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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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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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통일


고노에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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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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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헤이 일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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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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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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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
일본국 태정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출생
1537년 3월 17일[1]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
(현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사망
1598년 9월 18일 (향년 61세)
야마시로국 기이군 후시미 후시미성
(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재임기간
초대 하시바 당주
1573년 7월 20일 ~ 1598년 9월 18일
관백
1585년 8월 6일 ~ 1592년 2월 10일
태정대신
158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
초대 도요토미 당주
1586년 9월 9일 ~ 1598년 9월 18일
태합
1592년 2월 11일 ~ 1598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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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우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우지]
신호
풍국대명신(豊国大明神)
봉호
일본국왕(日本国王)
신체
140cm | 45kg[1]
종교
신토
부모
친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 ? ~ 1543)
친모 오만도코로
계부 지쿠아미(竹阿弥)
양부 코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 1536 ~ 1612)[2]
배우자
정실 코다이인
측실 요도도노 외 12명



파일:external/www.shouzou.com/hideyoshi_itsuou0.jpg

태정대신 재직 당시의 초상화

1. 개요
2. 가문과 역사
3. 호칭과 별명
5. 가족관계
6. 평가
6.1. 능력
6.2. 일본
6.3. 한국
7. 여담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shouzou.com/hideyoshi_koudaiji.jpg

관백 재직 당시의 2번째 초상화[2]


파일:하시바 히데요시 초상화.jpg

히데요시가 하시바 성을 칭할 때의 초상화


파일:external/bafcaa2ec8.up.n.seesaa.net/hide1.jpg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옷

일본 전국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전국시대의 일본을 통일시키고 관백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그는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도 연이어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3][4]


2. 가문과 역사[편집]


파일:고시치노키리.svg
파일:1280px-고시치노기리몬.svg.png
도요토미 가문과 하시바 가문의
고시치노키리(五七の桐) 문장
[5]
파일:403px-Taiko_Giri_(inverse).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3px-Taiko_Giri.svg.png
다이코키리(太閤桐)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몬(豊臣秀吉定紋)
파일:Kinoshita_Omodaka_(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svg.png
기노시타 가문 시절의 문장
오모다카(沢瀉)

센코쿠 시대가장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나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6]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칭한 태합(타이코) 또한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금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따라서 전통적으로 당연히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히데요시에 대해 평가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당장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일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으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입지전적인 활약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다.[7]


3. 호칭과 별명[편집]


이름을 자주 바꿨다. 다른 이름으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별명은 '대머리 쥐(禿げ鼠)', 원숭이.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이등박문으로도 부르는 것처럼 조선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고유어 이름을 일본어 그대로 옮기지 않고 그 한자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풍신수길로도 불린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풍신수길 외에도 "平秀吉"(= 타이라노 히데요시), 즉 "평수길"이라고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관계를 조사하던 중 정보전달의 오차가 있었어서 인지 일본 귀족 4대 성[8] 중 오다 노부나가가 관련 가문이라 칭하던 平, 즉 타이라(헤이지)를 받은 걸로 오해하고 오기록[9]한듯 하다. 대신 일본은 덴노가 성을 하사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알았던 듯[10]. 실제로는 도요토미가 되기 전, 4대 성 중 타이라가 아니라 藤原(후지와라, 등원)를 받아서 "후지와라노 히데요시"였기 때문에 저런 과거 성을 쓰려면 藤原秀吉(등원수길)이 맞다.[11]

만년에 간파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퇴임한 셋쇼(섭정)나 간파쿠를 이르는 호칭인 '타이코(太閤:태합)'로도 많이 불린다. 사실 타이코라는 호칭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호칭은 아니지만, 이 호칭으로 불린 사람들 중 제일 인지도가 높아서 일본인들이 그냥 '타이코'라고만 지칭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2] 그래서 나온 말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오늘날의 태합)'인데, 히데요시처럼 밑바닥 출신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들의 별명으로 쓰이는 단어다. 정치계의 이토 히로부미나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외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주 겸 초대 회장도 이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하며, 일본의 연예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의 창업자인 요시모토 세이(吉本せい)는 '여자 이마타이코(女今太閤)'라고 불렸다.


4.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가족관계[편집]


부모
이름
생년
몰년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
(木下弥右衛門)
미상
1543년
어머니
오만도코로
(大政所)
1516년
1592년 8월 29일
향년 76세
계부
지쿠아미
(竹阿弥)
불명
불명
양부
코노에 사키히사
(近衛前久)
1536년[13]
1612년 6월 7일
향년 76세

형제자매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친부
기타 가족사항
친누나
닛슈니
1534년
1625년 5월 30일
향년 91세
기노시타 야에몬
미요시 요시후사(1534 ~ 1612)와 결혼
장남 도요토미 히데츠구(1568 ~ 1595)
차남 히데카츠(1569 ~ 1592)
삼남 히데야스(1575 ~ 1592)
이부남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1540년 4월 8일
1591년 2월 15일
향년 50세
지쿠아미
아내 치운인(? ~ 1622)
1남 2녀(어려서 요절)
이부여동생
아사히히메
1543년
1590년 2월 18일
향년 47세
지쿠아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실
자녀 없이 사망

