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올로고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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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1. 배경
2.2. 1321년
2.3. 1322년
2.4. 1327~28년
2.5. 이후
3.1. 배경
3.2. 1341년
3.3. 1342년
3.4. 1343~45년
3.5. 1345~47년
3.6. 결과
4.1. 배경
4.2. 전개
4.3. 결과
5.1. 배경
5.2. 1373년
5.3. 1376~79년
5.4. 결과
6.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말기의 내전. 제국 최후의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 발발한 내전으로, 총 4차례 발생했다. 로마 제국은 이 내란으로 인해 회생 불가 상태에 빠져 오스만 술탄국에게 멸망당했다.


2. 1차 내전, 조부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v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편집]



2.1. 배경[편집]


1261년 7월 25일, 동로마 제국의 망명국인 니케아 제국 황제 미하일 8세라틴 제국을 축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써 1204년 4월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일시적으로 멸망했던 로마 제국은 50여 년 만에 부활했다. 그러나 미하일 8세는 지나친 정복 사업과 외교 실패로 인해 제국 주변국을 전부 적으로 돌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결국 제국은 모든 전선에서 전쟁을 치루는 상황에 직면했고, 자연히 국력은 쇠진해지며 재정은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미하일 8세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해군을 제노바, 베네치아에게 맡기는 등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군대를 감축하고, 주변국과의 외교를 개선하며 경제를 살리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하는 등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도리어 세금 증대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곳곳에서 폭동을 벌이면서 제국의 상황은 갈수록 위태로워졌다.

급기야 1299년 오스만 베이국를 건국한 오스만 1세는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1302년 제국군은 바페오스 전투에서 튀르크군과 맞붙었으나 알란 용병대와 현지 민병대간의 호흡이 제대로 맞지 않는 바람에 패배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용병대를 고용, 튀르크에 맞서게 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카탈루냐 용병대는 튀르크인들보다 더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주민들을 짓밟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 여러 번 충돌했다. 급기야 1305년, 그들은 제국을 배신하고 튀르크군과 합세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실리아를 파괴한 후 아테네 공국과 테베를 정복하고 그곳에 눌러 앉았다.

오스만 1세는 카탈루냐 용병대의 횡포로 제국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아나톨리아 반도를 공격했고 얼마 안가 비티니아 일대 대부분이 오스만 1세와 그의 후계자인 오르한 1세에게 넘어갔다. 여기에 불가리아 제국도 1305~1307년에 남하하여 북부 트라키아 일대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렇듯 제국은 외세의 침략으로 위태로운 지경에 몰렸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던 중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와 갈등을 빚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버지 미하일 9세아르메니아의 마리아에게서 네 아이를 얻었는데, 그 중 맏아들이었던 안드로니코스 3세가 1316년 2월에 19살의 나이로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안드로니코스 3세는 곧 극심한 정서 불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술과 도박에 탐닉했고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는 제위에 오른 이듬해에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아들라에데(브라운슈바이크의 이리니)라는 독일 귀족 여성과 결혼했지만, 얼마 안가 아내에게는 관심을 끊고 방탕한 삶을 누렸다.

급기야 1320년, 안드로니코스 3세는 대형 사건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의 정부 한 명이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의심한 그는 그녀의 집 근처에 염탐꾼을 숨겨 놓았다. 그러다가 동생 마누일이 자신의 정부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짐작한 그는 급기야 동생을 붙잡아 살해해버렸다. 이 소식을 접한 미하일 9세는 마침 이 시기에 숨을 거둔 딸 안나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다는 소식은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줬다. 결국 그는 기력이 쇠해 10월 12일 테살로니카에서 죽었다. 이에 격노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와 의절하고 자신의 막내 아들인 콘스탄티노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를 멸망으로 내몬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2.2. 1321년[편집]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부활절에 수도를 탈출해 아드리아노플로 도피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정부를 세우고 할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금을 매년 증액했지만 세수입을 카탈루냐 용병대와 튀르크에 공물로 지불하고 그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았다. 이 때문에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면서 외세에게 공물을 헌납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귀족과 지주 계층의 젊은 세대들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란에 호응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군사 귀족의 지도자였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요안니스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테살리아에 방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명망높은 귀족이었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와 어렸을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였다. 그는 모계 쪽으로 미미한 황실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아버지는 쿠만족의 후손이었다. 시르얀니스와 요안니스는 트라키아의 총독직을 사들인 다음 중과세에 신음하고 있던 현지 주민들의 불만을 선동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한 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트라키아 속주 전역에 세금을 완전히 면제해주는 등 온갖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고, 백성들은 기뻐 날뛰며 안드로니코스 3세를 받들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반란의 물결이 제국 전역에 번질 것을 우려해 협상에 나섰다. 그 결과 양측은 6월 6일에 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예전처럼 보스포루스에서 다스렸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아드리아노플에 자리잡았다. 다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제국의 대외 정책은 자신이 혼자서 맡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취하기로 했고, 그러다보니 얼마 안가서 서로 다른 두 제국이 전혀 다른 정책, 심지어 상충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가 오래 갈 수 없었고, 결국 양측은 충돌했다.


