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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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설계 구조와 형태
3.1. 앉아 젓는 노 구조라는 학설
4. 편제
5. 크기와 전투력
5.1. 평저선 구조
5.2. 탑재한 화포
5.3. 판옥선의 함대 구성
5.4. 일본 수군의 함선과의 비교
5.4.1. 일본 수군의 탑재 발사 무기
6. 단점
7. 대중문화
8. 모형·완구·피규어
8.1. 3D 퍼즐 뜯어 만드는 세상
8.2. 옥스포드
8.3. 영공방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판옥선()은 조선 시대의 군함으로, 조선 수군의 주력함이었다. 당시에는 전선(戰船),[1] 판옥전선(板屋戰船)이라고도 불리었다. 총통신기전화약 무기를 이용한 원거리 함포전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 직후 기존 전선인 맹선과선의 한계가 지적되었고, 이에 새로운 전선 개발의 필요성을 느껴 고려시대 주력 함선인 누전선을 개조하여 건조하였다. 최초 설계자는 당시 정극인의 5세손이자 전라남도 진도군 남도포 만호였던 정걸(丁傑, 1516-1597)[2]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사후에는 나대용 등이 전선 연구를 계승하였다.

판옥선의 '판옥'이란 널빤지(판, 板) 위에 올린 망루(옥, 屋)나 장대를 의미한다. 즉 기존의 함선에 판(Plate)으로 한층 더 쌓고, 무관(武官)들의 지휘 및 전투용의 망루(Roof, Watchtower)를 올린 배라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군함의 지휘관이 서 있는 누각이 바로 판옥이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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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해진도에 그려진 판옥선. 거대한 기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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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poemlane.com/chung31.jpg
후기의 해진도에 그려진 판옥선들.[3]
1406년(태종 8년)까지 조선 수군 군함은 크기에 따라 대선, 중선으로만 불렸다. 세종 시기에도 가장 큰 대선은 소수에 불과해 당시 조선 수군 군함 대다수는 병선이라 불리는 중간 크기 배로 이루어 졌다. 1465년(세조 11년)에 전투와 조운을 겸할 수 있는 다목적 군함 개발이 추진되어 맹선이 건조되었다. 맹선은 정해진 규격에 따라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으로 나누어 각각 80명, 60명, 30명이 승선 가능한 군함이었다. 그런데 삼포왜란, 사량왜변,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더이상 맹선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맹선은 수심이 낮고 거친 서해안에서 조운선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전체적으로 튼튼한 구조의 평저선이었다. 속도가 느려서 잽싸게 움직이는 왜선은 추적하기 힘들었지만, 각종 총통들을 탑재했으며 덩치도 큰 편이었다. 그런데 16세기부터 왜구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초보적인 화약무기와 누각을 탑재하면서 대형 맹선으로도 부족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결국 새로운 전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이때 소함주의자와 대함주의자간의 토론이 이어졌고, 결국 대함주의자들의 의견대로 판옥선이 탄생했다. 이후 다른 함선들은 보조용으로 돌려지고, 판옥선이 직접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판옥선은 '본격적인 군함'이었다. 비슷한 시기 한중일 3국 중 중일은 말이 전선이지 전쟁이 나면 민간 선박을 징발해 그대로 쓰거나, 개조를 좀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판옥선은 전술했듯 기본사양이 있을 정도로 오로지 전투를 위해 설계되고 건조된 함선으로, 아예 포격을 상정한 함선이기도 했다. 하술하겠지만 때문에 지속항해 능력이나 수송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연안 방어만을 상정한 함선이어서 배에서 먹고자며 며칠씩 돌아다닐 보급품을 실을 자리가 넉넉하지 못했다.[4][5]


3. 설계 구조와 형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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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각선도본에 그려진 판옥선.
맹선과 마찬가지로 판옥선도 배밑이 평평한 평저선이었다. 조선 초기 기준으로 판옥선중에서 가장 큰 상선(上船)은 크기가 19.7~21.2m, 일반적인 판옥선은 크기가 15.2~16.6m였다. 길이는 임진왜란~17세기 기준으로 대선은 본판(배밑)이 22.4m~23.17m, 상부는 26.13m~27.03m였으며, 차선은 배밑이 17.60m~20.68m, 상부는 20.53m~24.12m였다. 가장 작은 차차선은 배밑이 15.20m~20.2m, 상부는 17.73m~23m정도 되었다. 조선 후기 기준으로는 상선은 배밑이 27.7m, 상부는 32.8m였으며 일반 판옥선은 배밑 20.8m, 상부는 23.4m였다. 배수량은 불확실하나 최소 80톤~최대 280톤 내외로 추정된다.

구조를 보면 일단 네모진 통나무 15개를 이어 붙여 배밑을 만들고, 양현에 판재 7쪽 하나하나에 서양의 클링커 이음과 유사하게 턱을 따서 이를 짜맞춘 뒤 나무못을 박아 고정시켜 뱃전을 형성했다. 이물비우는 직판[6] 널빤지로 15쪽을 이어 붙이고 고물비우와 양현을 붙인 다음, 뱃전 위에 멍에를 걸고 그 위에 귀틀을 짜고 겻집을 깔아 1층 갑판을 만들었다. 노는 양쪽 뱃전에 있는 멍에 뺄목에 각각 9척씩 걸었다.

여기에 멍에 뺄목 위에 신방도리를 걸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 상장 위에 이물과 양쪽 뱃전을 따라가면서 여장이 상장의 언방 위에 뱃집 멍에를 걸고 널빤지를 깔아 2층 갑판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일종의 지휘소인 장대와 이물돛대, 고물돛대가 있다. 이물돛대와 고물돛대는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게 장치가 되어 있었다. 고물꼬리에는 널판을 깔지 않고, 난간이 없이 비어 있다. 여기에 선미옥란을 설치해 대소변을 보거나 뭍에 오르내리게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방해받지 않은 채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지난 겨울에 별군직(別軍職) 윤필은(尹弼殷)이 상소하여 전선(戰船)의 제도를 바친 것으로 인하여 신이 왕명을 받들고 이삼(李森)과 더불어 전선거북선(龜船)을 개조하였는데, 전선의 2층 위에 장식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만나면 제어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위층의 방패(防牌)를 별도로 제도를 만들어서 때에 따라 눕혔다 세웠다가 하고, 선두(船頭)에는 곡목(曲木)을 덧붙여서 그 모양이 마치 오리의 목과 같으나 조금 뽀족하여 비록 풍랑을 따라서 나가더라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주 빠르며, 혹시 암석에 부딪히더라도 곡목이 먼저 파손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합니다."

