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 풋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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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네덜란드어
totaalvoetbal
영어
Total football
일본어
トータルフットボール
중국어
全攻全守
독일어
Totaler Fußball
프랑스어
Football total
이탈리아어
Calcio totale
스페인어
fútbol total
포르투갈어
Futebol total
러시아어
Тотальный футбол

1. 개요
2. 토탈 풋볼의 태동
3. 전술의 문제
4. 참고 항목



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명감독 리누스 미헬스가 1970년대 아약스, FC 바르셀로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창시한 축구 전술 개념으로, 이것을 전설적인 선수 요한 크루이프를 위시한 네덜란드 선수들이 필드 위에서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세계 축구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현재 토탈 풋볼은 현대 축구의 시발점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21세기 이후 전세계의 모든 축구는 토탈 풋볼을 베이스로 전술을 고안해 궁극적으로 토탈 풋볼이 추구하는 축구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2. 토탈 풋볼의 태동[편집]


토탈 풋볼 시대 이전의 축구는 수비와 공격이 분담되다시피 나뉘어 있고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져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서있는 선수들이 공을 뺑뺑이 돌리는 형태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경기장 중앙에 넓은 벌판을 제공하게 되었고, 이렇게 공간이 나면 볼 컨트롤과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 한둘이 죽어라 달리면 가속이 붙어 쉽게 파훼되는 편이었다. 반면 토탈 풋볼은 팀 전원의 정교하고 조직적인 움직임을 통해 상대방이 뛰어다닐 공간을 막고 패싱을 통해 점유율을 올려 공을 골대까지 배달한다는 전술적 사상 하에 유기적이고 치밀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전 유럽을 제패하였고, 이런 전술을 다른 팀들도 모방하면서 현대 축구는 그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격변을 겪게 된다. 그 결과 토탈 풋볼은 축구 역사에서 판타지 스타 한두명의 영향보단 팀의 퀄리티 자체가 더 중요한, 진정한 팀 스포츠로 발돋움하게 된다.

흔히 토탈 풋볼은 AFC 아약스를 이끌던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혼자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이끌던 에른스트 하펠 감독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를 통해 보통 수비 상황에서는 잉여전력으로 간주되기 쉬운 공격수들에게 전방에서부터 상대를 압박하도록 만들고, 또 공격시에는 포지션 체인지를 통해 수비수들도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시켜 토탈 풋볼이라는 말 그대로 전원 공격 + 전원 수비의 형태를 취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들이 중시되는 축구 전술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 과정에서 요한 크루이프는 토털 풋볼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다는 찬사를 받은 당대 축구계 슈퍼스타였다. 리누스가 토탈 풋볼의 설계자라면 크루이프는 야전사령관이었던 셈.

참고로 토탈 풋볼이 네덜란드만의 고유한 흐름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미헬스 감독의 아약스 시절 이전에도 토탈 풋볼의 흐름은 있었기 때문. 물론 그 이전 토탈 풋볼의 시작도 잉글랜드 출신 잭 레이놀즈 감독의 아약스였다는건 함정이지만[1], 여하튼 레이놀즈가 주로 이끌던 당시 아약스는 191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중반까지 30여년간 토탈 풋볼로 네덜란드에서 맹위를 떨쳤다. 그 외에 1940년대 아르헨티나에서는 라 마키나라 불린 선수들이 기계와 같이 유려한 움직임을 펼쳤고, 1950년대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는 경기 중에 유기적인 포지션 변경으로 황금색 바람을 일으켰으며,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마슬로프는 압박과 4-4-2를 이용해 토탈 풋볼로 이어지는 여러 개념들을 앞서 선보였다. 또한 독일의 공격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워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도 카테나치오를 개량해 스위퍼리베로 개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고,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오늘날도 역대 최강팀 칭호를 듣는 유기적인 미드필더진을 구축했다. 이외에 멕시코 축구에서도 토탈 혁명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축구의 형태가 나타나기도 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토털 풋볼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 리누스 미헬스나 요한 크루이프의 위대함이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토탈 풋볼하면 미헬스와 크루이프가 떠오르는건 그들이 토탈 풋볼 개념을 제시한 것 못지 않게 그것을 활용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 역시 냈기 때문으로[2], 토탈 풋볼하면 가장 유명한 이들의 영향력 아래 이후 축구판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들을 토탈 풋볼의 시작이라고 보는거지 아니었다면 이들 역시 그냥 무명의 축구 전술 이론가 중 한명으로 남았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축구는 토탈 풋볼로부터 태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3]


3. 전술의 문제[편집]


경기가 잘 풀릴 때의 토탈 풋볼은 말 그대로 무적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반대로 경기가 잘 풀리지 않거나, 혹은 확실하게 골을 넣어줄 스트라이커가 부진하는 경우에는 공은 공대로 돌리다가 정작 골은 넣지도 못하고 역습 한 번에 무너지는 일이 빈번하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러한 경기를 두고 애무축구라며 비꼬기도 한다.[4] 이기는 축구를 하려는 축구팀 입장에서는 당연히 한번쯤은 익히고 들어가는 전술이지만, 이에 대한 카운터 전술로 지키는 축구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만큼 다득점 양상이 나타나진 않는다.

