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락스칼텍

덤프버전 :




파일:external/2.bp.blogspot.com/DSC00566.jpg
틀락스칼텍인들
틀락스칼텍의 나와틀어 심볼

1. 개요
2. 정치 체계
3. 역사
3.1. 아즈텍 제국과의 반목
3.2. 콩키스타도르와의 동맹
3.4. 멕시코 독립 이후
4. 오해
5. 평가
6. 미디어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멕시코틀락스칼라 주 일대에 존재하였던 원주민들의 연맹 국가.

각각 나와틀, 오토미, 피노메어를 쓰는 3개의 민족이 현 틀락스칼텍에 자리를 잡고 연방제로 공동 의회[1]를 만들어 하나의 정체를 이루는데, 중앙 아메리카의 대세에 따라 나와틀 민족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를 틀락스칼텍이라고 부른다.

관점에 따라 메소아메리카 부족 최후의 승자이자 생존자.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을 도와 아즈텍 제국의 멸망에 기여해 '메소아메리카 공통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지만, 틀락스칼텍 측에서는 현명한 외교술이었을 뿐이라 반론한다.[2]

2. 정치 체계[편집]


이들의 정치 체제가 어떠한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엇갈린데 스페인어 위키백과에서는 República de Tlaxcallan(틀락스칼란 공화국)이라고 되어있고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トラスカラ王国(틀락스칼라 왕국)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틀락스칼텍을 대표할 지도자를 둔 적은 없었기에[3] 이로쿼이 연맹과 비슷하게 부여, 고조선, 이스라엘 왕국 같은 초기 왕국이 되기 직전 과도기 상태의 부족 연합 상태였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상술한 스페인어로 틀락스칼텍을 '공화국'이라 부른건 현대적 의미로 군주가 없는 공화정 정부를 채택한 정부 체제의 의미로서 '공화국'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치 도시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정치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며 이런 '국체'를 가지고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는 그리스-로마 고전적, 르네상스적 의미의 '공화국'이다. 따라서 독일사에서 나오는 라이히란 단어의 번역문제처럼 사실 저런 근대적 의미가 아니라 르네상스적인 의미에서 당시에 '공화국'이라 부르던 건 뉘앙스를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틀락스칼란 연맹'으로 번역하는게 더 원의미에 가깝다. 당시 스페인 공문서들을 보면 카스티야, 아라곤, 안달루시아 같은 엄연한 자국내 영토들도 '이 공화국들(estas republicas)'이란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3. 역사[편집]



3.1. 아즈텍 제국과의 반목[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8px-Aztec_Empire_1519_map-fr.svg.png
1519년 아즈텍의 세력 지도. 틀락스칼텍이 완전히 아즈텍에 둘러싸여있다.

원래 틀락스칼텍인들과 테노치티틀란은 그다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두 국가가 발원한 14세기경 중앙아메리카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치치멕 세력과 신흥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틀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같은 나와틀 계열이었던 틀락스칼라와 테노치티틀란은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4]

그런데 테노치티틀란이 너무 커져버려서 틀락스칼텍으로서는 승산이 크게 낮아졌다.

아즈텍은 인신공양 의식을 앞둘 때마다 틀락스칼텍인을 공격, 포로를 잡아 인신공양의 제물로 희생시킨 다음 인육으로 먹었으며 이게 그 유명한 꽃 전쟁이다.[5]

이때 아즈텍은 틀락스칼텍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문화적/종교적 이유로 인육을 필요로 했기에 틀락스칼텍을 인육 공급원으로 쓰고자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15세기 당시 테노치티틀란, 즉 아즈텍은 멕시코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에서 틀락스칼텍은 테노치티틀란 바로 코앞임에도 놔두고 있었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듯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 일부러 놔뒀다는 것은 몬테수마 2세의 주장이라는 얘기도 있고, 실제로 아즈텍은 틀락스칼라의 마을을 포위하거나 무역을 단절시키는 등의 정규전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즉, 평범하게 틀락스칼텍의 저항이 완강했기 때문에 점령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이다.[6]

