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행정구역 코뮌이었던 파리에 대한 내용은 파리(프랑스) 문서
파리(프랑스)번 문단을
파리(프랑스)#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펼치기 · 접기 ]
이론과 분파
기본 이론
마르크스주의 · 카우츠키주의(정통 마르크스주의)
분파
레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 현실사회주의 · 카스트로주의 · 호자주의 · 호찌민 사상 · 주체사상 · 마오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 중국특색 사회주의 ·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 볼셰비키-레닌주의 (파블로주의 · 신트로츠키주의(클리프주의) · 제3의 진영 · 포사다스주의)) ·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룩셈부르크주의 · 좌파공산주의 · 무정부 공산주의 · 자율주의) · 서구 마르크스주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 국민공산주의 · 유럽공산주의
인물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 카를 카우츠키 · 블라디미르 레닌 · 레프 트로츠키 · 미하일 칼리닌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겐나디 주가노프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천두슈 · 리다자오 · 마오쩌둥 · 저우언라이 · 체 게바라 · 피델 카스트로 · 라울 카스트로 · 로자 룩셈부르크·프랑수아 노엘 바뵈프·루이 오귀스트 블랑키·카를 리프크네히트 · 안토니오 그람시 · 호찌민 · 응우옌반린 · 보응우옌잡 · 폴 포트 · 담딘 수흐바타르 · 허를러깅 처이발상 · 고토쿠 슈스이 · 시이 가즈오 · 고이케 아키라 · 키라 요시코 · 야마조에 타쿠 · 아카미네 세이켄 · 박헌영 · 김일성 · 빌헬름 피크 · 발터 울브리히트 · 에리히 호네커 ·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 엔베르 호자 · 헹크 스네이블릿·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 · 밥 아바키안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이론
공산주의 · 사회주의 · 노동가치론 · 변증법적 유물론 · 마르크스 경제학 · 여성해방론 · 프롤레타리아 독재 · 민주집중제 · 계획경제 · 반자본주의 · 무신론 · 사회주의법 · 인민민주주의 · 사회주의 문화
정당
(공산당)

