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 vs 마라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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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두 선수의 팀 커리어 비교
3.1. 펠레
3.2. 디에고 마라도나
4. 두 선수의 개인 커리어 비교
4.1. 펠레
4.2. 디에고 마라도나
5. 평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펠레디에고 마라도나의 라이벌리에 대한 분쟁으로, 명실공히 20세기 축구사의 양대 산맥인 두 선수 중 누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가에 대한 떡밥이다.

펠레가 산투스 FC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전 세계를 호령하며 "축구 황제"라는 칭호를 얻은 이후 요한 크루이프 등 많은 선수들이 그의 아성에 도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펠레의 위상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단연 디에고 마라도나이다.

두 선수의 공통점으로는 클럽에서나 국가 대표로서나 역대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는 것이다. 펠레산투스 FC를 이끌고 전 세계의 강호를 박살냈으며 역대 최고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유일무이한 월드컵 3회 우승을 달성하였다면 마라도나는 상대적 약팀인 SSC 나폴리를 이끌고 구단 역사상 유일무이한 스쿠데토 2회와 UEFA컵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마찬가지로 상대적 약팀이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두 차례나 조국을 월드컵 결승으로 올렸을 뿐만 아니라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말 그대로 혼자서 지배하며 역사상 최고의 단일 대회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였다.[1]

20세기 축구사에 있어서 이들 이전에 최고였거나 이들 이후 그 아성에 근접했던 선수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페렌츠 푸스카스,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지네딘 지단, 부상 이전의 호나우두 등이 있었으나 모두 이들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이 여섯 명 중 현재까지도 펠레와 마라도나의 위상에 가장 근접한건 단연 크루이프다. 디 스테파노월드컵 불운과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점점 밀려나고 있고 [2], 푸스카스매직 마자르 시절 월드컵 활약상은 엄청났지만 레알 마드리드 시절 에이스 이미지를 디 스테파노에게 내준 점과 마찬가지로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점점 밀려나고 있다. 또한 베켄바워는 당대 크루이프에 밀린 2인자였는데다 수비수라는 포지션 약점이 있으며 지단메시호날두처럼 커리어 내내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꾸준히 보여준 적이 없었고, 동세대 경쟁자들[3]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며 최근에는 평가가 5~8위권, 심하면 10위 바깥으로 밀려날 때도 있을 정도이다. 호나우두의 경우에는 약관의 나이에 펠마를 소환하면서 둘의 위상에 근접한 평가와 이들을 뛰어넘을거라는 기대를 동시에 받았으나 알다시피 1998년 월드컵 결승전부터 시작된 슬럼프와 자기 관리 실패, 그리고 두 번의 십자인대 부상으로 기량이 이른 나이에 쇠퇴하고 펠마를 뛰어넘기는커녕 동세대 지단에게도 위상이 역전당하면서 역대 10위권도 간당간당한 상태다.


2. 상세[편집]


