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1세(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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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8대 국왕
페드루 4세
Pedro IV

브라질 제국 초대 황제
페드루 1세
Pedro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rtrait_of_Dom_Pedro%2C_Duke_of_Bragan%C3%A7a_-_Google_Art_Project_edit.jpg

출생
1798년 10월 12일
포르투갈 왕국 켈루스 켈루스 궁전
사망
1834년 9월 24일 (향년 35세)
포르투갈 왕국 켈루스 켈루스 궁전
재위기간
브라질 황제
1822년 10월 12일 ~ 1831년 4월 7일
포르투갈 국왕
1826년 3월 10일 ~ 1826년 5월 2일
서명
파일:페드루 1세(브라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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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브라간사 가문
이름
페드루 드 알칸타라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주앙 카를루스 샤비에르 드 파울라 미겔 하파엘 조아킹 조제 곤자가 파스코알 시프리아누 세라핑
(Pedro de Alcântara Francisco António João Carlos Xavier de Paula Miguel Rafael Joaquim José Gonzaga Pascoal Cipriano Serafim)
아버지
주앙 6세
어머니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형제자매
마리아 테레사,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마리아 이사벨,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 마리아, 미겔 1세, 마리아, 아나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1817년 결혼 / 1826년 사망)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1829년 결혼)
자녀
마리아 2세, 미겔, 주앙 카를루스, 자누아리아, 파울라, 호드리구(사생아), 이자벨 마리아(사생아), 프란시스카, 페드루 2세, 페드루(사생아), 마리아 이자벨(사생아), 마리아 아멜리아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가족관계
4.1.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8대 국왕이자 브라질 제국 초대 황제. 포르투갈 국왕으로는 '페드루 4세'이고 브라질 황제로는 '페드루 1세'이다. 별명은 "해방자(o Libertador)" 또는 "군인왕(o Rei Soldado)"이다.


2. 생애[편집]


1798년 10월 12일 포르투갈 왕국 켈루스의 켈루스 궁전에서 포르투갈 왕자 주앙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딸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마리아 테레사,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마리아 이사벨,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 마리아, 미겔 1세, 마리아, 아나가 있었다. 당시 주앙 왕자는 정신병에 시달리는 어머니 마리아 1세를 대신해 나라를 통치했다. 그러나 페드루의 부모는 심각한 가정 불화를 벌였다. 주앙은 성격이 억센 아내를 꺼려 했고, 카를로타는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종교 생활에 빠져 지내는 남편을 경원시했다. 급기야 카를로타는 포르투갈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스페인의 이익을 수호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남편에 대한 음모를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페드루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버지를 계속 괴롭히는 어머니를 증오했으며, 성인이 되었을 때 공개석상에서 카를로타를 "개년"이라고 부르며 비난을 퍼부었다.

형 프란시스쿠 안토니우가 1801년 6살의 나이에 사망한 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며, 다섯 살 때부터 코임브라 부총장이며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주제 몬테이루 다 로차의 가르침을 받았다. 9살 때인 1807년 11월 29일, 가족 및 귀족들과 함께 나폴레옹 1세의 부하인 장앙도슈 쥐노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피해 리스본에서 브라질로 망명했다. 그는 항해 도중에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스를 읽었고 승무원 몇 명과 이야기를 나누며 항해술 기초를 배웠다고 전해진다. 브라질에 도착한 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코 지 상 크리스토방 궁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페드루는 간호사 마리아 제노베바 두 레고 이 마투스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그녀를 즐겨 따랐으며, 보좌관이자 감독자인 안토니우 지 아라비다 수도사 역시 잘 따랐다. 두 사람은 페드루의 성장을 책임지고 적절한 교육을 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그는 두 사람으로부터 수학, 정치경제학, 논리학, 역사 및 지리학, 음악을 포함한 광범위한 교육을 받았다. 또한 포르투갈어 외에도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를 잘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 수준도 훌륭했다. 그는 나중에 황제가 된 뒤에도 하루 중 적어도 2시간을 독서와 공부에 바쳤다. 한편 산타크루스 농장에서 승마 훈련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훌륭한 기수이자 마의가 되었다.

