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서 이슈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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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총리
티서 이슈트반 백작
gróf Tisza Istvá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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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보로시에뇌와 세게드 백작 티서 이슈트반 임레 러요시 팔[1]
(Borosjenői és szegedi gróf Tisza István Imre Lajos Pál)
출생
1861년 4월 22일
오스트리아 제국 페슈트
사망
1918년 10월 31일 (향년 57세)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국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 헝가리 왕국)
학력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국제법학 / 학사)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경제학 / 석사)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학 / 박사)
직업
정치인, 경제학자, 변호사
작위
백작(Gróf)
정당
자유당(Szabadelvű Párt)
국민노동당(Nemzeti Munkapárt)
경력
헝가리 왕국 총리(1903-1905 / 1913-1917)
헝가리 왕국 대의원 의장(1912-1913)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왕국 정치인이자 귀족이다. 이중제국 말기에 거물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오헝의 말기 역사를 다룰 때 티서 이슈트반의 영향력은 빠트릴 수 없을 정도다. 트란스라이타니아의 양당 중 대타협 지지파인 자유당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2. 생애[편집]


1861년 헝가리의 총리를 역임한 티서 칼만(borosjenői Tisza Kálmán)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과 영국에서 유학을 하며 법학과 경제학, 정치학을 배웠다. 이후 1886년에 헝가리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의회의 경제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890년부터는 헝가리공상은행의 이사이자 은행장으로 재임하면서 헝가리공상은행을 헝가리 내에 최대의 은행으로 성장시켰다. 1903년에 헝가리의 총리로 임명되면서 내무장관직을 겸직했다.

1기 내각에서는 야당과 거세게 대립하다 손수건 투표 사건이 발단이 된 헌정위기로 인하여 1년 7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이 파문으로 인하여 자유당은 선거에서 참패하였고, 오헝 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당인 독립당이 집권하여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이휴 자유당은 해산되었지만, 티서 이슈트반은 구 자유당계를 이은 정당인 국민노동당을 설립하였고 독립당 정부가 국립은행 설립 문제로 무너진 후 치러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한다. 그러나 1기 내각의 실패로 인해 그는 직접 나서기 보다는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912년부터 하원의장 직인 대의원 의장으로 재임하면서 보통선거권 운동을 저지하였다. 티서 이슈트반은 헝가리어 사용자가 48.1%뿐인 헝가리 왕국의 민족 문제로 인하여 보통선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헝가리에서는 의회 절대주의적인 정부 운영이 가능했다.[2] 이후 티서 이슈트반은 1913년 총리로 다시 복귀한다.

티서 이슈트반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중군주국 체제의 현상유지를 지지했고, 이에 따라 헝가리 왕국 내부의 슬라브족을 동요시킬 수 있는 세르비아와의 무력 충돌을 꺼렸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공동 외무장관참모총장과의 회동에서 티서 이슈트반은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다.[3] 갈수록 거세지는 압박에 결국에는 전쟁에 찬성했지만, 전쟁 이후에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에 합병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4]

티서 이슈트반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헝가리와 이중군주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에 있는 루마니아인들과의 통일을 노리고 있는 루마니아 왕국을 경계했는데, 루마니아의 참전 기미가 보이자 트란실바니아 방어를 요구했지만 너무 강력해진 독일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페렌츠 요제프 1세의 죽음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군주국을 재편하려는 카로이 4세가 즉위하자 티서 이슈트반은 결국 사임하게 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기병 연대장이 된다.

패전이 임박하자 헝가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정부를 도와 크로아티아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삼중군주국 체제로의 개편을 지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고, 10월 31일 혁명의 혼란 속에 자택에서 암살당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의 죽음 이후 베케를레 샨도르(Wekerle Sándor)가 3선하여 총리가 되었고, 트란스라이타니아의 마지막 총리는 허디크 야노시 백작(futaki gróf Hadik János)이었다. 얼마 안 있어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공동정부를 파기하였고, 독립파 수장이자 티서 이슈트반의 라이벌인 카로이 미하이 백작(gróf nagykárolyi Károlyi Mihály Ádám György Miklós)이 정권을 잡게 된다.


3.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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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 있는 티서 이슈트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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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헝가리어에서는 동양권과 마찬가지로 성이 이름 앞으로 온다.[2] 오스트리아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의회가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였고, 행정부 절대주의적 체제로 운영되었다.[3] 하지만 한편으로 티서 이슈트반은 헝가리를 극도로 혐오했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죽음에 안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헝가리인의 패권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으며, 티서 이슈트반조차도 특권을 부여받은 반역자로 여겼다.[4] 하지만 결국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점령지를 합병하며 티서의 조건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