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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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공화국
República del Paraguay[1] | Tetã Paraguá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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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앞면)
국장(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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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뒷면)[3]
국장(뒷면)
Paz y Justicia
평화와 정의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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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최대도시
아순시온
면적
406,750km²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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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인구
7,356,409명(2022년) | 세계 104위
민족 구성
메스티소(85%), 기타 백인, 동양인
공용어
스페인어, 과라니어
종교
국교 없음(정교분리)
군대
파라과이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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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대통령제(5년 단임제)]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77위(2021년)[혼합된체제]
국가
요인

대통령
{{{-2 '''[[국가원수|{{{#fff (국가원수)
(정부수반)}}}]]'''}}}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부통령
우고 벨라스케스 모레노
여당
콜로라도당(파라과이)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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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경제
명목
GDP

전체 GDP
$309억
1인당 GDP
$6,229
GDP
(PPP)

전체 GDP
1010억 7500만 달러
1인당 GDP
$15,030
국부
$510억 / 세계 98위(2019년)
화폐
공식 화폐
과라니(₲, PYG)
ISO 4217
PYG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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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수교 현황
대한민국: 1962년 6월 12일
북한: 미수교
무비자 입국 기간
양국 모두 30일

여행경보[4]
여행유의
황색경보 지정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
여행자제
산페드로주, 콘셉시온주, 아맘바이주



위치
파일:파라과이 위치.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map.png





1. 개요
2. 지리
2.1. 자연
2.2. 행정 구역
3. 역사
3.2. 20세기 초 정국
3.2.1. 1908년 혁명
3.2.2. 1911년 혁명
3.2.3. 제브뤼헤 호 사건
3.2.4. 1912년 혁명
3.3. 차코 전쟁과 이후
3.4. 1940년대 군부
3.5. 스트로에스네르 독재 정권
4. 경제
5. 정치
6. 군사
7. 스포츠
8. 문화
8.1. 언어
8.2. 음식
9. 종교
10. 외교
11. 가는 법
12. 나무위키, 아카라이브와 파라과이
13. 여담
14. 문서가 있는 파라과이인
15.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파라과이남아메리카 중앙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국명은 국토를 남북으로 관통해서 흐르는 파라과이 강(Paraguay River)에서 유래한다. 과라니어에서 유래했으며 원래는 강 이름이었다는 점에선 우루과이와 비슷하게 지어진 국명인데, 파라과이와 우루과이 모두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과라니어로 'para'는 '강', 'y'는 '물'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강이나 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수도는 위성도시까지 합치면 전체 인구의 40% 정도가 거주하는 아순시온(Asunción)이다.

국토 면적은 40만 7,000km²로 내륙국에다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서 크기가 작아 보이지만 이래봬도 독일보다도 큰 면적이다. 인구는 2015년 CIA 기준 6,783,272명.

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사바나 대평원인 그란차코(Gran Chaco)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다. 공용어는 과라니어스페인어다. 화폐 이름도 과라니일 정도인데 아메리카 원주민 과라니족의 피가 많이 섞였기 때문이다.

파라과이 국기는 네덜란드 국기에 문장을 새겨놓은 듯한 모양인데, 국기 가운데 문장의 앞뒤를 구별해야 한다.


2. 지리[편집]



2.1. 자연[편집]


남아메리카 중앙 한복판에 위치해 아메리카 대륙에서 볼리비아와 함께 둘 밖에 없는 내륙국이다. 국토 전체가 라플라타 강 수계에 속하며, 국토의 정중앙을 파라과이 강이 가로지르며 서쪽 국경으로는 필코마요 강이, 동쪽 국경으로는 파라나 강이 흐른다. 파라과이 강 동쪽으로는 언덕들이 많은 반면 파라과이 강 서쪽은 광활한 그란차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파라과이 강은 수운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다.

수도 아순시온은 파라과이 강과 필코마요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아르헨티나 포사다스와 접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아순시온 시에는 52만 명이, 그리고 아순시온 외곽 지역을 포함하는 수도권인 센트랄 주에는 207만 명이 거주해 인구의 약 37%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 외국은 대게 행정구역을 무시하고 생활권으로 도시를 구분하기에 207만 명의 센트랄 주 인구를 아순시온 인구로 간주한다.

파라과이 강 동쪽은 대체로 해발고도가 낮지만 브라질 고원의 맨 끄트머리라서 여러 언덕들과 몇몇 산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고봉인 세로 트레스 칸두(Cerro Tres Kandú) 봉은 해발 842m이다. 한편으론 동부 지방엔 이과수(Yguazú) 댐이나 야시레타(Yacyreta) 댐을 비롯한 여러 댐들이 위치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세계 최대의 수력 발전소인[5] 이타이푸 댐이 브라질 국경을 흐르는 파라나 강에 위치해 있다. 워낙 댐의 규모가 크다보니 전력 생산량이 엄청나서 공급이 소비를 한참 뛰어넘어서 전력 생산량의 85%를 브라질에 수출할 정도다. 다만 전력 자체는 풍부하지만 공급망이 좋지 못해서 정전 등은 빈번히 일어난다. 진짜다. 아순시온 대정전 사태가 가끔 뉴스에 나오고는 한다.

수도 아순시온을 포함해 파라과이 인구의 97%는 파라과이 강 동쪽에 거주하고 있다. 일자리와 기반시설 및 상업/여가 거리가 수도 아순시온에 주로 몰려있는 편이다.

파라과이 강 서쪽은 차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인 그란차코 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대체로 평평하고 여러 강들이 흘러 습지가 많은 편으로 람사르 협약 등록지인 리오 네그로 습지(3,700km²)나 티푼케 습지(2,800km²)처럼 매우 큰 습지들도 분포한다.# 파라과이 강 서쪽의 그란차코 평원은 한반도보다 넓은 파라과이 국토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해 인구가 극히 희박하다.

파라과이의 기후는 파라과이 강 동쪽은 주로 아열대기후(Cfa)를, 서쪽은 주로 사바나기후(Aw) 내지 스텝기후(BSh)를 띈다.

수도 아순시온의 경우 연평균기온은 22.7℃로 동아시아에서는 대만 타이베이와 비슷한 정도이며, 7월 평균기온은 17.6℃, 1월 평균기온은 27.5℃로 여름이 더운 편이고 겨울 기온도 15도 안팎의 홍콩, 마카오, 타이베이보다 훨씬 높고 가오슝과 비슷하다. 서쪽 사바나 그란차코 지역은 기온이 좀 더 높은 편이다. 강수량은 겨울보단 여름이 많은 편으로, 지역별로 편차가 있다. 파라과이 동쪽의 강수량은 대체로 1,000mm를 넘는 편으로 수도 아순시온의 경우 연강수량이 1,401mm 정도이지만, 서쪽의 그란차코 지역의 강수량은 500-1,000mm 정도로 적은 편이다.


