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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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1.1. 발단: 이오니아 반란 (BC 499 ~ BC 493)과 결과
1.2.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원정 (BC 490)
1.3.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 (BC 480)
1.4.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 (BC 479)
1.5. 이후의 전쟁과 페르시아의 반응 (BC 478 ~ BC 449)
1.6.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몰락 (BC 431 ~ 338)
1.7. 후대의 해석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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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91년부터 BC 449년까지 페르시아와, 아테네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벌인 전쟁. 아테네의 급성장을 일궈낸 전쟁이자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평가받는 전쟁이다.

대략 BC 490년부터 BC 479년까지는 페르시아의 공격과 그리스 연합의 방어가 이루어졌고 BC 479년부터 BC 449년까지 그리스의 공격과 페르시아의 수비가 이루어졌다.

페르시아군의 침략을 격퇴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왕중왕에 맞서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1]

또한 이 전쟁을 통해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최초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1.1. 발단: 이오니아 반란 (BC 499 ~ BC 493)과 결과[편집]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이오니아(소아시아 서부 일대의 그리스 식민지 도시국가들) 반란에 아테네가 개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 치세 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 중 철학자 탈레스의 고향인 밀레투스 등이 중심이 되어 몇 가지 요인에 의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때 이들은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에게도 만약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이번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는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기가 질려 다 가만히 있는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지원을 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다. 아테네가 이때 개입한 것은 밀레투스 등이 자신들과 혈통적 연계가 있는 이오니아족이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고 막 민주정으로 전환한 상태에서 쫓겨난 참주였던 히피아스를 페르시아가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쟁에서 땡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시민들의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테네의 지원은 전함 20척 정도의 작은 것이었다. 이들은 사르디스를 공격해 키벨레 사원을 불태우기도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패하고 곧바로 도주한다.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은 키프로스와 헬레스폰토스 일대에도 손을 뻗어 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라테 섬 해전[2]에서 이미 주요 섬 국가들을 매수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깨지며 진압된다.

참주 히피아스의 망명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전쟁 직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그리스의 자타공인 최강이던 스파르타와 마찰을 빚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시민들은 페르시아와 우호관계를 수립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지만 이들은 페르시아의 요구에 따라 단순한 동맹이 아닌 전면복종을 해버리고, 이를 내심 기분 나빠한 본국 시민들은 이 일을 흑역사 취급하고 없는 일처럼 넘어가버리기로 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도 도의적 책임이 없단 아테네와 복종을 맹세한 아테네가 배신을 했다고 여기는 페르시아 사이에 이견이 생겨 이후의 전쟁을 발발시켰다.[3]

이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일대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며 다리우스 대왕의 사위 중 하나인 마르도니오스의 지휘하에 BC 492년에 아테네에 대한 응징군을 보내지만[4] 아토스 곶에서 폭풍우로 삼분의 일 이상의 함대를 상실하고 마르도니오스 자신도 마케도니아 왕국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이민족들에게 부상을 입어 아테네로 응징군을 보내는 건 나중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호왈 20만이라고 한다.


1.2. 페르시아의 1차 그리스 원정 (BC 490)[편집]


BC 491년 페르시아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는데, 여기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신들을 처형해 버리는 것으로 응수한다.[5] 이에 분노한 다리우스 대왕은 그리스를 공격하기로 결정하며 이전에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군을 지원하기도 했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1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낸다.

지상군 2만 5천과 600척의 함대로 구성된 페르시아 원정군은 에레트리아를 공격하여, 제압하고 아테네 공략을 위해 마라톤 평원에 상륙한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포함한 여러 도시국가들에 지원군을 요청함과 동시에 9천의 중장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밀티아데스에게 위임해 마라톤으로 파견해서, 페르시아군과 대치했으며 이후 펼쳐진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기병을 포함한 주력을 함대에 탑승시켜 아테네 시 근방으로 접근하려던 페르시아 함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신속히 아테네로 돌아와 상륙을 저지한다. 결국 아테네 공략에 실패한 페르시아군은 철수했다.

