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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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레타의 역임 직책


파리 생제르맹 FC 주장

호세칼 피에르팡팡
(2004~2005)

파울레타
(2005~2008)


클로드 마켈렐레
(2008~2011)


파울레타의 수상 이력




포르투갈의 前 축구선수


파일:파울레타.jpg

이름
파울레타
Pauleta
본명
페드루 미겔 카헤이루 헤젠드스
Pedro Miguel Carreiro Resendes
출생
1973년 4월 28일 (50세)
포르투갈 아소르스 제도 상미겔섬 폰타델가다
국적
[[포르투갈|

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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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유스
CD 산타 클라라 (1988~1989)
FC 포르투 (1989~1990)
선수
CD 산타 클라라 (1990~1992)
오페라리오 (1992~1994)
앙그란세 (1994)
CU 미카엘렌세 (1995)
GD 이스토릴 프라이아 (1995~1996)
UD 살라망카 (1996~1998)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1998~2000)
FC 지롱댕 드 보르도 (2000~2003)
파리 생제르맹 FC (2003~2008)

국가대표
88경기 47골[1] (포르투갈 / 1997~2006)




1. 개요[편집]


포르투갈의 前 축구선수로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누누 고메스 등과 더불어 포르투갈 축구의 황금 세대를 이끈 주역이다.


2. 클럽 경력[편집]



2.1. 초창기[편집]


그는 선수 시절 초기에 포르투갈 2부 리그 팀 이스토릴에서 2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활약을 하던 중 스페인의 2부 리그 팀이였던 UD 살라망카로 이적하였다. 그는 살라망카에서 다시 한 번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다.

그는 1부 리그에서도 예상외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타 클럽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다.


2.2.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편집]


2부 리그에서뿐 아니라 1부 리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그는 당시 잘 나가던 라리가의 데포르티보로 이적하였다.

그는 데포르티보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팀의 공격의 한 축을 담당했고 1999년 팀 역사상 최초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하지만 이후 로이 마카이가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디에고 트리스탄이 영입되자 그는 이적을 결심한다.


2.3. FC 지롱댕 드 보르도[편집]


그는 2000년 보르도로 이적하였고 데뷔시즌에서 첫 경기 해트트릭을 비롯, 20골을 터트리는 활약으로 화려하게 시작하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 2001/02 시즌 보르도를 이끌고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선보이며 팀의 공격을 주도했고, 그는 리그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팀의 쿠프 드 라 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프랑스 리그 최고의 선수로 자리잡았으며 2002/03 시즌에는 리그 득점 2위를 차지하고 팀을 4위에 올려놓았다.


2.4. 파리 생제르맹 FC[편집]


그는 2003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였는데 전 시즌 추락하였던 파리 생제르맹을 이끌고 당시 프랑스 리그를 지배하던 1위 올랭피크 리옹과 승점 단 3점 차로 아쉽게 2위를 차지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쿠프 드 프랑스컵 우승을 이룬다.

그의 뛰어난 활약에 위협을 느끼기도 했던 리옹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오퍼하였지만 그는 팀에 잔류를 선언하며 파리에서 활약한다.

하지만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파리 생제르맹은 리그에서 추락을 거듭하였고 파울레타가 2005/2006, 2006/2007 시즌에 2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였음에도 순위는 곤두박질쳤다.

2007/08 시즌 그는 자신의 선수 마지막 시즌에서 강등권까지 떨어진 팀을 간신히 잔류시키고 쿠프 드 라 리그 결승에서 선제골을 기록하고 팀의 승리를 이끌며 우승컵을 안겨주고 은퇴를 선언한다.

여러모로 파울레타가 뛰었던 이때는 PSG 역사에서 암흑기라고 할수있을만한 시기였지만[2] 그런 와중에도 팬들에게 위안을 주던 마지막 자존심 같은 선수였다고 할수 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그는 1997년 포르투갈 대표팀으로 데뷔하였으며 UEFA 유로 2000때 팀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 당시엔 누누 고메스주앙 핀투가 주전 공격수여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3.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편집]


한국에선 월드컵이나 유로 본선에서의 미비한 활약과 적은 노출로 인하여 그냥 이름좀 날린 포르투갈의 희귀한 스트라이커로 알고 있지만 2002년 본선 직전까지만 해도 파울레타의 위상은 월드 클래스였다. 예선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을 상대로 홈에서 1골 1페널티 유도, 원정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침몰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2002년 당시에 한국이 상대한 모든 공격수들 중에 프란체스코 토티 정도를 제외하면 파울레타보다 명성이나 활약이 나은 선수는 없었다. 스페인의 라울 곤잘레스는 8강 한국 상대로 부상 때문에 나오지도 못했다.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딱히 주목받지 못하다가 본선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활약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 축구계에서 주목받은 케이스. 사실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도 폴란드전 해트트릭한국전 물수제비 헤딩슛 등 충분히 인상 깊은 활약을 보였으나 미국전에서의 부진 및 최종적으로 조별예선 탈락으로 인해, 또 한국의 상대편이었다는 이유로 저평가받은 부분이 있다.


3.2. UEFA 유로 2004[편집]


그는 유로 2004에서 주전으로 뛰면서 폭넓은 움직임울 보여주며 팀의 공격에 도움을 주긴 하였으나 결정적으로 득점을 올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팀은 선전 끝에 결승까지 올랐으나 아쉽게도 그리스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새로 등장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데쿠 등 신 골든 제너레이션과 파울레타,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등의 구 골든 제너레이션의 부조화로[3]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한 채 세간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거기다가 준우승으로 그치면서 내로라하는 스트라이커 치고는 해외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한 편이다.


