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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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문젯거리?
2.2. 가치
3. 사냥
4. 패장



1. 개요[편집]


패잔병()은 말 그대로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은 병사를 말한다.

유사어로 잔당이라는 표현이 있다. 다만 실상에서는 이쪽이라 함은 계속해서 항전하려는 세력을 일컫고, 패잔병이라 함은 싸울 의지 마저 상실해버린 세력에게 쓰이며 후술에도 나오듯 여러모로 쓰임새가 영 좋지 않다.

패배한 군대를 뜻하는 패군()과 그 의미의 대상을 공유한다. 물론 패군의 경우 남겨졌다는 의미는 다소 퇴색되나 패했다는 의미가 중점인 만큼 사용처는 거의 동일하다.

2. 상세[편집]


전투라는 건 이기는 쪽이 있으면 지는 쪽이 있기 마련이고 지는 쪽의 병력이 모두 전사, 부상당하거나 항복하진 않으므로 살아남아서 도주하는 병사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을 패잔병이라고 한다.


2.1. 문젯거리?[편집]


각종 매체에서 표현되는 패잔병들은 십중팔구 사기가 없다시피하고 규율도 없으며 강간이나 약탈을 일삼는 사실상 강도집단으로 묘사하곤 한다. 마냥 매체에서의 과장도 아닌 게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 패잔병들은 복귀하지 않고 집단 탈영하여 산적이나 마적단이 되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도 있었다.


2.2. 가치[편집]


하지만 제대로 된 지휘관에게 있어서 패잔병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다. 일단은 사람이 귀한 전쟁에서 사지멀쩡한 사람이라는 것부터가 가치가 있는 존재인 데다가 비록 패배해서 사기도 떨어지고 군기가 문란해졌을지언정 어쨌든 전투를 해봤기에 패배를 한것이고 더군다나 적군의 패잔병 사냥을 피해서 도망쳐온 자들이기에 적어도 평균 이상은 하는 병력자원이다. 강제로 끌려오거나 공명심이나 민족주의 따위로 자신만만하게 자원입대한 신병들은 총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엄마를 찾으며 패닉에 빠지지만 패잔병들을 수습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참전 경험이 있는 자들이기에 패닉에 빠지는 비율도 현저히 적고 나름의 전투경험을 살려서 싸우는 숙련, 정예병이 된다. 나치의 국민척탄병 사단도 그때까지도 징병되지 않은 중장년층[1]이나 허약체질자들을 긁어모은 사단은 폐급이었으나 패잔, 부상병들을 긁어모아서 편성한 사단은 숙련, 정예병과 맞먹는 전투력을 냈다.

때문에 전략단위에서의 패잔병 수습은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한 일이다. 예시를 들자면 6.25 전쟁에서 남한이 엄청난 병력의 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산을 지켜낼 수 있었던 건 김홍일 장군이 사실상 혼자서[2] 패잔병들을 긁어모으고 어르고 달래며 재편성하여 3개 사단을 재편성하는데 성공하여 지연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재편성에 실패했으면 그대로 쭉 밀렸을 게 뻔했다.

반대로 일본군은 패배한 자들에게 할복을 강요하거나 자살 공격에 투입하는 등이 귀하디 귀한 자원을 그대로 낭비해버렸고 그 결과는 처참한 패배와 집단 탈영이였다. 위에 써있는 마적단도 패배의 책임으로 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탈영한 것이니 말 다했다.

또한 옛날 신라임전무퇴로 대변되는 화랑 정신을 앞세워 전쟁에서 패배하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벌레 보듯이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이 당과의 전투에서 지고도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부모로부터 의절당했다.[3]

