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니파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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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1차 전투
3. 2차 전투
4. 3차 전투



1. 개요[편집]


인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3차례의 전투(1526, 1556, 1761).

이 전투가 벌어진 파니파트는 델리의 북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에 있으며 평원이어서 기병대의 작전에 적합했다.


2. 1차 전투[편집]


파일:vkslvkxm.png

첫 전투(1526. 4. 21)는 당시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술탄 바부르델리의 술탄 이브라힘 로디 간에 벌어졌다. 바부르가 이브라힘 로디에 승리해, 무굴 제국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바부르군은 히말라야산맥 앞의 구릉지를 따라 진군하다가 델리로부터 약 150km정도 떨어진 파니파트라는 마을에서 멈추었다. 바부르는 오른쪽으로는 마을까지, 왼쪽으로는 강가까지 포진하고 그 사이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좌우로 적이 우회하여 뒤를 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수레란 수레는 모두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700개 정도의 수레를 모은 바부르는 이를 소가죽으로 묶어 군진의 앞에 늘어놓았다. 수레 뒤에는 화승총을 든 총병을 배치했다. 아울러 앞의 수레벽에 몇 개의 틈을 두어 뒤에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뛰쳐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보면 바부르는 총기가 처음 등장하던 때에 총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전술을 쓴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총기는 현재처럼 방아쇠만 당기면 쏘아지는 것이 아니라 화약과 화승(火繩)을 따로 준비하고 화승에 불을 붙여 총 안쪽에 있는 화약을 폭발시켜 총알이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화약을 붓고 화승을 알맞은 길이로 맞추는 과정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빠른 사수라도 1분에 1발 쏘기가 힘들었다. 한 발 발사하고 다시 발사하기 전까지는 다른 병력이라던가 기타 장애물로 적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바부르의 수레장벽은 이러한 용도가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기관총이 나온 후에도 몰려오는 보병들에게 휩쓸리지 않으려 철조망을 까는데 이 시대라고 아닐리가 없다.)아울러 로디군에는 바부르군에 있는 코끼리들이 1000마리나 있었기에 코끼리 부대의 공격을 저지하는 장애물이기도 하였다.

먼길을 달려와 지친 바부르군은 빨리 싸우고자 하였으나 로디군은 본거지 가까운 곳에서 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로디군은 천천히 여유있게 진군하였고 4월 12일에나 파니파트 근처에 나타났다. 지역 전사들의 증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기록에 따라 1만 5천에서 2만 5천정도였다. 이에 비하여 로디군은 가장 적게 기록된 것이 3만, 많게는 10만을 동원하였다 한다. 사실 근대 이전에는 군대가 전쟁에 나서면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상인이며 하인같은 잡다한 인원들이 따라가기 때문에 로디의 군세는 4만 정도였을 것이다.

로디의 군대는 싸움터에 와서도 싸우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해진 것은 바부르였다. 기다리다 못한 바부르는 19일에 그의 본대 일부와 지역 전사들에게 야습을 명령하였다. 기습의 효과를 노렸지만 공격의 시작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기습 부대는 어둠 속에서 공격할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흩어졌던 기습 부대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을 때는 이미 동이 튼 후였고 그들은 적 부대 앞에 완전히 노출되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로디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면 바부르군을 완파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로디도 마찬가지로 준비가 안 되어 이 기회를 살릴 수가 없었다. 로디는 부랴부랴 자신의 병사들에게 공격 대형을 갖출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반격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바부르의 기습 부대는 별반 피해를 입지 않고 후퇴할 수 있었다. 바부르군은 공격을 막기 위하여 총과 포를 쏘았고 별반 피해는 없었지만 로디군의 1000마리나 되는 코끼리들은 폭발음에 놀라 앞으로 가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기만 하였다. 로디군의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코끼리 부대가 결과적으로 무력화된 것이다. 군마건 코끼리건 사람이건, 화약시대 초반에는 화약의 폭음에 익숙찮은 전투원들의 혼란이 승부를 가를때가 잦았다.(현대전에서조차 총성이나 폭음을 들은 저숙련 병사들이 그대로 궤주할 때가 왕왕 있다.)

로디는 전면공격으로 전환하면서 바부르군 진영이 파니파트 마을과 만나는 지점이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 때문에 로디군의 좌군(左軍)이 너무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우군(右軍)은 뒤처지게 되었다. 바부르는 적의 좌우가 흐트러지게 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병 예비대로 하여금 로디군의 우측을 우회토록 하였다. 그리고 중군의 일부도 이 공격에 투입시켜 로디군의 뒤를 돌아 그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로디의 우군은 좌군을 따라잡기 위하여 급히 움직이는 과정에서 대열이 와해되고 한 덩어리로 뭉쳐버렸다. 우군은 우군대로 바부르군의 ‘약점’을 돌파하지 못하였다. 이에 바부르군은 총기와 대포, 그리고 활을 총동원하여 한 덩어리로 뭉친 로디군을 사격하였다. 이에 뒤로 돌아갔던 바부르의 기습군까지 로디군의 뒤를 치자 로디군은 통제를 상실하고 붕괴되었다. 이브라힘은 살해되었고, 그의 군대는 패했다. 이 전투는 인도에서 무굴 제국이 창건되는 계기가 되었다.


3. 2차 전투 [편집]


2차 전투(1556.11.5)는 젊은 무굴 황제 악바르의 후견인 바이람 칸이 아프가니스탄의 왕으로 자처하며 독립을 선언한 힌두교도 장군 헤무와 싸워 이긴 것이다.


4. 3차 전투[편집]


파일:The_Third_battle_of_Panipat_13_January_1761.jpg
갈색 말을 탄 이가 아흐마드 샤 두라니

3번째 전투(1761.1.14)는 무굴 왕조에 이어 인도를 지배하려는 마라타 동맹의 야심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또 무굴 제국도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페슈와(총리)의 삼촌인 바오 사히브가 지휘하는 마라타 군대는 아프가니스탄 두라니 왕조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함정에 빠져 섬멸당했다.[1] 다만 아프가니스탄도 인도를 점령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군대가 급료를 이유로 폭동을 일으켜 회군을 해서였다. 이것은 북서부 인도에서 10년간 이어진 무질서 상태의 시초가 되었으며 후에 영국 지배의 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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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마라타 군대는 고원 지역에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에 능숙한 반면, 평지에서 진을 치고 벌이는 회전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마라타 동맹의 시조인 시바지도 무굴 제국과의 정면 대결은 가급적 피하고 게릴라전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