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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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བོད་ཀྱི་ནང་ཆོས།

불|སངས་རྒྱས།
석가모니불과 날란다 17 논사(論師)[1]


법|ཆོས།
티베트식 불교 경전 뻬차(dpe cha)[2]

파일:tibetanlama-1.jpg

승|དགེ་འདུན།
묀람(smon lam)[3]에 참가한 티베트 불교 승려들

교세

약 1,800만 ~ 2,000만 명[4]
분류

대승 불교 (Mahayana Buddhism)
금강승 불교 (Vajrayana Buddhism)
성립

A.D. 7세기 송첸감포 왕 재위 시
분포

티베트, 몽골, 부탄
인접한 인도, 네팔, 중국, 러시아 일대
주요 사상

반야, 중관, 인명, 밀교
종파

닝마, 까규, 사캬, 겔룩 등
명칭

티베트어

བོད་ཀྱི་ནང་ཆོས།
영어

Tibetan Buddhism
한국어

티베트 불교

1. 개요
2. 명칭
3. 역사
4. 현교
4.1. 개요
4.2. 교학과 수행의 일치
4.3. 분석적ㆍ논리적 탐구
4.4. 근(根), 도(道), 과(果)
4.5. 견해, 명상, 행위
4.7. 불교인식논리학
5. 밀교
5.1. 개요
5.2. 밀교의 기원과 불교사 서술 방식
5.2.1. 전통적 관점
5.2.2. 현대적 관점
5.3. 밀교와 현교의 비교
5.4. 밀교의 분류
5.5. 밀교의 수행 요건
5.6. 밀교의 계율
7. 강원의 교육과정
7.1. 개요
7.2. 5대 경전의 학습방법과 핵심
7.3. 문사수(聞思修)의 체계
7.4. 기초 과정
7.5. 5대 경전 과정
7.6. 강원 과정 이후
8. 종파
8.1. 개요
8.2. 사캬
8.3. 겔룩
8.4. 까규
8.5. 닝마
8.6. 조낭
10. 한국과의 교류
10.1. 인적ㆍ사상적 교류
10.2. 문화ㆍ예술 교류
11. 지역별 보급
11.1. 대한민국
11.2. 중화권 및 티베트
11.3. 몽골
11.4. 부탄
11.5. 인도
11.6. 네팔
11.7. 러시아
11.8. 미국
11.9. 기타 전세계
12.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섭
12.1.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에서의 "마음의 본성"
13. 기타
13.1. 밀교와 성(性)?
13.1.1. 오해와 편견
13.1.2. 사상적 배경
13.1.3. 원리, 자격, 금기
13.1.4. 논란
13.2. 승려의 결혼?
13.3. 육식?
13.4. 초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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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라싸(Lhasa)에 위치한 포탈라궁(Potala Palace)

허공계가 남아 있는 한, 중생이 머무는 한,

저 또한 여기 머물러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게 하소서.

《입보살행론》〈회향품〉


[여래는] 오온(五蘊)이 아니고

오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분[여래]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오온] 속에 그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여래가 오온을 갖는 것도 아닌데

이런 가운데 어느 것이 여래이겠는가?

《중론》〈관여래품〉[5]

《중론 개정본 - 산스끄리뜨 게송의 문법 해설을 겸한》(김성철 譯)



1. 개요[편집]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달한 불교의 한 종파. 주된 분포 지역은 중국(중국령 티베트 자치구 포함)[6], 부탄, 몽골(중국령 내몽골 자치구 포함), 러시아의 몇몇 공화국(칼미크 공화국, 부랴트 공화국, 투바 공화국) 등이며, 믿는 지역이 가장 넓은 편인 불교 종파이다. 티베트 불교를 밀교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티베트 불교는 대승을 중심으로 소승, 바라밀승(대승 현교), 금강승(대승 밀교)를 모두 포괄하므로 대승 불교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7] # 다만 (주로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와는 별개로 보는 시각이 많기도 하다.

2. 명칭[편집]



실로 스승(guru)이란, 다름 아닌 붓다이며, 법이며, 상가이다(gurur buddho bhave[d] dharma[h] samnghaś căpi sa eva hi).

《Subhāsitasamgraha》, 《Jñānasiddhi》, 《Abhisamayamañjarī》, 《Gunabharani》등 (방정란 譯)


티베트어 '라마(bla ma)'는 '라나 메빠(bla na med pa)'의 축약어로 '위없는 존재, 가장 높으신 존재, 뛰어난 존재'란 뜻을 담고 있으며 '스승'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구루(guru)'의 의역어다. 불법승 삼보와 함께 스승을 특별히 존숭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 때문에 과거 서구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lamaism)'라고 칭하였으나 이는 부적절한 표현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라마교 혹은 라마 불교라는 용어 대신 티베트 불교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Encyclopædia Britannica, 《Lama》

스승을 붓다 혹은 본존 그 자체로 보는 밀교보다 믿음과 공경의 정도는 덜하지만, 대승 현교(顯敎)에서도 스승을 붓다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화엄경》에서는 ‘모든 공덕이 선지식에 의해 생긴다’’라고 하였으며 《대고경(大鼓經, Mahabheriharaka-sutra)》[8]에서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가까워졌을 때 아난이 매우 슬퍼하자 석가모니가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아 슬퍼하지 말라. 아난아 울지 말라. 나(석가모니)는 미래에 선지식이 되어 너희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9]

따라서 현교의 견해에서도 스승은 불보(佛寶), 스승의 가르침은 법보(法寶), 스승의 권속과 제자, 도반들은 승보(僧寶)로 해석 가능하다. 더 나아가 밀교(密敎)에서 스승의 몸(身)은 승(僧), 스승의 말씀(口)은 법(法), 스승의 마음(意)은 불(佛)로서 스승은 곧 삼보의 총합이다. 즉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티베트 불교에서 스승을 중시하는 경향은 현밀(顯密)이 발달한 인도 대승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며, 스승과 삼보께 귀의하는 인도 날란다 사원의 전통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지 티베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란 용어는 외부에서 명명한 학술적 명칭이며 고유 용어로는 쵀(chos) 또는 낭쵀(nang chos)라고 일컫는다. '쵀'는 '법(法), 다르마, 진리'란 뜻이고 '낭쵀'는 '내부자의 법(法), 다르마, 진리'란 뜻이다. '내부자'란 뜻의 낭빠(nang pa)는 티베트에서 '불교도'를 가리키는 말로, 소걀 린뽀체의 설명에 따르면 '진리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면, 마음의 본성에서 찾는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진리를 외부에서 찾는 '외부자'인 "치빠(phyi pa)", 즉 불교 외의 타 종교, 신앙과 대비하여 '티베트의 내부자의 법(bod kyi nang chos)'이란 표현처럼 배타적인 의미로 쓰일 때도 있다.[10] John Powers, David Templeman, 《Historical Dictionary of Tibet》 리그파, 《티베트의 지혜(삶과 죽음을 바라보는)》(오진탁 譯)

3. 역사[편집]


파일:samye-monastery-religious-fresco-740.webp
티베트 불교를 정착시킨 (左) 샨타락시타, 구루 빠드마삼바와, 티송 데첸 왕 (쌈예 사원 내 벽화)

티베트에 불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5세기경 28대 하토토리넨첸 왕(lha tho tho ri gnyan btsan) 때이다. 토착 전설에 따르면 왕은 도대시마똑 육자진언과 금으로 된 탑을 선물 받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비밀스럽게 왕궁에 모셔 공양 올렸다고 한다. 불교에 관한 기록은 7세기 송첸 감포 왕(Srong btsan sgam po, 605-650)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진다. 이후 8세기 티송 데첸 왕(Khri srong lde btsan, 755–794)이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타락쉬타(Śāntarakṣita)와 티베트에서 '제2의 부처'라 여겨지는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인도로부터 초빙하고 불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티벳에 불교가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 대승 불교가 번성하였던 북인도, 중앙아시아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티벳에서는 인도로부터 유입된 대승불교가 흥성할 수 있었다.

파일:A_grand_view_of_Samye.jpg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 사원

불교가 티벳에 도입되던 초기에는 당나라의 영향으로 티벳에 인도불교와 중국불교가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당시 티벳에는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 양자의 수용 여부를 두고 왕과 왕비, 귀족 등 권력 집단 간에 이견이 있었다. 이윽고 티송데첸 왕의 중재로 중국 북종선(北宗禪) 계열[11]의 승려인 화상[12] 마하연(摩訶衍)과 인도불교를 대표하는 논사 까말라쉴라(Kamalaśīla, 740-795)가 티벳 최초의 불교 사원인 쌈예(bSam yas)사원에서 논쟁을 벌인 끝에 까말라쉴라가 승리하면서 인도불교가 티벳에서 주류로 확고히 자리잡게 된다. 티벳 측 문헌인 《바세(sBa bshed)》와 달리 20세기 초 돈황에서 출토된 중국 측 문헌인 《돈오대승정리결(頓悟大乘正理決)》에서는 쌈예 논쟁의 결과를 마하연의 승리로 기록하였다. 양측의 기록이 상반되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티송데첸 왕을 비롯한 당시 티베트의 권력층이 인도불교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폴 드미에빌, 《라싸 종교회의》(배재형, 김성철, 차상엽 譯)
중암,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
왕석, 《돈오대승정리결》(김치온 譯)
박건주, 《티베트 돈점 논쟁 연구》

쌈예논쟁 이후 인도불교는 티벳 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게 되고 불사불관(不思不觀)의 돈법(頓法)을 주장하는 마하연 화상(和尙)의 선종은 '하샹(ha shang)'의 가르침이라 불리우며 배척의 대상이 된다. 선종과 유사한 점이 있는 닝마의 족첸도 사캬 빤디타(Sa skya paṇḍita) 등에 의해 '하샹'에게서 유래하였다는 의심을 받으며 '중국식 족첸'으로 비판받았고, 까규의 마하무드라 역시 인도 전승의 마하무드라가 아닌 '중국식 족첸'에서 유래한 '오늘날의 마하무드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차상엽, 《싸꺄빤디따(Sa skya paṇḍita)의 마하무드라(Mahāmudrā) 비판》 Roger R. Jackson, 《Sa skya paṇḍita's Account of the bSam yas Debate: History as Polemic》 David Jackson, 《Enlightenment by a single means : Tibetan controversies on the "self-sufficient white remedy"(dkar Po Chig Thub)》

안성두 서울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 서울구도회 강의
《티벳 불교의 이해:삼예사의 논쟁과 그 의미》

티베트는 다른 불교권 국가에 비해 비교적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티베트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7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900년 간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이 이루어져 현재 티베트역 경전에는 산스크리트어 원전이나 한역본에는 남아 있지 않은 후기 불교 경전들이 존재한다. 또한 티벳 문자는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역경할 목적으로 인도 데바나가리 문자를 본따 창제되었고, 티베트어역 경전은 충실한 직역이라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왕가의 후원 하에 대대적으로 역경을 한 덕분에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의 계율, 아비달마, 《현관장엄론》계열의 바라밀 전통, 중관과 유식의 제 논서, 불교논리학(인명학), 밀교 등 인도 대승불교의 거의 모든 전통들을 받아들여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현교, 대승밀교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교학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파일:57077.jpg

티베트 불교의 중흥조, 아티샤[13]

또한 히말라야를 사이에 두고 티베트와 인도를 오가는 인적 교류가 활발했다. 예컨대 린첸상포(Rin chen bzang po, 958-1055)와 마르빠(Mar pa chos kyi blo gros, 1012-1097)와 같이 구법을 위해 티벳에서 인도로 넘어와 불교 문헌을 수집하고 인도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또한 반대로 인도에서 힌두교의 부흥과 이슬람의 확장을 피해 히말라야를 넘어 티벳으로 넘어온 아티샤(Atiśa Dīpaṃkara Śrījñāna, 982-1054) 같은 인도인 스승들도 있었다.

836년부터 842년까지 집권한 랑다르마 왕의 폐불 정책으로 인해 티베트 불교는 극심한 후퇴를 겪게 된다. 폐불 이후 2세기 간의 불교 암흑기를 거쳐 11세기 초에 이르러 예세 겐 부자의 불교 부흥 운동이 일어난다. 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1042년 아리 왕의 아들 예쎼외가 인도에서 아띠샤를 초대한다. 아띠샤는 티베트에서 《보리도등론》 등을 저술하며 17년 간 티베트에서의 포교로 까담빠 형성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3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인도로 진출하자 인도 불교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무슬림은 이교도인 불교와 힌두교를 박해하였는데, 힌두교와 달리 출가 승단과 재가 신도의 구분이 명확했던 불교는 승원이 파괴되자 구심점을 상실하고 인도에서 쇠멸한다.[14] 인도 각지에 있던 불교 승가 공동체는 티베트, 네팔, 남인도로 흩어졌다. 이 때 승려 상당수가 경전을 가지고 티베트로 피신하면서 위끄라마쉴라 사원에 있던 교학, 조직, 전적이 그대로 티베트로 옮겨졌고, 당시 승려들이 갖고 온 전적(典籍)들은《티베트 대장경》의 기원이 된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인도 대승불교의 마지막 계승자로 평가받는다. 티베트 불교도들 스스로도 인도 최대 불교대학인 날란다(Nālandā)사원과 위끄라마쉴라(Vikramaśilā) 사원의 학통(學統)과 법맥(法脈)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한다.



다큐 《Indian Roots of Tibetan Buddhism》





차상엽 경북대 동서사상연구소 전임연구원,
대한불교진흥원 헬로붓다 아카데미 "뿌리는 같아도 다른 꽃이 핀다"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사상》 1, 2부

4. 현교[편집]



4.1. 개요[편집]


파일:manjushri.jpg
모든 불보살의 지혜의 총체(總體)인 문수보살[15]

현교(顯敎)는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이란 뜻으로 언어 문자상으로 설시된 가르침이며 일반적인 소승[16]과 대승 가르침을 뜻한다. 밀교(密敎)는 '은밀히 전수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다른 말로 금강승이라고 한다. 참고로 현교, 밀교는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인도-티베트 불교에서는 주로 현교를 (반야)바라밀승/바라밀이취理趣, 밀교를 금강승/금강이취(혹은 진언승/진언이취)라고 일컫는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바른 수행과 실천을 위해 먼저 바른 견해가 세워져야 함을 강조하고, 성급하게 수행법만을 익히는 것을 매우 경계한다. 넓은 의미에서 수행을 '마음을 바꾸는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교학 역시 수행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학과 수행을 하나로 보고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를 고루 강조하는 것이 날란다 대학의 전승을 이은 티베트 불교의 특징이다. 박은정, 《티베트 불교 힘의 원천, 승가교육제도》

경전 못지 않게 논서를 중시하는 논장(論藏) 위주 불교라는 특징도 있다. 중국 불교가 특정 경전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종파불교인데 비해, 티베트 불교는 여러 경전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주석을 단 논장을 주로 학습한다. 경전이 형성된 지 이미 수백 년 이상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경장 만으로는 본래 뜻을 알 수 없으며, 보살 선지식들이 경장을 해설한 논장에 의지하여야 경장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것이 논장을 주로 학습하는 이유이다. 또한 '쌉쩨(sa bcad, 科目)'라고 하는 목차를 세세하게 달아 경론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4.2. 교학과 수행의 일치[편집]


온갖 유정으로서 발심하여 장차 진리를 관찰하는 도로 나아가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청정한 시라(尸羅, 즉 계율)에 안주하고, 그런 연후에 문소성혜(聞所成慧) 등을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이를테면 먼저 진리의 관찰에 수순하는 청문(聽聞)을 섭수하고, 듣고 나서는 들은 법의 뜻[法義]을 부지런히 추구하며, 법의 뜻을 듣고 나서 전도됨이 없이 사유해야 하니, 사유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선정에 의지하여 수습(修習)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수행자는 이와 같이 계(戒)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닦아 문소성혜(聞所成慧)에 의해 사소성혜(思所成慧)를 일으키고, 사소성혜에 의해 수소성혜(修所成慧)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譯)


문을식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에 따르면 서양의 철학(philiosophy)은 주로 논리적, 사변적, 분석적 방법을 통해 지혜(sophia)를 얻지만 인도의 철학(darśana)은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통해 지혜(jñāna, prajñā)를 얻는다.

  • 듣고 배워서 얻어진 지혜(śruta-prajñā): 오랜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검증되고 실험되어 온 옛 성현(ṛṣi)들의 경험과 탐구 결과를 듣고 배우는 방법(聞, śruta, śramaṇa) 이다. 이것은 다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만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동적 노력이 포함되는 활동이다. 이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문혜(聞慧, śruta-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경전이나 논서들의 텍스트를 이해, 해석하고 현대언어로 번역하고 설명해주는 해석학적 방법인 정언량(正言量, śabda-pramāṇa)이 있다. 단, 디그나가(Dignaga)는 정언량 혹은 성언량(聖言量) 또한 비량(比量)의 한 종류인 신허비량(信許比量, āpta-anumāna)으로 보고, 인식의 근원은 비량과 현량(現量) 뿐이라는 이량설(二量說)을 주장하였으며 티베트 불교에서도 이를 따른다.

  •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anumāna-prajñā): 바깥으로부터 배우고 받아들인 것과 스스로의 경험을 자료로 하여 그것을 논리적, 합리적 기준(yukti, anumāna)에 맞추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다른 견해와 주장과 견주어 토론하고 논쟁하며, 더 나아가 그런 자료들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지적 공유물이 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체계화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논리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지혜를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수혜 그리고 스스로의 지적 경험을 자료로 하여 의심하고 비판하고 토론하고 논증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논리적 방법인 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이다.

  •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bhāvana-prajñā, samādhi-prajñā): 마지막으로 문혜와 사혜로부터 얻어진 언어적, 개념적 관념적 지혜를 체험적이고 직접적이며 직관적 지혜로 변환시키는 요가적 방법에서 얻어진 지혜를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 또는 삼매의 지혜(三昧慧, samādhi-prajñā)라고 한다. 이 지혜를 얻는 방법은 문혜와 사혜에 기초하여 요가행법을 실천하는 것(現量, yogī praktiasa, sākṣātkāra)이 있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직접적 지각(知覺)인 현량(現量) 중에서도 유가사의 선정(禪定)상태에서 대상을 지각하는 유가현량(瑜伽現量)에 해당한다.

안성두 서울대 교수는 겔룩의 창시자인 쫑카빠의 견해에 의거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聞) 사유(思)하는 교학과 수행(修)의 불가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직접적 가르침과 경전적 가르침을 상호불가결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보다 우선적인 과정은 경전의 가르침을 듣는 데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 있어서 경전의 가르침은 문혜(聞慧)와 사혜(思慧)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문혜(聞慧)와 사혜(思慧)에 의해 증득된 바로 그것이 수혜(修慧)에 의해 수습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쫑카빠는 경마의 비유를 들어 청문(聽聞)과 이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반하는 직접적 수행은 "경주할 장소를 먼저 보여준 후에 경주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만일 경주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고 경주한다면 실제 노력에 비해 소득도 크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빠질 위험이 크다. 

또한 쫑카빠는 "위대한 경전의 가르침을 수행의 요체를 결여한 단순한 설명으로만 간주하고, 수행의 요체는 오직 핵심적 의미를 설하는 스승과 제자 간의 은밀한 직접적 가르침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가르침의 단절이라는 업장을 쌓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해탈을 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교설은 위대한 경전일 뿐이다.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불교의 이해》

문: 진리(사성제와 무상無常 등 16행상行相)를 봄으로써 해탈하니

공성을 보는 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답: 이 도道(공성을 깨달은 도)가 없이는 보리가 없다고 경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법의 뿌리가 비구이기에, (성문의 성자인 비구들이 공성을 깨닫지 못한다 하면) 비구 또한 머물기 어렵네.

마음이 대상을 가지는 한 열반 또한 머물기 어렵게 되네.

번뇌(세간도의 멸한 대상인 번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윤회에서] 벗어난다면

(현전現前한 번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 곧바로 해탈하게 될 것이다.

《입보리행론》


화두일구(話頭一句)만을 참구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는 선불교나 아함경, 니까야 등 초기 경전을 중시하는 측에서는 대승불교의 교학이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수행과 동떨어진 가르침이라고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심법(心法)은 오직 화두나 공안을 참구해야만 깨달을 수 있다고 여기거나, 혹은 사성제 팔정도 등 초기불교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히 해탈이 가능하며 대승 불교 사상도 초기 불교 교리 안에 모두 포섭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선불교는 대승불교의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면 불교인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은유적이고 함축적이며, 이는《능가경》, 《금강경》 , 《화엄경》 등 대승 경론에서 설해진 교의(敎義)들의 중국적 수용이자 실천적ㆍ신비적ㆍ심미적 변용에 다름 아니다. 한편 초기불교는 만일 대승불교의 교학이 초기불교의 교리를 보다 분명하고 심도있게 해석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법(法)을 실체화하는 오류를 답습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부파불교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자아는 무아이지만 구성 요소인 법은 실체가 있다'는 아공법유(我空法有)로 변질된 바 있으며, 현대 위빠사나 수행자들 가운데에서도 찰나생멸을 관하면서 '찰나 동안 지속되는 실체'를 인정하는 오류에 빠지는 경우 등을 찾을 수 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유부의 견해를 비판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것도 지나치게 단편적인 접근일 것이다. 법체에 대한 유부의 실재론적 해석은 현상과 인식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며 그 역시 무아론의 논의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없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유부의 주장은 불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불교 4대 학파의 학설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8세기 경 귀류논증 중관학파 논사인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사성제 등으로 충분하다는 소승 학파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사성제만으로 해탈에 이르지 못한 소승 수행자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샨티데바는 경전을 근거로 공성 또한 불설(佛說)에 포함됨을 강조하였고, 인무아를 자각하는 지혜만으로 해탈을 이루는데 충분하다고 여기는 후대 수행자들의 자질을 문제삼았다. 그는 법무아를 증득하지 못하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될 수 없으므로 승의(勝義)의 승가를 세울 수 없다고 보았다. 마음이 대상을 갖는 한, 즉 법아집(法我執)이 있는 한 이로 인한 다른 번뇌가 생겨 열반을 얻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소승 아비달마에 법아집 뿐 아니라 인아집(人我執)과 관련된 다른 번뇌들도 설해지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아비달마에서 설해진 번뇌만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유부ㆍ경량부 등 소승 학파에서 현전하는 번뇌를 제거하였음에도 즉시 열반에 이르지 못한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게셰 텐진 남카,《심오한 중도의 새로운 문을 여는 지혜의 등불》

일부의 원인으로 일부의 결과만을 이루고

일체의 원인으로 일체의 결과를 모두 성취한다.[17]

《대비백련화경(大悲白連華經)》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각자가 생각하는 진리, 법성(法性)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비단 대승불교 뿐 아니라 불교사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이른바 '초기 경전'이라 일컬어지는 아함과 니까야 역시 붓다의 온전한 친설(親說), 원음(原音)이 아니며, 수 세기에 걸친 역사적 변천 과정을 거쳐 각 부파에 의해 채택된 부파불교 시대의 산물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경전 내부에 수정ㆍ가감으로 인한 신ㆍ고층(新古層)이 존재하고, 경전 구성에 있어서 각 부파들의 판본마다 분명한 차이를 보이며,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도 각 부파 고유의 관점이 반영된 논장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불교에도 새로운 방편과 해석이 요구되었고, 이에 따라 등장한 대승의 사상은 석가모니의 본의(本義)를 분명히 밝혀 수행의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내도(內道)의 다른 학파들 및 외도(外道)들과 경쟁하고 교류하면서 불법(佛法)을 더욱 풍요롭게 발전시켰다. 대승 논사들은 근본스승인 석가모니를 존숭하며 대승 경전 뿐 아니라 초기 경전 또한 자신들의 전거로 삼았고, 학자이자 동시에 수행자로서 자신의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정치(精緻)한 이론을 전개하며 궁극적으로 마음, 의식의 변화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자타의 이익과 안락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대승의 사상적 기조는 수행과 무관한 지적 유희나 근원과 단절된 급진적인 변용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 배우는 반야, 중관, 구사, 인명, 계율 등 오부대론은 인도 나란다 대학의 교육과정에서 유래한 구성으로, 팔만사천법문 중에서 수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경율론만을 선정하여 압축한 교과 체계이다. 10여 년에서 길게는 20년 이상 소요되는 티베트 불교 교학과정이 상당히 방대해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해탈 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위한 성불을 목표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삼승(三乘)과 행, 소작, 요가, 무상요가의 사부(四部) 딴뜨라를 모두 아울러 배우는 인도-티베트 불교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8]


4.3. 분석적ㆍ논리적 탐구[편집]


티베트 불교는 비판적 분석과 판단을 중시한다. 권오민 경상대 교수의 설명처럼 불교의 믿음(信, śradha, 또는 勝解, adhimukti)확신이며, 이는 우선적으로 비판적 분석/판단에 의한 것이다. 문사수 중 사유의 과정에 해당하는 비판적 분석 혹은 탐구 고찰을 사택(tarka, 혹은 覺觀), 간택(pravicaya, 혹은 思惟觀察)이라고 한다. 부처의 말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금(金)을 감정하듯이 분석적으로 의심을 갖고 경전을 배우고 사유하고 수행하면서 불법의 진리를 수행자 본인이 직접 확인해가는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비판적 분석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은 맹신이 아닌 비판적 분석이기에 단순히 경전을 외우기보다 이치를 따지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법회에서 다음과 같은 경전의 어구를 즐겨 인용하며 경전을 분석하고 깊게 사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비구들과 지혜로운 이들이여, 연금술사가 금을 태우고 자르고 문지르듯이 나의 말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단순히 존경한다고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석가모니불[19]

꼰촉 직메 왕뽀,《티베트에서의 불교 철학 입문》(권오민, 유리, 김대수 譯)

스승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존경을 저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날란다 대학 같은 고대 인도의 사원 대학에서는 학승(學僧)이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전통을 발전시켰다. 스승의 저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스승을 존경하거나 공경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의 제자 아리야 위묵티세나(Arya Vimuktisena, 聖解脫軍)[20] 는 스승의 유식론적인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중관학파의 견해로 경전을 이해하였다. 티베트에서는 19세기 닝마의 학자인 주 미팜(Ju Mipham)의 제자 알락 담최 창(Alak Damchö Tsang)이 스승이 쓴 논전의 일부 내용에 반론을 제기한 사례가 있다. 알락 담최 창은 "스승이 훌륭하다고 해도 가르치는 내용이 정확하지 않다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티베트 속담 중에 "사람은 공경하고 존경하되 그가 쓴 논서는 철저하게 분석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스승에 대한 건전한 마음가짐과 수행할 때 의지해야 할 사의법(四依法)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 반야심경》(주민황 譯)

2021년 8월 한국인을 위한 비대면 법회에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스승과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 스승에게 실례가 되거나 스승을 거스르는 악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달라이 라마는 "경전에서 언급하였듯이 아무 이유도 없이 스승의 의견을 부정하는 것은 죄악이 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을 말했다. 상술한 석가모니의 연금술사 비유나 바수반두(세친), 아상가(무착), 디그나가(진나)와 이들의 후학(後學) 격인 짠드라끼르띠(월칭)의 사례[21]에서 알 수 있듯, 스승의 가르침을 아무 이유 없이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숙고하고 실천하고 수행한 뒤 그 가르침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달라이 라마는 설명했다.

또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람림 맹악빠, 람림 문헌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람림 슝빠와 등 람림 수행 전승의 분화(分化)에서 알 수 있듯이 스승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스승의 말씀조차도 관찰하고 분석해야 오류가 생기지 않는다고 달라이 라마는 말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스승이 어떤 가르침을 제공하든 제자는 그 가르침을 항상 탐구하고 관찰하고 분석해야 하며, 만약 가르침에 오류가 있다면 제자는 스승에게 해명을 요구할 수 있고 오히려 그 가르침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겔룩의 창시자 쫑카빠의 해석도 소개했다. #

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진의(眞意)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의식(意識)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미료의경(未了義經)에 의지하지 말라. 

《대승열반경》 제6권 사의법(四依法)


사물의 실상을 분석할 때 분석하는 사람이 갖춰야 하는 최소의 조건은 사의(四依)이다. '의지한다[依]'는 것은 '믿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며, 의지해야 하는 네 가지는 진의(眞意), 지혜, 법, 요의경이며, 의지하지 말아야 하는 네 가지는 문자, 의식, 사람, 미료의경이다. 의지하고 의지하지 않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그 사람의 명성이 높고 낮음 등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설하는 가르침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사람과 그의 가르침 둘 중에서 가르침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이다.[22]

'진의에 의지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그러한 가르침도 문장의 운율이 아름다운지 등을 보지 말고, 진의를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진의를 명확하게 설한 것은 받아들이고, 오류가 있는 것은 설령 문장이 매우 훌륭하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즉, 문자와 진의 둘 중에서 문자를 믿지 말고 진의를 믿어야 한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미료의경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특정 목적에 의해 단지 방편으로써 설하신 언설[미료의]만을 보지 말고, 그것의 진실된 실상[요의]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진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적에 의해 [어떤 사물이] '진실로 존재한다'고 설한 경은, 언설 그대로 받아들이면 논리적 오류가 있으므로 다른 의도로 해석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궁극적 의도대로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 경은, 언설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논리적 오류가 없으므로 요의로 마땅히 믿어야 한다.

'지혜에 의지하고, 의식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그 요의도 안식(眼識) 등의 근식(根識)이나 분별식(分別識)에 나타난 것만을 믿지 말고, 대상의 실상을 현량(現量)으로 보는 지혜를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이상의 사의법에 관한 일반적인 해설 외에 19세기 닝마의 대학승 미팜 린뽀체의 사의법에 대한 해설은 아래와 같다.

【"미팜의 <사의법(四依法)> 주석" 펼치기ㆍ접기】
만약 다음의 견해를 얻지 못한다면 맹인이 지팡이에 기대는 것처럼 오직 명성과 말, 또는 이해하기 쉬운 것들에만 의지하여 마침내 사의법(四依法)의 이치에 어긋날 수 있다.

1.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그러므로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해탈은 가르침(정법正法)에서 나오지 가르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만일 가르침이 잘 설해졌다면 누가 설하였든지 상관없다. 심지어 선서(善逝, sugata) 역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백정으로도 화현한다. 만일 대승법(大乘法)과 같은 정법의 의미와 반대되는 말을 한다면 아무리 말솜씨 좋은 사람이라도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 마치 부처의 모습을 한 마라와 같이.

2.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법을 공부하거나 사유할 때 항상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만일 뜻을 이해했다면 어떤 식으로 설하여졌든지 모순이 없다. 만일 설하는 이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이해했다면 그 때 비로소 각각의 단어와 표현에 대해 사유하라. 마치 코끼리를 찾은 후에 비로소 코끼리의 발자국을 찾아 나서듯이. 만일 뜻을 잘못 이해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더 많은 말들을 사유한다면, 생각이 다할 때까지 고민을 멈추지 못하겠지만, 그저 진정한 뜻에서 멀어지고 또 멀어질 뿐이다. 마치 아이들의 놀이처럼 기진맥진해진 채 끝이 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 ‘그러나’ 같은 한 단어일지라도 맥락에서 벗어나면 끝없이 많은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 뜻을 이해했다면 더 이상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때 어리석은 이들은 손가락만 쳐다보듯이, 바보들은 말에만 집착하여 자신들은 잘 이해하였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는 착각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3. 미료의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에 의지하라.
뜻을 파악할 때 무엇이 미료의(未了義)이고 무엇이 요의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불료의에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진정한 요의에만 의지해야 한다. 일체지자(一切知者, sarvajña)께서는 배우는 이들의 근기와 성향에 맞게 가르치셨다. 그는 사다리의 가로대들처럼 여러 단계의 승(乘)을 소개하셨다. 여덟 종류의 암시와 간접적인 가르침[1]과 같이 그는 마음에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지혜롭게 설하셨다. 만일 미료의의 가르침을 (의도와 상관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가르침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미료의의 가르침은 (방편으로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할 수 있다.

4.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만일 요의의 가르침을 수행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세속의 이원적(二元的)인 마음에 의지하지 말라. 이원적인 마음은 언어와 개념들을 쫓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지혜에 의지하라. 개념적인 생각과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로 세속적인 마음이다. 세속적인 마음은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을 포함하는 특성이 있다. 그런 식으로 주객을 나누는 이원적인 모든 생각은 그릇된 것이며 절대 진정한 현상의 본성(本性)에 다다르지 못한다. 실재든지, 비실재이든지, 실재이면서 비실재이든지, 실재도 아니고 비실재도 아니든지 그러한 개념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여전히 개념일 뿐이다. 우리가 마음에 품는 어떤 생각이든지 그것들은 마라의 지배 아래 있다.이러한 가르침은 경전에 나와 있다. 어떤 부인(否認)이나 단언(斷言)에 의해서도 개념을 다 제거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부인하거나 단언함 없이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한다면, 바로 해탈이다. 비록 주체와 객체에 대한 어떠한 집착도 없지만 스스로를 비추는 본연의 지혜가 있다.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 존재이면서 비존재,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모든 생각들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것은 최상의 본초(本初)적인 지혜(Yeshe, Primodial wisdom)라고 한다.

요의는 방편법문에 의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비개념적인 알아차림(awareness)의 지혜의 대상으로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부인과 단언, 존재와 비존재와 같은 개념적인 양 극단에 얽매여있는 한 세속적인 마음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다. 초월적인 지혜를 경험하는데 도달하였다면 모든 이원적인 생각은 진정되고 현상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모든 부정(否定)과 정립(定立), 또는 부인과 단언에서 벗어나 진정한 법(Dharma)의 심오함에 이르게 된다.#


삼소량분(三所量分) གཞལ་བྱའི་གནས་གསུམ། : 세 가지 존재 방식

མངོན་གྱུར། [ㅇ왼규르]  현전(現前) = 현전분(現前分)

ལྐོག་གྱུར། [꼭규르]  비현전(非現前) =  불현전분(不現前分) = 은폐분(隱蔽分)

ཤིན་ཏུ་ལྐོག་གྱུར། [씬뚜 꼭규르]  극비현전(極非現前) = 최극은폐분(最極隱蔽分)


앎의 대상에는 크게 현전(現前), 비현전(非現前), 극비현전(極非現前) 세 가지가 있다. 현전'지각 가능한 명백한 현상'으로 논리를 통해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 현상들은 직접적인 감각적 지각인 현량(現量)을 통해 직접 경험하며 터득할 수 있고,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 계절의 변화 같은 거친 무상(無常)은 현전에 해당한다.

비현전'일부분만 지각할 수 있는 현상'이다. 비현전은 요가수행자[23]가 아닌 일반인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없으므로 논리적 추론인 비량(比量)을 적용하여 확립해야 한다. 이때의 분석 대상은 경험에 근거한 추론적 인식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찰나생멸하는 미세한 무상이나 무아, 공성 등이 비현전에 해당한다.

극비현전'전혀 지각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극비현전은 일반인의 현량으로도 인식할 수 없고, 이해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람은 비량을 이용해 검증하는 것도 힘들다. 이러한 경우에는 타당한 경전적 권위, 즉 성교량(聖敎量) 내지 교증(敎証)에 의존해야한다.

교증에 의존하더라도 경전의 타당성, 신뢰 가능성에 대한 입증이 필요하다. 가령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텍스트 비평을 통해 번역된 경전의 진위 여부를 검증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경전을 가르치는 스승의 타당성, 신뢰 가능성도 검증해야 한다. 교증을 거친 후에는 경전 내용 자체가 삼지작법(삼단논법) 등의 논리에 위배되지는 않는지 검증하는 이증(理証)을 거친다. 이는 믿음에 기반한 논리적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부모의 말에 의지해서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알 수 있고, 역사적 기록에 의지해서 과거에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들을 알 수 있는 것 또한 극비현전에 해당한다. 경전에서는 극비현전의 예로 중생의 업력(業力), 부처의 사업(事業), 진언(眞言)ㆍ약(藥)ㆍ물질의 힘, 유가사(瑜伽師)의 유가(선정禪定)의 경계 등 네 가지 불가사의한 대상을 언급한다. 여기서 업력, 다시 말해 업의 인과(因果) 작용은 오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은 부처만이 완벽히 알 수 있으며, 아라한도 인과를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한다. 다만 개별적인 사태들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업의 경과가 아닌, 업이 작용하는 일반적인 원리인 업설(業說)에 대해서는 《구사론》 등 여러 논서에서 상세히 밝혀놓았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달라이라마, 수행을 말하다》(이종복 譯)

경설을 근거로 받아들이는 방식도, 예를 들면 '보시를 행하면 재물을 얻는다. 경에서 이와 같이 설하기 때문이다'라고 할 때, 경설 자체를 논증인(論證因)으로 세워서 해당 내용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론의 언설이 현량(現量)과 논리로써 오류가 없고, 경설의 구절에 직간접적인 모순이나 전후의 모순이 없으며, 설법자에게 다른 특별한 의도가 없는 등의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날란다 학자들의 전통에서는 제법의 체계를 확립할 때, 경설이나 타당한 말에 의지하는 신허비량(信許比量)보다 사세비량(事勢比量)을 중시하였고, 논리에 의지하는 사세비량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현량을 더 중시하였다. 이러한 우선순위를 아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사종도리(四種道理)

① 법이도리(法爾道理)

② 작용도리(作用道理)

③ 관대도리(觀待道理)

④ 증성도리(證成道理)


분석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해심밀경》, 《대승아비달마집론》, 《유가사지론》 등의 보살경론에서는 사종도리를 설하고 있다.

법이도리는 사물의 실상 그대로를 토대로 한, 각각의 법의 특성이나 자성 또는 법성을 의미한다. 작용도리는 그러한 법이도리를 토대로 하는, 각각의 법성의 본질과 부합하는 여러 가지 작용을 의미한다. 관대도리는 작용도리를 토대로 하는 상호 의존하는 관계, 즉 인과관계, 부분과 유분(有分)의 관계,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 대상 셋의 관계 등 의존하는 실상을 의미한다. 증성도리는 앞의 세 가지 도리를 토대로 분석할 때, '이것이기 때문에 저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도 없어야 한다'와 같은 논리를 세워서 소립(所立)을 논증할 수 있는데, 이러한 방식을 증성도리라고 한다.

사종도리 중 작용도리와 관대도리 이 둘의 핵심 내용인 인과와 연기의 법칙은 불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이치이다. 크게는 기세간과 유정세간의 생성에서부터 작게는 특정 시간에 특정 장소에서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개별적 상황의 발생에 이르기까지 오직 인과연기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의 교의체계에서는 중생이 업과 번뇌의 힘에 의해 윤회를 떠도는 방식에서부터 윤회의 원인과 조건들을 차례로 제거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까지 오직 인과의 법칙으로 성립된다. 역사적 기록이나 현실적 상황 그 어느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과의 법칙은 불교 철학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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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스탠포드대 "자비와 이타주의의 과학적 탐구"
(“Scientific explorations of compassion and altruism.”)
회의에서 과학자들[24]과 손잡은 달라이 라마.