2.3. 1322년[편집]


1322년 초, 시르얀니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젊은 안드로니코스 3세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고 여겨 그를 시기하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잠입해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손자에게 따끔한 교훈을 가르치라고 부추겼다. 이리하여 양측은 또다시 충돌했지만 얼마 안가 안드로니코스 2세가 전쟁을 끝내자고 제의했다. 그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이 너무 자주 일어나자 이러다가는 자칫 보유하고있는 영토마저 잃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1322년 7월, 두 황제는 두 번째 협정을 맺었다. 두 안드로니코스는 제국을 공동으로 다스리기로 합의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단독 상속자로 추인받았다. 하지만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선임 황제의 지위를 유지했고 손자의 정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보유했다.

이렇게 해서 평화를 수립하긴 했지만, 외세는 제국이 회복할 틈을 주지 않았다. 1326년 4월 6일, 오스만 베이군이 7년간의 포위 끝에 부르사를 함락하고 수도로 삼았다.(부르사 공방전) 게다가 안드로니코스 2세의 조카인 테살로니카 총독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가 제국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한 후 직접 세르비아 궁정으로 떠나 자신의 사위였던 세르비아 왕 스테판 데칸스키에게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제국에겐 다행스럽게도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는 스코페에 도착한 직후 돌연 사망했다. 이로써 제국의 임박한 위험은 물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1327년 가을, 또 다시 내란이 터지고 말았다.


2.4. 1327~28년[편집]


1327년 2월, 세르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국이 무력 충돌을 벌였다. 이때 세르비아 국왕이었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동맹 관계였고,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는 스테판의 누이인 첫 아내와 이혼하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누이인 테오도라와 결혼한 후 안드로니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런 상황에서 발칸 반도의 두 강국이 충돌하자,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도 그해 가을에 전쟁에 뛰어들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가는 곳마다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1328년 1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함께 테살로니카로 가서 황제로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와 성들도 그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그는 봄에 우기가 끝나는 대로 수도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가 그를 배신하고, 불가리아 기병 3천 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수도를 방어하게 했다는 것이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각 선발대를 이끌고 불가리아 기병대에게 다가갔다. 그는 불가리아 기병대 지휘관에게 철군 명령을 내리라면서, 불과 1년 전에 차르와 맺은 동맹을 정면으로 위반할 셈이냐고 따졌다. 이후 그는 후위에서 오는 본대를 기다렸다. 이런 안드로니코스 3세의 태도에 난감해졌는지, 불가리아 기병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철수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함선들이 무력 충돌을 벌였다. 급기야 베네치아의 함선 40척이 4월 내내 갈라타와 보스포로스 입구를 차단하는 바람에 수도의 주민들은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가까스로 들여온 소량의 식량은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 오래전부터 중과세에 시달려 온 일반 백성으로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황제의 인기는 나날이 곤두박질쳤고 그의 권위는 점점 불안정해졌다.

1328년 5월 23일 밤, 안드로니코스 3세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공성용 사다리를 든 병사 24명을 거느리고 로마노스 성문 맞은 편 대형 보루의 벽을 기어올랐다. 수도 내부의 공모자들이 밧줄을 내려 사다리를 끌어올리자, 병사 몇 명이 성벽을 넘어 들어가 성문을 열었다.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은 별다른 희생 없이 함락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폐위되었고, 그의 참모였던 테오도로스 메토키테스는 재산을 몰수당하며 코라에 있는 성 구세주 수도원으로 축출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안드로니코스 2세는 수도에 입성한 후 자신을 보러 온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악마는 이 세상이 생겨났을 때부터 늘 인간을 해치려 했지. 언제나 그 자신의 의도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의도는 대체로 성공했단다."