현존 정당
아시아
중국공산당 파일:중국 국기.svg · 일본공산당 파일:일본 국기.svg · 노동자공산당 파일:일본 국기.svg · 노동의 해방을 목표로 노동자당 파일:일본 국기.svg · 조선로동당 파일:북한 국기.svg · 대만 공산당 파일:대만 국기.svg · 베트남 공산당 파일:베트남 국기.svg · 라오 인민혁명당 파일:라오스 국기.svg · 버마 공산당 파일:미얀마 국기.svg· 네팔 공산당(통합 마르크스-레닌주의) 파일:네팔 국기.svg · 네팔 공산당(마오주의 센터) 파일:네팔 국기.svg · 네팔 공산당(통합 사회주의) 파일:네팔 국기.svg · 인도 공산당 파일:인도 국기.svg ·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 파일:인도 국기.svg · 방글라데시 노동자당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팔레스타인 인민당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 이스라엘 공산당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 예멘 사회당 파일:예멘 국기.svg · 몽골 인민당 파일:몽골 국기.svg · 카자흐스탄 인민당 파일:카자흐스탄 국기.svg · 캄보디아 인민당 파일:캄보디아 국기.svg
유럽
프랑스 공산당 파일:프랑스 국기.svg · 스페인 공산당 파일:스페인 국기.svg · 포르투갈 공산당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 그리스 공산당 파일:그리스 국기.svg · 튀르키예 노동자당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 노동인민진보당 파일:키프로스 국기.svg · 독일 공산당 파일:독일 국기.svg · 오스트리아 공산당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 벨기에 노동당 파일:벨기에 국기.svg · 스위스 노동당 파일:스위스 국기.svg · 적색당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 보헤미아 모라바 공산당 파일:체코 국기.svg · 몰도바 공화국 공산당 파일:몰도바 국기.svg · 벨라루스 공산당 파일:벨라루스 국기.svg · 러시아 연방 공산당 파일:러시아 국기.svg ·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 파일:러시아 국기.svg · 사회당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 헝가리 사회당 파일:헝가리 국기.svg
아프리카
경제자유투사당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 파일:기니비사우 국기.svg · 모잠비크 해방전선 파일:모잠비크 국기.svg · 상투메 프린시페 해방운동-사회민주당 파일:상투메 프린시페 국기.svg · 앙골라 완전독립 민족동맹 파일:앙골라 국기.svg ·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파일:앙골라 국기.svg ·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 - 애국전선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 콩고 노동당 파일:콩고 공화국 국기.svg ·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
아메리카
미국 공산당 파일:미국 국기.svg · 미국 혁명공산당 파일:미국 국기.svg · 캐나다 공산당 파일:캐나다 국기.svg · 쿠바 공산당 파일:쿠바 국기.svg · 베네수엘라 공산당 파일:베네수엘라 국기.svg · 인민진보당 파일:가이아나 국기.svg · 자유 페루 파일:페루 국기.svg · 브라질 공산당 파일:브라질 국기.svg · 사회주의자유당 파일:브라질 국기.svg · 칠레 공산당 파일:칠레 국기.svg · 에콰도르 공산당 - 붉은 태양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에콰도르 공산당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 우루과이 공산당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볼드체: 여당 또는 연립여당
취소선: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정당
해체된 정당
소련 공산당 · 이탈리아 공산당· 조선공산당 · 남조선로동당 · 세르비아 공산당 · 헝가리 사회노동당 · 폴란드 통일노동당 · 알바니아 노동당 ·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 인도네시아 공산당 · 불가리아 공산당 ·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 말라야 공산당 · 캄푸치아 공산당 · 루마니아 공산당 · 중화민국 공산당 · 영국 공산당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 헝가리 노동자당
국제 조직
코민테른 · 코민포름 · 코메콘 · 바르샤바 조약기구 · 인터내셔널 · 공산당-노동자당 국제회의 · 각종 공산주의 정당 연합
국가
인민공화국 또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국가
· · ·
공산주의 정당이 여당으로 집권 중인 국가
· · · · · · · · · · ·
★: 연립정부의 구성원으로 집권한 국가
붕괴된 국가
· · · · · · · · · · · · · · · · · · · ·
상징·표어
낫과 망치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붉은 별 · 적기
관련 문서
분파 · 역사 · 서기장 · 탈공산주의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파일:레닌_투명.svg 레닌주의 {{{-2

파일:스탈린_투명.png
마르크스-레닌주의 · {{{-2

파일:마오쩌둥 투명.svg
마오쩌둥 사상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좌파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프랑스 좌익정당
파일:불복하는 프랑스 신 로고.svg
파일:사회당(프랑스) 로고.svg
파일:프랑스 공산당 로고.svg
장뤼크 멜랑숑
올리비에 포르
파비앙 루셀
파일:유럽 생태녹색당 로고.png
파일:운동세대 로고.svg
파일:Logotype_PRG_Le_centre_gauche.png
야니크 자도
브누아 아몽
기욤 라크루아


주요 사상
공화주의 · 자코뱅주의 · 급진주의 · 사회주의 · 아나키즘 ·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 트로츠키주의 · 유럽공산주의) · 생디칼리슴 · 신좌파 · 사회민주주의 · 민주사회주의 · 생태사회주의 · 구조주의 ·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
프랑수아 노엘 바뵈프 ·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 샤를 푸리에 ·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 조르주 소렐 · 장폴 사르트르 · 모리스 메를로퐁티 · 시몬 드 보부아르 · 자크 라캉 · 롤랑 바르트 · 루이 알튀세르 · 미셸 푸코 ·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 장 보드리야르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 자크 데리다 · 피에르 부르디외 · 에티엔 발리바르 · 자크 랑시에르 · 알랭 바디우
정치인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 · 프랑수아 올랑드 · 에마뉘엘 마크롱*
주요 총리
아리스티드 브리앙 · 레옹 블룸 · 에두아르 달라디에 · 기 몰레 · 피에르 모루아 · 미셸 로카르 · 피에르 베레고부아 · 리오넬 조스팽 · 장마르크 에로 · 마뉘엘 발스 · 베르나르 카즈뇌브
기타
장폴 마라 · 조르주 당통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 자크 르네 에베르 ·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 자크 루 · 필리포 부오나로티 · 장 조레스 · 자크 도리오 · 모리스 토레즈 · 자크 뒤클로 · 로랑 파비위스 · 세골렌 루아얄 ·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 안 이달고 · 다니엘 콩방디트
관련 인물
자크루이 다비드 · 외젠 들라크루아 · 귀스타브 쿠르베 · 빅토르 위고 · 에밀 졸라 · 알베르 카뮈 · 누벨바그(장뤽 고다르 · 프랑수아 트뤼포 · 클로드 샤브롤 · 자크 리베트 · 에릭 로메르) · 아니 에르노 ·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 목수정
관련 집단
클뢰브 데 자코뱅(몽테뉴파 · 에베르파) · 상퀼로트 · 클뢰브 데 코르들리에 · 마레파 · 앙라제 · 드레퓌스파 · 급진당 · 인민 전선 · 레지스탕스 · 신민중생태사회연합 · 파리 제8대학교 · 파리 낭테르 대학교
언론사
르몽드(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리베라시옹 · 뤼마니테 · 샤를리 엡도 · 카이에 뒤 시네마
관련 사건
프랑스 혁명 · 리옹 폭동 · 1832년 6월 봉기 · 프랑스 2월 혁명 · 파리 코뮌 · 드레퓌스 사건 · 68혁명 · 노란 조끼 운동
* 대통령 집권 이후로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분파




