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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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시칠리아 왕국 제3대 국왕
페르디난도 2세
Ferdinando II


이름
페르디난도 카를로 마리아
(Ferdinando Carlo Maria)
출생
1810년 1월 12일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사망
1859년 5월 22일 (향년 49세)
양시칠리아 왕국 카세르타
재위
양시칠리아 왕국의 왕
1830년 11월 8일 ~ 1859년 5월 22일
배우자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32년 결혼 / 1836년 사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1837년 결혼)
자녀
프란체스코 2세, 루이지, 알베르토, 알폰소, 마리아 안눈치아타, 마리아 임마콜라타, 가에타노, 주세페, 마리아 피아, 빈첸초, 파스쿠알레, 마리아 루이사, 젠나로
아버지
프란체스코 1세
어머니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형제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사 카를로타, 마리아 크리스티나, 카를로 페르디난도, 레오폴도, 마리아 안토니아, 안토니오,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카롤리나, 테레사 크리스티나, 루이지, 프란체스코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즉위 전
3. 재위 초반
4. 보수화, 그리고 1848년 혁명
5. 재위 후반
6. 가족관계
6.1. 조상
6.2. 자녀



1. 개요[편집]


양시칠리아 왕국의 3대 국왕. 재위 초반에는 친자유주의 성향과 국가 발전에 대한 노력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나, 재위 중반기부터 보수화되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을 펼쳐 양시칠리아 왕국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2. 즉위 전[편집]


1810년,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보르보네 왕조가 피신해있던 시칠리아팔레르모에서 당시에는 칼라브리아 공작(Duca di Calabria)[1]이었던 프란체스코 1세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의 아들로 태어났다.[2] 출생 당시부터 프란체스코 1세의 실질적 장남이었기 때문에, 후계자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3. 재위 초반[편집]


1830년 부왕 프란체스코 1세가 승하하자 20세의 나이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도 2세가 즉위하였을 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전히 적자를 내고 있는 국가 재정 상태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도 2세는 국가 재정 개선을 위해 왕실 소유 부동산의 불하와 고위 공직자의 봉급 감액을 실시하였다. 또한 1820년의 자유주의적 군사 반란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복권과 사법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군사 체계의 현대화를 실시하였다.

한편 신문물의 도입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839년 나폴리와 포르티치 왕궁을 연결하는 이탈리아 반도 최초의 철도 노선을 개통시켰으며, 증기 함선의 도입과 나폴리-팔레르모 간 전신선 부설이 페르디난도 2세의 치세 초반의 이루어졌다. 동시에 섬유, 제철 공업의 도입과 농축산업의 현대화도 추진되었으며, 도로망의 정비와 교량 신설, 나폴리의 가스등 가로등 설치와 같은 기반시설 확충 사업도 이루어졌다.

이렇듯 재위 초반에는 친자유주의적 통치와 국가 현대화 및 산업화 정책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이러한 친자유주의적 통치가 정치 체제의 전면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이에 따라 자유주의 세력의 불만은 점차 누적되었다.

즉위 당시 아직 미혼이었던 페르디난도 2세는 1832년에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의 막내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혼인하였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4년 후인 1836년에 뒷날 양시칠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 되는 프란체스코 2세를 낳다가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837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3남 카를 대공의 첫째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재혼해 8남 4녀를 두었다.


4. 보수화, 그리고 1848년 혁명[편집]


1836년부터 1837년에 걸쳐 왕국 남부의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7만 명이 사망하였고, 흉흉해진 민심은 1837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입헌군주정 도입 요구 시위를 촉발하였다. 그러나 페르디난도 2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요구에 무력 진압으로 대응하였고, 경찰을 동원해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한편 1839~1840년 사이에는 시칠리아 유황 광산의 채굴권 문제로 영국과 외교 분쟁이 발생하면서 영국과의 외교관계도 크게 악화되었다.

1837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시위를 무력 진압한 것을 기점으로 페르디난도 2세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감사와 탄압을 강화해나갔다. 1844년과 1847년에 자유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역시 무력 진압과 주동자들에 대한 처형으로 대응하였다.

1848년 1월 시칠리아에서 전 유럽을 휩쓴 1848년 혁명을 촉발한, 분리주의 성격을 띤 대규모의 민중봉기(1848년 시칠리아 혁명)가 일어났다. 대규모 혼란 속에서 페르디난도 2세는 1월 29일에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의회 구성 과정에서 지속적인 혼란이 이어졌고, 혁명이 일어난 시칠리아에서는 그 해 7월에 독자적인 헌법이 공표되었으나 페르디난도 2세의 무력 진압 명령으로 9월에 군대가 투입되어 혁명군이 장악한 메시나를 무력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며, 혁명 세력의 휴전 요청으로 메시나 점령 직후 휴전이 실시되었다. 메시나 점령 과정에서 해군의 포격을 동반한 대대적인 무력 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페르디난도 2세는 폭탄왕(Re Bomba) 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849년 2월, 시칠리아 혁명 세력 측에 시칠리아에 독자적인 의회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한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타협안이 혁명 세력에 의해 거부되자 3월 19일에 혁명 세력에 대한 무력 진압을 재개해 5월 15일에 시칠리아 혁명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에 앞선 3월 13일에는 예산 문제로 의회에서 한 달 이상 혼란이 지속되자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군주정으로 사실상 회귀하였다.

혁명 진압 이후, 페르디난도 2세는 반체제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과 처벌을 단행하였다. 1849년부터 1851년에 걸쳐 2000명에 달하는 반체제 인사가 투옥되었으며,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망명을 떠나야 했다.