단어가 비슷해 틀라카틀올리란 인육을 넣어 만든 옥수수죽 음식이 틀락스칼텍인으로 만든 요리란 오해를 사는데 해당 요리 자체는 희생제물로 바쳐진 인육을 옥수수죽과 섞어 만든 음식으로 딱히 틀라스칼텍인의 인육만으로만 만드는 요리가 아니다. 물론 가장 가까운 틀락스칼텍 주민들이 요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국력에서 완전한 열세인 상황에서 아즈텍 내부의 결속 또한 단단하니 어떻게 반격의 여지가 없어 틀락스칼텍인으로서는 정말 꿈도 희망도 없었다. 아즈텍 남쪽은 무성한 정글이고 북쪽의 치치멕은 황야지대[7]로 그쪽 지역 부족들은 수렵으로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사실상 중앙아메리카에서 아스텍에 대항할 만한 세력은 전무했다.[8] 이러한 정세는 하늘에서 신이라도 내려오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3.2. 콩키스타도르와의 동맹[편집]


그런데 그 구세주가 정말로 나타났다. 16세기에 스페인 콩키스타도르가 메소아메리카에 들어온 것이다. 콩키스타도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 소양을 가진 에르난 코르테스[9] 1,000명도 되지 않는 군사력으로 인구 수백 만에 수 만의 군대를 가진 아즈텍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대담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한다.

베라크루스와 푸에비아 지역을 지날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텍스코코 호수에 도달할 뻔했던 스페인 군대를 주춤하게 한 것이 바로 틀락스칼텍인들이었다. 틀락스칼텍인 군대는 기습을 주로 활용했고 흑요석 검과 천갑옷을 사용했다. 여기까지는 여느 원주민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콩키스타도르들이 마주하지 못한 강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틀락스칼텍인의 군대는 아즈텍의 다른 군대와는 달리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고 한다. 당시 틀락스칼텍인들은 패배하면 스페인인들도 테노치티틀란인들처럼 자신들을 잡아먹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철갑옷과 철검으로 무장하고 총과 대포를 쏴대는 콩키스타도르들 앞에서는 추풍낙엽으로 쓸려나갔지만, 이들은 강자에게 산 채로 붙잡혀서 산 제물로 바쳐져 잡아먹히느니 차라리 전투 중에 비명횡사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매우 필사적이었다.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하는 척하면서 진영을 염탐하게 하는 기만전술을 펼치기도 하고, 정체 모를 스페인군의 무기에 대한 공포와 피해를 줄이려고 야간습격을 기도하거나, 수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등 아무리 죽어나가도 포기하는 법 없이 저항했다. 이들의 용맹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 있는데, 말 위에서 내지른 기병창을 손으로 붙잡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다음 다른 전사가 흑요석 검으로 후려쳐 중상을 입은 기수는 며칠 후에 사망했다.

코르테스 군대의 뛰어난 기수인 페드로 데 모른은 다른 기병 3명과 함께 원주민 전사들의 대열로 돌진하다가 기병창을 적에게 붙잡혔다. 그가 창을 빼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원주민 전사가 그들이 사용하는 날이 넓은 흑요석 칼로 페드로에게 중상을 입혔다. 기수가 타고 있던 암말을 내리 베어서 몸에서 머리가 잘려나가 가죽만 붙어 매달린 상태에서 말은 곧 쓰러져 죽었다.

- 베르날 디아스 디 카스티요의 기록


모른 외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악에 받혀 죽으려고 달려드는 틀락스칼텍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코르테스는 거짓 화친에, 야음을 틈탄 매복기습까지 실패한 뒤에야 고개를 숙인 틀락스칼텍의 사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틀락스칼텍을 이루는 세 개 부족 중 두 부족의 족장은 이 강력한 이방인들과의 동맹에 찬성했지만, 가장 세력이 큰 나와틀 부족의 지도자 젊은 치코텐카틀[10]은 반대했다.

하지만 코르테스와의 동맹을 찬성하는 족장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다수결 합의제에 따라 틀락스칼라 부족연맹체는 공식적으로 코르테스의 혈맹이 되었다. 이후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 원정을 갈 때 틀락스칼텍 전사 8천명을 동맹군으로 보낸 것을 시작으로, 슬픔의 밤 사태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코르테스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돕던 극소수의 부족들 중 하나였다. 오툼바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코르테스는 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노획한 아즈텍 총사령관의 깃발을 선물하면서 영원한 동맹을 약속했다.