-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1월 20일 신묘 1번째기사 형조 판서 장붕익이 전선과 거북선 개조에 대한 것을 아뢰다


"신이 전선(戰船)귀선(龜船)의 제도를 상세히 보았더니, 전선은 매양 개조(改造)할 때마다 그 몸뚱이가 점차 길어져 결코 운용(運用)하기가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는 당초 체제(體制)는 몽충(艨衝)[7]

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신이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기록한 바를 보았더니, 귀선의 좌우에 각각 여섯 개의 총(銃)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해 지나치게 커진 것을 또한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2월 21일 기축 4번째기사 호남 균세사 이후가 호남 해도의 상황을, 영남 균세사 박문수가 전선의 일을 아뢰다

다만 판옥선도 거북선과 똑같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여러 형태와 구조로 다양하게 개조되고 더 대형화 되었으므로 한가지 형태나 구조로만 고정되어 이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3.1. 앉아 젓는 노 구조라는 학설[편집]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2021년 11월 발표한 '판옥선 학술 복원 보고서'에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파일:판옥선 노 구조.png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보고서에 실린 도판
좌측은 기존 학설, 우측은 새로운 학설.
기존에는 대부분의 한선들처럼 당연히 판옥선, 그리고 판옥선의 개조형인 거북선의 노는 노 하나에 노꾼 여럿이 붙어 선 자세로 8자를 그리며 뒤로 젓는 노를 사용했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이런 노 젓는 모습은 영화 명량에서 잘 재현되었다. 그러니 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판옥선의 노는 서양 갤리선의 노처럼 노꾼들이 앉은 자세로 옆으로 뻗어나온 노를 앞뒤로 왕복하며 저었을 것이라는 새로운 학설이 나온 것. 앉은 자세에서 옆으로 젓는 노는 서양식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한선에서도 전혀 없던 것은 아니라고 하며, 옆으로 젓는 노의 경우 지구력은 서서 젓는 노보다 떨어지지만 순간 가속력이 좋아 기록에 나온 판옥선의 가속력을 설명하려면 옆으로 젓는 노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학계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내용이다.[8] 특히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가 '한국의 배'라는 책에서 최초로 주장한 학설과도 같은데,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언더우드의 연구 결과를 서양인이라 한선을 잘 몰라서 그런다고 폄하했지만 언더우드는 고종 때 실물 판옥선, 거북선을 본 사람이다.[9]

4. 편제[편집]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기 때문에 각 영(營)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 선조실록 206권, 선조 39년 12월 24일 무오 3번째기사 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가운데 창선을 건조하여 쓸 만한지를 시험하게 하다


"수군의 제도는 《대전(大典)》을 상고하여 보니, 대맹선(大猛船) 1척에 수군 80명, 중맹선에는 60명, 소맹선에는 30명이라 하였는데, 대맹선은 지금의 전선(戰船)이요, 중맹선은 지금의 귀선(龜船)이고, 소맹선의 지금의 방패선(防牌船)이니, 병선(兵船)의 종류입니다. 그런데, 선제(船制)가 차츰 커져서 큰 것은 좌우 노로(櫓櫨)[10]

사이가 혹은 24간에 이르고 노 젓는 군사가 1백 20명이 필요하니, 고제(古制)의 80명의 노군(櫓軍)으로는 결코 운용할 수가 없고 귀선과 방패선의 노군 역시 그 수로 기준을 삼기가 어려운데, 토졸(土卒)로서 구차하게 수를 채워 실제로 허술하게 되었으니, 한번 변통하는 것은 사세상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중략..)

각 선군(船軍)의 제정(制定)한 액수에는 전선(戰船) 1척에 선직(船直)·무상(舞上)·타공(舵工)·요수(繚手)·정수(碇手)·사수(射手)·화포장(火炮匠)·포수(砲手)·포도장(捕盜將)·노군(櫓軍)이 도합 1백 64인이요, 귀선(龜船)은 1백 48인이며, 정탐선(偵探船)은 79인이요, 병선(兵船)이 17인이며, 사후선(司候船)은 5인입니다. 각영과 진의 방군(防軍)에서 군포(軍布)를 마련한 수효에는 통영(統營) 8전선(戰船)의 원방군(元防軍)은 방군을 세우지 않고 사부(射夫)와 첨사부(添射夫)가 모두 7천 6백 36인으로 매인당 면포(綿布) 2필씩을 받는데 풍고(風高)와 풍화(風和)의 각 6개월에 대한 급대(給代)의 수량 및 각선(各船)의 육물가(陸物價)와 우후(虞候)에 속한 급대(給代)와 삭포(朔布)의 수량을 공제하면 여포(餘布)가 6천 5백필 남짓합니다. 좌수영·부산(釜山) 등의 진과 전라(全羅) 좌·우수영 및 방답(防踏) 등 진의 여포도 이에 준하여 다과(多寡)는 다르나 각기 정수(定數)가 있습니다. 각선의 육물가(陸物價)를 또한 마련하였고, 전선·병선·사후선·정탐선·귀선(龜船) 1척에 대해 1년에 드는 물건과 초둔(草芚) 진석(眞席) 같은 종류에까지도 모두 차등을 두어 값이 메겨져 있고, 심지어는 사후선(司候船)에 쓰는 표주박 2개의 값까지도 면포 3척 6촌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 숙종실록 40권, 숙종 30년 12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이정청에서 오군문의 군제를 고치고 수군을 변통하는 절목을 올리다

승선인원은 시대와 크기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에는 50여명이 탑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선조실록 1606년 12월 24일 기록에는 "거북선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의 숫자가 판옥선의 125명보다 많아 활을 쏘기에 불편합니다"라고 되어 있다.

보통 선장 1명, 신호용 깃발로 신호를 다루는 기패관 2명, 선박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훈도 1명, 선박 창고를 관리하는 선직 2명, 항해 요원으로 추정되는 무상 2명, 키를 잡는 타공 2명, 돛줄을 조정하는 요수 2명, 닻을 다루는 정수 2명, 군졸들의 군기와 질서를 바로잡는 포도장 2명, 활을 쏘는 사부 18~22명, 화약과 탄 장전을 맡은 화포장 10~14명, 화포를 맡는 포수 24~26명, 노를 젓는 격군 100~120명이 승선했으며 조선 후기에 배가 커지면서 약 200명이 탑승한 경우도 있었다.


5. 크기와 전투력[편집]


현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물건으로 크기를 비교하면 지하철 전동차 2칸을 가로로 붙여놓은 것이나 참수리급 고속정보다 길이가 조금 짧은 정도의 크기다.

유럽의 전열함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선박들과 비교하며 혹평을 하는 일부 사람들도 있지만 판옥선은 갤리선갤리온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인 1500년대 초부터 활동했던 군함이고 전열함은 167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한 군함으로 둘 사이에는 150년이 넘는 시간 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쨌든 1670년대까지도 조선의 주력 군함은 여전히 판옥선이었으므로 완전히 부당한 비교라고는 할 수 없다. 전열함의 전신이나 마찬가지인 3층갑판을 갖춘 대형 갤리온들도 이미 16세기 말에 출현하고 있었다.[11][12][13]

하지만 전열함이 판옥선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시 보다 정확한 비교 대상은 일본과 중국의 함선들이다. 병기는 필요에 따라 개발되는데 주변국인 중국과 일본이 소극적인 해상 정책을 펴는 통에 조선도 대형 함선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 한반도의 해안은 생산력이 빈약한 동해안을 제외하면 서·남해안이 모두 넓은 갯벌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런 지형에서 대형 첨저선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대규모의 준설과 매립을 통한 항만시설 건설이 필요하니 평저선 운용에 비해 재원이 몇곱절로 든다. 서해안의 주요 항만들이 괜히 하나같이 강 하구에 모여있는 게 아니다.[14] 결과적으로 조선 수군의 작전반경은 연안, 아무리 멀어봐야 대마도 정도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고, 판옥선 역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한 연안 전용의 전투용 함선이 되었다. 따라서 동시기 서양의 갤리온같은 배보다 항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15] 갤리온보다 화력이 떨어지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그 이상의 예산을 투자해서 필요 이상의 화력을 얻어봤자 조선에선 쓸 일이 없었다. 유럽처럼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인접국과 적대국이 많아서 해적질을 통한 약탈 경제를 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1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나 일본의 함선보다 명백하게 더 컸다는 것을 보면 당대 동북아 3국의 함선 중에서는 제일 강했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더 크게 만들 필요성이 없다보니 19세기까지 큰 변화 없이 운용한 게 문제라면 문제라 그렇지. 결국 본격적인 서양식 함선과 조우하자 그간 드러날 일이 없었던 약세가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18][19]

다만 조선은 당시 여건상 해상 무역이 활발하지 않았고 지키거나 침략할 해외 영토도 없었다. 조선 수군의 목적은 오로지 방어였는데, 방어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갖춘 상황에서 굳이 예산을 더 넣을 이유가 없었다. 유럽은 해군력에 투자한 만큼 해적질을 해서 충당하는 약탈경제를 굴릴 수 있었지만[20] 조선은 해군력에 투자해 봐야 예산만 잡아먹는, 딱 그뿐이었던 것이다.