그렇게 권좌에서 물러난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32년 2월 13일에 7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2.5. 이후[편집]


몇차례에 걸친 내전 끝에 할아버지를 몰아내고 단독 황제에 등극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제국에겐 천만 다행히도 국가를 수습할 능력이 있는 명군이었고 휘하에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라는 명신도 있었다. 그는 1328년 단독 황제가 된 이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보좌를 받으며 제국을 나름 잘 다스렸다. 그는 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매관매직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고위 공직자의 탈세를 엄중히 감시했다. 특히 1337년엔 부정부패 단속을 맡은 '보편 법관' 네 명 가운데 세 명을 뇌물을 받은 혐의을 적용해 직위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 또한 황제는 외세에게 공물을 납부하며 고분고분하게 대하던 안드로니코스 2세 시절의 유화책에서 탈피해 강경책을 꺼내들었다.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가 트라키아를 침략하자,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보복에 나서 불가리아의 요새 한 곳을 점령했다. 이후 양측은 무력 충돌을 벌이다가 강화 조약을 맺고 향후 2년간 상호간 침략 행위를 금지하기로 했다. 이후 1330년 7월 28일 불가리아 군대가 벨버즈드 전투에서 스테판 데칸스키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에게 궤멸되고 차르 본인도 전사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누이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불가리아에게 넘겨줬던 메셈브리아와 앙키알루스 등 흑해의 항구들과 국경 주변의 요새 몇 군데를 점령했다.

그러나 1331년 세르비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권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제국을 침략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마침 자신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불가리아의 차르 요한 알렉산더르와 결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요한 알렉산더르는 빼앗긴 흑해의 항구들을 손쉽게 되찾았고,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남쪽의 제국 영토로 꾸준히 밀고 내려갔다. 설상가상으로,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가 1334년에 제국을 배신하고 세르비아 진영으로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르얀니스는 이보다 앞서 안드로니코스 3세를 배신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편으로 넘어갔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안드로니코스 2세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안드로니코스 3세가 단독 황제가 된 뒤 시르얀니스를 사면해주고 테살로니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그는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음해하는 공작을 폈다가 발각되자 아예 세르비아로 도망친 것이었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시르얀니스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줬다. 이에 시르얀니스는 1334년 봄에 카스토리아와 그 일대의 요새 여러 곳을 점령해 은혜에 보답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를 테살로니카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해 시르얀니스를 유인한 후 생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스프란체스는 임무를 완수했다. 다만 생포하지 않고 현장에서 죽여버렸기에 견책 처분을 받았다가 곧 대 스트라토페다르크의 서열로 승진되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과 협상한 끝에 세르비아와 헝가리와의 싸움을 제국이 지원해주는 대가로 시르얀니스가 점령했던 영토를 제국이 반환받는 협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제국을 나름대로 잘 다스리던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41년 6월 15일 열병에 걸려 나흘 간 신음한 끝에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직후 제국은 또다시 내란에 휩쓸리게 된다.


3. 2차 내전,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v 권신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편집]



3.1. 배경[편집]