축구사에 영원히 남을 이 떡밥에서 마라도나의 손을 들어주는 사람은 마라도나는 펠레와 달리 월드컵 뿐 아니라 유럽리그에서마저 독보적인 업적을 쌓았다는 점, 더군다나 펠레와 같이 뛴 브라질의 축구대표팀 멤버 역시 호화찬란하기 그지 없는 데에 비해 마라도나와 같이 뛴 아르헨티나의 축구대표팀 멤버들의 경우는 거의 마라도나에게 의존한다는 점, 중하위권 수준인 나폴리UEFA컵 우승으로 이끈 주역 역시 마라도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펠레에게 훌륭한 동료가 많다는 말을 역으로 뒤집으면 그런 기라성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펠레가 당당히 최고로 빛난다는 소리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펠레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의 압도적인 골 기록, 17세의 나이에 기록한 1958년 스웨덴 월드컵 4강에서의 해트트릭, 결승에서 2골 기록, 월드컵을 3회 우승하게 만든 업적 등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펠레의 손을 들어준다. 또한, 펠레가 현역이던 시절은 유럽과 남미의 리그 수준이 차이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하는데, 실제로 펠레의 소속팀이었던 산투스 FC는 숱하게 유럽의 강호들에게 초청되어 투어 경기를 벌이면 대부분 압승을 거둘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펠레는 득점력 뿐만 아니라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6경기동안 28회의 키패스를 기록한 그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기회 창출 능력 역시 뛰어난 선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라도나는 선수 시절 도핑을 했다는 점 때문에 기량을 속였다고 커리어 전체를 부정하는 등, 약쟁이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의 경력은 비교 자체가 애매한 편이다. 펠레는 일선 코치나 감독으로 활동하지 않고 브라질 체육부 장관 등 스포츠 행정가로서 주로 활동한 반면,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는 등의 일선 감독으로 활동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펠레와 마라도나 둘은 경쟁 의식이 있는지 틈만 나면 서로를 디스한다. 펠레는 "그딴 약쟁이가 내 라이벌? 내 다음은 크루이프지"라고 까고[4] 마라도나는 "아이고ㅋㅋㅋㅋ 그 영감님 아직도 박물관 안 가셨음?"이라고 깐다. 펠레가 메시를 평가할 때도 "메시는 아직 크루이프, 플라티니, 디 스테파노 등 예전 스타들을 따라잡지 못했다"라고 하면서 마라도나를 쏙 빼놓을 정도.

두 사람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유치전 당시 벌였던 신경전 역시 매우 유명한데, 펠레가 브라질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일본을 지지하자[5] 마라도나는 펠레가 일본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을 지지했다. 덕택에 1995년 9월 한국의 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열린 한국 대표팀(당시 감독이 공석이라 전남 드래곤즈 감독이던 정병탁 감독이 감독대행 자격으로 지휘했다.)과 CA 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6]에 출전하기도 했다. 특히 이 경기는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약물 복용으로 인해 출장정지 징계를 받은 후 나선 첫 공식전이었기에 세계적인 관심을 끌기도 했다.[7]

2011년 6월 들어서부터 두 어르신들께서는 서로의 후계자를 두고 싸우기 시작하셨다. 마라도나는 네이마르를, 펠레는 리오넬 메시를 까면서 서로를 디스한다. 펠레가 먼저 유망주 네이마르가 메시보다 낫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시전하자 마라도나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영감이 약을 잘못 먹었나ㅋ 어지러워서 지가 뭔 말하는지도 모르나봄ㅋ 약이나 잘 먹으셈"이라고 어퍼컷을 날리며 서서히 발동걸린 이 라이벌 디스대전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죄없는 본인들 후계자들만 희생시키고 있다는 반응이다. 메시는 유망주와 비교당해 어이털리고 네이마르는 죄없이 거품이라고 폭풍 까이고...

실제 축구 실력과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과거 마라도나가 진행하던 토크쇼에 펠레가 게스트로 초정된 적이 있었는데, 이 토크쇼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과 등번호가 마킹된 유니폼을 교환하고 마라도나는 펠레를 칭찬(이라기보다는 까지 않는)하고, 펠레는 마라도나의 마약 끊기 노력을 크게 칭찬하는 등.



둘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일이 진행되었지만...마라도나가 먼저 헤딩 대결로 서로에게 헤딩해서 공을 넘겨주는 것을 제안하고, 즉석해서 성사되었다. 길게 가지 않고 결과만 이야기하자면 펠레가 이겼다. 심지어 마라도나는 자신보다 20살이나 더 먹은, 60대 무렵의 펠레에게 헤딩 실력으로 진 꼴이 되었다. 마라도나가 실수를 해서 공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펠레에게서 한 30cm 떨어진 채 바닥으로 직행...하던 것을 마라도나가 재빨리 캐치해서 펠레와 뜨거운 포옹하는 애드립으로 넘기며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제대로 봤다면 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진행하던 토크쇼에서 굴욕을 당했다.[8]


3. 두 선수의 팀 커리어 비교[편집]



3.1. 펠레[편집]