2.2. 행정 구역[편집]


파일:Paraguai.png


주도
면적(km²)
인구(명)[6]
아순시온
Distrito Capital

117
520,917
콘셉시온
Concepción
콘셉시온
18,051
262,360
산페드로
San Pedro
산페드로
20,002
445,550
코르디예라
Cordillera
카아쿠페
4,948
319,176
과이라
Guaira
비야리카
3,846
232,503
카아과수
Caaguazú
코로넬오비에도
11,474
576,261
카아사파
Caazapá
카아사파
9,496
196,994
이타푸아
Itapúa
엥카르나시온
16,525
633,847
미시오네스
Misiones
산후안바우티스타
9,556
131,493
파라과리
Paraguarí
파라과리
8,705
261,701
알토파라나
Alto Paraná
시우다드델에스테
14,895
853,610
센트랄
Central
아레과
2,465
2,286,193
녜엠부쿠
Ñeembucú
필라르
12,147
91,252
아맘바이
Amambay
페드로후안카바예로
12,933
177,252
카닌데유
Canindeyú
살토델과이라
14,667
243,779
프레시덴테아예스
Presidente Hayes
비야아예스
72,907
132,564
알토파라과이
Alto Paraguay
푸에르테올림포
82,349
69,304
보케론
Boquerón
필라델피아
91,669
18,937
파라과이
아순시온
406,752
7,453,695

파라과이의 1차 행정 구역은 17개 주(departamento)와 아순시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주 아래에는 약 260여개의 지방자치단체(municipios)들이 존재한다.

3. 역사[편집]


파라과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 인디언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과라니어를 사용하면 물건 값을 깎아주기도 한다나. 하지만 진짜 과라니족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스페인인 혈통 백인과 과라니족의 혼혈인 메스티소인데도 국민의 90%가 과라니어를 할 줄 안다. 이는 파라과이가 독립 당시 자국민의 혈통 전반에 섞인 과라니 부족들의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띄운 덕이다.

잉카문명이 발달한 안데스 산맥 일대가 아닌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변방지역이 그렇듯 대항해시대스페인인들의 식민지 개척 이전에는 뭐하고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36년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 때 스페인 왕실이 이탈리아인 탐험가들로 구성된 원정대를 과라니 부족 지역을 탐사하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과라니족은 백인들의 통치를 전면거부했으며 1607년에는 과라니족 인디언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친 스페인 제국 정부는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에 파라과이의 통치를 맡겼다.

파라과이에 있는 에수회의 레둑시온(reduccion)들은 제국의 핵심적인 은 광산이 있던 페루의 안데스 산맥 지대와 경계를 맞댄 동부 지역을 지키는 과제를 수행했다. 스페인인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이 지역을 특히 브라질 남부의 상파울루에서 온 팽창주의적인 노예사냥꾼(파울리스타Paulista)에게서 지키는 임무였다.

하버드 C.H.베크 세계사 1350~1750


예수회는 16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의 마을인 '레둑시온(reduccion)'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콩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 예수회의 레두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7]의 수출로 국제무역의 강호로 떠올랐다.

이런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의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 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했다.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이에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8]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세기~18세기의 레두시온 체제는 신앙을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 역사상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9] 그래서 실제 주민들은 메스티소임에도 인디언 언어인 과라니어가 아직도 널리 쓰인다. 아즈텍, 마야 인디언이 원주민인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만 쓰이고 역시 잉카문명 인디언이 원주민인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에서도 아이마라어 등 잉카 언어는 소멸 직전까지 갔으며 파라과이캐나다앵글로아메리카도 인디언 언어 대부분이 유실되고 영어가 국어로 쓰이는 걸 생각해보면 아메리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민지 생활이 계속되던 중,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1814년부터 1840년까지 파라과이는 이른바 "영원한 독재자"라는 별명을 받은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박사의 독재를 받게 되었다. 호세 박사는 파라과이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서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의 제위기간 동안 파라과이와 외국 사이의 여행이나 우편은 상당한 수준의 통제를 받았다. 파라과이로 유입되었던 외국인 상당수가 마치 전근대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파라과이에 정착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호세 박사는 독립 이전 파라과이에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예수회 시설 및 성당들을 공격하여 약화시키고 대신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군국주의 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그가 프로이센으로부터 모방한 징병제는 삼국전쟁 파라과이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과의 체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초반 만큼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하는 배경이 되었다.

브라질 국립박물관 화재 사고로 과거 브라질이 가져간 파라과이의 유물들이 모두 소실되면서, 1870년 이전의 파라과이의 역사 유물들은 없다.


3.1. 3국 동맹 전쟁[편집]


3국 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10]은 해당 항목 참조. 이 작은 나라가 대담하게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3국 동맹군과 맞장뜬 전쟁이다. 앙숙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 뭉게는 데 적극 협조했을 정도로 파라과이가 노골적으로 두 나라를 자극하여 자초한 자업자득이었고 당연하지만 국력 차이가 커서 밟혔다.

이 전쟁 후반기에 아순시온에 있는 파라과이 국립 기록 보관소가 브라질 제국군에게 죄다 털려서 모든 문서, 역사서 기록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국립도서관(Biblioteca Nacional do Brasil) 지하창고에 150년이 넘도록 짱박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브라질 측 역사학계가 이 역사서 기록들에 손대고 연구한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다. 이거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절,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의 레두시온 체제, 파라과이 건국사, 3국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 등 정치사,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파라과이 전쟁까지의 역사 기록이 꽤 부실하며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파라과이 현지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11]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는 객관적이 아닌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걸 감안해서 봐야 한다. 양쪽을 모두 비교해가면서 볼 경우 곳곳에서 역사 왜곡, 프로파간다, 흑색선전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해결하는건 현 브라질 정부에서 문서들을 공개하거나 파라과이 정부에게 반환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문제는 브라질 정부가 파라과이에게 돌려준 극히 일부 문서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문서들을 도서관 지하에 짱박아두고 공개하지를 않고 있어서 연구가 어렵다. 그나마 부분적으로는 용케 칠레 등으로 빼돌린 것들이 조금씩 있어[12] 칠레 대학들이나 멕시코 UNAM대학 등이 연구하기도 한다.

3국 동맹 전쟁 패전 이후 파라과이의 경제와 사회는 초토화되었으며 돈이 없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재건을 위해 국가소유였던 토지를 팔아 넘기면서 불평등이 매우 심각해졌다.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선 콜로라도당자유당의 양당이 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수당인 콜로라도당이 집권했으나 1904년 반란으로 자유당이 집권한 이후로는 자유당이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다만 자유당 집권기 동안에도 내란이 빈발하면서 정치가 안정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이때 파라과이는 인구구조도 막장이었는데 전국민의 90%가 여성인 엄청난 여초국가가 되었다. 인구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가임기 인구에서는 실제로 9:1도다도 더 극단적인 성비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는데, 살아남은 남성의 상당수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노인이나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길거리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강간이 일상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었으며[13] 파라과이가 정부차원에서 남성볼리비아 등 주변국 출신 노동 이민자들에게 자기네 나라로 귀화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런 후유증으로 인해 파라과이는 1950년대까지 일부다처제해야만 할 수 밖에 없었다.[14] 이당시 사회에서 거의 어쩔 수 없다싶이 정립된 여러가지 남성 우월주의적인 인습들은 여전히 살아남아 파라과이를 괴롭히고 있다. 백수십년이 지나도 전쟁의 상흔을 완벽히 극복하지 못한 셈.