그리고 공격 시에도 실수를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패스를 계속 돌리고, 전방에 공간이 나면 그때서야 공격을 들어가는 스타일이라서 뜬끔포나 예상치 못한 멋진 골이 터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FC 바르셀로나스페인국가 대표팀 그리고 펩 과르디올라 체제 하의 FC 바이에른 뮌헨이 대표적이다. 경기가 풀리지 않는 날 이 팀들의 패스를 보자면 상대 팀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좌우로 횡패스만 뿌려대는 모습이 마치 피구왕 통키에서 나오는 오복성 패스[5]로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지든 이기든 투박하게 치고박으며 골이 터지는 맛에 축구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지루한 전술로 손꼽히며, 2000년대 들어서는 토탈 풋볼의 안티테제격으로 오로지 실리만을 따지기 위해 극도로 수비적인 형태로 포지션을 마개조한 안티 풋볼이라는 새로운 흐름도 생겼다. 이 분야의 대표인물은 주제 무리뉴 감독으로 비판도 많이 받지만 본인은 쿨하게 비판들을 받아넘긴다.[6]

그리고 선수 입장에서도 전원 공격, 전원 수비라는 단순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화하기 어려운 형태의 전술이기 때문에 전방압박을 위해 그라운드 플레이어들의 높은 체력을 요구하며, 단순히 왔다갔다 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오프 더 볼 움직임과 공간 압박이 필수적인 전술이기에 선수 개개인의 최소한의 전술적 이해도가 받쳐줘야 한다. 여기에 더해 요한 크루이프, 펩 과르디올라처럼 천부적인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그라운드 위에서 선수들을 지휘할 키 플레이어가 없으면 금세 진형이 무너지고 공격수부터 수비수까지 공만 보며 따라다니는 동네축구로 전락해버리는 문제점까지 존재한다. 토탈 풋볼이 아마추어 수준의 플레이에서는 구현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7]

다만 크루이프는 그렇게 높은 수준의 체력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적절한 움직임과 높은 수준의 기술이면 체력을 세이브해 가며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크루이프의 토탈 풋볼은 사실상 리누스 미헬스 당대의 것과는 당연하게도 완전히 다르다. 1970년대 축구의 공격작업은 다소 정적이였고 포지션도 다소 분업화된채로 고정적인 위치에 자리잡은채 삼각패스 등을 넓게 주고 받았다. 지금처럼 전방에서의 거센 압박도, 좁은 공간에서 짧은 패스를 주고받는 전술도 없었다. 이러니 리누스 미헬스가 처음 제시했던 토탈 풋볼은 후방에 오프사이드 트랩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롱패스에만 대비하고 나머지는 거의 개떼처럼 공을 가진 상대선수에게 5-6명이 달려드는, 말 그대로 토탈 압박이였다. 물론 50년대의 포지션 체인지나 60년대 이후 지역방어가 대세가 된 것, 에레라의 인테르 역시 공격시 포지션의 가끔씩 스위칭을 사용하며 발전해온 것을 기억하자. 그들은 빠르게 수비로 돌아왔고 정적인 축구도 나름대로의 발전이 있어왔다. 그렇게 미헬스의 공격작업도 전원이 패스를 받을 최적의 위치와 공간으로 침투하여 전진하는 축구임은 다름없지만 80년대 남미와 유럽에서의 독자적 발전 하에 80년대 남미는 밀란 같은 강팀을 씹어먹으며 발전했었고 빠른 템포의 유기적 전환과 1:1 경합, 수비 등이 갖추어졌다.

유럽도 아리고 사키압박 축구와 함께 나타나 대변되는 효율적인 포지셔닝 사용이 등장했고 여기서 크루이프는 보다 세분화된 공격시 포지션과 공간의 활용과 수비시 발전해온 축구의 모습처럼 벌떼처럼 달려드는 비효율적 체력소모 대신 수비시 포지션에 보다 신경쓴 편이다.리누스 미헬스 역시 현대적인 패스 포지셔닝이나 수비과정에서의 포지셔닝을 훈련하고(4v2 등의 훈련이나, 나름의 수비라인을 맞추고 론도 등을 했다) 역사적 패러다임을 제시했으나 이후 축구의 발전과 함께 포지셔닝의 사용에 맞춰 크루이프는 그러한 시스템에 집중했고 90년대 중후반 아약스의 반할 등의 현대적인 전술적 시스템도 등장한다.

