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슈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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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명칭
3. 언어
4. 분포 지역
4.1. 아프가니스탄
4.2. 파키스탄
4.3. 타지키스탄
4.4. 이란
4.5. 인도
4.6. 중국
4.7. 그 외
5. 정체성
5.1. 조상
5.2. 문화
5.2.1. 명예
5.2.2. 용맹성
5.2.2.1. vs. 몽골 제국: 무승부
5.2.2.2. vs. 사파비 왕조: 승
5.2.2.4. vs. 마라타 동맹: 승
5.2.2.5. vs. 시크 왕국: 패
6. 그 외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슈툰인(پښتانه, Pashtuns)은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에 걸쳐 거주하는 이란계 민족이다. 파키스탄에 4400만여 명, 아프가니스탄에 1500만여 명, 인도에 300만여 명이 거주한다. 아프가니스탄 전체 인구의 38–42% 정도를 차지하는 최대 민족이며 파키스탄에서는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파슈툰인 총 인구는 약 6–7천만여 명 정도이다.


2. 명칭[편집]


파슈툰인의 모어인 파슈토어로 파슈툰인을 지칭하는 표현은 پښتانه(pəx̌tānə́)이다. 이는 پښتون(pəx̌tún)의 복수형으로, 파슈토어 자음 ښ(x̌in)이 페샤와르카불처럼 북부 지방에선 [x\], 칸다하르퀘타와 같은 남부 지방에선 [ʂ\]로 발음되기 때문에 북부 지방에선 퍼흐타너·퍼흐툰, 남부 지방에선 퍼슈타너·퍼슈툰으로 읽힌다. 이 때문에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파슈툰인이 거주하는 파키스탄우르두어로는 파흐툰(پختون / paxtūn)이란 표기도 종종 쓰이지만 전통적인 힌두스탄어로는 파탄(पठान / پٹھان / paṭhān)이라 지칭했다.

페르시아어(다리어)로도 파슈툰하(پشتون‌ها / paštunhâ, 복수형) 또는 파슈툰(پشتون / paštun, 단수형)이라고 하지만 아프간하(افغان‌ها / afğānhā) 또는 아프간(افغان / afğān)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기도 했다.

번외: 파슈토어 자음 ږ(ǵē)이 페샤와르카불처럼 북부 지방에선 [ɡ\], 칸다하르퀘타와 같은 남부 지방에선 [ʐ\]로 발음된다.


3. 언어[편집]


언어는 이란의 페르시아어(다리어)와 비슷한 점이 많은 파슈토어를 쓴다. 같은 이란어군에 속하여 비슷할 점이 많을 뿐, 상세하게 들어가면 페르시아어와 다리어는 서이란어군, 파슈토어는 동이란어군에 속한 탓에 서로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며 파슈토어 내에서도 방언차가 있다.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토인들의 경우 파키스탄의 공용어이자 국어에 해당하는 우르두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많으며,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인 중에서도 종교적 이유 혹은 발리우드 영화의 영향으로 우르두어를 구사 가능한 인구가 적지 않은 편이다.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인 상당수는 다리어를 구사할 수 있다.


4. 분포 지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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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남부를 비롯한 대부분 지역 및 파키스탄의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4.1. 아프가니스탄[편집]


아프간이라는 표현은 페르시아어로 파슈툰인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던 '아프간(افغان / afġān)'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기에 페르시아어 접미사 '-이스탄'이 결합된 아프가니스탄(افغانستان / afġānistān)이라 한다면 어원적으로는 '파슈툰인의 땅'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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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파슈툰인은 부족 단위로 세분화된다. 사진은 아프간 전체 파슈툰인이 아니라 아프간의 한 주인 칸다하르주의 파슈툰인을 세분화한 것이다. 가장 큰 부족들로는 아프가니스탄 서남부의 두라니(دراني)와 동남부의 걸지(غلجي)[1]를 꼽을 수 있으며, 물론 이들 부족도 여러 갈래로 세분화된다. 그 외에는 파키스탄 북부의 유서프자이(یوسفزی)나 하타크(خټک), 와지르(وزير), 발루치스탄의 카카르(کاکړ),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신와리(شينواري) 등의 부족들이 존재한다.


4.2. 파키스탄[편집]


또한 파키스탄에서도 전 인구의 15%가 파슈툰(파흐툰)족이다. 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파슈툰인 인구는 3200만 명이다. 즉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인 인구보다 더 많다. 이게 다 듀런드 라인 때문이다. 영국 또 너야? 주로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에 거주한다.

