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아농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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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농[1]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분할된 오헝 제국의 영토.
붉은 선과 붉은 글씨가 분할 이후의 국경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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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농 조약을 비난하는 헝가리 우표[3]
빨강색은 마자르족이 다수인 지역, 분홍색은 독일인 비율이 높은 지역이다.
1. 개요
2. 조약 이후와 빈 중재(Wienner Schidsspruch)
3. 현재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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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볼 만평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협상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헝가리 왕국이 체결한 조약. 협상국은 각각의 조약을 통해 패전한 동맹국의 영토를 분할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할되면서 헝가리도 대규모 영토 손실이 있었다. 헝가리는 조약의 체결로 인해 72%의 영토를 잃어[4] 전쟁 전 325,441km2에 달하던 헝가리의 영토는 93,073km2가 되었으며 64%의 인구를 잃어 2090만 명에서 76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의 변화로 1070만 명의 헝가리인 중 31%인 330만 명이 헝가리 국경 외부에서 살게 되었는데, 헝가리 고유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민족 구성을 핑계로 루마니아 왕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왕국 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5] 특히 에르데이(Erdély)의 헝가리계 민족들은 루마니아인들 사이에 포위당한 형국이 되었고, 같은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에게도 쇼프론을 제외한 외르비데크(Őrvidék)를 빼앗겨야 했다. 헝가리 밖의 헝가리인들 중 1921년까지 헝가리 영내로 이주하지 않은 사람은 트리아농 조약에 따라 헝가리 국적이 박탈되고 거주 국가의 국적이 부여되었다.

또한 철도에 있어서도 타격이 매우 컸는데, 국토 여기저기로 뻗어 있던 철도망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뻗어나가는 노선만 남게 되었다. 또한 복선 철도의 부설도 조약으로 금지되어 물류 수송에도 상당한 지장을 주었다.


2. 조약 이후와 빈 중재(Wienner Schidsspruch)[편집]


당연히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에 대해 불평등한 조약이라고 분노했으며 전쟁을 일으킨 건 오스트리아인데 왜 헝가리까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느냐고 주장하였다. 사실 이렇게 생각한 것도 당연한 게 전쟁 발발 직전 오헝 제국 내에서 헝가리는 전쟁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헝가리도 결국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제위/왕위 계승자의 죽음으로 인해 무조건 반대를 외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헝가리는 세르비아와 싸워서 이기더라도 세르비아의 주권과 영토는 유지시킬 것이라는 조건을 걸었고 오스트리아가 이를 수용하면서 헝가리도 전쟁을 지지하게 된 것이었다. 헝가리도 역시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후에는 적극적으로 전쟁수행에 동참하였다. 문제는 헝가리가 내건 조건을 오스트리아가 국가의 위신을 이유로 비밀로 해버렸다는 것. 만약 이를 국제적으로 공표했다면 오헝 제국에 동정적이었던 국제 여론상 세계대전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독립하여 세워진 신생 헝가리 공화국은 1차 대전 패전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무너지고 공산주의 정권인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들어섰는데 국내 상황도 제대로 수습 못한 상태에서 세계 혁명을 외치면서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세르비아 등 공산화의 공포에 떠는 주변 국가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결국 빨갱이 정권 제압 겸 트란실바니아 영유권 확보를 위해 루마니아가 직접 나섰다. 그리고 백군과 협상국을 모두 물리치는데 성공한 소련과 달리 협상국의 지원을 얻은 루마니아군, 그리고 빨갱이 저지를 위해 루마니아군과 연합한 헝가리 보수파에게 오합지졸 헝가리 적군은 완패했고 수도 부다페스트까지 함락당하고 만다.

루마니아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헝가리는 빼도 박도 못 하는 패전국이 되었고 보수파에 의해 재건된 헝가리 왕국은 트리아농 조약의 모든 내용을 수용해야 했다. 하지만 헝가리 내부에서는 억지로 수용해야 했던 조약을 인정하지 않아 "Nem, nem, soha! (안돼, 안돼, 절대로!)"나 "Mindent vissza! (모두 반환해라!)"라는 슬로건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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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추축국이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자 헝가리 왕국은 고토 회복을 위해 추축국에 가담, 뮌헨 협정과 빈 중재 등으로 1차 대전 때 빼앗긴 땅을 조금이나마 되찾았다.[6]


당시 극장 상영용 뉴스 인트로(Magyar Világhíradó, 헝가리 국제 뉴스). 잃어버린 영토와 '되찾은' 영토를 꼬박꼬박 표시하여 '언젠가는 다 되찾겠다'는 의지를 담아냈다. 한편 1944년 3월부로는 더이상 영토가 표출되지 않는데, 이는 독일의 마가레타 작전으로 인하여 헝가리 전역이 사실상 점령 상태에 놓여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축국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했고, 헝가리는 또다시 패전국이 되어 회복한 영토를 다시 반환했다.


3. 현재[편집]


헝가리는 이 조약에 대해 지금도 큰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각종 행사와 기념물을 통해 잊지 말자고 기리고 있다. 특히 루마니아와의 국민감정이 매우 나쁘다.

현재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와 그 지지자들이 공유하는 '대헝가리주의'는 이 조약 이전의 헝가리 왕국 영토를 회복하자는 주장으로 트리아농 조약 체결 직후부터 있어왔던 유서깊은 실지회복주의다. 다만 현재 헝가리 사회는 트리아농 조약의 실지를 되찾는 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대헝가리주의를 실현하기에는 헝가리의 국력과 군사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데다가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인구유출과 저출산에 시달리는지라 헝가리인들의 인구를 늘리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2022년 11월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이 대헝가리주의에 따른 영토를 수놓은 목도리를 하고 축구를 응원해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의 항의를 한꺼번에(...) 받았다.

2023년 4월 20일에는 헝가리 외무장관이 연설하면서 배경으로 대헝가리 지도를 띄워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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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약이 체결된 장소가 아닌 건물 이름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으로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있는 별궁을 말한다.[2] 갈리치아는 폴란드, 트란실바니아/부코비나는 루마니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보이보디나는 유고슬라비아, 이스트리아/쥐트티롤은 이탈리아에게 할양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분리되었다.[3] 우표 속 사람은 마차시 1세이며, 조약으로 줄어든 헝가리 영토에는 조약 전후의 영토 변화와 조약을 비난하는 문구인 Nem! Nem! Soha! (헝가리어안돼! 안돼! 절대로!라는 뜻.) 를 넣었다.[4] 72%로 줄어든 게 아니라 72%가 아예 줄었다. 후술할 인구도 마찬가지[5] 물론 이 3국은 헝가리의 영토를 받는 대가로 헝가리가 내야 할 전쟁 배상금 일부를 대신 내야 했다.[6] 아이러니하게도 루마니아 역시 추축국에 가담하면서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소련군의 진군으로 연합국으로 전환하기 전까지 전장에서 함께 싸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