부인
이름
생년
몰년
자녀
기타 가족사항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14]
네네(寧々)
코다이인(高台院)
[15]
불명
1624년 10월 17일
향년 77, 78세, 82세(추정)
없음
아버지 스기하라 사다토시
어머니 아사히도노
측실
미나미도노
(南殿)
불명
1634년
하시바 히데카즈
그외 1녀(요절)

측실
엔유인
(円融院)
1549년
불명
없음
우키타 나오이에의 과부
우키타 히데이에의 친모
측실
요도도노(淀殿)
차차(茶々)/키쿠코(菊子)
1569년
1615년 6월 4일
향년 46세
도요토미 츠루마츠
도요토미 히데요리

측실
히메지도노
(姫路殿)
불명
1641년 6월 16일
없음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
측실
산노마루도노
(三の丸殿)
불명
1603년 3월 17일
없음
오다 노부나가의 딸
니죠 아키자네의 계실
이 외에도 수많은 첩들이 있다. 주요 인물만 기재함.

자녀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친모
장남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아명은 이시마쓰마루(石松丸).
1570~1574년 추정
1576년 11월 4일
향년 2~6세
미나미도노
차남
도요토미 츠루마츠
(豊臣鶴松)
1589년 7월 9일
1591년 9월 22일
향년 2세
요도도노
삼남
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頼)
1593년 8월 29일
1615년 6월 4일
향년 21세
요도도노

수많은 처첩들을 두었음에도 후술할 불임 논란 때문인지 자녀가 3명밖에 없다. 불임은 아니더라도 난임은 확실했던 듯. 이중 장남 하시바 히데카즈는 도요토미 히데카츠와는 다른 인물로,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의 성주였던 시절에 생긴 아들이다. 생년은 1570년,1573년,1574년 등 이설이 많지만, 1576년에 요절했다. (출처:위키피디아 일본판 - 해당 문서로.)

양자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가족관계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1568년
1586년 1월 29일
향년 18세
본명 오다 히데카츠(織田秀勝), 오다 노부나가의 4남
도요토미 히데츠구
(豊臣秀次)
1568년
1595년 8월 20일
향년 27세
친누나 닛슈니의 장남
도요토미 히데카츠
(豊臣秀勝)
1569년
1592년 10월 14일
향년 23세
친누나 닛슈니의 차남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詮)
1582년
1602년 12월 1일
향년 21세
정처 네네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째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1572년
1655년 12월 17일
향년 83세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
유키 히데야스
(結城秀康)
1574년 3월 1일
1607년 6월 2일
향년 33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6. 평가[편집]



6.1. 능력[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0a3efcd296552dc10d50be9af395487.jpg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으로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신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으나 철저한 실력주의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중용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유능한 장수였다.[16] 특히 공성전에 능하여 수공을 성공하거나 포위를 하기 전에 미리 인근 지역에 사람을 풀어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곡량을 긁어모아 두는 등 용의주도했고, 젊은 시절에 노부나가의 집안에 들어갔을 때부터 근면성실함도 뛰어났으며 야무지기 이를데 없는 인물이었다. 또한 인물을 씀에는 노부나가를 본받아서 실력을 중시했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능력들은 다 평범 또는 일반인 이하 수준이었고 특히 글 읽는 능력과 개인 무예(맨손 싸움 실력)는 아예 무능아였다. 하지만 임기응변의 천재로 즉석에서 뭘 생각해내거나 상황 판단이 일반인을 아득히 웃돌 정도로 빨라, 위기가 계속 발생하는 센고쿠 시대에서는 이만큼 적합한 인재가 없었다. 그러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빠른 판단력과 뛰어난 임기응변을 가지고 있었고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이게 엄청 필요한 능력이었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설이나 게임의 영향으로 잘못 알려진 사실도 적지 않은데 전국시대공명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케나카 시게하루는 원래 히데요시의 참모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시게하루 문서에도 있듯이 엄연한 오다 가의 직속 가신이었으며 히데요시 휘하에서 종군한 것도 '요리키'[17] 자격으로 종군한 것이었다. 이는 또 다른 그의 참모로 알려진 구로다 간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 신분이 미천했던 히데요시는 적, 아군 할 것 없이 인재를 끌어모았고 최종적으로 그것이 노부나가의 후계자 싸움에서 승리하는 요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도 알려지는데 사실 이건 노부나가의 정책을 본받은 것이다. 원래 밑바탕이 없던 히데요시는 자신을 써준 노부나가에게 심취하여 노부나가 흉내를 많이 내었다.[18] 뿐만 아니라 출신이 미천한 탓에 귀족들의 문화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어서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어 제법 높은 지위와 재산이 손에 들어오자 이를 흉내내기에 바빴다고도 한다.[19]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면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린 에도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사냥), 상업통제와 사농공상 신분제를 철저히 한 것은 도요토미 정권이 시행한 정책들로, 히데요시 정권의 정책은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그대로 수행해 나갔고 이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전근대 일본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춧돌이 된다.

장사하며 밑바닥부터 올라온 인생 여정 때문인지, 만화 등의 매체에서 묘사할 때는 물건이나 사람 보는 눈이 좋은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만화에서는 생선장수로 나오는데, 말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출신을 알아내고 그 지역의 입맛에 맞게 소금간을 해서 인기를 끄는 모습도 보여줬다. 상인으로서도 대성했을 것 같은 모습이 긍정적인 면으로 자주 부각되는 인물이다.