티베트 불교의 분석적이고 지성적인 성향은 과학자들과의 적극적 교류에서도 드러난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äcker)#, 데이비드 봄(David Bohm)#, 리차드 데이비슨(Richard J. Davidson)#,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등 세계적인 뇌과학자, 신경생물학자, 인지과학자, 정신의학자, 물리학자들이 달라이 라마, 까르마빠와 같은 티베트 불교 스승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법문에서 양자역학, 심리학, 신경생물학 등을 예시로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는 양자역학과 불교의 중관 사상 모두 '사물이 실제로는 관찰자에게 인식되는 것처럼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과학적 사실에 기초하여 불교 경전에서 언급된 수미산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

달라이 라마는 "중국 불자든, 한국 불자든, 티베트 불자든 상좌부 전통을 따르는 불자든 우리 불자들이 21세기의 불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그것은 (21세기 불자들이) 현대 과학을 포함하여 현대와 현대 세계에 대한 더 폭넓고 깊은 이해의 기반을 갖춰야 하고 그에 덧보태어 부처님의 메시지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더 온전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불자들에게 현대 과학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또한 달라이 라마는 분석과 탐구를 강조하는 티베트 불교의 특성과 불교 논리학에 기반하여 불교와 과학 간의 교류가 가능하며 서로에게 유익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와 과학 간의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는 달라이 라마의 노력에 대해 불교계나 과학계 양측 모두에서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달라이 라마가 2005년 신경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학회인 신경과학회(Society for Neuroscience, SfN)의 연례 학술회의에 초대되었을 때, 처음에는 그의 참석에 관한 논란이 벌어져 (달라이 라마의 정치적 입장에 반대하는 중국 출신이 다수 포함된) 500여 명의 과학자들이 초대에 반대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반대 측은 "달라이 라마의 명상에 대한 견해는 주관적이며, 명상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현 시점에 신경과학이 무모하게 정신적 문제에 접근할 경우 학문의 신뢰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반대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이후 '명상을 통한 의식의 연구'를 주제로 한 달라이 라마의 연설을 듣고 신경과학자들은 그의 참석이 매우 적절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학회의 여론은 그의 방문을 전적으로 환영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 # #

2005년 당시 반대 측 과학자들이 내세운 '과학적 근거 부족'이란 명분은 이후 명상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활성화로 인해 그 정당성을 상실하였다. 가령 불교 명상에서 파생된 마음챙김(mindfulness)의 경우 1966년부터 2021년까지 마음챙김에 관한 16,581건의 출판 논문이 확인되었다. 특히 2006년 이후 출판물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이 있었다. 출판물의 거의 절반(47%)이 심리학, 약 5분의 1(20.8%)이 정신 의학 출판물이었다. 대부분의 출판물은 서양에서 비롯되었지만 아시아 국가들의 대표성도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 트렌드(2016–2021)는 메커니즘과 조정자(mechanisms and moderators), 장기간 명상(long-term meditation), 신경과학적 연구(neuroscientific studies), 스마트폰/온라인을 통한 중재 전달(smartphone/online delivery of interventions)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Anuradha Baminiwatta & Indrajith Solangaarachchi, 《Trends and Developments in Mindfulness Research over 55 Years: A Bibliometric Analysis of Publications Indexed in Web of Science》


《불교 과학 철학 총서-1.물질세계》한국어판 봉정 법회 관련 VOA Tibetan 영상
《His Holiness the Dalai Lama launched the Korean Translation of Buddhist science and philosophy》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날란다 대학(사원)의 설립 목적은 ‘불교학 연구와 진흥’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불교학뿐 아니라 철학, 문학은 물론이고 천문학이나 의학, 약학 등 자연과학에 대한 연구와 수업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불교는 원치 않는 고통의 뿌리가 대상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에 있다고 본다. 불교의 근본적 동기와 주된 목적은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구경(究竟)의 안락(安樂)이며, 이를 위해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란 것이 처음부터 명백했다. 결국 세상의 본질, 사물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게 ‘고통’에서 해방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말이다. 불교 경전이 성립되고 계율이 정비되자 붓다의 제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 나선 것도 세상의 본질에 대한 것이었다. 부파불교 시대, 아비달마가 융성하기 시작하면서 불교 논서들에 유달리 자연과학적 지식이 자주 등장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날란다 대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역시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는 불교 경론의 가르침을 크게 ‘제법(諸法)의 실상(實相) 혹은 과학’, ‘그와 관련된 철학’, ‘수행의 차례’로 분류하였다. 이 중 과학과 철학 두 분야는 종교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이며 시대적 요구와도 잘 맞는 학문이라고 여긴 달라이 라마는 2011년 《불교 과학 철학 총서》의 편찬을 기획한다. 이에 티베트 최고의 학승인 게셰 70여 명으로 구성된 편집위원회가 만들어진다. 편집위원들은 날란다 17 논사들의 저작, 그리고 여타 아비달마 논사들의 저작을 모두 검토하고 그 중에 과학, 철학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 선별, 분류한 후 주석과 해설을 달았다.

총서 1권에서 다루고 있는 물질세계는 극미(極微)의 세계에서 천체(天體)까지, 즉 마음을 제외한 외부 세계 전부를 가리킨다. 특히 세상을 이루고 있는 물질, 시간과 공간, 뇌를 비롯한 인간의 신체가 주 대상이다. 또한 서문에서는 불교와 과학의 관계를 다룬다. 영어, 중국어(번체)에 이어 전세계에서 3번째로 《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권 '물질세계'가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근간으로 2권 '수행(가제)', 3권 '철학(가제)'이 있다. 불교 과학 철학 총서 편집위원회, 《물질세계(불교 과학 철학 총서 1)》(게쎼 텐진 남카 譯) # 3권 '철학적 학파(Philosophical Schools)' 영문판에는 함형석 전남대 교수도 공동 영역(英譯)자로 참여하였다. 《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Indian Buddhist Classics, Vol. 3: Philosophical Schools》 그 밖에 티베트 불교와 과학 간의 교류를 담은 국내 서적으로 《과학과 불교(한 원자 속의 우주)》(이해심, 삼묵 譯), 《달라이 라마 과학과 만나다》(남영호 譯) 등이 있다.



티베트 불교 강원의 과학 교육에 대한 다큐
《100 Year Project:A Film》

달라이 라마와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마음과 생명 연구재단(Mind & Life institute)의 강연, 대담, 저서 그리고 달라이라마와 과학자들의 교류를 담은 다큐 영화 《The Dalai Lama: Scientist》등에서 티베트 불교와 과학자들 간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 Science for Monks & Nuns 프로젝트는 티베트 불교 승려들에게 과학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사업이다. 스미스소니언 재단 등에서 파견된 교육자와 과학자들의 지도 하에 현재 7개 과학 센터에서 300명 이상의 승려들이 3년 과정의 과학 리더쉽 프로그램을 수료하였다. # 또한 에모리대와 협력하여 Emory-Tibet Science Initiative(ETSI)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티베트 불교 강원에 과학 과목을 정규 교과과정으로 편성하여 승려들에게 지속적으로 과학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

2013년 제26회 마인드 앤 라이프 컨퍼런스: 마음, 뇌, 물질 (한글 자막 영상)[25]
Day1 am
실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 불교적 관점과 과학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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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1 pm
과학의 범위: 지식과 실재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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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2 am
양자물리학, 상대성, 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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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2 pm
실재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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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3 am
뇌 변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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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라마 경》에 대한 오해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깔라마들이여, 그대는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유익한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 받지 않을 것이며, 이런 법들은 지자(智者)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이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고 알게 되면, 그것들을 구족하여 머물러라."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탐욕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성냄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 "깔라마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내면에서 어리석음 없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그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손해가 되겠는가?"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주시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세존께서는 저희들을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깔라마 경(A3:65)》(대림 譯)

상좌부 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에 속한 《깔라마 경》은 이른바 '부처의 자유 탐구 헌장(the Buddha's Charter of Free Inquiry)'으로 잘 알려진 경전이다. 모든 교조주의, 전통, 편협함으로부터의 자유를 논하는 본 경전은, 그러나 유명세만큼이나 잘못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부분적인 인용을 바탕으로 종종 《깔라마 경》은 급진적인 회의주의나 비이성적이고 주관적인 진리 창조를 옹호하는데 악용되곤 한다.# 이에 관하여 현대 테라와다 불교의 스승 빅쿠 보디(Bhikkhu Bodhi)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맥에서 벗어난 단 한 구절의 인용을 근거로, 붓다는 '모든 교리와 신앙을 일축하는 실용적인 경험주의자'가 되어버렸고, 그의 법은 단순히 자유사상가의 진리에 대한 도구가 되어 각자 자기 멋대로 수용하고 거부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Bhikkhu Bodhi, 《A Look at the Kalama Sutta》

《깔라마 경》은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깔라마 사람들을 위해 즉각적이고 도덕적이며, 유익하고 본질적인 가치인 '탐진치(貪瞋痴)의 소멸'을 우선 기준으로 제시한 경전이다. 《깔라마 경》에서 석가모니는 논리와 추론, 사유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였지만, 그러한 지적 작용들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은 해당 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깔라마 경》을 독해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논리적 사고는 요구된다. 바른 법을 '이익과 행복의 획득 수단'으로 정의하고, 이익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탐진치를 소멸해야 하며 따라서 바른 법과 바르지 않은 법을 탐진치의 소멸 여부로 판단하는 《깔라마 경》의 전개 역시 일종의 연역적 추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깔라마 사람들의 삼보에 대한 귀의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건전한 사유에 기초한 믿음에 대해서도 《깔라마 경》은 부정한 바 없다.

차연성(此緣性)을 알고서 사견(邪見)의 그물인 분별(分別)을 벗어난 사람은, 탐욕, 미움, 우치를 벗어나 [번뇌에] 물들지 않은 열반으로 나아간다.

《공칠십론》(이지수 譯)

이지수, 《인도 불교철학의 원전적 연구》

석가모니는 자신의 탁월한 지성을 적극적으로 중생 교화에 활용하였는데, 단적인 예로 석가모니가 설한 연기법은 독립된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를 정립시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동시에 제거하기 때문에 "왕(王)과 같은 논리(rigs pa'i rgyal po)"로까지 일컬어진다. 용수보살이 《공칠십론》에서 밝혔듯이 연기를 통해 다른 것에 의존한 것(차연성), 즉 공성을 알게 되어 사견(邪見)과 그로 인한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붓다의 교설인 연기는《깔라마 경》에서 말하는 유익한 법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한다.


4.4. 근(根), 도(道), 과(果)[편집]



파일:Bodhgaya_3639641913_f4c5f73689_t.jpg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의 보리수.
불법(佛法)을 나무에 비유하면 존재론은 뿌리,
수행론은 줄기, 결과론은 열매에 해당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모든 불교의 가르침을 크게 근(根, 혹은 기基, gzhi), 도(道, Skt. mārga; Tib. lam), 과(果, 'bras bu) 세 부분으로 분류한다. 근은 존재론, 도는 수행론, 과는 결과론에 해당한다. 존재론에 기반하여 수행론이 성립하며, 존재론과 수행론을 기반으로 결과론이 성립한다.

수행론인 도(道)는 다시 견해, 명상(수습), 행위(Tib. ལྟ་སྒོམ་སྤྱོད་གསུམ་, ta gom chö sum, Wyl. lta sgom spyod gsum)로 구분한다. 여기에 결과론인 과(果)를 합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라고 지칭할 때도 있다. 견해, 명상, 행위에 대한 설명은 다음 항목에서 후술하였다.

불교 전반의 근ㆍ도ㆍ과에 대하여 티베트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근(根) - 기본 바탕인 세속제(속제)와 승의제(진제)의 이성제(二聖諦)
  • 도(道) - 방편의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 두 가지 방법
  • 과(果) - 법신과 색신의 두 가지 과위(果位)

이에 관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초심자들을 위해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라는 간략한 문헌을 지었다. 다음은 《로사르믹제》에서 키워드만을 뽑아 더욱 간략히 요약한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로사르믹제》와 관련 경론을 참고해야 한다.

1. 근(根)이 되는 이제(二諦)
진제궁극적 진실이고 속제관습적 진실이다. 둘은 배타적이며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모든 현상을 포함할 수 없다. 이 둘 외에 세번째 진실은 없으므로 다른 범주가 없는 열거이다.

또한 속제는 마음으로 인식하는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진제는 직접인식(현식顯識)이 인식하는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진제는 인무아, 법무아를 일컬으며 속제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일컫는다. 속제를 더 세분화하면 62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2. 불경(佛經)인 삼장(三藏)의 내용과 삼장으로 분류한 이유
붓다가 번뇌를 다스리기 위해 설한 팔만사천 가르침은 모두 십이분교(十二分敎)에 포함되며 또한 이는 다시 삼장(三藏), 즉 경(經)ㆍ율(律)ㆍ론(論)에 모두 포함된다.《대승장엄경론》에서는 삼장으로 분류하는 이유를 1) 3가지 번뇌, 2) 삼학(계정혜), 3) 3가지 알아야 할 대상과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3. 삼장의 내용인 삼학(三學)
3-1. 계율
삼장의 내용삼학(三學)계율(戒律)모든 공덕의 근원이며 십악업(十惡業)을 없애는 윤리 등 여러가지가 있고 이들은 모두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계에 포함된다. 별해탈계는 소승ㆍ대승 공통으로 지키는 계율이고 보살계, 금강계는 대승에서 지키는 계이다.

십악업에는 몸으로 하는 업 3가지와 말로 하는 업 4가지, 마음으로 하는 업 3가지가 있다. 각각의 악업들은 1) 대상, 2) 마음(의도), 3) 실행, 4) 괴로운 감정(번뇌), 5) 완료라는 다섯 가지 조건이 있다.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면 완전한 악업이 되며, 어느 한 조건이 빠진다면 그러한 행위는 불선업(不善業)이지만 십악으로 지은 불선업은 아니다. 십악업은 다시 업을 지을 때 갖는 세 종류의 번뇌인 탐ㆍ진ㆍ치에 따라 각각 세 종류의 세부적인 업들로 분류된다. 그리고 각각의 악업 항목에는 가장 큰 죄업이 있다.

별해탈계는 실천하는 본인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본인 해탈(별해탈別解脫)'이라고 한다. 윤회 전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인 출리심으로 받는 계율이며, 남을 해치는 것과 그러한 바탕부터 없애는 마음 및 마음 작용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팔관재계, 우바새계, 우바이계, 사미계, 사미니계, 식차마나니계, 비구계, 비구니계 등 여덟 가지가 있다. 별해탈계는 소승ㆍ대승 공통으로 지켜야 할 계율이다.

대승의 계율로는 보살계와 밀교계(금강계)가 있다. 보살계에는 18가지 근본타죄(根本墮罪)가 있고 밀교계는 14가지 근본타죄가 있으며 그 밖에 보살계와 밀교계에는 광대한 세부 계율들이 있다.

3-2. 선정
삼학 중 삼매(三昧), 즉 사마디(samadhi)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어떤 선(善)한 대상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사마디의 정의를 수습(修習)해서 익숙해지면서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을 얻게 된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완전히 익숙해지면 선정바라밀(완전한 선정)이 된다.

사마디에는 세간(世間) 사마디와 출세간(出世間) 사마디 2가지 있다. 처음에는 샤마타, 다음에는 위빠샤나, 마지막으로 둘을 결합한 사마디를 일으켜야 한다. 샤마타를 먼저 수습하는 이유는 삼승(三乘)의 공덕이 모두 진정한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결과이거나, 샤마타와 위빠샤나에 가까운 분석명상과 집중명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샤마타를 성취해야 분석명상 시에도 대상을 산만하게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강해진다.

샤마타를 수습하는 방식에 대해 미륵보살은 《중변분별론》에서 다섯 가지 허물과 여덟 가지 해독제를 설했다. 마음의 허물을 알고 그것을 치유하는 해독제를 적용하면서 《대승장엄경론》에서 설하였듯이 구주심(九住心), 육력(六力), 사작의(四作意)를 배우고 명상하면 청정한 사마디를 쉽게 성취할 수 있다. 구주심의 마지막 단계인 지주심(持住心)이 샤마타에 가까운 마음 상태이다. 마음의 나쁜 성향(습기習氣)이 사라지면서 몸의 경안(輕安)이 늘어나고 마음에는 환희심을 느끼게 된다. 그런 환희심도 차례로 적어지고 마음이 단단히 대상에 머무는 사마디와 일치하고, 흔들리지 않는 경안이 생긴다. 동시에 첫째 선정의 예비적 단계인 샤마타를 성취한다.

진정한 샤마타를 성취한 후 욕계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색계, 무색계의 마음인 샤마타를 얻게 되며 그 결과 욕계, 무색계의 천신(天神)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러한 결과의 원인인 선정(禪定, dhyana)을 얻기 위한 명상 방식으로《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칠종작의(七種作意)를 설했다.《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색계 초선정부터 사선정까지 다시 18가지 세부 단계로 나뉘어지지만 실질적으로는 11가지 단계가 있다. 삼승(三乘)에 입문한 자는 색계 사선천의 '상(相)이 없는 선정'과 윤회의 꼭대기인 무상천(無上天)의 멸진정(滅盡定) 등 상위 단계의 선정을 성취해야 한다. 이는 불교도와 비(非)불교도 모두 공통으로 성취해야 할 바이기도 하다.

3-3. 지혜
삼학 중 지혜조사와 분석으로 현상을 완전하게 분별하는 지혜를 뜻한다. 이것을 실천하며 완전하게 익숙해지면 지혜바라밀이 된다.

지혜는 3가지로 분류한다.
1) 궁극적 현상을 깨닫는 지혜: 공성을 분별심을 통해서 관념적(의공상義共相)[26]으로 인식하거나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지혜.
2) 관습적 진실을 깨닫는 지혜: 다섯 가지 지식(오명五明)을 잘 아는 지혜.
3) 중생의 복지를 인식하는 지혜: 중생의 현재와 미래의 복지를 성취하는 방식을 아는 지혜.

무아라는 개념의 의미에도 불교 4대 학파의 견해가 있다. 이런 여러가지 학파의 견해도 궁극적으로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를 잘 깨닫기 위해 해설한 것이다.

세간의 모든 허물의 뿌리는 실집(實執,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집착)과 그러한 습기(習氣, 습관적 성향)들이다. 이걸 없애는 방법은 무아를 깨닫는 지혜 밖에 없다. 그러므로 무아의 개념을 깨닫는 위빠샤나를 성취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인무아(人無我)와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나서, 그런 의식으로 파악한 대상이 공성으로 사라지고 의존적인 현상(연기緣起)의 모임일 뿐인, 명칭으로 세워졌던 것(유언가유唯言假有)일 뿐임이 마음에 나타날 때 법무아(法無我)를 깨닫는 것이다.

4. 삼학을 통해 성문승ㆍ연각승에 들어가는 방식
삼학을 통해 소승성문, 연각의 길에 들어서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대승의 길에 들어서는 이도 있다. 성문의 길에는 자량도(資糧道), 가행도(加行道),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오도(五道)가 있다. 윤회에서 세 가지 고통이 생기는 것을 안 뒤 벗어나려는 마음과 찾는 목적인 해탈을 원하는 마음(출리심出離心)이 진정으로 생길 때 성문의 자량도에 들어간 것이다. 자량도에서 부정관(不淨觀), 호흡관,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등을 수습하여 오신통(五神通) 등을 얻고 가행도에서 난(煖), 정(頂), 인(忍), 세제일법(世第一法)의 4단계를 거치며 오근(五根), 오력(五力) 등 특별한 공덕과 사성제의 본질을 인식하는 뛰어난 수혜(修慧)를 얻는다.

견도에서는 사성제 십육행상(十六行相)에 포함된 공성을 직접인식(현식)으로 지각하여 견도로 버려야 할 번뇌 112가지의 종자(種子)를 제거한다. 이로써 성문 수행자는 성현(聖賢)의 특성을 얻어 승보(僧寶)가 된다. 수도에서는 구생번뇌(俱生煩惱)의 종자를 제거하기 위해 견도에서 공성을 직접인식으로 지각한 것을 팔정도(八正道)로써 더욱 오랫동안 수습한다. 이를 통해 수도로 버려야 할 번뇌 81가지의 종자마저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성문의 금강유정(金剛喩定, 다이아몬드 같은 사마디)에 의지해서 생기는 해탈도를 얻을 때 성문의 무학도인 성문 아라한의 경지를 얻는다. 연각의 길은 성문과 비교하였을 때 찾는 깨달음이 같지 않고, 복덕을 수많은 겁 동안 쌓았는지 여부 외에는 오도 등이 거의 성문과 같다.

5. 대승의 바라밀승
대승에는 바라밀승(현교)금강승(밀교)이 있다. 바라밀승도 소승과 같이 자량도 등 오도가 있다. 고통스럽고 행복이 부족한 모든 중생을 내가 유익하게 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는 자애심과 연민심을 마음 동기로 삼아 붓다의 경지를 구하는 진정한 마음(보리심菩提心)이 생길 때 천신과 인간 등 모든 세간이 존경하는 보살이 되는 것이고 대승의 자량도를 얻는 것이다.

공성을 관념적(의공상)으로 인식하는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결합인 가행도를 거쳐 공성을 직접인식(현식)으로 인식하는 견도의 무간도(無間道, 장애 없는 길)에서 분별번뇌장 112가지와 분별소지장 108가지의 종자를 동시에 없애고 업과 번뇌에 의존하여 생기는 태어남, 늙음과 죽음의 고통 등이 제거되어 '모든 현상에 편안하게 들어가는 사마디'를 얻는다.

수도에 포함된 십지(十地)에서 수도로 제거해야 할 번뇌 16가지와 수도로 제거해야 할 소지장 108가지의 종자를 큰 것부터 차례로 제거하고, 십지의 끝인 순간에 (중생으로서의) 마지막 흐름인 무간도로 소지장을 완전히 제거하고 무한한 공덕인 붓다의 경지를 얻는다.

■ 대승의 오도십지(五道十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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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승의 금강승
바라밀승과 금강승은 목적인 붓다의 경지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이 두 가지 수레의 차이점은 붓다의 경지를 얻기 위한 원인에 있다. 결과인 붓다의 몸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 두 가지가 있고 따라서 둘의 개별적 원인도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보리심과 결합된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법신의 개별적 원인이면서 색신의 협력적 원인임은 바라밀승과 금강승 둘 다 동일하다.

색신의 개별적 원인이 되는 광대한 방편을 인정하는 것이 금강승이고, 단지 보리심과 육바라밀 등의 방편만 갖고 있는 것이 바라밀승이다. 따라서 바라밀승에 의지하면 많은 생이 지난 다음 붓다의 경지를 얻을 수 있지만, 금강승에 의지하는 지혜로운 이는 한 생 또는 몇 년의 수행만으로 붓다가 될 수 있어 금강승의 길이 더 빠르다.

바라밀승과 구별되는 금강승의 특징인 색신의 특별한 원인으로는 본존 요가가 있다. 결과인 색신의 진정한 거주지 및 몸 등과 비슷한 본존 요가를 관상하는 최고의 방편이 바라밀승에는 없는 광대한 방편이다.

7. 붓다의 사신(四身), 공덕, 행위
지혜가 원인이 되어 법신을 이루고, 방편이 원인이 되어 색신을 이뤄 최종적으로 붓다의 과위를 얻게 된다. 《현관장엄론》에 따르면 법신과 색신은 다시 자성법신(自性法身), 지혜법신(智慧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사신(四身)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자성법신은 진제에 해당하고, 나머지 지혜법신, 보신, 화신은 속제에 해당한다.

자성법신은 진제로서 '무자성(無自性)', 즉 '공성'을 의미한다. 자성법신을 다시 둘로 구분하면 '오염이 없는 본래청정'으로 '부처의 마음의 흐름(心相續), 즉 모든 현상을 깨닫는 지혜인 일체상지(一切相智)'의 본질인 공성을 가리키는 자성청정신(自性淸淨身)과, '객진번뇌[27]를 제거한 청정'으로 '번뇌장과 소지장이 없는 부처의 멸제(滅諦)'인 객진청정신(客塵淸淨身)으로 나눌 수 있다.

속제에 해당하는 지혜법신, 보신, 화신 중 지혜법신은 진제와 속제에 포함된 모든 현상을 자신의 앞에 존재하듯이 직접인식으로 인식하는 일체상지, 보신은 정토에 머물며 보살들에게 대승법만을 설하는 등 '다섯 가지 결정된 법'을 갖춘 색신, 화신은 다섯 가지 결정된 법을 갖추지 않고 삼계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투는 색신을 의미한다.

붓다의 공덕에는 신(身), 구(口), 의(意), 사업(事業)의 공덕이 있다. 그 중 붓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공덕으로 사무외(四無畏), 사무애지(四無礙智), 십력(十力),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이 있다. 붓다의 행위는 지속적이다. 붓다가 과거에 도(道)의 과정에서 보살십지를 차례대로 얻으며 지혜자량과 복덕자량에 포함된 특별한 공덕들이 생겼고, 유지되고, 늘어났다. 그러한 뛰어난 원인들이 성불(成佛)에 앞서기에 붓다의 행위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또한 중생의 마음의 본질은 불성(佛性), 즉 '자성(自性)적인 오염'이 없는 본성이며 그러한 불성의 장애가 되는 '일시적인 오염'이 번뇌와 번뇌의 종자들이다. 그것들을 없앨 수 있는 해독제인 대자비심으로 중생들을 살피고 그들에게 번뇌를 제거하는 방식을 가르치기에 붓다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행위가 생기는 것이다.

■ 자성? 무자성?

중관학파는 법에 실체가 있다고 보는 소승 아비달마 교학에 대항하여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인 자성(自性, svabhāva)을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동아시아 불교에 익숙한 이들은 이러한 중관학파의 정의에 혼란을 느끼기 쉽다. 여래장(如來藏)ㆍ불성(佛性) 사상과 유학(儒學), 노장(老莊)의 심성론(心性論)에 강한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자성이란 곧 진여(眞如), 불성(佛性),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과 동의어로서 진리의 당체(當體), 법의 진실한 본성이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관을 요의로 삼은 티베트 불교는 일체법의 무자성(無自性, niḥsvabhāva)을 논하면서 자성을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아시아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성신(svabhavakaya), 자성청정(rang bzhin gyis rnam par dag pa) 등 자성을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 초학자가 혼동을 느끼기 쉽다.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관품>에서도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논하면서 승의제(勝義諦), 법성(法性)으로서의 승의자성(勝義自性)은 긍정하는 일견 모순된 듯한 서술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티베트 불교에서 자성의 정확한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대승 불교에서 자성은 부정적인 의미의 자성과 긍정적인 의미의 자성으로 나뉜다.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경우 자성(세간자성)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공성의 부정대상인 인아(人我)와 법아(法我)를 의미한다.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 자성(승의자성)은 일체법의 궁극적 특성/본성을 가리키며 특히 중관학파에서는 공성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공성을 '자성이 없다(무자성)', '자성이 공하다', '자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식으로 전도(顚倒)된 관념을 척파하기 위해 부정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불도(佛道)를 이루는 수행의 근거, 목표, 결과로 삼기 위해 '(승의)자성', '자성청정', '자성법신', '법성', '불성', '여래장', '진여', '멸제', '승의제', '열반' 등의 긍정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긍정 형식으로 표현되더라도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닌, 언설로만 성립할 뿐이다.

이처럼 자성은 대승 불교 전반에 걸쳐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다른 대상과 구별되는 고유한) 본질', '본성'이란 뜻의 자성이 중관에서는 주로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부정의 의미로 쓰였고, 이후 유식과 여래장에서는 주로 '궁극적인 진실의 경계', '본질'이라는 긍정의 의미로 쓰이는 변천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변화가 개념적인 혼동을 유발하기 쉽기 때문에 맥락에 따른 자성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태승, 《『보리도차제대론』에 나타나는 승의자성의 의미》

이태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성(自性))》

윤희조, 《자성(自性)의 의미변화에 관한 일고찰 - 『구사론』, 『중론』, 『단경』 을 중심으로》


4.5. 견해, 명상, 행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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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단계마다 각기 다른 견수행과(見修行果)가 존재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수행론인 도(道, Skt. mārga; Tib. ལམ་, lam, Wyl. lam)를 다시 세분화하여 견해, 명상(수습), 행위(Tib. ལྟ་སྒོམ་སྤྱོད་གསུམ་, ta gom chö sum, Wyl. lta sgom spyod gsum)로 구분한다. 여기에 결과론인 과(果, འབྲས་བུ་, Tib. drebu; Wyl. 'bras bu)를 합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 견해, 명상(수습), 행위, 결과)라고 지칭할 때도 있다. 현밀(顯密)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 수행은 견해, 명상, 행위 세 가지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목표한 결과를 얻는다.

대만 중화불학연구소(中華佛學研究所)의 란지푸(藍吉富) 교수가 작성한 《佛教信仰的見修行果》를 참조하여 견수행과(見修行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견해(Skt. dṛṣṭi; Tib. ལྟ་བ་, tawa; Wyl. lta ba, view)란 법문이나 종파의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나 믿음을 의미한다.

1) 법문의 기본 원리, 믿음의 근거, 이론 구조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염불 법문을 예로 든다면 법문의 근거가 되는 경론과 왜 염불이 필요한지, 염불의 정의는 무엇이고 염불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등이 견해에 해당한다.

2) 어떤 전승이나 종파의 기본 교리 구조를 말함.

명상(혹은 수습, meditation)은 내재적(內在的)이고 개인적인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 수행(修行)은 내재적인 수행인 '명상'과 다른 대상 간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외재적인 '행위'로 구분할 수 있다.

명상은 주로
  • 수습(修習), 수행계발(Skt.bhavana; Tib. སྒོམ་, gom, Wyl. sgom)
  • 삼매(Skt.samadhi.; Tib. ཏིང་ངེ་འཛིན་, ting nge dzin, W yl. ting nge 'dzin)
  • 선정(Skt.dhyana; Tib. བསམ་གཏན་, samten. Wyl. bsam gtan)

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명상은 경전 학습을 통해 얻는 문혜(聞慧, śruta-prajñā)와 논리적 사유를 통해 얻는 사혜(思慧, anumāna-prajñā 또는 cintā-prajñā)를 요가행법을 통해 직접적, 체험적, 직관적인 수혜(修慧, bhāvana-prajñā)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위(Tib. སྤྱོད་པ་, chöpa, Wyl. spyod pa, action)는 앞서 언급했듯이 외재적(外在的)이고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일상의 태도,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의미한다. 육바라밀을 예로 들자면 선정, 지혜바라밀은 명상에 해당하고 보시, 지계, 인욕 바라밀은 행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정진바라밀은 나머지 다섯 바라밀 모두에게 적용된다.

결과(result)는 견해ㆍ명상ㆍ행위로 구성된 불교 수행을 배우고, 사유하고, 실천하여 얻는 성과를 의미한다.

1) 각 전승과 종파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과위(果位). 예를 들어 성문승은 아라한, 대승의 현교는 삼아승지겁 동안의 수행을 통한 성불, 밀교는 즉신성불(卽身成佛), 선종은 견성성불(見性成佛) 등을 결과로 삼는다.

2) 궁극적인 과위 외에 단계별로 얻는 성과. 예를 들어 성문승은 아라한 외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등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있으며 보살승은 초지(初地)부터 십지(十地)까지의 보살지(菩薩地)가 있다.

조낭의 스승인 제쭌 타라나타(rje btsun ta ra na tha) 는 견해, 명상, 행위의 불가분성과 종합적 실천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견해, 명상, 행위를 하나로 묶고 실천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마치 창(槍) 하나하나가 모여 한 묶음을 이루듯이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견해 없이는 행위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실재가 있다고 믿게 되고 그래서 윤회가 계속된다. 행위 없는 견해로는 공덕 쌓는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 게다가 견해를 기르는 당사자를 허무주의의 심연까지 이끌어 갈 위험이 있다. 명상이 없는 견해와 행위는 땅 속에 묻힌 보물과 마찬가지로 무용하다. 오두막집 밑에 보물이 무진장 숨겨져 있어도 가난한 사람이 그것으로 배고픔을 면할 수 없듯이, 견해와 행위에 대한 가르침이 엄청나게 많아도 실제 명상 수행을 하지 않으면 수행자는 마음을 다르마(불법)에 계합시킬 수 없다. 즉 견해와 행위가 필요할 때 전혀 유용하지 못할 것이다.

제쭌 타라나타(rje btsun ta ra na tha)

마티외 리카르,《티베트 지혜의 서》(임희근 譯)


4.6. 중관 사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중관 사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7. 불교인식논리학[편집]



대론(對論)으로 외도(外道)들을 제압하는 디그나가

세상 사람들의 이익을 바라는 분(慈悲者)이며, 교사(敎師)이며, 선서(善逝)이며, 구제자(救濟者)인 규범자(프라마나pramana(바른 인식)가 되신 분=세존)에게 경례하여 나(디그나가)는 프라마나를 확립하기 위해 [《니야야뭇차》 등의 자신의 저술에서] 산발적으로 설해져 있는 자기의 말들을 하나로 정리하여 《프라마나삼웃차야》를 저술한다.

《프라마나삼웃차야(양집성/집량론)》

《다르마키르티의 인식론평석:종교론》(권서용 譯)


중관학과 더불어 불교의 인식론과 논리학에 해당하는 인명학(因明學, Hetu-vidyā)을 중시한다는 점도 티베트 불교 교학의 특징이다. 인명학은 현대식 용어로 불교인식논리학이라고 한다. 인명학에서 지각에 해당하는 현량(現量, pratyakṣa)과 추리에 해당하는 비량(比量, anumāna)이라는 두 종류의 바른/타당한 인식(量, pramāṇa)을 다루며, 이 중 비량에 관한 이론은 논리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인명학은 경론을 통해 견해와 수행 체계를 익히는 데 필요한 분석 도구일 뿐 아니라, 수행을 통해 공성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획득하는 데도 필수적으로 의지해야 할 수단이다.

공성을 현량(現量)을 통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견도(見道)는 공성을 지각하기 이전 가행도(加行道)의 세제일법(世第一法)까지 유지되는 분별지(分別智)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분별지는 올바른 논리를 통해 생기기 때문에 결국 인명학의 논리방식을 익혀야 된다. 논리학을 공부하는 것을 외적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내적 수행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바른 논리를 심을 수 없으며 수행 체계 역시 완성할 수 없다. 따라서 사견(邪見)을 모두 제거하여 진정한 수행자가 되려면 논리학을 학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특히 지관(止觀)을 수습(修習)하는 이들이 논리 체계를 이해하게 되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
게셰 텐진 남카 譯,《논리에 이르는 신비로운 열쇠: 뒤다체계의 논리방식》

이처럼 인명학은 교학 뿐 아니라 수행에도 필수적인 토대가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인명학은 적극적으로 수용되지 못한 채 천 년 이상 잊혀져 온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한국인에게 《람림》같은 수행 체계보다 우선 《뒤다》와 같은 논리학을 먼저 가르치라"고 당부한 바 있다. 비단 연구자나 수행자 뿐 아니라 티베트 불교에 관심있는 일반인들도 인명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갖고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된다.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킬 뿐 아니라 티베트 불교를 보다 정확하고 심도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 관련 법문, 강의, 문헌 등에서 인명학의 개념과 논리 전개를 활용한 부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인명학에 무지하면 번역과 이해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인명학은 구(舊)인명과 신(新)인명으로 나뉘는데, 이 중 신인명은 디그나가(Dignāga, 480~540)와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7세기)가 확립했다. 불교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탐구하는 모든 과정은 인명의 범주에 포함된다. 디그나가와 다르마끼르띠는 불교의 인명논리학을 집대성하여 종(宗), 인(因), 유(喩)로 이루는 삼지작법(三支作法)을 확립했고, 이후 오지작법의 논쟁 방식이 점차 정립되었다.

《인명칠론(因明七論)⟫ 혹은 《칠부량론(七部量論, Pramanavartikadisapta-grantha-samgraha)⟫은 다르마키르티가 디그나가의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를 주석한 (1) ⟪양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 (2) ⟪정량론(定量論, Pramāṇaviniścaya)⟫, (3) ⟪이적론(理滴論, Nyāyabindu)⟫ (4) ⟪인적론(因滴論, Hetubindu)⟫, (5) ⟪관계론(關系論, Saṃbandhaparīkṣā)⟫, (6) ⟪쟁리론(諍理論,  Vādanyāya)⟫, (7) ⟪오타론(悟他論, Saṃtānāntarasiddhi)⟫ 등 일곱 가지 주석서를 총칭하는 말이다.
정성준, 《티베트대장경의 번역과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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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칠론》의 저자 다르마끼르띠

사람의 모든 목적 성취에는 선행하는 바른 인식이 있기에 그것이 논구(論究, vyutpadyate)된다.[28]

《니야야빈두(정리일적)》

《니야야빈두, 니야야빈두띠까》(박인성 譯)


동아시아 불교권에서는 디그나가의 《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과 디그나가의 제자로 추정되는 상카라스와민(Śaṇkarasvāmin)의 《인명입정리론(因明入正理論)》등이 한역되어 전래되었다. 반면 티베트 불교에서는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양평석)》을 중시하였는데, 《석량론》과 같은《인명칠론》은 과거에 한역이 된 바 없다. 현대에 이르러 학술서와 논문 등에서 《인명칠론》일부가 현대어로 번역되었지만 아직《석량론》의 현대어 완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근현대 티베트의 문제적 인물인 학승(學僧) 겐뒨 최펠(dge 'dun chos 'phel)이 《석량론》을 영어로 완역하였으나 실전(失傳)되었다고 전해진다.

티베트 불교의 인식논리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스위스 로잔 대학의 파스칼 위공(Pascale Hugon)이 작성한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ibetan Epistemology and Philosophy of Language> 항목에 나와 있다.

티베트 불교 강원에서는 기초 과정에서 인식논리학과 관련된 《뒤다(섭류학攝類學)》, 《로릭(심류학心類學)》, 《딱릭(인류학因類學)》을 배운 뒤 5부대론 과정에서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釋量論)》을 배운다. 대략 10년 이상 해마다 겨울철 한 달씩 스님들이 한 절에 모여 집중적으로 논리학을 배우기도 한다.

참조할만한 국내 서적은 다음과 같다. 티베트 불교의 인식논리학과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국내 서적은 매우 드물다.[29]


대신 티베트 불교 인식논리학의 토대가 되는 인도 후기 유식학파(경량부유가행파)의 인식논리학 및 언어철학과 관련한 국내 서적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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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승려들이 대론하는 모습

두 마리 사자가 서로 등을 맞대면 어떤 짐승도 그들을 대적할 수 없듯이, 중관과 인명을 익히면 어떤 반박과 논리도 물리칠 수 있다.

티베트 격언


불교논리학에 기초한 대론(對論, rtsod pa)은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부터 계승된 티베트 불교의 중요한 수행 방법 중 하나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대론은 설법('chad), 저술(rtsom)과 더불어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학자(paṇḍita)의 3가지 주요 활동(mkhas pa'i bya ba gsum)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불교는 내도(內道)의 다른 학파 및 외도(外道) 간의 대론을 통해 바른 견해를 확립해왔다. 오늘날과 같은 티베트 불교의 대론 방식은 12세기 차빠 최끼 셍게(phywa pa chos kyi seng ge)에 의해 정립되었다.

범천스님은 범천,《불교논리학의 향연》에서 티베트 불교의 대론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1) 대론은 인명자(因明者; 딱셀와; rtags gsal ba)와 발서자(發誓者; 담짜와; dam bca'ba) 간의 문답으로 진행된다. 인명자는 일어선 채로 질문하고, 발서자는 앉은 채로 대답한다.

2) 발서자는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고, 인명자는 발서자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발서자를 모순으로 유도해간다.

3) 발서자가 자신이 전에 했던 주장을 뒤에 번복하면 인명자는 왼손바닥에 오른 손등을 내리치며 '차!'라고 외쳐 오류가 발견됐음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인명자의 착각일 경우 발서자는 '찰록' 또는 '차똥'이라고 말해 오류가 없음을 주장한다.

4) 궁극적으로 인명자는 발서자의 근본주장(짜외담짜; rtsa ba'i dam bca'), 즉 논쟁의 시초가 된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아가며, 근본주장이 번복될 경우 발서자의 근본적 패배로 간주된다.



티베트 불교 대론법 소개 영상

대론이나 분석 명상은 마음챙김 등 다른 명상에 비해 과학적으로 거의 연구된 바 없다. 마리에케 반 부흐트(Marieke K. van Vugt) 흐로닝언대 교수, 조슈아 폴록(Joshua Pollock) 켄트 주립대 교수, 데이비드 프레스코(David M. Fresco) 켄트 주립대 교수 등은 2020년 대론과 분석명상에 관한 첫 과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대론(monastic debate)은 양자(兩者) 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분석 명상(analystic meditation)에 해당한다(역으로 개인의 분석 명상은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자가 대론(self-debate)'에 가깝다.).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대론 역시 '분석 명상'으로 지칭하였다. 측정 수단으로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분석하는데 알맞은 뇌파의 하이퍼스캔(Hyperscan)을 활용하였다. 실험 대상은 겔룩에 속한 세라 제(Sera Jey) 강원의 승려들로 선정되었다.