1341년 6월 15일, 안드로니코스 3세는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아홉살이었던 아들 요안니스 5세가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그가 공동 황제였던 적은 없었기에 법적 공백이 생겼고, 사람들은 누가 제국의 정부를 이끌 것인지에 관심을 집중했다. 당시 내무대신이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최측근이었던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요한니스 5세와 안나 황후에게 무장 경호원을 배치하고, 원로원을 설득해 요안니스 5세를 황제로 즉위시키게 했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말년에 집필한 역사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제위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공동 황제를 몇 차례 제의했을 때도 모두 거절했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은 뒤 어린 황태자와 황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5세와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 입장에서는 그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딸 엘레니 칸타쿠지니와 요안니스 5세를 결혼시킬 것을 요구했으며, 안드로니코스 3세 생전에 공식적으로 요안니스 5세의 섭정으로 지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위 승계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며 어린 황태자와 황후 주변에 경비병들을 배치해 사람들로부터 사실상의 섭정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요안니스 5세와 안나 황후가 위협을 느끼지 않으리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급기야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부하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로부터 제관을 받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요안니스가 거부하자, 아포카브코스는 옛 상사에게 등을 돌리고 오히려 그를 몰락시키고자 했다. 아마도 제관을 받을 것을 권유한 사실을 요안니스가 발설할까봐 그를 사전에 제거하려 했던 듯하다. 요안니스 칼레카스 총대주교도 요안니스 칸다쿠지노스의 정적이었다. 총대주교는 칸타쿠지노스 덕분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칸타쿠지노스가 자신을 재치고 어린 황제의 섭정이 된 것이 아니꼬왔고 일전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원정을 떠날 때 자신을 두 차례나 섭정으로 임명한 바 있었으니 자신이 섭정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던 1341년 7월 중순, 요안니스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자비를 들여 군대를 충원한 후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 불가리아의 요한 알렉산다르, 오스만 베이국의 오르한과 두루 조약을 맺어 평화를 이룩한 후 9월에 수도로 귀환했다. 얼마 후, 아카이아 공국이 제국에게 귀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9월 23일 트라키아로 갔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트라키아로 떠난 순간, 그의 적들은 한데 뭉쳐 내무대신을 반역자로 규정지었다. 칸타쿠지노스 본인은 그들이 자신을 시기했기에 이런 배신을 저질렀다고 주장했지만, 요안니스 5세와 안나 황후 측의 입장에서 보면 칸타쿠지노스는 그냥 내버려두기엔 너무 위험한 권신이었다. 그 자신은 찬탈할 의사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하는 행동을 보면 황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이렇듯 강대한 권력에 오른 권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례는 부지기수였으므로, 이들이 위협을 느끼고 제거하기로 결정하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의 적들은 상황 파악을 잘못하고 일을 지나치게 크게 벌였다. 기왕 제거하기로 결정했으면 칸타쿠지노스가 군대를 이끌고 있지 않은 시기를 노렸어야 했지만, 그들은 칸타쿠지노스가 자비로 모은 병사들을 이끌고 트라키아로 갔을 때 숙청을 단행했다. 더구나 군중을 선동해 요안니스의 저택을 약탈 및 방화하고 시골 영지를 몰수한 데다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전체를 연금해버리는 등 지나친 어그로를 끌었다. 이에 격분한 칸타쿠지노스는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1341년 10월 26일에 황제를 자칭했다. 이로서 2차 내전이 발발했다.


3.2. 1341년[편집]


1341년 11월 반란을 일으킨 칸타쿠지노스는 곧 위기에 직면했다. 민중이 그에게 적의를 드러낸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수도와 여러 속주에서는 빈민들과 귀족 세력이 심한 불화를 빚고 있었다. 빈민들은 거액의 세금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귀족들은 세금을 회피하고 이미 만연한 부정부패를 최대한 이용해 부를 축적했다. 이에 대다수 백성들의 가슴에는 불만과 원한이 사무쳤다. 그러던 와중에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의 선동으로 칸타쿠지노스의 저택을 약탈한 빈민들은 평소에 구경도 하지 못한 귀중품들을 발견하자 칸타쿠지노스를 부와 특권을 지닌 계층의 대표자로 간주하고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삽시간에 널리 퍼졌고, 아드리아노플에서는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귀족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그들의 재산을 약탈했다. 급기야 칸타쿠지노스가 거점으로 삼은 트라키아 전역에서 무장 봉기가 속출했으며, 테살로니카에서는 칸타쿠지노스의 옛 친구 테오도로스 시나데누스 총독을 몰아낸 젤로트당이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7년간 테살로니카를 독립 공화국처럼 지배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칸타쿠지노스는 아이딘 공국의 아미르인 우무르에게 긴급 전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세르비아의 국왕 스테판 두샨에게 의탁하고자 했다. 이때 그는 병사들에게 자신을 따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고, 대부분의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2,000명의 병사들만이 그와 함께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황제 참칭자로 전락하는 듯했지만 스테판 두샨이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면서 상황이 점차 호전되었다.