3.2. 20세기 초 정국[편집]


파라과이의 20세기 초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살인, 반란, 정권의 전복은 일상이었다. “파라과이보다 혁명이 많은 곳은 없을 것이다.”라는 자조적인 문구는 당시의 불안정한 정국을 종종 묘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을 주동하는 이는 파라과이 정치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알비노 하라였다. 1904년 혁명은 콜로라도당의 30년 정권을 종결시키고 자유당의 30년간의 집권 시기를 야기했다. 물론 집권 후에도 자유당은 당내 파별 다툼으로 혼란을 빚었다.

1908년 7월 2일, 자유당의 시민파인 베니그노 페레이라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반란이 발발했다. 반란 며칠 전, 반란이 임박했음이 일간 신문에 실렸지만 정부에 의해 검열되었다. EL DIARIO 신문사는 ‘혁명?’이라는 1908년 6월 15일자 기사를 발간했다. 이 신문사는 오랫동안 반정부 운동을 계획했고 이것에 대한 무지가 어느 정도 인지 실험하기 위해 "그런데 누가 선동적인 행동을 예상할까?" "콜로라도 당으로부터?" "현 정권에서 배제된 자유당원들로부터?" "군부으로부터?" "어떤 장관들로부터 어떤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가?" 등을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EL DIARIO 소유자인 아돌포 리켈메는 사실 이러한 혁명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런 계획의 성과를 내기 위해, 비밀리에 민간과 군부의 인원들로 구성된 혁명 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들이 페레이라 정부를 전복시킨 이유는 1904년 혁명의 목적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혁명 위원회의 민간 위원들은 마누엘 프랑코, 에우세비오 아얄라, 펠릭스 파이바, 에밀리아노 로하스, 리베라토 마르시알 로하스, 에두아르도 샤에레르, 아돌포 리켈메 등이 있었다. 군부 측에선 알비노 하라, 피델 페레이라, 토마스 멘도사, 라몬 베하라노, 파트리시오 에스코바르, 마누엘 로하스, 카를로스 고이부루, 마르시알 우르비에타 등이 있었다.


3.2.1. 1908년 혁명[편집]


당시 파라과이 정규군은 약 2000명 규모로 2개 보병 연대, 기병 연대, 포병 연대(2개 포대로 구성된)로 편성되었다. 제1보병연대 는 비야아예스에 주둔했고 기병 연대는 파라과리에, 제2보병연대와 포병 대대는 아순시온에 주둔했다. 아순시온의 군부대는 이후 발발한 혁명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봉기 날짜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각 위기에 처해지자, 7월 2일 자정 알비노 하라와 6명의 주동자들이 포병 부대를 장악하여 두아르테 대위와 부관인 베릴라 소위를 체포했다.

아메리코 베니테스가 지휘하는 또 다른 부대는 제2보병연대를 장악했다. 이로써 수도에 주둔한 군부대가 모두 반란군 측에 떨어졌다. 수도에 정부측 세력은 이제 경찰과 소방대만 있었다. 새벽 3시, 경찰은 사건을 알아채고 페레이라 대통령, 두아르테 전쟁부 장관, 베니테스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이미 경찰 내부에도 혁명 동조자가 있었고 아이작 두아르테 경위[15]는 뒤늦게 오는 두아르테 장관을 체포했다. 제2보병연대와 경찰 간에 소규모 교전이 진행되고 중앙우체국, 국립 극장과 기타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점령했다.

파라과이 해군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함선인 LIBERTAD 무장 수송선의 함장은 처음엔 두아르테 전쟁부 장관의 쿠데타로 착각하고 경찰측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이미 반란군이 승기를 잡자 그쪽으로 편을 바꾸었다.

경찰 측은 저항했지만 점전 전황이 불리해졌다. 새벽 6시, 페레이라 대통령이 대통령 궁에 도착하여 70명의 경비대와 합류했다. 반란군은 점차 세를 불렸고 7월 3일 오전 11시엔 경찰 본부를 점령했다. 그럼에도 아직 정부군은 대성당, 감옥, 기차역, 세무서를 점령 중이었다. 7월 4일, 외국 사절단에 의해 휴전이 제시되었다. 사절단의 대표이자 파라과이 대사 에드워드 오브라이언은 대통령 궁에 방문하여 페레이라 대통령과 내전 종전을 논의했고 휴전 조건을 반란군 측에 전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1908년 7월 4일, 대통령은 사임했고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정권을 잡은 혁명 위원회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했으며 이전 정부의 측근들을 해임했다. 부통령인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3.2.2. 1911년 혁명[편집]


1910년 11월 25일, 선출된 마누엘 곤드라 정부는 2달도 되지 않아 전쟁부 장관인 알비노 하라의 군사 쿠데타로 전복된다. 1909년 파라과이는 4개의 군사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 당 1개의 보병 대대, 기병 중대와 포대가 주둔했다. 이들은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곤드라 대통령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사임했고, 다음 날 알비노 하라가 의회에 의해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1월 말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아돌포 리켈메는 곤드라 대통령을 복위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콘셉시온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제1군구 사령관인 알프레도 메디나 소령과 이미 행동을 착수했다. 한편 엔카르나시온에 주둔한 제4군구의 사령관 페드로 멘도사 대령은 독립적으로 곤드라 복위 운동을 결정했다.

칠레 사관학교를 졸업했던 알비노 하라 대통령은 임시 정부의 군사 고문으로 칠레군의 막시밀리아노 호프레(Maximiliano Jofré) 대위를 임명했다. 호프레는 중령 계급을 받고 참모총장직을 지냈다. 호프레는 반란군이 연합하기 전에 개별적으로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페드로 멘도사가 이끄는 제4군을 Caí Puente 전투(지금의 Coronel Bogado 시)에서 격퇴했다. 또한, 도나토 알론소가 이끄는 교정 경비대대는 Ñandeyara 협곡에 주둔했지만 호프레 군에게 격퇴었다. 반란군 잔당은 로사리오로 후퇴했고 알프레도 리켈메 부대와 합류했다.

하라 대통령은 전쟁부 장관인 카를로스 고이부루 대령을 사령관으로 삼고 기함인 LIBERTAD 호와 3,000명의 정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했다. 반런군은 로사리오로 공격이 집중될 것이라 예측하고 병력 대부분을 집결시켰다. 하지만 정부군은 일부만 로사리오 남쪽에 상륙시켰고 본 부대는 에스테로보네테 요새로 향했다. 당시 요새에는 180명의 수비대만 있었고 5시간만에 점령되었다. 반란군의 사기는 무너졌고 리켈메의 군대는 더 이상의 저항없이 해산되었다. 리켈메와 8명의 부대원은 카누를 타고 강을 따라 밀림 속으로 도망쳤으나 3월 17일 발각되었고 결국 체포되었다. 비록 반란군은 진압되었지만 하라 정부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1911년 7월 5일, 리켈메가 사망하자 주변국에서 비난이 쇄도하고 국내에서 산발적인 폭동과 시위가 발발했으며 결국 같은 날 무혈 쿠데타로 하라 정부가 전복되었다.