측정 결과 대론 중에 집중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중전두 세타 진동(mid-frontal theta oscillations)이 유의미하게 증가하여, 분석 명상이 집중력을 훈련시킨다는 가설과 일치함을 보였다. 세타 진동의 증가 정도는 초보자 승려군(群)보다 숙련된 승려군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 또한 짝지어진 토론자들 간의 전두 알파 진동(frontal alpha oscillations) 동시성(synchrony)이 전제에 대한 의견이 서로 불일치할 때보다 동의할 때 더욱 증가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Marieke K. van Vugt et al.,, 《Inter-brain Synchronization in the Practice of Tibetan Monastic Debate》

세라 제 강원의 교수사들과 상급생 승려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토의 및 인터뷰와 예비실험들을 바탕으로, 반 부흐트 등은 성공적인 토론에 추론과 비판적 사고, 주의 집중, 작업 기억(working memory), 감정 조절, 추론 기술에 대한 자신감, 사회적 유대감 등이 필요하다는 초기 이론을 설정하였다. 또한 향후 대론과 분석 명상이 심리학적 웰빙과 교육적 성취에 심리학, 신경과학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추가로 연구해나갈 것을 제안하였다.
Marieke K van Vugt et al., 《Tibetan Buddhist monastic debate: psychological and neuroscientific analysis of a reasoning-based analytical meditation practice》

4.8. 자비와 보리심의 강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밀교[편집]



5.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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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보살의 힘(力)의 총체이자
밀승의 가르침을 결집한 금강수보살(Vajrapani)[31]

인도 불교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는 밀교는 티베트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 동남아, 동북아의 다른 국가들로 전래되었지만 과거부터 지금까지 법맥이 끊기지 않고 독자적인 밀교 종단이 유지되고 있는 곳은 티베트(몽골, 부탄, 네팔, 시킴, 라다크 등 티베트 불교권 지역 포함)와 일본뿐이다. 일본에는 중기 밀교까지 전해진 반면 티베트에는 후기 밀교까지 전래되었다. 티베트 대장경에는 밀교부에 해당하는 방대한 경전들이 존재하며 또한 티베트 불교 종파별로도 각자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과 문헌을 갖고 있다.

밀교는 다른 말로 금강승(金剛乘, vajrayana)이라고 한다. '금강'이라는 것은 매우 견고하고 단단한 것을 뜻한다. 방편과 지혜를 분리시키지 않고 합일시켜 단단하게 하기 때문에 금강승이라고 한다. 금강승은 '방편승(方便乘, upayayana)'이라고도 한다. 바라밀다승보다 많은 선교(善巧) 방편들을 구족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금강승을 '과승(果乘, phalayana)'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과(果)로써 도(道)를 삼기 때문이다. 즉 수행의 결과인 불과(佛果)를 수행 방편으로 이용하여 수행자 자신을 밀교의 본존으로 관상하는 청정 인식을 갖게 한다. 금강승은 '밀승(密乘, guhyayana)'이라 칭하기도 한다. 반드시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면서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밀교의 가르침과 수행은 비밀로 남아있어야 하며 밀교 수행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관정이나 금강승 수행에 대해서 남에게 알리거나 자랑해서는 안된다. 자칫 자기중심주의, 오만에 빠질 수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라마의 밀교란 무엇인가》(설오 譯)

현교의 개요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현교', '밀교'는 동아시아에서 유래한 용어이며 인도-티베트 불교에서는 주로 현교를 '바라밀승/바라밀이취理趣', 밀교를 '금강승/금강이취(혹은 진언승/진언이취)'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본 문서에서도 '밀교' 대신 '금강승'이란 용어로 표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금강승보다 밀교가 훨씬 친숙한 용어이며 학계에서도 금강승과 밀교를 혼용하므로, 현교/바라밀승/반야바라밀승과 밀교/금강승/진언승 등을 경우에 따라 혼용하였다.

최로덴(최연철)은 최로덴,《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딴뜨라(Tantra, rGyud)라는 용어는 밀교 경전들에 근거한 수행 전통을 말한다. 딴뜨라(Tantra)라는 말의 본뜻 역시 연속(連續), 계속(繼續), 본속(本續), 밀주본속(密呪本續), 비밀본속(秘密本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티벳어로는 ‘규(rGyud, 續)'라고 하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딴뜨라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로 관상(觀想)의 과정들, 의례절차, 상징들의 구체적인 묘사를 통한 깊은 철학적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을 활용한 수행을 통하여 의식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체계화되어 있다. 즉 ‘딴뜨라’는 모든 수행 양식과 관념들 그리고 다양한 상징물들과 함께 구전 전승되고 있는 의례 의식과 광범위한 경론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또한 밀교는 현교에서 미처 밝히지 못한 더욱 심오한 견해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밀교 경전은 현교의 번뇌 개념보다 더욱 미세한 수준의 번뇌들을 다루고 있으며, 부처의 사신(四身)[32]의 공덕에 대해서도 현교에서 다루지 않는 사항을 설명한다. 가령 현교, 특히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의식에 대해 설명할 때 전5식과 제6식의 존재에 대해서만 언급하지만, 밀교에서는 현교에서 언급하지 않는 미세한 소지장(所知障)들과 그것들을 소멸하는 도(道)인 미세한 의식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불교 수행에 있어 현교 뿐 아니라 밀교 역시 필수불가결한 가르침이며, 바라밀승(현교)으로 십지보살까지의 과위를 얻는 것은 가능하지만 성불을 위해서는 반드시 금강승(밀교)의 무상요가 딴뜨라를 성취해야 한다고 티베트 불교에서는 말한다.

  • 수행의 3가지 체계
이승
삼승

소의 경전
수행
소승
성문승·독각승
별해탈계
아함경 등 초기 경전
주로 자신의 번뇌를 없애는 수행
대승
바라밀승(보살승)
보살계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등
일체중생을 위해 보리심과 육바라밀 수행
금강승(밀승)
금강승계
구햐싸마자(밀집금강), 차크라삼바라(승락금강), 야만따까(대위덕금강) 등
번뇌의 독을 약으로 삼는 수행

5.2. 밀교의 기원과 불교사 서술 방식[편집]



5.2.1. 전통적 관점[편집]



파일:89904.jpg

지금강불(Vajradhara)과
84명의 마하싯다(mahasiddha)[33]

겔룩의 승원에서 교재로 쓰이는 양짼 가외로되(Dbyans can dgah baḥi blo gros)의 밀교 관련 논서 《시이꾸숨기남샥랍쌜된메(因位三身行相明燈論, gzhi'i sku gsum gyi rnam gzhag rab gsal sgron me)》를 중암 스님이 역주(譯註)한 양짼 가외로되,《밀교의 성불 원리》(중암 譯)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금강승은 석가모니불의 보신불(報身佛)[34]인 지금강불(持金剛佛, Vajradhara)에 의해 설하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강불은 오종성불(五種性佛)의 덕성을 하나로 모은 대보신불(大報身佛)로 밀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부처이다. 금강승의 가르침은 무상유가의 법기(法器)로 알려진 업과지(業果地)[35]의 남섬부주 유정들을 위해서 단지 한 생애에서 성불할 수 있도록 최상의 근기를 대상으로 설한 비밀의 방편도(方便道)로 설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상요가부 딴뜨라의 가르침은 대승 가운데 대승이며 최상승법으로 일컬어진다.

특히 이 비밀 금강승의 가르침이 남섬부주에 출현한 것은 오로지 석가모니불의 시대이며, 과거의 연등불이나 미래의 미륵불 때는 금강승의 가르침이 설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인간 수명이 100세에 불과한 오탁악세에 출현한 석가모니불의 교화 대상인 현세의 남섬부주 중생들이 금강승의 큰 연분(緣分)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오직 과거의 현전왕불(現前王佛), 현세의 석가모니불, 미래의 문수사리불[36]이란 세 분의 부처가 출현한 세 겁 때의 중생들만이 금강승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만큼 금강승과의 인연은 매우 희유한 인연이며 숙세의 매우 큰 선근 공덕 없이는 접할 수 없다고 한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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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드마삼바와 "나처럼 여기고 보라" 불상(佛象)[38]

티베트에 최초로 금강승을 전한 금강승의 대성취자(mahasiddha)이자 아미타불(Amitabha)의 화신으로 알려진 구루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의 전기 《빼마 까탕》에서는 금강승과 만나는 희유한 법연(法緣)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귀담아 잘 들으십시오! 티베트의 선근자들이여!

비밀진언의 금강승이 출현하는 것은 희유한 일이니,

과거의 8억 4천만의 제불여래도 설하지 않았으며,

연등불께서 법륜을 굴리실 때도 설하지 않았으며,

미래에 오시는 제불여래들도 역시 설하지 않으니,

그 유정들이 밀교의 법 그릇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 겁초에 겁명(劫名)을 일체장엄이라 부르는 때,

현전왕불의 가르침에 밀법이 출현하였으며,

현재불인 석가세존의 교법에 밀교가 출현하였습니다.

다시 천만 겁을 지나 겁명을 꽃 장엄이라 부르는 때,

문수사리불이 출현하여 현재와 같은 시절이 도래할 때,

그 부처님께서 지금처럼 진언밀교를 선양하게 됩니다.

이 세 겁의 유정들이 밀교의 법기가 되기 때문이며,

이 세 겁이 아닌 시절에는 금강승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뻬마 까탕》


불교학자 최로덴은 최로덴,《티벳 불교의 향기》에서 딴뜨라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딴뜨라의 수행자들은 딴뜨라 수행의 전통이 대부분 석가모니(Sakyamuni) 부처가 직접 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개중에는 가끔씩 다른 세상(타방他方)의 부처가 설한 것도 있으며, 말이 아닌 의식 속에서 전해진 것(意傳)이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것(心傳) 등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 딴뜨라들이 있다. 티벳 불교 학자들 대부분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일반적으로 역사학과 관련한 현대의 분과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내용을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 최소한 천 년 동안, 불교 딴뜨라들이 출현한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본다. 

이렇게 석가모니 재세시와 인도에서 딴뜨라가 꽃 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 티벳 역사가들 중 17세기의 유명한 역사가인 따라나타(Taranatha) 같은 이들은, 석가모니가 재세시에 직접 딴뜨라의 가르침들을 전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사람들의 근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기 때문에 단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승되고 나머지는 때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감추어져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딴뜨라의 기원에 관한 이런 식의 설명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큰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수많은 딴뜨라의 경전들이 언제 어디서 누가 편찬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딴뜨라를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의 전통에서 보면, 딴뜨라는 한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확실한 법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그 전통을 따라 성취를 이루었고, 지금도 그 법맥을 따라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며, 많은 딴뜨라의 경전에는 법맥의 전수자들이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딴뜨라의 법을 전해준 증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5.2.2. 현대적 관점[편집]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여전히 딴뜨리즘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과연 현 시점에서 딴뜨리즘의 기원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을지 회의를 표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을 통해 딴뜨리즘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한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였다는 ‘빌린 모델(borrowing model)’과 두 딴뜨라 이면에 공통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기층 모델(substratum model)’의 두 양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공통적인 토대로 일종의 ‘종교적 기층’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20세기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왔다.

'종교적 기층'이란 아리안족의 인도 아(亞)대륙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pre-Aryan") 토착 부족의 종교와 문화를 의미한다. 비(非) 아리안계 토착 부족들은 아리안 족의 진출 이후에도 주변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속하였다. 이들 부족들의 문화에 담긴 여신(女神) 숭배와 주술적 요소가 점차 아리안 족의 베다 전통(Vedic tradition)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힌두, 불교, 자이나교 등에 딴뜨리즘이 형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이 가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옥스퍼드대의 알렉시스 샌더슨(Alexis Sanderson)에 의해 도전받았다. 샌더슨이 ‘종교적 기층’ 가설에 의문을 품는 직접적인 이유는 ‘종교적 기층’이라는 것이 결코 지각되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추론되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었다. 

샌더슨은 우리가 딴뜨라로서 지각하는 것은 항상 샤이바 딴뜨라거나 바이슈나바 딴뜨라거나 불교 딴뜨라거나 혹은 어떤 구체적인 전통에 속하는 딴뜨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종교적 기층’ 가설은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많은 공통점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비록 요기니 딴뜨라들이 다양한 의례 등 그 기원에 있어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상당히 모방했지만, 요기니 딴뜨라들은 불교의 딴뜨라로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배척하며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샌더슨의 이론은 루에그, 스페라, 데이비드슨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웨더마이어 역시 힌두 샤이비즘과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공간을 공유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기에 불교 딴뜨리즘이 전적으로 힌두 샤이비즘(Śaivism)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라뜨나까라샨띠(Ratnākaraśānti)나 아바야까라굽따(Abhayākaragupta) 등 인도의 후기 딴뜨라 불교의 위대한 학승들이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을 문제 삼은 자료가 지금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딴뜨라 불교가 적절한 불교적 의미를 주는 상징주의에 의존하면서, 이교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명확한 의미가 그러한 요소들에 주어지면, 그들의 불순함은 제거되고, 그들은 불교의 이상을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들로 탈바꿈하였다. 
이용현,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불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은 불교 역사의 서술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19세기 근대 서구 학자들은 인도 불교의 쇠퇴와 불교 딴뜨리즘의 등장을 결부시켜 해석했다. 그들은 불교 딴뜨리즘이 힌두 샥티즘과 샤이비즘 등에서 유래하였다고 규정하고, 힌두이즘적 요소의 도입이 불교 내부의 도덕적 타락과 정체성 상실을 초래하여 인도 불교가 쇠멸하였다는 서사 구조를 고안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한다. 서구 학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Abrahamic religions)의 개념으로 인도 종교를 해석하였다. 그 과정에서 샤이비즘, 샥티즘, 바이슈나비즘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도 내 종교와 사상, 관습들이 '힌두교'라는 단일 종교처럼 취급되었고, 종교 간의 관계도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으며 여성의 가치는 평가 절하되었다.

또한 '생성-발전-번성-소멸'로 이어지는 유기체적 역사관에 익숙했던 서구 학자들에게 딴뜨리즘의 성(性)적 요소는 서양 고전(古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쇠락 징조로 해석되었다. 딴뜨리즘은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치부되어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채택되었다.

불교 딴뜨리즘으로 인도 불교의 쇠락을 설명하는 서술 모델은 제국주의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 학계에 만연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물론이고, 초기에 서구와 일본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는데 급급했던 한국 학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반면 인도 학자들, 특히 벵갈 출신 학자들은 딴뜨리즘을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하던 원시적인 문화적 저류(undercurrent)와 연관시키는 모델을 제시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토착 부족 문화는 아리안족의 진출 이후에도 '종교적 기층', 혹은 '저류'를 형성하여 유지되면서 주류 종교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기존 종교의 성격과 달리 민중 지향적, 모계 지향적, 신체 지향적인 딴뜨리즘이 등장하게 된다. 서구의 낭만적인 성향을 가진 학자들도 이러한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Christian K. Wedemeyer,《Making Sense of Tantric Buddhism: History, Semiology, and Transgression in the Indian Traditions》

한편 대승 불교의 중관, 유식 논사들은 학자이자 동시에 밀교 수행자들이었다. 《유가사지론》으로 대표되는 유가행 이론의 완성 이후 이들은 유가행의 실천을 목적으로 밀교 의궤를 창안하였다. 또한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밀교 경전에 주석을 달았고, 바라밀승의 수학 이후 진언승을 수학하는 대승 교단의 현밀겸수(顯密兼修)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밀교의 교리적, 실천적 정통성을 보여준다. 정성준, 《인도밀교의 성립에 나타난 후기중관파와 밀교의 교섭 고찰》


5.3. 밀교와 현교의 비교[편집]



티베트 전통 의학에서의 인체 맥륜(脈輪)도.
밀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 삼밀(三密)의 수행으로
현생(現生)에서 지금의 몸으로 부처가 되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이 가능하다고 본다.

겔룩의 창시자인 쫑카빠는 "공성에 대한 견해, 모든 유정의 존재들을 위해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하는 의도(보리심), 육바라밀의 수행에 있어 바라밀승과 금강승 양자는 차이가 없다." 하고 말하였다.

바라밀승과 금강승은 공성(空性)이라는 견해를 지향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금강승에서 말하는 공성이라는 것도 결국 바라밀승에서 말하는 공성을 말하는 것이지 더 심오한 공성을 말한다거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39]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공통된 수행도는 곧 보리심이다. 진정한 보리심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금강승에 입문할 수 있다. 보리심을 갖춰야 금강승에 박학다식하고 금강승의 수행을 겸비한 자격을 갖춘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금강승의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다.

바라밀승과 금강승 사이에 의도/동기인 보리심과 행위인 육바라밀에 있어서는 차이가 전혀 없다. 또한 바라밀승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와 금강승에서 말하는 부처의 과위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부처의 과위에 이르기 위한 방편에 있어서는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과위, 불과(佛果)라는 것은 법신(法身)과 색신(色身) 두 가지로 양상을 나눌 수 있다. 바라밀승과 금강승 모두 법신을 이루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지만, 색신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은 금강승에만 드러나 있으며 법신을 이루는 방법에 있어서도 바라밀승보다 금강승이 더욱 구체적이다. 전반적으로 금강승은 바라밀승에 비해 보다 지혜롭고 예리한 근기의 수행자만이 수행할 수 있고, 더욱 다양한 방편으로 쉽고 빠르게 성불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금강승이 바라밀승보다 우월한 점에 대해 제13대 달라이 라마 툽텐 갸초(Thub Bstan Rgya Mtsho)는 다음과 같은 4가지를 언급했다.

(a) 금강승에서 공성의 체험을 일으키는 방식은 비할 데 없는 방편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방편들은 신체의 거칠고 미세한 생명의 바람(風)들을 중맥(中脈)에 넣고, 머물게 하고, 녹임으로써 심원리(心遠離, Skt. cittavyavakarṣa, Tib. sems dben pa)의 지혜를 얻게 한다. 따라서 금강승에서 공성에 대한 통찰을 기르는 방편들은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b) 금강승은 보다 광대한 방편들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금강승의 수행 중에는 성취해야 할 색신(色身)의 특성에 따라서 원인이 되는 형색(形色)을 명상하는 것이 있다.

(c) 금강승의 도(道)는 어려움 없이 속히 성취된다. 반야바라밀승에서는 깨달음의 과위를 얻기 위해 수많은 생(生) 동안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반면 금강승에서는 지금 한 생 안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쉽게 성취할 수 있다.

(d) 마지막으로 금강승은 도(道)의 빠른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예리한 근기를 가진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
Glenn H. Mullin, 《From the Heart of Chenrezig: The Dalai Lamas on Tantra》

바라밀승과 달리 금강승에는 지혜와 방편을 완벽히 합일하여 수행하는 법이 있다.[40] 바라밀승의 수행자가 공(空)에 대한 개념적 또는 추론적 인식을 얻게 되면 오직 공만이 나타나고 대상은 사라진다. 그러나 본존요가는 공성에 대한 명상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본존으로, 자신의 주변 환경을 본존의 거주지로(만다라), 자신의 도반들을 신성한 존재들로, 자신의 행동들이 본존의 신성한 행동으로 심상화(心象化)함으로써 금강승의 수행자가 공을 깨닫게 되면, 관(觀)하던 현상이 공하다는 지각이 일어남과 함께 그 현상들이 사라지지 않고 공성의 범주 내에서 유지된다. 그러므로 지혜와 방편이 동시에 존재하고 공을 깨닫기 위해 사용된 미묘(微妙) 의식은 붓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금강승에는 본존의 관상 뿐 아니라 신체 구성요소인 기(氣, prāṇa), 기맥(氣脈, nāḍi), 맥륜(脈輪, cakra), 명점(明點, bindu) 등을 활용한 수행법이 있다. 금강승에서는 불과(佛果)를 이루는데 매개체가 되는 수행자의 신체를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무상요가 딴뜨라에 의하면 수행자의 몸과 마음은 일상생활의 거친 수준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이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미세한 수준으로도 존재한다. 다양한 물질요소로 이루어진 수행자의 일상적인 신체적 형태는 병과 쇠퇴와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금강신(金剛身)이라 불리는 미세한 몸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파괴 불가능한 성질을 갖고 있다.

소멸되는 물질적인 거친 수행자의 몸이 일반적인 신체기관에 의해 채워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세한 금강신의 몸은 기(氣)와 명점(明點)이 흐르는 수천 개의 기맥(氣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맥들은 지복(至福)의 원천이며 무상요가 탄트라의 수행에 있어서는 필수적이다. 딴뜨라 수행의 목적은 미세신(微細身)의 구성요소를 정화하여 붓다의 세 가지 몸(法身, 報身, 化身)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삼는 데에 있다.
원명, 《탄트라 수행의 특징: 신체 구성요소의 활용》

5.4. 밀교의 분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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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겔룩 계통의 칼라차크라 만다라


2007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코넬대 방문 기념으로 제작된 3D 칼라차크라 만다라 영상[41][42]

티베트의 신역(新譯, gsar ma) 전통에서는 딴뜨라 문헌을 소작부 혹은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4부 딴뜨라로 분류하였다. 4부는 수행의례나 방법 면에서 차이가 있다. 소작부는 외적인 의례를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행부는 외적인 의례와 내적인 수행을 함께 중시하며, 유가부는 오직 내적인 수행만을 중시한다. 무상유가부의 가르침은 인도 후기 밀교에 해당하며 비교하여 설명할 것이 없다. 네 탄트라의 수행은 상응하는 근기를 가진 수행자에 근거하여 나눈 것이지,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나눈 것이 아니다.

소작부, 행부 같은 하위 딴뜨라와 무상요가부 같은 상위 딴뜨라 모두 성불(成佛)하는 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또한 하위 딴뜨라의 본존들과 상위 딴뜨라의 본존들 모두 붓다의 법신(法身), 공덕, 행위 면에서 서로 차이가 없고 동일하다. 다만 수행법의 심오한 정도에 따라서 4부 딴뜨라가 구분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작 딴뜨라에는 무상요가 딴뜨라의 생기차제, 원만차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무상요가 딴뜨라는 방편 부(父) 딴뜨라, 반야 모(母) 딴뜨라, 부ㆍ모 양 딴뜨라의 쌍입(雙入)을 설한 불이(不二) 딴뜨라로 나뉜다. 부계 딴뜨라는 붓다의 색신(色身)이 되는 환신(幻身, Skt. māyādeha, Tib. sgyu lus)을 강조하며, 모계 딴뜨라는 붓다의 법신(法身)이 되는 정광명(淨光明, Skt. prabhāsvaratā, Tib. 'od gsal)을 강조한다. 불이 딴뜨라는 부계 딴뜨라와 모계 딴뜨라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방편 부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비밀집회 딴뜨라(Guhyasamaja tantra)》와 《야만따까 딴뜨라(Yamantaka tantra)》[43]가 대표적이며, 반야 모 딴뜨라는 《헤바즈라 딴뜨라(Hevajra tantra)》[44], 《챠크라삼바라 딴뜨라(Chakrasamvara tantra)》 등이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불이 딴뜨라에 속하는 경전은 《깔라챠크라 딴뜨라(Kalachakra tantra)》가 대표적이다.

참고로 4부 딴뜨라 분류는 불교 4대 학파 분류와 무관하다. 4부의 분류 기준은 이미 상술하였고, 인도와 티베트에서 딴뜨라는 소승 학파가 아닌 대승의 유식학파 혹은 중관학파의 관점[45]에서 해석되었다.[46]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는 주로 4대 학파 중 최상위 견해라 여겨지는 귀류논증 중관의 관점에 의거하여 딴뜨라를 해석하고 수행한다. 본격적으로 금강승을 배우기 전 강원에서 4대 학파의 견해를 학습하며, 이 때 하위 학파의 견해를 바탕으로 상위 학파의 견해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교학적 위계에 따른 학습을 통해 최종적으로 귀류논증 중관학파에 대한 견해가 확립된다. 이러한 강원의 학습과정은 딴뜨라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는 예비적 성격도 있다. 즉, 4대 학파에 대한 교학적 이해와 그에 따른 수행이 어느 정도 완성된 후 비로소 4부 딴뜨라를 배우는 것이 정석적인 수행 과정이다. 금강승에서 공성에 대해 바라밀승만큼 자세히 논하지 않는다고 해서 금강승을 교학과 무관한 상징, 의례, 주술, 명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소승-(대승의) 바라밀승-(대승의) 금강승 순으로 심화ㆍ완성되어가는 인도-티베트 불교의 층차적 구조를 파악하지 못해 발생한 몰이해이다.

정화(淨化), 장애 제거, 복덕 축적 등을 목적으로 외적 제례를 강조하는 끄리야, 짜르야 딴뜨라 같은 하위 딴뜨라에서도 상위 딴뜨라와 마찬가지로 공성의 인식을 수행의 핵심 요소로 삼으며, 이 때 소승 학파처럼 오직 인무아(人無我)만 인정하는 방식으로 공성을 인식하는 경우는-가정이야 해볼 수 있겠지만-실질적으로 인도-티베트 불교 전통에서 찾아보기 어렵다.[47] 애초에 소승 학파는 딴뜨라를 포함한 대승 경전들을 불설(佛說)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승 경전을 불설로 인정하는 순간 자종(自宗)의 견해와 수행 체계가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딴뜨라에서의 공성이 인무아 뿐만 아니라 법무아(法無我)까지 포괄하는 대승 학파에서의 공성임은 공성 만뜨라(mantra)[48]-"옴 스와바와 슛다 사르와 다르마 스와바와 슛도 항(oṃ svabhāva-śuddhāḥ sarva-dharmāḥ svabhāva-śuddho 'ham)"-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위 딴뜨라나 상위 딴뜨라 공히 본존을 생기(生起)하기 전 공성을 인식할 때 공성 만뜨라를 염송하곤 하는데, 만뜨라 앞부분의 '스와바와 슛다 사르와 다르마'는 '일체법의 자성청정(自性淸淨)함, 공(空)함', 즉 법무아를 의미하며 '스와바와 슛도 항'은 '나의 자성청정함, 공함', 즉 인무아를 의미한다.

공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본존을 생기할 수 없다. 범부중생으로서의 신(身)ㆍ구(口)ㆍ의(意) 삼문(三門)이 실재한다는 분별을 여의고 본래 자성청정함/공함을 지각하는 바탕에서 본존을 생기해야 한다. 공성의 인식을 통해 범부라는 분별을 제거하였으므로 수행자 자신을 본존으로 생기하는 것이 가능하며, 따라서 이는 범부와 부처를 혼동하는 전도(顚倒)된 인식이 아니다. 물론 공성을 인식하는 수준에 따라 수행의 성취가 달라질 수는 있다. 공성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금강승 수행을 할 경우, 가피(加被)를 얻거나 신통(神通)이 생길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비(非)불교도의 수행과 크게 다를 바 없어지게 된다. 또한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소승학파에서 자립논증 중관학파까지의 하위 학파들은 공성에 대한 견해가 불완전하므로 역시 이들 하위 학파들의 견해에 따라 금강승 수행을 할 경우 완벽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물론 공성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취의 차이가 크다. 따라서 금강승 수행자는 본인의 역량껏 최선을 다해 보리심과 공성에 대해 배우고 사유하고 명상할 필요가 있다).

구역(舊譯, rnying ma) 전통에서는 현교와 밀교를 9개 승으로 구분한 독자적인 9부승(九部乘) 체계를 갖추었다. 9부승은 크게 외(外), 내(內), 밀(密) 삼승으로 구분된다. 외승(外乘)은 곧 경승(經乘, sutrayana)(=현교)에 해당하고 내승과 밀승은 속승(續乘, tantrayana)(=밀교)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외승(外乘)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킨다. 성문승, 연각승은 근본승이며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승(內乘)혹은 외전(外傳) 딴뜨라는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로 구성된다. 내승의 가르침은 브라만의 베다(Veda) 전통처럼 의례와 외적 청정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밀승(密乘) 혹은 내전(內傳) 딴뜨라는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띠 요가(ati yoga, 혹은 maha ati yoga)로 구성된다. 마하, 아누, 아띠 요가는 신역(新譯)의 무상유가부에 해당한다. 마하 요가는 생기차제, 아누 요가는 기맥명점 수행, 아띠 요가는 원만차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9부승의 최상위에 위치한 아띠 요가는 바로 닝마 고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인 족첸(rdzogs chen)이다. 밀승의 가르침은 모든 현상을 청정하고 평등한 진여(眞如)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방편들이다.

5.5. 밀교의 수행 요건[편집]


현교, 다시 말해 바라밀승은 부처의 과위를 이루는데 삼아승지겁이 걸리는 반면 밀승을 수행하면 단기간 내에 자량(資糧)[49]을 쌓아 짧게는 한 생에도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티벳망명정부 총리를 역임한 삼동(zam gdong) 린뽀체는 2018년 방한법회에서 현교와 밀교를 도보와 고속철도에 비유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도보보다 고속철도가 훨씬 빠르지만 둘 중 어떤 수단을 이용하더라도 거쳐가는 경로는 같다. 마찬가지로 밀교도 현교보다 짧은 기간에 성불할 수 있지만 중간 과정을 생략함 없이 거쳐 가는 과정은 동일하다.

밀교는 단기간에 성불할 수 있는 수승한 가르침이지만 아무나 밀교를 수행할 수는 없다. 밀교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 이미 현교의 수행차제를 두루 섭렵하여 근기가 성숙된 자여야 하며, 오직 불과(佛果)를 얻고 싶다는 의욕을 앞세우거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자만하여 밀교 수행에 접근하여서는 안 된다. 또한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을 염원하는 출리심, 다른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과 보리심이 투철하고 공성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어야 한다.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 사람들이 금강승(밀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차제(次弟)에 따른 수행과 보리심의 획득,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 금강승 수행을 하는 것은 외도(外道)의 수행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수행의 결과도 얻을 수 없다." 라고 강조하였다.

출팀 껠상(Tsultrim Kelsang) 오오타니대 교수와 마사키 아키라(正木 晃)는 출팀 깰상, 마사키 아키라,《티벳 밀교》(차상엽 譯)에서 밀교 수행 이전에 현교 수행을 마치는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겔룩의 경우 20여년 간의 현교 수행을 제대로 마친 사람만이 아무리 젊어도 30대에서 40대 정도에 밀교에 입문하게 된다. 현교가 결여된 밀교 만으로는 자칫 체험지상주의에 빠져 자신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시작하였을 때도 각지의 스승을 찾아다녔지만 모든 스승들이 저차원의 경지에만 도달해있었음에도 그것을 고차원의 경지라고 굳게 믿고 있어 석가모니를 낙담시켰다고 불전은 전하고 있다.

또한 밀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격을 갖춘 법맥스승으로부터 관정(灌頂, Skt. abhiṣeka, Wyl. dbang)구전(口傳, Skt. āgama, Wyl. lung), 구결(口訣, Skt. upadeśa, Wyl. khrid)을 받아야 한다. 관정은 왕이 즉위할 때 왕의 머리에 사해(四海)의 물을 부어주는 의식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의식을 통하여 밀교에 입문하려는 사람은 스승으로부터 밀교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또한 스승의 구전(口傳)을 통해 수행법을 전수받고, 수행법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인 구결 역시 함께 전수받는다. 밀교 수행을 성취하려면 현교에서 요구하는 수준보다 더욱 큰 스승에 대한 신심(信心)이 필요하다. 관정을 주는 스승을 본존의 현현으로 믿어야 하며 만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

관정(Abhiṣeka)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가관정(許可灌頂, jenang)이고 다른 하나는 관정(灌頂, dbang)이다. 허가관정은 말 그대로 본존에 대한 간략한 성취법이나 명상을 허가받는 관정이다. 일반적인 관정이 궁극적으로 본존의 과위를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허가관정은 본존의 공덕을 이어받아 단기간에 가피를 얻는 목적이 크다. 허가관정은 2~3일 간 열리는 관정에 비해 의식이 훨씬 간소하며 관정을 받고 지켜야 할 삼매야계와 수행 의무[50]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따라서 허가관정은 대중적으로 많이 전수되고, 한국에서 열리는 티베트 불교의 관정법회 대부분도 허가관정에 해당한다. 허가관정을 통해 밀법과 본존에 인연을 맺으며 보리심의 종자를 심고 단시간에 많은 죄업과 장애를 소멸할 수 있다. 또한 관정을 주는 아사리(阿闍梨, ācārya)[51]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

티베트에서는 라마들이 상대방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대어 가피를 주곤 하는데 이를 '손으로 주는 관정' 이라는 뜻의 착왕(phyag dbang)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마정수기(摩頂授記)[52]로 오인하여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티벳 린뽀체 초청법회를 '마정수기 법회'라고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誤導)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5.6. 밀교의 계율[편집]


금강승의 계율은 싸마야(samaya, 삼매야三昧耶)라고 부른다. 금강승의 수행에서 계율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관정은 먼저 계를 받고 이를 지킬 것을 맹세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싸마야계와 관련하여 까담 전승의 창시자 아띠샤(Atisha)는 "(아띠샤 본인의 삶 중에서) 비구계는 조금도 어김이 없이 지켰고 보살계는 간혹 지키지 못했지만, 싸마야계를 어긴 것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이 많다."고 말하였다. 아띠샤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금강승 수행자는 소승의 별해탈계, 대승의 보살계와 금강승의 싸마야계까지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 중 금강승의 싸마야계는 다른 계에 비해 매우 엄격하고 지키기 힘든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무상요가 딴뜨라의 싸마야계는 '14가지 근본 싸마야계'와 '18가지 부차 싸마야계'로 분류하는데, 이러한 싸마야계를 어기는 것은 금강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 부차 싸마야계를 어기는 것조차 비구계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 18배나 무거운 과보를 낳는다고 한다. 역으로 별다른 수행 없이 싸마야계만 잘 지켜도 18생 안에 지금강불의 과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전해진다. 그만큼 싸마야계의 의의가 크기 때문에 싸마야계를 받은 후에는 이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된다. 싸마야계의 14 근본타죄(根本墮罪)에는 금강승의 스승을 모욕함, 금강승의 가르침을 경시함, 함께 금강승을 수행하는 도반과의 불화, 보리심과 공성의 포기 등이 있다.

1. 금강상사(金剛上師)의 말씀을 위배해서는 안 되며, 상사를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2. 붓다의 가르침을 위배해서는 안 된다.

3. 금강사형제(金剛師兄弟)나 사자매(師姉妹)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4. 중생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5. 보살원행(원보리심, 행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

6. 소승ㆍ대승ㆍ금강승을 비방하지 말며, 열심히 학습해야 한다.

7. 밀법을 의심하는 중생에게는 금강승 밀법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된다.

8. 자신의 몸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 몸의 어떤 부분이라도 모두 중생을 깨우치는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 밀법에 대해 의혹의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10. 중생을 해쳐서는 안되며, 중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11. 밀법을 경시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12. 밀법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하지 않은 중생에게는 밀법을 가르쳐주어서는 안 된다.

13. 금강승 밀법을 수지하는 데 있어서 규정에 따라 법기(法器)를 사용하고 공양을 실행하여야 한다.

14. 여성 혹은 지능이 낮은 중생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14 근본 싸마야계》


6. 수행 체계(람림/보리도차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수행 체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강원의 교육과정[편집]



7.1. 개요[편집]



인도 다람살라의 IBD(Institute of Buddhist Dialectics)에서 강의를 듣는 승려들의 모습

티베트 불교의 최대종파인 겔룩은 다른 종파보다 교학을 강조하여 전체 강원 교육과정을 수학하는 데 20여 년 정도 걸린다. 현대교육제도의 초등과정부터 대학원과정까지에 해당하는 기간을 불교 교육에 투자한다고 볼 수 있다. 겔룩 외의 타 종파는 보통 9~10년 이상의 강원 과정을 거친다.

광성사 주지 게쉬 소남 걀첸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겔룩의 3대 사찰인 데뿡 사원의 로셀링 강원에는 1학년부터 19학년까지 교육과정이 존재한다. 주로 《인명학(因明學)》, 《반야학(般若學)》, 《중관학(中觀學)》, 《율(律)》, 《구사론(俱舍論)》 등 5대 경전을 배우는 교육방법을 체계적으로 잘 갖추었다고 한다. 5대 경전을 주로 배우는 점은 겔룩 뿐 아니라 다른 종파에서도 동일하다.[53]
소남 걀첸 스님, 《티베트의 큰 강원에서 5대경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방법》

강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먼저 예비과정에 들어간다. 맨 처음 출가 서원을 하며 삭발과 승복을 입고 승려로서 사원에 들어간다. 한국 불교의 행자나 원불교의 간사 과정과 비슷하며, 이때 승가의 규율과 의식, 글과 기도문 암송 등을 배우고, 사원 곳곳에서 운력(運力)을 하면서 사원 생활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모든 승려들이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박사학위 격인 게쉬나 켄뽀 자격을 얻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 외 승려들은 의식이나 행정 등 사원 운영에 필요한 각자의 업무에 종사한다.


7.2. 5대 경전의 학습방법과 핵심[편집]


5대경을 배울 때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무조건 경전을 외워야 한다.
둘째, 경을 보지 않고 외우는 연습을 자주 해야 한다.
셋째, 뜻을 알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넷째, 경전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자주 보아야 한다.
다섯째, 여러 차례 토론을 통해 경의 내용을 깊이 새겨야 한다.

5대경을 포함한 불교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根) - 기본 바탕인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성제
도(道) - 방편의 보리심과 반야의 지혜 두 가지 방법
과(果) - 법신과 색신의 두 가지 과위(果位)

다시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근(根) 즉 기본이 되는 사성제, 진속이제 등 존재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도(道) 즉 수행은 앞서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에 맞는 오도(五道)와 십지(十地) 등 방편과 지혜의 수행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果) 즉 결과는 존재론과 수행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과 맞는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과위(果位) 즉 법신(法身), 화신(化身), 보신(報身) 등 부처의 신구의(身口意)의 공덕을 말하고 있다.


7.3. 문사수(聞思修)의 체계[편집]


먼저 들음에서 생긴 지혜(문소성혜聞所成慧)를 일으켜야 한다. 그것으로 경전의 가르침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고, 그 다음 사유함에서 생긴 지혜(사소성혜思所成慧)로 요의와 불요의를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 다음, 그것에 의해 상세하게 구별된 의미에 의지하여 오로지 진실한 의미를 수습(修習)해야 한다. 진실하지 않은 것을 수습하면 안된다.

진실하지 않은 것을 수습하게 되면 전도(顚倒)되게 수습하고 의심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청정한 지혜도 생겨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습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어, 마치 외도들이 수습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까말라쉴라, 《수습차제》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티베트 불교는 공부 따로 수행 따로 없이 배움 그 자체를 수행으로 생각하고, 문사수(聞思修, Skt. śruta cintā bhāvanā; Tib. ཐོས་བསམ་སྒོམ་གསུམ་, tö sam gom sum, Wyl.thos bsam sgom gsum)를 통해 경전을 공부한다.

문(聞), 즉 배움으로써 경전의 뜻을 타력(他力)으로 대충 이해하게 만든다.
사(思), 즉 깊게 생각함으로써 경전의 뜻을 자력(自力)으로 확실하게 확신이 생기게 한다.
수(修), 즉 닦음으로써 경전의 뜻을 깊게 마음에 익히게 한다.

문(聞), 즉 배움이 부족하면 문혜(聞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고, 문혜(聞慧)가 부족하면 사(思), 즉 관찰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으며, 사(思)가 부족하면 사혜(思慧)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聞), 문혜(聞慧), 사(思), 사혜(思慧)의 바탕이 없으면 수(修), 즉 도(道) 닦는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에 무엇보다 제일 먼저 경전을 잘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티베트 강원의 스승들이 늘 강조한다.

이와 같이 티베트 큰 강원에서는 문사수(聞思修)의 과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 5대 경전 등 불경과 논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먼저 현교(顯敎)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얻게하며 마음에 깊게 익히도록 하고난 뒤 밀교(密敎)의 깊은 수행법을 배우고 실천 수행한다.


