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 스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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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 스피커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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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1912
1915
1920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Speaker Tris Plaque_NBL.png
트리스 스피커
헌액 연도
1937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2.09% (2회)

파일:MLB 아메리칸 리그 로고.svg 1912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MVP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트리스 스피커
(보스턴 레드삭스)


월터 존슨
(워싱턴 세네터스)

MLB 보유 기록
통산 최다 2루타
792개






파일:91JtpFbTyiL.jpg

트리스트럼 에드거 스피커
Tristram Edgar Speaker

출생
1888년 4월 4일
텍사스주 허바드
사망
1958년 12월 8일 (향년 70세)
텍사스주 휘트니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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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포지션
중견수
투타
좌투좌타
신체
180cm, 87kg
데뷔
1907년, 보스턴 아메리칸스
소속팀
보스턴 아메리칸스-레드삭스 (1907~1915)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16~1926)
워싱턴 세네터스 (1927)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28)
감독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19~1926)

1. 개요
2. 입단 전
3. 선수 및 생활
4. 은퇴 후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1. 개요[편집]


트리스 스피커는 타이 콥의 유일한 라이벌[1]이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중견수[2] 중 한 명인 전설적인 선수이다. 라이브볼 시대에 최고 중견수 윌리 메이스가 있다면, 데드볼 시대에 트리스 스피커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공격과 수비를 모두 최고수준으로 갖춘 만능 중견수였다. 선수명은 긴 편에 속하는 진짜 이름인 트리스트램을 줄인 트리스였지만, 수비할때 맹수처럼 날아가 공을 낚아챈다며 "회색 독수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메이저리그 역대 야수 탑10[3]에 들고도 남을 경력을 가지고 있는 대선수이나, 활동 시기 중 전성기였던 데드볼 시대에는 4할 타자 타이 콥에 이은 2인자 이미지[4], 베테랑이 된 라이브볼 시대에는 데드볼 시대 활동기에 팀 후배였던 베이브 루스에 가려졌고 말년에 승부조작 의혹 스캔들까지 겪어, 메이저리그 매니아들이 역대 최고 야수 10위권을 이야기할 때도 생각보다 잘 안 넣어주는 선수들[5] 중 하나다. 라이브볼 시대의 스탠 뮤지얼처럼 실력에 비해 굉장히 저평가받는 선수이다.


2. 입단 전[편집]


브론코에서 우완투수로 뛴 스피커는 오른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두번 당하고 좌타자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때 그는 축구부 선수였고 학교 야구부에서는 주장을 할 정도로 운동을 잘하였다.


3. 선수 및 생활[편집]


트리스 스피커는 1907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데뷔했다. 펜웨이 파크가 개장하던 1912년 0.383의 타율과 최초로 50 2루타 이상, 50도루 이상을 동시에 기록하며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하였고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하였다.

1915년에도 팀의 신예 투수 베이브 루스와 함께 다시금 월드시리즈 우승을 견인하며 타이 콥과 함께 리그를 대표하는 중견수로 자리잡았다. 스피커는 중견수 수비위치를 2루수 바로 뒤에서 하면서 제5의 내야수로 상대방의 안타를 훔쳤으며, 뒤로 가는 공들은 엄청난 운동능력으로 따라 가서 커버했다.[6] 그래서 독수리처럼 날아가 잡는다고, 별명이 그레이 이글이었다.

그런데 레드삭스는 그해 스피커의 타율이 0.322로 하락세(??)를 보이자, 연봉을 삭감하려고 했고 당연히 스피커는 반발했다. 그러자 레드삭스는 우승의 주역이었던 스피커를 인디언스에 트레이드 시켜버린다.[7] 어찌됐든 인디언스는 리그 최고의 스타를 운좋게 얻었고, 자존심 강한 스피커는 트레이드 된 해인 1916년 0.386를 치며 타이 콥의 10년 연속 타격왕을 저지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격왕을 차지한다.

인디언스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뽑낸 스피커는 1919년부터 감독 자리도 겸임하였고, 그 다음해인 1920년 인디언스 창단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만들었다. 스피커는 월드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에서 혼자 3타점을 때려냈고 인디언스는 결국 3:0 으로 7차전을 승리하면서 우승했다.

그러나 스피커의 말년은 추했다. 1926년 인디언스의 선수 겸 감독 스피커와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 타이 콥은 승부조작 파문에 휩싸였고 청문회까지 받게 된다. 하지만 청문회날 승부조작 의혹을 최로로 제기한 타이거스의 투수 더치 레오나드가 신변의 위협을 문제로 나오지 않았고, 초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케네소 랜디스는 평소 타이 콥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레오나드의 억측으로 보고 무혐의 처리를 했다. 하지만 당시 정황상 승부조작이 상당히 의심되는 상황이었고, 불과 7년 전인 블랙삭스 스캔들 때에는 랜디스가 조 잭슨을 포함해 8명이나 영구추방했음에도 이번에는 스피커와 콥이 워낙 슈퍼스타라 그냥 덮고 넘어가려는 인상을 주었다.

