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굉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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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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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 C급 전범
일반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피의자 약 5,700여 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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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추종 세력 및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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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 순 배열
[1] 불기소 피의자, 재판 전 사망자 포함.
[2] 개별 사건의 중복 피고인까지 합계되었으며, 이 밖에 추축국 피점령지 내 부역자, 기소유예자가 포함된 수치이다.





1. 개요
2. 역사
3. 팔굉일우탑
4. 기타


1. 개요[편집]


팔굉일우(八紘一宇(はっこういちう)는 '온 천하가 한 집안'이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 당시 이를 변형하여 국시로 사용하였다. 내선일체(황민화 교육), 대동아공영권과 함께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2. 역사[편집]


팔굉(八紘)이란 천지를 연결하는 여덟 바로 온 누리의 대유고, 일우(一宇)는 한 지붕이라 하여 한 집을 뜻한다. 팔굉은 기원전 1세기에 기록된 중국의 고서 《회남자》에 등장한다.

九州之大 純方千里 九州之外 乃有八殥 亦方千里 (…) 八殥之外 而有八紘 亦方千里

구주의 크기는 즈믄[1]

제곱고 구주의 밖은 이에 팔인(八殥)이 있는데 또한 즈믄 제곱리고 (중략) 팔인의 밖에는 팔굉이 있는데 또한 즈믄 제곱리다.

회남자』, 「추형훈墜形訓」

회남자에서는 구주의 밖을 팔인이라 하고 또 팔인의 밖을 팔굉이라 하였다. 그러나 팔굉은 전거가 오래되었어도 팔굉일우의 역사는 그보다 짧다. 먼저 팔굉일우의 유래가 된 전거는 일본서기에 있다. 여기서 진무 천황이 즉위하기 2년 전이라는 기원전 662년에 내린 칙령이 있는데 여기서 팔굉일우의 모티브가 나온다.

兼六合以開都 掩八紘而爲宇不亦可乎

六合(くにノうち(ねて ((みやこ(ひら八紘(あめノした(おほ( (いへ(む こと (また (から((

육합(나라 안[2]

을 아울러 서울을 열고 팔굉(하늘 아래을 덮어서 집으로 삼는 일은 또한 좋지 아니한가

일본서기』 권3「신무기」, 기미년(己未年) 3월[3]

신유삭(辛酉朔)[4] 정묘(丁卯)[5]


훈독 때문에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로 읽어야 할 곳이 보인다. 특히 일본 고대 문헌은 격식있는 한자어를 일본어로 새겨 읽으므로 이런 현상이 많다.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신화의 건국표어지만 여기서도 일우(一宇)라는 글은 없다.

그러나 니치렌주의자인 불교 학자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가 1903년 이 글귀를 따와 고쳐서 팔굉일우라는 조어를 만들었다. 이 당시에도 홍익인간과 같이 신화적 표어일 뿐이었으나, 이후 1930년대의 대공황에서 일본 제국이 완전히 군국주의의 길에 접어들면서 의미가 변질되었다. 팔굉일우는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인용되며 일본 제국의 국시가 되었다. '온 세계가 하나의 지붕'이라는 뜻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세계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 하에 있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3. 팔굉일우탑[편집]


八紘一宇の塔(平和の塔)(はっこういちうのとう(へいわのとう)
팔굉일우탑(평화의 탑)
파일:external/http://www.miyazaki-city.tourism.or.jp/images/spot/sp28/main.jpg
팔굉일우 탑 소개홈페이지(한국어, 일본어, 영어)

명칭
한국어
팔굉일우탑 / 평화의 탑
일본어
八紘一宇の塔[6] / 平和の塔
영어
"Hakkō ichiu" Tower(monument)[7] / Tower of Peace





파일:Founding_Ceremony_of_the_Hakko-Ichiu_Monument.jpg
황기 2600년(1940년)을 맞아 미야자키시에 건립된 팔굉일우 기념탑. 한국중국 등 점령지에서 가져온 돌로 세워졌다. 패전 후 철거당할 뻔하였으나 '평화의 탑(平和の塔)으로 개명 후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름만 '평화의 탑'이지 주변 사람들은 과거처럼 '팔굉일우의 탑'이라고 부르는데, 탑 중앙에 '팔굉일우'라고 새긴 글자는 전혀 안 바꿨기 때문이다.

파일:800px-HakkoIchiu10sen.jpg
▲ 팔굉일우 탑이 그려진 10전짜리 지폐.


4. 기타[편집]


파일:800px-Flag_of_Hakkoichiu.jpg
▲ 팔굉일우기(旗) 아래 모인 일본군 조종사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사진이다. 당시 일본군에는 공군이라는 독립된 군종이 없었으므로, 해군 항공대나 육군 항공대 조종사들이다.

파일:Celebrating_Gagaku_Music_in_Imperial_2600.jpg
▲ 1940년 11월, 황기 2600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쇼와 덴노고준 황후.

1940년[8] 일본 제국의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는 시정 방침 연설에서 "황국(일본 제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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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千)의 옛말.[2] 천지사방[3] 당연하지만 그레고리력이 아니고 늦봄이다.[4] 1일이 신유일이란 뜻[5] 7일[6] 팔굉지기주(八紘之基柱), 일본어로는 아메츠치노모토하시라(あめつちのもとはしら)라고도 부르는데 '팔굉의 기초가 되는 기둥'이란 뜻이다.[7] "Hakkō" Pillar.[8] 일본 제국의 전성기이자 황기 2600년이라는 딱 떨어지는 숫자 때문에 여러모로 중요한 해이다. 천황의 우상화가 극에 달한 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