로하스 대통령은 하라를 체포하고 망명 여비로 3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표면상의 이유로는 유럽에서 군사 전술 연구를 위한 것이라 발표했다. 우선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망명시킨 뒤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지만 정작 하라는 바로 칠레로 도망가서 합의가 무효가 되어버렸다. 당시 혼란스러운 파라과이 정국을 본 하라는 조만간에 귀국하여 다시 권좌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듬해 알비노 하라는 귀국하여 새로운 반란을 준비하게 된다.

3.2.3. 제브뤼헤 호 사건[편집]


1911년 10월 12일, 600톤급 증기선 제브뤼헤가 250톤의 화약, 7.5인치 포 1문과 3인치 포 3문, 기관총 1정, 소총 6000정을 싣고 앤트워프 항을 출항했다. 포클랜드 제도에 상륙 후 바로 남미로 향했다. [16] 사실 제브뤼헤는 자유당이 알비노 하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파견된 것이었다. 제브뤼헤 호는 라플라타 강에 도착하자 브라질 국기를 게양하고 선체 페인트 칠을 다시하고 이름도 COIMBRA 호로 바꿨다. 짙은 안개 덕분에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났음에도 주의를 끌지 못했다. 선원들도 발각될 경우 해적 취급을 받을까봐 명령에 복종했다. 파라과이 국경에 도착하자 선장은 선원들에게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다고 선포했고 원정대에 합류를 거부한 선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 벨기에 앤트워프로 귀국했다.

문제는 배가 너무 늦게 도착하여 약속 시간보다 8개월이나 늦어졌다. 하지만 이 무렵, 하라 정부가 전복되자 제브뤼헤는 파라과이 해군에 편입되었다.


3.2.4. 1912년 혁명[편집]


1912년 2월 28일, 리베라토 마르시알 로하스 대통령은 경찰총장인 카요 로메로 페레이라(Cayo Romero Pereira)에 의해 강제로 사임되었고 콜로라도당 대표였던 페드로 파블로 페냐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자유당의 급진파 세력의 에우헤니오 가라이 소령은 무력으로 개입했고 의회는 로하스를 다시 대통령의 재선을 추진했다. 나머지 자유당 세력은 로하스의 재선은 헌법적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반대했다. 수도 방위군 대장인 이폴리토 누녜스(Hipólito Núñez)는 정부군의 세가 반란군에 비해 매우 불리함을 느끼고 수도를 버리고 반란군 주둔지인 로사리오로 향했다.

반란군은 북쪽과 남쪽에서 양동으로 아순시온을 향해 진군했다. 남쪽 미시오네스에서 출병한 반란군은 2500명 규모였다.

3월 1일, 정부군은 파라과리에서 폭발물을 실은 무인 기관차를 보내 사푸카이 역에서 북쪽 반란군 2000명과 75mm 산탄총 2대를 실은 열차와 정면 충돌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20문의 대포와 14문의 기관총을 확보하고 3월 8일 아순시온으로 향하는 철도를 따라 피라유에 집결했다. 반면 페냐 대통령이 이끄는 수도 방위대는 1300명에 불과했다. 3월 11일 하라 전 대통령이 정부군과의 교전 중 중상을 입자 페냐 대통령은 합의를 종용했지만 거절당했다. 3월 16일 루케(Luque) 전투에서 정부군이 패배한다. 파트리시오 에스코바르와 아돌포 치리페가 지휘하는 반군은 3월 17일 아순시온 공격을 개시했다. 남동쪽 산로렌소의 반군은 3월 19일 새벽부터 공격에 참전했다. 3월 21일 정부군의 방어선이 뚫리기 시작하자 그날 밤 페냐와 800명의 지지자들은 브라질 함선을 타고 아르헨티나 코리엔테스로 도망쳤다.

다음날 반란군은 아순시온을 점령하고 에밀리아노 곤살레스 나베로를 다시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한편 알비노 하라는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3월 15일에 35세로 사망했다.

3.3. 차코 전쟁과 이후[편집]


이후 파라과이는 1932년~1935년볼리비아와 그란차코 지방[18] 일부인 차코 보레알 지방[19]을 두고 차코 전쟁을 벌이게 된다.

당시 국제적으론 볼리비아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볼리비아는 인구도 3배가 더 많았으며 극단적인 여초국가가 되어버린 파라과이를 감안하면 병력은 아예 넘사벽으로 볼리비아가 더 많았으며 땅도 훨씬 넓고 파라과이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장비와 무기도 더 우수했으며 1차 세계 대전 및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독일 장군 한스 쿤트가 군사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라과이군 지휘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는 차코 보레알 지방에 석유가 많은 것 같으니 해외 석유기업들의 자본 지원을 요청했고 바로 네덜란드 이 이 지역 석유 개발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장비 자금을 제공했다. 파라과이도 질세라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같은 조건을 요구해 이른바 정유업체 전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우선 저지대 늪지가 많은 차코 보레알 지방 특성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들을 군인으로 고용했으며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로 전투를 벌여 큰 효과를 거뒀다. 또한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의 무선 감청과 암호문 해독을 막으려고 스페인어 대신 과라니어로 무선 통신을 진행하고 암호문도 과라니어로 작성하며 심지어 병사들의 대화도 과라니어로만 쓰게 만들었다.

결국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볼리비아도 고전했지만 전쟁 말에는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더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컸는데 전쟁을 피하고자 차코 보레알 지역 난민이 아르헨티나로 계속 오는 통에 신경쓰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겉으론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전쟁을 안 끝내면 아르헨티나도 전쟁에 끼어들어 두 나라 다 묵사발 내겠다고 으름장을 내놓았는데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으뜸가는 경제 및 군사 최강국[20]이기에 두 나라 모두 아르헨티나에 맞서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휴전협정을 맺는다.

전쟁은 1935년에 끝났지만 여러 번의 회의 끝에 전쟁은 1938년 7월에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종결된다.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3/4을 손에 넣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유역 및 푸에르토카사도 지역을 얻어서 어느 정도 땅을 확보했지만 전쟁 피해가 훨씬 컸기에 전쟁 중에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나고 사령관도 여럿 교체될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전술적 승리및 이득은 파라과이가 더 컸기에 볼리비아는 전후 처리에 골치를 겪는다. 볼리비아는 안 그래도 칠레에 안토파가스타 주를 뺏겨 내륙국으로 전락했고 브라질에는 고무 생산지 아크레 주를 털린 데 이어 최약체인줄 알았던 파라과이에까지 털려버려 싸움 더럽게 못 하는 나라로 완전히 찍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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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전쟁으로 인한 파라과이의 영토 변화


3.4. 1940년대 군부[편집]


몇 번의 쿠데타 끝에 치러진 1939년 대통령 선거에서 차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티가리비아가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지만 겨우 1년만에 영토 순방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라과이에선 자국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으며 그를 기렸다.