파리 코뮌
La Commune de Paris
Commune of Paris

파일:적기.svg
깃발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국가
라 마르세예즈 드 라 코뮌
수도
파리
표기
프랑스어:Commune de Paris
한국어(표준어):파리 코뮌
한국어(문화어):빠리 콤뮨
영어:Paris commune
정치체제
코뮌
자코뱅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종교
무종교(국가 무신론), 세속주의
언어
프랑스어
}}}

파일:파리코뮌.jpg
코뮌이 설치한 파리 시내의 바리케이드

1. 개요
2. 배경
3. 역사
3.1. 탄생
3.2. 파리 코뮌의 정책
3.3. 진압
3.4. 진압 이후
4. 영향
5. 문화재 파괴
6. 기타



1. 개요[편집]


"코뮌이 이런저런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이를 짓밟아 없애고자 한다면, 정부들은 자기 자신의 기생적 존속 조건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약 70일 가량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자유지상주의마르크스주의 운동. 70일 간 존속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이다. 자코뱅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이념으로 구성되어 여성 참정권 보장, 노동 시간 제한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2. 배경[편집]


예나 지금이나 혁명의 도시였던 파리는 강력한 시민 봉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파리 코뮌도 엄밀하게 따지면 기존 정부가 세금값을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나타난 이 혁명 정부만 일컫는 게 아니라 1789년의 그 대혁명 당시 중요한 정치적 격변마다 시민들이 쇠꼬챙이, 창, 부엌칼, 사냥용 머스킷 등등으로 무장하고 파리 시청 오텔드빌(Hôtel de Ville)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도 파리 코뮌이었으며 더 광의로 파리 시민봉기 전통 그 자체로 보면 그 이전으로는 16세기 위그노 전쟁의 파리 신성동맹, 이후로는 현대의 노란 조끼 운동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1871년의 혁명 정부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파리 코뮌'이란 단어 자체는 프랑스 혁명사에서도 늘상 등장하니 헷갈리지 말자.

프랑스 제2제정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너무나도 한심한 대처를 보여주자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아돌프 티에르를 수반으로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도 나폴레옹 3세 못지않은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굴욕적인 사태가 지속되었다. 신생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빌헬름 1세의 즉위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루어졌으니 말 다했다... 거기다가 새로운 국민의회가 자리를 잡은 도시가 하필이면 또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였다. 전쟁 직후에는 보르도에 수립되었으나 임시정부가 완전히 구성된 후 베르사유로 옮겼다고 한다.

파리가 대혁명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도시인 만큼 파리 시민들은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로 불만에 차 있던 시민들은 이런 일로 인해 더더욱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쌓여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은 의용군인 국민위병의 처리 문제였는데, 안 그래도 불신을 받던 임시정부가 프랑스군의 예비군 역할을 하던 의용군을 무작정 무장해제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과 의용군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3. 역사[편집]



3.1. 탄생[편집]


어제까지는 이름조차 없었으나 곧 만천하에 그 이름을 날릴 이 미천한 프롤레타리아트ㅡ국민 방위대 중앙 위원회 성원들ㅡ가 정의와 권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프랑스와 공화정에 대한 끝없는 헌신으로 충만하여 침략당한 조국과 위협받는 자유를 구하러 단호히 일어섰다.