하지만 이렇게 귀한 자원을 제대로 쓰기 위해선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휘관이라는, 마찬가지로 귀한 자원이 있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생존 장교를 중심으로 행동하면서 본대 복귀를 원하는 장병들이야 금방 재편성이 가능했지만 장교도 뭣도 없이 졸병들끼리 헤매는 병력들은 재편성이 쉽지가 않다. 총칼로 윽박질렀다간 다시 탈영할 게 뻔하고, 프래깅이나 안 하면 다행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름있는 명장을 투입하거나 전투에서의 승리로 승산이 있음을 입증해야 하곤 한다. 가장 유명한 예시인 명량 해전은 이순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칠천량 해전 이후로 숨어있던 패잔병들이 어느 정도 집결하여 재건된 함대로 치른 해전이고, 그 이후로도 이 통쾌한 승전보를 들은 패잔병들이 속속들이 집결하여 이후 반절이나마 조선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일단은 무기를 가지고 패주하여 전투능력을 갖춘 병력이기에 그 전투능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얌전히 항복해주면 다행인데 최후의 저항이라도 펼치기 시작하면 골치아파지기 때문.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서 게릴라성 병력으로 바뀌어버렸다간 굉장히 곤란해진다. 예시를 들자면 한국전쟁 당시 패퇴에 실패한 북한군 패잔병들은 후방 빨치산이 되어 남한을 한동안 괴롭게 했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측 기록에 따르면, 매복한 조선군 패잔병 단 한명이 발포한 총탄에 홍타이지의 매부 슈무루 양구리가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3. 사냥[편집]


전쟁이 잦은 지역에서는 오히려 패잔병을 지역 주민들이 살해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 도망치느라 힘이 빠진 패잔병을 몰려가서 잡아죽이거나, 아니면 밥에 독을 타서 주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였다. 과거의 병기들은 농민의 소득에 비하면 매우 비싼 편이였기에 그걸 노린 것이다.

그 외에도 왕이나 영주가 패잔병의 목에 포상금을 내걸어 패잔병 사냥을 장려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당시 아예 이런 패잔병, 일본식으로는 '낙오무사'들의 적극적인 사냥을 독려하여 '낙오무사는 참억새 꽃에도 겁을 먹는다.'는 말을 만들어냈고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 역시도 패잔병을 사냥하던 이들에게 죽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반복되다보니 패잔병들도 자신들의 위험을 잘 알아서, 농민이 보이면 그냥 그대로 죽여버리거나 밥을 빌어먹는 대신 다 죽이고 여자는 범하고 죽이는 식으로 더한 범죄를 유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범죄는 또다시 패잔병 사냥을 낳았다.


4. 패장[편집]


장교, 장군 판으로 패장이라는 말이 있다. 옛스러운 말로는 패군지장.

말그대로 패배한 장수를 뜻하는 말로, 패잔병과 비슷한 이유로 가치 있는 존재였기에 죄다 죽여버리는 건 장기적으로 큰 손해였다. 게다가 처벌을 남발하면 궁지에 몰린 장수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적에게 항복해 버리는 상황까지 일어날 수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윗선의 지시나 매뉴얼을 충실하게 따랐는데 패배한 경우는 윗선의 책임이거나 본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이 문제인지라 별 책임을 지지 않지만 항명하면서 저지른 일이 패배를 불러온 경우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진다.

패장이라고 무조건 죽이거나 보직해임 시키는 대신 능력있는 자라면 병력을 재보급하여 다시 기회를 주는 것도 국가 원수나 참모장의 중요한 능력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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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도 1차 대전 참전병이 있었긴 했을 거다.[2] 김홍일 장군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사령관으로 보임했으나 휘하 장병은 커녕 참모조차 안 딸려 보냈다.그야말로 원 맨 아미였던 어처구니 없던 부대였다.[3] 다만 김원술의 사례는 심하기는 하나 어쩔 수 없던 면도 있던 것이 그 당시 신라는 진지하게 생존이 우려될 정도의 시기를 보냈다. 진평왕 시절부터 시작해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시기까지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게 샌드백 신세였고 이런 상황에서 결국 필요한 것은 임전무퇴 같은 물러서지 않고 싸울 정도로 용기있는 모습일 수 밖에 없었다. 당장에 황산벌 전투에서 4전 4패하던 신라군의 사기를 되살린 것은 어린 반굴과 관창의 전사였다는 점에서 사기용으로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것'을 강조한 건 효과가 있었다. 문제는 저 반굴과 관창이 김유신의 친척이라는 것이다. 김유신이 누구인가? 당시(무열왕 시기)로 치면 여동생은 무열왕의 아내며 그 사이에서 난 딸은 자신의 아내인 인물이다. 그런 사람의 집안의 자제조차 저렇게까지 싸워야 했다. 그러니 자기 친척들은 자제들까지 희생시켜가며 나라를 지키고자 했는데 자기 자식은 (사실 어쩔 수 없었지만) 지고도 살아 돌아왔으니 속마음은 어떻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철저히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저 때도 신라는 명운을 건 나당전쟁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