미천한 출신 때문에 후다이[20]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인적 기반이 없었다. 이건 심각한 결점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임명하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보내거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 세력을 맡기는 등 어떻게든 정권의 기반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말년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초 병크를 터트리고, 같은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기존 후계자이자 많은 가신들을 거느리고 인망도 높았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일족들을 몰살시키면서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많은 신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을 드는 계기를 만드는 등 정치적으로 실책을 많이 저질렀다.

천하인으로 등극하고 나서는 과대망상적인 언행이 자주 보이는데, 후시미에 대지진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거나 다치고 후시미 성과 함께 조영하고 있던 대불이 무너지자 대불에 활을 쏘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네 몸 하나 못 지키냐!"라고 화를 냈고, 자기가 어머니가 태양 꿈을 꾸고 낳은 태양의 아들이라느니, 제국의 영토를 넓혀서 억만 년을 다스리겠다느니 하는 몹시 자뻑스러운 구절을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집어넣기도 했다. 조선에 보낸 국서 자체가 외교문서로서의 기본적 서식이나 의전 등의 격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중2병에 가까운 내용으로, 히데요시의 당시 배경이 부족했음을 나타내준다.

이외에도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는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정이대장군의 목상을 보고 "당신은 천황의 후손에[21] 명문 가문의 출신이므로 유배지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따랐지만, 나는 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내 능력만으로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 내가 낫다"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도 자주 엿보인다.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은 후 반드시 황실로부터 태정대신과 간파쿠 직을 제수받으려 한 것도 사실은 그것이 본래 황실로부터 노부나가에게 주어질 지위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노부나가는 생전에 일본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종2위 우대신과 우근위대장직을 제수받았고, 혼노지의 변 직전에는 정1위에 올라 태정대신, 간파쿠, 정이대장군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을 제수받기 위해 우대신직과 우근위대장직을 사퇴한 상태였다.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 후 정1위 태정대신으로 사후추서되었으므로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생전에 태정대신이나 그 이상의 관직을 얻어야 하는데 정이대장군은 명목상 겐지 중에서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계열인 카와치 겐지의 후손이, 아니면 적어도 황족은 돼야지 제수받을 수 있는 작위라 농민이나 다름없는 아시가루 출신의 히데요시로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관직이라 간파쿠로 만족했다는 설도 있다.[22] 요도도노 즉 차차히메를 첩으로 들이고 과할 정도로 총애했던 것도 본래는 그 모친인 오이치 부인을 맞아들이고 싶어했으나 오이치 부인이 남편과 자결함으로써 이루지 못한 데 대한 보상심리이며, 오이치 부인을 탐한 것도 부인의 미모도 물론 한몫했지만[23]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사실상 오다의 친족으로 편입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라는 측면이 강하다.[24]

그러나 임기응변에 능하여 미천한 신분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된 반면 대국적인 안목도 없고 한마디로 인스턴트라는 단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는 영단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기응변의 천재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 있을 때부터 매사를 순간적인 기지로 해결했지만 사전에 긴 시간을 두고 뭔가를 계획하는 일 따위는 일절 없었으며 처음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무력으로 맞붙었다가 고전한 끝에 오다 노부카츠를 꼬드겨 겨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숙청 건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당시 그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지정한다고 한들 그가 어린 나이에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높아서 이미 장성하고 수많은 휘하를 거느린 데다가 여기저기 인맥으로 얽혀있는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시키는 것보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배제하는 게 더 나았다.[25] 물론 사람 마음이 양자보다 친아들을 더 삼고 싶겠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그의 생전부터 요도도노가 바람 피워 낳은 아들이라는 말이 많아서 그조차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정 친아들을 배제하기 싫으면 차라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히데요리를 차차기로 지명하고 히데츠구를 징검다리 후계자로 남겨두는 게 나았다. 이중의 권위라는 문제가 생기긴 하지만 히데츠구 본인도 히데요리와 자기 딸을 약혼시키는 등 타협을 시도했고 어쨌든 도요토미 친족이니 불가능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그의 죽음이 훗날 무슨 파장을 불렀는지 생각한다면 그가 장기적인 시야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26]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순발력과 순간적인 판단력은 상당히 뛰어났기에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만큼은 확실히 뛰어난 전투지휘관이 맞았다. 하지만 이런경우 대개 그렇듯 참을성있게 오랫동안 계획헸다가 실천하는 능력이 뛰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임진왜란 역시 천하를 얻은 이후 시종일관 임기응변에만 능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갑자기 대폭 불어난 부하들을 통제하기 위한 임기응변으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히데요시의 능력은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일본 전국을 통일한 난세의 영웅이며, 일본 역사상 최초로 중국과 인도를 무력으로 지배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 정복군주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망이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꺾이며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다. 자신의 적이었던 선조와는 반대로 난세에는 명군이었으나 치세에는 암군이었던 셈이다.[27]


6.2. 일본[편집]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최고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의 대표이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임진왜란의 원흉인 탓에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이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과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28]에 더 많이 주목한다.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타이코(太閤)'다.