우리 나라는 다시 일어서고, 부흥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프랑스 혁명의 코뮌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코뮌은 모든 정치 체제의 토대다. 코뮌은 자치를 보유해야 한다. 즉 코뮌의 독특한 특성과 전통과 필요를 인정하는 자치 행정, 자치 정부를 가져야 한다.

<3월 18일 혁명> 中, 《파리 코뮌 공보》 1871년 3월 20일 자


3월 18일, 티에르는 국민위병이 보유하고 있는 대포를 탈취하고자 정규군을 파견했다. 군인들은 대포가 있었던 몽마르트르에 도착하여 대포를 차지했지만 곧 분노한 시민들과 국민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군중들이 모여들자 정부군 여단장은 발포를 명령했지만 군인들이 시민들과 손을 잡으면서 정부의 진압 작전은 실패했다. 이 일로 정국의 주도권은 파리 시민들에게로 넘어갔다.

곧 3월 26일 코뮌 평의원 선거가 파리에서 치러졌고, 84명의 평의원이 선출되면서 코뮌 평의회가 출범했다. 평의원들은 대다수가 자코뱅공화주의 성향의 인물이었고, 블랑키주의자, 프루동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3월 28일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 파리 코뮌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튿날부터 파리 코뮌은 10개의 위원회[1]를 구성하고 자치 정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3.2. 파리 코뮌의 정책[편집]


파리와 프랑스는 지금 진행되는 혁명의 성격, 원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당하는 이 비탄, 고통, 불행의 책임이 프랑스를 배신하고 파리를 외국에 내준 후... 이 위대한 도시의 파멸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을 당연하다.

코뮌은 파리 주민들의 열망과 바람을 확인하고 명확히 할 의무가 있다... 파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인민의 권리, 자유롭고 정상적인 사회 발전에 부합하는 유일한 통치 형태인 공화정을 인정하고 공고히 할 것[2]

을 요구한다...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 능력과 자질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코뮌의 절대적 자치를 요구한다....

보라, 무기를 든 파리는 용맹과 평온을 지키고... 열정과 활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파리는 만인의 자유와 영광에 헌신하고자 무기를 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투쟁할 의무, 승리할 의무가 있다.

<프랑스 인민에게 고함> 中, 《파리 코뮌 공보》 1871년 4월 20일자


파일:파리코뮌의 구성원들.jpg
방돔 광장에 모여 있는 파리 코뮌 의원, 군인,[3] 시민들

다양한 스펙트럼의 좌익으로 구성된 파리 코뮌 정부는 상당히 진보적인 활동을 벌였다. 먼저 정치적 주체를 인민으로 설정했고 인민 주권을 표방했다. 그래서 코뮌 평의회의 의원들은 지역구 시민들의 찬반에 따라 직위를 유지하거나 상실했다. 또한 이런 구조하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정책들을 펼쳤다.

코뮌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많이 시행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공장을 접수하도록 했으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공장을 운영하여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도왔다.[4] 또 노동 시간을 하루 최대 10시간으로 제한했고[5] 최저임금제[6] 야간 노동 금지 등의 파격적인 조치도 발표했다. 이외에도 주택 임대료를 조정하고 빈곤층을 구제했으며 공창제를 폐지하고 도박을 금지시켰다.