이후에 이어진 아즈텍 정복 전쟁에서 스페인을 위해 가장 중요한 지형정보를 주는 건 물론이고 각종 물자와 인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했으며, 테노치티틀란이 함락될 때는 최대 20만 명의 병력를 지원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젊은 치코텐카틀을 부족원들이 붙잡아 코르테스에게 압송하기도 했다. 이때 치코텐카틀은 반기를 들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3.3.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편집]


아즈텍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으로 틀락스칼텍인들은 코르테스로부터 보상과 자유를 보장받았다. 코르테스가 스페인으로 압송된 뒤에도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의 '파트너'로서 스페인 왕실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받고, 다른 원주민들과는 달리 말을 탈 권리[11], 총기를 휴대할 권리, 귀족 신분을 유지할 권리(기존 통치구조를 유지할 권리) 등을 인정받았으며, 스페인 왕가로부터 문장과 권리를 하사받기도 한다. 스페인은 이 약속은 지켜 틀락스칼텍의 특권들은 스페인이 멕시코 독립전쟁에 의해 물러나는 그날까지 유지되었다.[12] 아즈텍 주변 치치멕이나 다른 마야계 부족들은 거의 전부가 코르테스와 협력했고 그 공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지만 틀락스칼텍의 특혜에는 못미쳤으며, 심지어 가장 먼저 코르테스 일당과 동맹을 맺고 병력을 제공한 베라크루스 일대의 토토낙인들도 이 정도 대우는 받지 못했다.

스페인이 멕시코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할 때는 군사 지원을 했으며, 오히려 다른 원주민들을 공격하는 데에 가담하고, 심지어 스페인의 지원 하에 치치멕이 지배하던 구역[13]으로 이민 가서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14] 테노치티틀란 함락 때 살아남아 투항한 아즈텍인들도 반란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철천지 원수들이 한 깃발 아래 싸우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틀락스칼텍인들은 스페인 식민정부와 협상을 해서 개척지 영구 보유 및 세금과 부역 완전 면제라는 특권을 얻어냈다. 스페인이 잉카 제국 정복 당시 모든 잉카인들을 멸족 직전까지 몰아갔지만(잉카 제국 문서 참고) 여기선 상당히 유화적이었다.[15]

문화적으로 참견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식인풍습[16] 만큼은 바로 잡았다. 하느님의 피와 살을 직접 영접하는 영성체 행사를 통해 교정했고, 가톨릭 국가답게 가톨릭 전도도 지속적으로 했지만, 그래도 16세기의 중앙아메리카의 문화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집단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멕시코인 중에서 원주민식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틀락스칼텍인 조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주민 문화가 스페인의 정복으로 뿌리뽑힌 지금에는 라이벌이자 숙적인 아즈텍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틀락스칼텍인을 연구하는 몹시 미묘한 일도 일어난다. 특히 틀락스칼텍인들과 아즈텍은 같은 언어를 썼기 때문이다.[17]

다만 동맹이라고 해서 없던 면역력이 생기는 건 아니라서 스페인인이 들고 온 전염병에 의한 피해를 가장 크게 봤다. 한때는 몇만의 병력을 제공하던 틀락스칼라의 틀락스칼텍인들이 500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민 등으로 인구가 많이 빠져나갔던 것도 컸고 혼혈이 잘 이루어지다 보니 그만큼 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3.4. 멕시코 독립 이후[편집]


그러나 이런 전성기는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막을 내린다. 멕시코 연방은 끝까지 친스페인파였던 틀락스칼텍을 연방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틀락스칼텍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사방이 멕시코 연방에 합류한 시점에서 결국 자치권을 넘겨주고 멕시코 연방 틀락스칼라 주가 된다.

근현대 멕시코 연방은 아즈텍 제국으로부터 바로 계승된 것도 아니고 아즈텍만큼 잔혹한 국가는 아니어서, 편입되고 나서도 유혈 정치보복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인프라는 덜 신경 써서 그런지 멕시코 중부지역 중 취약한 편에 속한다.[18] 아무래도 아즈텍 제국을 추앙하고 틀락스칼텍을 깎아내리는 멕시코의 상황이 틀락스칼라 주를 소외시키는 것으로 보인다.[19]


4. 오해[편집]


촘판틀리 유적이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슈되면서, 아즈텍 제국 폭정의 피해자인 평화를 사랑하는 틀락스칼텍이라는 이분법이 종종 알려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가장 크게 간과하는 것은 아즈텍의 인신공양과 식인이 (마야 문명과 머나먼 잉카 문명 역시 공유하고 있으며, 틀락스칼텍을 비롯하여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부족들에게도 널리 퍼진) 메소 아메리카의 토착문화였다는 점이다.[20] 틀락스칼텍 또한 포로를 잡으면 식인과 인신공양을 하였다. 꽃 전쟁 또한 아즈텍이 틀라스칼텍에게 패배한 적이 많았다.