3.3. 2006 FIFA 월드컵 독일[편집]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에도 예선에서 무려 11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앙골라전에서 피구의 어시스트를 받아 한골을 기록한게 전부이다. 이란전에서는 확실히 그 이름값을 해주지 못하고 묻혔으며[4] 네덜란드전에서는 나름 네덜란드 킬러로 활약했으나 에드빈 판데르사르슈퍼 세이브로 골을 기록하지는 못하고 마니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 하면서 그 몫을 다 했다.[5] 잉글랜드전과 프랑스전은 두 번다 60분 정도 출전했는데 두 경기 모두 치열한 중원 싸움에서 양측 공격수들이 모두 삭제가 됐었기 때문에 딱히 파울레타가 잘했다 못했다를 가리기 힘들다.

이후 그는 국가대표 은퇴할 시점 에우제비우A매치 41골을 6골차로 넘어서 포르투갈 A매치 역대 최다 득점자로 자리잡았고 이 기록은 호날두에게 깨지기 전까지 파울레타가 보유하고 있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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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원톱을 선호했던 공격수로 빠른 침투를 통한 위치선정이 뛰어나고 테크닉까지 갖춘[6] 기교파 스트라이커였다. 헤딩 능력을 장착한 양발잡이 스트라이커로, 한순간의 재빠른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진들을 붕괴시킨 뒤 깔끔하고 정확하게 차는 원샷 원칼의 감각적인 슈팅을 자랑했다.[7] 거기다 많은 활동량 또한 파울레타의 장점 중 하나였다. 30줄이 되어도 중위권 팀 PSG에서 100골 가량을 넣어주는 등 기복없이 두루두루 좋은 장점들을 보유하여 포르투갈 황금세대 초반기 동안 주축 스트라이커로 활약할 수 있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6. 여담[편집]


  • 포르투갈의 황금 세대 선수 중 1명으로 꼽히지만, 사실 그는 다른 포르투갈의 황금세대 선수인 루이스 피구누누 고메스, 후이 코스타 등과 달리 포르투갈이 세계 청소년 대회를 제패할 때 멤버가 아니였다.

  • 포르투갈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1명으로 꼽히는 선수이지만, 정작 그는 선수 시절 단 1번도 포르투갈 1부리그에서 뛴 적이 없다.

  • 해트트릭의 제왕이 한 때 별명.[8]

  • 커리어는 전체적으로 뛰어났지만 국가대표와 클럽 양쪽 다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어서 선수시절 내내 큰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언급한대로 국대에서는 예선에선 유럽 최정상급 스트라이커였지만 본선에선 그 많은 경기를 뛰었음에도 득점한 경기는 단 두 경기 뿐이었고 클럽에선 리게앙[9]과 파리 생제르망의 레전드급 활약을 보였지만 그가 활약하던 당시의 프랑스 리그의 클럽들은 리옹을 제외하면 챔피언스리그에서 조예선 통과 자체도 힘에 겨운 정도였고 더군다나 당시 파리는 2010년대 후반기처럼 돈지랄 따위는 꿈도 못꾸던 내세울 건 이름 뿐인 클럽이라 큰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10] 이런 모습 때문에 우리나라 국내에서 해외축구가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에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에우제비우 이후에는 포르투갈 국대 최전방 공격수는 다 수준 이하였다라는 인식이 나오기도 했었다.[11]

[1] 대표팀 역대 득점 2위. 1위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이며 호날두가 갱신전까진 파울레타가 1위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2] 구단 재정이 워낙 좋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때문에 2010년대 카타르 투자청(QIA)의 타켓이 되었을 것이다.[3]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 역시 호날두의 지나친 개인 플레이 때문에 기존에 원톱 시스템이 많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인터뷰 한 바있다. 유투브의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정말 호날두가 너무 했다 싶을 정도.[4] 멕시코전은 아예 미출전.[5] 전반전만 뛰었는데 이정도면 충분히 잘한 것이다.[6] 드리블 돌파가 뛰어나다거나 온더볼이 화려하다고 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앞을 가로막은 수비수 한명 정도는 제치거나 페인트모션으로 슈팅각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의 기술력은 갖춘 선수였다.[7] 키 자체(180cm)는 작지 않았으나 체격 자체는 크지않아 딱히 몸싸움이 강한 선수는 아니었다. 헤더 골들도 신체경합능력으로 수비수를 제압한 뒤 넣는 것이 아니라 빠른 침투와 위치선정으로 넣은 헤더였다.[8] 살라망카 시절 바르셀로나 원정 해트트릭도 기록 했다고도 하는데 유튜브 영상을 보면 2골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해외 기록 사이트를 봐도 2골로 나와있다. 어쨌든 해트 트릭을 많이 한 선수중 하나이다.[9] 당시엔 르 샹피오나[10] 물론 파리 생제르망은 올랭피크 마르세유, AS 모나코와 더불어 프랑스 리그 전통의 강호이자 명문 클럽이었다. 다만 파울레타가 활약한 시기에는 과거의 명성을 잃어가는 중이었고 신흥 강호 올림피크 리옹이 주니뉴, 벤제마 등을 앞세워 리게 앙에서 절대 강세를 보이던 중이었다. 그리고 한국 축구팬들이 본격적으로 프랑스 리그를 접한 이 시기가 프랑스 리그의 판도가 리옹 중심으로 돌아가던 때였다.[11] 그렇다고 정말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에우제비우 이후 포르투갈 출신 공격수들은 파울레타를 제외하면 딱히 이렇다할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황금 미드필더진을 자랑하는 나라라는 걸 생각하면 대표팀 수준의 공격수의 뎁스가 얇았다는건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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