평저선은 대양에서는 풍랑에 취약하지만, 선회력이 매우 뛰어나다. 선회력이 좋다는 것은 배의 방향 전환에 필요한 회전 반경이 짧다는 것으로 암초가 많아서 좁고 물살이 거친 남서해안을 오다니기에 유리했다.

또한, 전통적인 한선답게 내구력에 모든 설계를 집중했다. 재현품들도 잘 보면 살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국가 함선과 비교했을 때, 구조적으로는 판옥선이 훨씬 튼튼한 경우가 많다. 쓰임새를 연안에서의 화포를 이용한 해전에만 한정해서 항해 목적보다는 전투를 위한 모든 기술을 때려박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항해기능 등 다른 기능을 생각한 목재선박이라면, 비슷한 체급일 때 판옥선보다 튼튼하기가 힘들다. 즉, 함포전시 교전능력과 튼튼함을 제외하면 항해성능은 매우 떨어졌고 오로지 수비 목적의 전투만을 위한 배로 만들어졌다.

또한 조선의 면포 생산력에 힘입어 치밀한 돛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본이 가지지 못한 산업 우위였다. 아직 면포가 대중화되지 못했던 일본은 빈약한 돛 탓에 대형선을 운용할 수 없었다. 일본이 면포 짜는 기술이 정교해진 것은 명치유신 이후이며, 그 뒤에는 일본산 면포를 '광목'이라는 이름으로 수입했다.


5.1. 평저선 구조[편집]


파일:평저선 첨저선.jpg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왜군의 전함에 비해 강력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큰 이유는 판옥선이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반면 왜군의 함대는 대부분 바닥이 V자인 첨저선이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평저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 안정성이 뛰어나 파도에 강하고 선회력이 좋았다. 심지어는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했다. 반면 첨저선은 회전하기 위한 반경이 커서 한참을 돌아야만 회전이 가능했다.

그래서 왜군은 파도나 물살이 강한 곳에서 무리한 선회를 하다가 침몰하는 경우가 많았다.[21] 이순신 장군이 물살이 빠른 곳을 주로 활용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이런 평저선의 선회력을 이용하면, 한쪽에서는 발사를 다른 쪽에서는 장전을 하는 식으로 해서 상대방보다 훨씬 포를 빠르게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학익진과 같은 진형을 구축하는 것도 360도 제자리 회전이 가능한 판옥선이 아니라면 매우 어려운 전술이다.

해전, 특히 함포전에서는 사실상 전함의 선회력이 전투력에서 가장 큰 비중을 담당한다. 당시의 전함은 좌우 측면에 함포를 달고 있기에 함포 공격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함이 측면에 위치해야 한다. 즉, 아무리 함포를 많이 달고 있는 전함이라고 해도 적군이 측면이 아닌 앞이나 뒤에 위치한다면 대포는 그냥 꿰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치 못한다.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하여 곧바로 함포 공격을 할 수 있는 판옥선과 회전하기 위해 많은 공간이 필요한 왜선들과의 전투는 절대적으로 한쪽이 유리한 싸움이다.

또한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배 위에서 대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다. 반면 왜군의 전함들은 첨저선이라 흔들림이 심해 명중률이 형편없었으며 주로 삼나무를 사용해 만들어서 포탄의 반동에 함선이 손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판옥선에 대한 전투력을 알고자할 때 화포의 개수같은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평저선이라는 구조 자체에 있다. 임진왜란 때 괜히 이순신 장군이 백전백승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판옥선 12척으로(게다가 전투 초반에는 대장선 혼자서) 적선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뒀다는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전설이 가능한 이유도 이러한 전함 간 구조적 차이에 기인한다.

한편 이런 구조 차이가 일명 '명량 철쇄설' 떡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5.2. 탑재한 화포[편집]


영화 명량에서 천자총통을 방포(放砲, 발포)하는 이순신의 지휘선(gif).
[1] 판옥선이 조선 수군이 가진 군함의 기본이었기 때문에 그냥 '전선'이라 불렀다.[2] 임진왜란 때까지 현역으로 활동했으며 행주대첩 당시 충청수사로 조선군에게 화살을 보급하여 승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3] 태극북과 색기(色旗)와 천막들은 훈련 때에 덧붙인 장식으로 보인다. 상태가 좋은 기록화들을 보면 상당히 알록달록하다. 항상 소형선들이 함께 그려지는 것으로 일반적인 운용법을 알 수 있는데, 같이 그려지는 작은 배들은 방패선(防船)이라고 한다.[4] 임진왜란 때 벌어진 해전도 도서지역 및 연안을 끼고 싸웠으며, 외해(먼 바다)에서 싸운 전투는 거의 없다.[5] 이건 돛과 노를 동시에 운용하는 갤리선이라 격군의 숫자가 많아서 그렇다. 격군 빼고 돛만 사용하여 항해하면 얼마든지 장기간 항해도 가능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차피 평저선이라 멀리 나가지는 못 하겠지만...[6] 조선 후기에는 곡목으로 만들기도 했다.[7] 몽충(艨衝): 좁고 긴 병선(兵船).[8] 해양문화재연구소 연구 이전에도 거북선/구조 및 재질 항목에 나온 것처럼 재야 연구가들이 같은 이유로 거북선의 노를 옆으로 젓는 노로 복원한 사례가 있었다.[9] 다만 임진왜란으로부터 수백년 이후의 물건들이었기에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과는 다를 수도 있고, 그 기간 동안 전술의 변화가 생겨 노 젓는 방식이 바뀐 것일 수도 있다.[10] 노로(櫓櫨): 배의 노와 돛대.[11] 1588년 건조된 갤리온 '아크로열' [[https://en.m.wikipedia.org/wiki/HMS_Sovereign_of_the_Seas[12] 판옥선과 포문 수가 비슷한 것은 프리깃이지만 이미 유럽의 함포는 조선과 비교할 수준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에 비교할 만한 함선은 슬루프 정도가 될 것이다. 조선은 함포의 구경을 줄이려고 했으나 유럽은 오히려 더 큰 함포를 더 많이 탑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3] 다만 판옥선 한척에 탑승하는 인원수가 호위함에 비해 훨씬 적었으며 뛰어난 방어력을 보유했으며, 갤리온 보다 연안기동성이 우수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의 복잡한 연안에서는 서양 함선보다 운용상 이점이 컸다.[14] 갯벌 위에 흙을 때려부은 인천항이 특이한 케이스. 당시 조선이 수도 방위 문제로 한강의 선박진입에 학을 떼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역시 한강 하구에 항구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결국 인천항은 너무 큰 조수간만을 극복하기 위해 동양 최대의 수문식 도크를 건설해야 했다. 유럽도 조수간만차가 큰 대서양 연안 주요 항구들은 대부분 강 하구지역에 위치한다.[15] 갤리온은 원양항해와 전투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거대해졌던 거지만 연안에서 전투를 상정한 판옥선은 그렇게까지 커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정규군 수군도 판옥선에 상대가 안 되었는데 왜구따위가 판옥선에 이길 생각을 하는 것도 언감생심이었을 테고.[16] 조선의 인접국이래봤자 일본과 중국인데, 중국을 향한 해적질은 가능할리가 없었고, 당시의 일본은 바다를 통한 무역을 하는 국가가 아니었다.[17] 그리고 애시당초 그 이전에 목숨을 걸고 해적이 될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정 힘들다고 해도 차라리 산적을 하고 말지. 일본이야 어딜 가도 싸움인 전국시대다보니 배고파서 고기잡으러 어선에 탔다가 다른 배를 만나면 약탈도 하고 육지가 보이면 상륙해서 강도질도 하고 그러는 거지만 조선이야 정말로 배고프면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환곡에 먼저 가고 그 다음 정 안 되면 차라리 양반집 노비가 되거나 산적이 되지 해적이 될 일 자체가 별로 없다.[18] 1614년 조선의 학자인 이수광이 쓴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에 보면,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 앞바다에 놀랍게도 영국 함선으로 추정되는 서양의 배가 나타나서 조선 수군과 하루 종일 결전을 벌이다가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1622년 7월 19일자 <광해군일기>의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라남도 고흥인 흥양현(興陽縣)의 앞바다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 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들어와서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언급되는데, 기사를 쓴 사관은 그 배가 아마 서양의 배였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자세한 내용은 오른쪽의 링크를 참조 바람.링크 다만 이 기록은 판옥선이 홈그라운드인 연안에서는 갤리온과 충분히 싸워볼 만한 전투력을 가졌음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유럽 해적들의 성질상 일단 시비가 붙었으면(혹은 시비를 붙여서) 나포나 격침이야 당연하고 내친 김에 상륙해서 약탈과 학살을 벌이는 게 기본이었는데, 싸워보니 만만찮아서 그냥 가 버린 경우라 볼 수 있다. 당시 기준으로는 세계적으로도 꽤 쓸만했다는 소리.[19] 다만 당시에 출현한 서양 선박이 군함이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물론 해적들이 판치던 당대 태평양의 해상 치안을 생각하면 상선이라고 해도 언제든지 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수준의 무장은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군함처럼 아예 함포로 도배하다시피 하는 중무장을 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상품(또는 약탈품)을 적재할 공간이 필요했고 탑승 인원도 일반 군함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20] 영국은 주로 신대륙을 왕래하던 스페인 상선을 털어 먹었고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에게 사락 허가증을 발행해서 지중해를 활개치며 다녔다.[21] 정확히 같진 않으나 직관적인 예를 들자면, 탱크와 자동차의 선회를 비교하면 된다. 탱크는 양 무한궤도를 서로 반대로 돌리는 것 만으로도 제자리에서 180도 선회가 가능하지만 자동차는 전륜만 움직이기에 피봇이 차체 바깥에 생기기에 회전반경이 훨씬 넓어진다. 따라서 왜선은 리아스식 해안인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왜선들은 아예 선회하는 게 불가능했다. 반면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할 수 있는 판옥선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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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anokseon_myeongryang_gif.gif


