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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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제국 팔라비 왕조 제2대 샤한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محمدرضا شاه پهلوی | Mohammad Reza Pahlavi


파일: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공식).jpg

출생
1919년 10월 26일
이란 숭고국 테헤란
사망
1980년 7월 27일 (향년 60세)
이집트 카이로
재임기간
이란 제국 샤한샤
1941년 9월 16일 ~ 1979년 2월 11일[1]
서명
파일:rezapalavi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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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
모하마드 레자 샤 (محمدرضا شاه)
신장
193cm
아버지
레자 샤 팔라비
어머니
님타즈 카눔(생모)
배우자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1939년 결혼, 1948년 이혼)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크티아리
(1951년 결혼, 1958년 이혼)
파라 디바(1959년 결혼)
자녀
슬하 2남 3녀
장녀 샤나즈(1940년생)
장남 레자 팔라비(1960년생)
차녀 파라나즈(1963년생)
차남 알리 레자(1966 ~ 2011)
삼녀 릴라(1970 ~ 2001)
종교
시아파 이슬람 (세속주의)
정당
부활당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재위 초반
2.3. '백색혁명'의 추진
2.4. 몰락
3. 여담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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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샤한샤(황제)이자, 이란(페르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 1941년 9월 16일 황위에 오른 후,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약 38년 동안 재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이란 황실이 다시 복원하지 않는 이상 팔라비 왕조 군주 중 팔라비 왕조의 건국과 이란 혁명으로 인한 팔라비 왕조의 멸망을 본 유일한 군주이다.[2] 국정 목표는 위대한 문명(تمدن بزرگ)으로, 급진적 근대화와 산업화로 이란의 강대국화를 계획하였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19년 이란(페르시아)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레자 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5년 수상이였던 아버지가 카자르 왕조를 쿠데타로 뒤엎고 레자 샤로 즉위하면서 팔라비 왕조를 열었고, 이후 자신도 황태자가 되었다.

팔라비는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던 스위스의 사립기숙학교인 르 로제에 유학을 했는데, 이 때 많은 친구들을 만들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버지 팔라비 1세는 이란 국내에 거주 중인 독일인의 추방을 거부하고 연합국의 철도사용을 반대하여 이란은 추축국인 독일 편이라고 거의 선언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영국소련은 1941년 8월 25일에 철도를 포함한 보급로와 석유 등의 자원확보를 위해 이란을 침공하게 되는데 이것을 페르시아 침공이라고 부른다. 이 침공으로 레자 샤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1941년 9월 17일 이란군은 소련과 영국에게 패배했다. 전쟁에서 지고 영국군과 소련군이 이란에 진을 치자 레자 샤는 퇴위하면서 아들이던 팔라비 2세가 이란의 샤로 즉위했다. 사실상 연합군의 꼭두각시로 세워둔 셈.

2.2. 재위 초반[편집]


황태자 시절이던 1939년에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이집트 국왕 푸아드 1세의 장녀인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와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지만 불화가 생겨 결국 1948년 이혼을 했다.[3] 이어서 1951년에 이란 남부의 바크티아리 족의 귀족장녀인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크티아리와 재혼했는데 그녀가 불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1958년에 다시 이혼했고[4], 1959년에 이란 군인의 딸이던 파라 디바(1938년생)와 재혼했다. (파라 왕비 사이에서는 2남 2녀. 하지만 그중 1남 1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팔라비의 지배 당시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에 의해 이란의 석유 산업이 잠깐 국유화되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팔라비는 1951년부터 석유국유화, 소련과의 접근을 추구하던 모하메드 모사데크 수상과 대립했고, 1953년에 CIAMI6의 지원을 받은 자헤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모사데크 수상은 실각했다. 그리하여 석유는 다시 이란의 기업들에게 넘어갔다.

2.3. '백색혁명'의 추진[편집]


팔라비는 1960년대부터는 이른바 백색혁명을 통해 이란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광범위한 형태의 개혁을 시도했다. 일본의 경제성장에 주목하여, 1963년부터 석유를 팔면서 획득한 외화와 미국에 의한 경제원조를 기반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했는데, 팔라비는 토지개혁과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사문제 해결, 여성 참정권의 확립과 아동결혼 금지, 교육개혁, 농촌개발, 문맹 퇴치로 이란의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친미노선을 추구하면서 서방세계의 자본이 이란에 투자하게 만들려고했다. 실제로 팔라비는 예전부터 영어와 프랑스어를 배워놓아서 외교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팔라비는 1960년대에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를 이용해서 반체제 운동을 탄압하며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개발독재에 나섰다.