교육에서는 교회와 교육을 분리했다. 당시 가톨릭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는 종교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코뮌 정부는 정교분리를 강조하여 세속주의적인 교육관을 퍼트렸다. 그런가 하면 초등 과정에서 의무교육를 무료로 시행했으며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직업교육도 강화했다. 교육 내용도 실용교양을 겸비하도록 했다. 또 예술 교육에도 신경을 써서 예술가들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 코뮌의 지원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예술가가 귀스타브 쿠르베다. 그는 코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코뮌 진압 이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코뮌 정부는 여성외국인의 권리 신장에도 신경을 썼다. 파리 코뮌은 여성들과 외국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고 이들이 코뮌 정부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최초의 여성 대중 운동 조직여성 동맹을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코뮌은 자유로운 결혼을 인정했으며 독신 여성들과 그 자녀들에 대한 연금 지원도 실시했다. 놀라운 것은 법률혼뿐 아니라 사실혼인 경우에도 이 정책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또 독일 출신 노동자를 노동부 장관으로 기용하기도 했는데 독일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2등 국가였고 불과 몇 달 전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했던 나라임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인사였다. 한국으로 예를 들면 동남아시아 외국인 노동자 출신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한 셈이었다.

그밖에 코뮌 정부는 '권위주의에 대한 공격'을 시행하여 나폴레옹 1세 당시 세워진 방돔탐 등 여러 권위적인 건물과 기념물, 문화유산들을 정책적으로 파괴하기도 했다.
[7]


3.3. 진압[편집]


파일:파리코뮌 진압 직후의 파리.jpg
파일:사살된 코뮌 관련자들.jpg
진압 작전 후 폐허가 된 파리 시내[8]
사살된 코뮌 관련자들

초기에는 코뮌 측의 병력이 훨씬 우세했으나 2주일만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베르사유의 정부는 (충성심이 의심스럽던) 파리에서 철수시킨 정규군 대신 지방에서 징집한 군대를 집결시키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교섭하여 400,000명의 프랑스군 포로들을 조기에 석방받았다. 코뮌과 정부 간의 협상도 있었으나 결국 4월 2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뮌 측은 훈련 부족과 기율 결핍으로 패배를 거듭했다. 특히 명확한 지휘 계통의 부재와 다양한 정파들 간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전투는 코뮌군의 계속된 패배로 이어졌다.

당시 코뮌군의 훌륭한 지휘관이었던 로셀은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그만두면서 사임서에 이렇게 썼다.

"코뮌 의원 동지들, 모두들 토론은 하나 아무도 따르지 않는 지휘의 책임을 내가 계속하여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코뮌이 토론은 하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만일 내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력이 있다면 나는 적을 징계할 수 있다..... 포병위원회의 엉터리가 포병대 조직을 막았고, 중앙위원회의 머뭇거림이 집행을 지연시키고, 대장들의 사소한 선입견이 군대 동원을 마비시키고 있다...."


결국 5월 21일 밤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 시내로 돌입하여 28일 오후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피의 1주일이 시작되었다.

파리 코뮌 측 중 절망한 과격파들은 파리의 대주교를 비롯해서 수많은 반대파를 학살했다. 또 튈르리 궁전, 루브르 궁전, 팔레 루아얄과 중세 시절부터 건축된 각종 정부, 법원 청사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인 건물들을 고의로 불태우면서 끝까지 항전했다. 베르사유 정부군도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포로를 즉결 처형하는 등 처절하게 보복했다. 보복은 보복을 일으켰고 그 강도를 계속 더해갔다.[9]

이때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0,000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871년의 파리 인구는 175만명 정도였다. 2019년의 파리 시내 인구가 220만명이니 2019년 기준으로 봐도 1% 이상이다. 1871년 당시 파리 인구로 치면 거의 2%에 가까운 대학살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전공한 노명식에 따르면 피의 주간에 사망한 코뮌파 포함 사망자의 수치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관련 연구들의 평균치에 따르면 즉결재판에서 처형된 자의 수는 적게 잡아도 최소 20,000명 이상이고, 많이 잡으면 25,000명 이하라고 하지만 이 즉결재판에 관해서는 처형자의 명단조차 남기지 않았기에,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파리 코뮌에서 희생된 자의 수는 즉결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전사한 자들과 '피의 주간' 이후에 마구잡이로 무차별 학살된 자들을 포함시키면 그 수효가 엄청나게 급증한다고 한다...

