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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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존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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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68 MLB 올스타전 로고.svg파일:1978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9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0 MLB 올스타전 로고.gif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68
1978
1979
198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37번
짐 피어설
(1959~1961)

토미 존
(1963~1964)


밥 헤프너
(1966)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번호 25번
짐 레몬
(1963)

토미 존
(1965~1971)


토니 머서
(1973~1975)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25번
조 모엘러
(1969~1971)

토미 존
(1972~1974, 1976~1978)


제리 러스
(1979)
뉴욕 양키스 등번호 25번
브라이언 도일
(1978)

토미 존
(1979~1982)


스테판 웨버
(198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번호 35번
데이브 마체머
(1978)

토미 존
(1982~1983)


빌 트레버스
(1983)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번호 25번
돈 베일러
(1978~1982)

토미 존
(1983~1985)


조지 헨드릭
(1985~1988)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25번
도니 힐
(1983~1985)

토미 존
(1985)


마크 맥과이어
(1986~1997)
뉴욕 양키스 등번호 25번
돈 베일러
(1983~1985)

토미 존
(1986~1989)


그렉 카다렛
(1989~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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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에드워드 "토미" 존 주니어
Thomas Edward "Tommy" John Jr.

출생
1943년 5월 22일 (80세)
인디애나주 테라 호테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학력
거스트마이어 고등학교 -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신체
190cm / 81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우타
프로입단
1961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CLE)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63~1964)
시카고 화이트삭스 (1965~197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2~1974, 1976~1978)
뉴욕 양키스 (1979~1982)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1982~1985)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85)
뉴욕 양키스 (1986~1989)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
2. 선수 시절
3. 기록
3.1. 명예의 전당 입성 가능성
4. 토미 존 수술 (팔꿈치 내측 인대 재건 수술)
5. 기타



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좌완 투수. 통산 288승, 4710.1이닝의 대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메이저리그 통산 이닝 20위에 해당한다.


2. 선수 시절[편집]


1963년 20살의 나이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소속으로 빅리그에 데뷔한다. 64년까지 빅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은 20대 초반의 유망주가 보여주는 모습치고는 꽤 괜찮았지만 더 좋은 선수가 탐이 나서 트레이드 매물로 팔렸는지 65년 22살 시즌에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팀을 옮긴다.

토미 존은 화이트삭스에서의 첫해 14승 7패 2.62의 성적에 리그 최다인 5번의 완봉을 기록하는 등 에이스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듬해에도 6완봉으로 리그 최다. 화이트삭스에서 28살이던 71년까지 뛰었는데 10완투를 세번이나 기록하고 매 시즌 최소한 1번은 완봉을 기록하는 등 완투형 투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1972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한다. 다저스로 이적해서도 3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는 등 기세가 등등했지만, 1974 시즌에 발생한 팔꿈치 부상은 그의 커리어에 잠시 큰 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토미 존 수술을 최초로 받은 후 1975년 내내 재활에 힘쓴 덕에 1976년 성공적으로 복귀하여 이듬해인 77년에는 34살에 나이에 커리어 첫 20승을 기록하면서 노익장을 제대로 보여준다. 1979년 36살의 나이에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는데 양키스에서의 첫 두시즌동안 각각 21승과 22승에 2년 합쳐 541.2이닝에 33완투 9완봉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닝소화를 보여주면서 명문 양키스의 에이스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 하지만 81년 다시금 부상으로 20경기만 출전하게 되자 39세라는 나이에 부담을 느낀 양키스는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그를 82시즌 도중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보내버렸다. 40살이던 1983년, 데뷔 첫 4점대 ERA를 기록하면서 세월앞에 장사없다는것을 보여주었지만 86년에 뉴욕 양키스로 컴백하여 짧은 기간이지만 여전한 피칭을 보여준다. 이후 44살인 1987년에도 두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만 2년 뒤 양키스에서 은퇴한다.

토미 존은 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한번의 플레이에 에러 3개를 연속으로 저지른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8년 7월 27일 당시 아메리칸리그 소속이던 밀워키 브루어스전에서 4대 0으로 앞선 1사 1루 상황에서 3번 타자 제프리 레너드의 투수 앞 땅볼을 더듬어서 포구에러(1)->뒤늦게 악송구(2)->그것도 모자라 중계되어 들어오는 볼을 무심코 컷트해 홈으로 던졌는데 덕아웃으로 날아감(3)으로 타자까지 홈에 들어오는데 성공해 2점을 헌납한다. 이 플레이 이후 존이 주심에게 한 말은 나름 유명하다. "이걸로 골드 글러브 받기는 다 틀렸구나..."[1]


3. 기록[편집]


26년간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했는데, 메이저리그 이 부문 공동 1위인 노익장의 화신 놀란 라이언, 19세기 선수(겸 감독)였던 캡 앤슨의 27시즌에 이은 역대 메이저리그 공동 3위 기록이다. 또 다른 26시즌 선수 한명은 19세기 ~ 20세기 초반 선수였던 디콘 맥과이어.[2] 놀란 라이언과 더불어 노익장의 상징과도 같은 리키 헨더슨보다도 1년 더 선수생활을 했다.