특히 팔라비는 미국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때 이란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실제로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다른 동맹국들에게는 팔지 않던 당시 최신예 전투기인 F-14를 이란에 제공했으며 당시 최신예 여객기인 보잉 747SP 여객기도 이란항공에 판매하는 등 이란과 밀접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5] 또한 미국과 친한 관계로 자연히 미국의 우방이며 반공 국가인 대한민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되었고, 당시 한국-이란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6] 테헤란로도 이 시기에 생긴 거리명이다. 이스라엘과도 우호적인 관계라서 이란과 이스라엘은 서로 많은 교류를 했을 정도로 친밀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다른 아랍 국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우디와는 팔라비와 사우디 국왕이 서로 친서를 주고받을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였다.

1967년 10월에는 대관식을 치렀고 1971년에 키루스 대제아케메네스 왕조 때부터 따진 이란 군주제 2,500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했으며, 1974년에는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한편 모사데크 실각 후에는 샤를 지지하는 두 정당 신이란당(حزب ایران نوین, Novin)[7]과 인민당(حزب مردم, Mardom)[8]만 남겨놓았으며, 이마저도 통치를 수월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1975년에 부활당(حزب رستاخیز ملت ایران, Rastakhiz)으로 통합시켰다.대정익찬회?

2.4. 몰락[편집]


그러나 세속적 무슬림이었던 팔라비는 이란시아파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특히 이란의 전통적 상인 계급인 '바자리'들의 지지를 서서히 잃게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한 것도 많은 사람들의 반발이 심해졌으며[9], 황실과 그 측근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그에 대한 불만들이 가득한 상황이 되었다. 이란의 공산주의 정당인 민중당[10]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자신의 정보기관이였던 SAVAK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당하거나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었는데 1978년 당시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잡혀온 이란의 정치범의 숫자가 최소 2,200명이었다고 하며 이 정치범 숫자들은 팔라비의 개혁이라는 '백색혁명'이 진행될수록 계속해서 증가했다. 특히 팔라비는 히잡 착용의 금지[11] 및 사원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등 이슬람의 세속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는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같은 이슬람 율법자들의 거센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팔라비의 폭압정치와 부정부패 그리고 여러 정책들로 인해 이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은 팔라비를 지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이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호메이니는 이슬람 세속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체제 운동가로 찍혀서 이란에서 추방되어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이란 국내의 반체제 인사들이 크게 반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냉전 하에 석유에서 얻은 돈을 바탕으로 근대화 추진정책을 펴던 이란은 오일 쇼크로 막대한 돈을 벌여들였고, 1인당 국민소득도 급속히 올라갔지만 오일쇼크로 얻은 돈은 골고루 배분되지 않아 빈부격차를 확대시켰고 계층간 위화감도 심해졌다. 또한 타 걸프 국가도 빈부격차는 심하기는 했지만 각 가정마다 가정부를 한둘씩은 기본적으로 두고 노동력을 대대적으로 수입하기까지 할 정도로 매우 부유해졌지만 이란은 타 걸프만 국가와는 다르게 이미 인구가 3천만에 달했기에 이란의 서민들은 이러한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란의 산업 부문은 갑자기 늘어난 소비력을 감당하기에 부족했고 수입품들이 이란 시장을 휩쓸면서 산업 경쟁력은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를 메꾸려고 통화량을 증가시켰지만 이러한 통화량 증가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중소상인들과 농민들이 몰락하여 팔라비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팔라비가 미국을 방패로 개발독재정책을 펴는 것에 염증을 느낀 이슬람 운동권은 반체제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이란 공산당도 합세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어 간다.

그렇게 1978년 초부터 학생들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팔라비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상황에도 샤는 테헤란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하지만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고 군대마저 등을 돌리게 되자 결국 팔라비는 "나는 지쳤다."라는 말과 함께 1979년 1월 16일 휴가라는 명목하에 전용 보잉 727기에 황후와 가족들, 측근들을 태우고 이집트망명했다.