그런데 웃기게도 전쟁이 끝나서 가장 좋아라하던 이들 중 하나인 쉘은 얼른 차코 보레알 지방에서 석유가 진짜 나오는지 탐사를 시작했지만 석유는 2012년이 되어야 발견되었다. 에스티가라비아가 원조를 얻고자 뻥을 친 것이었다.

국방부 장관 이히니오 모리니고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모리니고는 콜로라도당과 손잡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 또는 나치즘식 독재정치를 추구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정지하고 자유당의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이 모리니고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는 총파업과 학생들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에 모리니고 대통령은 완화책으로 1946년 정치활동을 합법화하여 좌익 야당인 2월당과 여당인 콜로라도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2월당은 1947년 초에 모리니고에 반발하면서 연립내각을 파기했고, 그러자 이에 격노한 모리니고 대통령은 콜로라도당만을 지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2월당원은 자유당 및 파라과이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차코 전쟁 후 쿠데타로 잠깐 집권했던 라파엘 프랑코를 리더로 하는 반란군으로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파라과이 내전이라고 부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전부터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군대도, 해군의 거의 전체와 육군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다. 육군사령관이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면서 모리니고는 반격에 나섰고, 결국 압도적으로 1947년 8월에 반란군을 해산시키며 승리했다.

이후 파라과이는 야당이 불법화되면서 1당 독재 국가가 된다.


3.5. 스트로에스네르 독재 정권[편집]


그렇게 파라과이 내전은 끝나고, 콜로라도당의 집권체제가 이어졌는데 당시 최고 지휘자였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1954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페데리코 차베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콜로라도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파라과이의 경제개발을 추진함과 동시에 반대자에 대한 인권탄압과 권력기반 유지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후안 페론[21]소모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니카라과에서 축출되고 파라과이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을때 받아들이기도 했고 1970년대-1980년대 더러운 전쟁이 펼쳐졌을 당시에 파라과이 CIA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농지 문제에 있어서는 말로는 토지개혁을 한다해놓고 지지계층에게 차별적으로 농지를 나눠주다시피해서 빈농들과 원주민들을 외지로 쫓겨나게 만든 결과를 낳았으며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파라과이이 애써 모른 체 하면서 35년간 장기집권하였고 1980년대 남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민주화 열풍이 불었을 때에도 1988년에 8번째 대통령직에 오른 스트로에스네르는 1989년에 오른팔 안드레스 로드리게스에 의한 쿠데타로 축출되어 브라질로 망명했고 거기서 죽었다. 2006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한 그의 시체는 파라과이 정부가 인도를 거부하여 지금도 브라질의 공동묘지에 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의 유산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파라과이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수의 지배계층이 토지를 거의 독차지하는 문제도 스트로에스네르와 관련이 있고, 민주화 이후로도 해결이 전혀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로도 장기집권한 콜로라도당의 의원들 상당수가 이러한 토지문제와 관련이 있는데다가 그나마 토지개혁을 중점에 둔 루고 대통령도 임기 1년을 앞두고 탄핵당하는 일까지 겹쳐져서 앞으로도 해결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콜로라도당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과거 스타플레이어인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22]1999년 자국에서 코파아메리카가 열렸을 때 우리나라에는 파라과이 거지보다 못사는 550만 인구가 살고, 파라과이 부자보다 잘 사는 20만명 부자가 산다. 그런 부자들 이득을 대변하는 오비에도 정권을 찬양할 결과를 만들고 싶지 않다.라며 보이콧을 선언해 출전조차 안 했을 정도였다.


4. 경제[편집]


산업이 목화와 콩, 동물 사료 생산, 축산업 등 대부분 1차 산업인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 개발도상국이다. 특히 파라과이에서 농업은 GDP의 21%, 전체 수출의 64%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기본적으로 과일의 질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파라과이의 한겨울에도 식지 않는 뜨거운 태양열 때문인 듯 하다. 기본적인 농사법이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라 기후가 비슷한 대만에서 농사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기초적인 공업품도 수입하는 그런 나라로 너무 높은 수입품 의존도를 지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거야 공업이 주산업이 아닌 홍콩,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같은 몇몇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는 개발도상국 그것도 후진국에 가깝다는 게 문제고 이것이 고스란히 서민경제에 부담이 된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을 잘 살리면 앞으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물류허브가 될 수도 있다. 주변에 위치한 접경국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이고 앞의 두 나라는 특히 남미 경제의 양대축이다. 그렇지만 1차 산업면에서 소수의 대지주들이 토지를 독차지하다시피하는 바람에 소작농들이 빈곤하게 살고 있어서 꼭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손꼽히고 있다.[23]

인지도가 상당히 낮지만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 10%에 소득세도 딱 8%/10% 두 구간밖에 존재하지 않아 상당히 유력한 조세회피처다.[24] 그리고 돈만 있으면 영주권을 살 수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처리비용을 제하고 경비지변능력 명목으로 최저임금 35개월어치 (3082만 과라니로 약 550만원) 예치하면[25] 영주권이 바로 나온다고. 여기서 3년동안 매년 183일 이상 거주하면 귀화 신청도 가능하고, 귀화 후 5년 거주를 채우면 다른 메르코수르 국가에서 신분증으로 넘어가 눌러앉을 수 있게 된다. 국외 수입은 거의 면세라서 앞서 말한 저세율과 겹쳐 외국인 부자들에게 반응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26] 신청에 드는 총 비용도 천만원 미만이라 이걸로 군 연기 테크를 타는 한국 남성도 없진 않는 듯.

GDP $308억, 1인당 GDP $6,229, 인구 702만명인 개발도상국으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동급이고 태국, 말레이시아보다도 못 사는 나라다. 하지만 의외로 공식 최저임금 수준은 남미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인데 1인당 GDP가 1000달러 이상 높은 에콰도르와 비슷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 중반 수준에 달해서 칠레우루과이와 비교해도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 이는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의 최저임금 수준이 2015년 이후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떨어진 영향도 크다. 거기에 베네수엘라는 그럭저럭 사는 나라에서 최빈국으로 수직낙하했다. 그러나 공식 최저임금 수준과는 별개로 1인당 GDP 수준이 남미에서도 낮은 건 여전해서 실제로 농민들이나 빈민층의 경우에는 최저임금도 못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그러나 2018년에는 아르헨티나의 화폐가치 추락에 힘입어 드디어 아르헨티나의 최저임금을 추월했다. 그리고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볼리비아의 최저임금도 아르헨티나를 추월할 듯 하다. 그러나 법적 최저임금은 높으나 파라과이 통계청에 의하면 2020년 1월 기준 전체 취업인구의 35%가 최저임금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어 법적 최저임금과 실제 임금 사이 괴리가 크다.#

최근 2~3년간에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이 급속도로 증진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원래부터 한인 이민자들 즉 교포의 세가 다른 남미 국가들보다 강한 면도 있지만, 최근 파라과이 정부는 각종 사회인프라 확충[27] 사업을 적극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라과이 현지 기업들 입장에서는 인프라 쪽 핵심기술이 부족한 면이 있기에 경제 파트너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고, 한국이 상대적으로 잘 맞는 파트너인 것이다. 포털에서 파라과이라고 검색해 보면 한국의 각종 정 관계 단체나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은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교통 외에도 소방 분야에서도 협력이 증진되어 불용물자화된 국산 구급차를 파라과이 적십자사에 무상 원조해주거나 한국의 각 지역 소방본부 소속 119구조대가 파라과이 소방대에 각종 인명구조 기술을 전수해주고 장비도 지원해주기도 한다. 파라과이 소방당국도 연수를 보내 한국 각 지역 소방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현지에 보급하기도 한다.


