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올라 데 모라 이 아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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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보두앵의 왕비
파비올라 데 모라 이 아라곤
La Reine Fabiola


파일:Fabiola, queen of Belgium.jpg

이름
파비올라 페르난다 마리아 데 라스 빅토리아 안토니아 아델레이다 데 모라 이 아라곤
(Fabiola Fernanda María de las Victorias Antonia Adelaida de Mora y Aragón)
출생
1928년 6월 11일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주르바노 대저택
사망
2014년 12월 5일 (향년 86세)
벨기에 브뤼셀 라켄 슈투이벤베르크 성
장례식
2014년 12월 12일
라켄 성모 성당
배우자
보두앵 (1960년 결혼 / 1993년 사망)
아버지
카사 리에라 후작 곤살로 데 모라 이 페르난데스 이 리에라 데 올모
어머니
블랑카 데 아라곤 이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 이 바로에타알다마르 이 엘리오
형제
마리아 데 라스 니에베스, 곤살로, 아나 마리아, 알레한드로, 하이메, 마리아 데 라 루즈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결혼 전
3.2. 왕비
3.3. 왕대비
3.4. 사망
4.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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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제 5대 국왕인 보두앵 국왕의 아내이며, 필리프 국왕의 큰어머니로 엘리자베트 공주백종조모이다.

보두앵 국왕과 파비올라 왕비 부부는 매우 선한 성품이었고 선남선녀 부부의 정석을 보여줬으며 특히 파비올라 왕대비는 자선 사업에 대한 열렬한 후원자로 벨기에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왕비이다.

2. 작위[편집]


파일:alliance-coat-of-arms-of-king-baudouin-and-queen-fabiola-svg_orig.png
문장



3. 생애[편집]



3.1. 결혼 전[편집]


1928년 6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카사 리에라 후작 곤살로 데 모라 이 페르난데스 이 리에라 데 올모와 그의 아내 도냐 블랑카 데 아라곤 이 카릴로 데 알보르노스 바로에타 알마르 엘리오의 딸로 태어났다. 파비올라의 대모는 스페인의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왕비였다.

파비올라는 다섯 번째 자녀로 6명의 형제자매를 두었다.

마드리드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고 어머니 블랑카와 함께 살았다. 결혼 전에 그녀는 12개의 동화 (Los decueentos maravillos)의 앨범을 출판했는데, 그 중 하나는 1966년에는 에펠링 테마파크에 자체 전시관을 설치했다.


3.2. 왕비 [편집]


1960년 12월 15일, 생 미셸-구둘라 대성당에서 벨기에의 왕인 보두앵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시 파비올라 왕비는 시어머니 아스트리드 왕비가 벨기에 왕실에게 선물받은 아르 데코티아라를 썼고, 왕비의 새틴-에르민 드레스는 쿠튀리에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디자인했다. 결혼 전인 1960년 9월 26일자 타임지는 파비올라를 "신데렐라 소녀"라고 부르며 그녀를 "미모는 아니지만 매력적인 젊은 여성", "남자를 잡을 수 없는 소녀"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그녀의 결혼식에 즈음하여, 스페인 제빵사들은 파비올라를 기리기 위해 "라 파비올라"(la fabiola)라는 빵을 만들었는데, 이 빵은 지금도 팔렌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961년, 1962년, 1963년, 1966년, 1968년에 다섯 번의 임신이 유산으로 끝났기 때문에 자녀가 없었다고 하며 그래도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1] 파비올라와 보두앵 1세는 유산을 통해 모든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라고 불렀다. 그래서 시조카인 필리프 왕자와 아스트리드를 친자식처럼 예뻐했다.

1965년 11월, 엘리자베트 왕대비가 사망하자, 파비올라 왕비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명예 회장이 되었다. 왕비는 예선전과 각 세션의 결승전에 참석했다고 한다. 1990년대 브뤼셀의 생피에르 병원에서 에이즈와 관련된 문제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비올라 왕비는 1993년에 그들을 방문했고 한 환자를 껴안았다. 그녀는 이것을 한 최초의 공인 중 한 명이었다.

파비올라 왕비는 또한 많은 도움 요청에 답하기 위한 목적으로 왕비의 사회 사무국을 설립했다. 그녀는 어린이들 사이의 난독증의 예방과 치료를 목표로 하는 연구 프로그램을 지원해왔다.

그녀는 파비올라 왕비 정신 건강 기금을 설립했다. 이 재단의 목적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평생 동안, 그녀는 젊은 여성 매춘, 인간 노예, 장애인과 같은 사업에 헌신했다. 생전에 여러 인도주의적 상을 받았고 2001년 유엔 식량농업기구로부터 세레스 메달을 받았다.


3.3. 왕대비[편집]


남편 보두앵은 1993년 7월 말에 사망했고 시동생 알베르 2세가 뒤를 이었다. 파비올라는 라켄 성을 벗어나 좀 더 수수한 슈투이벤베르크 성으로 이사했고, 파비올라의 동서인 파올라 왕비를 무색하게 하지 않기 위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녀의 가톨릭과 특히 정신 건강, 아동 문제, 여성 문제와 관련된 사회적 대의에 참여한 것으로 존경을 받은 파비올라 왕대비는 개발도상국에서 농촌 여성들을 홍보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세레스 메달을 받았다. 이 훈장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수여했다. 그녀는 또한 루아 보두앵 재단의 명예 회장이었다.


3.4. 사망[편집]


파비올라 왕대비는 2009년 1월 16일부터 15일간 폐렴으로 입원했다. 그녀는 이어서 회복되었고 다음 5월에 공공 행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9년에 앓았던 폐렴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등 수년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 2014년 12월 5일 저녁, 향년 86세의 나이로 슈투이벤베르크 성에서 사망했다.


4. 여담[편집]


  • 남편 보두앵 국왕처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세례명은 파비올라(Fabiola)이다.
  • 모국어인 스페인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에도 구사했다고 한다.
  • 1961년 탐험가 귀도 데롬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새로 발견된 남극 산맥인 퀸 파비올라 산맥을 명명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여러 종류의 관상용 식물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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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두앵 1세와 파비올라 왕비 부부의 사진중들에 보두앵 1세가 파비올라 왕비의 어깨를 올리고 걸어가면서 찍은 사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