페드루가 가장 좋아한 과목은 음악이었다. 그의 스승 중 한 명은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지기스문트 폰 노이콤이었는데, 페드루는 그로부터 클라리넷, 바순 및 첼로를 연주하는 법을 익혔고 아버지를 기리는 찬송가인 <주앙 왕> 등 여러 음악 작품을 작곡했다. 그 중 하나인 헌장 찬가(Hino da Carta)[1]는 포르투갈 왕국의 국가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어렸을 때 총명한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어렸을 때 부모의 불화를 똑똑히 목격하며 자랐기 때문인지 매우 변덕스럽고 감정적이며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면모를 보였다. 특히 자신이 내린 결정의 결과를 평가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자신의 견해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 주앙이 잘못을 저지른 페드루를 징계하려는 교사들을 해고해버리기 일쑤였기에, 그는 이러한 단점을 제때에 고치지 못한 채 성장했다.

1816년 마리아 1세가 30여 년간 정신병을 앓은 끝에 숨을 거두면서 새 국왕에 오른 주앙 6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아 레오폴디네와 페드루의 결혼을 주선했다. 11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레오폴디네는 페드루를 처음 본 순간 페드루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당시 19살이었던 페드루는 잘생겼고 키가 큰 편이었으며, 검은 눈과 짙은 갈색 머리를 가졌다. 또한 옷차림이 단정하고 흠잡을 데 없는 몸가짐을 갖췄으며, 목소리는 무척 감미로웠다고 한다. 두 사람은 마리아 2세, 미겔, 카를로스, 자누아리아, 파올라, 프란시스카, 페드루 2세 등 7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페드루는 여러 아이를 낳아준 아내에게 무심했고 바람기가 심했다. 그는 때때로 여행자로 변장해 리우데자네이루의 선술집을 자주 방문해 노에미 티에리(Noémi Thierry)라는 프랑스 댄서 등 여러 정부를 사귀었다. 주앙 6세는 그런 아들을 여러 차례 꾸짖고 사생아를 낳은 노에미 티에리를 멀리 보내는 등 여러 조치를 내렸지만,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아들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가부장적인 성격에 폭력성이 강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아내를 폭행했다. 레오폴디네는 이런 사정을 친정에 호소했지만, 오스트리아 황실은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1820년 10월 17일 포르투에서 무장 봉기가 발발했다. 이후 반란의 물결은 여러 도시들에 빠르게 확산되어 마침내 리스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했다. 반란을 주동한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 혁명"을 일으켰다고 자축하며 포르투갈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왕실이 포르투갈로 즉각 돌아와야 하며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회복하여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고 공식적으로 "브라질 왕국"이 아닌 "브라질 공국"으로 격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잠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제헌 의회 선거를 실시해 변호사, 교수 출신의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1821년 1월 30일, 새 의원들로 구성된 코르테스가 리스본에서 소집된 뒤 군주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브라질에 전해지자, 이번에는 브라질인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예속된 식민지인 취급을 받다가 주앙 6세의 망명 이래로 '브라질 왕국의 일등 백성'으로 인정받았는데, 이제와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보고, 주앙 6세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했다. 주앙 6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페드루를 포르투갈에 보내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의 서적을 탐독하여 열렬한 자유주의자가 된 아들이 포르투갈에 갔다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페드루의 출발을 가능한 한 연기했다.

1821년 2월 26일, 포르투갈 병사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새 내각을 임명하고 포르투갈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주앙 6세와 내각이 어찌할 바 몰라하자, 페드루가 직접 나서 반란군과 협상한 뒤 아버지에게 저들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리우데자네이루에 모인 자유주의자들이 4월 21일에 코르테스를 결성하고 왕실을 계속 압박하자, 주앙 6세는 마침내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주앙 6세는 아들 페드루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1821년 4월 26일에 왕실 식구들 및 귀족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다. 전승에 따르면, 주앙은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에 페드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드루, 브라질은 곧 포르투갈에게서 분리되겠구나!"