5. 정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파라과이/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군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파라과이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스포츠[편집]


여느 남미 국가들답게 축구가 가장 인기 좋다. 국대에 관한 것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2010년 6월 29일, 1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월드컵 16강전 파라과이 vs 일본 경기 때[28]. 한/일 양국 네티즌 사이의 키워 때문에 주한 파라과이 대사관 사이트가 다운되는 일이 발생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병림픽이다. 라리사 리켈메라는 파라과이인 여성 모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리켈메의 화끈한 공약 덕분이었다. 항목 참조. 1999년코파 아메리카에 특별참가한 필립 트루시에 체제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4-0으로 박살낸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월드컵에선 승부차기로 간신히 승리했는데 이 때 한일 양측 기량이 좋은 편이기는 했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우루과이를 만나 거의 이길 뻔하였다가 그놈의 물회오리슛으로 모든 걸 날려먹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파라과이를 월드컵에서 볼 수가 없다. 2014년에는 꼴등으로 지역예선에서 탈락했고, 2018년 월드컵도 영 신통하지가 않았다. 메시가 사라진 후 기량이 급저하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이외의 모든 팀들에게 고전했다. 그나마도 아르헨티나전은 두 경기 모두 리오넬 메시 없을 때 치르는 행운이었다. 애매한 순위와 승점들로 인해[29] 이례적으로 지역예선 마지막 라운드가 모조리 다 같은 시간으로 배정되었고 거기서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이 천적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아주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었는데다가 페루와 콜롬비아가 비기기 작전을 시전하고 있었던지라 7위였던 파라과이는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이기기만 하면 5위로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통해 본선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되려 베네수엘라에게 패했다. 결국 칠레가 패해 6위가 되었는데 파라과이도 패해서 7위를 기록하면서 러시아 월드컵도 본선 진출도 실패 확정. 되려 6위였던 아르헨티나가 에콰도르를 잡으면서 3위로 치솟아 본선에 직행했다.

확실히 기량 저하가 보이는데, 칠라베르트와 산타크루즈 이후 이렇다 할 스타 플레이어 자체가 없어져서 그런 게 크다. 최약체로 그간 비하되던 베네수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오히려 토마스 링콘이라는 스타의 등장으로 최근 들어서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보다도 기량이 좋아지는 판에 있다.

여담으로 2001년 1월에 있던 홍콩 칼스버그컵에서 한국과 파라과이가 맞대결을 했던적이 있다. 당시 한국 골키퍼였던 김병지가 무리하게 공을 몰고 가다 상대 미드필더인 구스타보 모리니고에게 공을 빼앗기는 아찔한 실수를 벌였고,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고 말았다. 이 경기에서 한국이 승부차기에서 승리했지만 이 경기 이후 김병지는 당시 한국 감독인 거스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나게 되면서 한동안 대표팀에서 볼 수 없었다.

8. 문화[편집]


파라과이는 한국인 이민 1세대가 정착한 곳이라서 한국인들이 많다.

1960년대 농업이민에서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최근 건설업계 쪽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장기간으로 근무하고있는 케이스도 꽤 늘고 있다. 노래방도 흥행하고 있고[30] 전국노래자랑도 다녀갔을 정도이며 사시장에 가보면 한국인이 주인인 곳이 많다. 일본계 브라질인이 동양계 주축인 브라질이나 화교들이 주축인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비해서 훨씬 한국계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크고 존재감도 큰 편이다. 파라과이 자체가 동양인들이 별로 없던 나라인지라 그런 게 크다. 이 나라에도 화교들은 쿨리 출신으로 들어갔지만 대부분 돈이 더 잘 벌리는 이웃 아르헨티나로 이주해버려 파라과이는 동양계 메인이 한국계가 되어버렸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교민들이 매우 조용한 데 비하여, 파라과이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소 발전이 더딘 곳이라서 한국인 교민들이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교민들이 소주삼겹살, 한인 청년들의 주말 축구 등 한국문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현지화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다 보니 현지인들도 한국에서 만든 것이면 좋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인종차별이 강해 한국계에 대해 무시하고 차별하는 성향이 강한 반면 이 나라는 그렇지 않다.

파라과이는 전통문화, 과라니족 인디언 고유의 문화가 꽤 많이 남아있다. 수공예 (Artesania)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전통 특세품이 파라과이를 대표하는 특산품 중 하나로 소개된다. 대표적인 수공예작으로는 냔두띠(Ñanduti) 가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파티(fiesta)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굉장히 즐기는 나라이다. 진짜다. 매주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에는 항상 노랫소리가 동네동네마다 들린다. 새벽 3시까지 틀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정도로 흥이 겨운 사람들이다.

파라과이이나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같이 낀세아녜라(quinceañera)라고 여자아이의 15살 생일에 하는 큰 파티도 있다. 스윗 식스틴(Sweet Sixteen)으로도 알려진 것인데 파라과이에서도 원래 서부 캘리포니아에 원래 살던 멕시코계 파라과이인들의 영향을 받아 들어온 것이다.

파라과이로 8월 15일이 공휴일이고, 2022년은 10월 3일도 공휴일이다.

성인 인구의 31%가 과체중, 15.1%가 비만이다.

8.1. 언어[편집]


공용어는 스페인어과라니어이다. 파라과이의 스페인어는 과라니어의 영향을 받았고 과라니어에서 유래된 어휘,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파라과이 주민들이 과라니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편이다. 그러나 현실은 스페인어를 좀 더 세련되게 인식한다. 두 언어 외에 단연 많이 쓰는 언어는 브라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어이고 국제 공용어인 영어도 최근 파라과이 영향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배우는 사람이 많다. 이 나라의 백인 부유층은 십중팔구 자녀들을 파라과이에 유학보낸다.

