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질린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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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ul Zielinski.jpg

이름
파울 질린스키[1]
(Paul Zielinski)
생년월일
1911년 11월 20일
사망년월일
1966년 2월 20일
국적
파일:독일 국기.png 독일
출신지
뒤스부르크
포지션
레프트 하프백
신체조건
172cm / 74kg
등번호
-[2]
소속팀
SV 유니온 함본 (1930-1939)
LSV 마르커슈도르프 (1939-1945)
라피드 카셀 (1945-1946)
SV 유니온 함본 (1946-1948)
국가대표
15경기 / 0골 (1934-1936)
감독
SV 유니온 함본 (1946-1948)
1. FC 보홀트 (1960-1962)



1. 생애[3]
1.1. 선수 생활
1.2. 감독 생활
2. 수상
2.1. 클럽
2.2. 국가대표


1. 생애[4][편집]



1.1. 선수 생활[편집]



1.1.1. 클럽[편집]


질린스키는 SV 유니온 함본 유스팀에서 축구선수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함본은 독일 대표팀에까지 선발되는 질린스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더라인 지방을 대표하는 강팀은 되지 못했고, 가울리가[5] 니더라인과 베치르크스리가를 오르락내리락했다.

1939년 질린스키는 함본을 떠났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베를린 소재의 공군 부대에서 복무하면서 남부 오스트리아의 LSV 마르커슈도르프[6]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전후에는 잠시 라피드 카셀이라는 아마추어 팀에서 뛰다가 친정팀 함본에서 1948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1.1.2. 국가대표[편집]


함본이 비록 군소클럽이었지만 질린스키의 활약을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대표팀 감독 오토 네어츠였다. 함본은 질린스키의 활약을 바탕으로 1934년 가울리가 니더라인에 올라갔는데 이 때에 네어츠가 질린스키를 눈독에 들였다. 질린스키는 포르투나 뒤셀도르프, 더비 카운티와의 연습 경기 이후 바로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질린스키는 A매치 경험이 전혀 없는 신예였지만 레프트 하프백으로 4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독일을 3위로 이끌었다.[7]

그 이후 질린스키는 올림픽을 대비하는 연습 경기에는 참가했지만 최종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 당시 소속팀 함본이 베치르크스리가로 강등되었기 때문이었다. 질린스키의 15번째이자 마지막 A매치는 9월 룩셈부르크와의 시합이었고 대표팀에서 질린스키의 자리는 알빈 키칭어로 대체되었다.

질린스키는 국가대표팀 외에도 니더라인 주 대표로 시합에 참가하기도 했다.


1.2. 감독 생활[편집]


선수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감독, 그 이후에는 스포츠 인스트럭터 일을 하였다.


2. 수상[편집]



2.1. 클럽[편집]


  • 가울리가 니더도나우 우승 2회: 1941-42, 1942-43(LSV 마르커슈도르프)


2.2. 국가대표[편집]



[1]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질린스키는 폴란드에서 8번째로 흔한 성이라고 한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 리그. 여기에서 우승하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할 수 있었다.[6] 현재의 독일 괴를리츠 지방의 마르커슈도르프와는 다른 곳이다.[7] 당시 질린스키를 제외하고 독일 대표팀에서 4경기에 모두 출전한 선수는 주장 슈체판, 공격수들인 코넨, 레너, 시플링. 이렇게 4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