7.4. 기초 과정[편집]


제일 먼저 《듀라(섭류학攝類學)》를 배운다. 《듀라》는 인명학(因明學)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은 논리 이론을 최초로 배우는 과목으로, 티벳의 스승이신 차빠 최끼 생게가 경량부의 이론 방식을 접목하여 량(量)의 전반적인 의미를 요약하여 ‘듀라’라고 정하였다. <듀라>는 소논리, 중논리, 대논리 세 가지로 나뉘며, 근(根), 도(道), 과(果) 세 가지 중 주로 근, 즉 존재론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두 번째, 《로릭(심류학心類學)》을 배운다. 구체적인 심리학이 아닌 일반적인 마음의 종류, 가령 현량(現量), 비량(比量), 분별심(分別心), 비분별심(非分別心), 육식(六識), 심왕(心王), 심소(心所) 등을 설명한다. 또는 7종심식(七種心識) 즉 현량식(現量識), 비량식(比量識), 재결식(再決識), 사찰식(伺察識), 현이미정식(顯而未定識), 의심(疑心), 전도식(顚倒識) 등을 가르친다.

세 번째, 《딱릭(인류학因類學)》을 배운다. 진인(眞因)은 과인(果因), 자성인(自性因), 불가득인(不可得因) 세 가지로 나뉘며, 사인(似因) 또한 상위인(相違因), 부정인(不定因), 불성인(不成因) 세 가지로 나뉜다.

네 번째, 《둡타(종의宗義)》를 배운다. 종의는 학파, 교파라고도 부른다. 외도나 불교도의 견해에 따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철학적 바탕(根), 수행방식(道), 그 결과(果) 셋에 대한 교리적 설명 방식 등을 말한다. 간략하게 고대 인도의 외도 5개 파(派)인 논의오파(論議五派; 수론파數論派, 순세파順世派, 승론파勝論派, 폐타파吠陀派, 리계파離繫派)와 불교도의 4대 학파인 유부(有部), 경량부(經量部), 유식학파(唯識學派), 중관학파(中觀學派)로 나눈다.

다섯 번째, 《살람(지도地道)》을 배운다. 보살의 십지(十地)[54]와 오도(五道)[55], 그리고 성문도, 연각도, 보살도에 대해 배운다.

이상의 과정을 배우는 데 대략 4년 정도 걸린다.

7.5. 5대 경전 과정[편집]


여섯 번째, 《석량론(釋量論)》을 배운다. 석량품(釋量品) 또는 광본양학(廣本量學)이라고도 하며, 고대 인도의 법칭(法稱)보살이 지었다. 이 논서는 자리(自利), 양성립(量成立), 현전(現前)과 타리(他利) 등 4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명칠론(因明七論) 중에서 세 근본이 되는 논서이다. 《둡타(종의宗義)》를 배우고 난 뒤 대략 10년 이상 해마다 겨울철 한 달씩 스님들이 한 절에 모여 집중적으로 배우기도 한다.

일곱 번째, 《반야현관장엄론(般若現觀莊嚴論)》을 7년 동안 배운다. 미륵오론인 《현관장엄론》, 《대승장엄론》, 《중변분별론》, 《법법성분별론》, 《구경일승보성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일체종지, 도지, 일체지, 일체오등현관, 정현관, 차제현관, 찰나오등현관과 법신 등 8가지로 보살도의 모든 수행과 부처님의 경지인 과위(果位)에 대해 설명한 미륵보살이 지은 논서이다.

여덟 번째, 《입중론(入中論)》을 3년 동안 배운다. 용수보살이 지은 《중론(中論)》의 논서인 《입중론》은 월칭보살(짠드라끼르띠)이 저술하였고, 10품으로 나뉜다. 주로 중관사상 즉 공성(空性)과 연기(緣起)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아홉 번째, 《율경근본율(律經根本律)》을 4년 동안 배운다. 인도의 율사 공덕광보살이 4부 율전의 내용을 해석한 것이다. 주로 계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17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열 번째, 《구사론(俱舍論)》을 2년 동안 배운다. 《아비달마 구사론본송》이라고도 하며, 인도의 세친보살이 저술한 소승의 논서로 본문은 게송체이고 8품으로 나뉜다. 당나라 삼장 현장법사가 범어를 한문으로 역경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교(顯敎)에 대해 기초과정 포함하여 거의 20년 정도 체계적으로 배운다.


7.6. 강원 과정 이후[편집]


5대 경전 등 불경과 논서들을 체계적으로 배움으로써 먼저 현교(顯敎)에 대한 이해와 확신을 얻게 하며 마음에 깊게 익히도록 한다.

강원의 전체 교육과정을 수료한 후에는 겔룩의 경우 불교철학박사에 해당되는 게쉬(ge she), 나머지 종파에서는 불교 강백(講伯)에 해당하는 켄뽀(khen po)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 필기 시험(디규), 대론(對論) 시험(쬐규) 등을 거쳐 칭호를 받는데, 겔룩에서 남자 수행자는 게쉬(Geshe), 여자 수행자는 게쉬마(Geshema) 칭호를 받는다. 타 종파의 경우 남자 수행자는 켄뽀(Khenpo), 여자 수행자는 켄모(Khenmo)란 칭호를 받는다. 게쉬에도 시험 성적에 따라 아래서부터 도람빠(Dorampa,) 링세(Lingtse), 촉람빠(Tsorampa), 하람빠(Lharampa)의 네 단계가 있다. 게쉬 학위를 얻기 위해선 약 23년, 켄뽀 자격을 얻기 위해선 약 13년이 걸린다. 그 후 밀교의 깊은 수행법을 기간 없이 평생 배우고 실천한다.

겔룩에서는 게쉬 학위를 취득한 후 규뙤 사원이나 규메 사원으로 대표되는 밀교 사원에 들어가 밀교 교학을 배운다. 밀교 공부와 수행은 평생 배우고 닦는다는 개념이고, 밀교 수행은 스승의 허락과 자격을 얻어야만 행할 수 있으므로, 견고한 현교의 철학적 토대를 갖춘 준비된 사람만이 밀교 수행에 들어갈 수 있다.

티베트에서는 교학이 갖춰지지 않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것을 '마치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바위산을 기어오르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수행자는 산의 정상을 오를 수 있는 정확한 지도가 있어야 하고, 산을 오르다가 맞닥트릴 수 있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철저한 교학의 토대가 필요한 이유이다. 교학을 철저하게 배우고 닦는 과정에서 이미 수행의 반은 완성된다.

8. 종파[편집]



8.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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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전(全) 티베트 불교 전승 회의 당시 사진.[56]

티베트 불교는 크게 닝마(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싸꺄(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까규(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 전승의"), 겔룩(དགེ་ལུགས་, Wyl. dge lugs, "위대한") 등 4개 종파로 나뉜다.

티베트불교의 종파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구파(舊派, nyingma)와 신파(新派, sarma)이다. 닝마(rNy-ing ma)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구파(舊派) 또는 고파(古派)로 번역되는데, 티베트의 모든 불교 종파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이보다 후에 일어난 사캬, 까규, 겔룩, 조낭 등 모든 티베트의 종파들은 신파(新派)에 속한다.

구파와 신파를 나누는 기준은 경전의 번역이다. 티베트에 인도불교가 도입되던 7~8세기에 티베트의 법왕들이 후원하여 이루어진 번역을 구역(舊譯), 10~11세기 지방 귀족 세력이 지원하여 이루어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 한다. 특히 현교보다는 주로 밀교 전승의 번역과 전래에 따라 구파와 신파로 구분된다.

종파
주요 수장
경전의 번역
닝마(རྙིང་མ་, Wyl. rNying ma '오래된')
전통적으로 없음
구파(舊派, Nyingma)
싸꺄(ས་སྐྱ་, Wylie: Sa skya, '하얀 땅')

사캬 티진
신파(新派, Sarma)
까규(བཀའ་བརྒྱུད།, Wylie: bKa' brgyud '구전전승의')
까르마빠
겔룩(དགེ་ལུགས་, Wyl. dGe lugs '위대한')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

전래 시기에 따른 분류 외에도 사캬, 디룽, 딱룽, 게덴 등 지역에 따른 분류, 까르마 까규, 불룩 등 스승에 따른 분류, 까담, 족첸, 착첸, 시제 등 수행 전승에 따른 분류 등으로도 종파를 구분할 수 있다.

종파 간에 정치적 대립이 빈번하였지만 각 종파의 고승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고, 다른 종파의 학승이 자기 종파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종파 간의 경쟁적 발전과 더불어 상호 이해와 존중이 이루어지고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이종복, 《종파로 보는 티베트 불교》

아래 각 종파별 소개는 티베트 불교 4대 종파를 일컫는 축약어인 "싸게까닝(sa dge bka' rnying)"의 순서대로 편집했다.

8.2. 사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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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캬의 다섯 개조(開祖)들(sa skya gong ma rnam lnga)[57]

사캬는 까규와 마찬가지로 나로빠의 가르침에 그 기원을 두고 또한 독미 로짜와(Drokmi Lotsawa)라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출발했지만, 까규와 다른 특징들이 있다. 사캬는 쾬(Khon) 일족 자체가 종파가 된 독특한 경우이다. 회색 땅을 뜻하는 사캬(Sa skya) 지방의 일족인 쾬 일족의 쾬 꾄촉겔뽀(Khon dkon mtshog rgyal po)를 종조로 하는 사캬 역시 밀교 전통에 근거한다. 사첸 꾄촉겔뽀는 인도에서 요기 나로빠와 밀교승원인 비끄라마쉴라(Vikramaśīla)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독미 로짜와로부터 헤바즈라 딴뜨라에 근거한 람데(lam ’bras) 전통을 배운다. 수행의 길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밀교에 바탕을 두고 논하는 람데 전통은 사캬의 핵을 이루는 중심 교리이다.

람데 전승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승(經乘, sutrayana)을 설명하는 부분은 삼현분(三現分, snang gsum)이라고 한다. 삼현분은 세 종류의 단계별 인식을 뜻한다. 첫 번째 단계의 인식은 청정하지 못한 인식으로 곧 세속 중생의 인식이다. 두 번째는 경험의 인식, 즉 실상(實相)을 통찰하는 수행자들이 경험하는 혼재된 인식이다. 마지막은 청정한 인식으로 일체지를 이룬 완전히 깨달은 스승이나 부처의 인식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속승(續乘, tantrayana)을 설명하는 부분은 헤바즈라 딴뜨라를 구성하는 삼속분(三續分, rgyud gsum)이라고 한다. 삼속분은 존재론인 기속(基續), 수행론인 도속(道續), 결과론인 과속(果續)으로 이루어져 있다.

람데 전승은 후에 뮈첸 쾬촉 걀첸(mus chen dkon mchog rgyal mtshan)에 의해 두 가지 주요한 전승으로 나뉜다. 그는 소수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더욱 심오하고 경험에 근거한 가르침을 전수하였고, 이를 람데 롭셰(lam 'bras slob bshad)라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중들을 위한 보다 보편적인 가르침은 람데 촉셰(lam 'bras tshogs bshad)라고 한다.

사캬의 다른 특징으로는 불교 논리와 중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이다. 후술할 겔룩과 함께 교학을 중시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사캬는 티베트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고, 몽골의 불교 전통을 만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캬의 지도자였던 사캬 빤디따(sa skya pandita)는 티베트를 침공한 고단 칸(Godan Khan)과 회동을 갖고 시주(施主)-화주(化主) 관계인 최왼(mchod yon) 관계를 맺어 평화적으로 티베트의 자치를 보장받았다. 또한 사캬 빤디따의 조카인 도괸 최걀 팍빠(ʼgro mgon chos rgyal ʼphags pa) 역시 쿠빌라이 칸과 최왼 관계를 맺고 원나라 국사로서 원나라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며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8.3. 겔룩[편집]


파일:Lama-Tsong-Khapa-nice-art.jpg
겔룩의 개조(開祖) 쫑카빠[58]

겔룩의 종조 쫑카빠 롭상닥빠(Tshong kha pa bLo bzang grags pa)는 14세기 동북 티베트 암도의 쫑카 지방에서 태어나서 까르마 까규 및 여러 종파에서 공부했는데, 특히 사캬의 렌다와 쇤누로도(Red mda' ba gzhon nu blo gros)를 주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까담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의 주석서인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을 비롯한 많은 주석서 및 저서들은 그 당시까지의 철학과 수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면서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로 까담의 전통은 점차로 겔룩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쫑카빠의 개혁을 통해 겔룩은 여러 승려와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화주(化主)가 되고 몽골, 오이라트, 청(淸) 왕조 등이 시주(施主)가 되는 최왼(mchod yon) 관계를 맺어 통치계급과도 폭넓은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제5대 달라이 라마가 오이라트 중 코슈트부의 군사를 빌려 티베트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겔룩은 정교합일(政敎合一) 체제를 구축하고 티베트 불교 내의 최대 종파로 부상하여 현재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초대 달라이 라마는 쫑카빠의 제자 겐둔 둡빠(dGe 'dun grub pa)이다. 그러나 겐둔 둡빠는 생전에 달라이 라마라고 불리운 적이 없다. 제3대 달라이 라마 때 이르러 몽골의 알탄 칸에게 '일체를 성스럽게 아시는 바즈라다라 달라이 라마'라는 존칭을 부여받고, 전전대 전생인 겐둔 둡빠까지 소급하여 달라이 라마란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제3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한 후 알탄 칸의 증손자 중 한 명이 환생자로 지목되어 제4대 달라이 라마에 등극하게 된다. 따라서 제4대 달라이 라마는 몽골인으로, 유일한 비(非)티베트인 출신 달라이 라마이다.

달라이 라마가 받은 존칭 중 '바즈라다라(Vajradhara)', 즉 집금강(執金剛)은 밀교의 이상적인 부처인 지금강불(持金剛佛)을 지칭하거나 혹은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스승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쓰인다. '달라이(Dalai)'는 몽골어로 '큰 바다(大洋)'라는 뜻이고 '라마(Lama)'는 티벳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초대 달라이 라마를 제외하고 달라이 라마로 선정되면 모두 '바다'라는 뜻의 '갸초(rgya mtsho)'가 들어간 법명(法名)을 얻게 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법명인 '뗀진 갸초(bstan ‘dzin rgya mtsho)'의 '뗀진'은 '가르침(佛法)의 소유자'란 뜻이다. 즉 '뗀진 갸초'란 법명은 '불법의 바다'를 뜻한다.

공식적인 겔룩의 종정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라 겔룩의 본산인 간덴 (dGa' ldan)사원의 사원장 간덴 티빠(dGa' ldan khri pa)이다. 간덴 티빠는 간덴 사원 안의 싸르쩨(Shartse)와 장체(Jangtse) 두 학당의 방장(方丈)이 번갈아 가며 맡게 되는데 임기는 전통적으로 7년이다. 환생자 제도로 선정되지 않고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과 학식, 덕망, 승가 내 경력 등으로 선정되는 직위이다. 때문에 티베트의 속담에 "만약 어머니의 자식에게 합당한 자격이 있다면, 간덴의 법좌는 그에게 열려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8.4. 까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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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빠 까규의 개조(開祖) 마르빠[59]


제17대 까르마빠 오겐 틴레 도제의 까규 법맥 소개

까규란 '구전의 전통(口傳傳統)'이라는 뜻이다. 11세기 인도의 밀교 요기 띨로빠(Tilopa)를 시조로 삼는다. 띨로빠는 나로빠(Nāropā)를 가르쳤다. 티베트인 역경사 마르빠 로짜와[60](Marpa lotsawa)는 역경사 독미 로짜와 샤꺄예쉐(Drokmi Śākya Yeshé)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서 나로빠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마르빠의 가르침인 마하무드라(mahāmudrā)는 이후 밀라레빠(Mi la ras pa)를 거쳐 까규로 성립되었다.

까규는 명상, 구루 요가, 나로 6법과 같은 금강승 수행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까규와 닝마는 모두 실수행을 중시하지만, 까규는 닝마와 달리 명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견해를 익히고 체험해나가는 방식을 따른다.

마르빠에게서 유래한 마르빠 까규는 4대 8소 종파로 나뉘어진다. 마르빠 까규의 초기 4대 종파는 까르마 까규(Karma bka' brgyud), 바롬 까규('Ba' rom bka' brgyud), 찰빠 까규(Tsalpa Kagyü), 팍두 까규(Pagdru Kagyü)이다.

이 중 팍두 까규는 다시 8개의 분파로 갈라져 둑빠 까규(‘Brug pa bka' brgyud), 디꿍 까규('Bri gung bka' brgyud), 딱룽 까규(sTag lung bka' brgyud), 마르창 까규(Martsang Kagyü), 슝셉 까규(Shugseb Kagyü), 트로푸 까규(Trophu Kagyü), 얌장 까규(Yamzang Kagyü), 옐빠 까규(Yelpa Kagyü)를 이룬다.

4대8소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종파는 까르마, 바롬, 둑빠, 디꿍, 딱룽 5개 종파들이다. 까루 린뽀체가 속한 상빠 까규(Shangs pa bka' brgyud)는 마르빠 까규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법맥이지만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르빠 까규의 창시자인 마르빠는 인도의 마이뜨리빠(mai tri pa)와 마이뜨리빠의 스승인 나로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샹빠까규의 창시자인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은 마이뜨리빠와 니구마(ni gu ma) 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니구마는 나로빠의 여자 형제 또는 배우자라고 전해진다. 이렇듯 창시자들의 스승이 서로 겹치거나 연관이 있으며, 후대에 이르기까지 두 법맥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8.5. 닝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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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의 개조(開祖) 빠드마삼바와[61]

닝마(Nyingma)는 '오래된'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티베트 불교 중 가장 먼저 생긴 종파이다. 8세기 티송데쩬 왕은 당시 네팔에 머물고 있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승원장 샨따락쉬따(Śāntarakṣita)를 초청하면서 밀교 성취자인 빠드마삼바와(Padmasambhava)를 대동했다. 빠드마삼바와는 밀교행을 통해 티베트의 토속 종교인 뵌교의 신도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토속신들을 제압하여 불교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이에 샨따락쉬따는 왕실의 후원 하에 쌈예사(bSam yas dgon pa)를 건립하고 티베트의 첫 승단을 만들었다. 닝마는 이때 샨따락쉬따가 대동했던 밀교 성취자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가르침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닝마는 까규와 함께 명상 등의 수행을 중시하는 종파로 알려져 있다. 수행을 중시하는 점은 두 종파 모두 동일하지만, 닝마는 까규와 달리 명상보다 견해를 좀 더 강조한다. 스승으로부터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Skt. upadeśa; Tib. མན་ངག་, mengak, Wyl. man ngag, pith instruction)을 먼저 전수받은 후, 그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명상하는 방식이다.

닝마의 전승으로는 석가모니로부터 내려오는 전승인 까마(kama)와 빠드마삼바와와 그의 제자들이 비장(秘藏)하고 시절인연에 따라 발견되는 전승인 뗄마(terma)[62]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닝마는 현교와 밀교를 9개 승으로 구분한 독자적인 9부승(九部乘) 체계를 갖추었다.

9부승은 크게 외(外), 내(內), 밀(密) 삼승으로 구분된다. 외승(外乘)은 곧 경승(經乘, sutrayana)에 해당하고 내승과 밀승은 속승(續乘, tantrayana)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 외승(外乘)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가리킨다. 성문승, 연각승은 근본승이며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승(內乘)혹은 외전(外傳) 딴뜨라는 사부(所作部 혹은 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로 구성된다. 내승의 가르침은 브라만의 베다(Veda) 전통처럼 의례와 외적 청정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밀승(密乘) 혹은 내전(內傳) 딴뜨라는 마하 요가(maha yoga), 아누 요가(anu yoga), 아띠 요가(ati yoga, 혹은 maha ati yoga)로 구성된다. 마하, 아누, 아띠 요가는 신역(新譯)의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에 해당한다. 마하 요가는 생기차제, 아누 요가는 기맥명점 수행, 아띠 요가는 원만차제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9부승의 최상위에 위치한 아띠 요가는 바로 닝마 고유의 가장 심오한 가르침인 족첸(rdzogs chen)이다. 밀승의 가르침은 모든 현상을 청정하고 평등한 진여(眞如)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방편들이다.

8.6. 조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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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낭의 중흥조(重興祖) 될뽀빠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번성한 조낭은 쿤팡 툭제 쇤두(Kunpang Thukje Tsondru)가 1294년 조낭 사원을 건립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전 11세기 깔라차끄라 딴뜨라 전문 수행가였던 유모 미꾜돌제(Yu mo mi bskyod rdo rje)는 조낭에 큰 영향을 준 조상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유모 미꾜돌제는 카쉬미르의 빤디따 찬드라나타(Candranātha)에게서 사사했다. 후캄(Hookham)에 의하면 타공의 이해는 유모 미꾜돌제가 카일라쉬산에서 깔라짜끄라 딴뜨라를 수행하는 도중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사캬에서 계를 받았던 될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 대에 이르러 조낭은 융성했다.

조낭은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 일체지, 천연의 의식,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이후 조낭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정치적ㆍ사상적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졌고 몽골과 암도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한다.[63]

될뽀빠는 삼전법륜(三轉法輪)에 해당하는 《보성론》의 여래장 사상을 요의(了義)로 보았다. 《보성론》에 따르면 속제의 현상들은 공(空)하지만 진제에서의 공성과 함께 나타나는 비이원적(非二元的)인 불지(佛智), 광명심(光明心), 부처의 공덕 등은 공하지 않다. 이러한 견해를 기존의 중관(Madhyamaka)에 대비하여 '대중관(大中觀, Mahamadhyamaka)'이라고 명명하였다.[64]

유식학파의 삼성설(三性說)과 제팔식설(第八識說)에 영향을 받은 점 때문에 학계에서는 타공설의 등장을 티베트 불교에서의 유식학파의 흐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대중관'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될뽀빠를 비롯한 타공론자(gzhan stong pa)들은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중관 논사라고 생각했고,[65] 타공설과 유식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편 겔룩 위주의 종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19세기 리메(Rimé, 無山, 무종파) 운동에 참여했던 사캬, 닝마, 까규 등 비주류 종파의 스승들도 타공설의 영향을 받아 타공, 혹은 타공과 자공(自空, rang stong) 사이의 절충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각 파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은 현교의 교학적 견해가 분화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안성두, 《티베트 불교에서의 여래장 해석 -자공설(自空說)과 타공설(他空說)의 차이를 중심으로-》
차상엽, 《연기와 공성 그리고 여래장에 대한 티벳 사상가들의 이해》
Susan K. Hookham, 《The Buddha Within: Tathagatagarbha Doctrine According to the Shentong Interpretation of the Ratnagotravibhaga》
Karl Brunnhölzl, 《In Praise of Dharmadhatu》
Karl Brunnhölzl, 《Luminous Heart: The Third Karmapa on Consciousness, Wisdom, and Buddha Nature》

티베트의 중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겔룩의 자공과 조낭의 타공을 양 축으로 삼은 사상적 스펙트럼 안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현교의 자공, 타공 사상과 밀교의 족첸, 마하무드라, 칼라차크라 등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별개의 전승들이므로 각각을 연계하여 해석하는 방식은 해석 주체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실 티베트 불교는 "라마 한 분 한 분이 각각의 종파이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 다양성이 두드러지며 전해지는 문헌의 양 역시 방대하여 학계에서도 아직 그 전모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티베트의 사조 계보는 우선 4대 종파 등으로 대별된 후 다시 시대별, 계파별, 인물별로 세분화되고 더 나아가 동일 인물의 경우에도 저작이나 생애 시기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다. 사상적으로 가장 대비된다고 알려진 두 종파인 겔룩과 조낭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 종파 내부에서도 견해 차가 없지 않다. 또한 개중에는 특정 견해에 천착하지 않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타공을 주창한 될뽀빠는 명상 중에 자공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개념의 제거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자공'이나 '타공'같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전승과 인물마다 각기 해석을 달리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에서는 "'흰 타공'과 '검은 타공'이 있다"는 식으로 여러 타공견(他空見)들 중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구분하곤 한다.[66]

조낭의 타공과 달리 까르마 까규, 닝마 등 다른 종파의 타공은 자공에 가까운 '완화된 타공'에 해당한다. 예컨대 조낭은 여래장을 삼세(三世), 즉 시공간에 종속되지 않는 궁극적이고 불변하는 독립된 실체(rtag dngos)라고 주장하였지만, 까르마 까규는 유식에서의 의타기(依他起)의 청정분(淸淨分)과 여래장을 결합하여 부정(negation)의 토대인 '조건지어지지 않은 빛나는 마음'을 (외부의 원인과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전 순간의 동류(同類)의 마음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규정함으로써 연기(緣起)와 분리하지 않았고 시공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했다. 다만 "물과 우유가 서로 섞이지 않는" 비유처럼,[67] 불성 혹은 정광명은 객진번뇌에 오염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조낭의 타공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빛나는 마음(prabhāsvaraṃ cittaṃ)은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나는 마음에서는 아무 것도 원인과 조건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순간의 빛나는 마음의 발생은 마음의 같은 종류(sajāti)에 의해 발생한 이전 순간의 마음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Sajjana,《Mahāyānottaratantraśāstropadeśa》

Klaus-Dieter Mathes, 《The Other Emptiness: Rethinking the Zhentong Buddhist Discourse in Tibet》〈Zhentong Views in the Karma Kagyu Order〉

절충적인 견해 중에는 자공설(自空說)로 분류되는 견해도 있다. 가령 미팜(Mipham)의 경우, 겔룩의 자공설처럼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인식'이나 '밝음' 등 진여(眞如)의 현상적인 측면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현상의 실체화, 개념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미팜의 견해는 타공설과도 구분된다. 김성옥, 《『법법성분별론』에 대한 미팜(Mi Pham) 주석의 특징》

미팜의 학맥을 계승한 닝마의 학승 뵈뛸(Bötrül Dongak Tenpe Nyima)은 티베트의 중관사상을 크게 (1) 조낭의 타공, (2) 겔룩의 제실공(諦實空, bden stong), (3) 닝마의 자공으로 구분하였다. 각각의 주요한 차이는 '부정 대상(dgag bya)'에서 드러난다. 조낭의 타공은 (1) 속제(俗諦)에 해당하는 현상의 자성(自性), 겔룩의 제실공은 (2) 일체법이 진실로 존재함, 닝마의 자공은 (3) 일체의 개념적 언급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이제(二諦)에 대한 설명도 조낭의 (1) '진제와 속제가 하나임을 부정함(gcig pa bkag pa)', 겔룩의 자립논증 중관의 관점[68]에서 (2) '진제와 속제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의식의 분별(이름, 생각 등)로는 각기 다른 두 가립(假立)된 법(法)임(ngo bo gcig la ldog pa tha dad)', 닝마의 귀류논증 중관의 관점에서 (3) '진제와 속제가 하나도 아니고 다수도 아님(gcig du bral)'으로 달라진다.

요컨대 각 파의 견해는 중관으로 대변되는 이전법륜과 유식, 여래장으로 대변되는 삼전법륜 중 어느 사상을 우위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겔룩은 이전법륜인 중관 사상, 조낭은 삼전법륜인 여래장 사상을 각각 요의(了義)로 보았고 닝마는 둘의 양립(兩立) 혹은 합일(合一)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미팜은 현상을 경시하고 공성만을 추구할 경우 자칫 단견(斷見)에 치우칠 수 있기 때문에 중관과 유식, 여래장의 결합을 통해 공성과 현상의 쌍입(雙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9][70]
Bötrül, 《Distinguishing the Views and Philosophies:Illuminating Emptiness in a Twentieth-Century Tibetan Buddhist Classic》

초(超)종파적인 성향이 강한 제14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서야 조낭은 티베트 불교의 정식 종파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티베트 내에서 조낭은 이단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세력 또한 미약하므로, 조낭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조낭보다는 오히려 불교와 거의 차이가 없어진 뵌교를 추가하여 사캬, 겔룩, 까규, 닝마와 함께 뵌교를 '티베트의 5대 종파'에 배속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분류이다. 뵌교의 경우 교학적 견해나 강원 제도는 겔룩과 유사하며, 그와 더불어 닝마의 족첸과 유사한 뵌교의 족첸 전승을 갖고 있다.[71]

비록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조낭을 정식 종파로 포용하였지만, 그와 별개로 달라이 라마 본인은 반야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보는 겔룩의 전통적 견해에 따라 조낭의 타공을 부정하고, 일체법이 승의적(勝義的)인 차원에서 독자적 실체가 없이 공(空)하다는 자공을 견지한다. 자공론자(rang stong pa)[72]들은 불성, 여래장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조낭의 주장이 힌두의 아뜨만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붓다는 영혼이나 불변하는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결코 가르친 바 없으며, 불성, 여래장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미료의(未了義)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조낭은 미료의를 요의(了義)로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공론자에게 있어 불성, 여래장은 마음의 법성(法性)으로서 진제로는 공성(空性), 속제로는 광명(光明)으로 장차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겔룩의 불성, 여래장 정의를 보면 알 수 있듯, 겔룩 또한 다른 종파처럼 마음/의식의 법성이 밝음과 인지라는 점에 동의한다. 한편 법성, 즉 존재의 고유한 성질에도 승의제와 세속제의 구분이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밝음과 인지는 마음/의식의 현상적 특성으로서 세속제에 해당한다. 승의로서는 마음의 밝음, 인지 또한 자성이 공하다. 마치 뜨거움이 불의 고유한 성질이지만 불의 뜨거움 역시 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것과 같다. 이처럼 마음/의식의 법성을 설명할 때 승의제인 마음의 공성과 세속제인 마음의 밝음, 인지 등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겔룩의 교학적 특징이다. 《반야경》에서 공성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정의하듯이, 쫑카파는 공성이 단지 부정해야 할 대상의 부정일 뿐 그 외 어떠한 정립적 함의도 내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18세기의 예수회 수사로 티베트에 와서, 5년 동안 보리도차제에 따라 티베트 불교를 공부했던 이폴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는 겔룩빠와의 대론에서 바로크 스콜라 철학의 견해에 입각한 제1원인론을 주장했다. 겔룩빠 승려들은 데시데리의 주장을 될뽀빠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9. 환생자 제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환생자 제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한국과의 교류[편집]



10.1. 인적ㆍ사상적 교류[편집]


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류는 통일신라부터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티베트 불교를 숭앙하던 몽골의 침략 이후 고려 불교에 일정 부분 영향을 준 바 있다.

1. 통일신라시대

  • 신라승 김무상(金無相, 684-762)과 티베트 사신 바상시가 만난 일화는 삼예사(寺)의 사지(寺誌)에 해당하는 《바세》에 기록되었다. 《바세》에 따르면 김무상은 경덕왕 13년(754) 당나라 장안에서 티베트 사신들을 만나 "인도불교가 티베트에서 주류를 이룰 터인데, 훗날 티송데첸 왕이 등장하여 불교를 널리 홍포하리라"라고 예언하였다.
    또한 김화상은 사신들에게 《십선경》, 《금강능단경》, 《도간경》을 전해주면서 왕의 즉위시에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훗날 김무상의 예언은 적중하여 샨타락쉬타가 인도에서 들어와서 티베트에 불법을 홍포했고, 티송데첸 왕이 즉위할 때에는 사신들이 전수받은 세 종류 경전을 독송하여 신심을 일으켰다.
    김무상의 법호와 법명은 정중무상(淨衆無相)으로 주로 사천(四川) 지방에서 활동했고 말년에 정중사(淨衆寺)에 주석(主席)했다. 그는 중국 선종 동산법문(東山法門)의 분파인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중국 선불교가 티베트에 영향을 미친 사례 중 하나로 김무상의 일화를 언급하기도 한다.

  • 《금강삼매경》은 신라 찬술설이 제기되는 경전으로[73], 중국 초기 선종 성립에도 영향을 준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금강삼매경》은 티베트에 족첸 전승을 도입한 인도의 학승이자 요기(yogi)인 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의 저술로 알려진 《돈입수의(Cig car ’jug pa'i rnam par mi rtog pa’i bsgom don)》에도 인용되어 돈오를 정당화하는 전거로 활용되었다. 만약 신라 찬술설이 사실이라면, 김무상의 일화와 더불어 당시 한반도~중앙아시아 간 활발한 문물 교류를 짐작케하는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돈입수의》에서의 선정ㆍ지혜바라밀 및 수소성혜(修所成慧)의 강조는 삼예논쟁 당시 까말라쉴라의 논적이었던 마하연 화상의 돈오론을 연상케 하지만, 한편 비말라미뜨라의 또다른 저서인 《점입수의》에서는 대비심과 보시 등의 방편을 강조하였고 《돈입수의》와 《점입수의》의 본문 중《수습차제》와 동일한 부분이 존재하는 등 비말라미뜨라와 까말라쉴라 간의 사상적 유사성도 찾아볼 수 있다. 박운진, 《비말라미뜨라(Vimalamitra)와 삼예(bSam yas) 논쟁》

  • 혜과(惠果) 화상의 제자인 신라의 오진(悟眞)은 인도로 구법순례를 떠났다가 귀로에 티베트에서 입적하였다.

  • 통일신라시대 고승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를 법성(法成, Chos grub)이 티벳어로 번역하여 티베트 대장경에 수록되었다. 이후 원측의 저서는 티베트 불교 내에서 경전 해석의 주요한 논거가 되는 대표적인 논장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2. 고려시대

  • 고려 충렬왕 20년(1294) 티베트 승려 절사팔(折思八)이 티베트 경전과 법구류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다.

  • 충선왕 즉위년(1298)에는 충렬왕과 충선왕, 계국대장공주 등이 티베트 불교 승려에게 보살계를 받았다.

  • 고려인 출신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출가하여 티베트 불교 승려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황실의 각별한 존숭을 받았으므로 고려에 있는 가족에게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베풀어졌다.

  • 충숙왕 1년(1314)에는 홍약이 티베트 경전 1만 8천여 권을 고려에 전해주었다.

  • 고려사》에 따르면 충숙왕 7년(1320)에는 몽골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티베트로 들어가게 된 충선왕을 위하여 민천사(旻天寺)에서 기도법회를 열었다고 한다.충선왕은 1320년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사망한 후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인해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3년 간 유배된다. 충선왕의 유배지는 당시 티베트의 정치ㆍ종교적 중심지였던 사캬의 사캬 사원이었다. 지금까지 현지에선 충선왕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일화와 함께 충선왕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탕카가 전해진다.

KBS HD 역사스페셜《고려 충선왕, 티베트로 유배된 까닭은》[74]

  • 현재 우리나라 불교에 널리 퍼진 육자진언 옴마니반메훔도 티베트의 자사태마(刺思駄麻)와 사팔자(思八刺) 라마가 전한 것이다.[75]

이처럼 원 간섭기에 원나라 황실에서 신봉하던 티베트 불교가 고려에 유입되었으나, 티베트 불교의 신도층은 고려의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의 수행원들과 고려에 거주하는 몽골 관인들 위주로 한정되었다. 고려에서의 티베트 불교 수용은 황실에 대한 존중과 공주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강했으며 전체 고려 불교계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원나라 황실을 축원하는 법회의식 등을 통하여 티베트 불교의 의례와 불상, 불구(佛具) 등이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연식, 《한국문화사 11.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이후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친원 세력이 축출되면서 티베트 불교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된다.

3. 조선시대

안노생(安魯生)이 말하였다.

"황제가 불법(佛法)을 숭상(崇尙)하여 중[僧]이 서역(西域)에서 왔는데, 나이가 20여 세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존경하고 떠받들어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그 언행(言行)을 들어 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고, 구운 양(羊)고기를 잘 먹습니다. 그러나 밤중에 등불과 같이 방광(放光)하는데, 이것이 이상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시킵니다."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3월 15일 기사 4번째 기사


예부(禮部)에서 이래(李來)·맹사성(孟思誠)·설칭(薛偁)·이회(李薈)로 하여금 영곡사(靈谷寺)에 나아가서 각각 황제가 지은 찬불시(讚佛詩)를 속운(續韻)하여 올리게 하였다. [...]

이때에 호승(胡僧) 갈니마(曷尼摩)가 있어 ‘생불(生佛)’이라고 하는데, 황제가 그를 맞아 경사(京師)에 데려다 영곡사에 거처케 하고, 매우 공경하고 믿으니, 조관(朝官)과 사인(士人)들이 모두 달려가서 이마를 땅에 대고 기(記)를 받았다.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4월 2일 경진 13번째 기사


태종실록》에는 영락제가 숭상했던 대보법왕(大寶法王) 제5대 까르마빠 데신 셱바(de bzhin gshegs pa)[76][77]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明)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안노생(安魯生)은 태종에게 영락제의 초청을 받은 한 서역(西域)의 승려에 대해 언급하였다. 비록 제5대 까르마빠라고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연대(年代)와 승려의 나이, 출신지, 명성, 풍습 등의 묘사를 통해 제5대 까르마빠임을 유추할 수 있다.[78] 안노생은 까르마빠에 대해 "그 언행을 들어보면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인색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편으로 까르마빠가 보여준 방광(放光)의 이적(異跡)을 소개하였다. 《황명종신록(皇明從信錄)》등의 명대 사서(史書)들도 까르마빠가 보인 이적을 기록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파견된 이래(李來), 맹사성(孟思誠), 설칭(薛偁), 이회(李薈) 등 조선 사신들이 당시 제5대 까르마빠가 머물던 난징의 영곡사(靈谷寺)에 방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사신들은 예부(禮部)의 지시로 영곡사에 가서 황제가 직접 지은 찬불시(讚佛詩)를 속운(續韻)하여 올렸다. 찬불시에는 불가적(佛家的) 구도(求道)와 깨달음에 관한 내용과 함께 전법행(傳法行)을 펼치는 까르마빠를 찬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79] 또한 사신들은 영곡사에서 까르마빠가 명나라의 조관(朝官), 사인(士人)들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는 모습을 목격하였거나 혹은 사신들 스스로 까르마빠를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80][81][82]

신대승(申大升)은 말하기를,

"건륭(乾隆) 때에는 두려워 한 것이 몽고(蒙古)였었으므로 반선(班禪)을 총애하여 대우한 것은 그가 몽고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하게 대우한 것이지 참으로 총애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8일 신해 1번째 기사 


몽고의 48개 부락의 사람들은 모두 사나운데 근래에 와서 더욱 강성해지자 황제가 늘 견제하면서 만족·한족과 같이 벼슬을 시키고 몽고의 왕이 새로 즉위하면 공주(公主)를 시집보냅니다. 그곳의 풍속은 번승(番僧)을 가장 존경하여 마치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기 때문에 몽고인으로서 라마승이 된 사람은 서울에 있는 사찰을 주관하도록 하였으며 몽고 사람들이 숭배하는 번승이 있으면 대뜸 존경의 예를 더합니다. 연전에 반선(班禪)이 입적(入寂)한 뒤에 몽고의 여러 부락들 가운데 칸왕(汗王)의 자제들로써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종파를 차지하려고 꾀하는 자가 있어서 황제가 유시를 내려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보면 반선을 파격적으로 존경하여 받드는 것도 오로지 그 불도를 독실히 믿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열하(熱河)에 해마다 거동하는 것은 아마 숨은 뜻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3월 24일 신해 3번째 기사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사절단과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 제6대 빤첸 라마 롭상 빨덴 예쉐(blo bzang gpal ldan ye shes)[83]와의 조우가 열하(熱河)에서 이루어진다. 건륭제와 그의 신하들은 조선의 사신들이 황제의 스승인 빤첸 라마에게 예를 표하기를 원했으나, 억불(抑佛) 정서가 지배적인 조선 후기의 통념상 명분에 어긋나는 굴욕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져 사절단 내부의 반발이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빤첸 라마는 사절단에게 목조 불상(佛像)을 하사하였으나 이후 불상의 행방은 묘연하다.

사절단의 정사(正使)인 8촌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했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열하일기》에 관련 일화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당시 청, 몽골, 티베트 간의 국제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 사료로 취급된다. 또한 《정조실록》에도 빤첸 라마와 관련한 조선 사신들의 국제 정세 분석이 수록되어 있다. 빤첸 라마에 대한 청의 파격적인 존숭을 단순히 신앙심의 발로(發露)로만 볼 수 없으며,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몽골을 포섭하고 회유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담겨있다는 점을 조선 사신들은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10.2. 문화ㆍ예술 교류[편집]


허일범, 《한국 불교 속의 티베트불교》
  • 고려시대 이후에 편찬된 의식집들에서 진언들을 실담문자나 티베트 문자로 표기하고, 관법차제(觀法次第)와 같은 수행법에서 범자로 된 종자자(種子字)를 명상에 채용한다.

