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차일드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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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어차일드 항공기
2.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
3. 페어차일드 반도체
3.1. 창업초기
3.2. 잇다른 퇴사
3.3. 이후 몰락의 길
3.4. 온세미컨덕터 코리아(구 페어차일드 코리아)


1. 페어차일드 항공기[편집]


1927년 셔먼 페어차일드(Sherman Fairchild)가 설립한 회사이다. 주로 항공기와 카메라 장비들을 제작하였다. 생산기종 중 가장 유명한 것이 A-10 썬더볼트2 공격기. A-10 외에도 C-123 수송기와 그 외 여러 민수용 항공기를 제작했다. 1965년에 P-47, F-84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리퍼블릭을, 1996년에는 독일의 도르니에를 인수하였다. 한때 M16 소총을 처음 만들었던 아말라이트를 자회사로 두었다.

2003년 M7 에어로 스페이스 사에 인수됨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M7 에어로 스페이스 사는 다시 이스라엘의 유명 방위산업체인 엘빗 사에 인수되었다.

포커 F27을 라이센스 생산한 적도 있으며 FH-227이라는 확장형도 생산하였다.

생산 엔진

2.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편집]


페어차일드 키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는 1927년 셔먼 페어차일드(Sherman Fairchild)가 설립한 페어차일드 항공기 (Fairchild Aviation)가 전신이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4년 페어차일드 항공기는 사명을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로 변경한다. 사업 분야에 기존의 항공기 산업과 더불어 엑스레이 카메라, 총기 싱크로나이저, 레이더 카메라 등의 군수물품과 음향기기 산업이 추가되었다. 군수물품은 2차 세계대전 특수로 이 회사의 주요한 수요가 되었다. 음향기기 중에서는 1950년대 후반 Variable-Mu 방식을 처음 선보였던 Fairchild 660/670 튜브 컴프레서로 음향 엔지니어링 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주로 방송송출과정에서 시그널의 과입력으로 인한 장비의 손상을 막기 위한 피크 리미터로 사용되었다. 이 제품은 지금까지도 다른 버라이어블 뮤 방식의 컴프레서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재까지도 Waves, Universal Audio 등 여러 플러그인 회사들에서는 이 제품을 에뮬레이팅한 소프트웨어를 내놓고 있다. 가끔 온라인 전자상거래 시장에도 매물이 보이는데 Fairchild 670은 올라오면 무려 400000달러 (한화 약 5억원) 정도로 거래되는 컴프레서중에서도 가장 고가의 가격을 자랑하고 있다.

3. 페어차일드 반도체[편집]


풀네임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주식회사(Fairchild Semiconductor Inc.)로 주로 페어차일드라고 한다. 산호세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세계최초로 집적회로를 상용화한 기업이다. IT 업계에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이 일어나게 한 한국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기업이다.[1] 1957년도에 창업해서 1960년대에 미국 IT의 상징인 실리콘 밸리의 혁신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유명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IC 분야로는 꽤 알아주는 반도체 기업 중 하나이다.


3.1. 창업초기[편집]


트랜지스터를 발명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는 쇼클리 반도체(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1956년에 설립했다. 그리고 8명의 젊은 박사를 엔지니어로 고용해 PNPN형 4층 다이오드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얼마 안 가 윌리엄 쇼클리의 특유의 편집증에 가까운 경영 방식에 갈등을 겪게 됐다. 이듬해인 1957년 그 엔지니어들은 쇼클리 반도체를 떠나 셔먼 페어차일드의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Fairchild Camera and Instrument)로 이직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했다. 자신의 엔지니어들이 페어차일드로 이직하자 윌리엄 쇼클리는 그 8명을 배신자라 비난했다. IT 업계의 경영공부를 하면서 한번쯤 듣게 되는 유명한 이야기인 8명의 배신자(Traitrous eight)이 바로 이들이다. 8명의 배신자는 줄리우스 블랭크, 빅터 그리니치, 진 호어니, 유진 클라이너, 제이 래스트,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와, 셸던 로버츠이다. 그 당시 반도체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재료는 현대의 실리콘이 아닌 저마늄이었는데,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처음부터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목표로 개발했다.[2]