에도 막부 시절에는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그가 쇼군을 자처하지 않고 명분상 천황을 중시하여 관백 직위를 받은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상적인 공무합체(公武合體)[29] 사례로 여겨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에는 상당히 고평가되었다.[30] 대외 침략에 매진했던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선구자였던 점도 주효하였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경술국치 당시 "코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이 대륙 침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그 나름의 국위선양을 이룬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31]

특히 오사카를 거점으로 삼아 도시의 상징인 오사카 성을 쌓고 일대를 크게 발전시켰던 인물이라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32]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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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일본의 패전 후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재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히데요시의 경우 객관적인 평가를 하여 임진왜란 전의 업적만 인정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권위 있는 통사를 내기로 명성이 높은 야마카와 출판사의 <일본사>는 임진왜란을 명확히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237 페이지의 소제목은 <도요토미 정권의 변질과 제1차 조선침략>이다. 인터넷과 정보의 발달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가는 일본 내부에서도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놓였다. 실제로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서는 일본 사극으로서는 최초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고의 역린임진왜란을 슬금슬금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일본측 장수들이 쓸데없이 춥기만 한 조선을 굳이 점령해야 하냐고 서로 다투기도 하고, 침공 초기의 거침없던 상황이 이후 갈수록 악화되면서 결국 처음부터 무모한 전쟁이었음이 드러나고 아주 장난이 아니게 난장판인 상황으로 묘사한다. 결정적으로, 주인공인 구로다 간베에의 입으로 대놓고 이대로면 일본이 망한다는 대사를 넣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대극으로 정면 비판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정계 진출에 대한 공평한 기회를 창출했다는 일본 신정부의 공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을 수 있다. 현대의 일본인들이야 히데요시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을 구실은 없을 것이므로, 히데요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과거보다 현재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 제국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된 것은 사실이므로, 조선 세조의 경우처럼 후대의 특정 정권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높이 평가된 측면도 있는 셈이다.


6.3. 한국[편집]


병자호란과 더불어 한국사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일본 근현대사의 인물 중에선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히로히토, 도조 히데키, 이시하라 신타로, 아베 신조, 아소 다로 등과 함께 한국 입장에선 좋게 볼 수 없는 일본인 중 한 명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히데요시를 특별히 감싸 줄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다만, 전근대시대 인물에게 손가락이 6개였다느니하는 기록은 좀 걸러서 해석해야한다. 당대 유럽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기형은 마녀나 악마 숭배자의 상징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고의로 특정인을 까내리려고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은 흔했다[34].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도 먼저 가톨릭 탄압을 시작한 인물인 만큼, 그 가톨릭의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그를 좋게 표현했을 리도 만무하다. 일단, 그가 다지증이라는 풍문은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는 사극 징비록에도 나타나 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라고 했다.[35]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도 일부 이본에서는 평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병권을 장악한 뒤 왜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관백이라 칭했다는 설정이 나온다.(경판본) 근데 좀 뜬금없게도 사쓰마 출신이고, 어머니는 납치당한 중국인.[36]

조일 관계가 정상화되고 상당히 악감정이 해소되어 일본에 대해서 꽤나 좋게 평가하게 된 이후의 조선 통신사들도 히데요시에 관한 문제만큼은 늘 민감했고 임진왜란 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어도 적어도 왜란 이후의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용서 못할 국적이자 침략자, 천하만민의 원수'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37]

숙종 때는 히데요시를 모신 사찰에서 조선 통신사들의 연회가 열렸는데, 히데요시를 모신 절이라는 걸 알게 된 통신사 일행이 노해서 항의하는 바람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 측은 얼버무리기 위해 가짜 사료를 들고 와서 '이 절은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이며 히데요시와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으로 해명했는데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자 통신사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지 연회가 재개됐다고 한다.[38]


7. 여담[편집]


  • 여자를 좋아해서 전국에서 미인을 끌어모아 주라쿠다이 저택에 수백 명의 첩을 둘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밝혀진 자식은 3명이며 2명은 요도도노 소생이다. 나가하마 성주 시절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으로 첩을 맞이하고 첫번째 측실이 된 여인 사이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후계자 아들을 얻기 위해 히데요시는 이후 15명의 측실을 두었고 그 가운데 5명은 출산 경험이 있는 재혼녀였는데도 자식을 낳은 사람은 요도도노뿐이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은 히데요시가 살아있을 시절 때부터 있었고 첫번째 측실의 자식도 히데요시 사이에서 태어난 친자가 아니라 그녀가 데려온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원래 본처인 네네는 젊은 시절 연애 결혼을 한 사이였는데 너무 바람을 피워 댄 데다[39] 자식도 없던 탓에 부부 사이는 갈수록 안 좋아졌다. 네네는 전국시대 최고의 현모양처이면서 동시에 괄괄한 여걸이었던지라 통일 이후에도 부부끼리 있을 때는 고향 사투리를 사용하며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랜 친구였던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내 마츠가 네네에게 자기 딸을 양녀로 보내서 중재해주기도 했다.

  • 출세한 이후에는 낮은 신분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고귀한 여성들이 취향이었고 통일 이후 측실들 중에는 과거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혈연이 몇몇 된다.[40] 본인도 호색한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지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너는 여색만큼은 나를 닮으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 당시 다이묘나 무장 중에서 드물게도 남색을 좋아하지 않은 인물이다. 당시 일본 상류층에는 미소년들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으며 이를 와카슈도라고 했는데[41] 히데요시는 전혀 즐기지 않아 반대파들은 이를 두고 "천한 출신이라 풍류도 모른다"고 깠다.
한 번은 이러한 평판을 불식시키려고 부하들이 미소년 수십 명이 있는 방에 히데요시를 데리고 갔는데 히데요시가 미소년 중 하나를 보고는 달려가서 그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소년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그 미소년에게 "총애를 받았냐"고 물으니까, 역시나 호색한 히데요시답게 "누나나 여동생 없냐"고 물어봤었다고 한다.