판옥선은 크기에 따라서 24문 이상의 화포를 적재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 24문 가량 적재한 배들도 몇척 있었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의 화력덕후 민족 조선 초기에는 천자총통, 지자총통처럼 대형포를 주로 사용했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현자총통이나 불랑기포 같은 중소형포로 전환된다. 인접한 국가들의 전투선은 정크선/세키부네처럼 소형이거나, 대형정크선/안택선처럼 대규모 화포전술에는 어울리지 않는 배들이었다. 그래서, 대형포를 싣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난중일기에는 대형, 중소형 총포류가 같이 언급된다. 하지만 나중에는 현자총통/황자총통같은 중소구경 화포, 신기전(=신호용), 완구(=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격진천뢰가 몇 점 바다에서 발견된 바 있다)처럼 다양한 화약무기들을 대량으로 운용했다. 판옥선의 덩치가 불어난 후기에도 유럽식 불랑기포를 개조하여 탑재했다.

포격을 전제로 한 선박이라는 것이 중요한데, 비유럽권 국가들이 유럽 해적들을 맞이해 자기들 배에 대포를 실으려 해 봤지만
1. 함포를 쏘면 함체가 부서지거나 흔들린다[22]
2. 1에 해당하지 않는 경량포를 쏘면 위력이 약하다
3. 1,2를 극복해도 적선의 함포에 맞으면 배가 부서진다
의 3중 난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항해성에 집중한 탓에 내구도가 처참했던 것. 하지만 판옥선은 선체 자체를 발포와 피탄에 견디도록 하는 보기드문 견고함을 가졌다. 판옥선의 재료가 매우 두꺼운 널빤지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화기로는 배를 부수지 못했다. 판옥선은 말이 배지, 물 위를 떠다니는 목책으로 둘러싼 작은 요새였다.


5.3. 판옥선의 함대 구성[편집]


임진왜란 일부의 해전을 제외하면, 판옥선은 다양한 함선들과 해진을 형성했다. 대표적인 것이 소형 맹선 혹은 평선의 개조판으로 추정되는 '방패선(防船:Shield Ship)이었다. 이들은 주로 탐(探)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정찰과 전투보조를 맡았다. 먼 거리를 정찰할 때는, 사후선(伺候船)이라는 초소형 선박이 이용되었다. 정찰선들은 주로 신기전을 쏘아서 신호를 전달했다. 또한, 잘 알려진 거북선은 돌격선으로서 직접적인 합동작전을 펼쳤다.

조선함대의 기함은 좌선(座船), 상전선(上戰船)이라고 불렸다. 이는 가장 거대한 판옥선[23]이 맡았으며, 사령관 전용으로서 높이도 기존 판옥선보다 1층 더 높고 화려하게 꾸며졌다. 후기에는 거대해진 판옥선을 소형화했던 창선(槍船:Spear Ship)이 방패선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 밖에는, 어립선들이 화약이나 물자를 싣고 다니면서 보급을 담당했다.


5.4. 일본 수군의 함선과의 비교[편집]


의외로, 일본 수군의 화포기술은 조선에 비교해도 크게 불리한 수준은 아니었다. 일본 함선들이 함포를 동아줄로 묶어놓았다는 루머가 떠도는데, 이는 '조선전역해전도' 같은 매체를 통해서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에서도 건조 단계에서 포구를 설계하는 등, 함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잡혀있었다. 이미 오다와라성 포위전 같이 해상에서 다양한 화포를 이용하여 적을 포격하는 전술을 운용한 경험도 있었다. 안택선 문서를 보면, 그럴듯한 포가에 포를 올린 구조도도 존재한다.

문제는 중세 일본의 화포가 특유의 전쟁 철학으로 인하여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주로 오오즈츠라는 대구경 조총이나 여타 중소구경 화기를 엄호용으로 이용하면서, 적극적인 선상 백병전을 최고라고 생각했다.[24][25] 임란 당시의 기록에서도 조선군이 일본 화포에 입은 피해는 주로 오오즈츠로 지휘관이 저격당한 것[26]이었다. 일본 전함들은 가벼운 대신 강도가 떨어지는 녹나무, 삼나무를 사용한데다 선체의 구조 자체가 얇아서 내구도가 빈약했다.