변경 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탈레반들의 주 기반으로 과거 교역 요충지였던 카이베르 고개는 오늘날 탈레반 연결 통로로 악용되고 있다. 파키스탄 내에서는 파슈툰인이 인기가 꽤 있는데, '순수 백인 혈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이목구비가 훤하고 피부가 뽀얀 미녀가 많은 민족'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4.3. 타지키스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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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슈툰인과 근연 관계인 파미르인이 20~30만여 명 거주한다. 다만, 파미르인들은 순니파가 아닌 이스마일파에 속하므로 종교적으로 이들은 분리된다. 일부 파슈툰인들이 타지키스탄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프간 내전 당시에 피난 온 경우도 있다.


4.4. 이란[편집]


이란에도 파슈툰인이 산다. 대부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참화와 탈레반의 폭정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이며, '공식적'으로는 10만여 명 정도로 집계된다. 물론 이란의 파슈툰계 정복왕조인 호타키 왕조 시절에 이주해온 파슈툰인의 후손들도 있다.


4.5. 인도[편집]


인도에서는 아프가니스탄계 인도인들 중에 파슈툰인들이 상당한 편이다. 인도에 정착한 파슈툰인(파탄)인 로힐라족이 있는데, 우타르프라데시의 로힐칸드 지역에 많이 산다. 16세기 초 무굴 제국에 흡수당한 로디 왕조수르 제국 역시 파슈툰인과 관련이 있다.

현대 인도의 파슈툰계 유명인사로는 배우인 아미르 칸이 대표적이다.


4.6. 중국[편집]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국경 지역 타슈쿠르간에 거주하는 사리콜인와키인파슈토어 방언을 쓰지만, 다른 파슈툰인들과 다르게 종파가 순니파 이슬람이 아닌 시아 이스마일파이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타지크인으로 분류하는 상황인지라, 파슈툰인과는 별개의 민족 집단으로 여겨진다.


4.7. 그 외[편집]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중에는 파키스탄, 타지키스탄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부는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호주, 인도로도 이주했다. 러시아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5. 정체성[편집]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사는 파슈툰인들은 아프간인, 파키스탄인보다는 파슈툰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강하다. 이들에게는 제국주의 열강이 그어놓은 국경에 소속된 국적보다는 자기 주변의 씨족,부족 소속원의 정체성을 우선시하며, 평상시에는 부족단위로 분열되어 각자 살지만 외세의 침입때는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연대해서 싸워 이기던 아프간 고원의 토착민들이다. 이때문에 양국의 파슈툰인이 국경선에 개의치 않고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사람과 물자가 오가고 있는데, 이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무자헤딘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탈레반이 승전한 원인이기도 했다.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는 미국이 파키스탄의 파슈툰인을 활용해서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저항군에 다량의 물자를 지원했고, 21세기 들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수많은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양국의 파슈툰인 거주지역을 자유로이 오고 가면서 활동한다. 오사마 빈 라덴알카에다 간부들도 미군의 추적을 피할 때 이 루트를 통해서 파키스탄으로 탈출했던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사실 파슈툰인들의 거주 지역이 두 나라로 찢어지게 된 것도 19세기 말 대영제국이 국경선을 제멋대로 지도에 자 대고 그어서 생긴 일이다. 지금의 파키스탄을 포함한 인도 전체를 식민지로 집어삼킨 영국이 아프가니스탄까지 노리고 침공해서 보호국으로 만든 다음에 아프가니스탄 영토 일부를 뚝 잘라 인도령으로 삥 뜯었고, 이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듀랜드 라인 참조.


5.1. 조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프가니스탄/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 민족인 스키타이인, 알렉산드로스 3세를 따라 중앙아시아에 들어온 그리스인, 그리스인들이 세운 박트리아를 무너트린 토하라인 쿠샨족,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이란계 에프탈의 후손이라고 한다. 19세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누리스탄인들은 근대까지도 파슈툰인들을 압달(에프탈)이라고 칭했다 한다.

파슈툰인이 살고있던 아프간은 동서남북의 교역로가 만나는 ‘문명의 교차로’여서 일찌감치 번성한 문화 유산의 보고이기도 하다. 의외로 이슬람 유적 뿐만아니라 아이 하눔의 헬레니즘 유적, 불교 유적같은 다양한 유적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고대 스키타이인 및 토하라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영향으로 녹안 혹은 벽안을 보유한 경우도 있다. 중국에서 인도로 불경을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로 건너간 현장 등 불교 승려들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5~6세기 무렵에는 중앙아시아 상당수 지역에서 적발에 벽안, 녹안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arbat_Gula.jpg