진 호어니는 1959년 트랜지스터 생산을 기존의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를 접합하는 방식에서, 벨 연구소의 모하메드 아탈라 박사의 열 산화(Thermal Oxidation) 방식의 패시베이션(Surface Passivation) 방식을 도입해, 마치 사진 인화하는 것처럼 반도체에 불순물을 확산시켜 N, P형 반도체를 만들고 금속 박막을 증착하는 플래너 공정(Planar Process) 기술을 개발했다. 플래너 트랜지스터는 기존 방식의 트랜지스터에 비해 값도 싸고 내구성과 성능은 크게 향상해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페어차일드 반도체 2N697 트랜지스터는 IBM에 개당 150 달러로 납품했다.

2년 후인 1961년 로버트 노이스는 플래너 공정으로 4개 트랜지스터 회로를 하나의 실리콘 웨이퍼에 집적한 반도체를 설계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실리콘 집적 회로가 탄생했다. 그러나 집적 회로는 같은 해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의 잭 킬비도 개발했고, 특허는 이쪽에서 취득하였다. 그러나 업계는 식각한 반도체에 설계된 전자 회로를 구현하기 위해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의 미세 전선으로 배선하는 방식 대신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박막 증착(Thin-Film Deposition)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이쪽을 더 선호하였고, 결국 현대의 반도체 공정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1964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MOSFET를 최초로 상용화했다. MOSFET는 1959년 벨 연구소의 모하메드 아탈라 박사와 한국계 미국인 강대원 박사가 개발했으나, 벨 연구소보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이를 사용하여 아날로그 연산 증폭기(Operational Amplifier)를 설계했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아날로그 집적 회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66년에는 매출액 상으로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에 이어 반도체 업계 2위를 달성하였다.

3.2. 잇다른 퇴사[편집]


아날로그 집적 회로 시장을 장악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디지털 집적 회로 시장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61년 디지털 집적 회로의 첫 번째 제품으로 저항 트랜지스터 논리(Resistor-Transistor Logic) 집적 회로를 개발했고, NASA에 납품해 아폴로 계획의 우주선 유도 컴퓨터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RTL 집적 회로는 매우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상업용으로는 이윤이 작았고, 노이즈에 취약해 방위 산업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았다. 1964년 텍사스 인스트루먼츠에서 트랜지스터 트랜지스터 논리(Transistor-Transistor Logic) 집적 회로를 만들었고 수많은 반도체 회사들이 호환 소자를 만들면서 사실상 산업 표준이 되었지만, 페어차일드는 이듬해인 1965년에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논리(Diodes-Transistor Logic) 집적 회로를 개발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회사의 구조상 문제가 있었는데,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에 있었으나 뉴욕에 있는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의 자회사였던 탓에 뉴욕에서 경영했다. 이로 인해 본사는 자회사간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못했을 뿐더러 반도체 산업에 무지해 갈등을 겪을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1967년에 적자전환하면서 갈등이 폭발하였다. 1967년 이사회에서 비수익 사업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해 당시 CEO였던 존 카터는 사임하였다. 이후로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만든 중추였던 '8명의 배신자'는 1969년까지 전부 회사를 떠났다. 제이 래스트, 진 호어니, 셸던 로버츠, 유진 클라이너는 전자 계측 장비 회사 텔레다인의 전신인 Amelco를 설립하기 위해 이미 1961년에 떠났지만[3], 로버트 노이스, 고든 무어, 빅터 그리니치는 1968년에 줄리우스 블랭크는 이듬해인 1969년에 떠났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난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난 해였던 1968년에 인텔을 설립했다. 같은 페어차일드 반도체 출신이면서, 트랜지스터 게이트로 금속 박막을 증착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결정 실리콘으로 사용하는 기술이었던, 자기 정렬 게이트(Self-Aligned Gate)라는 혁신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한 앤드류 그로브와 레슬리 배다스를 영입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중역들이 인텔에 합류하였다. 같은 해인 1969년에 제리 샌더스(Jerry Sanders)는 7명의 이사와 같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떠나 5월 1일에 AMD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페어차일드 출신 직원들이 만든 반도체 회사는 약 30여개에 이른다. 다른 기업으로 창업을 하는 사람들을 "페어차일드 런"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뛰쳐나온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IT 업계의 중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71년 칼럼니스트 돈 호플러는 이 지역을 '실리콘밸리'라 불렀고, 이 때 이 이름이 탄생했다.