스페인 역사가 디에스 무뇨즈 카마르고(Diego Muñoz Camargo)가 기록한 <틀락스칼라 역사(Historia de Tlaxcala)>에 기술된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1384년 틀락스칼텍과 또다른 도시국가인 우에쇼친코(멕시코시 남동쪽의 우에쇼친코라는 나와족 마을)의 전쟁에서 승리한 틀락스칼텍은 그들이 섬기는 신인 카막스틀리에게 바치기 위해 수많은 포로들을 인신공양하고 잡아먹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심지어 같은 저서에는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여성 노예 300명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들의 영역이자 현재 멕시코 틀락스칼라 주가 된 지역에서도 아즈텍의 인골탑으로 알려진 촘판틀리가 발견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사실이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아즈텍 제국의 인신공양은 틀락스칼텍을 포함한 다른 멕시코 원주민 문명보다 훨씬 큰 스케일이었기 때문이다.


5. 평가[편집]


멕시코에서 이들은 종종 '스페인창녀(...) 말린체와 그 아들들' 식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즉, 멕시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들은 같은 언어(나후아틀어)와 혈통 등을 공유하는 동족을 배신하고, 멕시코의 문화를 말살하고 자원을 약탈한 열강을 끌어들인 배신자이자 매국노인 것. 이를테면 베라크루스에는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으며 악수하는 늙은 치코텐카틀의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의 이름이 '아즈텍을 팔아넘기는 틀락스칼텍인들'이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런 평가는 틀란스칼텍인들에겐 좀 억울한 부분도 있다.

일단 몇몇 욕 안먹는 틀락스칼텍인들도 있다. 바로 코르테스에게 반항하고 교수형당한 젊은 치코텐카틀[21]로, 끝까지 동맹을 반대한 데다가, 스페인인과의 첫 교전에서 콩키스타도르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포위하기까지 한 업적을 세웠다. 포위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22] 결과적으로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사에서 유일하게, 소수의 원주민으로 그 코르테스에게 패배를 안겨준 젊은 치코텐카틀은 그 극적인 업적과 실패, 사망과 더불어, 배신자의 민족에서 나온 최고의 영웅이라는 드라마틱함 때문에 이후 멕시코의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다분히 근대에 들어 부각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역사적 맥락을 보면 마냥 합리적인 주장은 아니다. 당장 당시 틀락스칼텍이 코르테스 편을 든 원인은 본인들을 못살게 구는 아즈텍 제국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만일 아즈텍이 주변국들과 원만히 지냈다면 수백에 불과한 코르테스의 원정대가 우군을 얻지 못해 소득 없이 물러났을 것이다. 테노치티틀란의 함락 때 수만 명의 아즈텍인이 복수심에 가득찬 원주민 동맹군에게 학살당한 사건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주변국과 민족들에게 원한을 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아즈텍 바로 옆에 자리한 틀락스칼텍인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가장 오랫동안 강요당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압제는 아즈텍의 멕시카인들에게 가해졌지, 틀락스칼텍은 스페인에게 압제를 당한 적이 없다. 원수를 치는 데 협력한 대가로 자치권과 세금면제 혜택, 작위를 받아 200년 만에 오히려 아즈텍의 압제를 받던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3]

아이러니한 건 현대 멕시코가 아즈텍에서 정체성을 찾긴 하지만 실제 현대 멕시코인의 혈통은 아즈텍인보다는 아즈텍에게 노예 취급 당하던 다른 피지배부족들의 혈통이 더 많다는 것이다. 진짜 아즈텍 제국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아즈텍 제국의 지배세력이었던 테노치티틀란 사람들의 후손인데 이들은 아즈텍 제국 전체 인구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게다가 아즈텍인들은 스페인의 동맹 부족민들에게 대대적으로 학살당해 후대에 혈통을 많이 남길 수도 없었다. 그 중에서도 틀락스칼텍은 코르테스에게 수만 단위 병력을 제공할 만큼 인구가 많았기에 현대 멕시코인의 핏줄에도 틀락스칼텍인의 혈통이 많이 흐를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잡아먹힌 이들의 후손'이 오히려 '조상들을 잡아먹은 자'를 옹호하고 자기 선조들을 배신자라 욕하는 것이다. 즉, 아즈텍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은 일종의 멕시코판 서울 공화국 현상이라 볼 수 있는데, 멕시코는 대부분의 인프라가 아즈텍 제국이 터를 잡기도 했던 수도 멕시코 시티에 집중되어 있을 정도기에 멕시코의 정체성을 아즈텍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허나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21세기 들어선 여러 역사학자들이 이런 점도 지적하고 있어서인지 예전보단 형편이 나은 편이긴 하다. 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멕시코에서 아즈텍 향수는 상당하다보니 그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아즈텍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제물로 바쳤으니 그 시대에 남녀평등을 실현한 선진국가"[24]라 주장하면서 틀락스칼텍인들을 폄하하기도 하는 모양. 서로 매국노의 후손, 식인종의 후손[25] 따위로 욕한다니 일종의 지역 감정도 섞인 드립으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6. 미디어 매체에서[편집]