이때 마라톤 전투의 소식을 먼저 전하기 위해 전령이 달려온 것이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는 전령만 먼저 달려온 게 아니라 아테네군 전체가 함대가 오기 전에 아테네로 황급히 달려왔다고 한다.


1.3.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 (BC 480)[편집]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 정벌의 실패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아 그리스에 복수를 맹세하며 2차 원정군을 보낼 준비를 하나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진압하다가 병사하고,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 뒤를 잇는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진압한 다음 대규모 원정군을 직접 이끌고 그리스 원정길에 나선다.

헤로도토스는 이 원정군을 아시아 일대에서 소집한 180만, 유럽 일대에서 추가적으로 합류한 30만, 하인과 수행원 및 여타 잡역부들이 260만으로 육군만 470만이며 해군은 갤리선 1207척과 수송선 및 보급선 3000여 척에 해군 인력은 25만이어서 총 규모 500만이라는 초월적인 수치[6] 달한다. 를 제시하고 있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모두 과장이며[7] 실제로는 대략 20~50만 사이로 추정한다. 헤로도토스는 이외에 헬레스폰토스(다르다넬스 해협) 일대에 부교를 건설해 육군을 옮겼다고 하며, 아칸토스 일대에 운하를 파서 함대를 안전하게 옮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기도 한다.

이에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헬라스 동맹' 을 결성해 대향하기로 정하고 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국가들에게도 지원을 요청하지만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나 아드리아해의 코르키라(오늘날의 코르푸)와 같은 힘있는 다른 도시국가들은 눈치만 보면서 합류하지 않는다.[8]

그리스 연합은 1차 방어선을 테르모필레와 아르테미시움 일대에 구축하고 테르모필레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중장보병 6천여 명(스파르타는 이때 또 다른 종교축전 중이어서 근위대 300명만을 보냈고, 펠로폰네소스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보이오티아의 테베, 포카스등이 추가적인 병력을 보탰다.)과 여기에 딸린 시종 및 노예들을 포함해 1만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을 이끌고 방어선을 쳤고, 아르테미시움에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갤리선 271척과 기타 함선 50여 척(나중에 겔리선 53척 추가)을 이끌고 방어선을 친다. 이것이 유명한 영화 300(영화)의 배경이 된다.

여기에 페르시아군이 접근해 3일 동안 테르모필레 전투아르테미시움 해전이 펼쳐지는데, 3일 만에 테르모필레가 뚫리면서 아르테미시움의 그리스 해군도 방어를 포기하고 철수한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점령하고 시가지를 방화한 뒤[9], 펠로폰네소스 일대까지 공격하려 하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속아 넘어가 지형적으로 대단히 불리한 살라미스 해협으로 들어가(함대가 너무 대규모다 보니 좁은 해협에서는 그리스 함대보다 불리하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하고 테실리아로 돌아가서, 겨울이 다가오자 마르도니오스에게 상당수 병력을 떼어주고 크세르크세스 자신은 철수한다.


1.4. 페르시아의 3차 그리스 원정 (BC 479)[편집]


파일:Thermopylae_War2.png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리스 원정에 대한 권한을 이어받은 마르도니오스는 겨울이 지난 다음에 재차 그리스 원정을 기도한다. 마르도니오스의 페르시아군은 1차로 아테네를 헬리온 동맹에서 떼어내고자 시도하지만 실패하자, 재차 남하해 아테네를 또 불태운다. 이에 살라미스로 피신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계속 지원을 요청했고,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의 힘을 합쳐 중장보병만 3만 명에 달하는 원정군을 파견한다. 여기에 아테네 중장보병 8000과 합류한 뒤 플라타이아이로 진격해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 전투를 벌여 페르시아군을 격파[10], 동시에 그리스 해군은 이오니아 지역의 미칼레 전투에서 요새를 쌓고 버티는 페르시아 해군을 격파해 페르시아군을 그리스 본토에서 밀어내게 된다.