하지만 판옥선은 가시나무(뾰족한 가시나무가 아닌 도토리 비슷한 '가시'라는 열매가 열리는 상록성 참나무류), 참나무, 소나무 등 단단한 나무를 이용했다. 게다가 판옥선은 한선답게 완전조립식이라서 남은 부품들을 이용하면 수리가 용이했다.[27] 덤으로, 평저선이었기에 선회력이 뛰어나서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보일 수가 있었다. 판옥선은 기본적인 내구도와 그를 바탕으로 화포 탑재량, 결정적으로 조직적인 포격이 가능한 주력 전투선이었기에 일본 수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심지어 백병전에서도 일본 수군의 함선들보다 유리했다. 당대 일본의 주력 함선이었던 세키부네(関船)나 코바야부네(小早船)는 판옥선보다 크기가 작고, 높이도 상당히 낮아서 도선하려면 공성전을 하듯이 판옥선의 병사들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쏘는 화살, 포, 진천뢰와 질려화포외 같은 폭탄, 장병기를 버티며 승선해야 했다. 여기에 공성전 처럼 벌어지는 전술 특성상 조선측이 승자총통을 산탄총마냥 쏴대었기에 명중률이 높은 조총도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으며 설사 승선에 성공하더라도 이미 체력이 소진된 채로 무장한 조선 군졸들과 싸워야 했다. 당장 육지에서 공성전을 한다고 해도 공격측에서 3배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걸 해상에서 해야 했으니... 아예 조선이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걸은 노량해전에서 이 차이는 더욱 두드러 지는데 돌격한 판옥선이 일본 배에 갈고리를 던져넣고 질려화통과 같은 불 항아리를 던져 화공을 펼치며 시마즈의 연합해군을 압박했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조선수군은 일본군 배만 보면 환호성을 지르며 공격하고, 미늘창 다루는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절대적인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어서, 도선을 허용하여 배를 빼앗겼다는 기록도 있다.[28]

다만, 위에 백병전에 유리하다는 건 선체가 높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거고 판옥선은 순수 포함이라 백병전을 전문으로 하는 해병(수병)을 거의 태우지 않았다. 전투원은 사수와 포수로 구성되었지 도선 접전을 전문적으로 하는 해병은 태우지 않았다. 물론 판옥선의 탑재용량상 많은 병사들과 대포를 함께 싣는 건 불가하다. 반면, 일본의 아타케부네는 대포는 적었지만 육박전을 전문으로 하는 해병을 200명이나 태우고 있었다. 당연히 도선 접전을 벌이면 수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고 조선 수군은 최대한 이를 피하려 했다. 그렇다고 조선 수군이 도선전을 피하기만 했던 건 아니고 필요하다면 왜군의 배로 등선하여 싸우기도 했다.[29] 물론 건너가는 건 원거리 전투로(총통과 화살 등) 왜군을 정리한 다음에 했지만. 아무리 왜군이 조선군에 비해 백병전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일단 화포와 화살로 두들겨맞은 뒤엔 그 우위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투 구도는 조선 함포에 몇 대 맞은 일본의 군선들이 파손되어 침수가 일어나고, 탑승한 노잡이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어 기동력을 잃으면 다가가서 화살과 소형총통, 박격포인 완구 등으로 선상을 쓸어버린 후에 불화살을 쏴 불태우는 식이었다. 포탄 몇 발로 침몰하는 경우는 적었지만 전투력 상실이라는 점에선 충분. 의외로 마지막 공격의 쐐기는 화공이었던 셈. 불에 약한 목조선이 병선으로 쓰이던 시대에는 화공이야말로 효과적인 공격수단이었다.

일본도 이런 판옥선의 장점을 파악하여 확보하려 했고, 실록에는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 포섭된 조선인을 통해 판옥선과 비슷한 배를 만들게 해 확보한 기록이 있다.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이운룡(李雲龍)의 첩정(牒呈)에 적에 가담했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두모악(豆毛岳)·김담손(金淡孫) 등에게 물어보니, 청정이 서생포(西生浦)에 있을 적에 적에게 붙은 해척(海尺) 하감동(河甘同)이란 자가 우리 나라 판옥선(板屋船)의 제도로 배 한 척을 만들어 주어 사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하감동을 잡아다가 물어보았더니, 청정이 서생포에 있을 때 적에게 투항(投降)하여 우리 나라 배의 제도로 배 한 척을 만들어 바쳤다고 하였다.하였으니, 매우 경악스러운 일입니다. 즉시 행형(行刑)하게 하소서."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선조실록 86권, 선조 30년 3월 24일 갑인 3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8일의 도체찰사 이원익의 서장.



5.4.1. 일본 수군의 탑재 발사 무기[편집]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군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수없는 서적은 바로 구보타 마사루의 "일본의 군사혁명"[30]일 것이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조총이 전해진 시기는 알려진 대로 포르투갈 상인의 배가 일본에 좌초하여 전래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최근 일본사학계의 현황을 보면 그 연구가 심화되어 그 배의 정확한 소유주는 명나라 해적 왕직이었고 포르투갈인은 군사고문으로 승선해 있던 인물로서 그 전래의 기원을 포르투갈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이미 조총의 존재를 파악하고 어느 정도 실용화 단계로 접어들었던 명나라로 볼 것이냐라는 논쟁이 있다.

무엇이든 그 시점이 1543년임에는 변함이 없고, 일본에서 최초의 대포 혹은 총통의 전래는 이보다 17년 뒤늦은 1560년으로 그 이름은 [석화시병종자도통]으로 이미 고려 말부터 최무선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기 발달이 상당했던 조선과 비교하여 무려 200년 가까이 뒤진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기록에도 일본의 전국시대 후반기에 그 사용된 예를 모두 뒤져도 많아야 1~2기가 동원되거나 그 빈도조차도 극소수로서 상대적으로 조총의 발달과 비교해 그 양적 수량의 제작이나 기술의 발달이 현저히 뒤쳐졌다. 이는 이미 조선 세종대에 전국에 보급된 총통 2만기나 1425년 세종7년에 전라 감사가 대형 화기인 천자총통에 탄환으로 사용되는 천자철탄자 1,140등을 새로 주조하여 바쳤다는 기록 등을 감안하면 그 발달의 정도와 보급의 격차를 유추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즉 임진왜란만 놓고 볼 때 일본 측에서는 이를 발달, 유용할 만한 물질적, 전술적인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지금부터는 전래 후, 즉 1560년부터 1592년, 일본으로의 전래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대포가 사용된 예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 덴쇼(1573년 기점) 2년 9월: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잇키를 배위의 대포로 포격한 일
  • 덴쇼 3년: 나가시노 성 측에서 세이로(목조망루)를 포로 쏘아 격퇴
  • 덴쇼 6년 5월: 이마고군이 농성하는 하리마 코즈키 성을 포위할 시 사용
  • 덴쇼 6년 6월: 하리마 칸키 성 포위전에 세이로(목조 망루)를 두 개 건설한 후에 그 위에서 대포로 성내를 공격한 일
  • 덴쇼 10년 8월: 사누키 소고 성 포위전에서 대포 2정을 사용
  • 덴쇼 12년: 아리마군 대포 2정으로 시마바라 성 포격
  • 덴쇼 13년 3월: 사이카 수전에서 호수 위에 배를 띄어 포격
  • 덴쇼 13년 5월: 다카오 성 공략전
  • 덴쇼 15년: 오오토모군이 사용하여 포위를 해산시킴
  • 덴쇼 막년: 오다와라 성 포위 공격전시 2정으로 포격
  • 덴쇼 막년 5월: 무사시 하치타카 성 공략에서 1정 사용
  • 원구(1590년 기점) 9월: 이시야마 혼간지 포위전에서 대포를 운용한 일
  • 원구 3년 7월: 아자이군의 치쿠부시마를 대포로 포격한 일

총 13건이 전부인데 그 특성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 대규모 운용은 전무하여 기록상 2정의 사용이 최대치이다.
  • 배에서 사용한 예이자 최초의 등장으로1.과 6.사례로 두 차례뿐이고 그 마저도 함의 설치가 아닌 단발적인 사용의 사례등으로 미루어 사실상 일본내의 자체적 발전으로 배에서의 운용은 임진왜란 후까지도 전무했다라고 보아도 무방하고 육해전을 모두 아우르고도 그 사례가 1~2정으로 고작 13차례 뿐이라는 것에서도 보이지만 그 발전의 후진성을 특유의 전통으로 해결하는 것은 에도시대 이후에도 미발달의 이유로서 적용하는 것은 일견 타당하지만 임진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매우 큰 무리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수있다. 현실적으로 대포의 대규모 운용을 위해서는 우선 수군의 경우는 전통적인 기술의 축적이 존재하던 건조법을 일시에 전환해야 하는 상당한 기술적 난해함과 함께 배의 구조와 특성의 변화로 인한 전술의 어려움등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므로, 전간기에 이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무엇보다 물적으로 수백~수천개의 대포를 양산한다는 것은 그 기술적 엄혹함은 배제하더라도 시대적 한계상 역시 불가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영지 단위로 나눠져 있었고, 올망졸망하게 나눠진 상태에서 대포 개발할 돈 있으면 모조리 조총에 때려박는 게 이득인 상황이었다. 일본이 통일된 다음엔 대포를 대량으로 사용할 만한 적도 없었다.