그러나 틀락스칼라에 먼저 들르면 도시 사람들이 신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면서 같이 아즈텍을 멸망시킬 것을 제안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실제 역사대로 아즈텍의 압제를 받던 도시국가들과 연합해 아즈텍을 완전히 멸망시키는 정복 플레이로 이어진다. 이 경우 대도시였던 테노치티틀란은 완전히 박살나 중소도시 멕시코로 변해 버린다. 연합을 거절하면 "맙소사, 신께서는 우리 보고 죽으라고 하신다!"라고 한다. 사실 테노치티틀란을 먼저 들러서 아즈텍을 발견하더라도 역사대로 코르테스가 결국 아즈텍을 멸망시켜 버린다.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아메리카스 캠페인에서 플레이 가능 세력으로 나오는데 주변 영토가 다 아즈텍에 둘러싸여 있어 심히 암울하다. 그래도 시작시 풀 군단 4개가 주어지고 아즈텍군은 도시마다 소규모 군단이 주둔하니 각개격파로 쳐부수자. 원래 역사대로 뉴 스페인과 동맹 맺는 플레이도 도움이 된다. 사실 플레이어가 어느 쪽을 잡느냐에 따라 운명이 극단적으로 갈리는데, 플레이어가 틀락스칼텍이라면 초기에 주어진 풀 군단으로 아즈텍을 각개격파해 버릴 수 있지만 아즈텍을 잡으면 흩어진 병력을 모아 1~2턴 내에 틀락스칼텍의 풀 군단을 뭉개버리고 멸망시킬 수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04:38:07에 나무위키 틀락스칼텍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약 50명에서 200명 가량의 공동 대표가 의회를 구성했다.[2] 사실 이쪽이 맞는게 당시에 틀락스칼텍과 아즈텍 명백히 다른 나라 다른민족이었으며 맥시코가 무리해서 아즈텍을 자기들의 민족으로 추켜세워서 그렇지 아즈택의 영향력이 있던 지역은 맥시코 시티 주변의 극히 일부지역에 불과하다.[3] 누에바에스파냐의 자치령이 된 후에는 사실상 스페인 국왕이 틀락스칼텍의 군주 역할을 했다.[4] 이 과정에서 틀락스칼텍 본인들도 인신공양과 식인을 대거 자행한 흔적도 있다. 본래 중남미 일대에서 인신공양은 흔했기 때문이다. 다만 아즈텍만큼 대대적인 규모로 벌이지는 않았다.[5] 나와틀어로는 xōchiyāōyōtl(소치야오요틀)이라고 한다. 스페인어로는 guerra florida, 영어로는 flower war로 보통 번역된다.[6] 실제로 꽃의 전쟁 승패 기록을 보면 대부분 테노치틀란쪽이 패배했다[7] 정글에 살던 원주민 기준으로 뉴멕시코와 애리조나 지역은 황야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마약 카르텔이 이를 악용, 멕시코 북부지방의 치안이 악화되는 원인을 제공했다.[8] 서쪽에 아즈텍의 경쟁국이라 할만한 타라스칸 왕국이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청동제 무기를 가지고 산악 지형에 의지해 자기 몸만 겨우 지키는 수준으로 아즈텍 원정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9] 정치력이란 부분이 중요하다. 당대 콩키스타도르치곤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코르테스는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대신 가능한 한 현지 부족들과 협상하여 동맹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썼다.[10] 사실 그의 아버지인 늙은 치코텐카틀이 부족장이고 그는 전쟁지도자였지만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젊은 치코텐카틀은 아무래도 갑자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스페인에 대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끝까지 의심하면서 스페인 세력과의 동맹을 반대했다.[11] 스페인 측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에게 을 타지 못하게 규제한 이유는 이들이 기병대를 만들어 군사력을 키울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꽃 전쟁이나 반(反) 스페인 항쟁 등으로 상당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부족들의 힘을 제한하고자 했다. 