  • 산투스 FC (1956~1974)
    • 타사 브라지우: 1961, 1962, 1963, 1964, 1965,
    •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사[9]: 1968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58, 1960, 1961, 1962, 1964, 1965, 1967, 1968, 1969, 1973
    • 토르네이우 리우-상파울루: 1959, 1963, 1964, 1966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컵: 1962, 1963
    • 인터컨티넨탈 슈퍼컵: 1968




3.2. 디에고 마라도나[편집]


  • CA 보카 주니어스 (1981, 1995~1998)
    • 프리메라 디비시온: 1981 M[10]

  • FC 바르셀로나 (1982~1984)
    • 코파 델 레이: 1982-83
    • 코파 데 라리가[11]: 1982-83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우승: 1986, 준우승: 1990
    • 1979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979
    •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12]: 1993
    • FIFA 75주년 기념 대회: 1979


4. 두 선수의 개인 커리어 비교[편집]



4.1. 펠레[편집]


  • FIFA 발롱도르 명예상: 2013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58[13]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1970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14]: 2000
  • FIFA 공로훈장: 1984, 2014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MVP: 1959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959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3
  • 타사 브라지우 득점왕: 1961, 1963, 196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득점왕: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9, 1973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득점왕: 1965
  • 인터컨티넨탈컵 득점왕: 1962, 1963
  • 북미 축구 리그 올스타팀: 1975, 1976, 1977
  • FWA 공로상: 2018
  • 볼라 지 프라타: 197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타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15]: 1999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BBC 올해의 해외 스포츠 스타: 1970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평생 공로상: 2005
  • 로이터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OC 20세기의 운동 선수: 1999
  • IFFHS 20세기의 선수: 1999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4.2. 디에고 마라도나[편집]


  • 발롱도르 명예상: 199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FIFA 월드컵 골든볼: 1986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90
  • FIFA 월드컵 실버슈: 198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86, 1990
  • FIFA 월드컵 도움왕: 1986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U-20 월드컵 골든볼: 1979
  • FIFA U-20 월드컵 실버슈: 1979
  • 세리에 A 득점왕: 1987-88
  •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78 M, 1979 M, 1979 N, 1980 M, 1980 N[16]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87-88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85
  • 옹즈도르: 1986, 1987
  • 옹즈 드 옹즈: 1985, 1986, 1987, 1988, 1989
  • 구에린도르: 1984-85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79, 1986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86
  • 올림피아 데 오로: 1979,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4, 198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1981, 1986
  • FIFA 100: 2004
  • FIFA 세기의 선수[17]: 2000
  • FIFA 20세기 최고의 골: 2002[18]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골든풋: 2003
  • 올해의 유나이티드 프레스 국제선수상: 1986
  • 마르카 레전드: 1999
  • IFFHS 레전드: 2016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아르헨티나 역대 베스트 XI: 2015
  • 문도 데포르티보 바르셀로나 역대 베스트 XI: 2007[19]


5. 평가[편집]


2017년 이후 각국 축구 전문지에서 매긴 순위 합산[20]

세간의 평가는 펠레를 반수 정도는 위로 친다. 공신력이 어느 정도 보장된 기관에서 내놓는 역대 축구선수 랭킹을 보면 십중팔구는 펠레가 1위를 차지했고, 세기 말에도 각종 세기말 조사에서 펠레가 축구 선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고 엘 그라피코와 같은 아르헨티나 축구 잡지에서조차 마라도나가 아닌 펠레를 1위로 깔고 들어갈 정도였다.[21]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인을 뽑으면 축구계 대표로는 펠레가 들어가고 복싱무하마드 알리농구마이클 조던, 야구베이브 루스같은 타 종목 최고 선수들의 위에 랭크되는 결과도 자주 나온다. 실력이야 시대 차이가 많이 나니 마라도나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 그렇다 쳐도 축구 황제의 위상만큼은 도전자가 현재로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다. 그 이유는 월드컵 3회 우승 등 현재까지 전해지는 '축구 제국' 브라질의 위상을 처음으로 개척한 선구자이자 세계 국제 축구 대회의 중심축을 브라질로 옮겨놓은 인물일뿐만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큰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한 적도 없고 축구 진흥 및 홍보에 계속 힘쓰는 등 모범생의 이미지가 강한 펠레와 달리, 마라도나는 사생활 문제로 끊임없는 구설수에 오르고 금지 약물 복용이라는 흑역사가 존재한다는 점이 둘의 위상 차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마라도나가 알리, 조던, 루스 등과 비슷하거나 그들의 위에 설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베이브 루스나 마이클 조던은 이미 기록을 증명이 되었고, 베이브 루스는 투수, 타자로 모두 성공한 선수다. 통산 WAR만 봐도 이미 메이저 최고의 선수다. 마이클 조던이야 한시대의 아이콘이고 펠레, 알리와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힌다. 거기에 르브론도 조던을 넘어서진 못한다.

