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바티스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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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크 바티스통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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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축구감독


파일:Battiston_Profile.jpg

이름
파트리크 바티스통
Patrick Battiston

본명
파트리크 레이몽 쟝 바티스통
Patrick Raymond Jean Battiston
출생
1957년 3월 12일 (67세)
프랑스 그랑테스트레지옹 모젤 암네빌르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신체
182cm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1] / 은퇴)
축구 감독
축구경영인
소속
선수
딸렁쥬 (1966~1973 / 유스)
FC 메스 (1973~1980)
AS 생테티엔 (1980~1983)
지롱댕 드 보르도 (1983~1987)
AS 모나코 (1987~1989)
지롱댕 드 보르도 (1989~1991)
감독
지롱댕 드 보르도 (1998~2003 / 유스 감독)
지롱댕 드 보르도 B (2003~2017)
경영
지롱댕 드 보르도 (1991~1995 / 단장)
지롱댕 드 보르도 (1995~1996 / 수석 마케팅 담당)
지롱댕 드 보르도 (1996~1998 / 단장)
국가대표
56경기 3골 (프랑스 / 1977~1989)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3.1. 바티스통 충돌 사건
3.2. 대회 이후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여담



1. 개요[편집]



파일:Battiston_Bordeaux.jpg


프랑스의 前 축구선수이자 축구경영인 및 축구감독.

많은 축구팬들은 1982년 월드컵 서독과의 준결승전에서 하랄트 슈마허와의 아찔했던 충돌로 인한 피해자로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와 별개로 1980년대 리게 앙을 대표했던 수비수였으며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 알랑 로슈와 함께 지롱댕 드 보르도의 최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 한명이였다. 또한 높은 축구 지능과 공수 밸런스로 라이트백, 리베로 포지션에서 모두 발군의 활약을 보이며 옹즈 드 옹즈 2회에 선정되기도 했다.


2. 클럽 경력[편집]


하부리그 구단인 딸렁쥬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바티스통은 지역팀 FC 메스로 이적 후 7년간 활약했다. 이후 AS 생테티엔으로 팀을 옮겨 1981년 프랑스 디비시옹 1 우승을 이끌었고 지롱댕 드 보르도로 이적하여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리그 우승 3회, 쿠프 드 프랑스 2회 우승을 거머쥐며 팀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으로 활약했다.

1987-88시즌을 앞두고 AS 모나코로 둥지를 옮겨 우승청부사 답게 또 한번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두 시즌을 마치고 다시 보르도에 돌아온 바티스통은 3년간 활약 후 1991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977년 2월 23일, 서독과의 친선경기에서 처음으로 A매치 무대를 밟았다. 이후 간간히 대표팀에 소집되며 뢰 블레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78 FIFA 월드컵에 참가하며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으나 독재자의 협박[2]과 버프[3]를 받은 개최국 아르헨티나에게 1:2로 패한 2차전이 그의 유일한 출전경기였다. 팀은 대회내내 졸전을 거듭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1982 FIFA 월드컵 최종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본선에서 센터백 한자리를 놓고 제라르 장비옹과 로테이션으로 번갈아 출전했다. 팀은 준결승에 진출했고 상대는 자신의 A매치 데뷔전 상대였던 서독이였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자신에게 큰 사고가 닥쳐올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3.1. 바티스통 충돌 사건[편집]




슈마허와 바티스통의 충돌장면[주의] (1분 3초부터)


파일:Battiston_National_1.jpg


1:1로 맞서던 후반 5분, 바티스통은 장비옹 대신 교체 투입되며 그라운드를 밟는다. 그리고 15분뒤, 후반 20분 플라티니의 스루패스를 바티스통이 쇄도하면서 슈팅으로 연결했지만 골문을 빗나갔고 직후 앞으로 뛰쳐나온 하랄트 슈마허의 엉덩이에 안면을 크게 강타당한다. 이 가격에 의해 그는 턱뼈가 부서지고[4] 치아와 척수 손상까지 입은 의식 불명 상태로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선수 본인은 의식을 찾았다. 그러나 팀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슈마허의 선방에 무릎을 꿇으며 결승진출에 실패한다.