그가 망명하고 난 이후 샤푸르 바크티아르 총리[12]가 섭정 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호메이니가 1979년 2월 1일, 15년만에 귀국한 뒤 10여일간의 격전을 거쳐 완전히 제압당했다. 호메이니는 바로 이슬람 혁명평의회를 조직한 뒤 메흐디 바르자간을 총리로 임명했고 (형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망명중이던 팔라비는 이후 암 치료를 위해 황후와 함께 미국으로 갔지만 팔라비의 미국 입국에 반발한 이란 대학생들이 1979년 11월 4일에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하고 팔라비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미국은 거부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극도록 악화되었다.

이후 팔라비는 이집트에서 잠시 머물다가[13] 모로코[14], 미국[15], 멕시코[16], 파나마[17], 바하마 등을 떠돌다가 다시 이집트로 돌아왔고[18] 얼마 되지 않아 말 그대로 객사했다. 장례식은 사다트에 의해 특별히 국장으로 치러졌고 사다트도 직접 참석하여 애도했지만, 재위 시절 그가 믿던 서방에서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 외에는 참석한 사람이 없다시피했다고 한다.[19]

1952년 이집트 군주정이 폐지되었을 때 이집트의 실질적 마지막 왕이었던 파루크 1세[20]가 망명을 요청하자 거부한 바가 있다.[21] 이에 파루크 1세는 "너라고 황위를 영원히 지킬 줄 아느냐?"라고 비아냥거리며 유럽으로 망명했는데, 본인도 똑같은 꼴을 당한 걸 넘어 이집트로 망명을 갔으니 참 세상만사 새옹지마다.

3. 여담[편집]


팔라비 2세는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트와 비행기 조종을 좋아했다. 이란 공군의 차기 전투기 도입에서는 스스로 후보기의 조종간을 잡고 시험비행을 하여, 최종적으로 F-14를 도입했다. 망명할 때도 직접 전용기 보잉 727을 조종하여 황후와 측근과 함께 망명했다.

자동차 컬렉션을 좋아하여 이탈리아의 슈퍼카 람보르기니와 서독의 메르세데스 벤츠 600 등 고급차를 애용했다. 이 콜렉션은 이란 국립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사진 보러가기

축구도 매우 좋아해서 당시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불러다가 함께 공을 차기도 했다고... 당시 대표선수의 증언에 따르면 샤의 실력은 너무나 비범해서 드리블을 하면 수비수가 막을 수가 없었고, 슈팅은 골키퍼가 반응조차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장년의 팔라비가 청년 위주의 국가대표 전문 축구선수들보다 실력이 탁월했을 리가 없으니 군대 축구마냥 선수들이 알아서 접대게임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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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품 컬렉션을 진두지휘한 팔라비 2세의 셋째 부인인 파라 팔라비와 앤디 워홀. 배경에는 워홀이 그린 파라의 초상화들이 있다. 현재 이 그림들은 테헤란 현대미술관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으며, 아마도 이란의 신정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기 이전에는 다시 전시되기 힘들것이다.