  • 또한 사원의 건축물이나 법구류 등에서 범자나 티베트 문자로 된 진언종자들을 활용한다. 사원건축에 단청을 하고, 거기에 범자로 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은 티베트를 제외한 어떤 국가에도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 인도나 티베트로부터 몽골 지역을 거쳐서 전파된 나가리·실담·란차·티베트·팍파문자 등은 우리 나라의 불교관련 의식집의 찬술 및 문자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육자진언(옴 마니 반메 훔) 관련 수행법은 티베트에서 저작된 《마니 깐붐(Tib. མ་ཎི་བཀའ་འབུམ་, Wyl. ma Ni bka' 'bum)》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육자진언을 활용한 명상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마니 깐붐》은 몽골을 통하여 고려에 전래된 닝마의 밀교 경전인데, 육자진언과 관련된 여러 가르침들을 총망라했다.[84]

  • 밀교경궤의 교설에 입각한 다면다방불(多面多方佛), 운주사에 조성된 대석합체불(大釋合體佛)과 쌍와불은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 티베트에는 비단으로 만든 대형 탕카(thang ka)[85]인 ‘괴꾸'(gos sku) 혹은 '괴꾸 첸모'(gos sku chen mo)가 있다. 괴꾸는 그 길이와 너비가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에 달하며, 특별한 종교적 행사 때 괴꾸 전용으로 지어진 사원의 거대한 벽이나 산, 언덕 자락에 전시된다.
    우리나라에도 괴꾸와 비슷한 형식의 불화(佛畵)인 괘불(掛佛)이 다수 존재하여 영산회(靈山會)같은 야외 의식에서 활용된다. 우리나라에서 괘불이 조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대규모 천도(薦度) 의식이 활발히 개최된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괘불도 1622년에 조성된 죽림사 세존괘불탱(보물 제1279호)이다.#
    한편 길이 419.5㎝, 너비 254.2㎝에 달하는 크기나 단독 좌상, 단독 입상 등의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수월관음도가 괘불일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고려시대부터 괘불이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의 주장도 있다.#
    주수완 우석대 교수에 따르면 괘불이나 괴꾸같은 걸개그림 형식의 대형 불화는 특이하게 중국,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고 한국과 티베트 불교권인 티베트, 몽골 등에서만 발견된다. 한국의 괘불이 티베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완전히 무관하다고 단정짓기도 힘들며 티베트의 밀교 의식에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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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괘불과 티베트의 괴꾸.


EBS 세계 견문록 아틀라스 《티베트 불교 최대 명절 '몬람'》
라싸(Lhasa)의 여름 축제인 쇼뙨(zho ston) 때 산자락에 괴꾸를 펼쳐 전시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를 쇄불(晒佛), 즉 부처님께 바람과 햇볕을 쐬어드리는 것이라 부른다.

  • 고려시대 때부터 제작된 금강저(金剛杵)와 금강령(金剛鈴)은 현대 한국불교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밀교 경전에 의거한 의식이나 수행에서는 널리 쓰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금강저는 티베트 계통과 당나라 계통 금강저를 응용한 한국의 독자적인 형태인 것이 대부분이다.

  • 고려 명종 20년(1190)에 조성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티베트인들의 신앙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마니륜통(摩尼輪筒, mani khor lo)이다. 2000년대 넘어서 용문사의 윤장대와 그 형식은 다르지만,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티베트의 것을 차용한 마니륜통을 제작하여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법구로 활용한다. 윤장대 내부에는 불경(佛經)이 들어있고, 마니륜통 내부에는 '옴 마니 밧메 훔' 등의 진언(眞言, mantra)이 적힌 두루마리가 들어있다. 글을 몰라 경전을 읽거나 진언을 외울 수 없어도 윤장대나 마니륜통을 돌리는 것만으로 똑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붓다가 법륜(法輪)을 굴리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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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28호 예천 용문사 윤장대(輪藏臺)와
티베트의 마니 꼴로(mani khor lo).


11. 지역별 보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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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불교 종파의 분포

밀교 ·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상좌부 불교


11.1. 대한민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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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풍으로 지은 한국의 첫 티베트 불교 사원
광성사 (부산 서구 아미동)

현대 티베트 불교의 한국 전파는 대략 1980년대 말부터 비롯된다. 해외 출국 제한이 해제되면서 인도 내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수행하는 한국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면서 씨짱(西藏) 자치구나 쓰촨성(四川省) 등지에서 티베트 불교를 배우는 경우들도 있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티베트 불교는 전환기에 들어선다. 사원과 종단의 지도자인 린포체들의 방한이 늘어났고,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사찰과 수행센터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린포체들의 방한을 주도한 모임은 해외 티베트 불교 단체의 한국 지부를 설립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의 티베트 불교는 한국인의 니즈(needs)에 따라 현대화된 명상 프로그램과 밀교 수행을 위주로 운영되면서 동시에 점차적으로 현교의 교학적 이해를 높여가고 있다. 다만 티베트 불교의 정수를 알려줄 게셰, 켄뽀급 지도자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그마저도 겔룩에 치중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물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종교 인구 감소와 고령화일 것이다. 한국 종교가 당면한 구조적 난관을 극복하고 한미한 규모의 한국 내 티베트 불교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다음은 티베트인 승려가 상주하는 사찰 및 수행 단체 목록이다(단체명순).

단체명
링크
주소
광성사[86]
공식 사이트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png |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부산 서구
삼학설행사(랍숨섀둡링)[87]
공식 사이트 |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서울 은평구
서울티벳불교문화센터(따시최링)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서울 강북구
캄따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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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경기 양평군
팬대링(대구티벳불교센터)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네이버 밴드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대구 달서구


이 외에 정기/비정기적인 법회와 수행모임을 개최하는 티베트 불교 관련 수행단체는 다음과 같다(단체명순).

단체명
링크
다르마타 코리아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마이트리야 상가
공식 사이트 |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세첸코리아[88]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싯다르타즈 인텐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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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셰 롱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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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가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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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티벳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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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티베트 불교 관련 국내 학술기관들이다(단체명순).

학술기관명
링크
나란다불교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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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마을 한국티벳불교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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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대장경역경원
공식 사이트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의 공식 한국어 소셜 미디어 채널은 다음과 같다.


불교 일반 및 티베트 불교를 배우고 싶은 이에게 불교학자 알렉산더 벌진(Alexander Berzin)의 《Study Buddhism》한국어판 사이트는 유용한 창구가 될 수 있다. 세계적인 티베트 불교 전문가인 알렉산더 벌진 및 제14대 달라이 라마, 제2대 첸샵 쎌콩 린뽀체 등 티베트 불교 주요 스승들의 저술과 녹취를 수록하여 전문성과 신뢰성을 갖추었고, 다양하고 방대한 기고문들이 주제별로 찾기 쉽게 분류되어 있으며, 또한 일반인을 대상으로 평이하게 서술되어 매우 추천할만한 사이트이다. 더불어 전세계 불교계의 승려, 수행자, 학자들을 인터뷰한 영상도 곳곳에 기재되어 있다(Study Buddhism 유튜브 채널에서도 시청 가능하다). 다만 아직 홈페이지 전체가 번역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티베트 불교를 믿는 재한 네팔인, 몽골계 한국인들을 위한 사찰도 있다. 이 중 서울네팔법당 텍첸사의 경우 한국인 불자들도 법회에 참여하고 있다.

  • 서울 네팔법당 텍첸사 (서울시 강남구 일원동)[91]
  • 동두천 네팔법당 용수사 (경기도 동두천시)[92]
  • 몽골 간단사 서울 포교당 (서울시 중구 광희동)

11.2. 중화권 및 티베트[편집]


과거 티베트 영토였던 티베트 자치구칭하이성, 쓰촨성, 간쑤성, 윈난성 일부 지역의 티베트인들, 내몽골 자치구몽골인들, 신장 위구르 자치구(주로 북부 중가리아 지역) 몽골 자치현의 오이라트인들, 그리고 동북 3성만주족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들 중에도 티베트 불교도들이 다수 있다.

티베트는 이름대로 티베트 불교의 중심지였으나, 중국의 병합과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문화대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현재까지 중국 내 티베트인들 650만 여명 대부분은 독실하게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 사실상 티베트 지역의 국교. 그러나 티베트인들 중 10% 정도는 티베트의 고유 종교인 뵌교를 믿는다. 다만 현재의 뵌교는 불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의 탄압을 피하고자 불교의 교리와 의식 등을 거의 그대로 습합하여 외부인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불교와 유사하게 변모하였다.

대만에는 티베트 불교도가 상당히 많다. 대만에 티베트 불교를 널리 포교한 스루스(釋如石) 스님은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전파 과정을 두 단계로 구분하였다. 1950년부터 1982년까지는 이른바 '전홍기(前弘期)'로, 이 기간 동안은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건너온 소수의 겔룩, 사캬 승려들 외에 대부분 한족 재가 불자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를 신앙하였다. 밀법의 전수는 적었고, 전파 지역은 대만 북부에 한정되었다. 그 후 1982년부터 인도, 네팔에서 티베트 불교 승려들이 포교를 위해 대거 대만에 입국하고, 또한 미국에서 밀법을 수행했던 천젠민(陳健民)의 저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대만 전역에 티베트 불교 전(全) 종파의 가르침이 본격적으로 전래되었다. 鄭志明, 《藏傳佛教在台發展的現況與省思》 양정연, 《한 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타이완 불교사>

현재 닝마, 까규, 사캬, 겔룩 등 티베트 불교 주요 4대 종파가 모두 대만에 진출한 상태이다. 사라 프레이저(Sarah E. Fraser) 하이델베르크대 교수가 2018년 연구에서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대만 내 티베트 불교 신자 수는 약 50만~60만여 명에 달한다. 이 중 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신자 수는 10만~20만여 명 정도이다. Sarah E. Fraser, 《Tibetan Buddhist Temples in Taiwan: An Exploration of Transnational Religious Architecture》 달라이 라마는 1997년, 2001년, 2009년 세 차례에 걸쳐 대만을 방문한 적이 있다.

11.3. 몽골[편집]


몽골 제국시절에 몽골의 종교였으나 제국이 쇠퇴하면서 몽골 내 티베트 불교도 쇠퇴하였다. 알탄 칸 대부터 다시 몽골인들의 종교가 되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을 학습하고 티베트 승려와 동일한 복식을 착용할 정도로 몽골과 티베트의 불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몽골 승려들의 수준은 예전부터 우수하였는데,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몽골을 방문한 후 그 곳 학승들의 능숙한 논쟁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일이 지금과 같은 길고 철저한 게쉬 학위 제도를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될 정도였다. 안병남, 《티베트 불교의 사원 교육제도》

공산주의 시대에는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주도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지만[93] 탈공산화 후 완화되었다. 비록 공산 정권의 탄압을 받은 건 마찬가지지만 몽골 공산정권의 후원자인 소련은 문화대혁명의 광풍을 겪은 중국에 비하면 비교적 문화유산 파괴가 덜했기 때문에, 불교 관련 유산이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 당한 티베트와는 달리 많은 경전과 유물이 따로 보관되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1990년대 몽골이 민주화되면서 탄압이 끝났고 오늘날 몽골에서 티베트 불교는 국민 다수가 믿는 국가적 종교가 되었다.

현재 몽골 인구의 약 60%가 불교도로 대부분 티베트 불교(주로 겔룩)를 믿으며, 간단 사원이 몽골 티베트 불교의 중심적인 사원이다. 소련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 몽골과 칼미키아 공화국, 부랴티아 공화국, 투바 공화국의 승려들이 남인도 카르나타카 주에 소재한 데뿡 사원의 고망 강원(Drepung Gomang Monastic University)[94]으로 유학을 오기 시작하여 현재는 2000여 명의 몽골, 러시아 연방 출신 승려들이 고망 강원에서 정진 중이다. 개중에 게쉬 학위를 취득한 승려나 사원의 방장(方丈) 등 고위직에 오른 승려도 상당 수 배출될 정도로 몽골 승려들의 자질은 우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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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몽골 최대 규모 사원인 간등테크칠렌(Гандантэгчинлэн хийд) 외부전경
(아래) 사원 내부 26.5m 높이의 관세음보살상

11.4. 부탄[편집]


사실상 부탄국교이다. 16세기에 둑빠 까규 중 샵둥 나왕 남걜(zhabs drung ngag dbang rnam rgyal)이 이끄는 티베트 남부의 일파가 겔룩이 이끄는 티베트 중앙 정권과의 분쟁을 피해 부탄에 자리잡아 국교가 되었다. 부탄 헌법에 따르면 5명의 고승인 롭뾘(slob dpon)들의 추천을 받아 부탄 국왕이 임명한 제 켄뽀(Je Khenpo)가 국사(國師)로서 부탄의 전체 불교 사원들을 이끌게 된다.

2022년 6월 21일 부탄 불교 최고 지도자인 제 켄뽀의 수계로 144명의 비구니가 탄생했다. 비록 부탄 불교 한정이지만, 이로써 티베트 불교권에서도 자체적인 비구니 계맥을 갖추게 되었다. 제 켄뽀 주석(主席) 사원인 슝 다창 사원은 공식 SNS를 통해 '부탄 수도인 파로 교외의 람탕카 사원에서 제 켄뽀인 툴쿠 직메 최다 스님이 계사(戒師)가 되어 직접 구족계를 수계했다'고 전했다. 이번 수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들은 대부분 부탄 출신이지만, 일부는 인도나 영국 등 세계 각지에서 참가한 스님들도 있다. 이들은 비구스님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교육과정을 거쳐 아사리나 승원장 같은 직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다. 이번 수계는 부탄 왕실의 지원 하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현 부탄 국왕의 어머니인 체링 양된 대비가 2009년 설립한 '부탄 비구니 재단(Bhutan Nuns Foundation)'에서 여성 출가자의 지위 향상과 권리 보호를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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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년대 부탄을 통일한 샵둥 나왕 남걜

11.5. 인도[편집]


인도 북부의 라다크, 시킴,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티베트계 지역 주민들과 중국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10만 여명의 티베트 난민들이 주로 믿는다. 망명 이후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현지의 주요 사원들을 본따 인도 각지에 새롭게 불교 사원들을 건립하여 티베트 불교의 명맥을 보전하는 한편, 인도 불교의 부흥에도 기여하고 있다.

인도 사회에서 오랜 세월 천대를 받아온 불가촉천민 계층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많다. 마하라슈트라 지역의 신흥 종파인 나바야나(Navayana)가 그것이다.[95] 그러나 나바야나와 티베트 불교는 교리 차이가 상당히 큰 편이라, 양자 사이의 교류는 생각보다 제한적이다. 나바야나는 인도 독립 이후 불가촉천민들의 지도자이자 무신론, 불가지론 성향의 사상가였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박사가 인도 중부 지역에서 수십만명의 불가촉천민, 평민과 함께 한 불교 운동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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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르나타카의 데뿡 로셀 링(Drepung Losel Ling) 강원

11.6. 네팔[편집]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Lumbini)가 네팔에 있지만, 힌두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80%로 우위를 차지하며 불교 인구는 9~10% 정도에 불과하다. 네팔의 불교는 크게 티베트 불교, 네와르 불교, 테라와다(상좌부) 불교로 구성된다.

네팔은 티베트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고 한 때 티베트의 지배를 받았던 적도 있다. 그 영향으로 셰르파(Sherpa)족 등 카트만두 계곡 근처 북부 고지대의 소수 민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주로 믿는다. 중앙의 네와르(Newar)족은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네와르 불교를 믿는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네와르족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카스트 제도가 있다. 테라와다 불교도 소수지만 존재한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 인근은 성역화되어 전세계 불교 종파들이 세운 사원들이 밀집해있다.


네팔의 보다나트 대탑(Boudhanath stupa) 소개 영상

11.7. 러시아[편집]


시베리아소수민족부랴트인투바인, 칼미크인 등이 주로 믿는다. 이웃나라 몽골과 가까워 영향을 받았거나(부랴트, 투바)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는(칼미키아) 민족들이다. 이들 중 티베트 불교 신도 인구는 약 70만~15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 2016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 중 불교도의 비율은 투바 공화국 52.2%, 칼미키아 공화국 53.4%, 부랴티아 공화국 19.8%, 자바이칼 변경주 14.6%, 러시아 연방 0.6%이다. #

국가 무신론이 강요되던 소련 시절, 칼미크인 불교 지도자들은 티베트 불교가 무신론이라고 주장했으나, 소련 정부는 티베트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라면서 이슬람이나 기독교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가했다. 당시 소련 전국에 오직 2군데 사원[96]만이 허가 하에 존치되었을 정도였다.

소련이 붕괴한 후 러시아 정부에서는 과거의 종교 탄압을 사실상 중단했다. 러시아 정부에서 공인한 '전통 종교' 4개 중 하나로 지정되어[97] 정부 인사들과 불교 대표가 자주 만나는 등 사정이 많이 나아져 교세를 회복하고 있으며, 소수민족만의 종교가 아니라 영미권에서 티베트 불교 신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소수민족 외 슬라브계 러시아인 신자도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연해주동슬라브인 인구가 95%가 넘는 지역이지만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도 까규 종파 계열의 티베트 불교 센터를 열었고 2020년에는 관광지인 독수리 전망대 근처에 10톤 규모의 불상을 신도들의 후원으로 설치하는 등# 교세를 각 지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1976년1991년 두 차례 러시아를 방문했다. 당연히 중국이 러시아에 항의하고 있으나 러시아인 불자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2004년에도 티베트 불교 신자가 많이 사는 지역인 칼미키야 공화국 대통령 키르산 일륨지노프의 초청으로 방러하고자 하였으나 이 때는 중국 측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여담으로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선교가 허용되는 불교 종파이며, 대승불교와 상좌부 불교의 선교 행위는 불법이다.[98]


Dr. Andrey Terentyev, 《Tibet's Connection with Buddhism in Russia》(한글 자막 있음)



뗄로 린뽀체(Telo rinpoche), 《The Revival of Buddhism in Russia and Mongolia》
《The Revival of Buddhism in Kalmykia》

11.8. 미국[편집]


유명 헐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 우마 서먼, 스티븐 시걸 등이 대표적인 미국의 티베트 불교 신자다. 리처드 기어는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고 한 때 출가를 결심했을 정도로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이다.

우마 서먼은 부친이 미국의 대표적인 티베트 불교학자인 컬럼비아대 교수 로버트 서먼(Robert Thurman)이다. 우마 서먼의 이름 중에 '우마(Uma)'란 퍼스트네임은 대승불교 사상인 '중관'을 뜻하는 티베트어이고 미들네임인 까루나(Karuna)는 '대비심'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이다. 또한 서먼은 티벳 하우스 미국(티벳 망명정부의 문화원 격인 비영리단체) 이사로도 활동했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도 티베트 불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신을 티베트 불교도라고 규정하진 않았지만, 젊었을 적부터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티벳 하우스 미국의 창설을 돕기도 했다. 또한 달라이 라마의 방미(訪美)를 기념하여 《Mad Rush》를 헌정하였고, 달라이 라마의 출생부터 인도 망명까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쿤둔》의 OST를 제작하였다.

키아누 리브스는 티베트 스님의 환생을 다룬 영화 《리틀 부다》출연을 계기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네팔의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 수개월 간 머물며 수행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불교도는 아니지만 불교를 통해 행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고, 2022년 티벳 하우스 미국을 위한 자선 콘서트에도 출연하여 중국인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스티븐 시걸은 열렬한 티베트 불교도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1997년 닝마의 주요 지도자인 뻬놀(Penor) 린뽀체로부터 17세기 닝마의 뗄된이었던 충닥 도르제(Chungdrag Dorje)의 환생으로 인정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의 환생자 신분에 대해서는 미국 불교계 내에 논란이 있다. 미국의 주요 불교 잡지 '트라이시클'(Tricycle)의 창립자 겸 편집자 헬렌 트워코프(Helen Tworkov)는 스티븐 시걸이 기부금으로 환생자 신분을 매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11.9. 기타 전세계[편집]


상좌부 불교, 선불교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불교로 심지어 아프리카에도 절이 있다.[99] 아프리카 불교도들의 따라보살 기도 영상[100] 유럽[101]이나, 일본[102], 중남미[103], 동남아[104], 오세아니아 등지에도 상당한 신자들이 있다. 특히 서구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학계에서는 티베트 불교를 인도 대승 불교의 마지막 후계자로 인정한다.

달라이 라마(Dalai Lama), 까루 린포체(Kalu Rinpoche), 딜고 켄체 린포체(Dilgo Kyentse Rinpoche)[105], 소걀 린포체(Sogyal Rinpoche)[106] 까르마빠(Karmapa), 꺕제 송 린포체(Kyabje Zong Rinpoche), 라마 쇠빠(Lama Zopa) 린뽀체 등이 활발하게 포교활동을 벌이며 티베트 불교를 서방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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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에 위치한
티베트 불교 사원 레랍 링(Lerab Ling)

12. 한국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교섭[편집]




12.1.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에서의 "마음의 본성"[편집]


무엇이 일심(一心)인가? 이르길 염오와 청정의 모든 법(法)이 그 성(性)이 둘이 아니고 진실과 허망의 두 문(門)이 다름이 있을 수 없기에 일(一)이라고 이름하고, 이 둘이 아닌 자리가 모든 법 가운데 실(實)로서 허공과 같지 않아 성(性)이 스스로 신묘하게 알기에 심(心)이라고 이름한다.(何爲一心 謂染淨諸法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제법이 모두 공한 곳에 신령한 앎이 어둡지 않으니 즉 이러한 공적영지의 마음이 그대의 본래면목이다.(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원효는《대승기신론별기》를 통해 대승의 양대 사상인 중관과 유식을 여래장으로 융합한 일심(一心) 사상을 주창하였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에 갖춰진 본래적 각성(本覺)에 관하여 '마음의 본성이 스스로 신묘하게 앎(性自神解)'이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지눌은 《수심결》에서 '공하고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러운 앎(空寂靈知)'이 있으니 이것이 곧 '본래면목'이고 마음의 본성이라고 일컬었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역시 궁극적 깨달음은 마음의 본성/특성/자성(自性)/법성(法性)을 앎으로써 가능하고, 마음의 본성은 곧 '공성과 본연의 지혜의 결합'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한국과 티베트 모두 스승과 제자 간의 심전(心傳)으로 마음의 본성에 관한 가르침이 전해져왔으나, 차이가 있다면 중관 사상이 발달한 티베트에서는 마음의 공(空)한 본질에 대한 논의가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왔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도 그간 미약했던 중관적 시각이 강화된다면 동아시아 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일심', '불성', '진여', '본각', '공적영지심' 등을 실체화하여 집착하는 위험을 감소시켜 더욱 균형잡힌 교학적, 수행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에서의 마음의 본성에 대한 닝마, 까규 스승들의 설명이다. 족첸, 마하무드라 전승은 인도-티베트 불교의 금강승 전승이면서 동시에 현교의 중관 사상과 밀접하게 연계되었고, 선(禪)과의 유사성도 발견되는 독특한 수행 전통이다. 이를 통해 인도-티베트 불교와 동아시아 불교 간 사상적 교섭의 단초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극단에서 벗어난 자유에 관한 족빠 첸뽀(Dzogpa Chenpo)의 견해는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와 대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주요한 차이점은 중관의 기본 견해가 허공과 같은 공(空)한 측면에 관한 것이라면, 족빠 첸뽀의 기본 견해는 언설(言說)로 표현 불가능하고 간단(間斷)없으며, 본초(本初)적으로 청정하고 벌거벗은 본연의 앎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족빠 첸뽀에 따르면, 본연의 앎과 그 안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은 허공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모든 극단을 벗어나 있다.

롱첸 랍잠(Longchen Rabjam)

Longchen Rabjam, 《A Treasure Trove of Scriptural Transmission: A Commentary on The Precious Treasury of the Basic Space of Phenomena》

《최잉 쬐(Chöying Dzöd)》와 다른 족빠 첸뽀 문헌들은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를 찬탄한다. 그래서 부정대상 제한(dgag bay's mtshams 'dzin)의 정의에 관하여 족빠 첸뽀와 귀류논증 중관은 서로 일치한다.

제3대 도둡첸(Dodrupchen)

Longchen Rabjam, 《The Precious Treasury of Philosophical Systems: A Treatise Elucidating the Meaning of the Entire Range of Spiritual Approaches》


다시 말해, 마하무드라는 무주(無住, apratiṣṭhita)의 견해, 그리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지는 수행과 연관이 있다. 이는 개념적으로 만들어진 극단을 멀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부분들에 의해 가립(假立)된 법(法)들의 자성(自性) 같은 개념으로부터 끊임없이 주의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극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이러한 비개념성의 극치에 다다른 상태는 진정한 마음의 본성에 대한 대락(大樂)의 마하무드라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고, 이는 부작의(不作意, amanasikāra)의 밀교적 의미인 "광명(光明)의 자관정(自灌頂)"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과(果)로서의 대락(大樂)은 또한 오직 그러한 대락의 공성(空性)을 깨달을 때만 안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집착의 대상으로 구체화되어 고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마하무드라와 중관의 융합은 싯다(siddha)들의 새로운 가르침들과 수행들을 주류(mainstream) 불교로 통합시키는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정의 세 번째 순간을 올바로 확인하는 것에 대한 마이뜨리빠(Maitrīpa)[107]

의 해석은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알아차림(즉, 부동불인(不動佛印, Akṣobhya seal) 또는 유가행의 공성) 뿐 아니라 그러한 알아차림의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동시적(同時的)인 확인(즉, 금강살타인(金剛薩陀印, Vajrasattva seal) 또는 중관의 공성)까지 포괄한다. 마이뜨리빠는 만약 유가행(유식)의 일시적인 깨달음들이 중관에 의해 더욱 정제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유가행의 교리가 시설(施說)된다면, 그러한 유가행 교리들은 (중관에 도달하는) 필수적인 단계적 접근이 되고 유용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세번째 대락(大樂)은 성불(成佛)의 목표를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한 대락은 비이원성(非二元性)인 부동불인(不動佛印) 뿐만 아니라 비이원적인 대락 또한 그 자성(自性)이 공(空)하다는 금강살타인(金剛薩陀印)으로도 인(印)쳐져야 한다.

Klaus-Dieter Mathes, 《Maitripa: India's Yogi of Nondual Bliss》


중관은 "개념들을 초월하는 것" 4가지로 설명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도, 비존재하는 것도, 존재하면서 동시에 비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도 않고 비존재하지도 않는 것도 아닌 무언가이다. 이러한 4가지 가능성 외에 무엇이 있는가? 없다. 비록 지적인 방식으로만 접근해보았지만, 이는 중관의 궁극적인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분석적인 방법으로써, 이러한 결론은 족첸에서도 옳은 결론이다. 나가르주나의 추론은 수승하다.

최걀 남카이 노르부(Chögyal Namkhai Norbu)

Chögyal Namkhai Norbu, 《Dzogchen Teachings》


닝마는 자공(自空, rang stong)도 타공(他空, gzhan stong)도 아닌 숭죽, 즉 쌍입(雙入, Skt. yuganaddha, Tib. zung 'jug)의 견해를 따른다. 쌍입의 견해란 현상과 공성의 불가분성(현공불이顯空不二), 밝음과 공성의 불가분성(명공불이明空不二), 대락(大樂)과 공성의 불가분성(낙공불이樂空不二), 지혜와 공성의 불가분성(각공불이覺空不二) 등을 의미한다. [...] 중관논사들은 귀류논증을 완벽한 자공(自空)의 견해라고 여긴다. 족첸 텍최(trekcho)[108]

의 카닥에 관한 견해와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는 같다. 두 견해에서 모두 공성은 같은 개념이며 차이가 없다. (본초청정(카닥)은 귀류논증 중관의 공성을 가리키는 족첸의 용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롱첸빠(Longchenpa), 직메 링빠(Jigme Lingpa), 미팜(Mipham) 등 과거 닝마 스승들은 귀류논증 중관논사들이었다. 미팜 린뽀체에 따르면 귀류논증 중관의 공성과 족첸의 공성은 완벽히 일치한다. 차이란 없다. 100% 같다.

켄첸 릭진 도제(Khenchen Rigdzin Dorje) #


밀교에는 족첸(dzog chen)이나 마하무드라(mahamudra)와 같이 마음을 조작하지 않고 바로 직지심체(直指心體)하여 본성에 안주하는 명상이 있다. 족첸이나 마하무드라에서는 마음 그 자체가 마음의 본성과 하나되어[109] 그 상태에 머물게 된다. 족첸에서 말하는 릭빠(rig pa)나 무상요가 딴뜨라에서 말하는 정광명(淨光明, ‘od gsal) 등은 모두 마음의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분별을 여의고 오로지 순수한 앎 뿐인 명료함을 특성으로 갖고 있다.

'마음의 본성'이란 표현 때문에 마치 자성(自性)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마음의 본성' 혹은 '마음의 법성(法性)', '가장 미세하고 청정한 의식', '불성(佛性)' 또한 본질은 공(空)이며, 따라서 릭빠나 정광명을 증득한다는 것은 '주체(혹은 마음/의식)의 무자성(無自性)=주체의 공(空)함'을 온전히 깨닫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족첸, 마하무드라의 견해에 따르면, 마음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공하면서 현상적으로는 명료한 앎을 드러내기 때문에 공성과 명료한 앎은 분리할 수 없다. 공성만을 강조하고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허무주의, 단멸론(斷滅論)에 해당하며, 반대로 현상의 본질을 '영원한 자아', '영혼(anima)', '아트만(Ātman)', '참나(眞我, True Self)'처럼 독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영원주의, 상주론(常住論)에 해당한다. 따라서 족첸, 마하무드라 전승에서 진정한 마음의 본성은 극단을 배제한 공성과 현상의 불가분(不可分) 혹은 쌍입(雙入)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의(作意)를 여읜 것이 대수인(마하무드라)이요

양변(兩邊)을 여읜 것이 위대한 중도(중관),

이를 모두 포함하면 대원만(족첸)이라 하니

하나를 앎으로써 일체를 깨닫는 확고함을 얻게 하소서.

제3대 까르마빠 랑중 도제, 《마하무드라 발원문》(까규 대기원법회 번역팀 譯)

랑중 도제는 이 발원문을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가르치기 위해 지었다: 본성의 완벽한 깨달음은 "모든 작의로부터의 자유로움"이다. 그것이 바로 마하무드라(위대한 수인)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또한 그것은 중도(중관)란 다른 이름도 있다. 왜냐면 모든 극단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깨달음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것은 또한 대원만(족첸)이라 일컬어진다. 우리는 하나의 진정한 본성을 앎으로써 모든 법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제8대 타이 시투빠(ta'i si tu pa)

Peter Alan Roberts, 《Mahamudra and Related Instructions: Core Teachings of the Kagyu Schools》

(발원문의) 네 번째 줄은 비록 "세 가지 위대함"이란 다른 이름들이 있지만, 그러한 용어들은 오직 깨달음의 다양한 측면들을 묘사하기 위해 쓰여진다는 것을 일러준다. 용어들은 깨달음을 묘사하면서 단지 그렇게 묘사된 것 외에 더 깨달을 것은 없음을 알려주고자 한다.

고귀한 랑중 도제는 어떤 사람들이 (깨달음의) 한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더 심오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수행자들은 마하무드라가 족첸보다 수승하다고 여겼고, 반면 어떤 수행자들은 중관이 더욱 심오하다고 주장했다. 과(果)의 측면에서 모든 수행은 동일하다. 차이점은 오직 세속적인 이해를 통해서만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러나 지적(知的)인 서술로는 결코 궁극적인 본성을 묘사할 수 없다. 마하무드라, 중관, 족첸-이 세 가지 용어들은 모두 동의어이다. 도(道)의 측면에서도 또한 차이는 없다. 그러나 수행자들의 다양한 성향과 각기 다른 능력 및 요구로 인해 도의 적용에 있어 차이들이 생겨날 뿐이다.

제3대 잠곤 꽁뚤(ʽjam mgon kong sprul) Jamgon Kongtrul Rinpoche the Third, 《Instructions on The Aspiration Prayer for Mahamudra》


중관은 위대한 승리자 붓다 샤캬무니가 설한 가르침의 정수를 드러낸다. 금강승의 수행들조차 중관의 견해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본존 수행을 시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본성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쉬는 진실삼매(眞實三昧, tattva-samadhi)에 머문다. 이 진정한 본성에 관한 명상은 중관의 명상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또한 족첸 명상으로 알려져 있다. 족첸의 가르침들은 사실 중관의 가르침들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금강승의 수행일지라도 본존을 관(觀)할 때 우리는 중관의 지견(智見)을 갖고 있어야 한다. "모든 상(相)들을 초월한 원만차제(圓滿次第)"로 알려진 원만차제에 도달할 때, 우리는 또한 중관에 관한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족첸 명상과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본성의 공(空)한 측면은 중관을 수행하든 족첸을 수행하든 다르지 않다. 둘 모두 "관(觀)하는 상태", 혹은 작의(作意)를 여읜, 진정한 본성에 대한 비이원적(非二元的)인 알아차림의 명상을 수반한다.

만약 이러한 설명이 참이라면, 중관과 족첸이 수행자들에게 진정한 본성을 알려주는 방식의 실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족첸은 논리나 추론을 사용하지 않고 진정한 본성에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족첸은 수행자 자신의 알아차림을 수행자에게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단순한 방법이며, 이를 통해 수행자 내면의 본성을 발견하도록 인도한다. 이와 달리 중관은 공성, 또는 진정한 본성을 논리와 추론이란 수단을 통해 알려준다. 중관은 진정한 마음의 본성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확립하는 보다 분석적이고 교학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의 차이는 기술적인 차이이다. 하지만 실제 본성에 관해서는 동일하다-분리된 두 가지 본성들 같은 것은 없다-우리가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수행 방식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당신은 물론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단지 이러한 가르침들이 모든 수행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지를 상기시키고자 할 뿐이다.

켄첸 빨덴 셰랍(Khenchen Palden Sherab)

Khenchen Palden Sherab, 《Opening the Wisdom Door of the Madhyamaka School》


족첸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나가르주나(Nagarjuna)의 추론에 의지해야 하며, 마하무드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티벳의 셰드라(티베트 불교 강원)에서는 《중론》과 짠드라끼르띠(Candrakīrti)의 《입중론》 그리고 다른 비슷한 문헌들을 여러 해 동안 공부한다. 

그러나 마하무드라와 족첸은 따로 배우지 않는데, 왜냐하면 중관 텍스트들이야말로 서로 다른 주장들과 논리적 추론들의 광대한 집합체로서, 그것들을 미묘하고도 심오한 방식으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하무드라 전승에서도 역시 제3대 까르마빠 랑중 도제(Karmapa Rangjung Dorje)의《마하무드라 발원문》과 같은 다음의 문장들을 찾을 수 있다.

"마음에 관해 말하자면, 마음이란 것은 없다! 마음의 자성은 공하다."

만약 4구부정 등의 추론을 통해 분석한 결과 마음의 자성이 공함을 확신하게 된다면, 마하무드라에 대한 이해는 심오해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구절을 암송할 수야 있겠지만 마음 속으로는 일종의 의견이나 추측 정도로만 여기게 된다.

만일 《중론》의 추론들을 익힌다면, 마하무드라와 족첸의 공성과 무자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을 때 이미 익숙한 것들이라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팜 린뽀체는 《결정보등(決定寶燈, nges shes sgron me)》[110]

이란 간략한 문헌을 지었는데,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닥(ka dag, 本初淸淨)[111] 에 대한 완벽한 확신을 얻으려면 반드시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를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카닥 혹은 본연의 본초청정은 족첸의 견해로서, 그 견해를 완벽하게 얻기 위해선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를 완벽히 얻어야 한다. 이는 족첸의 카닥 견해와 짠드라끼르띠의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켄뽀 출팀 걈초(Khenpo Tsultrim Gyamtso)

Khenpo Tsultrim Gyamtso, 《The Sun of Wisdom: Teachings on the Noble Nagarjuna's Fundamental Wisdom of the Middle Way》


족첸, 마하무드라와 귀류논증 중관은 현상과 공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각 전승의 견해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와 일치를 이룬다. 족첸, 마하무드라와 귀류논증 중관 모두 단변(斷邊)과 상변(常邊)의 양 극단을 여읜 중도로서 자성이 없는 공을 설하고 있다. 족첸, 마하무드라의 공성과 귀류논증 중관의 공성은 일치하며, 귀류논증 중관적 접근은 족첸, 마하무드라의 견해를 이해하는 교학적, 수행적 토대[112]가 된다.

특히 무상요가 딴뜨라, 족첸, 마하무드라 등에서 말하는 공성은 현교의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한 공성에 해당하며 유식학파나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하는 공성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 4대 종파는 모두 중관을 중시하며 그 중 닝마, 까규는 특히 중관과 유식의 결합을 강조하는 편이지만 이들 종파는 한편으로 외경(外境)의 부정, 자증(自證)의 인정[113] 등을 주장하는 유식학파의 견해를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닝마나 까규 스승들 중에는 금강승의 견해를 귀류논증 중관의 견해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의 교의(敎義) 위계에서 귀류논증 중관학파보다 하위학파에 해당하는 유식학파나 자립논증 중관학파에서 정의한 공성을 족첸, 마하무드라의 공성과 동일하다고 보는 경우는 없다.[114] 닝마, 까규 논사들은 중관과 족첸, 마하무드라가 각기 분석과 직관이란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개념적 극단을 여읜 결과의 측면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

이미 상술하였듯이 "미세의식", "청정의식", "마음의 본성", "비이원적인 알아차림", "광명", "대락"과 같은 밀교 용어와 표현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마치 아뜨만이나 "참나"와 같은 고정불변한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독(誤讀)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같거나 유사한 용어라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공(空)"이라는 용어도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다.

  • 초기불교: 1)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같은 명상 상태의 일종. 2) 무아(無我).
  • 아비달마: 1) 빈 공간이나 틈이 되는 유위(有爲)의 공계(空界). 2) 공간적 점유성(접촉)과 장애성(막힘)이 없는 무위(無爲)의 허공.
  • 유식: 유식에서는 법공(법무아)을 확립하는 두 가지 논리가 있다.[115] 1) 인식 주체(能取)와 인식 대상(所取)의 본질이 모두 마음이라는 능소이공(能所二空).[116] 2) 의타기성(依他起性)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공(空)한 것.[117]
  • 여래장: 번뇌에 물들지 않음.
  • 중관: 일체법이 연기(緣起)하므로 고정불변한 실체(자성)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자성(無自性).

특히 공(空)을 '텅 빈 자리', '형상 없음' 등으로 단순하고 안일하게 해석할 경우 유변(有邊)이나 무변(無邊)의 극단에 치우치기 쉽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공성을 알지 못하여 유변에 치우친 대표적인 사례로 《금강경》에서는 사상(四相)을 언급한다.

  • 아상(我相, ātmasaṁjñā)=아뜨만(Atman)이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 중생상/유정상(衆生相/有情相, sattvasaṁjñā)=사트바(Sattva)가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118][119]
  • 인상(人相, pudgalasaṁjñā)=뿌드갈라(Pudgala)가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 수자상/명자상(壽者相/命者相, jīvasaṁjñā)=지바(Jiva)가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이들은 형이상학적 관념들로서 대부분 물질적 형상이 없지만, 불교의 공(空) 사상에서 배격하는 극단적 견해인 상견(常見)에 해당한다.[120] 반야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모두 '토끼의 뿔'과 같은 허구의 망상(妄想)이고 근본 번뇌인 아집(我執)의 소산이다. 이러한 개념적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의 무아, 공성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기법(緣起法)을 통해 일체법이 무자성(無自性)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공성을 파악해야 한다.

또한 "영원하고 항구적이다"는 표현 역시 힌두의 아뜨만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 하고 열반 같은 무위법[121], 불성ㆍ여래장, 유식이나 중관에서의 진여, 공성 등 불교의 궁극적 진리, 이법(理法)을 묘사할 때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단지 특정 표현과 문구만으로 의미를 파악해서는 안되며 표현이 쓰인 전체 맥락을 고려하여 내포된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사유해야 한다.