결국 스피커는 다시 인디언스로 돌아오지는 못하고, 워싱턴 세네터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다시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로 옮겨 절친 타이 콥과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함께 하면서 은퇴했다.

스피커는 통산 22시즌 동안 0.345의 타율, 3,515안타(역대 5위), 1,529타점, 그리고 아직도 깨지지 않는 메이저리그 역대 1위 2루타 792개를 달성했다.


4. 은퇴 후[편집]


최고의 중견수라 불리우던 스피커는 1936년 최초 명예의 전당 입성 투표에서는 타이 콥, 베이브 루스 등 최초의 5인에 밀렸지만, 1937년 두 번째로 개최된 명예의 전당에서 82.09%의 투표를 받고 대투수 사이 영, 2루수 레전드 냅 라조이와 함께 헌액되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트리스 스피커
38
346
252
73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enter Field (3rd)

career WAR
7yr-peak WAR
JAWS
트리스 스피커
133.7
62.1
97.9
중견수 HOF 입성자 평균
71.2
44.6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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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명예의 전당 지표에서 트리스 스피커는 엄청난 수준의 그레이 잉크(트리스 스피커 346, 타이 콥 417로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무려 역대 6위로, 7위인 베이브 루스보다 높다.)에 비해, 블랙 잉크가 상대적으로 약한 걸(38로, 활동시기가 같은 타이 콥의 블랙 잉크 151에 비하면 많이 적다.)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타격지표 1위를 타이 콥이 자주 독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 콥만 없었어도 1위를 잔뜩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즌들에서 2위나 3위 등 5위 정도 안에만 든 지표들이 많아 블랙 잉크가 약한 것. 즉 보통 상황이라면 1등만 해도 될 엄청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타격왕을 한번 밖에 못하는 등 공격에서는 4할 타자 타이 콥이라는 절대적 존재 때문에 한 수 아래의 2등으로 평가되던 비운의 선수였다. 수비는 스피커가 콥보다 근소우위였고, 타격은 콥이 근소우위라 동급일 수 있었는데, 하필 스피커의 주루 및 도루능력이 중하위권이라 그 분야에서조차 역대 최강자인 도루왕 타이 콥이 주루분야를 압살하던 수준이라 종합에서 항상 타이 콥보다 아래로 평가받았다.[2] 그보다 WAR이 높은 중견수는 윌리 메이스와 타이 콥 딱 둘 뿐이다. 사실 동시대에 하필 타이 콥이 있어서 그렇지, 저 둘 외의 모든 중견수들은 감히 비견될 수조차 없는 대선수이다.[3] 팬그래프 WAR로는 야수가 문제가 아니라 역대 야구선수로도 탑10에 드는 선수이다. 야수로서는 그 테드 윌리엄스보다도 앞선 역대 7위.[4] 스피커도 타이 콥처럼 4할을 쳐 보고 싶어해서 몇번이나 도전했지만 3할 후반대 타율만을 기록하며 끝내 실패했다. 그나마 처음으로 타이 콥을 이기고 1시즌 타격왕을 했을 때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오히려 1912년 Chalmer's Award(당시의 MVP) 수상 당시는 여전히 그해 타격왕은 타이 콥이었는데, 전 해에 수상자였던데다가, 스피커는 소속팀이 우승한 해라 우승빨이 섞여있었다는 평이 있어, 그 해 타이 콥을 이겼다고 느끼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스피커는 이 때보다 1916년 타격왕 때 가장 기뻐했다고.[5] 동시대의 에디 콜린스나 후배 세대 중 스탠 뮤지얼이 비슷하다. 전자는 전성기인 1910년대에 MVP를 받고 전성기가 지난 1920년대 30대 중후반에도 20대 베이브 루스와 MVP 경쟁(1923년 MVP 투표 2위)을 했을만큼 노쇠화가 거의 없어서 공수에서 엄청난 실력을 유지하여 장기간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2루수로 군림하였으나, 블랙삭스 스캔들 때 승부조작을 안 했지만 혼자 연봉을 많이 받아 스캔들 일으킨 선수들의 불만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밉상이 되었고, 스탠 뮤지얼은 동시대에 튀던 선후배선수들 때문에 커리어가 묻혀보여서 저평가되지만, 둘다 세이버매트릭스상 각각 역대 최고 2루수, 외야수 겸 1루수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6] 스피커의 팔은 투수의 팔만큼 강하여 많은 주자들을 아웃시켰다. 스피커가 22년동안 보스턴, 클리블랜드, 워싱턴, 필라델피아에서 보여준 전설적인 외야송구는 7번의 풋아웃과 6번의 더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스피커의 기록은 메이저리그 중견수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7] 레드삭스는 스피커를 팔았음에도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고, 다시 2년 뒤에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다시 우승의 주역이었던 베이브 루스를 트레이드 시켜버린다. 그 결과는 폭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