아버지가 포르투갈로 돌아간 뒤 브라질의 섭정이 된 페드루는 인권 및 재산권을 보장하는 법령을 반포하고 세금과 정부 지출을 줄이고 정치범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이려 애썼다. 1821년 6월 5일 조르지 지 아빌레스 주자르테 지 소자 타바레스가 페드루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브라질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페드루는 홀로 반란군 앞에 서서 그들이 내세우는 요구 조건 중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삭제하고 나머지를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면서 압력에 굴복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 병사들은 혼자서 자신들을 마주보며 협상에 침착하게 임하는 그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1821년 말,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앙 정부를 해산하고 브라질을 식민지로 되돌리며 페드루 왕자를 귀국시키기로 결의했다. 브라질인들은 식민지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페드루에게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말아달라는 청원서를 대거 보냈다. 페드루는 청원서를 읽은 뒤 대중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모든 사람의 이익과 국가의 전반적인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준비가 되어 있소. 사람들에게 내가 있다고 말하시오!"


오늘날 브라질 정부는 페드루가 포르투갈 코르테스의 복귀 명령에 불복한 1822년 1월 9일을 '머무는 날(Dia do Fico)'로 이름붙이고 이 날을 자국의 독립이 이뤄진 날로 기념하고 있다.

조르지 지 아빌레스는 페드루를 강제로 포르투갈에 보내기 위해 반란을 다시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페드루가 수적으로 우세한 민병대를 결집시켜 반격했다. 아빌레스의 반란군은 쉽게 제압당한 뒤 브라질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페드루는 몇 달 동안 미나스 제라이스, 상파울루 등 여러 지역을 돌며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고자 노력했다. 한편, 아내 레오폴디네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남편을 대신해 통치를 대행했다. 그러던 1822년 9월 2일에 열린 각료 회의에서 브라질을 독립시키기로 결의했다. 레오폴디네는 당시 상파울루에 있던 페드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페드루는 즉시 리우데자네이루로 달려가서 9월 7일 도착한 뒤 노새에 올라타서 수많은 시민들이 모인 광장에 들어선 뒤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느님, 저는 브라질에 자유를 주겠다고 맹세합니다. 브라질 백성들이여, 오늘부터 우리의 표어가 '독립이 아니면 죽음뿐이다!'가 되기를 바라노라."


1822년 10월 12일, 페드루는 자신의 24번째 생일에 브라질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서 즉위했으며 대관식을 12월 1일에 거행했다. 브라질 남서부, 북동부 및 북부의 일부 지역에서 포르투갈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페드루 1세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페드루 1세는 대다수 민중의 지원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압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브라질이 독립했다는 소식에 격분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전 인구의 1/6을 상실하는 참사를 겪은 터라 브라질에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되지 않았기에 막을 방도가 없었다.

페드루 1세는 독립을 달성한 뒤 지질학자이자 브라질의 독립운동가였던 주제 보니파시오 지 안드라다 이 실바를 국외부 장관에 선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곧 악화되었다. 보니파시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정적들을 탄압했고, 정적들은 이에 맞서 황제의 호의를 받고 그를 제거하려 들었다. 결국 페드루 1세는 보니파시오를 해임한 뒤 1822년 8월 프리메이슨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과티모짐"이라는 회원명을 채택했다. 이후 10월 7일에 보니파시오를 대신하여 프리메이슨의 단장이 되었다.