3.3. 1342년[편집]


1342년 7월, 스코플례 부근의 프리슈티나에서 스테판 두샨과 만난 칸타쿠지노스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두샨의 말에 안심했다. 두샨은 제국의 내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칸타쿠지노스를 보호해주겠다고 나섰고 선의의 표시로 칸타쿠지노스가 디디모티쿰으로 돌아가는 길에 용병 부대를 붙여줬다.그러나 중도에 세레스에서 가로막히자 포위 공격했으나 전염병이 돌아 정예병 1,500명이 몇 주 만에 죽는 바람에 세르비아로 도망쳤다. 그는 세르비아에서 지지 세력을 규합했고, 크리스마스 직전 우무르가 파견한 함대가 에게해를 거쳐 마리차 강 어귀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1342년부터 1343년 사이의 겨울에 테살리아 속주가 칸타쿠지노스의 지지를 선언했고, 1343년 봄에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중요한 도시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3.4. 1343~45년[편집]


1343년, 우무르가 친히 이끄는 200척의 아이딘 공국 함대가 테살로니카로 쳐들어왔다. 여기에 칸타쿠지노스가 세르비아의 지원에 힘입어 국경 지대를 돌파하고 디디모티쿰까지 진군하여 가족과 거의 1년 만에 재회했다. 상황이 이렇듯 안좋아지자, 안나 황후는 1343년 여름에 사부아 출신의 기사 한 명을 아비뇽으로 보내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구원을 호소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에게도 지원을 호소했다. 심지어 그녀는 1343년 8월에 금화 3만 두캇을 빌리는 조건으로 베네치아 측에 동로마 제관의 보석들을 저당잡히는 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노력이 헛되게도 아비뇽, 제노바, 베네치아 어디에서도 구원군이 오지 않았다.

1344년, 트라키아의 장군 요안니스 바타치스가 칸타쿠지노스에게 항복했다. 2달 뒤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의 아들 마누일도 변절했고 이듬해(1345) 초 아드리아노플이 칸타쿠지노스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아포카브코스는 공포 정치를 실시했다. 그는 늘 많은 경호원을 거느리고서야 집을 나섰고,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들을 속속히 체포해 고문을 가했으며, 오랫동안 페허로 남아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궁의 일부를 감옥으로 개조하여 그들을 수용했다. 그러던 1345년 6월 11일, 그는 건축 공사 현장을 감독하다가 측근 한 명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경호원들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때 공사에 투입되어 있던 죄수들의 습격으로 목이 베어졌다. 죄수들은 그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 감옥의 벽 위에 자랑스럽게 전시했고 경호원들은 겁에 질려 달아났다. 이튿날, 아포카브코스의 부하들이 죄수들을 습격하여 200여 명을 학살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칸타쿠지노스에게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야심 가득한 스테판 두샨이 칸타쿠지노스에게 등을 돌리고 마케도니아 공략에 나섰다. 이에 칸타쿠지노스는 병력의 일부를 빼서 세르비아군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우무르의 아이딘 함대는 1344년에 출동한 교황의 동맹군에게 스미르나 항구를 빼앗기고 함대가 파괴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모면하고 내전에서 하루속히 이기기 위해, 칸타쿠지노스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과 직접 만났다. 오르한은 칸다쿠지노스의 딸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는 대가로 칸타쿠지노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넘기기로 했다.


3.5. 1345~47년[편집]


1346년 5월 19일,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동쪽 일부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은 이것이 신이 자신들을 버리려 하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총대주교는 신망을 잃어버렸고, 시민들은 칸타쿠지노스가 돌아오길 희망했다. 한편 칸타쿠지노스는 5월 21일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라자루스로부터 아내와 함께 제관을 받음으로서 공식적으로 황제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맏아들인 마테오스가 공동 황제로 임명되는 것에는 한사코 반대하며 그 자리는 그가 아직도 적법한 군주이자 선임 군주로 여기고 있는 요안니스 5세의 몫이라고 밝혔다.