  • 히데요시는 신분이 천해서 정이대장군이 될 수 없었는데 정이대장군은 미나모토씨(源氏)에 해당되는 성씨가 있어야만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정이대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자신을 양자로 삼아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42] 하지만 거절당했다. 일각에서는 정이대장군의 뜻이 외국을 토벌한 장군이라 하여 일본 입장에서는 외국에 해당되는 조선을 토벌해서 정이대장군이 될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결국 정이대장군이 되는 데에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단 태합에 취임해서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 내부에서의 인식이 현대로 따지자면 태합 = 국무총리, 정이대장군 = 합동참모의장 같은 존재인지라 정이대장군이 태합보다 의전서열은 낮지만 사무라이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더 컸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당당히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나모토씨 중 하나인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후손임을 칭할 수 있는 다이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43]

  •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는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사실상 이름뿐인 윗사람인데[44]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항복 과정에 기인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항복 시키려고 이미 유부녀가 된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냈으며 그래도 항복을 못 시켰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을 낳아준 생모인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내서야 겨우 신용을 얻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그럼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러 상경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오만도코로의 저택에 기름을 먹인 장작을 잔뜩 쌓아놓고 보초까지 세워가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자마자 바로 불을 붙일 수 있게 해 놓았다. 이쯤 되면 사실상 제발 항복해 주십시오라며 애걸복걸한 꼴이다. 항복 과정이 이랬으니 오직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만은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으며 그래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에 불참하는 데 성공했다.

  • 중국을 제외한 당대 국가들의 정적 숙청 대부분이 그렇듯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족 및 방계 후손들은 살아남았고 그 중 상당수가 현재 일본에 생존해 있다. 키노시타 가는 네네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에서 이어진 방계로서 여러 곳에 분봉되었지만 적손은 대대로 현재의 오이타 현 언저리에 위치한 소규모 번인 히지 번의 번주가 되었고 19대손인 키노시타 무네토시(木下崇俊) 씨는 1998년 사가 현 나고야 성터에서 이순신의 직계 15대손인 이재엽(李載燁) 씨와 만나 화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방계 후손인 키노시타 가에서는 오사카 성 전투 이후 붙들려 어린 나이에 처형당한 쿠니마츠가 사실 사나다 유키무라의 아들 다이스케[45]와 함께 시마즈 가문의 도움으로 사츠마로 도주했고 사츠마에 있을 수 없게 되자 키노시타 가의 히지 번에 와서 2대 번주 키노시타 노부하루의 동생 키노시타 노부요시로 위장해 아예 타테이시 번이라는 별개의 번으로 독립해 나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구전은 당주에게만 대대로 비밀로 전해졌다(일자상전)고 한다. 실제 타테이시 번의 독립 과정이 몹시 수상쩍기 때문에 이 설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는데 오직 노부요시 본인의 위패에만 용납되지 않는 도요토미 성씨가 적혀 있는가 하면 3만 석밖에 안되는 번인데 초대 영주 노부토시는 무리해서 노부요시에게 1만 석이나 되는 영토를 찢어 주려고 했다.[46] 단, 몇 가지 상충되는 증거도 있어 진실은 아직 미스터리 속에 있다.[47]


  • 외모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당시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얼굴이 못생겼으며 얼굴빛 또한 거무스름했다.

징비록

그런가 하면, 조선 통신사 황윤길은 도요토미의 첫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눈에서 광채가 나고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인물로 보이며 행색과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다. 눈에는 불꽃이 튀어 그 용모만으로도 침략의 야욕을 읽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미리 대비해야 할 인물이다.