일체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논하는 현교의 귀류논증 중관과 밀교는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닝마ㆍ사캬ㆍ까규ㆍ겔룩 등 티베트 불교 4대 종파들은 모두 귀류논증 중관을 종지(宗旨)로 삼아 불교 4대 학파(유부, 경량부, 유식, 중관)의 견해를 아우르는 매우 정교하고 방대한 교학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일찍이 현밀겸수(顯密兼修) 체계가 확립된 인도-티베트 불교 전승의 밀교 문헌들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술한 현교 교학 및 밀교 경전의 주석서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122][123]

본 문단은 한국 불교와 인도-티베트 불교 내 족첸, 마하무드라, 중관 전승 간의 공통점을 위주로 간략히 서술되었다. 때문에 각각의 견해들을 상세히 설명하는 글은 아니다. 국내에 단편적으로 소개된 티베트 밀교 문헌들에 대한 몇몇 오해를 불식시키고 중관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더불어 한-티 불교간 사상적 교섭의 가능성을 언급하고자 작성된 글임을 밝힌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귀류논증 중관이란 공통된 토대 위에서 무아, 공성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13. 기타[편집]



13.1. 밀교와 성(性)?[편집]



13.1.1. 오해와 편견[편집]


파일:vajradhara.jpg
얍윰(yab yum)[124] 형상을 한 지금강불. 존재 내면의 남성적 에너지와 여성적 에너지의 통합을 상징한다.
대락(大樂)을 상징하는 남성 에너지와 불이(不二)의 지혜를 상징하는 여성 에너지의 결합을 통해 참된 본성을 자각할 수 있다.

후기 밀교 수행법 중에는 성에너지를 이용한 수행도 있으나 이를 '저급하다', '좌도(左道, left-handed) 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딴뜨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과거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혹은 동양의 유교적 편견)에 해당한다. 밀교에 대한 이해가 축적된 현대에는 이미 불교의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징적,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밀교의 부모불(혹은 쌍신불, 얍윰Yab-yum)은 지혜와 방편, 혹은 현상과 공성의 합일을 상징한다. 수행에 있어서도 실제 딴뜨릭 수행자 간의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125]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학자 정성준의 설명에 따르면, 인도 후기밀교의 경우 전법스승인 아사리(阿梨)와 수행을 전수받기 위한 제자의 자격은 오계를 비롯해 보살계 뿐만 아니라 삼매야계와 같이 행위가 아닌 내면적 의식을 문제삼는 등 엄격한 계율에 의해 자격을 심사받으며, 밀교수행의 자격도 현교(顯敎)의 경론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시험을 거쳐야만 비로소 관정(灌頂)의식을 통해 밀교수행에 참여할 수 있다. 실제 인도의 밀교수행의 전통을 계승한 티벳사원의 현실도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의해 수행이 이루어지며, 밀교의 관정의식과 입문의식에 동원되는 성과 관련된 도구들도 남존(男尊)의 보리심을 상징하기 위한 술이나, 여존(女尊)을 상징하는 염색된 물을 이용하는 등 인간의 실상(實相)을 불성(佛性)으로 관조하고 자각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들이 사용되고 있다.

후기밀교의 한 시대에는 관상(觀想)에 의지하더라도 성적(性的) 관상을 실천하는 수행이 전통적인 비구계의 율의(律儀)를 범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는데, 이와 관련한 대목이 《비밀집회딴뜨라》의 관정의식을 다룬 《제4관정의궤, Sakiptbhiekavidhi》에 전해진다. 저자는 위끄라마실라 사(Vikramala 寺)의 육현문(六賢門)의 한 사람인 와기슈와라(Vāgīśvara)로 그는 《비밀집회딴뜨라》의 유파인 즈냐나빠다류에 속하며, 현밀(顯密)과 계학(戒學)에 능통한 당시 인도에서 가장 번영한 사원의 학두(學頭)였다.

그가 다룬 제4관정은 인도후기밀교에서 중요시되는 것으로 ①병(甁)관정, ②비밀(秘密)관정, ③반야지(般若智)관정, ④제사(第四)관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략히 소개하면 병관정은 물, 보관, 금강저, 금강령, 명명식(命名式)의 다섯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기물(器物)들은 만다라의 중심을 이루는 오불(五佛)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사리는 제자에게 기물을 부여함으로써 오지(五智)를 성취할 것을 명하는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인 비밀관정과 세 번째 반야지관정은 성적인 요가를 수반하는 과정이다. 먼저 제자는 관상(觀想)을 통해 스승에게 반야모(般若母)를 바치는데 《비밀집회딴뜨라》에는 “푸른 연꽃의 눈을 가졌고, 16세의 나이로 아름다우며 도살자(屠殺者)의 딸이다”라고 묘사하고 있으나, 문헌에는 즈냐나빠다류의 전통에 입각해 문수금강(文殊金剛)의 화현으로 대신하고 있다.

비밀관정은 아사리에 의해 공성(空性)을 상징하는 반야모와 육신의 현상세계로 현현한 방편(方便)의 합일을 통해 반야와 방편의 합일이라는 상징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반야지관정은 제자로 하여금 합일을 상징화한 매개물을 통해 반야(般若)의 대락(大樂)을 체험하게 된다. 마지막 단계의 제4관정은 ‘언어에 의한 관정’으로 아사리는 구두(口頭)로 제자에게 비의(秘義)를 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제4관정의궤》에는 대론자가 “(반야와 방편의 합일을 상징한) 이근교회(二根交會)의 의식이 어찌 비구의 율의를 훼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와기슈와라는 “삼계에 태어난 인간과 제천(諸天) 등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유루(有漏)의 애착을 향수하는 것으로 탐욕을 향수하는 것은 비나야 등에서 금해지고 있는 것이지만, 삼계(三界)를 초월한 신체를 지니고, 유식(唯識)을 자성으로 하는 문수금강(文殊金剛) 등이 현현한 여성들은 그런 류가 아니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론자는 다시 “비나야 등에서 금지되고 있는 외적인 갈마인모(羯磨印母)에 대해서는 어떻게 적정(適正)하다고 할 것인가?”라고 반론하고 있다. 여기서 갈마인모란 현실세계의 육체를 가진 반야모를 가정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 와기슈와라는 “진언이취(眞言理趣)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는 색(色) 등의 일체의 사물을 자심(自心)의 현현(顯現)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꿈과 같은 문수금강을 본성으로 전변한 갈마인모들도 환(幻)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그녀와의 성적유가를 포함한 관정을 실수(實修)한다 하더라도 청정하며, 과실이 없기 때문에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한다.

반면 와기슈와라 후대에 생존했던 인물로 같은 사원의 대학승(大學僧)이었던 아티샤(Atiśa)는 그의 명저인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에서 “범행자(梵行者)는 비밀과 반야의 관정을 실수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하고, 계를 범할 시 악취(惡取)에 떨어지는 죄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있어 와기슈와라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

같은 시대의 아브야까라굽타(Abhaykaragupta)는 《금강의 화환(Vajrāvalī)》에서 “일체가 공성이기 때문에 갈마인모도 또한 공성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그녀와의 유가도 율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고, 반면에 " ‘결고(潔高)한 진실을 신해(信解)하지 않는 비구’인 경우 갈마인모(磨印母)가 아니라 지인(智印)을 사용한다" 하여 와기슈와라와 아티샤와의 절충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청사(靑史)》에는 아브야까라굽타 자신은 위끄라마실라사의 학두로 있으면서 평생 비구의 불범계(不犯戒)를 지키며 결정코 성적 유가를 행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성준,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사리자가 말했다.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을 이루는 것 아닙니까?”

천녀가 말했다.

“부처님께서 자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설한 것입니다. 자만을 완전히 벗어난 자들에게는 ‘일체의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본성이 그대로 해탈’이라고 설합니다.”

《설무구칭경(유마힐경)》(장순용 譯)


통상적으로 우리를 한 가지 불만상태에서 또다른 불만상태로 몰아대는 것과 동일한 욕망 에너지가 딴뜨라의 연금술을 통해서 초월적인 희열과 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변화된다. [...]

욕망의 에너지가 우리의 불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만의 원인, 즉 실제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근본적인 무지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용된다.

티베트의 딴뜨라불교에서는 이렇게 욕망의 에너지를 변화시키는 것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한다. 나무에서  생겨난다는 어떤 벌레들이 있다. 그들의 생애는 나무줄기 속 깊은 곳에서  부화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자신들이 태어난 바로 그 나무를 먹으면서 자란다. 그와 마찬가지로 딴뜨라의 변화 수행을 통해서 욕망은 통찰적 지혜를 낳고 그  다음에 그 지혜는 그 자신을 태어나게 한 욕망을 포함해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통상적인 욕망의 작용과 깨달은 이의 작용은 정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딴뜨라에서는 욕망에서 일어나는 희열의 체험이 마음을 확장시켜서 우리가 모든 제한을 극복할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욕망의 대상과 접촉하는데서 오는 쾌락은 우리의 주의를 제한하고 더 강하고 더 좋은 쾌락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라마 툽텐 예셰, 《딴뜨라 입문》(주민황 譯)


어떤 때에는 잡신(雜神)들이 잘생기고 피부 좋고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매력적인 청년으로 변신하여 나타나기도 했다. [...] 음욕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 색정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행위를 했지만 그 자체를 환상으로 보는 삼매에 드니 대부분 실체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어 보살의 대치법(對治法)을 수행하니 몇몇은 검은 시체로, 몇몇은 늙고 추한 모습으로, 몇몇은 문둥병 환자로, 몇몇은 귀머거리, 장애자, 바보와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여 모두 사라져버렸다.

겔와 장춥,《예세초겔의 삶과 가르침》(설오 譯)


성문승에서는 대체로 번뇌를 억제하는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적정(寂靜)을 유지하고 번뇌의 소멸을 추구한다. 반면 대승의 바라밀승에 이르게 되면 《유마경》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보살은 번뇌의 본성과 보리(菩提)의 본성이 모두 청정하고 공(空)하다는 불이(不二)의 견지(見地)에서 번뇌를 회피하지 않고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번뇌는 자연히 소멸된다. 성문과 달리 보살에게는 번뇌로 인해 남겨진 습기(習氣) 혹은 소지장(所知障)의 제거가 주된 관건이며, 소지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번뇌장 역시 함께 제거된다.

더 나아가 대승의 금강승에 이르러서는 독초(毒草)를 이용해 효능 좋은 약을 만들듯이 더욱 적극적으로 번뇌를 활용하여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의 결과를 얻는 특별한 방식을 따른다. 번뇌를 방편으로 활용하는 점은 바라밀승과 금강승이 비슷하지만, 번뇌 자체가 곧 그대로 방편이 되는 것은 금강승만의 특징이다.[126] 이러한 금강승의 급진적ㆍ전복적 발상은 고통받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최대한 신속히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는 절실한 보리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보리심이 없다면 금강승을 수행할 이유도 없고 수행해서도 안되며, 도리어 타락하여 막중한 악업을 지을 수도 있다.

여전히 바라밀승과 마찬가지로 금강승에서도 번뇌는 고통의 원인이기에 극복의 대상이며, 최종적으로 "나무에서 생겨난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듯" 번뇌에서 얻는 에너지는 수행을 통해 번뇌 그 자체를 제거하는데 이용된다. 성적 요가 수행시 가장 미세한 의식을 활용해 공성을 깨닫게 되면 번뇌와 지혜라는 두 상반된 마음은 함께 공존할 수 없어 공성을 깨닫는 즉시 성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는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통상적인 성적 행위는 끝없는 갈망과 불만, 흐릿하고 둔한 의식 상태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금강승에서는 단순한 성적 희열만을 깨달음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금강승의 성적 요가는 범속한 성행위와는 다르다. 성적 요가를 수행하려면 바라밀승과 금강승의 공통된 도(道)인 보리심과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를 기반으로 대부분의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미세한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예를 들어 티베트의 대표적인 여성 수행자 예세 초겔(ye shes mtsho rgyal)은 성적 요가를 행한 금강승 수행자였지만, 여러 잡신(雜神)들이 매혹적인 남성의 몸으로 유혹하여도 전혀 동요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번뇌만이 남아있던 상태였다. 또한 예세 초겔은 기(prāṇa), 맥(nāḍī), 명점(bindu) 수행으로 신체의 미세한 에너지를 조절하여 자재(自在)한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보리심의 동기와 공성 인식, 금강승의 스승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 스승의 지도와 별해탈계ㆍ보살계ㆍ싸마야계의 통제 하에
  • 딴뜨라의 상징과 비유, 철학, 기법, 내적 논리에 관한 이론적 지식과 고도의 집중력을 갖추고
  • 정교한 의식과 명상, 신체 에너지 운용을 거쳐 이루어지는

금강승의 번뇌 활용은 대승 유가행(瑜伽行)의 정점으로서 마치 독성 있는 원재료로부터 유효 성분만을 추출하여 정제하는 정밀한 제약(製藥) 공정과도 같다. 번뇌는 중생의 가장 강력한 적이지만, 동시에 번뇌로 작용하는 의식 또한 의식의 일종이므로 밝음과 인지라는 의식의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금강승 수행을 통해 번뇌로 작용하는 오염된 의식으로부터 오염만 제거할 수 있다면, 이는 즉시 공성을 인식하는 강력한 의식으로 전환되어 공성을 인식하는 힘은 더욱 배가(倍加)될 수 있다. 단, 주의할 점은 금강승의 번뇌론이 결코 도덕윤리의 전적인 폐기나 아노미(anomie),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리심을 바탕으로 성문승의 별해탈계ㆍ바라밀승의 보살계ㆍ금강승의 싸마야계 모두를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금강승의 윤리ㆍ계율관은 오히려 다른 승(乘)에 비해 더욱 확장ㆍ심화된 다층적 규범 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출가한 사미, 사미니나 비구, 비구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직접적인 수행을 하지 않는다. 일체 음행(淫行)을 금하는 출가계를 수지(受持)하였기 때문이다. 아티샤가 《보리도등론》에서 밝혔듯 무상요가를 통해 얻는 공덕보다 출가의 공덕이 더욱 크고, 또한 만일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성적 요가를 수행할 경우 바라이죄[127]를 범하여 매우 엄중한 과보를 받게 되므로 수행을 성취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지옥에 떨어지는 원인을 얻게 된다. 대신 비구, 비구니 같은 범행자(梵行者)는 직접적인 육체적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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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다끼니(dakini, 空行母) 본존인
바즈라요기니(Vajrayogini)

여성은 하늘이며, 여성은 법(dharma)이다.

여성은 실로 가장 수승한 고행(tapas)이다.

여성은 붓다이며, 여성은 승가이고, 여성은 반야바라밀이다.

《찬다마하로샤나 탄트라, ⅷ: 29-30》

폴 윌리엄스, 앤서니 트라이브, 알렉산더 윈, 《인도불교사상(개정증보판)》(안성두, 방정란 譯)


금강승에서 여성을 단순히 성력의 심볼로만 취급한다는 주장도 온당치 못하다. 비록 금강승 전통에서 여성이 갖는 실질적인 지위와 역할에 관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밀승과 뚜렷이 대비되는 여성성의 긍정과 여성 수행자의 진취적 면모를 금강승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금강승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별 없이 남녀 모두 동등한 수행자로 취급되며, 때로는 여성이 스승이 되어 남성 수행자를 지도하는 등 금강승 수행자로서의 여성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금강승의 계율인 사마야(samaya)에서는 여성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

미란다 쇼(Miranda Shaw) 리치몬드대 교수는 미란다 쇼,《열정적 깨달음: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조승미 譯)에서 딴뜨릭 불교는 대승 불교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을 함께하지만, 상징과 의식 분야에서 친밀감과 성(性), 젠더와 체현을 해탈의 길에 포함시키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하였다. 남녀가 나란히 등장하는 패턴은 남성과 여성이 착취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서로 일깨워주는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믿음과 숭고한 이상을 나타낸다.

여성과 여성의 가르침이 등장하고 여성의 에너지와 영적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딴뜨릭 종교성의 특징이다. 딴뜨릭 불교의 여성들은 격렬한 지혜의 화염 속에서 즐겁게 춤추며 태연히 번뇌의 시체를 밟는 거침없고 대담한 모습을 보인다. 그녀들은 가부장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열정적이고 자유로우며 깨달은 여성들이었다.

리타 그로스(Rita Gross) 위스콘신대 교수 또한 그녀의 저서 리타 그로스,《불교 페미니즘: 가부장제 이후의 불교》(옥복연 譯)에서 금강승 불교만큼 여성의 정신적 발달과 성숙에 유리한 종교를 찾기 힘들다고 강조하였다. 그로스는 불교 전반에 걸친 남성 중심적 관행과 가부장성, 그리고 비구니 승단 없이 사미니 승단만 존재하는 티베트 불교 교단 내의 열악한 여성수행자의 지위에 대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비판하였다.[1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타 그로스는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가 다른 어떤 불교 분파보다 여성성을 중시하고, 뛰어난 여성 스승들이 많이 존재하며, 수행에 필수적인 여성 상징들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불교의 가부장성을 극복하고 불교를 성평등적으로 재구축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참고로 현대 티베트 불교 여성 수행자들의 면모는 미카엘라 하스, 《다키니 파워》(김영란, 장윤정 譯), 비키 메켄지, 《나는 여성의 몸으로 붓다가 되리라》(세등 譯)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1.2. 사상적 배경[편집]


불교학자 정성준은 밀교의 성, 육체, 번뇌 개념에 관한 사상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밀교를 통해 성과 육체, 번뇌를 다룬 내용은 기존의 대승불교(顯敎)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밀교의 교리와 수행체계를 최초로 체계화한 《대일경》은 대승불교사상이 다양한 측면에서 결합된 것으로, 중관, 유식, 여래장사상이 경전에 반영되어 있다. 경전의 비로자나여래는 절대법신인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을 계승한 것이지만 보살과 같이 공성에 머물면서 중생구호를 위해 다양한 신변을 나투는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밀교의 붓다들은 열반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수용신과 육신을 통해 중생을 직접적으로 구호하는 존재들이다.

현교의 경우 중생의 세계에 드나드는 존재는 중생구제를 위해 성불을 포기한 대비천제(大悲闡提)인 대보살들로서 관세음보살이나, 보현보살, 문수보살 등이 그 예이다. 열반을 성취한 현교의 붓다는 열반이라는 절대세계에 도달한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지혜의 광명인 수용신의 범주를 넘지 않으며, 중생의 현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대보살의 몫이다. 그러나 유식계의 논서를 통한 불신론(佛身論)의 전개는 붓다의 몸은 법신, 수용신, 화신의 세 가지가 있으며, 열반의 절대신이라도 삼계의 범주를 다양한 불신을 통해 넘나드는 것으로 이론화하였다.

《대일경》 이후 성립된 《금강정경》에는 중생의 의식과 우주법계의 현상세계가 오불의 속성(屬性)을 지니고, 이에 입각해 현화한다고 보는 부족사상(部族思想)을 체계적으로 설하였다. 오불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아촉불, 보생불, 무량수불, 불공성취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도 후기 밀교경전에는 경전마다 다르지만 오불의 범주에 번뇌를 포함시켜, 탐진치(貪瞋癡)와 아만(我慢), 질투(嫉妬)의 다섯 번뇌도 불성의 부족으로서 성불한 붓다에게 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의지와 갈망의 대번뇌로 전변한다고 설하고 있다.

《금강정경》에 설해진 부족사상과 번뇌의 긍정은 인도 후기밀교의 성과 번뇌의 긍정이라는 대전제를 이끌어내는 핵심사상이 된다. 그러나 밀교의 긍정은 중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성의 지혜에 입각한 불지(佛智)에 의해 조명되었을 때 비로소 대번뇌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이다. 《금강정경》에서 설해진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수행은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보살이 육신을 사바세계에 둔 채 수용신(受用身)의 몸으로 색구경천(色究竟天)에서 일체여래의 가르침에 의해 성불한다는 내용이 설해지고 있는데, 오상성신의 증금강신(證金剛身)의 수행은 중생의 삼업(三業)의 현실을 신금강, 어금강, 의금강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그 이론적 배경은 마음의 자성을 깨닫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수행이념이 경전을 통해 형식화된 것이다.

한편 대반야경에 소속된 《반야이취분(般若理趣分)》은 공성의 지혜를 통해 정(淨)과 부정(不淨)의 분별을 초월한 보살에게 번뇌와 육체적 현실은 청정한 진여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는 극적인 표현을 볼 수 있는데, 같은 품은 독립적인 밀교경전으로 조직화되어 《이취경(理趣經)》으로 출현하고, 여기에는 인간의 감촉과 애욕의 수용과정을 17가지로 분류한 ‘17청정구(淸淨句)’로 표현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인도후기밀교의 주석은 17청정구를 포옹과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 애락(愛樂)을 향수하는 남녀의 성교(性交)로 해석한 주석서도 존재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의 밀교화는 외교적 요소를 단기간에 수용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반야와 중관, 유식사상 등의 대승불교사상을 점진적으로 반영시켜 경전화된 과정을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밀교화가 외교의 수행을 급작스럽게 받아들인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성장과정에 의해 경전화되고 출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밀교에 있어서 육체뿐만 아니라, 번뇌와 성마저도 불지(佛智)에 의해 관조할 때 현실은 실제(實際)로서 법계의 현현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연원은 연기법의 무아사상으로부터 반야, 공, 유식 등 불교사상의 전개에 따른 것으로 밀교는 딴뜨리즘에 의해 문제시 되었던 성과 번뇌를 전통적인 불교사상의 영역에서 해석한 것이다.
정성준,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선남자여, 나는 ‘욕심을 떠난 실제(實際)의 청정한 법문’을 성취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이 나를 보면 나는 천녀가 되고 사람이 나를 보면 나는 인녀(人女)가 되며, 내지 비인(非人)이 나를 보면 나는 비인녀(非人女)가 되는데 그 몸이 곱고 묘하며 광명과 빛깔이 뛰어나고 훌륭하여 견줄 데 없느니라.

욕심에 결박된 중생이 내게 오면 나는 설법하여 그들이 모두 욕심을 떠나 경계에 집착하지 않는 삼매를 얻게 하고 나를 보는 중생은 환희(歡喜) 삼매를 얻으며, 나와 말하는 중생은 걸림없는 묘한 음성 삼매를 얻고 내 손을 잡는 중생은 일체 부처 국토에 나아가는 삼매를 얻으며, 나와 함께 자는 중생은 해탈 광명 삼매를 얻고 눈으로 나를 보는 중생은 고요한 모든 행의 삼매를 얻느니라.

또 내 빈신(頻申)을 보는 중생은 외도를 깨뜨리는 삼매를 얻고 나를 관찰하는 중생은 일체 부처님 경계의 광명 삼매를 얻으며, 나를 껴안는 중생은 일체 중생을 포섭하는 삼매를 얻고 나와 입맞추는 중생은 모든 공덕의 비밀한 창고 삼매를 얻나니, 내게 오는 이런 일체 중생은 다 ‘욕심을 떠난 실제 법문’을 얻느니라."

《대방광불화엄경》〈입법계품〉(이운허 譯)


《화엄경》에서는 바수밀다(Vasumitra, 婆須蜜多/伐蘇蜜多)를 53선지식 중 하나로 소개하며 탐욕이 지혜로 바뀌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과정을 보여준다. 금강승의 사부ㆍ행부ㆍ요가부ㆍ무상요가부는 수행자가 욕망의 에너지를 정신적인 수행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각각 관락(觀樂), 소락(笑樂), 집수락(執手樂), 옹포락(擁抱樂)의 〈사락(四樂)〉으로 비유되는데, 그 출처가 바로 《화엄경》〈입법계품〉의 바수밀다 일화이다. 금강승에서는 욕망을 지혜로 전환할 근기가 되지 않은 이에게는 금강승의 가르침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관락(觀樂)에 비유되는 소작 딴뜨라(Kryatantra)는 관상의 대상인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생긴 탐심의 즐거움을 수행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근기로 본존요가의 수행보다 외적인 의례에 중점을 둔 밀경이나 밀교 수행이다.
  • 소락(笑樂)에 비유되는 행 딴뜨라(Caryatantra)는 관상의 대상인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생긴 탐심의 즐거움과 서로의 눈을 보며 교감하는 탐심의 즐거움까지 수행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근기로 본존요가의 수행과 외적인 의례를 동등하게 중시하는 밀경이나 밀교 수행이다.
  • 집수락(執手樂)에 비유되는 요가 딴뜨라(Yogatantra)는 관상의 대상인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서로의 눈을 보며 교감하면서 생긴 탐심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서로 손을 잡아서 생긴 탐심의 즐거움까지도 수행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근기로 본존요가의 수행에 중점을 둔 밀경이나 밀교 수행이다.
  • 옹포락(擁抱樂)에 비유되는 무상요가 딴뜨라(Anuttarayogatantra)는 관상의 대상인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서로 눈을 보며 교감하고, 손잡아서 생긴 탐심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서로 껴안아 합일해서 생긴 탐심의 즐거움까지도 수행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근기로 본존요가의 수행을 위주로 한 밀경이나 밀교 수행이다.


13.1.3. 원리, 자격, 금기[편집]


금강승의 성적 요가는 중관, 유식, 여래장 등 대승 불교 철학과 금강승 고유의 인체 생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금강승의 입문은 매우 제한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무상 요가 딴뜨라의 성적 요가는 극소수의 자격을 갖춘 최상근기의 수행자-"생각 만으로 땅에 떨어진 열매를 다시 가지에 붙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초월적인 능력을 갖춘-에게만 허용된다. 출가계를 수지(受持)한 출가 수행자는 직접적인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한다. 또한 성적 요가 중에는 복잡하고 때로 위험할 수 있는 수행 절차를 거치며, 반드시 정해진 금기를 준수해야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1981년 하버드대에서 열린 초청법회에서 딴뜨라와 성교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 현재 미국에는 성교(性交)와 딴뜨라를 연결시켜서 성교를 수행이라 하고, 성교를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선전하는 책이나 단체들이 많습니다. 전통적인 딴뜨라의 가르침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성교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독신생활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 사실 딴뜨라에 대해서 오해할 위험이 큽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 가지 단계의 의식이 있고, 가장 미세한 의식을 수행에 이용할 때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경험하는 것은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중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미세한 의식의 힘을 실제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을 고의적으로 제어하고 정지시킬 수 있다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이 작용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미세한 의식이 작용할 뿐 아니라, 그 의식은 방심하지 않고, 예민하고, 명석합니다. 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은 공성과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수행자는 포착하기 쉬운 단계의 의식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해야 되고, 그러려면 백보리(白菩提)와 적보리(赤菩提)[129]

같은 근본적인 요소들을 이동시켜서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딴뜨라 수행에는 성교가 그런 식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통상적인 의미의 성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여섯 가지 근본 요소로 구성됩니다. 어떤 설명에 의하면, 그 중 세 요소는 어머니에게서 받고, 세 요소는 아버지에게서 받는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서 받는 세 요소는 뼈와 골수와 정액이고, 어머니에게서 받는 세 요소는 살과 피부와 피라고 합니다. 또 다른 설명에 의하면 여섯 가지 요소는 지, 수, 화, 풍, 맥, 명점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의 물리적 육체라는 특별한 조건으로 인해서, 육체 안의 요소들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미세한 단계의 의식의 안에 변화가 옵니다. 예를 들어 재채기를 하거나 하품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성교를 하는 동안에도 그런 의식의 변화가 잠시 일어납니다.[130]

의식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본성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의식의 변화는 성교를 하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수행자는 그것을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딴뜨라 수행에서는 성교를 방편으로 이용합니다.[131]

욕계에 살면서 아직 욕망을 버리지 못한 어느 딴뜨라 수행자가 수행의 일부로서 고의적으로 마음에 욕망을 일으킨 다음에, 근본 요소들이 변화하고, 포착하기 쉬운 단계들의 마음 대신에 미세한 마음들이 작용하는 동안, 딴뜨라 수행자는 가장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이용해서 공성을 깨닫습니다. 하나의 의식이 두 가지의 상반된 유형(번뇌와 지혜)의 이해를 동시에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 미세한 의식이 공성(空性)을 깨달을 때 욕망을 일으킨 마음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맥과 기와 명점에 변화를 유발하는 집착과 욕망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은 본래적 존재가 있다는 생각(아집我執과 법집法執)입니다. 하지만 그런 욕망으로 인해 나타나게 된 미세한 마음이 공성을 깨달으면, 그 미세한 마음은 욕망을 일으키도록 도왔던 '본래적 존재를 생각하는 의식'을 없애는 치료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나무에서 생겨난 벌레가 결국은 그 나무까지 갉아먹는다는 예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수행들을 하는 사람은 공성과 무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거나 경험을 해야 하고, 둘째로 그런 수행의 목표는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므로 수행자는 다른 중생들을 돕기 위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이타적인 의도를 가져야만 합니다. 공성을 이해하고 이타적인 의도를 갖지 않으면, 그런 딴뜨라 수행의 기법들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무상 요가 딴뜨라의 몇몇 수행들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몸 안의 기가 중맥(中脈)으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제가 말한 육체적 변화는 주로 기가 중앙 기맥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머물다가 사라지는 결과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강력한 방법은 목의 맥도(脉道)들을 죄는 것인데, 그 방법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을 성공할 수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방법들이 딴뜨라 수행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잘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하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딴뜨라 수행을 밀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수행한 숙련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나 수행자가 자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거나 딴뜨라 수행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쌓지 않았다면 딴뜨라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 하버드대 강의》(주민황 譯)



13.1.4. 논란[편집]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가 여성성을 중시하고 다수의 뛰어난 여성 수행자들을 배출하였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스트 여성 학자들 사이에서는 금강승의 성적 요가가 여성에게 능력을 부여하는지 반대로 여성을 착취하는지 여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다. 특히 티베트 불교가 현대에 이르러 북미, 유럽 등 서구 사회에 널리 전파되면서 문화적 차이와 금강승의 폐쇄성으로 인해 많은 오해와 논란이 야기되었다.

성적 요가의 효용을 인정하면서도 성적 요가의 실천을 엄격히 제한했던 겔룩과는 달리 닝마, 까규 등 금강승 수행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종파들은 성적 요가 수행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티베트 불교가 서구에 도입되던 초창기에 히피(Hippie) 문화와 68운동의 열풍에 힘입어 서구 사회에 널리 알려진 티베트 불교 종파도 금강승 수행을 강조하는 닝마, 까규였다.

서구 사회 포교에 나섰던 재가수행자 스승들 중에는 자신의 서양인 제자에게 성적 요가를 함께 수행할 '영적 배우자' 혹은 '비밀 배우자'인 쌍윰(gsang yum)이 되어줄 것을 제안하는 경우가 있었다. 개중에는 스승과 원만한 동반자 관계를 맺는 제자도 있었지만,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며 후회하고 스승을 비난하거나, 수행 공동체 내에서 배척당하고 가쉽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제자들도 종종 있었다.

홀리 게일리(Holly Gayley) 콜로라도대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 배경에 서구인들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환상과 문화적 차이, 금강승의 폐쇄성으로 인한 정보 부족이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금강승 관련 유물이 박물관에 전시되고 금강승 서적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항목에 오르는 등 금강승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에게 널리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딴뜨라 문헌 일부는 번역이 금지될 정도로 금강승 교의(敎義)의 공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금강승의 계율인 싸마야에서 금강승을 수행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금강승의 가르침을 공개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Holly Gayley, 《Revisiting the Secret Consort (gsang yum) in Tibetan Buddhism》

2000년대 미투 운동의 발흥과 북미, 유럽, 인도 등에서 발생한 티베트 불교 지도자들의 잇단 성추문으로 인해 금강승의 교리도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다. 일련의 성 스캔들은 종파를 불문하고 발생하였으며, 성적 요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132] 그러나 구루 요가, 싸마야(Samaya)계, 청정 인식같은 여타의 금강승 교리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사태가 악화된 측면이 있다.

금강승에는 스승을 비롯한 일체 대상을 청정하고 원만한 본성으로 인식하는 청정 인식(dag snang)이란 가르침이 있다. 진정한 청정 인식은 참된 진리의 세계,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청정 인식이 맹목적인 도그마로 변질되면서 스승의 부적절한 언행까지도 일종의 "방편(Skt: upaya)" 혹은 파격적인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미친 지혜(Tib: ye shes ’chol ba)"로 정당화되었고, 계율, 자비와 같은 불교의 다른 주요한 가치들이 실종되면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133]

이와 관련하여 독일 루트비히 막시밀리안스 대학의 안네 이리스 미리암 안더스(Anne Iris Miriam Anders)는 불교 단체의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청정 인식이나 업의 정화(karma purification)와 같은 금강승의 개념이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착취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되었고, 스승의 가피를 구하는 금강승의 구루 요가(Guru Yoga)는 자기 책임을 방기(放棄)하고 스승에게 의존하는 성향을 강화시켰다고 분석하였다.
Anne Iris Miriam Anders, 《Silencing and Oblivion of Psychological Trauma, Its Unconscious Aspects, and Their Impact on the Inflation of Vajrayāna. An Analysis of Cross-Group Dynamics and Recent Developments in Buddhist Groups Based on Qualitative Data》

당신은 이 상황을 외부에 공개해야 합니다. 신문에 출판하여 스승들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이들이 법을 가르치면서도 오히려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알리십시오. 이런 상황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이를 공개하는 것이 약간의 도움과 이익을 가져올 수 있지만, 그 밖에 우리의 설명은 이런 악행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위선적이고 거짓된 스승의 경우 그들의 이름을 공개하고, 마지막으로 필요하다면 경찰에 신고해 처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일부가 체포되었고 대만에서도 아마 체포될 사람이 몇몇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교리를 가르치는 소수의 ‘라마’라는 직함을 다는 사람들이 그 악행이 발각될 때, 이런 상황은 세간의 이목을 끌지만, 이것이 법(부처님의 가르침)에 해를 끼칠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교사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악행이 드러난 이 스승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티베트인들과 대만인들을 위한 강연에서#


티베트 불교 교단 내 성적 남용이 이슈화되면서 티베트 불교계 지도자들도 이에 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불교 교단 내부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그는 1993년 서방 불교 교사들을 위한 네트워크가 참석한 학회에서 서양의 일부 티베트 불교 라마들과 선불교 교사들에 의해 심한 학대가 자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학대하는 영적 교사들이 그들의 난폭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면 제자들은 학대를 공론화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한 몇 년 후 티베트인들과 대만인들이 참석한 강연에서도 다시 한 번 같은 조언을 언급했다.# 201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달라이 라마는 성학대 피해자들과 면담을 갖고 "불교 지도자들의 성학대를 25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서 학대에 연루된 지도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

여성 환생자 스승인 칸드로 린뽀체는 상식과 계율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의문스런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조사할 것을 권장했다. # 밍규르 린뽀체는 신체적ㆍ성적ㆍ심리적 학대는 가르침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수행 공동체 내부의 심각한 윤리적 위반은 공개되어야 하고 만일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으면 외부에 알릴 것을 권고했다. #

일련의 사태로 인해 금강승의 가르침이 잘못 이해되는 것을 우려하는 스승들도 있었다. 종사르 켄체 린뽀체는 피해자들의 입장에 공감을 표하는 한편, SNS와 공개 대담을 통해 현대 서구인들의 금강승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 아래는 2018년 프랑스 몽펠리에 레랍 링(Lerab ling)에서 열린 대담의 요약문이다.

금강승이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이유는 기괴하고 이상해서가 아닌, 반대로 너무나 심오하고 소중한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금강승은 스승과 제자 간 일대일로 은밀히 전수되는 가르침이었지만 티벳으로 전해지며 공개적인 의례로 변형된 부분이 있다. 금강승의 상징, 의례, 기물 등으로 인해 컬트(cult)로 오해받기도 하고 사성제, 사법인, 공성, 보리심 같은 가르침이 안타깝게도 뒷전으로 밀려날 때도 있었다.

금강승은 불교의 팔만 사천 가르침 중 하나이며 굳이 금강승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만일 금강승에 입문한다면 먼저 금강승에서의 스승의 의미와 스승-제자 관계가 여타 가르침과 다름을 알아야 한다. 금강승의 스승을 선택할 때는 먼저 반드시 스승의 자격을 살피는 과정을 거친다. 스승이 될 인물을 관찰하는 기간은 정해진 기한이 없다. 스승의 자격을 검증할 때는 분석과 회의, 의구심을 총동원하여 매우 신중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만일 다른 요인으로 인해 스승의 자격을 검증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검증 대상인 인물과 자신 간에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없거나 아직 인연이 무르익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스승을 찾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다.

일단 금강승의 스승으로 모시기로 서약한 후에는 스승에게 헌신하고 그의 모든 행위를 깨달은 행위로 여겨야 한다. 이는 마치 위험한 절벽을 처음 오를 때 숙련된 가이드의 지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만일 스승에 대한 헌신과 청정 인식이 없다면, 제자의 이분법적인 마음은 끊임없이 스승에게서 결점과 결점 아닌 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수정하려 할 것이다. 또한 스승에게 헌신하고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에고(ego)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만일 에고를 제거하지 못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영적 물질주의(spritual materialism)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승의 모든 행위를 깨달은 행위로 본다고 하여 곧 스승이 아무 행위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금강승에서는 스승에 대한 헌신 뿐 아니라 제자에 대한 헌신도 중요하다. 진정한 금강승의 스승에게 제자란 친자녀 이상의 존재이고,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승에게도 엄청난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는 일이다. 또한 아무리 높은 깨달음을 얻은 스승이라도 그의 행위는 업과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스승은 지혜로써 모든 행위를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고, 바로 그러한 다양한 방편이 금강승의 강점이기도 하다.

금강승의 방편 중 하나인 구루 요가는 세간의 오해와 달리 스스로를 의지하라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스승에는 외(外), 내(內), 밀(密)의 스승이 있는데 스승으로 섬기는 인물은 외적 스승에 해당한다. 구루 요가에서는 최종 단계에 외적 스승이 제자에게 흡수되어 스승과 제자가 불가분(不可分)으로 하나되는 관상(觀想)을 한다. 이는 내적, 밀적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스승인 제자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 과정이며 이 때 외적 스승은 본성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미친 지혜(ye shes ’chol ba)"는 남을 때리고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다. 미친 지혜 역시 에고에 반(反)하는 수행의 방식 중 하나이다. '미쳤다'라는 것은 정상에서 벗어남, 초월함을 의미한다. 마치 아늑한 러그(rug)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러그를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며 마음챙김 명상을 하고 "불교"를 믿는 정상적인 영역에 머물지만, 그러나 불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영적인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다.

스승의 모든 행위를 깨달은 행위나 방편으로 보는 것은 맹목적일 수 있고, 만일 그렇게 보지 않으면 싸마야를 어기는 것이 되어 딜레마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실 이는 일종의 축복이다. "미친 지혜"와 마찬가지로 정상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는 전위적인(avant-garde) 방식이다. 싸마야계는 다른 계에 비해 복구하기도 훨씬 쉽다. 우리 본성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제자에게 스승이 비윤리적인 행위를 방편으로 쓰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금강승의 싸마야계를 받으려고 너무 서둘러서는 안된다. 먼저 성문승(소승), 대승의 가르침부터 익힐 필요가 있다.

구루(Guru)를 투표와 같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출해야 된다는 둥 금강승의 전통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발상이지 자비로운 방식이 아니다. 프랑스 출신 작곡가 비제(Bizet)의 곡에 자기 취향대로 폭포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 천둥 소리들을 추가하다보면 점점 원래 비제의 곡은 잊혀지고 나중에는 캘리포니아에서 폭포소리로 뒤덮힌 프랑스인 비제의 곡을 배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Dzongsar Jamyang Khyentse Rinpoche, 《Vajrayana Buddhism in the West: The Challenges and Misunderstandings of our Times》


2021년 종사르 켄체 린포체는 2010년대 금강승 구루 관련 스캔들로 야기된 금강승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Dzongsar Jamyang Khyentse,《Poison is Medicine:Clarifying the Vajrayana》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상기한 레랍 링에서의 대담을 포함하여 2018년 초 베를린, 파리, 런던, 레랍 링에 위치한 릭빠 센터에서의 대담들을 기반으로 저술되었다. 저자가 이끄는 수행 단체 '싯다르타즈 인텐트(Siddharta's Intent)'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ePUB, PDF 파일 양식의 전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으며, 관련 질문을 보낼 수 있는 메일 주소도 함께 공개되어 있다.