3.3. 이후 몰락의 길[편집]


1970년 대에는 벨 연구소 다음으로 상업용 CCD를 생산하였다. 디지털 영상 센서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자회사인 페어차일드 이미징에서 오랫동안 생산했다. 또한 이 시기에 특이하게도 페어차일드 채널 F라는 비디오 게임기를 출시했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의 롬 카트리지 교환식 비디오 게임기였다.

파일:external/www.old-computers.com/fairchild_channel-f_1.jpg
- 채널 F의 사진 -

하지만 이후로 연속되는 삽질과 경쟁업체들의 호조로 인해서 시장에서 점점 더 멀어졌고 1979년도에 프랑스 석유 기업인 슐룸베르거에 인수되었다.

1987년 슐룸베르거는 일본의 후지쯔에 3억 달러에 매각할 뻔 했지만 당시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통상 마찰로 인한 미국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같은 해 내셔널 세미컨덕터에 매각했다. 이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뒤 1997년도에 사모펀드 운영 회사의 도움을 받아 독립하였다.

2016년 9월 19일 온 세미컨덕터[4]가 26억 달러에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인수해 흡수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4. 온세미컨덕터 코리아(구 페어차일드 코리아)[편집]


페어차일드의 한국에서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1967년에 구로공단에서 처음 공장을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1만 명의 직원이 한 달에 2천만 개의 반도체를 만들었다.[5] 수출액은 1973년에 2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참고로 당시 노동자의 월급이 2만2천 원이던 시대였다.[6] 하지만 본사의 매출감소와 2년 연속 적자, 당시 한국에서 불고 있는 노사문제가 불거지는 등 문제가 생긴데다 점차 한국의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1989년에 철수했다. [7]

하지만 1998년도에 삼성전자의 전력용 반도체 부문을 4억 5,000만 달러에 인수함으로써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전력용 반도체 전문 회사이다. 당시 삼성에서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매각한 사업을 잽싸게 사들였는데 이것이 페어차일드의 부활을 촉발했다. 페어차일드는 이후 전력용 반도체 부문에서 2003년과 2004년에 각각 5억 5,000만 달러와 5억 8,1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는 전체 매출의 약 40%를 차지했으며 계열사 중 최대 규모에 속했다.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지역에 연구소와 생산 공장이 함께 있으며, 2012년 까지만 하더라도 약 1,8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경영악화로, 많은 엔지니어들과 생산직들을 해고하면서 지금은 약 1,600 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특별시와 경상북도 구미시에 영업사무소, 경기도 화성시에 자동화 물류센터가 있다.
홍콩에도 물류창고가 있었으나(2005~2014)이후 매각, 해외사이트는 반도체 후공정 사이트가 있으나 채용에서는 별개의 회사이다.
반도체가 경기사이클이 큰 산업이다 보니 수시로 셧다운과 정리해고가 남발된다. 정리해고시 국내기업처럼 위로금,특별보상금 이런 거 일체 없다. 최소한의 퇴직금만 손에 쥐고 쫒겨 난다.
노조는 없고 대신 노사협의회가 있는데 어용이다. 노사협의회 사무실은 전화만 있고 아무도 근무하지 않고 정리해고시 상담을 요구하면 회사편에서 노동자들을 무안주고 축출시키기 바쁘다. 그 댓가로 노사협의회 간부들은 고용을 보장 받는다.
드라마 송곳에서 푸르미유통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기업으로서 한국의 가장 안좋은 모습은 전부 다 흡수해서 완전 토착화 된 기업이다. 노동자탄압 정리해고 기술빼돌리기 탈세 등.
대부분 임원은 미국인인데 한국사람을 노예나 열등한 민족으로 보고 컨퍼런스콜시에 쌍욕도 마다 않는다. 이들에게는 노동자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오직 미국인들한테만 쥐어진 특권으로 여겨진다.