사실 구설수는 골프 황제라고 불리우는 타이거 우즈도 있다. 타이거 우즈도 사실 불륜에 섹스 스캔들이 있어서 구설수가 많지만 골프하면 누가 생각나냐 하면 대다수가 타이거 우즈를 꼽을 것이다. 지금 21세기에 위대한 선수로 칭하는 마이클 펠프스도 그렇고, 호날두와 메시도 똑같이 논란은 있다. 펠프스는 마약음주운전을 한 선수이지만 올림픽 최고의 선수로 불리운다. 결국 마라도나는 펠레라는 선수가 있기에 그런것이다.

단순히 시대의 흐름을 서술하면 20세기 말~2000년대 초까지는 마라도나가 은퇴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축구팬들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마라도나의 우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당시 마라도나의 경이적인 축구 실력을 눈앞에서 본 마라도나 세대들의 과거 폄하는 상당했는데, '마라도나가 펠레보다 축구 3배 잘한다.' '펠레는 유럽 왔으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축구 역사상 마라도나 같은 선수는 본 적이 없다.' '마라도나의 월드컵 우승 1번은 펠레의 월드컵 우승 3번을 능가하는 가치다.'등과 같은 말들이 기정사실로 돌아다녔을 정도.[22] 물론 반대로 펠레의 플레이를 젊은 시절에 직접 목격한 기성 세대의 의견은 반대였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펠레가 마라도나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은 기록만으로 축구선수를 평가하는 축알못 또는 좆문가 취급을 받는 수준이였는데, 상술한대로 전문가들도 고령에 가까울수록 펠레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조차 마라도나의 팬들에 의해 과거의 뽕에 취했다는 식의 폄하를 당했고, FIFA에서 20세기 최고의 선수를 선발할 때 온라인 투표애서 마라도나가 무려 7만 8000표로 2만 6000표을 얻은 펠레를 3배 차이로 따돌렸으며 이에 당황한 FIFA가 방식을 바꿔서 다른 투표를 한뒤 1위로 선정된 펠레, 그리고 기존 1위 마라도나를 공동수상자로 정했을 때 마라도나가 이에 반발하여 퇴장하자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이해한다는 반응부터 FIFA와 펠레의 커넥션에 대한 음모도 공공연하게 돌기도 했다. 하지만 마라도나가 은퇴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러 마라도나가 은퇴한 지 20년이 넘어갔다. 펠레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줄었지만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기억하는 사람도 역시 줄어가고 있다는 뜻.

그리고 2004년의 펠레 에테르노[23]를 시작으로 펠레의 영상 자료가 과거에 비해 많이 발굴되었다. 또한 적은 표본이긴 하지만 옵타 등 스포츠 통계 사이트에서 골 기록 외에도 키패스 등 다른 스탯에서도 현재의 슈퍼스타들에 모자를 것 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골 기록만 있고 영상 자료는 없던 과거에는 축구팬들이 펠레가 단순히 골만 많이 삽입하던 전형적인 스트라이커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상 자료들로 인해 축구팬들에게 축구 전반에 뛰어난 컴플리트 포워드로서의 모습으로 각인될 수 있었다.[24] 또한 도핑의 심각성이 두각되면서 마라도나 우위론이 그전에 비해서 적어지고 현재는 펠레의 평가가 올라가면서 역대 최고라는 위상이 더욱 드높아지는 모습이다.