1.5. 이후의 전쟁과 페르시아의 반응 (BC 478 ~ BC 449)[편집]


페르시아의 침공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를 몰아낸 여세를 타고 세력 확장을 꾀했으며, 이오니아 일대를 포함한 에게해 전체를 넘어서 헬레스폰토스와 흑해, 키프로스와 이집트까지 세력확대를 꾀했다.

또한 이러한 활동에 스파르타가 소극적으로 움직인 반면[11] 아테네는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를 꾀해 BC 478~BC 477년 사이에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고 페르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주도하게 되었다. 에게 해 북부의 마지막 페르시아 기지였던 에이온을 BC 476년에 함락시켰고, BC 466년에는 대규모 델로스 동맹군을 소아시아지역으로 파견해 이오니아 지역을 모두 점령한다. 이집트는 BC 459년과 BC 454년에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페르시아에 진압당했고, 키프로스 역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치열한 쟁탈전이 펼쳐졌다. 결국 지친 양국은 BC 449년에 칼리아스 화약을 맺어 전쟁을 끝낸다.

단순히 이렇게만 보면 꽤나 열심히 치고받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페르시아는 고질적인 왕위다툼에 신경쓰느라 방어 위주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으로 바꾸느라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한 감이 있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 전쟁을 통해 깡패로 성장했다.

일단은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성의 왼쪽에 조금 큰 균열을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가 사분오열 됐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아테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페르시아인들》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일대에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에게해-이오니아 일대만 영향을 끼쳤다면 모를까, 상당히 중요한 속주인 이집트 및 시리아 근방까지도 영향이 갔고, 덕분에 이집트는 페르시아 속주 중 가장 반항적인 속주로 존재하게 된다. 트라키아 일대의 속주는 유지가 어려운 시점까지 가기도 했고 이오니아에서 세금 거두라면서 지속적으로 갈굼받은 지역 총독들 입장에선 상당히 큰 문제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이 용병으로 페르시아 왕위다툼에 개입하기도 했고.[12]


1.6. 아테네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몰락 (BC 431 ~ 338)[편집]


자만이 뻗친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구성해 동맹의 국가들에게 횡포를 부리며 스파르타에 오만을 부렸다. 결국 이를 보다 못 한 전투종족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대립하던 남그리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이 발발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도하에 육지에서의 싸움을 피하고 해군으로 응수하는 전략으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전쟁의 장기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도시민의 1/3이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터지고 페리클레스도 이것에 걸려 죽자 아테네는 국력이 눈에 띄게 약해진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퇴장으로 정치의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탄 알키비아데스[13]와 같은 신흥 정치가가 등장하여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라쿠사 전쟁을 제안한다. 시민들은 이것을 지지했지만 알키비아데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다른 정치세력의 공작으로 알키비아데스는 성상파괴의 누명을 뒤집어 쓴 채 망명하고 그 결과 그 없이 시라쿠사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전염병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놔두고 시칠리아 섬까지 가서 그 섬의 가장 크고 강력한 도시인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고자 한 것이라 뜬금없어 보이나 당시 아테네 인들의 생각은 이 도시를 점령해 그 자원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하는 데 보태자 이런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알키비아데스가 추방당한 뒤 이것을 앞장서서 반대한 니키아스[14]가 이 전쟁을 맡게 되자 지휘는 엉망으로 되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코린토스의 지원 병력이 상륙에 성공하여 지원병을 모집하고 아테네군의 포위를 저지하기 시작했다.[15][16] 또한 시라쿠사 역시 매우 강력한 대도시였으므로 공략은 쉽지 않았다. 아테네는 그야말로 물량을 모두 투입하여 어떻게든 승리코자했으나 마침내 대패하여 이 병력과 물량이 시칠리아 섬에서 소멸됨으로써 아테네는 100여 척의 함대를 제외하고 모든 전쟁 물자를 손실한 끔직한 타격을 입는다.

