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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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30년 전쟁을 끝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이다.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페르디난트 4세이다.[2]
1608년에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그라츠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수회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1627년에 군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중요한 법률이며 군사 판례가 될 수정 영토 조례를 발표한다. 이것은 군대로 인해 지쳐있던 보헤미아인에게 도움이 되었으며 그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30년 전쟁이 계속되던 1634년,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한 이후에, 형식적으로 제국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사촌인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와 같이 활동하면서, 도나우뵈르트와 레겐스부르크를 되찾았으며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군을 패배시켰다. 화평파의 리더로서 그는 작센 등의 신교도 제후들과 1635년 프라하 평화 조약을 맺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3]
163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프랑스, 스웨덴과 평화를 맺길 원했으나 전쟁은 11년을 더 끌었다. 1648년에야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져 전쟁이 종결되었다. 1644년에 페르디난트 3세는 모든 제후들에게 독자적인 외교권을 준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전에는 선제후만 독자적인 외교가 가능했다. 이 칙령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권한과 정체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 스웨덴과 협상하는 와중에 더 많은 군대를 모았다. 1648년 이후 페르디난트 3세는 독일에 있는 외국의 군대를 몰아내고 베스트팔렌 조약의 조항들을 실천에 옮기느라 바빴다. 1656년에는 프랑스와 분쟁에 들어간 스페인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군대를 보냈다. 1657년 4월 그가 죽기 전에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동맹을 맺었다.
음악 작곡가로 인정받은 최초의 합스부르크 군주이기도 하다. 아들 레오폴트 1세, 손자 요제프 1세 등이 그의 명성을 뒤따랐다.
2. 가족[편집]
2.1. 조상[편집]
2.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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