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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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나 (나바라)
Pamplona





스페인어: Pamplona
바스크어: Iruña(이루냐)[1]
프랑스어: Pampelune
영어: Pampeluna

1. 개요
2. 역사
2.1. 아랍인의 지배
2.2. 프랑크 vs 바스크
2.3. 팜플로나 왕국의 수도
3. 관광


1. 개요[편집]


중세 스페인에 있었던 나바라 왕국의 수도. 스페인 북부 나바라 지방의 주도인 도시다. 중세 스페인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성벽과 성당 등 당시 문화 유산이 잘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끈다. 또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성지 순례객이라면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노상에 있으므로 한번쯤 들러볼 만하다. 현재 인구는 196,000명이다.

축구팬이라면 CA 오사수나의 연고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역사[편집]


도시의 이름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명장인 폼페이우스에서 유래했다. 그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군대와 싸울 때에 숙영지로 쓴 것이 도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폼페이오폴리스(Pompeiopolis)로 불렸고, 나중에 폼파일로(Pompaelo)에서 다시 팜플로냐로 바뀌었다. 고대 후반부터 도시에는 바스크인들이 하산해 정착한 듯하다. 그들이 팜플로나를 부른 '이루냐'는 그들 언어로 '도시'라는 뜻이다.

466년, 472년에 도시는 서고트 왕국의 한 귀족에게 정복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사실상 독립을 유지한 듯 보인다. 581년 서고트 국왕 리우비길드의 군대는 바스크인들을 굴복시켰고 이 시기에 성 페르미노 주교가 비기독교도이던 40,000명의 바스크인들을 3일만에 세례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8세기 초에 서고트 왕국이 내분으로 혼란에 빠지자 팜플로나의 바스크 인들은 재차 독립했다. 711년 로데리크 왕은 도시를 공격했는데 동시에 타리크의 이슬람 군대가 지브롤터에 상륙했다.

2.1. 아랍인의 지배[편집]


서고트 군대는 713년 이후로 사실상 소멸했고 아랍-베르베르 군대는 715년에 팜플로나에 무혈 입성했다. 바스크 인들은 지즈야를 내며 이슬람의 지배 하에 별다른 저항 없이 고분고분 지냈다. 그리고 팜플로나는 무슬림 군대의 아키텐 원정의 기지로 활용되었다. 740년 팜플로나는 코르도바 총독의 직접 지배령이 되었고 755년에는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인들을 공격한 아랍 군대가 패배하기도 했다.

2.2. 프랑크 vs 바스크[편집]


778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가 이베리아 원정을 해 도시에 접근하자 무슬림 영주[2]는 항복했지만 도시는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프랑크 인들은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바스크인들에게 패한다. 781년 아브드 알 라흐만은 팜플로나를 후우마이야 왕조의 영토로 편입했다. 799년에는 아랍인들이 바스크인들과 코르도바 중앙정부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라흐만의 아들인 히샴 1세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806년 팜플로나는 다시 프랑크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다만 812년 루트비히(이후 경건왕으로 즉위)의 실패한 원정 이후 바스크인들은 독립했다.

2.3. 팜플로나 왕국의 수도[편집]


프랑크인들은 824년에 바스크로 원정대를 보냈지만 2차 론세스바예스 전투에서 바스크-아랍(카시 부족)의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이던 에네코 아리차가 왕으로 추대되어 나바라 왕국의 전신이자 바스크 민족의 첫 독립국인 팜플로나 왕국이 세워졌다. 아리차의 어머니는 카시 아랍인과 재혼해 바스크인과 카시 부족은 종교에 상관 없이 서로 잘 지낸 듯하다. 하지만 이 시기의 팜플로나는 요새 마을에 불과했다. 924년에 한 코르도바인은 팜플로나를 '그다지 자연의 축복을 받지 못한 곳'이라고 묘사했다.

게다가 924년 7월 24일에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군대가 도시를 습격, 약탈한 후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10세기 말에는 바이킹의 침공까지 받았다. 이 도시가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11세기부터다. 스페인 서북쪽 갈리시아 지방의 성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가는 순례길(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을 1083년에 열었는데 그 여정에 팜플로나가 위치한 것이다. 피레네 이북의 기독교도들이 몰려들며 도시는 발전했다.

하지만 도시가 커지면서 3개의 구역(나바레리아, 산 세르닌, 산 니콜라스)마다 분쟁이 발생했고 1258년과 1276년에는 유혈 사태로 번지기도 했다. 1423년에 카를로스 3세는 세 구역을 하나로 합쳐서 분쟁을 끝냈다. 그리고 1512년에 스페인 군대가 팜플로나를 함락해 스페인의 도시가 되었다.


3. 관광[편집]


산 페르민 축제(매년 7월 6일 ~ 14일) 때에 '엔시에로(encierro)'라고 하는 소 떼를 풀어놓는 행사로 유명하다.

도시 성벽도 유명하다.[3] 프랑스 국경지대하고도 가깝고 16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카스티야에게 정복당하지 않았던 독자적이었던 동네라 아빌라, 세고비아, 레온 같은데서 볼수 있는 뻣뻣한 중세 초기의 성벽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최근, 근세까지 실전성이 있었던 성형 포병 요새로 되어있는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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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ruñea라고도 쓰는데, 도시라는 뜻이다. '도시'라고만 해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리키는 걸로 다 알아먹었던 동로마 제국처럼 바스크 쪽에서 '도시'라고 하면 나바라 왕국의 수도였던 팜플로나를 지칭하게 됐다.[2] 코르도바의 후우마이야 왕조 대신 바그다드아바스 왕조에 충성한 듯하다.[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