황윤길


8. 창작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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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36년 2월 2일이라는 설도 있다.[2] 틀에 있는 착색 초상화 보다 약간 색이 없다.[3]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이라는 밥을 만들었는데, 그의 사후 히데요시 밑에서 조용히 야망을 키워가던 3대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전부 꿀꺽해 에도 막부를 열어 버렸다. 그래서 일본사, 특히 전국시대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오다가 떡방아를 찧고 '하시바'가 만든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구절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 문서로.[4] 하지만 애시당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국시대 말기 최대 군벌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력으로 누르지 못했던 것이 컸는데 이로 인해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제거할 명분을 갖지 못했고 결국 관동으로의 전봉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이에야스가 관동 경영에 성공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오히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가 관동은 물론이고 본인의 옛 영지의 영향력마저 되찾으며 거대한 세력을 갖추게 되는데 일조하였다.[5] 고시치노키리 문장은 오동나무를 상징하며, 본래 일본 황실의 문장 중 하나였고 오늘날에도 일본 정부의 상징이다. 그러나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덴노에게 하사받은 이래 재상이나 조정 고관에게 하사되었고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문장을 하사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은 초기에만 이 문장을 사용했고 이후 본래 자기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문장을 쇼군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오다 노부나가 문서에 있는 초상화에도 노부나가의 옷에 이 문장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고시치노키리는 주로 조정이나 중앙 정계의 정치적 유력자에게 수여되는 문장이고, 이외에도 각 가지의 잎 수가 2개씩 적은 고산노키리(五三桐)를 비롯해 다른 기리몬(오동나무 문장)들은 평민과 무가를 불문하고 폭넓게 쓰인다.[6] 역직은 군정직이고, 관백은 조정직, 그리고 관백은 품계 없는 관위로 품계가 가장 높은 관위는 태정대신. 다만 품계가 없다는 의미와 히데요시의 권력을 감안하면 최고의 자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무가 출신으로 관백이 된 이는 자기가 물려준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외에는 유일하다. 정1위는 죽어서나 되었고 생전에는 종일위였으니(살아서 정일위가 된 인물은 일본 역사를 통틀어도 고작 6명 뿐이다.) 위계 기준으로는 사실상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7] 일본 영상물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최고권력자에 오르기까지는 호방하고 대범하며 미천한 출신답게 재치있는 인물로 묘사하다가 말년에 타락, 노망드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 매체는 아직까지 '그냥 나쁜 놈' 취급이다.[8] 당시 일본은 4대 가문 중 후지와라 가문이 조선 건국도 하기 전부터 수백년째 관백 자리를 계속 독점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이런 기초적인 사정을 조선 정부가 알았다면 다른 정보가 부족하거나 오류 정보가 와도 헤이지는 맞지 않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애초에 하시바가 패권을 가지고 나서 도요토미를 만들기 전에, 4개의 가문 중 고민없이 바로 후지와라를 고른게 다른거 없이 그냥 간파쿠를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9]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을 보면 오다 노부나가에 대해서도 관백(간파쿠)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다. 히데요시에 대해 설명할때, 죽은 前 관백을 주군으로 모시던 부하였다가 주군이 죽고 나서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관백이 된 사람이라고 써 놨다. 즉 히데요시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이 관백이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 역사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관백에 관심이 특별히 없기도 했고, 우다이진(右大臣, 우대신)까지만 하고 관백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실록에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 자체는 따로 나오지 않는다.[10] 사실 사성(공을 세운 자에게 성씨를 하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국 역사에서도 여러번 있었던 일이므로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조선에도 이지란이라는 예가 있기도 하고.[11] 사실 히데요시가 자신의 미천한 출신 때문에 이런저런 관직을 받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일본의 지배자인 쇼군이나 마찬가지였고 그 쇼군 자리는 타이라씨 혹은 미나모토씨만이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평수길이라고 적은 듯하다. 당시 일본은 워낙 위치와 관직명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당장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관직이 사마노카미였는데 이게 말을 보살피는 직위다.[12] 한국에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다.[13] 양부라지만 겨우 1살 많을 뿐이다. 히데요시가 천민이었던 반면 코노에 사키히사는 공가 귀족들 중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권위가 높은 후지와라 가문의 으뜸인 코노에 가 사람인데다 아버지 대부터 본인까지 관백 겸 태정대신을 지낸 서열 끝판왕이었다. 천한 신분이었던 히데요시는 자신의 신분을 높이고자 양자로 들어가는 꼼수를 쓴 것.[14] 관백의 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태합으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15] 출가한 이후의 법명.[16]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이 서양과의 교역 과정에서 노예장사로 아프리카에서 일본에 끌려온 흑인에게 이름을 주고 사무라이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출신보단 능력을 우선시했다. 야스케 문서 참조.[17] 일종의 파견 근무[18] "노부나가가 진을 치면 풀 한 포기 나지 않지만, 히데요시가 진을 치면 시장이 들어선다"란 말이 있다. 다만, 이것은 상업 장려 외에도 히데요시가 즐겨쓰던 '기동전'과 '기만전술'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오다와라의 호죠가를 정벌할 당시에 대군으로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뒤 뒤에 목책을 쌓고 그 너머에 시장과 유곽을 세워 비번인 병사들과 여자들이 노닥거리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등의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19] 이에 대해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은 주군인 노부나가에게 자기 찻잔 컬렉션을 신나서 자랑했다. 