1347년 2월 2일, 칸타쿠지노스는 수도 내부의 협력자들의 힘을 빌려 수도에 입성했다. 이튿날 아침, 그는 병력을 블라케르나이 궁전 앞에 집결시키고, 황후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러나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가 자신과 네 명의 아이를 죽이려 한다고 믿고 그를 한사코 궁전에 들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요안니스의 일부 추종자들이 인내심을 잃고 궁전을 습격하자, 경비병들은 황후의 명을 어기고 궁전의 문을 열었다. 닷새 뒤인 2월 8일, 양측 간의 합의가 이뤄졌다. 향후 10년 동안 두 황제는 공동으로 제국을 지배하기로 했고 칸타쿠지노스가 선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두 황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지기로 했다.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는 추방되었지만 다른 정치범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각자의 재산은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신임 총대주교에 발탁된 이시도루스 부카리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이리하여 칸타쿠지노스는 1347년 5월 21일 블라케르나이의 성모 성당에서 두번째 대관식을 치렀고, 1주일 뒤 칸타쿠지노스의 막내딸 엘레니 칸타쿠지니도 같은 성당에서 요안니스 5세와 결혼했다. 다만 두 황제가 써야 하는 보석 제관은 베네치아에게 저당잡혀 있어서 유리로 된 관을 써야 했다.


3.6. 결과[편집]


1341년 말부터 1347년 2월까지 전개된 2차 내전은 동로마 제국의 분열을 심화시켰고, 세르비아 및 튀르크에 대한 의존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제국의 국력은 실추되었고 외세는 더욱 팽창했다. 특히 스테판 두샨은 내전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확장시켰고, 스스로를 로마의 진정한 황제로 자처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은 5년 여에 걸친 내전을 거치면서 농촌이 황폐화되었고, 각 도시들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특히 테살로니카는 무려 7년 동안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공화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했다. 이리하여 제국은 주변의 국가들이 성장하는 걸 막지 못할 뿐더러 자국을 방위하기에도 벅찬 지경에 내몰렸다. 여기에 1347년 흑사병이 돌면서 제국의 세금 및 징병 기반이 더욱 축소되면서 국력이 더욱 쇠진해졌다.

그래도 이쯤에서 내전이 끝났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것이다. 칸타쿠지노스는 탁월한 통치자이자 군략가로 제국을 능히 이끌만 했다. 만약 요안니스 5세 지지 세력과 칸타쿠지노스가 끝까지 협력하여 제국을 재건했더라면, 제국은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회복되어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에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에게는 불행하게도, 불과 5년 뒤 또다시 내전이 터지고 말았다.


4. 3차 내전, 장인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v 사위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편집]



4.1. 배경[편집]


1347년 내란을 마무리하고 공식적으로 제국의 황제가 된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이하 요안니스 6세) 세르비아 제국의 차르 스테판 두샨의 영토 확장 정책, 1347년의 흑사병, 튀르크군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맏아들 마세오스에게 디디모티쿰과 크리스토폴리스 사이, 세르비아의 국경과 면해 있는 트라키아를 보존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차남인 마누일에게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또한 그는 함대를 조직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 했지만 겨우 5만 히페르피라만 확보했고, 부자들은 더이상 희생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외국 상선들이 기존의 갈라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게 만들기 위해 수입 관세를 대폭 삭감했다.

이에 갈라타를 도맡았던 제노바인들이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348년 8월 소함대를 파견해 황금뿔 주변의 동로마의 선박들에 불을 질렀다. 이에 칸타쿠지노스의 아내 이리니는 차남 마누일, 사위 니키포로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항전을 선도했다. 시민들은 해안가에 있는 제노바의 창고들에 불을 지르고, 바위와 불붙은 짐짝들을 갈라타로 집어던졌다. 이후 양측은 몇 달 동안 격렬하게 싸웠고, 마침내 제노바는 제국에 전쟁 배상금으로 10만 히페르피라를 지불하며 그동안 불법으로 점유해오던 갈라타 뒤편의 토지를 반환했다. 그후 요안니스 6세는 7년간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테살로니카를 탈환하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을 지켜본 후 승자인 제노바와 화평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렇듯 정열적으로 통치하던 요안니스 6세는 1352년 무렵 사위인 요안니스 5세와 대립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젊은 황제는 더는 장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요안니스 6세는 이런 사위의 야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내란이 또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트라키아의 큰 몫을 떼어줬다. 트라키아는 요안니스 6세의 맏아들 마세오스의 관할이었으므로, 요안니스 6세는 마세오스에게 아드리아노플과 그 주변의 영토를 할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을 빼앗긴 마세오스는 요안니스 6세를 미워했다. 결국 양 측은 또다시 무력 충돌을 벌였다.