크루이프의 시대는 미헬스의 획기적인 아이디어 제시 이후와 그 이전부터 자행되어왔던 많은 발전을 거쳤고 포지셔닝과 공간, 기술에 있어서 그냥 축구 자체가 훨씬 발전해있는 때다. 물론 크루이프의 시스템은 전술적 유연성은 제로에 가까웠고 분석도 크게 신경쓰진 않은듯 그의 바르셀로나는 드림팀이라고 불리며 역대급 멤버들을 지녔다는 것에서 키 플레이어들이 시스템을 활용하며 공격에 활기를 불어다줄 선수가 아주 많았다. 크루이프도 자극을 주면서까지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화하려고 했다.

19-20시즌 1부 리그로 승격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3명의 수비수 중 2명을 오버래핑 시키는 원백 전술로 다시 등장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전술이 EPL에서 통용되기 어려울것이라고 얘기했지만 9위로 시즌을 마무리 지으며, 이 전술이 EPL에서도 통용됨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전술은 한번 파훼되면 뒷공간을 숭숭 내주고 빠른 수비가담과 스토퍼 및 골키퍼의 역량이 굉장히 요구됐는데 다음 시즌이였던 2020-2021 시즌 수비의 핵심이였던 잭 오코넬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고 맨유에서 임대로 데려온 딘 헨더슨이 소속팀으로 복귀하며 대체할 수 있는 선수가 없었고 그 어느팀보다 빠르게 최하위로 강등이 확정되고 말았다. 다만 3백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이 전술을 어느 정도 보완해서 비슷하게 전술을 꾸린 감독이 또 있었는데, 바로 첼시 FC에 중도 부임했던 토마스 투헬. 투헬은 첼시의 현 상황을 보고 단기적으로 수비를 빠르게 안정화시키기 위해 3백 포메이션을 선택하고 중앙 스위퍼 대신 좌우 스토퍼를 적극적으로 오버래핑해서 후방 빌드업 체계를 구축하고 수싸움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이 전술을 도입했는데, 그 결과 첼시의 수비진이 단기간에 빠르게 안정화가 되는 데에 성공했고 그 결과 2020-21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거머쥐게 되었다.[8]


4. 참고 항목[편집]


[1] 애초에 미헬스가 신인 선수 시절, 잭 레이놀즈 감독 말년의 아약스에서 뛰었다.[2] 미헬스는 아약스의 첫 유로피언컵(챔스) 우승과 네덜란드 유로 우승을 가져왔고, 크루이프는 미헬스가 떠난 이후 70년대 아약스의 트레블과 유로피언컵 3핏, 훗날 감독이 되고 나선 FC 바르셀로나에서 드림팀을 이끌며 구단 역사상 첫 챔스 우승을 선사했다.[3] 당장 8~90년대 크루이프이즘과 함께 유럽축구전술계를 이끈 아리고 사키사키이즘 역시 알고보면 토탈 풋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애초에 사키는 토탈 풋볼의 신봉자였다. 그걸 토탈 풋볼의 적장자격인 정파 크루이프이즘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기식대로 해석한게 사파 사키이즘인 것.[4]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준비작업부터 철저하게 계산하고 움직이지만 정작 골은 넣지도 못하는 것이 마치 열심히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정작 본방은 들어가지도 못한다며 비꼬는 표현이다.[5] 여러 선수들이 패스를 빠르고 정확하게 주고받는 것을 반복하다가 허둥대는 상대편이 보이면 그때야 샷을 날리는 기술이다.[6] 정작 무리뉴 역시 토탈 풋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이라는 점이 아이러니. 사실 현대축구에서 토탈 풋볼의 영향을 받지 않은 감독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만큼 토탈 풋볼이 현대축구에 끼친 영향이 크다는 이야기.[7] 동네 축구는 말 그대로 '공만 보이면 너도나도 개같이 달려들어 골을 따낸다'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만큼, 팀 단위의 전술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나 피지컬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당연하겠지만 골을 넣기 위해선 같은 팀이라도 경쟁자(...)나 다름이 없다 보니 유기적인 패스플레이나 압박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토탈 풋볼처럼 그라운드 위에서의 세밀한 위치 조정이나 전술적 움직임은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아마추어 수준에서의 축구는 드리블이 특출난 선수 몇몇에게 프리롤을 맡겨두면 개인 플레이로 알아서 찢어놓던 60년대의 축구나 다를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8] 차이점이라면 셰필드와는 다르게 두 명의 좌우 스토퍼를 동시에 오버래핑하는 형태가 아닌 좌우 스토퍼가 번갈아가며 오버래핑을 가져가는 식으로 썼는데, 스토퍼 한 명이 오버래핑을 가져가면 반대편의 스토퍼는 중앙 스위퍼와 함께 뒷공간을 커버해주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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