이후 대포의 유용성을 대규모전에서 실감했을 임진왜란 중에도 일본군의 대포 사용의 예시는 1597년 8월 남원성 공격에서 사용했다라는 기록과 시마즈군이 당도해전 시 육상에서 포를 쏘아 조선수군을 격퇴시켰던 경우 등의 당시 일본군의 전체 사정을 총괄하면 가덕도 이하 8성에 한정씩을 배치해놓고 다음해에는 2정을 추가로 보냈다라는 기록이 전부이다.

그리고 일본 측에서의 최대 규모의 사용은 사실상 전국시대의 실질적 종결인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측이 결사항전한 경우다.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약 126정이 성 전체에 배치되었다고 추정되며, 이 중에 상당수는 임진왜란 당시에 적군 즉 조선과 명으로부터 노획한 거였다. 그 중에는 태랑통 차랑통이라고 하여 일본 제일의 대석화시라 불린 것도 존재하였다. 즉 한마디로 위의 주장은 상당히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의 대포는 에도시대 후에도 그 발달이 정체되었냐 문제의 경우는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이 정권의 정책에 기인하는 바가 큰데, 우선 에도 막부는 전국시대의 교훈으로 반란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들을 다수 시행한다.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다음과 같다.

  • 대형함선 제조의 억제
  • 일국일성령이라 하여 일국에는 하나의 성만이 존재하게 한 점
  • 참근교대
  • 화포 제조의 철저한 억제

이와 비해 조선군은 양란을 거치면서 철저한 군제개혁을 통하여 군 전체가 냉병기 체제에서 화기 체제로 전환되는 일대 군사혁명을 경험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노영구의 병학통에서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6. 단점[편집]


2층 구조이며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제자리 선회력은 우수한 대신 항해 능력은 떨어진다. 노를 아무리 저어도 물의 저항을 정면에서 받기 때문에 왜선에 비해서는 속력이 현저히 느렸으며 선체 높이에 비해 흘수선이 상당히 낮고 무게중심이 높은 탓에, 수심이 깊은 바다에서는 풍랑을 만나면 쉽게 균형을 잃고 전복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초기 판옥선에는 달려 있지 않던 꼬리가 달려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때문에 임란 이후에는 2층 갑판의 방패판들을 착탈식으로 만들어, 유사시 떼어놓아 바람이 통과하도록 하여 폭풍에 저항성을 높여 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더욱이 평저선이라는 구조상 유체 저항이 커서 속도가 느리고, 운용 인원이 너무 많아서 대양에서 항해하기엔 부적합했다. 화포와 인원을 만재하면 대인원을 유지할 식량과 식수를 적재할 여력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반도 연안에서 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설계된 군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실전에서 발목을 잡은 적은 드물었다. 유일하게 조선 수군이 패배한 해전인 칠천량 해전을 제외하면 함대를 이끌고 외해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더욱이 표해록에 나온 것처럼 밸러스트로 바닥에 짐을 두어 균형을 잡으면 풍랑 속에서도 좌초를 막을 수 있었기에 외해 항해가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으며[31], 사실 500년 전인지라 바닥이 첨저식이든 평저식이든 먼바다에 있는 풍랑을 만나면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정크선 문서 주석에 나오듯, 첨저식 정크선 신주도 달랑 3m만 높이기만 해도 선원들이 '아놔 풍랑 만나면 대체 어쩌려고...'하는 기록이 고려도경에 나온다.

건조와 유지/보수에 들어가는 목재의 양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건조에 들어가는 목재만 해도 숲이 사라질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이것은 함대를 유지할 때 목재 소비가 엄청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다.


7. 대중문화[편집]



7.1. 충무공전 시리즈[편집]


충무공전 시리즈에 등장. 충무공전1에서는 조선과 왜 양쪽에서 사용하여 자체 전투력은 없지만 아군이 탑승해 전투가 가능하다. 포수 8명을 태우면 거북선을 능가하는 화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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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전 동영상의 판옥선1. 가운데 배가 판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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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판옥선 함대의 모습. 동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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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과 판옥선이 합세한 조선 수군의 모습.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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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게임상의 판옥선의 모습. 저 뗏목이 판옥선이다. 참고로 일본 것도 동일하다.

파일:충무공전2 판옥선.png
충무공전2에서는 겉모습은 정상적인 판옥선인데, 기능은 그저 수송선. 거기다 충무공전 1때처럼 아군 유닛들이 탑승해 발포할 수도 없고 그냥 화살만 쏜다. 게다가 생산 가격과 스펙 모두 일본의 수송선과 동일하다. 명백한 조선수군의 주력군함임에도 거북선과 철갑선 띄워주려다 생긴 판옥선의 굴욕. 이런 왜곡 때문에 나중에 게임이 출시되고 나서 제작사를 강력히 비난한 유저들도 많았다고 한다.

7.2. 임진록 시리즈[편집]


파일:나무위키 올릴 임진록1 조선 순찰선.png

임진록 시리즈에서도 시리즈에 걸쳐 조선 수군의 기본 병력으로 등장. 임진록1에서는 조선순찰선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나 생긴 것을 보면 영락없는 판옥선이다.[32]

파일:53127.jpg

임진록2부터 조선판옥선이라는 이름으로 제대로 나오고 임진록1과 비교하면 고증도 신경쓰고 섬세하게 만든 티도 나고 디자인도 멋져지고 퀄리티도 높아졌다. 작중 거북선이 대포를 쏘아 공격하니까 거북선과 이미지가 겹치지 않기위해 그런지 대포가 아닌 신기전을 쏘아 공격한다.
아래사진의 왼쪽에서처럼 임진록2에서는 거북선과 크기가 비슷했다. 그러나 아래사진의 오른쪽에서 보듯 후속작인 임진록2+조선의반격에서 거북선은 디자인이 더 화려하고 커다랗게 업그레이드되어 나왔으나 판옥선은 전작과 그대로인 탓에 거북선보다 작은 크기로 나오는데,[33] 일반적으로 판옥선의 크기는 거북선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었고 역시나 임진록2와 임진록+조선의반격에서 판옥선과 거북선보다도 더 크게 나오는 명나라 소속의 사선보다도 커다랗다. 괜히 명나라 수군제독인 진린이 판옥선을 탐내니 이순신장군이 진린에게 판옥선을 선물한 것이 아니다. 실제역사에서 일본수군의 가장 크고 강한 전투선이었던 안택선 역할이 이 게임내에서는 일본의 누각선[34]이라는 배로 대체되어 나온다. 그러나 판옥선이 공격력도 더 높고 연사력도 더 빨라서 공격력도 아래고 연사력도 느린 누각선보다도 더 강하다. 사선은 공격력은 높아도 대포알이 날라가는 시간이 길어 이동명령으로 회피하고 공격명령으로 치는 등으로 컨트롤을 쓰면 치고 빠지며 이기기 쉬우니 사실상 이 게임의 전함들중 1등으로 강한 전함인 거북선의 바로 다음으로 강한 2등 전함.


