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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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Ducato di Parma e Piacenza
Ducatus Parmensis et Placentinus

파일:파르마 공국 국기(부르봉-파르마).png
파일:1704px-Coat_of_arms_of_the_House_of_Bourbon-Parma.svg.png
국기
국장
Dirige me Domine!
저를 이끌어 주소서, 주여!

파일:Duchy_of_Parma_(Territory).png

파르마 공국의 최대 판도
1545 ~ 1808, 1814 ~ 1859
수도
파르마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공작
주요 공작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
라누치오 2세
페르디난도 1세
로베르토 1세
인구
500,603 명 (1859년)
민족
이탈리아인
언어
에밀리아로마냐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종교
로마 가톨릭
통화
파르마 리라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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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5년 건국
1748년 부르봉파르마 가문 집권
1808년 프랑스 제1제국과 합병
1814년 재건
1847년 부르봉파르마 가문 복위
1860년 이탈리아 왕국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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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가
이탈리아
1. 개요
2. 역사
3. 역대 공작
3.1. 공위요구자
4. 기타



1. 개요[편집]


이탈리아 반도 중부 에밀리아로마냐 지역에 존재했던 공국이다.


2. 역사[편집]


교황 바오로 3세는 이전 교황들로부터 대대로 이어오던 독점적인 권력 유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밀라노 공국령 포 강 남쪽 지역이었던 파르마피아첸차프랑스가 물러난 이후 교황령에 흡수되었다. 바오로 3세는 자신의 양자였던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제를 파르마 공작으로 임명했는데 밀라노 공국을 획득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파르마 공국을 이전처럼 밀라노에 통합시키고 싶어했다. 황제의 조종에 의해 파르마와 피아첸차에서는 친황제파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의해 초대 공작 피에르 루이지가 사망했다.

하지만 교황 바오로 3세는 피에르 루이지의 아들 오타비오 파르네제가 재빨리 공작위를 잇게 했으며, 반란을 수습했다. 이로써 파르마를 흡수하려는 카를 5세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1559년 펠리페 2세앙리 2세가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전쟁을 마무리한 이후 파르마 공국은 스페인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와 같은 공작은 스페인 장군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이외에 예수회가 파르마에서 활동하는 등 가톨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1731년 파르네제 가문이 단절되고, 혼인 관계였던 스페인보르본 왕가가 공작위를 계승했다.[1]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도중 합스부르크 제국카를 6세마리아 테레지아가 파르마를 양도 받았으나[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도중 다시 스페인 보르본 왕조에 넘어갔다.[3]

1802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파르마 공국을 멸망시켰다. 나폴레옹은 파르마를 프랑스 직할령으로 병합했다가 프랑스 제1제국몰락한 1814년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이 부활했다.

빈 회의 이후 파르마 공국은 오스트리아 공주이자 나폴레옹의 황후였던 마리 루이즈의 영지가 되었다.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고 다시 보르본 왕가가 계승했지만 2월 혁명의 여파가 파르마까지 번져 시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1848년 제1차 이탈리아 통일전쟁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일시적으로 파르마를 병합했으나 요제프 라데츠키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사르데냐-피에몬테군을 격파하여 다시 보르본 왕가가 복귀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사실상 파르마를 속국화했다.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재개되자 파르마에서는 이웃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교황령볼로냐 일대 지역과 함께 혁명이 일어났고, 외국 지배자들이 축출되었다. 이후 혁명이 일어난 중부 지역은 서로 '중부 이탈리아 연합주'(Province Unite del Centro Italia)를 구성하여 국민 투표를 거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병합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어진다.


3. 역대 공작[편집]





3.1. 공위요구자[편집]


  • 로베르토 1세(1848~1907)
    • 엔리코(1873~1939) - 로베르토 1세의 차남, 지적장애인이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동생 엘리아가 수장 역할을 했다. 미혼이었기에 사후에는 동생 주세페가 공가의 수장이 되었다.
    • 주세페(1875~1950) - 로베르토 1세의 3남, 형과 마찬가지로 지적장애인이었다. 미혼이었기에 로베르토 1세의 사후 실질적으로 수장 역할을 해 온 엘리아가 수장 자리를 계승했다.
    • 엘리아(1880~1959) - 로베르토 1세의 4남,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안나[4]와 결혼하여 3남 5녀를 두었으나, 4녀 알리체를 제외한 자녀들은 모두 독신이었다.[5]
      • 로베르토 우고(1909~1974) - 엘리아의 차남, 아버지의 사후 수장 자리를 계승했으나 독신으로 사망하여 사후에는 숙부 사베리오가 수장이 되었다.
    • 사베리오(1889~1977) - 로베르토 1세의 7남, 1952년 카를리스타들에 의해 카를리스타 왕위요구자로 추대되었다.[6]
      • 카를로스 우고(1930~2010) - 사베리오의 장남, 부인은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차녀 이레네 공주였다.
        • 카를로스(1970~) - 카를로스 우고의 장남
          • 1남 2녀

4. 기타[편집]


파일:Palazzo della Pilotta.jpg
파르마 공국의 궁전으로 16세기 세워진 필로타 궁전(Palazzo della Pilotta)이라는 별궁이 있다[7]. 이 궁전의 이름은 궁전 내부에서 왕족들이 스페인의 전통 공놀이인 펠로타(Pelota)를 즐긴데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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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공작의 누이 엘리자베트 파르네제의 아들 카를로(후일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계승했다.[2] 파르마를 양도하는 댓가로 카를로는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넘겨받았다.[3] 카를로의 동생 펠리페가 파르마 공국을 이어받았다.[4] 테셴 분가 출신, 테셴 공작 프리드리히 대공의 둘째딸이다.[5] 알리체는 양시칠리아 국왕 페르디난도 2세의 증손자인 알폰소 왕자(분열된 양시칠리아 왕가의 두 계통 중 칼라브리아 계통의 중시조)와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6] 이 사람의 아들인 카를로스 우고의 대까지는 카를리스타 왕위요구권을 실질적으로 주장하였으나, 손자인 현 수장 카를로스의 대에 이르러서는 스페인 왕위 요구를 사실상 포기한 상태이다.[7] 정궁으로 쓰던 공작 궁전(Palazzo Ducale di Parma)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후 재건되지 않아 터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