고흐르누아르, 마티스, 드가 같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 및 조각 같은 예술작품도 마구 사모았다. 덕분에 그가 쫓겨날 때 테헤란 미술관에 남은 이 그림들을 호메이니 정권이 팔아치운다는 소문도 있어 해외 수집가들이 매의 눈으로 노리며 군침을 흘렸으나 팔긴커녕 미술관 지하에서 비공개로 보관하면서 되려 수집가들이나 미술 애호가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다.[22] 이는 파라의 요청에 의해서였다고 하며, 결국 이 작품들을 소장할 "테헤란 현대미술관"(TMoCA, Tehran Museum of Contemporary Art)의 창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미술관에서는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과 같은 현대 팝 아티스트들의 작품들 약 300점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기준으로 미국과 유럽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다행히도(?) 이 컬렉션은 다른 작품과 교환된 한 점을 빼고는 전부 수장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고 하며, 현재 가치로 약 미화 30억 달러, 즉 2018년 기준 약 3조 3000억원(!)의 가치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컬렉션 중에는 여성의 상반신 누드를 표현해 이란에서는 영원히 전시할 수 없는 르누아르의 "열린 블라우스의 가브리엘", 앤디 워홀이 그린 파라의 초상화 등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현 이란 정권이 작품들을 팔지 못한 이유는 이런 작품을 사줄 만한 곳은 미국이나 유럽의 이름높은 옥션뿐일텐데 미국이 이란 경제제재를 해제하지 않는 한 매각은 불가능할 것이다.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평가가 좋은 편.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수용소에 가둬 둔 사람들을 이란에 있던 자유 폴란드군에게 인계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 난민들은 수용소의 극심한 환경으로 인해 기아와 질병을 앓고 있었다. 팔라비 2세는 이스파한에 난민 수용소를 지으며 적십자와 협력하여 난민 구휼에 매우 열성적으로 임했다. 사실 이 시기 이란도 나라만 안 빼앗겼지 폴란드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터라 어쩌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의 자녀들 중 명목상의 샤는 그의 장남인 레자 팔라비 황태자가 계승하였는데, 이후 미국에서 팔라비 왕조 망명 정부를 수립해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팔라비 왕조의 복고를 주장하고 있다.[23] 하지만 현실은 과거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과 사이가 좋았던 미국이나 서방 강국들에게서도 정치적, 군사적인 지원은커녕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중.

2001년 막내딸 레일라 팔라비가 우울증으로 자살했으며 막내아들 알리 레자 팔라비도 2011년 미국에서 권총자살했다. 파라 팔라비 황후는 2009년 NHK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꽤나 엄중한 보호 아래 프랑스에서 자선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카페인 '세계의 왕실 이야기'에서 파라 황후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에 답장을 해주기도 했다.

1967년 6월 서독에서는 팔레비 샤의 방문을 반대하는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서독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한 대학생이 총에 맞고 사망했는데, 이것은 결국 서독에서 무장투쟁 단체인 바더 마인호프의 창설로 이어졌다.

팔라비의 통치와 자세한 내용과 평가 등은 팔라비 왕조 문서를 참고.

이동원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에서 그와 만난 이야기가 있는데 영어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쓰는 유럽 신사라고 평하고 있다. 만약 런던이나 파리 시내에서 만났으면 이란인인줄 몰랐을 거라고. 이동원 장관에게 팔라비가 이란의 발전상에 대해 한참을 자랑하자 약간 약이 오른 이동원 장관이 "폐하, 이란을 너무 발전시키면 이란 국민들이 폐하보고 물러나라고 하는 거 아닙니까?"라고 농담을 했는데 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설마 그럴 일이 있겠냐면서도 국민들이 군주제에 반대할 정도로 발전한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참고로 동생 압둘 레자 팔레비는 사냥 매니아였는데, 1974년 북한으로 사냥 여행을 떠나 호랑이를 잡은 적이 있다. 시베리아호랑이 항목 참조.