허나 당시 찻잔은 그야말로 높으신 분들만 누릴 수 있는 문화였고, 미천한 가문 출신의 히데요시가 모은 찻잔들을 본 노부나가는 꼭지가 돌아 '선 넘지 말라'며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히데요시를 꾸짖었다고 한다.[20] 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21] 미나모토/겐지(源氏), 타이라/헤이케(平氏), 타치바나(橘氏), 후지와라(藤原氏)는 천황에게 사성받음으로서 쓸 수 있는 본성 중에서도 특히나 격이 높아 일명 4대 본성(겐페이토키츠)으로 불린다. 이 중 후지와라를 제외한 셋은 전부 황실의 분가이다. (참고로 타치바나는 유일하게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성씨이다.) 종법상 왕과 촌수가 멀어지면 신하의 신분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선 일반적이었다. 조선에서도 전주 이씨의 공파에서 갈라져나간 자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에도 적용되는데 증손자까지 왕족이고 고손자부터는 평민이 된다. 하지만 현대에는 세습친왕가화족들의 몰락과 여자들만 태어나면서 다들 해당 경우가 적용되기도 전에 평민이 되었다.[22] 물론 계승권이 있는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다만 이 설에서는 히데요시가 아시카가 가의 양자로 입적하는 것에 실패해서 정이대장군직을 포기했다고 본다. 그러나 관백 작위는 정이대장군 이상으로 혈통이 중시된다는 점 등을 근거로 애시당초 히데요시는 정이대장군보다 관백직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보는 설도 있다.[23] 원래 오다 가는 남녀 가리지 않고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했다.[24] 히데요시의 친구 토시이에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나가에 대한 공포심과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던듯 하다. 말년에 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노부나가가 나타나 히데요시를 저승으로 데려가려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내가 원수 아케치를 죽이고 오다 가문을 보전하지 않았냐"고 항변했지만, 노부나가는 "그러기에는 내 아들을 비롯한 오다 일족들을 죽이고 핍박했기에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며 일갈했고 멱살을 잡고 끌고 갔다고 한다. 깨어난 히데요시가 주위를 살펴보니 진짜로 끌려간 듯 이부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 누워있었고, 이 꿈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건강이 더 악화돼 곧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25]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처럼 타 가문의 견제나 포섭 목적으로 보내는 방법이 있었다.[26] 아예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오고쇼가 되고 히데츠구를 바지사장으로 앉혀서 자신이 실권을 휘두르고 히데츠구를 허수아비로 각인시킨 다음 그 실권을 히데요리에게 온전하게 넘겨주는 방법도 있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처형은 히데츠구에만 한정하고 그 자식들에게는 적당한 자리를 줘서 중앙에서 멀리 떼어놓는 방법도 있고. 단순히 히데츠구를 죽여서인 것만이 아니라 그 처자식마저 잔인하게 죽인 덕에 원래 히데츠구를 따르던 사람들과 히데츠구의 인척들의 마음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대실책이었다. 오죽하면 오사카 전투 이후에 히데요리의 어린 아들이 처형되자 사람들이 "이게 다 히데츠구 죽인 천벌을 받는 거다." 라는 말까지 했을정도다. 그냥 히데츠구 가족들만 연루되었다면 모를까 여기엔 꽤 굵직한 다이묘들도 연루되어 있어서 파장이 장난이 아니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다테 마사무네 같이 무게감이 엄청난 다이묘들도 연루되었던 게 문제였다. 그리고 훗날 이 두 다이묘는 정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어버리는데 히데아키는 서군에 있다가 배신해서 동군으로 바꿨고 마사무네는 아예 시종일관 동군이었다.[27] 사실 그보다는 장수로서는 쓸만했지만 정치가로서는 불안정했다는 말이 어울린다.[28] 그러나 이것도 정확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이 흑화하기 전의 성격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걸로 모자라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하기까지 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코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는 성격이 아니었다.[29] 공가(일본 황실)와 무가(실권을 쥔 무사 가문)가 조화를 이룸.[30] 사실 히데요시가 쇼군을 자처하지 않은 이유는 본인이 천황가(家)의 후손이 아닐 뿐더러 본인이 미천한 신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해봤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천한 출신이었던 탓에 히데요시는 후다이(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나 자신의 가문에 충성을 다하는 지역적 기반이 없었다. 어차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인이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크게 성공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뿐더러 본인의 직위였던 관백이 쇼군보다 오르기 어려운 직위였기에 굳이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하면서까지 쇼군이 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31]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음침한 계략꾼으로 상당히 저평가되었다. 이유는 물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유신지사들 입장에서는 타도해야할 타락한 구체제가 에도 막부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나 그 시조인 이에야스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일본 황실을 푸대접했다고 여겼고, 이러한 격하에는 괘씸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야스 외에도 일본 역사상 천황을 갈아치웠던 무로마치 막부의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그 목상(木像)이 대역죄로 효수를 당했다. 사실 임진왜란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성공적인 침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첫 해는 조선의 국방 상태가 안 좋은 점이 유리하게 작용해서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하긴 했으나 결국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르자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듬해 부터는 후퇴를 거듭하여 조선 내 거점이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로 축소되었다. 이후로는 시간만 끌었을 뿐 딱히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행패만 부리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야 자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적어도 도요토미 정권이 일본을 통치하는 동안은 일본이 임진왜란으로 손해만 봤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도자기 제작 기술과 유학이 발달하는 등의 이익을 보긴 했지만 이것도 도요토미 정권이 멸망한 후의 일이었다.[32] 'はん'은 "~씨"를 뜻하는 'さん(~상)'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아재', '태합 씨' 정도.[33] 사실 유능한 센고쿠 다이묘들은 오늘날 현지에서 스타 취급받는다. 