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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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세르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초대 국왕.
2. 생애[편집]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오브레노비치 왕가와의 세르비아 왕위다툼에서 밀려나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오랫동안 재야에서 지내며 살아갈 운명에 처해졌었다.
그러나 오브레노비치 왕가 출신의 알렉산다르 1세가 폭정을 일으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는 알렉산다르는 입헌군주제를 전제군주제로 바꾸고, 세르비아인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12살 연상의 평민 여자를 왕비로 맞았다. 결국 민심이 폭발한 결과 1903년 6월 11일 알렉산다르 1세는 살해당하고 당시 59세였던 페타르 1세가 어부지리로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자세한 건 알렉산다르 1세(세르비아) 문서 참조.
제1차 세르비아 봉기 100주년이 되는 1904년 대관식을 올렸다. 당시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전제군주제든 입헌군주제든 군주제 체제가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전임자를 살해한 쿠데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페타르 1세의 대관식에도 장인댁인 몬테네그로 왕국과 불가리아 왕국만 대표를 파견했다. 다만, 전임 왕인 알렉산다르도 타국 왕족들과 귀족들도 납득할 정도로 삽질과 폭정을 심하게 한 데다 일반 평민과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비난도 형식적일 뿐이었다.[1] 게다가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그 귀천상혼 결혼 + 후계자 선정 때문에 나라를 분열시킬 뻔했기 때문에 세르비아 국내 여론은 말할 것도 없다.
발칸 전쟁 때 세르비아군 최고 사령관이기도 했다. 70세[2] 라는 초고령에 건강 문제를 이유로 1차 대전 직전인 1914년 6월 24일, 그것도 사라예보 사건 나흘 전 알렉산다르 왕태자를 섭정(대리청정)으로 내세웠다.
이후 세르비아가 승전국이 되면서 그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병합해 1918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그래서 해방자 페타르 왕(Kralj Petar oslobodilac)으로 평가받으며, 사후에도 국부로 평가받았지만, 티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격하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발흥과 함께 재평가되었고, 현재는 세르비아와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위인으로 평가된다.
2.1. 자녀[편집]
몬테네그로 왕국 국왕 니콜라 1세의 큰딸 조르카(1864 ~ 1890)[3] 와 1883년 결혼하여 3남 2녀(실질적으론 2남 1녀만 성년기까지 생존)를 낳았다. 39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한 이유는 결혼 당시 아버지가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의해 대공위를 뺏기고 본인 또한 오랫동안 재야에서 머물러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
조르카는 1890년 출산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고 이후 페타르 1세는 재혼하지 않았다.
3. 여담[편집]
그를 소재로 한 영화도 개봉했다.
킹 페타르: 세계대전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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