4.2. 전개[편집]


1352년 여름, 요안니스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처남인 마세오스의 영역을 침범해 아드리아노플을 포위했다. 마세오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 1세로부터 상당 규모의 튀르크 병력을 빌려서 아드리아노플로 파견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손을 빌렸고, 스테판 두샨은 이를 받아들여 기병 4천 명을 파견했다. 양측은 마리차 강에서 격돌했고, 튀르크군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튀르크군은 약탈 허가를 얻고 인근의 소도시와 촌락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로 인해 요안니스 6세는 이겨놓고도 인기가 폭락하는 상황에 놓였다.

1353년 4월,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 마세오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대가 끊긴 것은 아니라면서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상속권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가족을 테네도스 섬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총대주교 칼리스투스는 마세오스의 대관식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요안니스 6세를 파문한 뒤 총대주교 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엔 제노바 측의 도움을 받아 테네도스 섬으로 도주했다. 마세오스와 그의 아내 이리니는 1354년 2월에야 비로소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마저 그 뒤에 이어진 눈보라와 홍수로 인해 사망했다. 한때 대도시였던 갈리폴리는 거의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 튀르크군은 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최대한 거느린 채 트라키아로 이주, 버려진 도시들에 터전을 잡았다. 대다수는 페허가 된 갈리폴리로 갔고, 곧이어 더 많은 튀르크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이리하여 제국은 트라키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요안니스 6세는 튀르크 측에 영토를 반환하라고 요구했으나 튀르크인 이주를 주도한 슐레이만 파샤는 알라의 뜻에 따라 도시를 점유한 것이니 제국에 넘겨주면 불경스러운 행위가 되는 것이라며 묵살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요안니스 6세는 사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테네도스 섬으로 갔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그가 탄 배를 받아주지 않았고 사위 역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요안니스 6세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무기력한 심정으로 사태의 변화를 지켜봤다. 1354년 11월 21일, 요안니스 5세는 테네도스 섬을 빠져나와 헬레스폰트를 빠르게 거슬러 가서 마르마라 해로 들어갔다. 11월 22일 이른 시각에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입성하는 데 성공하고 신속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날이 밝자 군중은 이미 거리에 나와 그의 이름을 외쳤고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다. 요안니스 6세의 집은 또다시 약탈과 방화를 당했고, 그의 지지자들이 사는 집도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요안니스 5세는 소피아 대성당 맞은편의 옛 황궁을 임시 거처로 삼고 장인과 대치했다.

11월 24일, 요안니스 5세는 장인에게 사자를 보내 만나자고 제의했다. 이후 이어진 협상에서, 그는 장인에게 에전처럼 공동 황제로서 함께 제국을 다스리자고 제안했다. 요안니스 6세는 이에 따라 요안니스 5세를 공동 황제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요안니스 6세는 12월 10일 블라케르나이에서 제관을 내려놓고 황제만 착용하는 예복과 자주색 장화를 벗은 후 은퇴를 선언하고 수도원에 은거했다. 황후 이리니 아사니나 역시 황후복을 벗고 키리아 마르타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에서 거점을 갖추고 있던 요안니스 6세의 맏아들 마세오스는 이에 불복하고 황제를 칭하며 매제인 요안니스 5세에게 맞섰다. 그러던 1356년 말 또는 1357년 초, 그는 세르비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인들이 내건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마세오스를 데려왔다. 이후 마세오스는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그의 아우 마누일이 있는 모레아로 갔다. 이렇게 해서 3차 내전이 막을 내렸다.


4.3. 결과[편집]


35년간 제국을 살리기 위해 애썼던 요안니스 6세는 3차 내전으로 몰락했다. 하지만 장인을 무찌르고 단독 군주에 오른 요안니스 5세는 내전의 여파에 직면해야 했다. 튀르크인들은 이제 아나톨리아 반도를 넘어 트라키아에 정착해 발칸 반도를 석권할 기반을 다졌다. 이제 제국은 자력생존할 기반을 거의 잃어버리고 외세에 의존하여 생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5. 4차 내전, 아버지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v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편집]



5.1. 배경[편집]


1354년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요안니스 5세는 튀르크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대가로 교황으로부터 지원군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정교회를 신봉하는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만 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굴복하고 튀르크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오기 위해 서유럽을 견문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1373년 서유럽 견문을 마치고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던 요안니스 5세는 불가리아에 의해 억류되었다. 당시 그의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는 부황의 구원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 동안 억류되었던 요안니스 5세는 가까스로 벗어난 뒤 안드로니코스 4세를 폐위시키고, 차남 마누일을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이에 격분한 안드로니코스 4세는 쿠데타를 결심했다.