이 학살극 이후 파리 코뮌 정부는 마침내 해체되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3.4. 진압 이후[편집]


진압된 이후에도 보복이 이어져서 40,000여 명이 법정에 끌려나왔으며 이 중 13,450명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 중 사형 270명, 강제노동 410명, 요새 금고형 3,989명, 유형 3,507명이었다. 1875년 군부가 의회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투옥된 자가 43,522명이고 이 중 7,213명이 예비심에서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36,309명이 기소되었다. 이중 기소 무효가 23,727명, 무죄 판결이 2,445명이었으며 결국 유죄판결을 받은 수는 10,137명이었다. 이중 사형이 93명, 무기가 251명, 유형이 4,586명, 나머지는 전부 금고형이었다고 한다. 일부 코뮌 참여자들은 프랑스를 빠져나와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은 다시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1876년 총선에서 강성 보수 왕당파가 참패하면서 중도 보수 공화파가 승리를 거두웠고 공화파가 정치위기를 극복한 이후 코뮌 가담자에 대한 사면령이 1879년과 1880년에 내려지면서 일부 코뮌 가담자들은 의회 정치에 참여하며 정계에 진입하였다. 이후 파리 코뮌의 주 이념이었던 급진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 정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함에 따라 프랑스 정계에도 강력한 영향을 남겼다. 비록 당대에는 실패했지만, 후대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남긴 셈이다.


4. 영향[편집]


비록 코뮌은 실패로 끝났지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시도는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세우는 데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파리 코뮌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 연습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으며[10]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본보기/반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사에 비춰보면 파리 코뮌은 그간 프랑스 혁명을 이룬 상퀼로트들의 최후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이라고도 할 수있다. 역사가 데이빗 톰슨에 의하면 파리 코뮌은 1789년 이래의 프랑스 혁명적 전통의 매듭 중 가장 큰 것으로서, 파리 코뮌이 문명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으로 끝나자 이후 폭력의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가 평화적 타결로 혁명을 이어가는 이유가 파리 코뮌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뷰리라는 역사가는 파리 코뮌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향으로 우선 파리 코뮌을 통해 혁명의 중점이 파리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들었다. 이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파리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모든 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고 지방의 반발은 파리의 중심을 차지한 혁명세력에게 짓눌렸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파리를 차지했는데도 지방에 밀려서 패배'했다. 파리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폭력과 불안정 및 사회적 위기는 늘 동반된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실패로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다시 지연시켰다는 면도 있었다. 물론 이후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지만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이 해체되면서 국민위병 부대도 해체, 19세기 내내 정부와 별개로 민중을 대변했던 힘이 소멸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파리 코뮌을 통해 제2제국으로부터 제3공화국의 실현이 한층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

전세계 좌익에서 널리 불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탄생했다. 인터내셔널가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려면 해당 문서 참조.

2000년피터 왓킨스가 감독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코뮌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뮌 당시 벨기에에 있었다. 그는 파리 코뮌에 대해 동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후일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자 정부군이 파리에 들어오며 끔찍한 전투와 학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절규했고 <참혹한 해(L'Année terrible)>라는 시집을 1872년 출판한다. 그 중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는 다음과 같다. 원문

<길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죄 있는 피와 죄 없는 피로 붉게 물든 디딤돌 사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12세의 소년이 친구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 자식, 너희도 놈들과 한패지?
소년은 대답했다.
우리들은 친구입니다.
좋아.
장교는 말했다.
너희는 총살감이다, 차례를 기다려라.
한 소년이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시계를 전해 주고 오겠다고 말했다.
장교는 의심의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건 핑계지? 도망치려고 그러지?
아닙니다. 틀림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좋아, 도중에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장교는 소년을 풀어 주었고 소년은 곧 돌아왔다.
소년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떳떳하게 외쳤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형은 수치를 부른다. 그래서 사관은 놓아주었다.
아이여, 나는 알 수 없다. 선도, 악도, 영웅도, 도둑도.
모두를 끌어넣어 흘러가게 하는 회오리 속에서,
무엇이 너를 이 전투에 끌어들였는지, 하지만 나는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마음이야 말로 가장 기품 있는 마음이었음을


5. 문화재 파괴[편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파리 코뮌 기간 동안 파리를 상징하는 각종 유서 깊은 역사적 건축물들과 문화재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과격한 코뮈니스트들이 건축물들과 문화재들을 대거 파괴했기 때문이다. 파리 코뮌이 진압되고 나서 도시가 거의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것은 코뮈니스트들의 엄청난 방화 때문이었다.

