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부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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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8대 국왕
트리부반
त्रिभुवन वीर विक्रम शाह


파일:King_Tribhuvan_(cropped).png

출생
1906년 6월 30일
네팔 왕국 카트만두
사망
1955년 3월 13일 (향년 48세)
스위스 취리히 칸톤 병원
재위기간
제8대 국왕
1951년 2월 18일 ~ 1955년 3월 13일
대관식
1913년 2월 20일
칭호
트리부반 비르 비크람 샤허 데브
부모
아버지 프리트비 국왕
어머니 디베쉬와리 락쉬미 왕비
배우자
칸티 락쉬미 왕비
종교
힌두교

1. 소개
2. 허수아비 왕에서 절대왕정으로
3. 절대왕정 실현 이후



1. 소개[편집]


네팔의 제8대 국왕. 그의 치세에 150여년에 달하던 라나 가문의 통치가 끝나고 샤 왕조의 절대왕정이 실현되었다.


2. 허수아비 왕에서 절대왕정으로[편집]


1911년 네팔의 8대 왕으로 즉위한 그였지만 그에게는 실권이 전혀 없었다. 이미 6대왕 수렌드라 때부터 샤 왕조의 왕들은 이름뿐인 존재였고 실제 네팔의 통치자들은 라나 가문이었다. 라나 가문은 총리직을 독점하면서 내부적으론 가문의 최고 연장자가 총리를 자동 승계하는 법을 통해서 승계 구도를 명확히 해 권력공백을 막았고, 외부적으로는 인도를 통치하고 있던 영국에 접근해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내외부의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해 150여년의 통치를 이어갈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이르면서 라나 가문의 권력기반에는 점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팔의 젊은 세대가 인도에 유학하면서 인도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주의를 배우게 되었고 이를 네팔로 들여와서 라나 가문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게 되면서 이런 민족주의 세력들이 반 라나운동의 중심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1947년, 영국이 오랜 인도통치를 청산하고 물러가면서 라나 가문에게는 위기가 닥치게 되었다. 특히나 인도의 네루 수상은 친영국적이었던 라나 가문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이런 라나 가문을 끌어내리고 친 인도적이면서 자못 민주적인 정권을 원한 게 라나 가문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이런 내외부적인 환경의 변화가 맞아떨어지면서 그간 라나 가문에게 유폐되어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던 신세이던 샤 왕조의 트리부반왕에게 자연히 시선이 집중되게 되었다. 인도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반 라나운동 세력들은 트리부반과 은밀히 협상을 진행해 자신들을 도와주면 트리부반을 공식적인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민주주의 도입을 제안했고 트리부반은 이를 받아들였다.

1950년, 트리부반은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가족들과 수행원을 데리고 궁을 나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행선지를 카트만두의 주 네팔 인도대사관으로 돌려버렸고 인도 대사관에 들어간 뒤 네루 수상에게 망명의사를 타진해 결국 트리부반은 인도의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뉴델리로 망명해버렸다.

당황한 모한 샨시르 라나 총리는 궁에 남아있던 트리후반의 4살배기 손자 갸넨드라를 급한대로 왕위에 추대해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네팔 국민들에게 이는 왕이 버젓이 계시는데 무슨 새로운 왕이냐!라는 반발만 불러일으켰고 결국 라나 가문에게는 자충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네팔 국민들은 "인도에 계신 트리부반 왕을 모셔오자"는 거센 운동을 일으켰고 결국 다음해인 1951년 1월 7일, 트리부반은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환호속에 카트만두로 돌아오게 되었다.

트리부반의 인도망명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혹자들은 라나 가문에게 살해당할까봐 두려워서 인도로 도망쳤다고 보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네팔을 통치하던 라나 가문의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도입하기 위해 국민을 위하여 왕위도 버릴 수 있다는 표시로 인도에 망명한 거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어쨌든 트리부반의 망명과 복귀로 150여년에 걸쳐 이어지던 라나 가문의 네팔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샤 왕조는 150여년만에 절대왕정을 실현했다.


3. 절대왕정 실현 이후[편집]


샤왕조의 절대왕정 실현 이후, 트리부반은 이전의 민족주의 세력과 한 약속대로 민주주의를 도입해 네팔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오랫동안 권위주의적 통치에 익숙해져 있던 네팔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혼란과 진통이 지속되던 중 트리부반은 네팔 최초의 의회수립을 보지 못하고 1955년 사망했다. 이후 네팔에 민주주의의 상징인 의회의 수립은 그의 아들인 마헨드라의 통치기간에 이루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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