참고로 웃기는 사실은 충돌 장면에서 당시 심판이었던 찰스 코르버르(Charles Corver)는 오히려 바티스통의 파울이라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축구 역사상 최악의 오심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에서 심판이 제대로 판정했다면 슈마허에게 최소한 옐로 카드가 주어져야 했다. 이에 격앙된 프랑스인들은 그를 "세비야의 도살자(Butcher of Seville)"로 부르기도 했다. 그래도 나중에 슈마허는 바티스통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고 바티스통은 이를 받아들였다.[5] 사건 이후 바티스통과 슈마허가 참여한 공식 기자회견 영상

훗날 오심에 대해 바티스통은 슈마허를 이미 용서했고 지난 일이라며 서로간의 앙금은 없다고 했지만 심판의 판정 만큼은 아직도 화가 난다며 왜 자신에게 경고를 주었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3.2. 대회 이후[편집]


상처로 남았던 대회를 마친 뒤 바티스통은 마리우스 트레소르와 제라르 장비옹의 은퇴로 공백이 생긴 센터백 자리를 이어받았고 UEFA 유로 1984 무대에서 팀의 우승을 이끈다. 1986 FIFA 월드컵에서는 지난 대회와 달리 확고한 주전으로 나섰고 전 경기 모두 출전한다. 준결승전에서 다시 한번 서독을 만났지만 0:2로 패배하며 이번에도 발목을 잡히면서 2연승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3위 결정전에서 황금세대로 무장한 돌풍의 벨기에를 꺾고 유종의 미를 거두며 3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후 바티스통은 대표팀이 암흑기를 맞이하면서 UEFA 유로 19881990 FIFA 월드컵 본선에 참가하지 못함에 따라 1989년 4월 29일, 유고슬라비아와의 월드컵 예선전을 끝으로 자연스럽게 대표팀 은퇴 수순을 밟았다.


4. 지도자 경력[편집]


1990-91시즌을 마치고 현역 은퇴를 한 바티스통은 지롱댕 보르도의 단장직에 재임하며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수석 마케팅 담당자를 거쳐 1998년부터는 직접 현장에서 선수들을 가르치는 감독으로 부임했고 유소년팀과 리저브팀에서 15년간 후배들을 양성하다가 2017년 현장에서 물러났다.

당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대표적인 선수가 마루앙 샤막, 리오 마부바 그리고 마르크 플라뉘였다.[6]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6. 여담[편집]


  • 아버지 레이몽 바티스통[7]도 1945년부터 1954년까지 메츠에서 활약한 축구 선수였다.
  • 그의 할아버지가 베네치아에서 건너온 이탈리아인이다. 고로 바티스통은 이탈리아계 프랑스인이다.

[1] 라이트백, 스위퍼[2] 우승을 하지 못할 경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르헨티나 월드컵 조직위원회에게 우승 못하면 총살이라는 공갈협박 지상명령을 내렸다.[3] 우승을 위해 비델라가 직접 조직위원회에게 대진표를 조작하라고 지시했다.[주의] 보는 사람에 따라 놀랄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4] 바티스통처럼 턱뼈가 골절되면, 뇌진탕 부상을 당할 위험이 굉장히 크다. 복싱선수들이 턱을 보호하는 훈련을 하는 이유이다.[5] 슈마허의 자서전에서 그는 이 일이 있고 바로 바티스통의 상태를 체크하고 싶었지만 프랑스 선수들이 위협을 가해서 그러지 못했다고 서술했다.[6] 훗날 샤막과 플라뉘는 10년만에 구단의 리그 우승을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한다.[7] 192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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