하지만 토미 존이 이렇게 오래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는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리키 헨더슨은 야수중에서 1위지만 투수쪽에는 놀란 라이언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수술로 인한 유명세가 워낙 압도적이다.


3.1. 명예의 전당 입성 가능성[편집]


통산기록이 288승 231패 3.34 162완투 46완봉 4710.1이닝 2245탈삼진이다. 특히나 이닝 소화능력이 발군으로, 통산 이닝 20위인데 토미 존보다 이닝 많이 먹고 명예의 전당 멤버가 아닌 사람은 투수 로테이션 같은 개념은 커녕 팀에 투수가 3, 4명이었던 시기인 19세기 선수 바비 매튜스와 원래대로라면 명예의 전당에 100% 갔겠지만 영 좋지 않은 스캔들이 있는 로저 클레멘스 이렇게 2명뿐이다.[3] 하지만 토미 존의 시대는 클래식 스탯을 중시하던 시대였는데 그는 저니맨이었는 데다가 오래 뛴 것에 비하면 클래식 스탯이 명전에 들어간 투수들만큼 뛰어난 건 아니었으며, 임팩트가 대단한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기자회 투표로는 15번의 기회를 모두 소진하여 입성에 실패했다. 그나마 통산 승수가 288승으로 1년만 더 제대로 뛰었다면 300승도 노릴 수 있었다는 점으로 인해 용케 탈락하지 않고 15번을 끝까지 버텨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의 선구자적인 수술 및 재활 성공[4]으로 인해 역대 셀 수 없이 많은 메이저리거와 예비 HOFer가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언젠가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입성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실제로 매년 명예의 전당 투표만 다가오면 베테랑 위원회 투표의 뜨거운 감자가 되며, 팬들에게나 선수들에게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수술이 꼭 아니더라도 bWAR이 62.1, fWAR이 무려 79.4이므로 성적상으로도 베테랑 위원회를 통한 입성은 무난히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5]


4. 토미 존 수술 (팔꿈치 내측 인대 재건 수술)[편집]


검색 사이트에 '토미 존'을 검색하면 토미 존 야구 선수 본인보다 수술 얘기만 잔뜩 나올 것이다.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을 일컫는 토미 존 서저리의 토미 존이 바로 앞서 기술한 이 선수로서 이젠 토미 존 본인보다 수술 이름이 더 유명해져버렸다.[6]

토미 존은 1974시즌 중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커리어에 큰 위기를 맞게 되는데[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주치의인 프랭크 조브 박사는 당시로서는 혁신적 발상인 손상되지 않은 인대, 예를 들어 반대쪽 팔의 손목이나 허벅지나 발바닥 등 투수가 별로 쓰지 않을 힘줄[8]을 채취해서 손상된 인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는 재건 방식을 제안했다. 토미 존이야 어차피 가만 있으나 수술 실패하나 은퇴할 입장이니 승낙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후 재활 기간을 거쳐 토미 존은 이전보다 더 좋은 구위를 보여주며[9]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3위인 26시즌을 빅리그에서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 바로 이 팔꿈치 인대 재건 수술인 것이다.

참고로 이런 수술의 경우는 피술자보다는 시술자인 의사 이름이 붙는게 일반적이므로 프랭크 조브 서저리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싶지만, 토미 존 서저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프랭크 조브 박사 본인이었다고 한다. 수술 이후 끈질긴 재활을 거쳐서 존이 복귀하고 좋은 성적을 거둬주지 않았다면 수술이 대중화 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10][11]

자세한 것은 토미 존 수술 문서 참조.


5. 기타[편집]


  • 사실 토미 존은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선수들 중 비상식적 내구력을 가진 사례인데, 수술 후 돌아오자마자 관리고 뭐고 살벌하게 많은 이닝을 던졌다. 복귀한 1976년부터 5시즌을 연속으로 200이닝 돌파했다.

  • 43세가 되던 1986년, 그가 환자로 치료 받았던 치과의사의 아들이 장성해 메이저 리그에 데뷔 하고 토미 존에게 멀티히트를 날린다. 그 청년의 이름이 마크 맥과이어.[12] 경기 후 "꼬맹이한테 맞기 시작하다니, 은퇴할 시기군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3년이나 더 선수생활을 했다. 맥과이어와의 통산전적은 20타수 6안타 (2홈런).

