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스캔들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탈세를 위한 조세 회피처에 대한 내용은 파나마 페이퍼즈 문서
파나마 페이퍼즈번 문단을
파나마 페이퍼즈#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Le scandal de Panama
Panama Scandals

1. 개요
2. 내용
3. 여파
3.1.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
3.2. 경제적 손실
4.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eau_d'or_(Panama).jpg

당시 프랑스의 일간지 <르 프티 주르날>에 개재된 풍자 만평.[1]

19세기 말 프랑스 제3공화국을 뒤흔든 정경유착 스캔들.


2. 내용[편집]


1880년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파나마 운하 수주권을 확보하고 공사에 돌입했지만 아직 치료법이 없었던 말라리아로 인하여 2만 2천명의 건설노동자가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잇따르면서 1890년에는 공사가 실패했음이 자명해졌다. 하지만 이미 막대한 투자를 행한 건설사 측은 정부 모든 부서에 천문학적인 뇌물을 뿌리면서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기 때문에 공사의 실패가 세간에 드러난 시점은 1892년쯤이었다.

1892년 조르주 클레망소를 비롯한 6명의 현역 장관들이 건설책임자였던 페르디낭 드 르셉스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공사의 실패에 대해 함구하는 한편 추가적인 투자액 확보를 위한 유령 회사 설립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프랑스 정국은 발칵 뒤집혔다. 연이어 드러난 부패의 규모는 정말로 충격적이었는데 무려 510명의 국회의원들이 르셉스로부터 뇌물을 제공받고 파나마 운하 건설 시공사의 시궁창스러웠던 재정 상태에 대해 침묵을 했다는 의혹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경찰서 정모

장 조레스가 주도한 조사 위원회에서 이 510명 가운데 뚜렷하게 뇌물을 수수한 정황이 드러난 의원만 무려 104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건설사 측의 주요 인물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덧붙여서 1903년 프랑스는 수주권을 4천만 달러에 미국 측에 팔았고[2] 미국은 1914년에 파나마 운하를 완공했다.


3. 여파[편집]



3.1.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편집]


무려 500여 명의 국회의원들이 너 고소를 시전당했고 그 중 100명 이상이 실제로 유죄가 드러난 만큼 프랑스의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1년 남짓한 기간 동안만 무려 세 차례나 내각이 붕괴되었으며 특히 거물이었던 클레망소는 이 사건으로 인해 평생 짊어지고 갈 부패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대중들에게 왕정이나 공화정이나 윗대가리들은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이 만연해졌으며 이를 이용하여 왕당파들은 신랄하게 부패한 공화정을 비판할 수 있었다.[3]


3.2. 경제적 손실[편집]


대략 80만 명 가량의 프랑스인들이 유령 회사에 대해 주식 투자를 했다가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이 중에는 자신의 전재산을 투자한 독신 여성과 과부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후유증을 낳았다. 총손실액은 당시 액수로만도 무려 9억 6천만 프랑으로 추정된다. 약간 시기 차이가 있지만 1873년 기준으로 금본위제에 근거한 1프랑의 가치가 대략 0.3그램[4]의 순금이다. 현재 금값이 그램 당 대략 44000원 정도이니 오늘날 가치로는 무려 12조 4500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다.


3.3. 반유대주의[편집]


또 건설사 측이 주식 투자를 위해 만든 유령 회사를 좌우한 것이 유대계 금융자본이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 사이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다시 한 번 만연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팽팽히 부푼 반유대주의를 크게 폭발시킨 것이 이로부터 2년 뒤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이다.


4.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모리스 르블랑이 쓴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인 <수정마개(Le Bouchon de cristal)>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중에서 아르센 뤼팽은 파나마 스캔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정치권의 흑막과 대면하고 그와 대결하면서 사건의 이면에 파묻혀 있는 비밀을 파헤쳐나간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07:57:03에 나무위키 파나마 스캔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기독교 문명권에서 금송아지(Le veau d'or)는 물욕을 상징하는데 성경에서 우상숭배의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황금 송아지 상에 경배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대놓고 잘근잘근 씹은 셈.[2] 처음에는 미국에 1억 1천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물론 하하하 이녀석 하하하.[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국민 사이에서 일단 공화정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졌고 왕당파는 오를레앙 왕가 지지파와 부르봉 왕가 지지파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880년 이후 프랑스 국회에서는 왕당파 의원을 찾기 어려워졌다.[4] 정확히는 0.290322581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