5. 재위 후반[편집]


1850년 나폴리를 방문한 영국의 정치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양시칠리아 왕국의 정치범 탄압 현황을 본국에 보고한 것을 계기로 페르디난도 2세의 반동정치에 대한 영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압박이 점차 가중되었다. 특히 영국은 시칠리아 유황 광산에서 채굴되는 유황 확보를 이유로 양시칠리아 내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페르디난도 2세는 프랑스와 영국이 제시하는 개혁안을 거부하였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1856년 양시칠리아 대사를 소환하는 등 양시칠리아 정부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나갔다. 또한 이에 더불어 양시칠리아 왕국의 보호무역 추구가 맞물려 왕국의 주요 수출품었던 농산물에 대한 제제가 실시되면서 왕국 경제에 대한 타격도 심화되었다.

1856년 12월 8일, 페르디난도 2세는 미사에 참례하던 중 암살을 기도한 한 군인에 의해 총검으로 피습당하는 사건을 겪었다. 암살 시도로 입은 상처가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수 년이 지나며 상처가 점차 악화되었고, 왕세자 프란체스코의 결혼식에 참석하던 중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제 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859년 5월 22일 카세르타에서 승하하였다. 왕위는 장남 프란체스코 2세가 계승하였으나 불과 1년 만인 1860년 시작된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에 의한 원정에 의하여 1861년에 왕국이 멸망, 2년 만에 망국군주가 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


6. 가족관계[편집]



6.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페르디난도 2세
(Ferdinando II)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delle Due Sicilie)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delle Due Sicilie)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de España)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A]
(Maria Amalia von Sachsen)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Maria Karolina von Österreich)
프란츠 1세
(Franz I. Stephan)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von Österreich)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María Isabel de Borbón)
카를로스 4세
(Carlos IV de España)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de España)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A]
(Maria Amalia von Sachsen)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di Borbone-Parma)
파르마 공작 필리포[3]
(Filippo I di Parma)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4]
(Louise-Élisabeth de France)


6.2. 자녀[편집]


두 차례의 결혼에서 9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프란체스코 2세는 딸 1명만 두었고 그나마도 요절했기 때문에 프란체스코 2세의 사후 명목상의 왕위는 4남 알폰소가 계승하였고, 오늘날 양시칠리아 왕가는 알폰소의 후손들로만 이어진다.

여계후손의 경우 차남 루이지 왕자의 외동딸 마리아 테레사의 후손이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가를 통해 이어지고 있으며[5], 장녀 마리아 안눈치아타의 후손은 손자 카를 1세를 통해 오스트리아 황가로 이어진다. 차녀 마리아 임마콜라타와 3녀 마리아 피아의 후손 역시 현존한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사보이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ristina di Savoia)
1남
프란체스코 2세
(Francesco II)
1836년 1월 16일
1894년 12월 27일
바이에른의 마리 조피[6]
슬하 1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Maria Theresia Isabella von Österreich)
2남
트라니 백작 루이지
(Luigi, conte di Trani)
1838년 8월 1일
1886년 6월 8일
바이에른의 마틸데 루도비카[7]
슬하 1녀
3남
카스트로조반니 백작 알베르토
(Alberto, conte di Castrogiovanni)
1839년 9월 17일
1844년 7월 12일

4남
카세르타 백작 알폰소
(Alfonso, conte di Caserta)
1841년 3월 28일
1934년 5월 26일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에타[8]
슬하 8남 4녀
1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안눈치아타
(Maria Annunziata, Arciduchessa d'Austria)
1843년 3월 24일
1871년 5월 4일
오스트리아의 대공 카를 루트비히
슬하 3남 1녀[9]
2녀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마리아 임마콜라타
(Maria Immacolata, Arciduchessa d'Austria)
1844년 4월 14일
1899년 2월 18일
토스카나의 카를로 살바토레[10]
슬하 5남 5녀[11]
5남
지르젠티 백작 가에타노
(Gaetano, conte di Girgenti)
1846년 1월 12일
1871년 11월 26일
스페인의 인판타 이사벨[12]
6남
루체라 백작 주세페
(Giuseppe, conte di Lucera)
1848년 3월 4일
1851년 9월 28일

3녀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피아
(Maria pia, Duchessa di Parma)
1849년 8월 21일
1882년 11월 29일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
슬하 5남 7녀[13]
7남
멜라초 백작 빈첸초
(Vincenzo, conte di Milazzo)
1851년 4월 26일
1854년 10월 13일

8남
바리 백작 파스쿠알레
(Pasquale, conte di Bari)
1852년 9월 15일
1904년 12월 21일
블랑슈 마르코네[14]
4녀
바르디 백작부인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Contessa di Bardi)
1855년 1월 21일
1874년 8월 23일
바르디 백작 엔리코[15]
9남
칼테지로네 백작 젠나로
(Gennaro, conte di Caltagirone)
1857년 2월 28일
1867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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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리 왕국양시칠리아 왕국의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칭호.[2] 마리아 이사벨에게는 장남이지만, 프란체스코 1세에게는 요절한 전처 소생 장남이 있었으므로 프란체스코 1세에게는 차남이다.[A] A B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이다.[3]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5남이다.[4]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녀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외손녀이다.[5] 마리아 테레사가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의 형인 빌헬름과 결혼했다.[6]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의 여동생이다.[7] 위에 나온 마리 조피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여동생이다.[8] 프란체스코 1세의 7남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의 장녀다.[9]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10]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차남이다.[11] 레오폴트 잘바토어 대공 등.[12] 이사벨 2세의 장녀다.[13] 불가리아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 등.[14] 귀천상혼[15] 파르마 공작 카를로 3세의 차남, 위에 나온 로베르토 1세의 남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