여담으로 생산직을 뽑을 때 경기도 내의 특성화고등학교에서 삼성전자, LG디스플레이와 함께 고졸들을 가장 많이 뽑는 기업 중 하나이다. 다만 현재에 들어 특성화고에서도 진학을 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까다로운 면접은 그대로여서 대학보다 합격이 더 힘든 곳이라는 말이 생겼다. 또한 몇 년 전만 해도 여성의 취업율이 높았는데[8]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남녀고용평등상 등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고된 노동 때문에 여성들의 잦은 퇴사로 인해서 지금은 얼떨결에 남녀평준화가 되었다.(...)
덕분에 노동자의 질이 상대히 양극화 되어있다. 기획마케팅엔지니어링-명문대출신, 현장라인-고졸위주.
고졸출신들은 낮은 임금때문에 항상 피해의식에 젖어 있고 대부분 회사의 부정은 이들로부터 비롯된다. 대졸자와 밥도 따로 먹고 외부에서 능력있는 경력자가 오면 피해의식때문에 극도로 경계한다. 주로 부천의 토종 성씨인 원씨계열들 중에 고졸자로 입사한 생산직 사원들이 많다.


[1] 왜냐하면 이들의 혁신이 없었다면 반도체로 먹고 사는 한국에게도 답이 없었을 수밖에...[2] 이 여덟명이 실리콘을 이용한 반도체를 만들 게 된 이유가 있다. 반도체에 전압을(순방향으로) 일정 수준 이상으로 걸어야 전압이 제대로 인가가 되어 회로가 작동할 수 있는데, 이 일정 수준의 전압을 전위장벽(문턱전압)이라고 한다. 저마늄은 그 전위장벽이 0.3V정도, 실리콘은 0.7V정도로, 딱 보면 저마늄을 사용하면 더 낮은 전압으로도 회로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고 전압 강하도 0.4V가 적어 효율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반도체는 본래 절대영도를 가정하고 만들었고 상온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끔 발전시킨 것이기 때문에 절대영도가 아닌 상온에선 반도체에 원래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역전류(역포화전류)가 흐르게된다.(이는 온도가 높아질수록 심해진다. 반도체가 열에 약한 이유가 이 때문) 실리콘은 전위장벽이 0.7V라 괜찮지만 저마늄은 전위장벽이 낮아 전압이 충분히 가해지지 않으면 원래 흘러야 할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전류가 너무 쉽게 흐르게되어 최근에 나오는 모든 반도체는 다 실리콘을 쓴다. 물론 실리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온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기존 저마늄 대신 실리콘을 통해 반도체(트렌지스터)를 만들게 됐고, 이게 오늘날까지 계속 발전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3] 진 호어니는 이후 1967년 텔레다인을 떠나 아날로그 반도체 전문 기업, 인터실도 설립했다.[4] 모토로라에서 1999년 반도체 부품 사업부가 분사되어 나온 회사.[5]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반도체는 많은 노동이 필요한 노동 집약적 산업 중 하나였다.[6] 1974년 10월 5일 경향신문 3페이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고.[7] 이때 노동자들이 23.6% 임금인상을 요구했으니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 밖에...[8] 남자는 군대문제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