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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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원과 성능
3. 개발 과정
4. 효용성
5. 해체와 은폐
6. 후속
7. 매체에서의 등장

Paris-Geschütz / Pariser Kanone[1]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www.militaryfactory.com/paris-gun-artillery-wagon.jpg
1차 대전 시기 독일 제국이 만든 열차포. 당시 파리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가한 무기였다.

1918년 3월 23일 토요일 7시 20분 파리의 센 강변 한 가운데에 거대한 포탄이 떨어졌다. 처음 포격 소리를 들은 프랑스 육군 장병들은 독일 제국군 육군 포병의 77㎜ 구경 야포탄이라 생각했고 시민들은 독일 육군 항공대의 23파운드 항공폭탄이라 여겼다. 조사 결과 파편 조각을 통해서 그것이 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포탄이 어디서 발사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변에 대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독일 육군의 항공기가 지나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며칠 전에 수류탄 공장에서 오폭사건이 있었기에 그 영향으로 봤다는 기록이 있다. 포격 초반 프랑스 육군 항공 장교들이 대공 경계 근무자들을 급히 호출하여 조사한 결과 비행기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증언을 들었다.

하여튼 포격을 개시한 23일 당일의 물리적인 전과는 25발의 포탄과 16명의 사망자 21명의 부상자와 7개의 가옥 그리고 파리 시내를 7시간동안 마비시키는 의외로 낮은 피해를 입혔지만 원래부터 독일이 노리던 상징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의미는 충분히 달성하였다.[2] 공포에 빠진 파리 시민들은 의외로 빠르게도 다음날 4시쯤 군의 발표에서 그 포탄이 독일에서 개발한 신형 대포의 포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월이 지나 4월이 되자 프랑스 육군의 레인저들도 이 파리 대포의 위치를 어느정도 추정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주도면밀하게 파리 대포 주변에 적당한 다른 대포들도 같이 설치하여 그저 그런 방열 대형으로 보이게 하거나 위장포를 씌워 공중 정찰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열차포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계속해서 이동시켰기 때문에 포격이 계속되던 8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군은 파리 대포를 찾아내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실제로 파리 대포를 발견하여 공격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파리 대포가 곧바로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3월부터 8월까지 무려 320~367발(기록마다 차이가 있다)의 포탄이 날아와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사망 250여 명, 부상 62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중에는 금요일 랭스의 랭스 노트르담 성당에 인파가 모였을 때 포탄이 성당 기둥에 직격하여 무려 88명을 일격에 사살한 기록도 남아있다.[3]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무려 1만이 넘는 인구가 빠져나갔고 같은 시기 파리 남부의 오를레앙은 인구가 두배로 늘었다. 파리 시민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차나 마차를 거부하고 철도와 버스를 고집했다고 한다. 또한 파리 대포의 공격이 시작된 3월 말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대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의 장례식도 대폭 축소된 채 거행되었다.


2. 제원과 성능[편집]


포신길이 34m, 구경 211mm(후기형 238mm), 포탄중량 90~120kg, 유효사거리 130km, 운용인원 80명의 열차포.

현대의 장사정포도 보통 15~20km, 부스터를 달아서 40km 정도의 사거리를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벼운 포탄을 공기 저항이 적은 성층권을 경유해 쏘아 보내기 때문.

포탄은 마하 5의 속도로 발사돼 고도 40km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 높이는 나치 독일이 V2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때까지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높이였다. 물론 이 기록이 포로 도달한 최고 고도는 아니어서, 포로 도달한 최고 고도 기록은 제랄드 불이 계획한 HARP 포로 고도 180km 근처까지 도달한 기록이다.

그러나 사거리와 포격 기간에 비해 피해는 적은 편이다. 사거리를 위해 가벼운 포탄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상대적으로 폭약 탑재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과 더불어 탄두에 별다른 유도장치를 달 기술이 없었던 때라 초장거리에서 포격했을 때 명중률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 목표로 파리라는 넓은 지역을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공장이나 항구, 비행장 같은 작은 목표는 노리기조차 포기했었다.

하도 높이 멀리 쏘다 보니 포탄이 날아가면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도 영향을 받아서 조준할 때 코리올리 효과를 계산에 넣어야 했다고 한다.[4] 이외 포물선 운동을 하는 물체는 체공시간이 길어지면 공기저항의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에 45도[5]보다 다소 낮은 각도로 발사해야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밀도가 낮아져 공기 저항의 영향이 줄어들어서, 파리 대포의 경우 오히려 45도보다 높은 각도로 쏘는 것이 사거리가 늘어났다고 한다. [6]

이러한 이유로 각종 고전역학, 공업수학, 수리물리학 교재에 예제로 등장한다 (...).