과라니어는 한때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주름잡던 과라니족 인디언들이 쓰던 언어이다. 학교에서 파라과이 학생들이 배우는 과라니어(Gurani Ñe’ê) 와는 차이가 있다. 파라과이의 시골 쪽에 사는 주민들은 스페인어보다 과라니어를 유창히 구사하는 편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순시온에 사는 젊은이들은 스페인어를 세련되게 여기고 과라니어를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을 비친다. 과라니어를 수준 낮은 언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제로 시골에 살수록 과라니어를 유창히 구사하게 되는 언어적 특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파라과이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과라니어는 파라과이 초중고 교육과정중 필수과목이며, 의학계열을 공부하고싶은 의대생에게도 과라니어 구사자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최근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몇 안되는 아메리카 내 인디언 언어 보존국가인지라 과라니어는 파라과이 문학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많은 파라과이 문학작품에서는 과라니어로 이루어진 시와 노래들이 존재한다. 과라니어는 파라과이 문학의 필수요소이며, 파라과이에서 과라니어는 공용어인 만큼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8.2. 음식[편집]


대부분 남아메리카 대륙 나라들이 그렇듯 육류 특히 쇠고기가 굉장히 싸다. 대체로 쇠고기를 통째로 구워서 먹는데 이것을 아사도(Asado)라고 한다. 처음 먹을 때는 마치 원시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사도는 가우초 문화권의 공유물로 브라질에도 슈하스코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돼지고기보다도 쇠고기가 쌀 정도다.

주식은 만디오카(Mandioca)라고 불리는 감자 같은 채소인데, 이걸 밀가루처럼 가루로도 만들고 그냥 고구마처럼 쪄서 아사도를 먹을때 함께 먹는다.

그 외에도 전통 빵인 치파(chipa)가 있는데, 주 재료는 파라과이 치즈(queso paraguaya)와 만디오카 가루로 이것이 밀가루 반죽보다 빵을 더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며 집에서 만들어 먹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그 밖에도 로미토(romito), 베주(mbeju) 등의 음식이 있다.

의외로 파라과이에서 한식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갈비찜[31]이나 불고기가 굉장히 유명하고 심지어 한국식 중화 요리탕수육, 짜장면까지 이미 훌륭한 한식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인 아순시온의 센트로에 자리잡은 모 한식당은 줄을 길게 서야 할 정도다. 한식이 알려진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일식집과 중식집 마저 파라과이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다. 덕분에 한인들의 파워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심지어 현지인들도 몇몇 한국어 단어를 알 정도라고 한다.

특히 김밥은 파라과이 주민들 사이에서도 먹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일반 동네 마트에서도 김밥을 만들 수 있는 방법과 함께 포장된 김을 볼 수 있는데, 스시라고 적혀 있다. 김밥 자체가 노리마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뭐라 하기도 그렇다. 심지어 김치는 우리나라의 짠 맛이 아니라 단맛이 대단히 강하게 개량되었다. 현지인 입맛에 맞추어 로컬라이징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결과로 볼 때 순수한 전통적인 한식을 고수하지 않고 현지의 입맛에 맛춘다면 한식의 세계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중화 요리멕시코 요리, 이탈리아 요리 등의 세계화도 각국의 식습관과 환경에 맞춰서 현지에 정착할 수 있었는데 한식은 원조 레시피를 고집하는 등 배타적이긴 했다. 멕시코의 텍스멕스나 파라과이식 피자/ 파스타, 파라과이식 중화 요리 등을 보면 한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다.

9. 종교[편집]


파일:LatinAmerica_Faith.png
통계에 의하면 가톨릭 89%, 개신교 5%의 교세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가톨릭 교세가 매우 강한 편이다. 1609년에 최초로 과라니족 보호거류지가 마련되었으며, 그후로도 가톨릭 수도회예수회와 긍정적 관계를 장기간에 걸쳐 쌓았다. 이런 면이 반영된 영화가 《미션》. 다만 과라니족이 원시적인 무기만 들고 유럽인이랑 싸운 것은 아니고, 영화에서처럼 소수의 예수회원을 제외한 모든 유럽인이 과라니족을 인간 미만으로 취급한 것도 아니다. 과라니족은 예수회원들에 의해서 화약무기로 훈련 받기도 했으며 1641년 전투에서는 포르투갈인(+투피족)들의 침략을 4,000여명의[32] 과라니족이 일제사격으로 격퇴하기도 했다.


10. 외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파라과이/외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가는 법[편집]


한국에서 직항으로 가는 항공편은 없다. 그러나 대신 2017년 아에로멕시코가 서울에 취항해서 이제 멕시코를 경유하는 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다.

가장 편수가 많은 노선을 이용하는 방법으로는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아에로멕시코로 간 뒤 상파울루에서 아무 브라질 비행기나 잡아타고 가는 게 효율적이다. 어차피 파라과이는 나라 특성 상 거의 국제선 항공로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가는 것이 대다수이며 상파울루-아순시온 간 비행시간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과거에는 유럽이나 아라비아 반도 국가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에서 이중환승하기도 했으나 아에로멕시코 취항 후에는 같은 라틴아메리카이고 쭉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을 거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되었다. 멕시코는 입국도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한가지 문제는 아에로멕시코의 고질병인 그 놈의 지연운항이다. 이거 피하고 싶으면 에미레이트 항공으로 두바이 국제공항을 거쳐 상파울루로 간 후 다시 이중환승하는 기존 방법을 써도 된다만 가격 면에선 아에로멕시코가 확실히 경쟁력이 더 있다.

중국, 일본의 경우 중국 쪽에서는 닥치고 홍콩 국제공항에서 캐세이퍼시픽+아메리칸 항공 조합을 이용하고 일본 쪽에서는 일본항공+아메리칸 항공 혹은 아메리칸 항공의 도쿄-달라스 노선으로 달라스를 거쳐 환승하는 게 보편적이다. 남아메리카에 갈 때 유럽을 거치거나 중동을 거치는 루트는 동쪽에 있어 태평양에 맞닿은 일본에선 상상도 안 하는 루트이고 그냥 편하게 태평양을 건너 파라과이을 거친다.


12. 나무위키, 아카라이브와 파라과이[편집]


나무위키아카라이브의 운영사인 umanle S.R.L.의 본사가 수도인 아순시온에 있다. 이로 인해 한때 나무위키에서 파라과이가 유명세를 탄 적 있다. 리그베다 위키와의 소송, 법인세, 저작권, 명예훼손 등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함이다. 해외 도메인인 한국계 사이트 대부분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이로 인해 나무위키 토론창 등에서 나무위키는 위키피디아처럼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위키이지 대한민국 국적위키가 아니므로 대한민국 법률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둥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국적 이용자가 대다수인 위키인 것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법은 속인주의속지주의를 모두 채택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든 파라과이에서든 대한민국 국적인 사람이 대한민국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면 처벌받는다. 법범행위의 정도가 가볍지 않을경우 파라과이 현지 경찰과 사법공조를 거치면 개인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의 이야기고, 나무위키나 아카라이브는 다크웹이 아니므로 실제로 공조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파라과이 경찰 입장에사 한국의 인터넷 검열은 파라과이 법상으로 불법이 아니라면 아예 공조가 불가능하고, 파라과이 치안당국이라고 한가한건 아니라서 거절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가 나무위키, 아카라이브에 취할수 있는 조치중 가장 가능성 있는것은 Https 검열을 통한 접속 차단이며, 실제로 경찰이 아닌 방통위에서 umanle에 음란물 유포와 관련해 경고를 준적도 있다.[33]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접속을 방해하는것이지 실제 사법조치나 수사는 아니다.