국외부 장관에서 해임된 보니파시오는 반 페드루파 인사들과 손잡고 제헌의회 내에서 페드루를 향한 정치적 공세를 가했다. 그는 브라질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포르투갈의 음모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페드루 역시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암시했다. 페드루 1세는 이 중상 모략에 분노해 1823년 11월 12일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보니파시오를 프랑스로 추방했다. 다음날 새로 설립된 국무원에 헌법 초안 작성을 맡겼고, 완성된 초안을 모든 시의회에 보내 압도적 다수의 투표를 통해 제국 헌법으로 즉각 체택했다. 1824년 3월 25일에 반포된 헌법은 절대군주정을 표방하며 왕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으며, 지방 정부의 자치권을 불허하고 중앙 정부의 관할에 귀속되게 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페르남부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파라이바, 세아라 지방의 반란군과 합류해 '에콰도르 연방'을 결성했다. 페드루는 이들을 달래려 애썼지만 실패하자 영국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서 용병을 고용한 뒤 토머스 코크레인의 지휘 하에 레시페로 파견했다. 반란군은 곧 토벌되었고, 16명의 반란 주모자가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나머지는 사면되었다. 또한 페드루는 페르남부쿠 영토의 일부를 미나스 제라이스로 넘겼다가 다시 바이아로 넘겼다.

한편, 페드루 1세가 브라질 황제로 즉위하는데 한 몫 거든 뒤 브라질 황후가 되었던 레오폴디네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페드루 1세는 평소처럼 선술집에 들락거리던 중 빌라 리카 시의 용기병 군단 제2중대의 장교인 펠리시우 핀투 코엘류 지 멘돈사 중위의 전 아내인 도미틸라 지 카스트로와 만났다. 도미틸라는 남편의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상파울루로 도망쳐서 그곳의 선술집에서 일하다가 1822년에 페드루를 만났다. 페드루는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자신의 정부로 삼은 뒤 황후의 시녀로 삼고 산토스 여후작 작위를 주었다.

페드루는 도미틸라와의 애정을 과시하면서 점점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함부로 대했으며, 페드루와 도미틸라의 자식들은 레오폴디네의 자녀들과 같은 대우와 교육을 받았다. 도미틸라는 페드루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것에 우쭐해져 레오폴디네를 무시했고, 레오폴디네는 그런 그녀를 "매혹적인 괴물"이라고 칭했다. 레오폴디네가 도미틸라 문제로 항의하자, 페드루는 그녀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레오폴디네는 친정에 이 사실을 알리며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이 없자 우울증에 빠졌고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825년 8월 29일, 포르투갈은 오랜 협상 끝에 리우데자네이루 협정을 체결해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 대신, 브라질은 포르투갈이 입은 손실을 배상해야 했으며, 협상을 중재한 영국에게 유리한 무역 권리를 갱신해야 했다. 몇 달 후인 1826년 3월 10일, 주앙 6세가 사망했다. 이리하여 페드루가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로 등극했지만, 브라질 정부는 포르투갈의 군주인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며 반대했고, 포르투갈 역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황제를 칭한 그를 군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에 페드루는 5월 2일 포르투갈 왕위에서 퇴위하고 딸 마리아 2세를 포르투갈 여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마리아 2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페드루의 누이인 이자벨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자벨 마리아의 섭정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절대군주제 옹호자들간의 불화가 정부를 지배했고, 시의회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었으며, 리스본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자, 페드루는 미겔에게 포르투갈의 섭정을 제안하는 동시에 마리아 2세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미겔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포르투갈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뒤 포르투갈에 복귀했다.

