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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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왕국 초대 국왕
페타르 1세
Петар I

출생
1844년 7월 11일
세르비아 공국 베오그라드
사망
1921년 8월 16일 (향년 77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베오그라드
재위기간
세르비아 국왕
1903년 6월 15일 ~ 1918년 12월 1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국왕
1918년 6월 15일 ~ 1921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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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아버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어머니
페르시다 네나도비치
배우자
몬테네그로의 조르카[1]
자녀
옐레나, 밀레나, 조르제, 알렉산다르, 안드레이


1. 개요
2. 생애
2.1. 자녀
3. 여담



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


2. 생애[편집]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오브레노비치 왕가와의 세르비아 왕위다툼에서 밀려나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재야에서 지내며 살아갈 운명에 처해졌었다.

그러나 오브레노비치 왕가 출신의 알렉산다르 1세가 폭정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는 알렉산다르는 입헌군주제전제군주제로 바꾸고, 세르비아인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12살 연상의 평민 여자를 왕비로 맞았다. 결국 민심이 폭발한 결과 1903년 6월 11일 알렉산다르 1세는 살해당하고 당시 59세였던 페타르 1세가 어부지리로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자세한 건 알렉산다르 1세(세르비아) 문서 참조. 아주 가관이다...

제1차 세르비아 봉기 100주년이 되는 1904년 대관식을 올렸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제군주제든 입헌군주제든 군주제 체제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전임자를 살해한 쿠데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페타르 1세의 대관식에도 장인댁인 몬테네그로 왕국불가리아 왕국만 대표를 파견했다. 다만, 전임 왕인 알렉산다르도 타국 왕족들과 귀족들도 납득할 정도로 삽질과 폭정을 심하게 한 데다 일반 평민과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비난도 형식적일 뿐이었다.[1] 게다가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그 귀천상혼 결혼 + 후계자 선정 때문에 나라를 분열시킬 뻔했기 때문에 세르비아 국내 여론은 말할 것도 없다.

발칸 전쟁 때 세르비아군 최고 사령관이기도 했다. 70세[2]라는 초고령에 건강 문제를 이유로 1차 대전 직전인 1914년 6월 24일, 그것도 사라예보 사건 나흘 전 알렉산다르 왕태자를 섭정(대리청정)으로 내세웠다.

이후 세르비아가 승전국이 되면서 그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병합해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해방자 페타르 왕(Kralj Petar oslobodilac)으로 평가받으며, 사후에도 국부로 평가받았지만, 티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격하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재평가되었고, 현재는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위인으로 평가된다.


2.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옐레나 페트로브나
(Elena Petrovna)
1884년 11월 4일
1962년 10월 16일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슬하 1남 1녀
2녀
밀레나
(Milena)
1886년 4월 28일
1887년 12월 21일

1남
게오르게 카라조르제비치 폐세자
(George, Crown Prince of Yugoslavi)
1887년 9월 8일
1972년 10월 17일
라드밀랴 라도니치
2남
알렉산다르 1세
(Alexander I)
1888년 12월 16일
1934년 10월 9일
루마니아 왕국의 마리야
슬하 3남
3남
안드레아 왕자
(Prince Andrea)
1890년 3월 16일
1890년 3월 16일


몬테네그로 왕국 국왕 니콜라 1세의 큰딸 조르카(1864 ~ 1890)[3]와 1883년 결혼하여 3남 2녀(실질적으론 2남 1녀만 성년기까지 생존)를 낳았다. 39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 이유는 결혼 당시 아버지가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의해 대공위를 뺏기고 본인 또한 오랫동안 재야에서 머물러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

조르카는 1890년 출산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고 이후 페타르 1세는 재혼하지 않았다.


3. 여담[편집]


그를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했다.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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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왕실과 일반 평민간의 결혼이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야기이다.[2] 당시의 70세는 21세기의 90대와 다름없는 나이였다.[3] 원래 이름은 류비카였으나 결혼하면서 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