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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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83-J0827-500-002,_Ferdinand_Lassalle.jpg

페르디난트 라살
Ferdinand Lassalle

본명
페르디난트 요한 고틀리프 라살
Ferdinand Johann Gottlieb Lassalle
출생
1825년 4월 11일, 프로이센 왕국 브레슬라우
사망
1864년 8월 31일, 스위스 제네바
국적
프로이센 파일:프로이센 왕국 국기(1803-1892).svg
직업
정치가, 학자
서명
1. 소개
2. 생애
3. 사후


라살은 북독의 하늘을 잠시 비추다가 별똥별처럼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정치적 수호신이었다. 아마 더 이상 이런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골로 만


1. 소개
2. 생애
3. 사후



1. 소개[편집]


대표적인 국가사회주의 사상가로 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이되는 전독일 노동자동맹을 창설하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함께 최초의 복지제도를 확립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브레슬라우에서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를린 대학의 철학과 학생이었던 그는 청년 헤겔파의 일원으로서 진보적이었으며, 1848년 혁명 기간 동안에는 카를 마르크스와 《신라인신문》을 접했다. 그 후 그는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었으며 수차례 고소되었다. 한편 대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헤라클레이토스 연구에 박차를 가해 1857년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한 2권의 철학서적을 썼고, 1861년 『획득된 권리체계』란 책을 출간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1]

이후 1863년 전독일 노동자동맹(독일 사민당의 전신)를 창설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비스마르크의 눈에 띄어 함께 정사를 논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에게 있어 라샬은 흥미로운 인물이었는데, 사회주의에 물들어져 있으면서도 애국심으로 불타는 라살이란 인물은 노동자와 보수파를 연계할 수 있는 수단으로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살과 비스마르크의 만남은 1863년 이후 끊겼는데, 이는 라살이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공상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스마르크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스마르크는 라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이 두고 사귀고 싶은 인물이다. 그렇게 교양 있고 영민하고 상냥한 사람이 어디 흔하겠는가?"


실제로 라살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대중연설을 하고 환호를 받았지만, 그는 당의 총재라기보단 동원된 연사에 가까웠고 라살 생전에 노동자동맹의 회원수도 수천명을 넘지 못했다.

1864년 6월 라샬은 매독치료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요양을 하러갔다. 이곳에서 그는 바이에른 외교관의 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이 여인에게는 이미 약혼자(루마니아 귀족)가 있었다. 이 사실을 그 여성이 말하자 부모는 라살과 그녀의 교류를 금지한 후 급히 딸의 약혼자를 불러들였다. 결국 라살은 그녀의 약혼자에게 권총결투를 신청했고, 이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라살은 사흘 뒤에 숨을 거뒀다.

3. 사후[편집]


그는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으며 평등선거나 생산협동조합에 대한 국가적 지원같이 민주적인 방식으로도 실현 가능한 요구를 내세웠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역사적인 필연성으로 예언한 카를 마르크스에게 비판을 받았다. 마르크스와 교류를 가진 적이 있지만 마르크스는 라살이 자신의 아내에게 꼬리를 치는 난봉꾼이라 생각했으며,[2] 그의 주장을 보고 그가 분열책동을 한다 생각했다.[3] 하지만 현재는 그 역시 큰 업적을 남긴 사회주의 사상가로 존경받고 있다.

그의 사후 노동자동맹은 사회민주노동당과 1875년 발대식을 갖고 독일 사회주의노동당으로 통합했으며, 1891년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사회의 발전 법칙과 당의 임무를 분명히 규정한 에르푸르트 강령을 통과시켜 라살의 노선은 사실상 묻혔다. 그러나 1917년 독일 사민당에서 좌파가 스파르타쿠스 연맹을 결성해 탈당한 후 1919년 독일 공산당을 창당해 당내에서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우파만 남게 되었다. 그 후 사민당은 여성참정권까지 보장하는 만인의 평등 선거권을 쟁취하고,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했다.

2차 대전 후 사민당은 기존 노동자 정당에서 대중 정당으로 변신을 꾀하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1959년 통과시켜 반세기만에 라살의 정신을 다시 잇게 되었다.
[1] 다만 이때 마르크스는 펄펄 뛰었는데, 라살이 자신의 작품을 도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사회주의 계열 외에 마르크스의 명성이 알려지지 않아 묻혔다.[2]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예 대놓고 그를 모세의 피를 받은 흑인출신이라고 비꼬았다. 마르크스는 유대인 집안 출신이지만 유대인이라는 의식은 없었기에 저런 비난이 가능했다. [3] 라살이 죽었을 때 엥겔스에게 그를 폄하하는 편지를 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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