3. 개발 과정[편집]


파리 대포를 만든 독일의 철강 재벌 크루프 사는 19세기부터 대포에서 잠수함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기를 만든 회사였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정거리를 노리고 개발한 것은 아니었고 우연한 실수와 그로 인한 발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작된 포를 테스트하던 중 실수로 고각으로 발사해버렸는데 각도상 근처에 떨어졌어야 할 포탄이 훨씬 먼 거리에서 착탄한 것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니 공기 저항이 적은 성층권을 통과하여 사거리가 늘어난 것을 발견하게 된 것.

이후 이 연구를 바탕으로 전함의 마모된 380mm 포신 안에 라인을 입히고 또 그 포신을 연장하여 만든 것이 파리 대포로 처음에는 해군포로 제작되었다가 파리를 공격하기 위한 육상포로 전환되었다. 당시 전차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후대에 나온 구스타프 열차포처럼 특수 열차에 탑재하게 되었다.


4. 효용성[편집]


떨어지는 명중율과 한 발당 위력, 높은 운용 비용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파리 대포를 운용한 목적은 심리전이었다. 적국의 수도를 공격하는 것으로 국내의 사기 진작과 프랑스의 사기 감소를 노린 것. 심리적인 효과는 독일 국내에서 컸다고 한다.


5. 해체와 은폐[편집]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프랑스의 공격이 시작되어 파리 대포를 해체해야 했다. 생산된 7문의 동형 포 중에서 파리를 직접 공격했던 것은 3문이었고 그나마 폭격으로 1문이 소실된 상황이었다. 8월에 파리 대포를 해체하며 독일은 포신은 물론 제조와 운영에 관한 모든 자료를 파기 및 은닉하였다. 연합군이 파리 대포를 찾아내려고 샅샅이 뒤졌지만 찾아낸 것은 포받침 역할을 하던 열차를 미합중국 육군 병력들이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현재 남은 자료는 크룹 사에서 일하던 프리츠 라우젠베어가(Fritz Rausenberger)가 죽기 전에 남긴 짧은 기술이 전부.

만약 파리 대포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생존한 세계에서 제일 큰 대포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폭격기나 미사일 등의 원거리 타격 수단이 발달한 현대로서는 그런 대포를 다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 참고로 현재 남아있는 대포 중에서 가장 큰 대포는 차르 대포이며 전장에 투입된 것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구스타프 열차포이다. 참고로 인류 역사상 사정거리가 가장 길었던 대포는 빅 바빌론이었지만 이쪽은 개발자 제럴드 불의 죽음과 걸프 전쟁으로 인해 끝내 완공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또한 실전 투입된 기록만 계산하자면 V3 초장거리포가 가장 사정거리가 길었다.


6. 후속[편집]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크루프에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해서 21cm K 12 (E)라는 후속작을 만들어냈다. 전작인 파리 대포와는 달리[7] 열차포의 형태를 갖췄고, 최대 사정거리가 115km에 육박하는 대포로 2기가 생산되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독일 국방군의 무기로 제식 채용되어 대서양 방벽에서 영국의 해안가를 장거리 포격하는데 사용되었다. 포탄은 무려 88km를 날아갔고 켄트주 레인헴 인근까지 착탄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진 못했다.


7.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쥘 베른이 1879년 쓴 인도 왕비의 유산에서 독일인 슐츠 박사가 프랑스 도시 프랑스빌에 거대한 대포를 발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작중에서는 계산 오류로 성층권 진입을 넘어 아예 인공위성이 되는 기염을 토한다. 작품 자체는 파리 대포보다 무려 40년이나 먼저 쓰여졌다.

또한 이전에 쓴 1865년작 지구에서 달까지에서는 본격 달로 가는 대포를 설정했으니, 발사 시에 지구 자전속도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미국 영토에서 최대한 위도가 낮은 지점에 대포를 설치했다는 설정인 소설상의 위치가 실제 케네디 우주센터와 거의 같고 소설상 포탄의 궤도가 아폴로 계획의 궤도와 거의 일치하는 등 아무튼 쥘 베른의 과학적 상상력은 무시무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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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는 대체로 Paris Gun이라고 한다.[2] 이는 실패 병기라고 여겨지는 독일 제국 해군 항공대체펠린 비행선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쟁 말기 체펠린 비행선은 연합국 전투기에게 마구 격추당하며 호구취급 당했지만 파리 대포는 끝까지 연합군을 괴롭했다는 데에 있다.[3] 랭스 노트르담 성당은 흔히 랭스 대성당이라 불리며,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들이 대관식을 치르던 곳으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과는 이름만 비슷할 뿐 다른 곳이다.[4] 오늘날에 포병이 사격할 때에도 코리올리 효과를 계산한다.[5] 공기저항이 없을 때 이상적인 최대 거리 각도[6] 대략 50~55도 정도에서 최대 사거리가 나온다. 중력가속도도 고도가 높아질수록 약해지므로 고려 요인 중 하나이나 그 영향은 미미한 편.[7] 파리 대포는 고정된 상태에서 발사되었고, 수송용으로 열차를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