13. 여담[편집]


  • 볼리비아와 벌인 차코 전쟁 당시, 상대적으로 고지대라 모기가 없는 지역에서 살던 볼리비아 병사들은 저지대인 파라과이로 내려왔다가 모기말라리아에 시달렸다. 그리고 파라과이가 반격을 가해 볼리비아로 진격한 뒤에는 이번엔 산이 없는 나라인 파라과이 병사들이 고산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볼리비아는 아마조니아 내 저지대인 산타크루즈만 빼면 대부분이 고원 지대로 수도 라파스는 아예 대놓고 알티플라노 고원 상에 올려져 있어서 모기는커녕 바퀴벌레도 못 본다. 바퀴벌레가 살기엔 기온도 너무 낮고 기압도 낮아 환경이 부적절하다. 애초 라파스의 연 평균온도는 한국 중부지방의 10-11월 수준으로 1년 내내 쌀쌀하다. 따라서 대부분 사바나인 그란차코의 더위와 해충이 고역이었고 이게 패배로 이어졌다.

  • 파라과이 시간대PYT라고 불리며 평상시에는 UTC-04:00를 사용하며 일광 절약 시간제 때는 UTC-03:00을 사용한다. 평상시 시간대는 이웃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하고 똑같다. 그래서 한국시각에서 낮/밤만 바꾸면 바로 이쪽 시간대라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든다.

  • 파라과이 국경 모양이 이천시를 닯았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니체가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던 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니체와 결혼한 백인 우월주의자 베른하르트 푀르스터는 유대인의 영향이 없는 순수한 독일인들의 이상 낙원을 건설하겠다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 포함(!) 일부 추종자들을 데리고, 1888년 파라과이로 이주하여 누에바 헤르마니아(Nueva Germania)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나 푀르스터 본인이 빚에 시달려서 89년 음독자살하고, 농사가 망하면서 기근과 질병이 창궐해서 추종자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독일계 인구의 정착은 실패했으나(니체의 여동생은 5년 정도 머무르다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도시 자체는 중소 도시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21세기 현재도 독일의 극단주의자들이 파라과이로 이주하고 있다.#

  • 강원랜드가 도박 중독 방지를 명목으로 내국인의 출입 가능 일수를 줄이자 파라과이 영주권 브로커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14. 문서가 있는 파라과이인[편집]


※ ABC, 가나다 순



15. 외부 링크[편집]


[1] 스페인어[2] 과라니어[3] 양면에 다른 문양이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다만 튀르키예 국기도 앞면에만 월성을 그려넣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이것도 앞뒷면이 다른 것으로 친다면 앞뒷면이 다른 유일한 국기는 아니다. 앞뒷면의 문장 모두 2013년에 새로 지정되었다. 하나만 써야 한다면 앞면을 쓴다. 그 외 오리건 주 주기도 양면이 다르다.[4]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전 지역에 여행자제가 발령되었다.[5] 싼샤 댐이 완공되면서 2014년 세계 최대 자리를 넘겨준 적도 있었으나 2015년부터 다시 발전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6] 2022년 추정인구 [7] 우려내서 마시는 찻잎을 말한다. 다이어트 차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8] 영화 미션이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9] <최초 인류의 후예들> 63~64쪽에서 인용.[10]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11] 특히 3국 동맹 전쟁 당사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12] 아르헨티나의 앙숙인 칠레는 파라과이에 유일하게 우호적인 나라였다. 게다가 파라과이도 칠레처럼 볼리비아를 박살내기도 했다.[13] 자세한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남자가 없어 보이는 남자마다 잡아서 강제로 성관계를 하려 드는 여성들과 인구가 너무 없어 강간조차 범죄로 집어넣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아무 여성이나 강간하고 다니는 살아남은 남성들이 한데 모여있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단 참조[14] 끔찍한 전쟁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인구유지를 위해 감정이 좋지않을 주변국가에서 노예출신 이민자를 받아들이려고 했을 정도이다.[15] 위 두아르테와 성만 같을뿐 아무 관계가 없음[16] 선원들은 이때가 되어서야 파라과이를 공격할 것이라 알아차렸다.[17] 민간인의 피해는 없었다.[18] 그란차코 지방을 모두 합치면 60만 km²가 넘는다. 차코 보레알을 빼면 나머진 아르헨티나볼리비아의 땅이다. 그리고 그란차코 지방의 과반수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19] 25만 9,000km² 넓이로 한반도보다 더 크다[20] 그 거대한 브라질 제국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놨고 그래서 우루과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바 있다.[21] 국내에서는 좌파 표퓰리스트라고 알려졌지만 후안 페론 1기 집권기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이 집권한 기간이 의외로 길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파라과이 내전 당시에 콜로라도당을 대놓고 지지하며 전함을 지원보내주기도 했다. 파라과이 내전이 끝나고 나서 자유당원들을 망명객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그러한 공적(?)덕택에 아르헨티나에서 강제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을때 파라과이에서 한 동안 망명생활을 보내기도 했다.[22] 나무위키 유저 주축인 저연령층 어린 세대는 잘 모를 사람인데 무려 골 넣는 골키퍼로 유명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 돌아이 기행을 선보인 후 재미들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번 더 선보였다.[23] 2019년 11월에 발표된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인구수의 약 1.9%가 개인 사유지의 94%를 갖고 있다.[24] 이런 세율을 갖고 있지만 다국적 기업들이 그닥 눈독을 들이진 않는지라 국제기구들도 파라과이를 목록에 올리지도 않는다.[25] 연금수급권을 증빙할 수 있으면 예치금은 불필요하다. 연금만 하더라도 자본 유치가 많이 필요한 파라과이 정부 입장에서는 가뭄에 단비다.[26] 다만 여기서 이자나 수수료, 금융소득 등은 국내소득으로 처리된다.[27] 특히 철도, 고속도로 등 교통 분야[28] #, #.[29] 3위와 7위의 승점차가 고작 2점에 불과한 데다가 4위 콜롬비아와 5위 페루가 자기들끼리 맞붙는 형국인지라 3위인 칠레가 삽질하지 않는 한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탈락인 형국이라서(그러니까 칠레, 콜롬비아, 페루 중 하나는 무조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기면 무조건 뒤집는 것이었다.[30] 일본식 가라오케가 아니라 한국에서 운영되는 노래방과 같다[31]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에 온 칠라베르트는 갈비찜을 먹어보고 두 그릇이나 비웠다고 한다. 심지어 아욱국도 잘 먹었다고.#하니 말 다 했다.[32] 스페인 상인이 군량을 대줬다.[33] 이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파라과이을 능가할 세계 경찰'이라는 조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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