이런 규제에도 불구하고 틀락스칼텍인이나 아즈텍인의 친척뻘 민족인 코만치족스페인인 이주민들의 농장에서 말을 훔치거나, 도망쳐나와 야생화된 말을 길들여 유목민이 된 후에는 스페인 식민당국 측은 물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멕시코인들을 상대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12] 그리고 스페인에서 독립한 지금도 이들이 받은 세습작위는 유지되고 있다.[13] 지금의 미국 뉴멕시코, 애리조나 주들. 이들의 상당수는 현지 백인과 결합하여 완전히 백인화하였다.[14] 스페인은 이 지역을 개발하여 농경지로 만들고 싶어했는데, 스페인 본토인들은 이 지역의 기후와 맞지 않았고 현지인들은 치치멕 등의 유목민이어서 복속시켜도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주민족이었던 틀락스칼텍인들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켜 농경지로 개간하도록 한 것이다.[15] 잉카 제국 또한 스페인군이 잉카 제국의 착취와 억압에 이를 갈던 페루에콰도르 등 잉카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남미 지역의 피지배 원주민 부족들을 앞세워서 잉카 정복에 나서거나 회유했을 정도였다.[16] 아즈텍처럼 극한의 인신공양까지는 아니었지만 틀락스칼텍인들도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동맹을 체결한 부족들에게 식인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딱 한번, 테노치티틀란 포위전 때 사기진작을 위해 죽은 아즈텍 전사들을 동맹군 병사들이 가져가 포식하는 걸 허용했다. 정확히는 식인을 허용할 순 없으니 묵인한 것에 가깝다.[17] 사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말과 지역 사투리 정도의 차이일 뿐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인들은 서로 소통이 됐다고 한다. 거리가 매우 가까운데다 지금도 136번 국도를 타고 오갈 수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18] 버스를 예로 들면, 멕시코 시티로 가는 버스는 있어도 케레타로로 가는 버스는 아르코 노르테(Arco Norte)가 개통되고 나서도 생겨나지 않았다. ADO와 IMASA 경계를 나누는 과정에서 틀락스칼라는 배제된 것.[19] 지금도 멕시코 시티 사람들과 지역감정이 남아있는 듯하다. 서로를 매국노의 후손, 식인종의 후손으로 부르면서 싸우는 모양.(...)[20] 실제로 틀락스칼라 지역에 거주하는 현지인, 심지어 틀락스칼텍의 후손들도 인신공양에 대해 대화할 때 이 점을 들어 틀락스칼텍에 대해 오해하지 마라고 한다.[21] 이건 원주민식 이름이고, 영어권에서는 치코텐카틀 2세라고도 부른다.[22] 콩키스타도르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동맹에 찬성한 오토미와 피노메 부족들이 군대를 빼버렸다. 하지만 남은 나와틀 부족만으로도 콩키스타도르의 10배 가까운 숫자였기에 치코텐카틀 2세는 승리를 자신하고 공격했지만, 빈틈을 포착한 코르테스에 의해 실패, 그대로 휴전을 맺게 된다.[23] 이런 점에선 당나라와 협력해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오늘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욕먹는 것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 물론 신라는 이후 당나라와도 전쟁을 치르는게 차이점이지만.[24] 아즈텍 제국의 남녀평등은 스파르타의 사례를 생각하면 편하다. 극도의 군국주의 사회로 모든 자유민 남성들을 전사로 육성하다 보니 전사가 될 아이를 낳는 임신과 출산이 성스러운 전투로 여겨져 여성들도 대우를 받은 것으로 역시 군국주의 사회였던 스파르타의 여성들이 군사훈련을 받고, 타 폴리스 여성들보다 외부 활동이 잦았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죽창드립처럼 권위적으로 남녀를 '평등하게' 만들어서 주변 도시국가와 원주민들을 착취해 이룩한 군국주의 사회의 부산물이지 절대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의무교육기관인 칼메칵의 남녀 과목만 봐도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25] 물론 상기되어있듯 다른 많은 부족들조차도 정도의 차이일 뿐 인신공양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