그 뒤 알키비아데스를 불러들여 100여 척의 함대로 계속 버티다 재정확보를 위해 알키비아데스가 일등항해사에게 관리를 맡기고 자리를 뜬 상태에서 일등항해사가 멋대로 스파르타 해군에게 덤벼 가벼운 패배를 당하자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그는 사령관 지위에서 쫒겨난다. 그 뒤로 아테네는 남은 국고와 인력을 쥐어짜내어 새로이 편성한 함대로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을 격파하지만 전투 직후 풍랑을 만나 생존자 구출과 시신 수습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시민들은 대단히 분노하여[17] 지휘관들을 모두 처형해버린다. 그 뒤 경험있는 지휘관이 부족한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게 가볍게 격퇴되고[18]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마무리된다.

그 뒤 아테네를 점령한 스파르타는 스파르타대로 국력을 이 전쟁에 너무 소모해서 전후 아테네의 위임통치조차 힘에 부칠 지경이 되었고 전후처리에 불만을 품은 코린토스와 테베가 반기를 들어 재차 코린토스 전쟁, 스파르타-테베 전쟁을 치르며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 사이에 아테네는 2차 델로스 동맹을 건설해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했다.) 스파르타는 이때 테베에게 당한 패배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우선 총 전투 인원이 2만 명이 조금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이 이 한 싸움의 패배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며 스파르타의 피 정복민인 헬롯인들이 승자인 테베에 의해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19]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패권국이 된 테베는 페르시아 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동족 그리스인들을 배신하고 페르시아 편에서 싸우다 아테네군에게 개박살났었다.

그러나 테베의 영광도 잠시, 장창병과 기병으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가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면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차례로 마케도니아에 접수당했다. 이를 보다못한 두 원수지간인 아테네와 테베는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와 대결한다. 테베와 아테네는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인구가 많은 도시 국가들이였으므로 이들의 연합은 그만큼 마케도니아의 침략이 위협적이였다는 말이었다. 이때 마케도니아의 왕인 필립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훗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는 이 연합군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격파하여 (이때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을 지휘하였다) 이 두 강력한 도시들의 그리스에서의 패권다툼을 종식시키고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새로운 패자가 되고 만다.

그 이후 한때 종주국이었던 테베는 필립포스가 죽고 알렉산드로스가 즉위한 직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역으로 진압당하여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시민 전원이 노예로 팔림으로써 소멸당해버린다.


1.7. 후대의 해석[편집]




2.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편집]


현대에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고대에는 이것도 페르시아 전쟁이라 한 경우가 있다.


3. 로마-페르시아 전쟁[편집]


