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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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6대 국왕
페드루 3세
Pedro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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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페드루 클레멘트 프란시스쿠 조제 안토니우
(Pedro Clemente Francisco José António)
출생
1717년 7월 5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
1786년 5월 25일 (향년 68세)
포르투갈 왕국 켈루스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777년 2월 24일 ~ 1786년 5월 25일
배우자
마리아 1세 (1760년 결혼)
자녀
주제, 주앙 6세, 마리아나 비토리아
아버지
주앙 5세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형제
바르바라, 페드루, 주제 1세, 카를루스, 알렉산드르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3. 자녀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6대 국왕. 별명은 "능력 있고 적절한 왕(O Capacidónio)"이다.


2. 생애[편집]


1717년 7월 5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5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인 마리아 안나의 4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아 바르바라, 페드루, 주제 1세, 카를루스, 알레산드르가 있었다. 일찍이 예수회 수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 1655년 주앙 4세가 건립한 별궁인 카사 두 인판타두(Casa do Infantado) 궁전을 수여받았으며, 크라토 수도원장과 황금 양모 기사단장에 선임되었다. 형제들 중 가장 총명해서 주앙 5세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형 주제 1세가 1750년 새 국왕에 등극한 뒤 카사 두 인판타두에서 은인자중하라는 지시에 순종해 그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

1760년, 페드루는 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마리아와 결혼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브라간사 왕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단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7년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이 시점에서, 포르투갈은 어느 한 쪽과 손을 잡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를 어느 한 국가의 왕자와 결혼시켰다가는 그 나라를 적대하는 국가들로부터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될 수 있었기에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기 어려웠다.

타국 왕자와의 결혼을 배제한다면, 공주의 결혼 상대는 포르투갈 국내의 귀족이 유력했다. 그러나 주제 1세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귀족들을 모조리 찍어누르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는 장차 여왕이 될 마리아가 귀족 집안의 자제와 결혼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질 것이라 여겼고, 정치에 별 관심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던 페드루 왕자라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마리아와 짝지어주기로 했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친족간의 결혼이 흔했던 유럽 왕실에서도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고 교회법에도 어긋났지만, 어느 누구도 독재 권력을 펼치는 세바스티앙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1777년 2월 24일 주제 1세가 사망하면서 아내 마리아 1세와 함께 포르투갈의 공동 국왕에 등극했다.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그는 아내 마리아가 정무에 전념하는 동안 사냥이나 종교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면서도 세바스티앙의 독재에 대한 비판 대열에 가담해 그가 실각하는 데 일조했으며, 세바스티앙에 의해 불법 집단으로 간주되어 추방되었던 예수회의 복권에 대해 "나는 그들이 어렸을 때 베풀어준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라며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정치에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면서도 아내와 자식들에게 무척 자상했고 그들의 요청을 언제나 들어줬다. 또한 마리아가 내각을 구성할 때 여러 인물을 거론하면서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그는 "그 사람은 능력 있고 적절하다"라고 답했다. 그가 어찌나 "능력 있다(capaz)", "적절하다(idóneo)"라는 말을 자주 했는지, 세간에서는 이를 풍자해 그에게 "능력있고 적절한 왕(O Capacidónio)"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한편 페드루는,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낙인찍혀 세바스티앙에게 심한 탄압을 당한, 타보라 가문을 복권하고 살아남은 구성원들에게 재산을 돌려주도록 했다.

1786년 5월 25일, 페드루 3세는 리스본에 있는 켈루스 궁전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정치에 별다른 공헌을 하지 않았지만 자상한 남편이었던 페드루 3세를 사랑했던 마리아 여왕은 남편을 잃은 상실감에 몹시 슬퍼했고, 이후 자식들이 잇따라 사망한 충격까지 겹치자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말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다.


3. 자녀[편집]


다음은 모두 마리아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로서 주앙 6세를 제외하면 오래 살지 못했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브라질 공 주제
(José, Prince of Brazil)
1761년 8월 20일
1788년 9월 11일
포르투갈의 베네디타 공주[1]
2남
주앙 6세
(John VI)
1767년 5월 13일
1826년 3월 10일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2]
3남 6녀[3]
1녀
스페인의 가브리엘 왕자비 마리아나 빅토리아
(Mariana Victoria, Infanta Gabriel of Spain)
1768년 12월 15일
1788년 11월 2일
스페인의 가브리엘 왕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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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1세의 4녀이자 펠리페 5세의 외손녀로, 무려 친이모다.[2] 카를로스 4세의 장녀다.[3]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이사벨, 페드루 1세, 미겔 1세 등.[4] 카를로스 3세의 4남이자 아우구스트 3세의 외손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