7.3. 불멸의 이순신[편집]


김명민충무공 이순신을 연기한 불멸의 이순신에선 조선 수군의 주력함으로 등장, 이순신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왜선인 세키부네들이나 안택선을 신나게 날려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사대로 이순신이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에게 선물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작중 중반까지 원균옹호론에 따라 성급하나 용맹한 장수로 미화된 최재성이 연기한 원균옥포해전때 충파로 일본군의 안택선을 박살내는 모습은 판옥선의 강함과 견고함을 엿볼수 있는 백미.

파일:나무위키 올릴 불멸 이순신 판옥선.png
[35]


7.4. 이순신 3부작[편집]



7.4.1. 명량[편집]


파일:Panokseon_myeongryang_mv.jpg

2014년 7월에 개봉한 명량에서도 강력한 면모를 보이며, 세키부네가 임란 후반기에 나타난 대형급으로 나왔기 때문에 크기 면에서의 고증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자세한 건 명량/고증 문서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판엔 이게 전함을 넘어 무슨 바다의 탱크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7.4.2. 한산: 용의 출현[편집]


파일:한산 판옥선.jpg
지휘용 누각인 장대의 지붕 형태가 둥근 지붕에서 정자에 주로 사용하는 모임지붕 형태로 바뀌었고 계단이 2개로 늘었으며, 전작인 명량 판옥선보다 선체 측면에 그려진 용 그림이 좀더 선명해졌다.


7.4.3. 노량: 죽음의 바다[편집]


한산: 용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는 한산의 디자인 쪽에 더 가깝게 등장하였다.
칠천량 패전 이후 바다에 떠다니던 이억기의 판옥선이 인양, 수리된 후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사용되며 등자룡이 이순신에게서 선물받은 판옥선을 노량 해전에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36]

7.5. 징비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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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과거의 불멸의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드라마인 징비록에서도 등장, 옥포 해전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신나게 쓸어준다. 그리고 누각 위에 난간이 하나 더 있는 등 기존의 묘사들에 비해서 럭셔리함을 더 한것같은 모습에 더 화려한 외견을 보여준다.자세한 건 징비록(드라마)/고증 문서 참조.

파일:1589116200478.jpg
파일:1589116201552.jpg
[37]


7.6. 임진왜란 1592[편집]


KBS의 4부작 다큐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서도 거북선과 함께 등장한다. 1부의 주요 포커스는 거북선의 돌격전술과 직사 방포에 맞추어져 있어서 판옥선이 주역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7.7.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편집]



이외에도 임진왜란 1592의 원형이 되는, 1992년 임진왜란 400주년 특집으로 제작된 KBS의 4부작 다큐드라마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도 등장한다.

CG기술이 빈약하던 시대라 모형을 이용한 전투씬이 나온다.[38] 대형 전투씬은 작은 모형으로, 클로즈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리포터인 신승수 영화감독의 키보다도 더 길다란 거대 모형으로 찍었으며 실제 바다 위에 띄운 통통배에 합판으로 외장을 올린 레플리카 판옥선과 거북선도 등장한다. 다만 30년 전 조악한 촬영기술이나 연출 때문에 KBS 유튜브 담당자도 '다큐인가 개그인가'라고 적어놨다(....).


7.8. 포방부[편집]



군사장비 3D그래픽 제작 채널인 포방부에서도 판옥선을 그래픽으로 만들었다. 물론 채널이 채널인지라, 매우 괴악하게 마개조 되었다(...)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의 마스트와 워터젯, K-9 자주곡사포의 포탑과 팰렁스를 앞뒤로 탑재하였고, K6 중기관총RWS로 2층 전방에, 거치형식으로 좌우에 발라놓았다.


7.9. 만화·애니메이션 등[편집]


파일:1589125987445.jpg

역사관련 학습만화를 많이 만든걸로 유명한 박종관이 그린 효리원의 역사학습만화 난중일기에서 나온 판옥선. 흔히 충무공 이순신이나 임진왜란에 관련된 매체라면 만화든 위인전이든 동화든 소설이든 이렇게 지나가면서 두어 번 정도 언급되는것이 매번 나온다. 특히 2010년대 후반기 이후로 학습만화에서도 고증을 중시하게 되면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충무공 이순신 관련 애니메이션들중 유명한 변강문 감독의 극장용 이순신 애니메이션 난중일기에서 나온 판옥선의 모습(아래 사진에서 왼쪽)과 KBS의 어린이위인전 애니메이션인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서 나온 판옥선의 모습(아래 사진에서 오른쪽). 충무공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에서는 이렇게 꼭 왜군의 전함을 무찌르는 모습으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의 이순신과 임진왜란 관련 작품들이 십중팔구 그러하듯 거북선에 비중과 초점이 거의다 맞춰져 있으니 거북선에 밀려 위용과 존재감이 적다.
파일:추억의 만화영화 난중일기.1997.mp4_00202412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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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모형·완구·피규어[편집]



8.1. 3D 퍼즐 뜯어 만드는 세상[편집]


파일:나무위키에 올릴 판옥선 모델.jpg


8.2. 옥스포드[편집]


파일:jil0462-00 - 복사본.jpg

옥스포드 완구에서 2004년에 불멸의 이순신이 인기를 끌자 "임진왜란 시리즈"라는 상품명을 통해 거북선 블럭과 함께 판옥선 블럭을 출시했고 많은 인기를 끌었다.

파일:2248549_1 - 복사본.jpg

10년 후인 2014년 명량이 흥행하여 또 한번 이순신열풍이 불자 "장군 이순신 시리즈"라는 상품명으로 다시 거북선 블럭과 함께 판옥선 블럭도 만들어 대박을 치게된다. 후자인 장군 이순신 시리즈 제품속 판옥선은 아무래도 시대차가 있다보니 전체적인 모습도 정교하고 호화스럽게 바뀌었고 깃발도 기의 용그림을 그림자처리만 한 전작과 달리 화려하게 바뀌어 상당히 디럭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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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명량 후속으로 한산이 제작된다하고 또 다시 충무공 이순신이 각광받는 때가 오자 "영웅 이순신 시리즈"라는 상품명으로 거북선 블럭과 함께 판옥선 블럭도 로컬라이징되어 재출시 되었다. 전체적인 모습과 컬러매치는 같지만 배의 깃발이 황룡이 그려진 황룡기에서 청룡이 그려진 청룡기로 바뀌어져 나왔다.[39]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지 않을 수 없듯 매번 출시될 때마다 한번도 빠짐없이 항상 동시대 조선수군의 강력한 전투함이었던 거북선과 함께 출시되었다.



8.3. 영공방[편집]


목공예로 유명한 영공방의 거북선과 마찬가지로 장식용,모형용인 노젓는 판옥선. 어린이 장난감용의 주니어 시리즈 판옥선이 2종 나왔다.[40] 장식용,모형용인 노젓는 판옥선은 마찬가지로 장식용,모형용으로 나온 1/65거북선과 1/100거북선처럼 세부구조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잘 만들고 훌륭한 컬러배치와 잘 어우러져 굉장히 멋지다.

파일:영공방 키즈용 판옥선.jpg
어린이 장난감 용인 주니어 시리즈 판옥선.