파일:external/4.bp.blogspot.com/Afghan+Girl_old_2002.jpg


1984년에 미국인 사진가인 스티브 매커리(Steve McCurry)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찍은 녹안의 파슈툰 소녀 사진. 사진에 나온 여성은 샤르바트 굴라(شربت ګله, Sharbat Gula)[3]로 1972년생이다. 해당 사진이 국제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이후,# 많은 사진 작가들이 아프가니스탄 및 타지키스탄 각지에서 녹안 혹은 벽안을 지닌 소녀들을 찾아 사진을 찍었지만,[4] 이 사진만한 임팩트를 준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파일:Pathani Chai wala Model.png

2016년에는 길거리에서 마살라 짜이를 팔던 파슈툰인 청년 한 명이 선명한 푸른 눈과 세련된 이목구비로 인도와 파키스탄 각지에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었다.# 다만 파슈툰인 대부분은 엄격한 이슬람 문화를 따르는 경우가 많아 수염을 기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처럼 짧은 수염은 대도시에서 세속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하는 편이다.


5.2. 문화[편집]


용맹하고 터프하며 소박하면서 외부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이다.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를 고수하고 있다.


5.2.1. 명예[편집]


낭그(ننګ / nang)라 불리는 일반적인 명예 뿐만 아니라, 여성의 명예인 나무스(ناموس / nāmús) 또한 중시한다. 만약 외부인이 아프간에 들어와 아프간 여성을 건드리거나 성관계를 맺으면, 나무스가 손상당했다고 여겨서 극도로 분노한다.

아프간과 영국이 3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이게 된 동기도 영국군이 아프간 여성을 가정부로 고용하고 그녀들과 성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고 파슈툰인 남성들이 분개했기 때문이다.


5.2.2. 용맹성[편집]


투라(توره / túra, '검·용맹성')와 마라나(مړانه / maṛā́na, '남성성·기사도')에 근거해 전투민족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파슈툰인의 영토를 침투하던 대국들을 격파한 걸로 유명하다. 수백 년 동안 러시아에 맞서 항전했던 캅카스체첸인과 비교되기도 한다. 두 민족의 공통점은 러시아,인도등 지역의 대국이 다른 지역과 교역을 주고받을 길목에 자리잡고 있으며, 힌두쿠시 산맥캅카스 산맥이라는 두 높은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수시로 강대국의 외침에 시달렸지만 산악지형을 무기로 항전하는 게릴라 전술에 능통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북캅카스의 평야지대와 힌두쿠시 고산지에서 잘자라는 양귀비 덕에 산속에서 사냥외에도 먹을 거리가 있어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었고, 이를 이유로 대국들 사이에서 용병으로 자주 팔려가던 민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종종 영국, 소련, 미국군이 철수한 사례만 놓고 강대국들이 손익계산에 맞추어서 떠난 것에 가깝다고 폄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술한 전쟁들은 점령군의 기술과 화력이 아프간 현지인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했던 경우였다. 점령군의 기술과 화력이 비등비등했던 경우에는 사파비 제국이 호타키 왕조에게 망한 사례, 몽골군이 북인도의 아프간계 델리 술탄국 왕조들에게 패전했던 사례들처럼 괴력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5.2.2.1. vs. 몽골 제국: 무승부[편집]

몽골 제국 침략군이 호라즘 제국을 정복하면서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서부 각지의 주요 거점 도시들을 쓸어버리는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로 침공하던 몽골군은 아프간계 할지 왕조의 공격에 막혀 패배하였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이 다시 인도를 침략하나 번번히 아프간계 왕조들에게 패전하였다.


5.2.2.2. vs. 사파비 왕조: 승[편집]

1722년 9월 불과 2만의 군사로 페르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대국인 사파비 왕조를 침략해 훨씬 많은 수의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멸망시켰을 정도다. 다만 당시 사파비 왕조는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고, 아프간 군대는 페르시아 전 국토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수도인 이스파한을 박살내고 왕위를 칭한 수준이었다(호타키 왕조).


5.2.2.3. vs. 아프샤르 왕조: 패[편집]

몇년 지나지 않아 아프간 세력은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샤한샤 나디르 샤에게 탈탈 털리고 망했다.


5.2.2.4. vs. 마라타 동맹: 승[편집]

나디르 샤의 사망 이후 아흐마드 샤 두라니두라니 왕조로 독립한 파슈툰인은 무굴 제국 이후 인도 아대륙의 강자가 된 마라타 연합을 상대로 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내부 사정이 겹쳐[5] 인도를 접수하지 못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5.2.2.5. vs. 시크 왕국: 패[편집]

영국이 구르카 다음으로 높게 평가했던 전투민족이 바로 펀자브인 시크교도들이다.

두라니 왕조 군대가 펀자브는 물론 카슈미르 일대까지 정복하였으나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프간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점령지를 다지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이 다시 들고 일어나 퇴각하는 파슈툰인들을 격퇴하였다. 일부 파슈툰인들이 카슈미르 지역에 정착하였으나 이들 역시 란지트 싱 휘하의 시크 왕국 군대에게 패배하면서 시크 왕국은 카슈미르 일대까지 장악하였다.


