2. 생애[편집]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는 1409년에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의 막내아들[1]로 태어났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형들이 많아서 제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평화로울 때 태어났다면 황족으로써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안락한 삶을 즐길 수 있었겠지만, 당시 제국이 처한 상황은 그에게 순탄치 않은 운명을 부여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제후국모레아 전제군주국[2][3]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사방에서 이슬람 국가오스만 제국에게 포위당하여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태였다. 토마스의 아버지인 마누일 2세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을 비롯한 서방 세력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고, 티무르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란 역부족이었다.

1425년에 마누일이 사망하자 첫째 형인 요안니스 8세가 즉위했는데, 그로부터 3년 후인 1428년에 토마스는 둘째 형 테오도로스와 함께 모레아의 전제군주로 책봉되어, 셋이서 모레아를 공동 통치했다.[4] 1429~1430년 맏형인 요안니스의 지휘 하에 벌어진 아카이아 원정에서 토마스는 아카이아 공작이었던 첸투리오네 자카리아를 격파해 모레아의 펠로폰네소스의 통일에 일조했고, 1430년 1월 센투리오네의 상속녀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이후 1443년 10월 테오도로스가 셀림브리아를 잠시 통치하던 다섯째 형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와 자리를 바꾸면서 펠로폰네소스는 세 전제국인 토마스의 글라렌차, 콘스탄티노스의 칼라브리타, 디미트리오스의 미스트라스로 분할되었다.

이후 1448년에 요안니스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남은 형제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아버지이 했던 것처럼 망해가는 제국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으나, 1453년에 있었던 마지막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2,200여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제 로마인들의 영토는 토마스와 디미트리오스가 다스리던 모레아가 유일했으나, 두 형제는 제국의 잔재를 유지하지도 못했고, 콘스탄티노스처럼 명예롭게 죽지도 못했는데, 이는 그들의 내분 때문이었다. 그들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협력하기는 커녕, 상대방을 축출하여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고, 명목상의 로마 황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내분을 벌였는데, 1460년에 디미트리오스는 동생을 축출하기 위해 조국의 원수인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였다. 결국 술탄 메흐메트 2세와 디미트리오스의 연합군 앞에서 견디지 못한 토마스는 이탈리아교황령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디미트리오스는 술탄의 제후로서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토사구팽당해 아드리아노플에서 연금되는 상태가 되어,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디미트리오스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은 죄값인지, 연금당한 상태에서 10년 동안 비참하게 살다가, 1470년에 사망했다.[5]

반면, 토마스는 로마에서 교황의 보호를 받으며 비교적 안락한 삶을 보낼 수 있었는데, 비록 멸망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동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여기는 것은 서방 세력도 마찬가지였기에, 교황은 그에게 명목상으로나마 황제 대접을 해주었다. 이후, 토마스는 1465년에 로마에서 사망했고, 명목상의 로마 황제 및 모레아 전제군주 칭호는 그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승계했다. 그리고 안드레아스는 생계를 위해 황제의 칭호를 프랑스샤를 8세스페인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 등에게 팔아넘겼는데[6], 칭호를 사들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은 실제로 칭제하지 않았기에, 허울 뿐인 로마 황제 자리는 형식적인 계승권마저 흐지부지되며 소멸했다.

그의 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가, 러시아가 동로마의 정통성을 잇는 제3의 로마를 자칭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3. 여담[편집]


  • 미디어 상에서는 롬연시에서 주인공의 지지자이자 후계자로서 등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찌 보면 원 역사의 토마스보다는 이쪽의 토마스가 한국에서는 더 잘 알려져 있을 듯하다. 자세한 건 롬연시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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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형제 중 여덟째 아들이었다.[2] 모레아는 그 당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가리키던 명칭이었다.[3] 모레아의 군주는 '데스포티스라는 칭호였다.[4] 여섯째 형인 미하일은 마누일 2세 재위 기간에 요절했다.[5] 이때 디미트리오스를 토사구팽하던 메흐메트 2세에게 휘하 관리가 왜 디미트리오스를 통치자로 삼지 않는지 물어봤었는데, 메흐메트는 '그런 자는 어떤 왕국을 맡더라도 제대로 통치해내지 못할 것이다.'라며 그를 토사구팽한 이유를 밝혔다.[6] 안드레아스가 황제 자리까지 팔 정도로 가난해진 것은 그가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애초에 교황에게 지원받은 생활비가 너무 적어서,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