이것도 페르시아 전쟁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해당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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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냐면 그리스는 페르시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토와 인구가 열세였던 터라 훨씬 거대한 세력인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거기다 페르시아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던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를 통해 유능한 왕중왕이 직접 국정을 총괄하고 군통수권을 장악하여 국가간 전면전에 매우 유리한 시스템이었던 반면, 그리스는 수십여 개의 폴리스로 쪼개져 각자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면서 내전까지 치를 정도로 느슨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에 불과했다. 국력 자체도 페르시아가 압도적인 우위였고, 그 국력을 효율적으로 집중시키는 제도조차 페르시아가 훨씬 발달되어 있었다.[2] 페르시아가 600척을 반란군이 380척의 함대를 거느렸다.[3] 여담으로 이 사절단 사건 전까지만 해도 아테네는 페르시아 입장에선 말 그대로 듣보잡이었다. 사절단을 맞이한 페르시아 측에서 한 말이 "그대들은 대체 누구이고, 어디서 온 것인가?"였을 정도.[4] 사실 BC 490년이 아니라 이것을 1차 원정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5] 아테네는 민주정 국가 답게 사신들을 재판에 세워 사형을 때렸고, 스파르타는 재판이고 뭐고 없이 흙과 물을 가져가고 싶으면 직접 우물에 들어가서 가져가라는 말을 곁들이면서 사신들을 우물에 빠뜨려 죽였다. 참고로 스파르타의 이 사건은 영화 300에서 레오니다스가 페르시아 사신을 걷어차 구덩이에 빠뜨리는 장면의 원형이기도 하다.[6] 1000년도 더 뒤에 벌어진 여수전쟁에 동원된 수나라군보다 200만이나 더 많다.[7] 완전한 과장보다는, "어떤 병종 몇 명, 어떤 병종 몇 명"하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무식하게 그냥 합친 수치로 본다. 그리스는 신분에 따라 병종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지만, 페르시아에서 병종이란 그냥 병사특기였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한 사람이 여러 개를 겸했으므로 중복해서 세어진 수치가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경궁사 1만 명, 경보병 1만 명, 중장보병 1만 명이라고 하면 그리스에서는 무조건 3만이지만, 페르시아에서는 1만 명의 병사가 상황에 따라 활도 쏘고 중무장도 하고 경무장도 하는 식으로 중복집계될 수 있다.[8]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최대 도시(?) 시라쿠사의 경우 카르타고와 전쟁 중이어서 참여할 수가 없었다.[9] 이때 페르시아군이 약탈하려 해도 아테네 시민들이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전부 가지고 도주한 터라 약탈할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분풀이로 시가지를 방화한 것.[10] 전투초반에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의 견제와 물량에 상당히 말려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됐고 결국 폴리스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여 임전무퇴 스파르타, 제일 원한을 많이 사서 도망갈 수가 없는 아테네, 아테네가 없으면 테베한테 맨날 맞고사는 플라타이아이인 이렇게 셋만 남았다. 날이 밝고 이 사실을 안 스파르타 사령관 파우사니아스는 어이가 없어서 아테네에 사자를 보내 우리끼리라도 싸우다 죽자고 하고, 아테네와 플라타이아이도 동의하였다. 그렇게 싸운 결과 전투에서는 불리했으나 페르시아 사령관 마르도니우스가 왠지 앞에서 싸우다 죽어버리면서 전쟁에 이겼다.[11] 왜냐면 스파르타는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의 반란 때문에 장기원정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12] 이 페르시아 내전에서 그리스 용병으로 참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로도 유명한 크세노폰이다. 그가 남긴 전쟁 회고록이 바로 아나바시스.[13] 소크라테스의 애제자 중 하나로 유명하다.[14] 니키아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부유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문학에도 많은 후원을 하여 시민들에게 유력한 정치가로 여겨졌다. 여러 승리를 기록하면서 (어렵고 긴 임무를 기피한 경향에 힘입어) 패배한 일도 없었고 겸손한 태도가 시민들의 호감을 샀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니키아스 스스로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군 지휘관의 한 명으로 억지로 앉혀지게 되었다. 시칠리아에 파견된 장군 세 명 중 알키비아데스는 도주하고 라마코스는 전사하였는데 유일하게 남은 장군인 니키아스는 애초에 반대하던 원정이라 열의도 없었고 마침 그의 건강마저 좋지않았다. 특유의 지나친 신중함까지 더해 원정군은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이는 재앙이 되었다.[15] 게다가 시라쿠사 인들은 스파르타 출신의 도리아인들이었으므로 스파르타의 지원을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했다.[16] 스파르타의 초기 지원이 적극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각 2척으로 구성된 함대에 스파르타 완전시민 병사는 한 명도 없었고 지휘관 귈립포스조차 모타케스(열등자) 신분이었다.[17] 전사자 시신 수습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 풍조에다 때마침 있었던 제전 기간이 전사자들을 상기시켜 시민들을 격분시켰다.[18] 마지막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가 잠시 등장해 해군의 위치가 안 좋다고 조언하며 자신을 전시 작전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사령관들은 거부하였다.[19] 스파르타의 인구 구성원은 1만에서 2만 사이의 전사 계급인 스파르타 시민과 그들을 먹여 살리는 수십만의 노예신분인 헬롯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테베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이로 인해 이 시민의 절반 이상이 죽고 수십만의 헬롯이 해방되어 독립되었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이 사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파괴된 것이다. 이 이후로 스파르타는 약소국으로 추락하여 다시는 그리스 내에서의 패권을 경쟁하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