그러나 미겔 1세는 어머니 카롤리타의 설득을 받아들여 1828년 초 포르투갈 헌법을 무효화하고 절대군주제를 지지하는 포르투갈인들의 지지를 받아 마리아 2세를 밀어내고 포르투갈 국왕에 등극했다. 페드루의 누이인 마리아 테레사,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사벨 마리아, 마리아 등이 미겔 1세를 지지했고, 오직 막내 여동생 아나만이 페드루를 지지하고 나중에 페드루에게 가담하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로 떠났다. 페드루는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를 가로챈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마리아 2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여러 국가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25년 4월, 리우데라플라타 연합주의 지원을 받은 소수의 반란군이 당시 브라질 최남단 주였던 시스플라티나 의 독립을 선언했다. 브라질 정부는 처음엔 사소한 봉기로 간주했지만, 리우데라플라타 연합주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지원하자 그해 12월 리우데라플라타 연합주에 전쟁을 선포했다. 아리하여 500일 전쟁이 발발했고, 페드루는 1826년 2월에 바이아로 내려가서 전쟁의 당위성을 홍보하며 전쟁 물자를 가능한 한 많이 차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전선의 상황이 갈수록 안 좋게 돌아가자, 페드루는 1826년 12월 7일 상페드루두리오그란지두술 주의 주도인 포르투알레그레로 향한 뒤 무능하고 부패한 장군들을 해고하고 군대의 질을 개선해 승리를 이끌어내려 노력했다. 이후 리우데자네이루에 귀환하던 그는 12월 11일 아내가 아이를 낳다가 사산 후 숨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황후가 남편의 폭행으로 유산 후 사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녀가 죽었을 때 페드루는 전선에 나갔다가 귀환하던 중이었기에 근거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남편의 바람기와 학대로 인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건강을 해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페드루는 자신이 그녀에게 심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동안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레오폴디나의 초상화를 껴안고 바닥에서 울곤 했으며, 아들 페드루를 품에 안고 "불쌍한 소년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왕자다."라고 말하며 통곡했다. 그는 도미틸라를 궁정에서 내보낸 뒤 재혼해서 더 나은 남편이 되기로 결심하고, 장인이었던 프란츠 1세에게 서신을 보내 "나의 모든 악행은 끝났고, 이미 넘어진 오류에 다시는 빠지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며 회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페드루의 바람기와 악행은 이미 유럽 전역에 퍼질대로 퍼진 터라 여러 나라의 공주들은 청혼을 거부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페드루는 결국 1829년 4월 29일 도미틸라를 궁전에 복귀시켰다. 그러다 1829년 8월 27일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외젠의 딸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와의 결혼이 확정되자, 페드루는 도미틸라를 궁정에서 완전히 내보냈다. 페드루는 새로 맞이한 아내에게 충실했으며 다시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 또한 호세 보니파시오와 화해하고 그가 브라질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1828년경, 브라질과 연합주 및 시스팔라티나 반란군과의 전쟁은 서로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을 뿐 좀처럼 결판이 나지 못했다. 브라질 국내에서는 돈만 잔뜩 들고 인기도 없는 전쟁을 당장 중단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여론이 커져갔다. 연합주 역시 브라질에 공세를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이 브라질 해군한테 봉쇄당하고 재정수입이 대폭 줄어들면서 재정부담이 커졌다. 결국 라플라타 강이 봉쇄당하면서 연합주와의 무역로가 막히게 된 영국이 양측에 빨리 전쟁을 끝내라고 압박하면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1828년 8월 27일 영국과 프랑스의 중재 하에 양국은 시스플라티나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1828년 10월 4일 몬테비데오에서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우루과이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전쟁의 실패에 민심이 들끓어오르자, 페드루는 이를 달래기 위해 야당인 자유당에서 끌어온 정치인들로 구성된 내각을 결성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자유당 내 급진파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포르투갈 공동체를 괴롭히기 위해 거리 갱단을 결집하면서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1831년 3월 11일 포르투갈인과 브라질인간의 패싸움이 벌어지면서 리우데자네이루 시내가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페드루 1세는 혼란 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해 4월 5일 자유당 내각을 해산시켰다. 4월 6일 오후 리우데자네이루 시내에서 급진파의 선동을 받은 군중이 모여 해산된 내각의 즉각적인 복구를 요구했다. 황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나, 백성이 강요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페드루의 경호원을 포함한 군대 전체가 그를 버리고 시위에 가담하자, 그제야 자신이 브라질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4월 7일 아내, 딸 마리아 2세, 여동생 아나를 포함한 측근들과 함께 영국 전함 HMS 워스파이트에 승선했다. 그러면서 아들 페드루 2세를 브라질의 새 황제로 삼겠다는 메시지를 의회에 전하면서 다음의 메시지를 덧붙였다.