5.2.2.6. vs. 영국: 승[편집]

19세기 들어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침공을 받았지만 물리쳤다. 그레이트 게임 와중 러시아가 아니라 일개 원주민에게 털린 것은 작지 않은 상처였다.

영국군은 미얀마나 스리랑카에서도 고전했지만 끝끝내 식민지 현지인 부대를 활용하여 승리한 것과 다르게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1차 침공에서 패배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예 아프가니스탄과 전면전을 포기했다.

즉 영국은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아프간에서 그나마 발 하나 담궜다 뺀 수준으로 곱게 물러난 쪽이다. 그리고 영국이 남긴 듀랜드 라인은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집어넣은 소련과 미국을 골탕먹이는데….[6]


5.2.2.7. vs. 소련: 승[편집]

20세기에는 소련의 침공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파슈툰인들만 소련군에 맞서 싸운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무자헤딘들이 소련군에게 압도적인 교환비로 밀리는 동안 소련군과 제대로 싸운 것은 타지크인 출신 아흐마드 샤 마수드이다.#


5.2.2.8. vs. 미국: 승[편집]

파슈툰족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를 차지하는 탈레반 광신도들 입장에서 보면 승리이긴 한데,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 결과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의 상태를 보면 이걸 승리라고 말하기 미안해진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탈레반에게 패전했다기보다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무능과 부패 앞에 패배했다고 보는 게 맞다. 물론 이게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취급을 받는 이유가 남베트남 때문이다. 베트남전은 아직도 승/패 문제로 싸움 나기 때문. 그리고 파슈툰이라고 모두 탈레반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탈레반에 맞서는 이들이 훨씬 많다.


6. 그 외[편집]


영화 '론 서바이버'로 유명한 레드 윙스 작전 당시 마커스 러트웰을 도와준 마을의 촌장 무하마드 굴랍과 사브레이 마을 사람들이 바로 파슈툰인이다.

대다수의 파슈툰인이 탈레반을 옹호하거나 지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절대 다수의 파슈툰인들은 오히려 탈레반을 싫어하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소련이 철군하고 난 후의 무자헤딘 군벌들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기에 탈레반을 지지했지 탈레반의 이슬람 극단주의를 바탕으로 한 폭압적인 전제정권을 겪고 난 이후에는 탈레반에 대해 부정적이고 오히려 싫어한다.[7][8]

개발도상국 여성 인권 운동 분야에서 유명한 파슈툰인이라면, 단연 파키스탄 출신의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꼽을 수 있다.

나무스에 대한 강요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성문화가 결혼외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되자 삐뚤어진 일탈적 형태로 남성들 사이에서 소년 대상 성착취, 소아성애, 성매매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자세한건 바차 바지(Bacha Bazi) 사항 참조.


7. 관련 문서[편집]



[1] 걸자이(غلزی)라고도 하며 튀르크계 민족인 할라지인이 기원이다.[2] 이후 중앙아시아 내 금발, 적발 및 벽안 및 녹안 인구는 몽골 제국의 대학살에 의해 중앙아시아 인구 구성이 상당부분 바뀌면서 소수만 남았고 그 이후로는 외부의 침입이 어려웠던 산간 벽지 주민들 중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3] 12살 때 찍은 사진으로 17년 동안이나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았는데, 사진작가 매커리가 2002년 현장을 다시 찾아가서야 굴라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파키스탄 페샤와르에 살다가 불법 신분증 소지 혐의로 파키스탄 당국에 체포됐고 결국 추방된 적 있었다. 탈레반 재집권 이후 이탈리아에 정착했다.# [4] # #2 #3[5] 군대에 급료를 제대로 주지못하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진압해야 했기에 인도를 점령할 수가 없었다.[6] 듀랜드 라인이 파슈툰 거주지를 반으로 자른 상황이 되다보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파슈툰인 게릴라들이 듀랜드 라인으로 도망갔다 다시 쳐들어갔다가를 반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7] 그러나 탈레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북부동맹 소속의 타지크인, 우즈벡인, 하자라인들은 북부 지역의 파슈툰인들을 잠재적 탈레반으로 간주하고, 보복으로 폭행, 살인, 약탈, 강간을 저지르기도 했다.[8] 그중 당한 게 많은 하자라인들이 파슈툰인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보복을 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2002년 발흐에 위치한 "바르가-에 아프가니(Bargah-e Afghani)" 마을에 하자라인 무장강도들이 나타나 돈을 요구하면서 파슈툰 남성 37명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구타 후 살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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