5.2. 1373년[편집]


1373년 5월,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 베이국의 부하로서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가 수도를 비운 틈을 타 안드로니코스 4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무라트 1세의 아들 사우지와 결탁하여 봉기했다.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금세 진압되었다. 격노한 무라트는 사우지를 실명시키고, 요안니스 5세에게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물론 안드로니코스 4세의 어린 아들까지 실명시키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 5세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약간의 자비를 베풀었다. 두 부자는 한쪽 눈만 잃은 채 콘스탄티노플에 감금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 4세의 제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 제위 상속자가 된 스물 세 살의 마누일은 테살로니카에서 황급히 소환되어 9월 25일에 공동 황제가 되었다.


5.3. 1376~79년[편집]


1376년 3월, 요안니스 5세는 베네치아에게 테네도스 섬을 양도하는 대가로 3만 두카토를 받고, 제관의 보석들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러자 제노바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베네치아가 테네도스 섬을 양도받기 전에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376년 7월, 제노바인들은 안드로니코스 4세를 감옥에서 탈출시켰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비밀리에 갈라타로 간 후 무라트와 접촉하여 기병과 보병 혼성군을 얻었다. 그는 그 군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한 달 동안 포위한 뒤 뚫고 들어갔다. 요안니스 5세와 나머지 황족들은 금문의 요새에서 며칠 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그들을 자신이 얼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아네마스 탑에 가두었다. 그 후 그는 테네도스 섬을 제노바에 양도했고, 1377년 10월 18일에 정식으로 즉위하며 어린 아들을 공동 황제인 요안니스 7세로 삼았다. 그러나 테네도스 섬의 동로마 총독은 제노바에게 넘기기를 거부하고, 베네치아의 함선이 오자 기꺼이 섬을 넘겨줬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4세는 신의를 내보이기 위해 제노바가 그 섬을 무력으로 탈취하는 것을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제노바는 베네치아에게 패배해 끝내 테네도스 섬을 얻지 못했다.

한편, 무라트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복위시킨 뒤, 그를 복위시키는 대가로 갈리폴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이에 따라 1377년 말 갈리폴리를 오스만 베이국에게 헌납했다. 한편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은 아네마스 탑에 3년간 갇혀 있다가 1379년에 탈출하여 무라트 1세의 진영으로 갔다. 마누일은 무라트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복위시켜 주면 공물과 군사 지원을 더 늘리고 소아시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로마의 거점인 필라델피아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는 이를 승낙해 군대를 규합했고,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한 안드로니코스 4세를 제거하기 위해 소함대를 파견했다. 1379년 7월 1일,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는 하리시오스 대문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입성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에게 도망쳤다. 이듬해(1380),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는 각각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벌였다. 무라트는 겉으로는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를 지원했지만 암암리에 안드로니코스 4세를 지원해 양측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전쟁은 거의 2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1381년 4월에야 비로소 양측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협상 결과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위 계승권을 되찾았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도 장차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5.4. 결과[편집]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부자는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오스만 베이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오스만 베이국은 그런 그들을 취사 선택하면서 이득을 마음껏 챙겼고,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갉아먹었다. 또한 베네치아와 제노바도 제국의 내란을 이용해 이권을 챙기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이에 따라 제국의 상업은 베네치아와 제노바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었다. 이로서 그 거대했던 로마 제국은 '제국'이란 단어가 부끄러울 정도로 쇠락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영역 정도에 국한된 소국으로 축소되었고, 로마 황제는 오스만 베이국의 봉신이 되었다. 이제 동로마의 멸망은 시간 문제였다. 그럼에도 오스만이 로마를 멸망시키는 건 4차 내전이 끝나고 무려 70년이 지난 1453년의 일이었다.[1]


6. 참고 문헌[편집]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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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그 사이에 티무르의 침공이라는 오스만 입장에서는 불행이, 동로마 입장에서는 행운이 따른 것도 한 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