파리 시내에 있던 여러 궁전, 의회, 정부, 법원, 오페라하우스 건물 등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코뮤니스트들은 역사적 건축물에 의도적으로 방화했으며 석유와 액체 타르 등을 써서 방화한 덕분에 많은 건물들이 속수무책으로 불타 버리고 말았다.

파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궁전인 튈르리 궁전도 이때 코뮤니스트들의 방화로 완전히 전소되었으며 루브르 궁전에도 방화가 시도되었으나 화재가 조기 진압되어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튈르리 궁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 튈르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16세기에 지어져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로 유명한 파리 시청도 이때 방화로 전소되었다가 나중에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6. 기타[편집]


  • 러시아-소련 해군강구트급 전함 중 파리시스카야 콤무나(Парижская коммуна)는 이 파리 코뮌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정확히는 소련 건국 이후 붙여진 것으로, 러시아 제국 시절의 이름은 '세바스토폴'. 앞서 말했듯이 파리 코뮌은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로 꼽히므로 러시아 혁명 직후 국제주의 - 이상주의 성향이 많이 남아 있던 극초기 소련에서는 당연히 이를 기념할 필요가 있었다. 비슷한 예로 같은 강구트급 전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는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혁명가 장폴 마라의 이름을 따서 '마라'로 바뀌었다.

  • 참고로 세계 최초의 여행사를 세운 토마스 쿡이 처음으로 패키지 여행 서비스 대상으로 삼은 곳들 중 하나가 바로 파리 코뮌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파리 시가지였다. 당시 색다른 것을 찾던 부유한 영국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고.#

  •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프랑스로 공산주의 루트를 선택할 시 국명이 프랑스 코뮌으로 변하기도 한다.[11]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07:49:21에 나무위키 파리 코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위원회의 종류는 다음과 같았는데 재무, 군사, 사법, 보안, 식량 공급, 노동, 공업, 교환, 외무, 공공사업, 교육이었다. 이들 10개의 위원회들은 동일한 권력을 가졌고 각 위원회의 위원들이 업무를 담당하며 정책을 시행했다.[2] 이후 공화정은 바뀌지 않고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 정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3] 중간중간 파리 방어전에 투입된 이후 그대로 주둔하다가 가담한 프랑스 해군 육전대 수병들도 보인다.[4] 흔히 노동자 자가경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도는 노동자들이 직접 노동조합을 통해서 산업을 운영하는 산업 민주주의 체제였고 파리 코뮌 이후에는 네스토르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자유지구, CNT-FAI의 스페인 내전 당시 자가경영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시도하는 체제였다. 즉 국가자본가도 아닌 노동자들 자신들이 직접 산업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체제였다. 이후 이 이론은 유고슬라비아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서 완성되었다.[5] 8시간 노동이 꽤나 보편화된 21세기에는 10시간이 뭐냐는 이들도 있겠지만 저 당시엔 10시간은 고사하고 적어도 18시간의 노동, 심하면 20시간 이상의 고노동도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이를 절반 가까이 줄인 것이다.[6] 러시아의 얘기지만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에 나오길 여성들이 18시간의 노동을 해도 고작 30수, 즉 1프랑 10수 대략 50,000원 가량의 돈만을 받았다고 나올 정도로 당시 자본주의임금 제도는 정말로 노예와도 같았다.[7] 물론, 당시 입장에서의 나폴레옹시기 기념물이나 문화재같은 경우에는 건립된지 반세기도 안된것들이 하다했기에, 당시 인식은 그냥 오래된 건물이였다, 약 한세기 후의 중국문화대혁명같이 학술가치 풍부한 중요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때려부순것 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있다.[8] 시내가 폐허로 변한 것은 정부군의 진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코뮈니스트들이 의도적으로 방화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9] 이 끔찍한 학살극 앞에서 신문 《파리 주르날》(Paris Journal)은 이렇게 호소했다. "죽이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 살인범이나 방화범이라 해도 더 이상 죽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놈들의 사면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형의 집행을 유예하고자 하는 것이다."[10] 레닌은 소련 체제가 두 달을 버티자 파리 코뮌보다 오래 지속됐다고 기뻐하기도 했다.[11] 다만 프랑스 코뮌은 스탈린주의 정당인 프랑스 공산당이 집권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