"나는 내가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나라를 떠나 유럽으로 돌아간다."


1831년 6월 10일 프랑스 셰르부르옥트빌에 도착한 페드루는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마리아 2세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다. 프랑스와 영국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미국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고 프랑스 혁명 초기에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라파예트 후작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라파예트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받은 그는 주앙 바프티스타 다 실바 레이탕 드 알메이다 개럿, 알렉상드르 헤르쿨라노 등 포르투갈 자유주의자들과 라파예트의 손자 아드리앙 쥘 드 라스테리 등 지지자들을 끌어모으고 외국 용병 및 지원병들을 규합했다. 1832년 1월 25일, 모든 준비가 완료된 페드루는 라파예트 후작과 200명의 지지자들에게 작별을 고한 뒤 딸 마리아 2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가씨, 당신의 권리를 지키고 당신의 왕관을 되찾아 줄 포르투갈 장군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리아 2세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고 한다. 이후 페드루와 그의 군대는 마리아 2세에게 여전히 충성을 바치고 있는 유일한 포르투갈 영토인 아조레스 제도로 가서 몇달 간 재정비를 한 후 포르투갈 본토로 출발해 7월 9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포르투에 입성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겔 1세는 군대를 동원해 포르투를 포위하여 1년 이상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페드루는 친히 수비대를 격려하고 대포를 장착하고 참호를 팠으며, 부상자를 돌보고 병사들과 함께 식사했다. 그러던 중 보니파시오의 형제 안토니오 카를로스로부터 브라질에 돌아와서 페드루 2세의 섭정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브라질 의회가 정식으로 대표단을 보내 자신에게 복귀하라고 요청하지 않는 이상 돌아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1833년 6월, 영국 정부는 페드루와 포르투갈 자유주의자들을 돕기로 결의하고 찰스 네이피어 제독의 해군을 파견했다. 영국 함대는 알가르브에서 자유주의파 인사인 안토니우 주제 세베림 드 노로냐와 합세한 뒤 해상과 육상에서 동시에 포르투로 진격했다. 1833년 7월 5일, 네이피어 제독은 산 비센테 곶 해전에서 미겔 1세의 함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에 미겔 1세의 지지자들은 기세가 꺾였고, 안토니우는 알가르베 북쪽의 알렌테죠 지역까지 진군한 뒤 7월 24일 리스본 공략에 성공했다. 페드루는 포르투 포위가 풀리자 리스본에 입성한 뒤 마리아 2세를 포르투갈 왕위에 복위시키고 자신은 마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미겔 1세의 남은 군대는 1834년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국면을 뒤집지는 못했고 1834년 5월 26일 미겔 1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면을 받는 대가로 포르투갈을 영구적으로 떠난다는 내용의 에보라몬테 협약이 체결되면서 포르투갈 내전이 종식되었다.

내전이 끝난 후 몇 달간 섭정으로서 활동하던 페드루는 결핵에 걸려 9월 10일부터 켈루스 궁전의 침대에 누웠다. 그는 브라질인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점진적인 노예 제도 폐지를 청원하면서, "노예 제도는 악이며 인간 종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공격이며 도덕성에 대한 암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며칠 동안 병마에 고통받던 그는 1834년 9월 24일 14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브라간사 왕가의 판테온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포르투의 라파 교회에 안치되었다.


3. 평가[편집]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배신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평이 안좋고, 브라질 내에서도 썩 호의적이지는 않는다. 브라질 내에서도 "해방자"라는 좋은 평이 있는가 하면, 그래봤자 포르투갈 본국과 똑같은 전제군주일 뿐이라는 악평도 있다.