1977년에는 자신을 키루스 2세의 후계자로 선언하며 1977년 기준으로 1억 달러를 지출한 초호화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거액이 2022년 기준으로는 약 4.1억 달러(한화로 약 4920억 원)이나 된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파우지아 빈트 푸아드 이집트 공주
(Fawzia Fuad of Egypt, 1939년 결혼, 1948년 이혼)
1녀
샤나즈 팔라비
(Shahnaz Pahlavi)
1940년 10월 27일
생존 (83세)
슬하 1남 2녀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크티아리
(Soraya Esfandiary-Bakhtiary, 1951년 결혼, 1958년 이혼)
자녀 없음
파라 디바
(Farah Diba, 1959년 결혼)
1남
레자 팔라비 황태자
(Reza Pahlavi, Crown Prince of Iran)
1960년 10월 31일
생존 (63세)
슬하 3녀
2녀
파라나즈 팔라비
(Farahnaz Pahlavi)
1963년 3월 12일
생존 (61세)
미혼
2남
알리 레자 팔라비
(Ali Reza Pahlavi)
1966년 4월 28일
2011년 1월 4일
슬하 1녀
3녀
릴라 팔라비
(Leila Pahlavi)
1970년 3월 27일
2001년 6월 10일
미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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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질적으로는 1월 16일까지.[2] 팔라비 왕조의 군주들 모두 카자르 왕조 시절 태어났고, 즉 팔라비 왕조 시절 태어난 팔라비 왕조 군주는 없다.[3] 푸아드 공주는 이후 이집트 배우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1남 1녀),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다가 2013년 91세로 사망했다.[4] 소라야 왕비는 2001년 69세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이혼 이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듯.[5] 이란이 서방 국가들과 사이가 틀어진 후 이 747SP는 2010년대까지 굴려먹게 된다. 그리고 2010년 단항전까지 인천-테헤란 정기편에 고정 투입되던 기종이였다. 사실 당연하게도 이는 이란이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국가였기에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특히 이란은 최전선 중에서도 소련의 핵심지역인 캅카스 지방과 인접하고 있다.[6] 특히 모하마드 국왕이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강남개발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테헤란 역시 한참 팽창하던 단계라서 지속적인 개발을 통해 주거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7] 왕당파[8] 명목상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하지만 5공 때의 관제야당이나 공산국가의 우당을 생각하면 된다.[9] 단순히 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홍해를 통해 석유를 팔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때의 이스라엘과 이란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사실 종교적인 감정 이외에도 팔라비 왕조는 이전부터 뒷구멍 무역을 통해 부정축재를 일삼았던 전적이 꽤나 많았다. 대표적인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석유를 팔다가 영국과 소련에게 발각돼서 나라가 절단이 날 뻔한 적이 있다.[10] 투데(Tudeh) 당이라고도 한다. 1949년에 팔라비를 암살하려다 부상만 입히고 실패한 전적이 있다. 이슬람 공화국 치하에서 금지당하고 지금은 유럽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11] 사실 이는 선대 레자 팔라비 시절인 1936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물론 선대와는 달리 히잡 착용을 빡세게 금지시키지는 않았다.[12] 이란 최후의 세속주의 총리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1991년 파리에서 이란 신정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암살당한다.[13] 5월에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14] 같은 군주국이라 잘 대해줄 거라고 믿었지만 당시 모로코의 국왕이던 하산 2세가 망명 조건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하자 떠나버렸다.[15] 카터 대통령은 팔레비를 질색했지만 키신저와 록펠러 가문의 로비로 받아들여줬으나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터지면서 나가라고 압력을 주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록펠러 가문 소유의 맨해튼 체이스 은행은 이란 황실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인질 사건과 그 후 제재 과정에서 비자금을 꿀꺽한다[16] 멕시코와 비교적 우호적인 쿠바가 미국의 꼭두각시를 받았다고 비난하고, 새 이란 정권과의 관계도 신경써야 했던 멕시코 정부가 떠나라고 압력을 줬다. 멕시코는 전통적으로 외교에서 불간섭주의를 펴는 나라인걸 감안해야 한다[17] 파나마의 실권자였던 오마르 토리요스도 팔라비를 싫어해서 좌익 성향의 교수를 팔라비가 있는 병실에 눌러 앉혀 팔라비를 계속 비난하게 했다.[18] 자신과 절친했던 이집트의 독재자인 안와르 사다트 덕이 컸다. 특히 사다트는 팔레비와 그의 가족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주는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안와르 사다트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한 원인이 바로 팔라비를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그가 암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란 정부는 사다트 암살범을 영웅 대접해주었다고.[19] 사다트의 장례식에 지미 카터, 제럴드 포드, 리처드 닉슨 미국 전직 대통령들과 이스라엘,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등 많은 서방 국가들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20] 샤의 첫 부인 푸아드 공주의 오빠이다. 즉 한때는 손위 처남-매부 관계였던 셈. 물론, 나세르의 쿠데타 당시에 샤와 푸아드 공주는 이미 이혼한 상태[21] 단, 파루크 1세의 경우 옛날에 자기 여동생하고, 매제의 보물을 훔친것도 모자라서 레자 샤 팔라비의 장례식때 관속에서 보물을 훔쳐간 이력이 있었다.[22] 출처는 오! 이런 이란. 책지은이도 이 소식을 듣고 그 해당 미술관으로 가봤지만 지하에 비공개로 있다는 말만 듣었다.[23] 이 사람은 딸만 셋이라 (현재로서는) 그가 죽으면 가문의 수장은 샤의 조카(샤의 남동생의 아들)가 된다고 한다. (영문 위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