  • 다저스의 에이스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콩라인이기도 하다. 다저스 시절엔 1977년, 1978년 연속으로 양키스에게 우승을 헌납. 이에 이듬해 양키스로 소속을 바꾸나 1981년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가 자신의 2차전 선발승을 포함해서 먼저 2승을 따낸 뒤 4연패로 준우승에 그치는 대참사를 직접 경험해야 했다. 당시 월드 시리즈에서 다저스의 양키스와의 시리즈 상대전적이 무려 5연패 포함 10전 8패였으니, 정말 지독하게 불운한 위치선정이였던 것이다. 에인절스로 이적한 이듬해에는 ALCS에서도 에인절스가 2연승 뒤 3연패로 WS 진출에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더 억울한 것은 자신이 못 던졌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존의 PS 통산 성적은 6승 3패, ERA 2.65로 매우 좋았으나, 동료들의 난조로 인해 콩라인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 과거 코로나 19 양성반응을 보였다. 후유증으로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 거동이 매우 불편했으며, 그의 자택이 있는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서 치료 받았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2 19:00:16에 나무위키 토미 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I told the umpire, Richie Garcia, that I think I lost a Gold Glove on that play."(나는 이 경기의 심판인 리치 가르시아에게 "나는 이 플레이로 골드 글러브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2] 하지만 맥과이어의 경우는 부족한 선수 사정으로 인해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며 비상시에 선수로 투입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선수로 뛴 마지막 시즌의 경기는 타이 콥의 관중 폭행 사건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주전 선수를 전부 빼고 동네 주민들을 뽑아서 선수로 쓰는 바람에 48세의 나이로 게임에 나섰던 1경기가 전부이다. 물론 그 경기는 2:24로 참패.[3] 못 들어가던 버트 블라일레븐은 드디어 2011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두 이후 블라일레븐은 굉장히 지지도가 오르는 추세였다는 점에서 그와 유사한 커리어를 지닌 짐 카트나 토미 존은 굉장히 아쉬울 것이다. 그리고 짐 카트는 2022년 베테랑 위원회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리고 토미 존 보다 이닝을 많이 소화한, 명전 첫턴행이 확실시되었던 그렉 매덕스는 명전 입성 유예가 풀린 2014년이 되자마자 97%의 높은 지지율로 첫 턴에 입성했다.[4] 물론 수술은 프랭크 조브 박사가 한 것이나 토미 존이 재활에 성실히 임해 수술의 인지도를 높인 것은 그의 공이라는 평이 많다.[5] 2023년 현재 WAR 명전 입성 컷이 60이므로, 토미 존은 현재의 기준에 따른다면 첫 턴도 노려봄직 하며, 적어도 5회 이내에 입성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진다. 물론 그가 뛰던 시대 기준으로는 저 성적으로는 입성하기엔 다소 부족하다. 1960-70년대에는 쟁쟁한 경쟁자 투수들이 워낙에 많아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 횟수를 다 써버렸다.[6] 토미 존 수술 관련해서 양키스타디움에 초대되기도 했다.[7] 토미 존 수술 전까지는 투수가 팔꿈치에 부상을 당했다면 거의 100% 확률로 은퇴하게 되었다.[8] 인대는 아니다. 쓰이지 않는 인대는 없다. 힘줄의 경우는 힘줄만 길고 근육은 너무 작은 경우가 있어서 쓴다.[9] 이로 인해 토미 존은 토미 존 서저리 최고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현재 의사들은 토미 존 수술로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운이 좋으면 기존 최고 구속과 동일한 구속'이라고 단언하는데, 토미 존은 수술 후 수술 직전이 아닌, 인대가 멀쩡했을 때보다도 구위가 증가한 경우이기 때문. 수술 후 토미 존의 구위가 증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술보다도 재활 당시 마이크 마셜과 함께 피칭 메카닉을 손본 것이 유효해서 그렇다고 한다.[10] 단적으로 2번째 피시술자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투수 브렌트 스트롬이었는데, 스트롬은 안타깝게도 재활에 실패한 역대 첫 사례가 되어 은퇴하게 됐고, 이후 '자신이 첫 피시술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만일 첫 피시술자가 스트롬이었다면 이 수술이 대중화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스트롬은 은퇴 후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가서 투수코치로서 댈러스 카이클, 랜스 맥컬러스 주니어, 프램버 발데스, 크리스티안 하비에르 등 굴지의 투수들을 육성해내는 데 성공하며 뛰어난 지도자 경력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2022년부터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투수코치가 되었다.[11] 3번째 피시술자는 당시 꼬꼬마 마이너리거였던 데이비드 웰스였는데 다행히 웰스는 재활에 성공해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12]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index/batter_vs_pitcher.cgi?batter=mcgwima01&pitcher=johnto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