결과적으로 페드루 1세의 행동으로 인해 브라간사 왕조는 포르투갈 본가 왕위도, 브라질 황위도 그 어느것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생애 면에서 언급되었듯 다혈질적이고 독단적인 성향 때문에 동군연합으로 잘 운영될 수 있었던 포르투갈-브라질 정치권은 큰 혼란을 맞게 되었고, 독립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호의로 독립된 브라질의 황제로 집권했지만 그 성향으로 인해 빚어진 실책 때문에 의회로부터 쫓겨났다. 쫓겨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브라질 독립에 대한 포르투갈-브라질 양국의 혼란상을 제대로 수습해보기 전에 요절한 탓에 아들 페드루 2세와 딸 마리아 2세가 그 빚을 전부 짊어져야 했고, 이는 브라질의 공화정 쿠데타, 포르투갈 공화 혁명으로 이어졌다. 페드루 1세의 행동 때문에 그 업보로 외증손자 카를루스 1세는 아예 암살당했다.


4. 가족관계[편집]



4.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네
(Maria Leopoldina of Austria)
1녀
마리아 2세
(Maria II)
1819년 4월 4일
1853년 11월 15일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2]
페르난두 2세
슬하 6남 2녀[3]
1남
베이라 공 미겔
(Miguel, Prince of Beira)
1820년 4월 26일
1820년 4월 26일

2남
베이라 공 주앙 카를로스
(João Carlos, Prince of Beira)
1821년 3월 6일
1822년 2월 4일

2녀
아퀼라 백작부인 자누아리아
(Princess Januária, Countess of Aquila)
1822년 3월 11일
1901년 3월 13일
아퀼라 백작 루이지[4]
슬하 3남 1녀
3녀
파울라 공주
(Princess Paula)
1823년 2월 17일
1833년 1월 16일

4녀
주앵빌 공비 프란시스카
(Francisca, Princess of Joinville)
1824년 8월 2일
1898년 3월 27일
주앵빌 공 프랑수아 도를레앙[5]
슬하 1남 2녀
3남
페드루 2세
(Pedro II)
1825년 12월 2일
1891년 12월 5일
양시칠리아의 테레사 크리스티나[6]
슬하 2남 2녀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
(Amélie of Leuchtenberg)
5녀
마리아 아멜리아 공주
(Princess Maria Amélia)
1831년 12월 1일
1853년 2월 4일



5. 여담[편집]


포르투갈 왕국의 국가인 헌장 찬가(Hino da Carta)[7]는 페드루 1세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이다.

1972년 페드루 1세의 유해는 브라질 독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브라질로 옮겨져 상파울루의 왕실 묘지에 안장되었다. 2022년 9월 7일, 브라질 정부는 브라질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여 페드루 1세의 심장이 담긴 항아리를 임시로 가져와 수도 브라질리아에 전시했다가 포르투갈에 돌려보냈다.#

파일:Brazil 10 Centavos.jpg
현 브라질 10센타부 주화의 도안이다.

여러모로 명나라선덕제와 닮은 구석이 많다. 둘 다 만 35세에 죽었고, 총 재위기간이 10년도 안 되지만 각국에 임팩트가 컸고, 장성할 때까지 할아버지/할머니가 살아 있어서 장성할 때까지 왕세손/황태손이었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황태자/왕세자였다. 둘 다 20대 후반에 후계자 아들을 두어 아들들이 채 10살도 안 되었을 때 본인들이 요절한 것까지 똑같다. 다만 선덕제는 호불호의 여지조차 없는 확실한 명군인 반면 페드루는 포르투갈에서와 브라질에서의 평가가 갈리며 대체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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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 제정 당시의 포르투갈어 철자법에 따른 표기는 'Hymno da Carta'이다.[2]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남이자 페드루 4세의 계후인 아멜리 황후의 오빠이다.[3] 페드루 5세, 루이스 1세, 작센의 게오르크 왕자비 마리아 아나, 호엔촐레른 공비 안토니아(페르디난드 1세의 어머니) 등[4]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6남.[5] 루이필리프 1세의 3남[6] 양시칠리아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7녀, 매형 루이지 왕자의 바로 위 누나다.[7] 국가 제정 당시의 포르투갈어 철자법에 따른 표기는 'Hymno da Carta'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