다케다 신겐도 야마나시현에서 지역 대표 위인 대접를 받는다. 정작 관백을 그만두고 태합으로 물러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끝낸 그 영웅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타락한 뒤였다. 굳이 임진왜란이 아니어도 도요토미 히데츠구 및 그 일가를 잔혹하게 숙청하여 도저히 좋게 평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34]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도 앞선 시대의 인물인 앤 불린도 정적들에 의해 다지증이라는 가짜 뉴스가 퍼지는 굴욕을 당한 일화가 있다.[35] 히데요시가 반역자인지 어떤지에 대해 여기서도 토론이 있었다. 통상 반역을 주인에게 가야 할 권리를 부하가 빼앗는 행위로 해석한다면 히데요시는 오다 히데노부에게 가야 할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결과적으로 볼 때 빼앗은 셈이므로 히데요시도 반역자이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니 당시 일본에서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와 서열이 뒤바뀌어 있기는 하나 요도도노 등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히데요시의 배려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훗날 가문이 이어져서 메이지 시대 당시 자작급은 될 정도로 그 세력을 유지했다. 중국식으로 보면 이왕삼각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할 수 있을 듯싶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명히 오다 가문에게 가야 할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오다 가문에게 무슨 정통성이 있다고 보기는 또 어렵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오다 가문부터가 원래 가문을 하극상한 가문의 분가였다. 원래 가문의 신하였다가 하극상을 통해 그 자리를 빼앗은 사이토 도산과도 비슷하다.[36] 단 완전 뜬구름 소리는 아닌 게 징비록에도 틀리기는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출신이라는 서술이 있다. 아마도 당시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출신이 아닌 중국 출신으로 보았고 때문에 임진록에서도 이런 설정을 넣었을지도 모른다.[37] 그래도 예외가 있기는 있었으니, 1763년 당시 서기(書記)로 파견된 원중거(元重擧)라는 사람이다. 그는 사행 후 일종의 일본 백과사전인 '화국지(和國志)'를 쓰는데, 여기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도요토미를 까면서도 '중국으로 치면 진시황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이것은 시황제가 한창 전국통일 이룰 때까지 영민하고 노련한 통치자의 수완을 발휘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교만과 독선에 허황된 망상에 빠져 나라를 떠받들 중요한 후계자를 내치고, 충신을 죽이고, 백성들을 시달리게 하여 패업을 제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과 같게 본 것이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선 ‘그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단 낫다’는 식으로 평가받고 있다.[38] 그 절은 히데요시와 히데츠구가 증축한 덕에 도요토미 가문을 떠받들고 있었다. 철저하게 도요토미 세력과 그 일족을 몰살한 이에야스였지만, 그 지지자들을 다 죽일 수는 없어서 방치한 것이다. 즉 새빨간 거짓말.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봐 거짓 자료를 가지고 와서 출전이라면서 증거로 제시해 통신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연회를 취소하고 국교를 파토낼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이때 조선 통신사들과 같이 있으면서 그 가짜 문서를 가져와 보여준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였는데, 신유한의 사행기록인 <해유록>에는 그때 아메노모리는 조선 통신사들이 끝내 접대를 거절하자 분해하면서 칼까지 빼려고 하는가 하면, 조선통신사들에게 그 가짜 기록을 보여주고 난 다음 날에도 실무 맡은 일본 측 관리들에게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가며 마구 갈구고 통신사들에게도 "저희가 아니라고 문서까지 가져와 보여드리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안 믿어주시니 너무 섭섭합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되어 있다.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였던 아메노모리로써는 조선통신사들의 강경한 태도는 쓰시마 번이나 실무 관료의 총책임자격인 자신에게 화살이 다 돌아오는 만큼 매달릴 수밖에 없었기도 했다.[39] 네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남편의 바람기를 가지고 하소연하자 이에 상관인 오다 노부나가는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히데요시) 녀석이 그대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 저 대머리 쥐새끼 녀석이 그대만큼 훌륭한 여성을 또 얻을 리는 없을 테니 그대도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토키치로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게."라는 서신을 보내 네네 편을 들어줬다.[40] 노부나가의 딸,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의 딸 요도도노, 노부나가 남동생의 딸 등. 특히 요도도노는 전국시대 최고 미녀였던 이치히메(오이치)를 닮아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최고 미녀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가장 총애했다.[41] 에도 시대 조선 통신사에서 조선 측 서장관인 신유한이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남자가 여자와 서로 어울리지 않고 같은 남자와 어울린다니 괴이하다"라는 반응을 보이자 아메노모리는 "학사님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시나 봐요"라고 대답하니, 이를 들은 신유한이 "성리학자인 아메노모리도 저런데 보통 일본인들은 오죽하겠나."라는 식으로 평한 기록이 있다. 다만 이런 남색 문화는 상류층이나 즐기는 것이었고 일반 백성이 즐기는 문화는 아니었다.[42] 『義昭興廃記』『豊臣秀吉譜』 畿内戦国軍記集 和泉選書39 1989年1月15日初版第1刷発行 青木晃、加美宏、藤川宗暢、松林靖明編 和泉書院発行。そもそもは、加賀市立図書館聖藩文庫蔵.[43] 다만 도쿠가와 가문 역시 겐지의 후손이라는 건 족보 위조라는 설이 유력하다.[44] 사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맹 관계였으니 원래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동맹의 부하 1에 불과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오다 가를 차지하고 자신에게 인사하러 오라고 을러댔으니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고까웠을 듯. 말할 것도 없이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천하를 차지하려는데 있어서 제일가는 장애물이고.[45] 정사에서는 오사카 성 전투에서 전사했다.[46] 이렇게 큰 땅덩이를 계승자가 아닌 아들에게 떼어주는게 불합리하다고 여긴 가로가 저지했기 때문에 타테이시 번은 결국 절반 크기인 5천 석밖에 받지 못했는데 키노시타 가의 전승에 의하면 나중에서야 노부요시의 정체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 쿠니마츠이고 선대 영주 노부토시가 그를 모시기 위해 1만 석을 주려고 했음을 알게 된 가로는 자신이 주군의 깊은 뜻이 담긴 유명을 어겼다는데 죄책감을 느껴 할복했다고 한다.[47] 키노시타 무네토시 씨는 아직도 현지에서 지역 유지의 대접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영주님"으로 불린다고 하며 도요토미의 성씨가 적힌 인장을 대대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