13.2. 승려의 결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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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 수행자 응악빠
출가 승려

티베트 불교를 대처승을 허용하는 불교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을 비롯하여 닝마, 까규, 사캬 등 모든 종파의 출가계를 받은 승려는 독신을 지키는 청정 비구이다. 또한 티베트 불교에는 재가 수행자인 응악빠보다 출가 수행자인 승려의 수가 훨씬 많다.

출가 승려와는 별개로 닝마 등 일부 종파에는 대승불교의 재가 수행자 전통을 계승한 응악빠(sngags pa, 남성)/응악마(sngags ma, 여성)라는 재가 수행자들이 존재한다. 대승 불교는 재가자 또한 출가자와 동등한 수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대승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은 대부분의 도상(iconography)에서 천신(天神)의 복식을 입은 재가자로 묘사되며, 대승 경전의 도입부에서도 성문 승가와 별도의 집단인 보살 승가 혹은 보살중(菩薩衆)으로 등장한다. 이들 보살 출가자 및 재가자들은 성문의 출가자들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교단을 지탱하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인도의 마하싯다(mahasiddha)와 빤디따(pandita) 중에는 출가자 뿐만 아니라 재가자도 존재하며[134] 티베트의 빠드마삼바와, 예세 초겔, 돔뙨빠, 밀라레빠 등도 불보살의 과위를 성취한 재가자 출신의 성현으로 여겨진다. 특히 불교 딴뜨리즘의 경우 요기니 딴뜨라(yogini tantra)의 등장 이후 승원 외부의 재가자 요기(yogi), 요기니(yogini)들 중심으로 딴뜨릭 수행이 성행했으며, 출재가자 여부와 신분 계급의 차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수행을 통해 밀교의 성취자인 싯다(siddha)가 될 수 있었다. 최경아, 《인도초기대승의 수행문화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기원과 전개》 안성두, 《대승경전 찬술의 배경과 과정》

재가 수행자인 응악빠/응악마는 밀교 수행자로서 우바새/우바이계, 보살계와 밀교계를 받고 그들의 사원에서 각종 의식을 집전하며 수행에 전념하므로 일반적인 세속의 재가 불자와는 구별된다. 이들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질 수 있다. 응악빠에는 혈통을 통해 대(代)를 거쳐 이어지는 전승과 법맥의 전수를 통해 이어지는 전승 두 종류가 있다. 사캬의 수장인 사캬 티진(sa skya khri 'dzin)의 직위도 쾬(Khon)족 혈통에 의해 계승되는 응악빠의 일종이다.

티베트 불교의 환생자들 중에는 출가 비구인 환생자도 있지만 결혼을 하는 환생자도 있다. 출가 수행자가 되기를 원치 않거나, 성적 요가의 성취를 위해 재가 수행자로 남기를 원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환생자가 수승한 법연(法緣)을 갖춘 환경에서 다시 환생할 수 있도록 태(胎)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또한 환생자들 중에는 뗄된(gter ston)이기 때문에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뗄된이란 뗄마(gter ma)라는 빠드마삼바와와 예세 초겔의 보장(寶藏)을 발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컬으며, 주로 닝마빠 수행자 중에 많다. 만약 뗄된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단명(短命)하거나 보장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장애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뗄된이 뗄마를 발견하는 과정 역시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보적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한 환생자들은 출가계를 받지 않거나, 환계 후 환속한 재가 수행자이며 출가 수행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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닝마에는 일찍이 출가 수행자 전승과 재가 수행자 전승이 공존했다.

출가 수행자, 즉 사미, 사미니인 게출빠(dge tshul pa, 남성)/게출마(dge tshul ma, 여성)나 비구, 비구니인 겔롱빠(dge slong pa, 남성)/겔롱마(dge slong ma, 여성)는 일체 음행을 금하는 출가계에 의거하여 결혼을 할 수 없고 성관계도 당연히 가질 수 없다. 승려의 경우 무상요가 딴뜨라 수행 가운데 하나인 성적 요가도 직접적인 결합 대신 관상(觀想)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에는 출가계를 받았음에도 결혼한 이른바 '대처승'은 없다. 만일 승려가 결혼을 원한다면 다른 불교 교단과 마찬가지로 출가계를 환계(還戒)하고 환속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티베트 불교의 최대 종파인 겔룩은 계율을 특히 강조하여 사원 공동체 구성원 절대 다수가 비구계나 사미(니)계를 받은 승려인 출가 수행자다.

《초불(初佛)대(大)딴뜨라》에서

애써 금하기 때문에

비밀(秘密)과 지혜(智慧)의 관정을

범행자(梵行者)는 받아서는 안된다.

만약 관정을 받는다면

범행의 고행에 머물면서

금한 것을 행한 것이 되기 때문에

고행의 율의를 잃게 된다.

금계(禁戒)를 가진 이가

바라이(波羅夷)를 범하게 되고

그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보리도등론》

《달라이라마의 보리도등론》(양승규 譯)


전통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용수보살부터 아티샤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요한 대승불교 논사들이 음행(淫行)을 범하지 않는 청정 비구의 신분으로 밀교를 수행했다고 본다. 다만 학계에서는 용수(나가르주나)나 성천(아르야데바) 등 용수와 그의 제자들이 저술하였다는 용수류(龍樹流) 혹은 성자부자류(聖者父子流) 밀교 관련 논서들을 9~10세기에 지어진 후대의 저작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용수 같은 초기 중관 논사들이 밀교수행자였는지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아티샤 등 후기 대승 논사들이 밀교수행자였으며 동시에 범행자(梵行者)의 성적 요가를 엄격히 금지하여 범계(犯戒)에 유의했음은 문헌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승려의 계율을 중시했던 겔룩의 창시자 쫑카빠도 평생 독신의 비구 신분이었고 대신 중음(中陰)에서 밀교 수행법을 통해 불과(佛果)를 성취했다고 알려졌다.

티베트 불교에는 많은 재가 수행자 요기, 요기니들이 있지만, 티베트 불교의 기반은 다른 불교 종파와 마찬가지로 승원(僧院, monastery) 중심의 출가불교라고 할 수 있다. 쫑카빠는 《보리도차제광론》에서 경론에 의거하여 재가자의 허물과 출가자의 공덕에 대해 분명히 밝혔다. 쫑카빠는 세속에서 수행하기 어렵고 출가의 공덕이 크기 때문에 재가자는 출가자가 되기를 발원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바라밀승은 물론 금강승을 수행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루는데도 출가자가 되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또한 쫑카빠는 별해탈계, 보살계, 금강승계 등 삼종율의(三種律儀)에 있어서 별해탈계가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므로 별해탈계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계율 뿐 아니라 의식, 예법, 복식 등에 있어서도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의 구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 불교 전통에 따라 티베트 불교의 재가 수행자는 머리를 기르고 백색 의복을 입지만, 출가 수행자는 삭발하고 사프란(saffron)색 가사를 입는다.[135] 하지만 때로 복식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아 혼동을 주는 경우도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13.3. 육식?[편집]


티베트는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농경보다는 목축이 주를 이루었다. 식생활도 보리같은 곡물과 육류, 유제품 위주이며 여기에 차(茶)를 더하여 부족한 비타민 등을 보충한다. 농작물을 구하기 힘든 티베트 민족에게 육식은 불가피한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티베트 민족의 식습관을 두고 육식을 기피하는 동아시아 불교권의 불자들은 혹 육식이 불교의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표할 때가 있다.

그러나 육식이 계율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따르는 근본설일체유부 계통의 《율경근본율(Vinayasūtra) 》이나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에서 따르는 법장부 계통의 《사분율(四分律)》, 남방 상좌부 불교의 율장인 《위나야 삐따까(Vinaya Piṭaka)》 등은 모두 '삼정육(三淨肉)'과 같은 예외 사항을 만들어 육식을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육식을 금하는 것은 주로《범망경(梵網經)》의 대승계 때문이다.[136] 그러나 티베트 불교는《범망경》의 대승계가 아닌 《입보살행론(Bodhisattvacaryāvatāra)》, 《대승집보살학론(Śikṣāsamuccaya)》의 대승계와 《유가사지론(Yogācārabhūmi-Śāstra)》 〈계품〉의 대승계를 따르는데, 여기에는 육식을 직접적으로 금하는 조항이 없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도가 삼정육을 섭취하는 것은 별해탈계나 보살계를 어기는 것이 아니다.

계율 문제와는 별개로 티베트 불교에도 자발적으로 채식을 실천하는 수행자들이 있다. 과거 까담의 아티샤(Atisha)나 닝마-겔룩의 샵카르(Shabkar) 같은 고승들은 평생 채식을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에는 닝마의 차트랄 상게(Chatral Sangye) 린뽀체, 뻬마 왕걀(Pema Wangyal) 린뽀체나 까르마 까규의 제17대 까르마빠(Karmapa) 오걘 틴래 도제(Orgyen Trinley Dorje), 밍규르(Mingyur) 린뽀체, 그리고 겔룩의 삼동(Samdhong) 린뽀체, 라마 소빠(Lama Zopa) 린뽀체 등이 티베트 불교 내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인도 망명 이후 1964년부터 스무 달 가량 완전 채식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급격한 식습관의 변화로 인해 심한 황달이 발생하고 담낭에 결석이 생겨[137] 담낭을 적출하는 수술 끝에 채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육류 섭취를 제한하며, 공장식 축산업을 지양하고 불살생과 채식을 권장하는 법문을 여러 차례 설한 바 있다.

달라이 라마는 2020년 세계 동물의 날(World Animal Day)을 맞아 "생명 존중과 환경 보호를 위해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동물 착취를 줄이고 채식을 하는 것이 보다 자비롭고 지속 가능한 생활 방식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가령 티벳 북부나 몽골처럼 추운 기후 때문에 대대로 가축에 생계를 의지하던 사람들까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반면 인도는 농작물이 풍부하고 채식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세계의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메세지를 전했다. 달라이 라마의 메세지처럼 인도 내 티베트 불교 대학이나 티베트 불교 사원에서는 최근 채소와 과일 식단 비중을 늘리고 있으며, 채식 공양만을 하는 사원들도 있다.
  • 2012년 세계 자비의 날(World Compassion Day) 제정 기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동물복지 진흥 및 채식 장려 메세지 # #
  • 2020년 세계 동물의 날(World Animal Day) 기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채식 장려 메세지 # #

외적인 의례를 중시하는 소작(所作) 딴뜨라, 행(行) 딴뜨라는 관정(灌頂) 등의 의식을 치를 때 육류, 어패류, 계란, 오신채 등의 섭취를 엄격히 금한다. 또한 무상요가 딴뜨라에 속하는 칼라차크라 딴뜨라(Kālacakratantra)에서도 수행 중 육식을 금하는 항목이 있다.

무상요가 딴뜨라의 회공(會供, gaṇacakra) 때 청정과 비청정의 집착을 벗어난 '이원성의 초월(不二性, advaya)'을 목적으로 5종의 고기인 오종육(五種肉, Sha lnga, sha chen sna lnga)과 대변, 소변, 혈액, 골수, 정액 등의 부정물(不淨物)인 오감로(五甘露, bdud rtsi lnga)를 공양물로 쓰는 경우가 있으나,[138] 실제 수행에서는 마음으로 관상(觀想)하는 가상(假像)의 공양물과 요거트, 주스, 과자 등의 온건한 물질들로 대체된다. 이러한 의궤는 무상 요가를 수행할 자격을 갖춘 소수 수행자들이 세간에서 더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용하여 고도의 선정력(禪定力)을 바탕으로 미세한 분별심을 정화시키기 위해 행하는 것이며 일반적인 수행자를 대상으로 한 의궤는 아니다.

13.4. 초야권?[편집]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원대(元代) 몽골인들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상 루머 취급을 받으며 주류 학계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나무위키를 포함하여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몽골 초야권설 대부분은 주장만 있을 뿐 명확한 학술적 근거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초야권 설은 야사(野史)에 해당하는 《신여록(燼餘錄)》이란 문헌에 처음 등장하였지만 근대 학자들에 의해 《신여록》은 위서(僞書)로 판명되었고, 몽골의 잔혹성을 입증하기 위해 원대 역사를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39] # 정사(正史)인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등에는 초야권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청말민초(淸末民初)에 출간된 민속학자 저우쭤런(周作人)의《담룡집(談龍集)》 등 초야권과 관련된 민담, 풍습을 다룬 산문집과 그 영향을 받은 일부 대중역사서들로 인해 실제 초야권이 실시되었다는 루머가 퍼진 적도 있지만, 현재는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부정되고 # # 바이두 백과 초야권 항목 # 이나 중국어 위키백과 초야권 항목 # 에서도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바이두 백과 초야권 항목에는 百科TA说로[140] 원대 초야권의 허구를 상세히 입증하는 글이 링크되어 있다.《“蒙元初夜权”,一个历史谣言的原型、变形与事实。 》

원대 초야권이 실시되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현대 중국의 언론인 중 신리지엔(信力建)이란 인물이 있으나 신리지엔은 중산대학(中山大学) 중문과를 졸업하였을 뿐 역사학 관련 학위가 없는 비전문가이며# 그의 주장들 역시 앞서 언급한 《신여록(燼餘錄)》같은 위서나 《담룡집(談龍集)》 같은 민담에 근거하여 신뢰도가 매우 낮다.

초야권설이 유포된 배경에는 원(元)과 원을 계승하여 몽골의 대칸을 자처한 청(淸) 등 전대(前代) 이민족 왕조에 대한 한족 지식인들의 반감이 존재한다. 이들의 역사관은 이른바 "원청비중국론(元清非中國論)" 혹은 "만몽비중국론(滿蒙非中國論)"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이란 이데올로기를 따라 원, 청도 중국 왕조 중 하나로 인식하는 현대 중국의 중화주의적 역사관이 강화되면서 중국인들이 굳이 근거 없는 초야권 설로 원나라를 비하하고 한족 스스로를 치욕스럽게 만들 이유도 사라졌다.

또한 인터넷상에는 외몽골 같은 일부 티베트 불교권 지역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승려가 초야권을 행사하여 매독(syphilis) 감염의 주요 경로가 되었다는 출처 불분명한 주장이 있다. 근현대 몽골에서 매독이 창궐했던 것은 사실이나 매독이 유행하게 된 원인은 분명치 않다. 청이 몽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매독, 임질 등 성병에 감염된 죄수를 일부러 몽골에 유배보냈다는 설, 마을의 우물에 매독균을 풀었다는 설, 초야권을 행사하는 승려들을 통해 매독을 전파했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어 왔으나 모두 불확실한 추측성 루머에 해당한다.

불교학자 바차이칸 노로브(Batsaikhan Norov)에 따르면 몽골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매독이 전파된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시 몽골의 상당한 비혼(非婚)인구 비중이다. 비록 청 왕조가 불교 전파를 지원했지만 몽골의 각 구역 당 단지 40명의 남자만 출가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제한은 점차 효력을 잃고 총 승려 수는 가파르게 증가하였다. 1918년까지 승려 수는 105,577명으로 칼카(Khalka) 몽골 남성 중 거의 절반(44.5%)에 이르렀다. 이 시기까지 내몽골에는 1600여 개에 달하는 사원과 10만 여명의 승려가 존재했다. 비구계를 받은 승려는 결혼을 할 수 없기에 상당한 수의 몽골 여성 또한 비혼으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가볍고 혼외(婚外)적인 성관계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낮은 개인 위생 또한 감염 전파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전염병에 대한 지식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의학적 치료 및 노력은 부족했다. 성병(性病)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몽골의 문화도 감염된 환자가 의학적 치료 받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티베트 불교 학승(學僧)들은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몽골에서 대유행했던 천연두, 매독같은 감염병의 예방에 기여하였다. 이들은 사부의전(四部醫典, gso dpyad rgyud bzhi)에 기초한 티베트 불교 의학과 티베트, 몽골, 중국의 전통의학이 결합된 자신들의 의학지식을 활용하여, 청의 군인과 상인들을 통해 유입된 감염병들의 예방법과 치료법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질병 퇴치를 위한 종교적 의식을 행할 뿐 아니라 홍분(紅粉), 경분(輕粉), 주사(朱砂) 등 당시 매독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던 수은이 포함된 약재들을 치료에 활용하였다(이들은 신장 질환같은 수은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감염자 및 감염 매개물을 격리하는 한편 위생 증진을 위한 생활수칙과 마늘, 유황, 사향 등의 약재를 활용한 소독법 등을 연구하였다.
Batsaikhan Norov (2019), 《Mongolian Buddhist Scholars’ Works on Infectious Diseases (Late 17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또한 캠브리지대 사회인류학과의 바산자브 테르비쉬(Baasanjav Terbish)는 딴뜨리즘의 성력(性力) 수행만으로는 몽골 승려들의 성생활을 설명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딴뜨리즘의 성력 수행은 범속한 성행위와는 달리 열반을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근기를 갖춘 극소수 수행자에게만 허용된 고도의 수행 방식이기 때문이다. 테르비쉬는 세속 사회와의 근접성과 사원의 경제활동에도 주목하였다.
Baasanjav Terbish (2013), 《Mongolian Sexuality: A Short History of the Flirtation of Power with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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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기후 위기 대응[편집]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달라이 라마의 메세지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우리들의 집》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제26회 유엔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COP26) 메세지 -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습니다." 》


《2021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기후 운동가들의 대담》

지난 수 년간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 위기에 관심을 갖고 전인류적 대응과 노력을 호소해왔다. 그는 그레타 툰베리 등 전세계 기후 운동가, 학자, 언론인, 종교인, 정치인들과 함께 기후 위기에 관하여 대담을 갖고 해결책과 대안을 모색하였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프란츠 알트, 《단 하나뿐인 우리의 집》(민정희, 우석영 譯)
수잔 바우어-우, 툽텐 진파, 《그레타 툰베리와 달라이 라마의 대화》(고영아 譯)
Michael Buckley, ‎The Xivth Dalai Lama Tenzin Gyatso, 《This Fragile Planet: His Holiness the Dalai Lama on Environment》
John D. Dunne, Daniel Goleman, 《Ecology, Ethics, and Interdependence: The Dalai Lama in Conversation with Leading Thinkers on Climate Change》