9. 관련 문서[편집]


  • 한국의 무기
  • 범선
  • 한선
  • 과선, 검선 - 고려 중기의 전투선. 거북선 같은 돌격선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 누전선 - 고려 후기의 전투선. 맹선과 판옥선의 발달 과정을 알 수 있는 함선이다.
  • 조운선 - 해당 문서의 맹선.
  • 거북선
  • 방패선: 중소형 맹선을 개조한 소(小)형 보조용 전투선. 후기의 해진도에서 판옥선 주변을 호위하는 축소형 선박들이 이것이다. 병선(兵船)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판옥선처럼 생겼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찰용 보조선박이었다.
  • 창선: 판옥선과 거북선을 축소한 중(中)형 전투선. 해진도에 종종 그려지는 소형 거북선을 이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과선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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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실제로 오스만 제국에서 거대한 사석포를 배에 싣고서 쏘다가 사석포의 포탄이 발사되면서 생기는 반동에 배가 심하게 흔들려서 침몰하는 일이 있었다.[23] 판옥대선이라 하여 기함으로 주로 사용되며, 승무원은 일반 판옥선보다 30명 더 많은 194명이 승선하는 대형선이었다.[24] 센고쿠 시대 일본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내전이었고, 그것도 이념 대립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권력 투쟁에 불과했다. 이런 전쟁에서는 상대방을 완전히 때려부수고 몰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 세력의 대장만 따내면 어차피 병사와 영지는 주인만 바뀔뿐 상하관계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 영토, 노동력, 심지어는 군사력과 인재까지도 자기 세력에 편입시킬수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전비 소모를 메꾸고 세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는 수상전도 다르지 않아서, 센고쿠 시대 해상 작전의 가장 큰 목적은 세토 내해 등의 수로를 통한 군자금 조달이라 적 함대를 무조건 격침시키기보다는 가능한 한 탈취하는 쪽이 이익이었고, 심지어 그 해상 전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전리품이 중요한 해적 세력이었다. 처음부터 적함을 수장시켜버릴 목적으로 대들보까지 뽑아다가 화포로 때려붓는 판옥선의 화력과 이순신의 완벽한 해전 지휘에 일본 수군들이 장수,수병할 거 없이 충격과 공포로 모랄빵을 맞고 깨진 것이다.[25] 다만 이건 일본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 서양에서도 해군 함대들끼리의 전투는 선상 백병전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함대에 실린 함포만으로 적 함대를 격파하거나 침몰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적 함대의 전투력을 무력화시키려면 아군 함대의 수병들이 적 함대에 쳐들어가 적군 수병들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선상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서양의 선상백병전의 역사는 아주 오래되어서 살라미스 해전과 포에니 전쟁, 악티움 해전같은 고대에서도 즐겨 썼다. 백병전을 통해 적의 배를 나포하고, 포로들은 짭짤한 몸값으로 적국에게 교환받을 수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포격전으로 적선의 전력을 떨어뜨리면 백병전을 감행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최첨단 해군을 가진 영국 함대에서도 선상 백병전을 중요시했다.[26] 대표적인 사례로 부산포 해전에서 녹도 만호 정운(鄭運)의 전사를 들 수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참나무 방패 3개와 쌀 2섬을 뚫고 들어와 정운의 몸까지도 관통했다고 한다.[27] 모듈이나 파츠 형식이었다는 게 아니라, 한국 전통 건축 마냥 각 부재를 끼워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일부 구조재에 못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나무못이었다. 이런 구조는 물에 젖으면 젖을수록 나무가 불어서 오히려 접속부 강도가 높아지며, 동시에 나무라는 자재 특성 덕에 연성까지 온존할 수 있으며 문제가 생겨도 부서진 부분을 (교체하는 게 아니라) 깎아내고 퍼즐처럼 끼워 맞출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품이 많이 들고 작업을 총괄할 장인도 필요했으나 애초에 건조 방식 자체가 집을 짓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기에 큰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실재로 당대 판옥선에 대한 평가도 튼튼한 가옥과 같다고 하였다.[28] 참고로 임란 최초로 배를 빼앗긴 장수는 그 유명한 원균. 1597년 3월 9일, 즉, 휴전 중일 때, 조선 수군은 거제도 기문포에 왜선 3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술과 먹을 걸 줘가면서 안심시켜서 돌려보내고 뒤를 쳤는데 반격한 일본군에게 해상에서 판옥선은 물론 그 안에 실린 화포와 화약, 기타 무기까지 덤으로 빼앗기고 함장인 고성 현령 조응도와 승조원 140명이 그대로 몰살당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원균은 빼앗긴 배를 일본군이 몰고가기 전에 포격으로 침몰시키고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선조에게 바쳤다.[29] 대표적인 예로 당포 해전에서 순천부사 권준이 활을 쏘아 적 총지휘관인 도쿠이 미치유키에게 부상을 입히자 사도첨사 김완이 도선하여 백병전을 벌인 끝에 목을 딴 일이 있었다.[30] 2008년 일본에서 발간되어 국내에선 2010 번역본으로 편찬되었다.[31] 비슷한 체급의 평저선인 통신사선도 무난하게 외해 항해를 소화했다.[32] 판옥선을 다소 퀄리티 떨어지고 초라하게 대충 그린거같은 모습이다. 호칭을 판옥선 아닌 다른이름으로 지은 문제로 그렇고 판옥선을 그리다 만것 같은 부실한 모습도 그렇고, 흔히 임진왜란때 거북선옆에 그려지는 판옥선의 모습을 보긴 보았으나 명칭을 몰라 이름 대충짓고 디자인도 신경써서 만들어주지 않은것만 같은 느낌.[33] 거북선과 판옥선 옆의 제일 작은 배는 게임 내에서 조선군 병사들을 옮겨 나르는 일을 도맡는 조선 수송선.[34] 사실상 임진록2와 임진록+조선의반격에서 누각선으로 나온 배가 실제 안택선, 정작 게임내 안택선의 역할은 일본수군의 소형전함이었던 세키부네취급이다.[35] 불멸의 이순신 촬영에 사용된 함선은 왜선, 명나라 군함을 포함해서 총 7척이 였는데 모두 어선을 개조해 제작했다. 사진속 판옥선은 촬영에 사용된 판옥선중 2척중 1대로 드라마가 종영된후 부안 격포항에 정박해 있다가 2005년 12월에 침몰했다. 나머지 함선들도 세트장 근처로 옮겨서 방치되다 시피 하다가 2000년대 후반에 모두 폐선 처리 되었다.[36] 대사를 들어보면 이순신이 사용하던 판옥선을 등자룡에게 준 것 같다.[37] 위 사진은 징비록 화면이지만 사실 불멸의 이순신 당시 촬영한 전투신을 재사용한 것이다.이 외에도 재사용한 장면이 많다.[38] 한국에서 TV 다큐멘터리에 CG를 적극 활용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 5~6년 후인 EBS의 한반도의 공룡, KBS의 '한반도 탄생 30억년의 비밀'등에서 비로소 본격 시도된다. NHK가 이미 이보다 10여년 전인 1988년 첨단 기법을 동원한 특수촬영과 CG로 지구대기행을 만들었음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늦은 시도이지만, 한국 CG기술은 이 이후로 20여년간 미친듯이(...) 발전하기 시작한다.[39] 거북선의 경우도 깃발은 황룡이 그려진 황룡기에서 청룡이 그려진 청룡기로 바뀌어져 나왔다. 그리고 2014년의 장군 이순신 시리즈 때와 비교하면 외형은 전체적으로 같지만 용머리 컬러와 선체 상판의 컬러가 2004년 임진왜란 시리즈의 거북선처럼 갈색과 강철느낌이 나는 실버색으로 바뀌어 나왔기에 비슷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체인지가 다소 많이 있는 편인데 판옥선은 깃발 하나만 바뀐 셈.[40] 영공방의 거북선도 마찬가지로 커다랗고 정교하고 멋진 모형용과 조그맣고 단순한 어린이들 완구용으로 총 3종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