달라이 라마는 2020년 글래스고에서 열린 COP26 유엔 기후 회의 메세지에서 전세계 정상들에게 매우 높은 기대를 갖고 있으며, 그들이 파리 기후 협정을 실천으로 옮기길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엔은 이 (기후) 분야에 있어 더욱 활동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세계 정상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냐는 질문에, "그들 거대 국가들은 생태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무기나 전쟁에 막대한 돈을 소비하는 거대 국가들이 그들의 자원을 기후 보전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달라이 라마는 만약 현재 정당을 가입해야 한다면 "나는 녹색당에 가입하고 싶다. 그들의 사상은 매우 좋다"고도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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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용수(150~250 / 龍樹 / དཔའ་མགོན་ཀླུ་སྒུབ་ / Nagarjuna)
2. 성천(170~270 / 聖天, 提婆, 聖提婆 / འཕགས་པ་ལྷ་ / Aryadeva)
3. 덕광(394-468 / 德光, 功徳賢 / ཡོན་ཏན་འོད་ / Gunaprabha)
4. 진나(480~540 / 陣那, 域龍, 大域龍 / ཕྱོགས་ཀྱི་གླང་པོ་ / Dinnaga)
5. 청변(490, 500~570 / 淸弁 / ལེགས་ལྡན་འབྱེད་ / Bhavaviveka)
6. 불호(470-540 / 佛護, / སངས་རྒྱས་སྐྱངས་ / Buddhapalita)
7. 월칭(600~650 / 月稱 / ཟླ་བ་གྲགས་ / Chandrakirti)
8. 적천(685~763 / 寂天 / རྒྱལ་སྲས་ཞི་བ་ལྷ་ / Shantideva)
9. 무착(395~470 / 無着 / ཐོགས་མེད་ / Asaga)
10. 세친(400-480 / 世親 / དབྱིག་གཉེན་ / Vasubandhu)
11. 석가광(8세기 초 / 釋迦光 / ཤཱ་ཀྱ་འོད་ / Shakyaprabha)
12. 법칭(6-7세기 / 法稱 / ཆོས་གྲགས་ / Dharmakirti)
13. 사자현(8세기 중엽 / 師子賢 / རྒྱལ་སྲས་སེང་གེ་བཟང་པོ་ / Haribhadra)
14. 성해탈군(6세기경? / འཕགས་པ་རྣམ་གྲེལ་སྡེ་ / Araya Vimuktisena)
15. 적호(725~790, 728~788/ 寂護 / ཁན་ཆེན་ཞི་བ་འཚོ་ / Shantarakshita)
16. 연화계(740~795 / 蓮華戒 / པད་མའི་ངང་ཚུལ་ / Kamalashila)
17. 아티샤(982-1054 / 燃燈吉祥智 / ཇོ་བོ་རྗེ་ / Atisha Dipankara Shrijnana)
[2] 가로로 긴 낱장 앞뒤에 경문이 기록된 패엽경(貝葉經) 형태를 취한다.[3] 각 종파 별로 열리는 대(大)기원 법회. 사부대중이 모여 수 일간 기도, 공양, 토론, 명상 등을 하며 세계 평화와 불법(佛法)의 지속 및 흥왕을 기원한다. #[4] 대승 불교(Mahayana buddhism), 테라와다 불교(Theravada buddhism)에 이어 불교 종파 중 규모 3위에 해당한다. Peter Harvey, 《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s, History and Practices》[5] 《입보살행론》과 《중론》의 게송은 각각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리심과 공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오온(五蘊)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란 다섯 가지 물질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킨다. 달라이 라마는 아침마다 《입보살행론》의 게송을 사유하며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와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론》 게송의 '여래'를 '나'로 바꾸어 '나'란 존재는 과연 무엇인지 늘 사유한다고 한다.[6] 티베트인은 티베트 자치구 외에 병합 전 티베트 영토였던 쓰촨성, 윈난성, 칭하이성, 간쑤성 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고, 혹은 티베트인이 아닌 중국의 다른 민족 중에도 티베트 불교를 믿는 인구가 어느 정도 있다.[7] 한국 불교가 중국 불교의 선교(禪敎) 전승에서 유래하였듯이, 티베트 불교도 인도 불교의 현밀(顯密) 전승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티베트 불교=밀교"라는 잘못된 통념 때문에 티베트 불교 내 현교의 존재가 간과되기도 하고, 원류(源流)에 해당하는 인도 밀교가 티베트 불교와 도매금으로 취급당하는 웃지 못할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인도 밀교를 전공한 불교학자 방정란은 인도 밀교와 티베트 불교의 관계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직까지도 밀교가 단순히 티벳 불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취급받는 일들이 국내학계에서 종종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이 분야가 얼마나 변방의, 소외된 학문으로 오해를 받아 왔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라고도 할 수 있다.
금강승(Vajrayāna) 혹은 진언승(Mantrayāna)이라고 불리는 인도 밀교는 인도 대륙에서 불교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는 기원후 12-13세기 무렵까지 가장 번영하고 발전된 형태의 불교의 모습 중 하나였다. 그 영향력은 네팔을 넘어 티벳 등지로 퍼져나갔고, 방대한 양의 인도찬술 밀교 경전과 주석들은 티벳어로 번역되어 밀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인도 밀교가 티벳 불교의 뚜렷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원천이 된 것은 자명하나, 인도밀교와 티벳밀교의 교집합의 존재가 인도 밀교가 티벳 불교로 포섭된다는 비약으로 전개돼서는 안 된다."방정란, 《[서평] 하루나가 아이작슨&프란체스코 스페라 (공저), 『마이뜨레야나타의 『세까니르데샤』와 라마빨라의 『세까니르데샤판지까』, 산스끄리뜨와 티벳역의 비판 편집본과 영역, 그리고 사본 복제』》
[8] 용수보살의 탄생을 예언한 경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성(佛性)에 관한 10대 경전 중 하나이다.[9] 대승 불교 전통에서는 석가모니가 반열반 이후에도 용수보살을 비롯한 미래의 선지식들로 화현하여 계속 중생 제도를 이어갈 것임을 예언한 구절이라고 해석한다.[10] 이와 유사하게 한역 불전에서도 불교를 내도(內道)/내교(內敎), 불교 외의 종교, 신앙, 사상은 외도(外道)/외교(外敎)라고 지칭한다.[11] 기존에 마하연은 북종선 계열의 선승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남종선 계열 혹은 양자 모두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수경(성제), 《티벳 불교의 쌈예 논쟁에 대한 재검토》[12] 화상(和尙)이란 승려를 높여 부르는 한자어이다.[13] 윗 열 : 티베트 불교의 장수삼존(長壽三尊)인 백색 따라(Tara), 무량수불(Amitayus), 불정존승모(Namgyalma). 아랫 열 : (左) 아티샤의 수제자인 돔뙨빠 걀웨 중네('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호법존 비사문천(Vaiśravaṇa), 돔뙨빠의 수제자 뽀또와 린첸 쌀(po to ba rin chen gsal)[14] 그 밖에 주로 신흥 상인계급과 왕족의 지지를 받아 민중계급에는 불교가 널리 퍼지지 못한 점, 불교의 힌두이즘화(Hinduism 化) 등 여러 가지 원인설(說)이 제기되었다.[15] 모든 번뇌를 자르는 반야이검(般若利劍)과 모든 경전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갖고 있다. 지혜의 화염에 휩싸인 반야이검은 각각 무지(無知)의 어둠을 밝히는 불, 무지의 뿌리를 끊는 검으로 해석한다.[16] 본 문서에서 '소승'은 티베트 불교에서 정의한 불교 4대 종파에 속하는 설일체유부, 경량부를 주로 지칭한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소승'이라 일컫는 부파는 주로 유부, 경량부 등 북방 상좌부 계열에 해당하며, 현존하는 남방 상좌부 계열과는 무관하다. 소승 대신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 등의 대체어를 사용할 때도 있으나, '대승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며 역사상 실존했던 불교 부파들'이란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소승이란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신 현존하는 남방 상좌부 불교의 경우 '상좌부 불교', '테라와다 불교' 등의 명칭으로 최대한 지칭하였다.[17] ཉི་ཚེ་བའི་ཐེག་པ་(니체와 텍빠):  일부승. 단편적인 부분의 승인 소승(小乘) མཐའ་དག་པའི་ཐེག་པ་(타닥빼 텍빠) = ཐེག་པ་ཐམས་ཅད་པ་(텍빠 탐쩨빠):  전체승. 대승(大乘)[18] 물론 티베트 불교 승려 모두가 강원과정 전체를 이수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수준과 여건에 맞는 공부와 수행을 하며 기도, 의식, 행정 등의 직무를 담당하는 승려들도 많다. 또한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재가 불자들을 위해 람림, 로죵 위주로 축약된 교학과정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19]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의 논서인 《진실강요(Tattvasaṃgraha)》에서 인용한 경전 어구이다. 현존하는 경전(經, sūtra)에서는 1차 출처를 찾을 수 없으나 《Śrīmahābālatantrarāja》라는 밀교 속전(續, tantra)에서는 거의 동일한 어구를 찾을 수 있다.[20] 전통적인 티베트 불교 역사서에서는 아리야 위묵티세나를 바수반두의 직계 제자로 서술하고 있으나 현대 불교학계에서는 실제 제자일 가능성이 매우 적다고 본다.[21] 바수반두, 아상가, 디그나가는 유식학파인데 비해《입중론》등에서 공성(空性)에 대한 유식의 견해를 비판한 짠드라끼르띠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에 해당한다.[22] 사의법(四依法) 중에 가장 오해하기 쉬운 구절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이다. 이 구절은 법을 전하는 스승이나 승가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면 사람을 멀리하고 홀로 경전에만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티베트 불교 스승들은 "정법(正法)인지 아닌지 여부로 법을 판단해야 하며, 법을 전하는 사람의 외모, 화술, 학력, 명성, 지위 등 부차적인 요소를 법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뜻으로 가르치고 있다.[23] 요가(Yoga)는 신체적, 정신적, 영적 수행을 통칭하는 말로 궁극적인 요가의 목적은 마음, 의식의 변화에 있다. 요가는 비단 요가학파 뿐만 아니라 인도 종교와 사상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용어이다.[24] 제임스 도티(James Doty), 폴 에크만(Paul Ekman), 에밀리아나 사이먼-토마스(Emiliana Simon-Thomas), 아서 자욘스(Arthur Zajonc) 등[25] 동영상 설명에는 개최연도가 2016년으로 기재되어있지만, 정확한 개최 일시는 2013년 1월 17-22일이다.[26] 티베트 불교의 인식론인《심류학(心類學, blo rig)》에 의하면 '의식의 종류 중 분별식(분별인식)으로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에 현현하는 이미지(image)'를 공상(共相, spyi'i mtshan nyid)이라고 정의한다.
공상의 종류에는 1) 의공상(義共相, don spyi), 2) 성공상(聲共相, sgra spyi), 3) 의공상과 성공상의 혼합체 3가지가 있다. 의공상은 대상의 의미(개념, 기의)를 알고 마음으로 떠올린 대상의 이미지이며, 성공상은 대상을 지칭하는 소리(음운, 기표)를 알게 된 후 마음으로 떠올린 대상의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염주'라는 대상을 분별식으로 인식할 때, '염주'라는 대상의 의미를 알고 마음으로 '염주'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의공상이다. 그리고 '염주'라는 대상의 의미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염주'를 가리키는 소리만을 알려주었을 때 마음에 떠올린 '염주'의 이미지는 성공상이다.
[27] 객진(客塵, གློ་བུར།) 번뇌는 모든 법의 체성(體性)에 대하여 본래의 존재가 아니므로 객(客)이라 하고, 미세하고 수가 많으므로 진(塵)이라 함.[28] "논구한다(vyutpadyate)"란 그릇된 이해(vipratipatti)를 물리침으로써 이해(pratipadyate)하는 것이다.《니야야빈두, 니야야빈두띠까》[29]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주요 언어로는 비교적 다수의 번역서와 연구서들이 출간되었다. 예를 들어《뒤다(섭류학攝類學)》, 《로릭(심류학心類學)》, 《딱릭(인류학因類學)》등의 강원 교재는 중국어로 완역된 바 있고 관련 강의도 들을 수 있다. 또한 최근에는 다르마끼르띠의《인명칠론》에 관한 케둡제의 주석서 중 핵심 부분이 《Freedom through Correct Knowing》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영역자인 게셰 텐진 남닥(Geshe Tenzin Namdak)의 관련 강의도 Wisdom Publications 홈페이지에서 수강 가능하다.[30] 동아시아 불교의 경우 현장에 의해 디그나가의 《인명정리문론》, 상카라스와민의 《인명입정리론》이 한역(漢譯)되었고 이에 관한 주석서인 규기의 《인명대소》, 원효의 《판비량론》등이 저술되었다. 관련된 국내 서적은 다음과 같다.
*《인명정리문론》: 《한글대장경 250 논집부5 입세아비담론 외 (立世阿毘曇論 外)》
*《인명입정리론》: 《니야야빈두 외》, 《인명입정리론의 분석》, 《인명입정리론 산스끄리뜨문 번역》( 《인명입정리론》에 관한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교수의 강의가 유튜브에 공개되어 일반인도 청강 가능하다. 김성철 동국대(경주) 교수 불교인식논리학 강의)
*《판비량론》: 《중변분별론소 제3권 외》, 《원효의 판비량론(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풀어본)》, 《원효의 판비량론 비교 연구》,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원효 판비량론의 신역주》, 《원효의 논리사상과 판비량론》
[31] 상부: (左) 붓다 (右) 금강살타보살. 금강수보살은 모든 번뇌와 마라를 항복시키는 분노존(忿怒尊, krodhakaya)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른손에는 금강저, 왼손에는 갈고리를 들고 있다. 금강수보살은 대세지보살 혹은 금강살타보살의 분노존으로 알려져있다. 분노존의 분노는 번뇌로서의 분노가 공성(空性)을 인식하는 지혜와 중생을 향한 대자비에 의해 오염을 여읜 청정하고 강력한 에너지로 전환된 것이다.
좌상(左上)에 위치한 붓다의 존격은 부동불(Akshobhya)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부동불은 금강살타보살, 금강수보살이 속한 금강부(金剛部)의 주존(主尊)이고 금강살타, 금강수 두 보살들은 곧 부동불의 화현(化現)이다. 또한 탕카 속 붓다는 통상의 티베트 양식에서 볼 수 있는 석가모니불과 달리 선정인(禪定印)을 한 왼손 위에 발우가 묘사되어 있지 않다. 발우 대신 금강저를 지물(持物)로 갖고 있거나, 짙은 푸른색(청금색) 신체를 취하면 부동불로 확실히 특정할 수 있겠으나 육안상으로는 그러한 특징을 찾기 힘들다. 부동불의 금강저는 보통 선정인 위의 허공에 떠있는 상태로 작게 묘사되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형태가 희미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 붓다나 금강살타보살의 광배(光背)가 모두 짙은 푸른색으로 채색된 점은 확인 가능하다.
[32] 자성신(自性身), 법신, 보신, 화신[33] 지금강불의 짙은 푸른색은 허공같이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의미하고, 금강저와 금강령의 교차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을 의미한다. 84명의 마하싯다는 고대 인도의 대표적인 밀교 대성취자들이다.[34] 대승 불교의 불신론(佛身論)에 따르면 석가모니불은 교화 대상인 중생의 근기를 따라 화현한 화신불(化身佛)이다.[35] 업을 짓고 쌓는 힘이 왕성하고 쉽게 성숙해서, 생의 전반에 쌓은 업이 생의 후반에 익는 땅을 말한다.[36] 문수보살의 성불 후 불호(佛號)[37] 석가모니불 외에도 현겁의 부처 중 몇 분이 추가로 금강승을 가르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가령 겔룩에서는 현겁의 11번째 부처로 성불할 겔룩의 창시자 쫑카파와 현겁의 마지막 부처인 누지불(樓至佛) 또한 금강승을 가르칠 것으로 예상한다. 쫑카파의 경우 (쫑카파 자신이 부처로서 교화하는 시기가 아닌) 석가모니불의 교화 시기에 이미 금강승을 크게 선양하였으므로, 쫑카파 본인이 부처로서 교화할 시기에 금강승을 가르칠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임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누지불은 현겁의 나머지 999명의 부처가 행한 불사(佛事)를 모두 실행할 부처이므로 누지불 또한 자연히 석가모니불처럼 금강승을 가르치게 된다.[38] 구루 빠드마삼바와가 생전에 자신과 닮았다며 가피를 내리고 "이제 이 불상은 나 자신과 다름없다"고 한 불상이다. 쌈예 사원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고, 인도 시킴(Sikkim) 국왕의 모후가 찍은 사진만 전해진다.[39] 특히 겔룩, 사캬의 경우가 그렇다.[40] 바라밀승은 지혜와 방편을 합일하는 법에 대해 "지혜는 보시 등 이전에 행했던 힘의 영향을 받고, 방편은 공(空)에 대한 명상을 했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라밀승의 수행자들은 마음이 공성과 계합한 연후에 ‘모든 법이 공하다’는 관조력을 잃지 않고 보시, 지계, 인욕을 닦아야 하며, 동시에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보리심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공성을 관(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라밀승에서 말하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이다. 그러나 금강승의 관점에서 볼 때 바라밀승에서 말하는 지혜와 방편의 합일은 완벽한 합일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독립된 두 의식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금강승에서는 단일한 의식으로써 공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방편인 대락(大樂)을 함께 누리는 낙공불이(樂空不二)가 가능하다.[41] 만다라(Skt. mandala, Tib. dkyil ‘khor)는 금강승에서 본존이 거처하는 궁전과 정토 등 성스러운 환경을 가리키며 본존의 성불(成佛)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만다라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본존이 갖고 있는 공덕, 지혜 등을 의미하는 심오한 상징들이다. 만다라는 본래 3차원적 공간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탕카나 모래 등으로 조성한 만다라는 그것을 2차원적 평면에 구현한 것이다.[42] 본 영상은 카비타 발라(Kavita Bala) 코넬대 컴퓨터과학과 교수와 당시 재학생이던 엘리자베스 포폴로(Elizabeth Popolo)가 제작하고, 남걀사원 불교학연구소(Namgyal Monastery Institute of Buddhist Studies) 구성원들이 감수했다. 남걀사원 불교학연구소는 달라이 라마의 주석(主席) 사원으로 칼라차크라 의식을 전문적으로 주관하는 남걀(Namgyal) 사원의 북미(北美) 분원이다.[43] 통상적으로 야만따까 딴뜨라는 부속(父續)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겔룩에서는 부속과 모속(母續)의 핵심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을 야만따까 딴뜨라의 특징 중 하나로 본다.[44] 헤바즈라 딴뜨라를 중시하는 싸꺄에서는 헤바즈라 딴뜨라를 부속과 모속의 핵심을 모두 갖춘 불이 딴뜨라로 본다.[45] 유식학파와 중관학파에서 각기 다르게 해석한 여래장 교설의 관점까지 포함된다.[46] 남방 상좌부 전승에도 호주(護呪)에 해당하는 빠릿따(paritta) 게송이나 소위 "상좌부 밀교(Esoteric/Tantric Theravada)"로 일컬어지는 보란 깜맛타나(Borān kammaṭṭhāna) 수행 등이 존재하지만 4부 딴뜨라 분류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47]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 따르면 반야바라밀은 성문ㆍ연각ㆍ보살의 공통된 원인으로 차이가 없으며, 대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의 정도에 따라 각기 다른 삼승(三乘)으로 구분된다. 성문ㆍ연각은 개인의 해탈을 추구하는 출리심을 바탕으로 공성을 수습(修習)하며, 보살은 일체중생의 성불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바탕으로 공성을 수습한다. 이 때 수습의 대상인 공성은 삼승에 따른 차이가 없으며 모두 동일한 공성이다.
귀류논증 중관학파에서는 소승의 설일체유부, 경량부나 대승의 유식학파, 자립논증 중관학파같은 하위 학파의 견해를 따를 경우, 공성에 대한 견해가 불완전하여(하위 학파에서는 부정해야 할 대상인 일체법의 자성(自性)을 일부만 부정하기 때문이다) 아집(我執)을 남김없이 제거할 수 없기에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 가운데 어떤 승을 수행하더라도 최대 가행위(加行位)까지가 성취할 수 있는 과위(果位)의 한계라고 본다. 즉,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는 견도위(見道位) 이상의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을 막론하고 모두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
[48]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삼업(三業)을 정화하는 '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식 발음으로는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공성 진언이 업을 정화하는 진언으로 개변된 이유는, 한역(漢譯)된 밀교 의궤들에서 나타나듯 공성 진언이 참회와 밀접한 관련을 갖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인도-티베트 불교에서도 공성의 인식을 통해 참회, 정화 등을 성취한다. 참회의 직접적 조건이 사대치력(四對治力)이라면, 참회의 보조적 조건은 참회의 세 가지 요소인 삼륜(三輪)-참회의 주체, 참회의 대상, 참회해야 할 업-이 공(空)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삼륜이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그 자성(自性)이 공하므로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진정으로 공성을 인식하게 되면 인과에 대한 확신 역시 강해지므로, 자신이 지은 악업이 반드시 과보를 맺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치는 진정한 참회가 가능해진다. 공성을 인식하였다고 인과를 폐기하는 것은 공성을 잘못 인식하여 단변(斷邊)에 치우친 것이다. 공성과 인과ㆍ연기는 상호의존관계로서 인과ㆍ연기를 토대로 공성이 성립하므로, 공성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동시에 공성의 토대인 인과에 대한 변함 없는 확신이 생겨야 한다.
[49] 보리(菩提)와 열반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선근공덕 (善根功德)[50] 예를 들어 진언을 하루에 몇 번 외우거나 사다나(sadhana, 본존 성취 의궤)를 하루에 몇 번 수행해야 된다는 식으로 관정을 준 아사리가 제자에게 수행 의무를 줄 때가 있다. 만일 이때 수행을 하기로 발원하고 스승에게 약속했다면 이를 꼭 준수해야 한다.[51] 불교 교단의 스승의 총칭[52] 부처가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미래에 제자가 성불할 것을 예언하는 행위[53] 5부대론을 배우는 커리큘럼 역시 나란다 사원의 교육과정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장(玄奘), 의정(義淨) 등 당나라 구법승(求法僧)들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나란다 사원에서 유식, 인명, 구사 등을 배웠다는 내용이 나온다.[54] 환희지,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55]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56] 앞줄 좌(左)부터 닝마의 뒤좀(Dudjom) 린뽀체, 까르마 까규의 제16대 까르마빠(Karmapa), 사캬의 제41대 사캬 티진(Sakya Trizin), 겔룩의 제14대 달라이 라마(Dalai lama), 링(Ling) 린뽀체, 티장(Trizang) 린뽀체, 바쿨라(Bakula) 린뽀체.[57] 사캬의 실질적인 성립은 꾄촉 겔뽀의 손자인 사첸 꿍가 닝뽀부터 시작된다. 지금강불 아래에 꿍가 닝뽀를 위시한 다섯 명의 사캬 창시자가 있다. 1. (가운데) 사첸 꿍가 닝뽀(Sachen Kunga Nyingpo) (1092–1158) 2. (왼쪽 위) 소남 체모(Sonam Tsemo) (1142–1182) 3. (오른쪽 위) 제쭌 닥빠 갤첸(Jetsun Dragpa Gyaltsen) (1147–1216) 4. (왼쪽 아래) 사캬 빤디따(Sakya Pandita) (1182–1251) 5. (오른쪽 아래) 도괸 최걀 팍빠(Drogön Chögyal Phagpa) (1235–1280)[58] 1열: 석가모니불. 2열: (左) 쫑카빠의 두 수제자인 제2대 간덴 티빠(dga’ ldan khri pa) 겔찹 제(rgyal tshab rje), 초대 판첸 라마(pan chen bla ma) 케둡 제(mkhas grub dge). 중앙: 쫑카빠(Tshong kha pa) 3열: (左) 문수보살, 문수보살의 분노존 야만따까(Yamantaka), 백색 따라.[59] 좌(左)로부터 1열: 틸로빠(Tilopa), 지금강불(Vajradhara). 나로빠(Naropa). 2열: 성취자(siddha) 마이뜨리빠(Maitripa), 샹빠 까규(Shangpa Kagyu)의 창시자 케둡 큥뽀 낼죨(Kedrub Kyungpo Naljor). 중앙: 마르빠(Marpa). 3열: 밀라레빠(Milarepa), 감뽀빠(Gampopa). 4열: 까르마 까규(Karma Kagyu)의 창시자 두숨 켄빠(Dusum Kyenpa), 팍두 까규(Pagdru Kagyu)의 창시자 팍모 둡빠(Pagmo drupa).[60] 로짜와(lotsawa)는 '역경사(譯經師)'라는 뜻의 티벳어이다.[61] 좌(左)로 부터 1열: 보신불 금강살타(Vajrasattva), 법신불 보현왕여래(Samantabhadra, 8대보살 중 하나인 보현보살과 명칭은 같지만 여기서는 족첸 전승의 법신불에 해당하는 본초불(本初佛, Adi-Buddha)를 가리킨다), 화신불 가랍 도제(Garab dorje). 2열: 법신 아미타불, 보신 관세음보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빠드마삼바와는 법ㆍ보ㆍ화 삼신(三身)의 관계로 알려져 있다). 3열: 예세 초겔(Yeshe tsogyal), 빠드마삼바와의 적정존(寂靜尊) 구루 촉게 도제(Guru Tsokyé Dorje), 만다라와(Mandarava). 4열: 빠드마삼바와의 분노존 구루 닥뽀(Guru Dragpo), 여성격 호법존 싱하무카(Simhamukha) 5열: 샨타락시타(Shantarakshita), 티송 데첸(Trisong detsen)[62] 《티베트 사자의 서》로 알려진 《바르도 퇴돌 첸모》도 까마가 아닌 뗄마 전승에 속한다. '바르도 퇴돌 첸모'란 '중음(中陰, 죽음과 환생 사이의 시간)에서 듣는 것만으로 얻게 되는 해탈'이란 뜻이다.[63] 정치적 이유가 주(主)이고 사상적 문제는 부수적이다. 17세기 중반 제5대 달라이 라마와 그를 지원하는 몽골 세력이 중앙 티베트인 짱(Tsang) 지역 지배권을 두고 조낭과 충돌하면서 조낭은 겔룩 세력권인 짱 지역에서 축출된다.[64] '대중관'이란 표현은 타공론자(gzhan stong pa) 뿐만 아니라 자공론자(rang stong pa)들도 "위대한 중관(혹은 중도)"라는 의미로 중관 사상(특히 귀류논증 중관)을 예찬할 때 종종 사용하므로 티베트 불교에서 반드시 대중관이 타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도르지 왕축(Dorji Wangchuk)의 설명처럼, "대중관"은 겔룩(dGe-lugs)의 학자인 케둡제 (mKhas-grub-rje, 1385–1438)가 주장한 “자공(自空)이라는 대중관(大中道)”(rang stong dbu ma chen po)이나 될뽀빠(Dol-po-pa, 1292–1361)가 주장한 “타공(他空)이라는 대중관(大中道)”(gzhan stong dbu ma chen po)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불성·여래장사상의 형성 수용과 변용》[65] 될뽀빠는 《보성론》 등 《미륵오론》과 《승만경》등 여래장 계열 경전 외에도 나가르주나의 《중론》, 《찬법계송》을 자신들의 논거로 삼았다. 그들은 《찬법계송》의 "화완포(火浣布:타지 않은 직물)가 불 속에 들어가면 더럽혀지지 않고 때를 제거하면 베는 본래같이 더욱 빛나는" 비유처럼 '지혜의 불이 객진번뇌를 태워도 광명심 혹은 법계는 불변하다'는 해석으로 타공설을 뒷받침하였다.[66] '타공'은 될뽀파 등에 의해 새로이 창안된 용어이며 이전 인도, 티베트 문헌에서는 그 용례(用例)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공이란 용어는 겔룩의 종파주의에 대항하여 서로 다른 종파들 간의 사상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태그라인(tagline)처럼 여러 종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대체적으로 타공은 밀교에서 주로 논하는 미세한 수준의 의식 상태를 가리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타공의 세부적인 의미는 이미 서술하였듯이 종파, 전승, 인물마다 차이가 있다.[67] 물과 우유는 서로 화합하되 일치하지 않는다. 《섭대승론》에서도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인 바른 문훈습(聞熏習)과 근본식인 아뢰야식이 서로 공존하는 양상을 물과 우유의 화합에 비유하였다. 인도 설화에 등장하는 거위 '함사'(haṃsa)가 물과 함께 섞인 우유 중 우유만을 골라마시는 것처럼, 《섭대승론》에서는 근본식은 멸하더라도 근본식이 아닌 문훈습과 같은 청정한 종자는 멸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68] 물론 겔룩에서는 쫑카빠의 견해를 귀류논증 중관으로 본다. 그러나 미팜은 쫑카빠가 대상 그 자체가 아닌 대상이 진실로 성립하는 것만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자립논증 중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69] 미팜 학파의 연구자로 잘 알려진 더글라스 덕워스(Douglas Duckworth)는 미팜의 사상을 "쌍입(雙入, Skt. yuganaddha, Tib. zung 'jug)"으로 특징지으면서 미팜이 쌍입을 통해 사상들 간의 이상적 화합을 도모한 것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무상요가 탄트라에서 공성과 대락(大樂)의 합일인 쌍입을 핵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덕워스나 닝마 학승들의 생각처럼 "숭죽", 즉 쌍입이 닝마만의 오리지널리티인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70] 조낭빠 깔라차끄라 딴뜨라, 닝마빠 족첸의 체험적 공성과 시간의 개념을 비교하고 이를 들뢰즈의 시선에서 바라본 티베트학자 조석효의 논문도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조낭의 될뽀파가 깔라짜끄라와 여래장을 결합하여 '항상한 실재'를 상정한 반면 닝마의 롱첸빠는 족첸과 귀류논증 중관을 결합하여 '궁극적인 것의 비결정성(불확정성)'을 주장한 점, 조낭은 동시적 수행을 부정하고 점진적 수행만을 인정한 반면 닝마는 동시적 수행을 강조하는 기조 속에 점진적 수행이 병존하여 둘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 등이 두 교파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조석효, 《공성과 아이온의 시간: 티벳 불교 수행 해석의 한 가능성》[71] 족첸의 유래에 관해서는 뵌 기원설, 닝마 기원설, 뵌-닝마 공통기원설, 외부 기원설 등 다양한 이설이 존재한다. 족첸이 뵌교나 중국 선종에서 유래하였다는 타 종파의 비판에 대해 닝마에서는 그들과의 연관성을 강하게 부정하며 족첸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강변하였다.[72] 자공론자들은 스스로를 '자공론자'라고 칭하지 않는다. 타공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유(實有)를 인정하지 않는 중관학파(dbu ma pa)와 그 외 실유를 인정하는 학파들이 존재할 뿐 중관학파 내에서 자공과 타공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타공은 왜곡된 중관 내지 중관 외적(外的)인 견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73] 중국 삼계교(三階敎)에 의한 찬술설, 혹은 삼계교를 믿는 신라인 승려에 의한 찬술설도 제기되었다.[74] 썸네일에 나온 탕카 속 원(元)의 제후 복장을 한 인물이 충선왕일 것으로 추정된다.[75] 출처: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당대 원나라의 한자식 인명 표기를 고려하면, 여기서의 자()는 자형이 비슷한 랄()의 오기로 추정된다. 剌자는 '라(la)'를 음차하기 위해 자주 쓰인 글자였다.[76] 명(明)의 황제들은 까규, 사캬, 겔룩의 지도자들에게 각각 대보법왕(大寶法王), 대승법왕(大乘法王), 대자법왕(大慈法王) 등의 법왕 칭호를 하사하며 국사(國師)로 대우하였다. 이 중 까르마 까규의 수장 까르마빠에게 수여된 대보법왕의 서열이 가장 높았다. 명의 티베트 불교에 대한 존숭에는 원(元), 청(淸)이 그러했듯 종교적 이유 뿐 아니라 이민족인 티베트를 통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락제는 티베트 불교 내 다른 종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까르마빠가 속한 까르마 까규를 선양한다는 명목으로 티베트에 군대를 파견하고자 했으나, 제5대 까르마빠는 다양한 종파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영락제의 제안을 거절한다. 덕분에 명대(明代) 300년 가량 티베트는 중원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원대(元代) 싸꺄의 지도자였던 도괸 최걀 팍빠 역시 서로 다른 근기와 성향을 가진 중생들을 위해 다양한 종파들이 필요함을 쿠빌라이 칸에게 역설한 바 있다).[77] 명대(明代) 이전에는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이 사꺄의 지도자 도괸 최걀 팍빠(ʼgro mgon chos rgyal ʼphags pa)에게 '대보법왕'(大寶法王)이란 칭호를 봉한 바 있다. 이후 '대보법왕'은 티베트 불교 지도자를 지칭하는 중원의 칭호 중 가장 존숭받는 칭호가 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영락제가 원 세조의 선례를 따라 제5대 까르마빠 데신 셱빠에게 대보법왕 칭호를 수여했다. 청대(淸代)에는 겔룩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나 빤첸 라마도 세간에서 '대보법왕'이란 칭호로 일컬어졌다. 각 종파의 지도자가 '대보법왕'으로 일컬어진 시기(사꺄-까르마 까규-겔룩 순)와 해당 종파가 종교적, 세속적 권력의 우위를 점했던 시기가 대략 일치한다. 현대 중화권에서 '대보법왕'은 주로 까르마 까규의 지도자인 까르마빠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8] 제5대 까르마빠는 1403년 영락제의 초청으로 티베트에서 출발하여 1407년에 이르러서야 난징에 도착하는데 그 때 그의 나이 만 23세였다. 안노생은 1406년 명의 사신으로 파견되어 1407년 조선으로 돌아온다.[79] 영락제의 찬불시 전문(全文)이 태종실록 동일 기사에 수록되었다.#[80] 실록 원문의 '마정수기언'(摩頂授記焉)을 '이마를 땅에 대고 기(記)를 받았다'라고 옮긴 국사편찬위 조선왕조실록 DB의 번역은 명백한 오역으로 사료된다. '마정수기'(摩頂授記)란 부처가 제자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미래세에 성불(成佛)할 것을 예언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고유 명사를 일반 명사처럼 풀어 해석하는 오류는 실록 번역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문제점 중 하나이다. 조선왕조실록번역의 문제점 문단 참조.[81] 실제 까르마빠가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티베트 불교에 마정수기를 주는 의례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설사 까르마빠가 생불(生佛)의 자격으로 마정수기를 준다 하더라도 일반 대중들에게 무분별하게 수기를 내릴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마정수기는 부처가 보살의 정수리를 만지며 미래세(未來世) 성불(成佛)을 알려주는 예언적 행위이며, 수기를 줄 때 보통 성불하는 시기와 성불 후 갖게 되는 부처의 명호(名號), 불국토의 이름, 수명, 권속 같은 자세한 사항도 함께 일러주는 경우가 많다. 티베트 불교에도 간혹 스승이 제자의 성취를 예언하는 일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뛰어난 근기를 가진 제자에 한정된다.
이는 라마(lama)들이 상대방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대어 가피를 주는 일상적인 행위로서 '손으로 주는 관정'이란 뜻의 착왕(phyag dbang)을 동아시아의 불교 상식에 의거하여 마정수기로 해석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열하일기》에도 빤첸 라마가 그를 친견한 자의 이마에 손을 대어준다는 설명이 등장하며, 현재까지도 린뽀체들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하는 신도들에게 답례처럼 착왕을 주곤 한다(심지어 '발로 주는 관정'이란 뜻의 샵왕(zhabs dbang)도 있는데, 가령 대중이 너무 많이 운집한 경우 고승이 대중들 위를 걸어가며 발로 가피를 줄 때도 있다). 착왕에는 마정수기처럼 미래세에 결정코 성불한다는 예언의 의미는 없다. 밀교의 수행 요건 문단에서 서술하였듯이, 티베트 불교 문화에 익숙치 않은 동아시아에서 관정이나 착왕을 마정수기로 착각하는 일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종종 반복되고 있다.
[82] 실록에 등장하는 조관(朝官)과 사인(士人), 즉 관료와 관직이 없는 지식인들이 명나라 사람인지 조선 사절단인지 여부는 실록의 문장만으로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실록의 전후 기사에도 상황을 유추할만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사대부들의 배불적(排佛的)인 성향을 고려하면 명의 관료, 지식인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또한 '조관과 사인이 모두 달려갔다'(朝官士人皆奔趨)는 문장에 쓰인 '분추'(奔趨)란 표현은 '분추경리'(奔趨競利)라는 사자성어가 있듯, 이익을 위해 권력자의 거처를 분주히 드나드는 모습을 묘사하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표현이다. 따라서 실록의 해당 문장은 조선 사절단의 행적을 묘사한 문장이라기보다는, 황제의 공경과 믿음에 편승하여 까르마빠와의 친교를 바라던 당시 명나라 지배층의 세태를 묘사한 문장에 더 가깝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억불(抑佛) 정서가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조선 초기란 점, 황제의 의사에 민감한 사절 신분이라는 점, 조선 사신들이 예부(禮部)의 명으로 두 차례나 어제(御製) 찬불시(讚佛詩)를 차운(次韻)하여 올렸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조선 사절단을 지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83] '반선액이더니'는 강희제가 제5대 빤첸 라마에게 수여한 칭호로, 역대 빤첸 라마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반선'은 빤첸 라마의 '빤첸'이라는 티베트어('학자'를 뜻하는 산스끄리뜨어 '빤디따'(paṇḍita)와 '위대한'을 뜻하는 티베트어 '첸모'(chen mo)의 합성어), '액이더니'는 몽골어 단어를 그대로 빌린 만주어로 '보배'(珍寶)를 뜻하는 '에르데니'(erdeni)를 각각 음차(音借)한 한자어이다.[84] 밀교 종단인 대한불교 진각종의 주관 하에 불교학자 최로덴이 《마니 깐붐》을 한국어로 완역한 바 있다.[85] 면(綿), 비단 아플리케(Appliqué) 등으로 만든 티베트 전통 불화(佛畵)를 가리킨다. 탱화의 어원이 탕카라는 설이 있다. 국내에는 화정박물관에 티베트 탕카 컬렉션이 있다.[86] 2004년부터 광성사 주지를 맡아 온 게셰 소남 걜첸 스님이 2022년 12월 30일 인도 보드가야에서 제14대 달라이 라마로부터 제7대 라뙤 사원(Rato Dratsang) 켄 린뽀체(Khen Rinpoche)로 임명되었다. '켄 린뽀체', 약칭 '켄뽀'는 본래 율장에서 '계(戒)를 주는 아사리'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그로부터 파생된 '(겔룩에서의) 사원장, 학장'과 '(겔룩 외 종파에서의) 강원 학위'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소남스님의 직위는 전자에 해당한다. 동아시아 불교 용어로는 '방장(方丈)' 정도로 번안할 수 있다. 선종 사찰에서 본래 이판(理判)의 방장과 사판(事判)의 주지를 구분하지 않고 사찰의 최고 책임자를 방장이라고 통칭했듯이, 켄 린뽀체 또한 그와 비슷하게 사원 전체를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에 해당한다.
라뙤 사원은 아띠샤의 수제자인 돔뙨빠와 응옥 렉뻬 셰랍에 의해 창건된 까담빠 사원으로 천 년 가량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며 14세기에 싸꺄빠의 사원과 신(新)까담빠, 즉 겔룩빠의 사원으로 분화되었다. 사원 위치는 라싸 근교이다. 또한 라뙤 사원은 '장 군 최('jang dgun chos)'라 하여 매년 겨울 한두 달 가량 티베트 전역의 승려들이 모여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집중적으로 불교 논리학을 연찬하고 대론하는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9년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전까지 라뙤 사원의 승려 수는 오백여 명에 달했으나, 망명 후 인도에서는 데뿡 사원에 소속된 소규모 승원으로 편제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티베트 현지에 남아있던 라뙤 출신 승려들의 요청으로 1983년 인도 카르나타카주(州) 문곳에 본격적으로 사원이 재건되어 현재 백여 명의 승려가 상주하는 대가람으로 성장하였고, 달라이 라마가 직접 지원하는 몇 안되는 사원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제7대 켄 린뽀체로 임명된 소남스님은 1983년 사원 재건 후 처음 배출된 라뙤 출신 게셰들 중 한 명으로, 그중에서도 최고 등급 학위인 게셰 하람빠를 수여받았다.# # # # #
[87] 티베트 망명정부의 주한 대표부 역할을 하는 티벳하우스 코리아(Tibet House Korea)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88] '세첸코리아'의 대표인 용수스님은 뻬마 왕걀 린뽀체의 제자인 티베트 불교 승려이다. 따라서 용수스님이 닝마의 세첸 법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세첸코리아'가 세첸 사원의 정식 한국 센터는 아니다.# '세첸코리아'는 세첸 사원의 이름만 빌렸을 뿐 사실상 용수스님 개인이 운영하는 독자적인 수행 단체이며 '세첸코리아'나 용수스님이 한국에서 세첸 사원을 대리하지는 않는다.
'세첸코리아'가 순전한 티베트 불교 수행단체인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용수스님은 남프랑스 수행센터에서의 4년 생활 외에 주로 한국에 머물면서, 스스로 인정하듯 한국 선불교에 경도된 삶을 살아왔다. 또한 용수스님이 지도하는 명상은 닝마 고유의 전통이 아닌 선불교와 티베트 불교, 그 외 여러 명상 수행들을 참고하여 재해석한 명상이며, 용수스님의 "참 나"나 "참본성"에 대한 설명은 닝마보다 조낭의 타공중관이나 동아시아의 불성론에 가깝다.
따라서 용수스님의 법문이나 글을 닝마의 교의처럼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용수스님은 닝마 강원에서 교학을 배운 적이 없으며 강원의 교수사(敎授師)인 켄뽀 자격은 더더욱 없다. 특히 SNS에 올리는 글들은 스님의 개인적 의견으로 스님 본인의 말마따나 "기억도 나지 않고 실천도 못하므로"# 지나치게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89] 한국어 전용 채널은 아니지만, 2021년 '춘계 아니 찌최' 법문부터 한국어 동시 통역이 제공되기 시작했다.[90] 중국 내 최대 티베트 불교 사원인 닝마빠 오명불학원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중화권과 서구에 잘 알려져 있다.[91] 텍첸사 주지 쿤상 도르제(Kunsang Dorje) 스님은 2022년 12월 9일 네팔인 최초로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다. 쿤상스님은 한국 거주 네팔인들에 대한 의료통역봉사, 문화 교류 등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받아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았다.# # #[92] 용수사 주지 우르겐 스님은 2003년 한국을 첫 방문하고 2008년 용수사를 개원하여 15년 간 국내 네팔 이주민 지원 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왔다. 그러나 2020년 7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열흘 후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반신마비 후유증을 겪게 된다. 용수사 운영위원회, 능인선원, 마하이주민단체협의회, 법보신문 공익법인 일일시호일, 국제포교사회, 한국다문화불교연합회 등 여러 단체에서 우르겐 스님을 후원하였으나 한국에서의 치료와 재활을 지속하기 힘들어져 결국 스님은 2021년 9월 네팔 귀국행을 결정하였다. 현재 파상 스님이 대신 용수사에 주석 중이고 서울 텍첸사의 쿤상 스님도 도움을 주고 있지만 우르겐 스님의 공백을 메꾸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 # 네팔 출신의 설래스님(타망 다와 치링 스님)이 우르겐 스님을 대신하여 용수사에서 네팔 이주민들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설래스님은 카트만두 UDC monastery에서 출가 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다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고 동국대와 동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국내 네팔불자모임을 통한 이주노동자 돌봄의 공로가 인정되어 2022년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 #[93] 아이러니하게도 처이발상도 어린 시절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쓴 이름 '처이발상'도 승려 시절에 받은 법명이었다.[94] 데뿡 사원에는 로셀링(Loseling), 고망 두 강원이 있다. 로셀링에 2,500여 명, 고망에 2,000여 명의 승려가 소속되어 있다.[95] 상좌부 불교 문화권인 미얀마와의 접경지대에 사는 경우에는 상좌부 불교를 믿기도 한다.[96] 울란우데 근처의 이볼긴스키 사원(Ivolginsky datsan)과 치타 근처의 아긴스코예 사원(Aginskoye datsan)[97] 정교회, 이슬람교, 유대교, 불교[98] 불교뿐 아니라, 어느 종교든 외국계 종파는 선교를 허용하지 않는다. 기독교 역시 현지의 러시아 정교회는 허용하지만 한국에서 전세계에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개신교는 막는다.[99] 케냐, 남아공, 짐바브웨[100] 잘 들어보면 티베트어임을 알 수 있다.[101]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폴란드 등 다수의 유럽국가에 티베트 불교 사원과 수행센터가 있다.[102] 달라이 라마는 2018년까지 25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고령으로 인해 사실상 2018년 방문이 달라이 라마의 마지막 방일(訪日)이 되었다), 도쿄에 티베트 망명정부의 대표사무소를 두고 있다. 미국, 인도와 마찬가지로 일본(특히 일본 내 우익)도 대중(對中)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티베트 망명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이다. 또한 티베트 불교처럼 밀교 전승을 계승한 일본 진언종(眞言宗)의 본산 고야산(高野山)에 달라이 라마가 수 차례 방문한 바 있다.[103]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에 티베트 불교 센터가 있다.[104] 대승불교권 국가인 베트남인들과 동남아의 화교들 위주로 티베트 불교도들이 존재한다.[105]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다.[106] 티베트 고위 승려중 처음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있다.[107] 인도의 학자이자 밀교의 대성취자(mahasiddha)로 마하무드라 전승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그의 스승으로 샤와리빠, 나로빠, 라뜨나까라샨띠 등이 있고 제자로는 아티샤, 마르빠, 큥뽀 낼죠르 등이 있다.[108] 족첸 수행 중 카닥과 관련된 수행을 '잘라 내기'라는 뜻의 텍최(khregs chod), 훈둡과 관련된 수행을 '직접적인 접근'이란 뜻의 퇴갈(thod rgal)이라 한다.[109] 족첸에서는 마음을 일반적인 마음인 셈(sems)과, 공성과 순수한 앎이 결합된 마음의 본성인 셈니(sems nyid)로 구분한다. 셈은 분별하는, 이원적(二元的) 마음이며, 이와 달리 셈니는 분별을 여읜, 비이원적(非二元的)인 마음이다.[110] 국내에는 《정해보등론 강의》란 번역서가 있다. 미팜 린뽀체의 저작을 오명불학원의 직메 푼촉 린뽀체가 전수, 소다지 켄뽀가 강설 및 한역(漢譯)한 중국어본을 지엄스님이 한국어로 번역했다.[111] 족첸의 존재론(gzhi, 根)에서 마음의 본성은 본질(ngo bo)인 카닥(ka dag, 本初淸淨), 특성(rang bzhin)인 훈둡(lhun sgrub, 任運自成), 그리고 발현인 툭제(thugs rje, 大悲周遍)로 구성된다. 카닥은 공성, 훈둡은 현상을 가리키며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툭제는 대자비로 중생의 희구(希求)에 응하여 윤회와 열반 등 무수히 많은 개별적인 현상들로 나타나는 에너지를 뜻한다. 족첸에서는 마음의 본성을 거울에 비유한다. 거울의 비유에서 카닥은 '자기 자신'이라고 지칭할만한 실체가 없이 비어 있어 어떤 상(象)이든 비출 수 있는 거울의 본질, 훈둡은 저절로 끊임없이 상들을 비추는 거울의 특성, 툭제는 거울에 비춰진 무수히 많은 특정한 상들에 해당한다.[112] 중관의 분석은 교학의 가르침대로 연기와 공성을 관(觀)할 수 있고, 단견과 상견 등 잘못된 견해에 치우치거나 무기(無記), 혼침(昏沈)에 빠지는 위험이 적은 장점이 있다. 그러나 족첸, 마하무드라 전승의 관점에서 중관의 분석은 마음의 미세한 분별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해 마음의 본성을 아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렇듯 티베트 불교 안에는 철학적 분석에 의존하거나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 전자를 '학자'라는 뜻을 가진 빤디뜨(pandit)의 전통, 후자를 '거지''라는 뜻을 가진 꾸살리(kusali)의 전통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거지'는 곧 사원 바깥의 저잣거리, 숲, 화장터, 강가 등에서 은밀히 밀교 수행을 하던 요기, 요기니들을 일컫는 말이다.[113] 족첸에서도 자기인식을 중시하지만 유식에서의 자증과는 차이가 있다. 롱첸빠의 설명에 따르면, 유식의 자증(rang gi rig pa)은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상대적이고 왜곡된 인식이지만, 족첸에서의 자기인식(so so rang gi rig pa)은 언설, 사유를 초월한 궁극적 인식이며 주체와 객체가 다르지 않다.[114] 단, 겔룩 외의 종파에서는 겔룩에 비해 자립논증 중관학파와 귀류논증 중관학파 간의 차이를 더욱 적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승의제에 대한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궁극적인 승의제의 증득(證得)에 있어서는 두 학파 간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Wikipedia, 《Svatantrika–Prasaṅgika distinction》[115] 인공(인무아)의 의미는 자립논증 중관학파 이하의 모든 학파들이 동일하다. 즉 귀류논증 중관학파를 제외하고 다른 불교학파들의 인무아에 대한 정의는 같다.[116] 이공(二空)은 다시 말해 마음 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외계 대상, 즉 외경(外境)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능취와 소취 모두 마음의 현현이며, 서로 다른 실체로는 공하다(능취와 소취가 서로 다른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117] 유식에서 제법(諸法)을 분류하는 체계인 삼성설(三性說)에서, 분별지(分別智)의 인식대상이며 명칭과 표식/기호를 적용하는 토대가 되는 변계소집성은 공하지만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공하지 않다. 유식에서는 의타기성(=연기)이 변계소집성의 측면에서 공한 것을 가리켜 원성실성(=공성)이라고 정의한다. 즉, '부정대상인 변계소집성의 부정(변계소집성이 자성으로 공한 것)'이 '원성실성≡공성≡진여≡법성'이 되며, 유식은 이러한 공성을 자성이 있는 실재로 인정한다.[118] 아비달마나 힌두철학 문헌에서 '사트바(sattva)'가 '의식의 순수성' 내지 '순수의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므로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중생(衆生)'이란 용어를 선택한 구마라집의 한역이 오역이란 주장도 있으나,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중생상/유정상(衆生想/有情想, sattva-saṃjñā)'의 용례를 살펴보면, 구마라집의 번역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적확한 번역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비바사론》에서는 지식념(止息念, ānāpāna-smṛti)이 법상(法想, dharma-saṃjñā)을 강화하고 공관(空觀)의 근본이 되어 4념주(四念住, catuḥ-smṛtyupasthāna)를 유도하지만, 부정관(不淨觀, aśubhā)은 유정상(有情想, sattva-saṃjñā)을 강화하여 공관을 장애하고 신속히 4념주를 유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로 인하여 여러 경에서는 지식념은 4념주에 통한다고 말씀하셨으나 부정관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 또 지식념은 법상(法想, dharma-saṃjñā)을 더욱 늘리고 공관(空觀)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있으므로 이것만 말씀하셨다. 부정관과 같은 것은 유정(有情)이란 생각(sattva-saṃjñā)을 더하면서 “이 뼈는 여인의 것인가, 남자의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공관을 장애하고 빨리 4념주를 이끌 수 없으므로 말씀하지 않았다(송성수 譯)."
여기서 유정상은 생명체로서의 자아가 실재한다는 인식을 의미하며, 법상은 생명체에 대비되는 풍대(風大)라는 물질을 관찰함으로써 공관(空觀)에 이르는 토대가 되는 인식이다. 즉 유정(sattva)은 순수의식 따위가 아닌 여성, 남성 등 생명체, 개체(individual)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119] 마찬가지로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구마라집 한역본인 《유마힐소설경》에서도 《대비바사론》과 거의 동일한 맥락에서 중생상, 법상이란 용어가 적용된다.
“병든 보살은 반드시 이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이 병은 모두가 전생의 망상(妄想), 전도(顚倒), 여러 가지 번뇌로부터 생긴 것이지 (나의 몸에는 병을 앓을 만한) 실체로서의 존재(實法)는 없다는데, 어떻게 병이 걸렸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 몸은 4대(四大)가 결합한 것이므로 몸이라고 임시로 이름(假名)하였을 뿐이지, 이 4대에 주인(主, adhipati)은 없고, 또한 몸에는 나(我, atman)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병이 생기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미 이같이 병의 근본을 알았으니, 곧 나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我想)도, 중생이라는 것에 대한 잘못된 생각(衆生想)도 없애 버리고, 물질이라는 생각(法想, dharma-samjna)을 일으켜야겠구나.’(동국대 역경원 譯)"
여기서 아상(我想)은 4대로 구성된 몸과 별도로 존재하며 몸을 주재(主宰)하는 아트만이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중생상(衆生想)은 몸이 '나'로서 실재한다는 인식, 법상(法想)은 몸이 수많은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인식을 의미한다. 법상은 아상, 중생상에 비해 더욱 세밀한 분석을 거친 인식으로 공관(空觀)의 토대가 되지만, (인식대상인 물질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법상 또한 그릇된 집착이므로 아(我)와 아소(我所)를 떠나야 한다고 《유마힐소설경》은 설한다.
[120] 《금강경》의 산스끄리뜨어 원전을 보면 사상(四相)이 곧 '고정불변하는 실체'를 전제로 브라만교, 자이나교, 독자부 등 일부 소승 부파들에서 주장한 개념들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인도와 사상적 지형, 사고관이 다르고 산스끄리뜨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중국에서는 한역된 용어를 바탕으로 사상에 다소 변용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현진, 《산스끄리뜨 금강경 역해》[121] 불교 학파에 따라 열반 뿐 아니라 연기법, 공성같은 이법(理法)도 무위법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122] 물론 밀라레빠처럼 현교 교학에 정통하지 않아도 밀교 수행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일 밀교 수행을 제대로 성취했다면 밀교 수행을 통해 얻은 견해와 현교의 견해가 서로 모순되지 않고 조화를 이룰 것이다. 전통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는 사라하, 나가르주나, 마이뜨리빠, 나로빠, 마르빠, 밀라레빠 등 초기 마하무드라 전승의 스승들을 귀류논증 중관학파로 분류한다.[123] 티베트 불교 안에서도 교학과 수행에 비중을 두는 정도가 각기 다른데, 가령 겔룩이나 사캬의 경우 논리적 분석을 통한 공성 증득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반면 닝마나 까규는 직관적 경험을 통한 공성 증득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편이다(그러나 동아시아의 선종과 교종처럼 종파색이 극명하게 분화되어 있지 않으며, 티베트의 모든 종파는 교학과 수행, 문사수聞思修, 현교와 밀교를 종합적으로 병행하는 수행체계를 갖고 있다). 또한 같은 종파라 할지라도 강원에서 체계적으로 교학을 익힌 승려와 그렇지 않은 승려 간에 차이가 있고, 밀교 수행자의 경우에도 반드시 모든 밀교 수행자들이 밀교 문헌을 전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124] 티베트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얍'과 어머니를 뜻하는 '윰'이 합쳐진 단어로 남녀합신상(男女合身象)을 가리킴.[125] 본존, 만다라 등의 이미지를 심상화(心象化)하는 것[126] 이른바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를 주창하는 선불교와 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성(空性), 불이(不二)의 견지(見地)에서 이루어지는 인습적인 도덕율의 초월, 스승과 제자 간의 밀접한 사자상승(師資相承) 관계, 돈오(頓悟)의 가능성 등 선불교와 밀교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있다.[127] 비구나 비구니가 승단을 떠나야하는 무거운 죄. 살인, 음행, 절도, 대망어(아직 깨닫지 못한 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깨달은 성자인 척 대중을 속이는 거짓말)가 이에 해당한다.[128] 인도에서 티베트로 불교가 전해질 때부터 비구니 계맥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 승단에는 초기부터 비구니 없이 사미니만 존재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일부 티베트 불교 여승들(특히 외국인 출신의 여승들)이 한국, 대만, 홍콩 등에서 비구니계를 받았고, 티베트 불교 종단에서도 이들을 비구니로 인정하였지만 티베트 불교 종단 자체적으로 비구니계를 수계하는 것은 아직 불가능하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 여승들의 권리 확대에 관심을 갖고 티베트 불교 내부에 비구니계를 도입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왔다. 달라이 라마는 여자 승려도 남자 승려와 동등한 승가교육을 받고 게쉬(dge bshes)에 상응하는 불교 박사 학위인 게쉬마(dge bshes ma)를 수여받을 수 있게 허용하였다. 또한 1987년부터 티베트 불교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주도 하에 붓다 재세 시에는 존재했던 비구니 승단이 왜 티베트에는 없는지, 티베트에서는 왜 비구니 구족계를 주지 않는지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일 비구니 계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아시아 비구니 승단에게서 비구니계를 수계할 경우 첫째 티베트 불교가 자체적으로 원로 비구니 12명을 배출할 때까지 이부승(二部僧) 수계식은 외국인 비구니들이 집전할 것이라는 점, 둘째 동아시아 한문권 불교는 법장부의 《사분율》을 따르는 반면 티베트 불교는 근본설일체유부의 《율경근본율》을 따르므로 기준이 되는 계목이 다르다는 점 등의 이유로 티베트 불교 종단 내부의 반대 여론이 강하여 달라이 라마 역시 비구니계 도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향순, 《여성불교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생각》 2022년 6월 21일 부탄불교 최고 지도자인 제 켄뽀의 수계로 144명의 비구니가 탄생했다. 이로써 적어도 티베트 불교권인 부탄에서는 자체적인 비구니 계맥을 갖추게 되었다. # # # # #
[129]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정혈(精血)을 의미한다. 미세한 몸과 의식의 차원에서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산출하는 질료가 되므로 '보리심'이라고 한다.[130] 붓다슈리즈냐나(Buddhaśrījñāna)에 따르면 평상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미세한 단계의 의식을 경험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 가령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성적인 희열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기절했을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그런 경우들이다. 딴뜨라 수행자는 이러한 네 가지 상황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을 때 특별한 명상을 수행하여 미세하고 청명한 빛의 마음(정광명淨光明)을 일으킬 수 있다. 정광명은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강렬하며 그 다음 깊이 잠들었을 때, 그 다음으로 성적인 희열을 느끼는 순간의 순으로 약해진다.[131] 이 때 수행자는 성적인 희열의 에너지를 참고 그 에너지를 방출, 즉 사정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만일 그 에너지를 붙들고 있지 못하고 흘려버리면 이는 아주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132] 직접적 관련은 없었지만,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들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밀교의 성적 요가 교의로 인해 피해사실을 인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133] 반야 사상의 절대 부정이 악취공으로 곡해되어 막행막식을 초래했듯이, 불성 사상의 절대 긍정 역시 변질될 경우 윤리적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비판불교(批判佛敎)'의 이론가인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는 불성ㆍ여래장 사상의 전(全) 긍정이 사회적 불평등,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마츠모토의 비판적 관점은 '와(和)' 사상, 전체주의, 일본주의 등 주로 일본 사회에 한정적으로 적용되었지만, 동일한 관점을 티베트의 사원, 종단, 지역 사회나 전체 티베트 사회에 적용시켜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궁극적 진리의 차원은 절대 부정 혹은 절대 긍정의 영역으로 분별을 허용하지 않지만, 세속적 진리의 차원은 철저한 분별의 영역으로 인과와 그에 따른 선악의 구분이 엄존한다. 이제(二諦), 즉 승의제와 세속제란 두 층위의 진리를 서로 모순이 없는 것으로 조화롭게 파악하고 알맞게 적용해야 잘못된 견해에 함몰되는 폐해를 막을 수 있다. 때로 고착된 분별적 사고를 타파하기 위해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언행으로 스승이 제자를 교화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매우 특수한 일부 사례에 해당하며 불교 전반은 물론이고 금강승에서도 일반적인 지도 방식은 아니다.
[134] 예를 들어 7세기 날란다 사원에서 유식학파를 대표하여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짠드라끼르띠와 논쟁했다고 알려진 짠드라고민(Candragomin) 역시 재가자 출신의 학자이다. '고민(gomin)'은 '소의 소유자'란 뜻으로 재가자를 의미하며, 출가자는 아니지만 승복을 입고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존재였다. 안성두, 《안성두의 대승의 보살사상 11. 초기 대승경전의 제작과 유통자》 짠드라고민은 흰 옷을 입고 우바새계를 지키는 재가 수행자였다는 설명도 있으니 참조할 것.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135] 둑빠 까규의 무문관 수행자인 독덴(rtogs ldan, 남성) / 독덴마(rtogs ldan ma, 여성)는 응악빠처럼 머리를 기르고 흰색 의복을 입은 재가 수행자 복식을 취하지만 비구계를 받은 출가 수행자이다. 밀라레빠의 수행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 독덴은 안으로는 비구계를 지키고 겉으로는 재가 수행자의 외형을 갖추었는데, 이는 비구로서의 의무를 다하되 비구의 특권은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12년 간의 무문관 수행을 포함하여 일생을 수행에 헌신한다.[136] 《범망경》, 《능엄경》등 중국에서 찬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전들 외에 인도에서 편찬된《능가경》, 《대승열반경》, 《앙굴리말라경》등 여래장 계통 대승 경전에서의 육식 금지도 채식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탁발과 달리 직접 농작물을 경작하고 조리하는 동아시아의 공양 문화도 적극적인 채식 실천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대승불교에서도 청변(淸辯, Bhāviveka)처럼 전통적인 삼종정육(三種淨肉)의 육식을 옹호하고 채식주의를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성두, 《대승불교에서의 육식의 거부와 그 근거》[137] 의료진은 당시 인도인 측근의 권유에 따른 지나친 견과류 섭취가 담낭 결석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추측하였다.[138] 5정(五淨, Pañcagavya)과 같은 정결한 물질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5정은 인도에서 신성시 하는 소(牛)로부터 생산된 우유, 기(ghee, 버터), 커드(curd, 응유凝乳), 소오줌, 소똥을 일컬으며 갠지즈강의 물(Ganga jal)과 함께 정화(淨化)의 힘을 발휘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5정은 아유르베다 의학에서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139] 李則芬《明人歪曲了元代歷史》,《文史雜考》,1979年.[140] 百科TA说는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바이두 백과 운영진이 전문가, 학자, 기관 등에게 작성 권한을 제공하는 항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