다만 2017년에 포포투와 부트발에서 선정한 역대 TOP 100에서는 펠레가 포포투에서 3위, 심지어 부트발에서는 고작 4위로 선정되었으며 마라도나는 포포투에서 1위, 부트발에서는 2위로 선정되었고 2020년에도 포포투는 마라도나와 펠레를 각각 2, 3위로 선정하여 마라도나를 더 고평가 한 점을 보면 아직까지도 유럽 쪽에서는 펠레가 뛰지 않았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 그리고 현재까지도 마라도나의 위상이 건재함을 알 수 있다.다만 포포투의 경우 당초 2020년 메시를 1위로 했다가 마라도나가 사망하자 다시 마라도나를 1위로 바꾸는 등 기준이 불분명한지라 어느 정도 거르고 보는 것이 좋다.[25]

브라질에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제인지, 마라도나의 사망을 애도하면서 나온 '최고의 축구선수'라는 수사에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불만을 표하고 있다고 한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좀 황당할 정도의 자존심 싸움이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만큼 축구가 브라질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1] 이에 비견되는 단일 대회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로는 유로 1984미셸 플라티니가 있으나, 월드컵과 유로는 위상과 난이도에서 엄연히 차이가 나는 대회이다.[2] 물론 디스테파노 입장에서도 억울한것이, 27살에 레알에 와서 라리가 우승 8회, 29살에 생긴 챔스 5연패, 30살에 생긴 발롱도르 수상 2회를 달성했다. 첫 시상이 41살의 스탠리 매튜스에게 돌아가고 디스테파노가 2위를 차지한걸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3회를 챙긴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익히 아는 대회/시상들이 막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다. 실제로 29살에 챔스가 생긴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커녕 챔스 5연패를 해본 선수는 디스테파노의 팀동료 외에는 없다. 디스테파노는 자료/영상이 거의 안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논외로 치는 격이다. 실제로 그 시기를 지켜본 퍼거슨감독 같은 경우는 디스테파노를 마라도나 위에 뒀다.[3] 호나우두, 히바우두, 루이스 피구, 파벨 네드베드, 데이비드 베컴, 프란체스코 토티, 호나우지뉴[4] 그런데 크루이프는 막상 "그 녀석(마라도나)은 선수로서 나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한다.[5] 다만 여기에는 당시 FIFA 회장으로 장기 집권하며 독재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주앙 아벨란제의 입김도 상당히 들어가있었다.[6] 이 당시 '마라도나 복귀전'이라고 널리 홍보되어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카를로스 메넴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까지 경기장에 방문했는데, 하석주가 동점골을 넣기도 했다. 경기는 2:1로 보카 주니어스가 승리.[7] 참고로 일이 이렇게 되자 남미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다. 브라질이 일본 편에 붙고 이런 브라질의 영원한 앙숙인 아르헨티나가 한국 편에 붙자 역시 브라질에게 나라 전체가 잡아먹힐 뻔한 기억을 갖고 있는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와 함께 한국 편에 붙었고, 거기에 아르헨티나를 싫어하는 칠레가 일본 편을 들자 이번에는 또 칠레와 사이가 좋지 않은 페루볼리비아가 한국 편에 가담했다. 그러자 또 볼리비아를 싫어하는 파라과이가 일본에 붙었으니, 한마디로 아시아에서 터진 일에 남미 국가들이 서로 편을 가른 것이다.[8] 굳이 옹호하자면 펠레는 173cm의 키에도 불구하고 현역 시절에 세계 최고의 헤더 중 하나였던 선수고, 마라도나는 키도 펠레보다 8cm 더 작고 딱히 헤딩을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9] 1968년부터 1970년까지, 브라질의 공식 전국 리그였다.[10] 메트로폴리타노[11] 1982년부터 86년까지 존재했던 스페인의 리그컵[12] 1985년과 1993년에 열렸던 유로 우승자와 코파 아메리카 우승자의 경기[13] 최초, 최연소 수상 기록. 참고로 1982년 이전 월드컵 골든볼 수상 리스트는 가짜이다. 피파에서는 공식적으로 1982년부터 골든볼을 수상했으며 이전에 알려진 정보는 피파 공홈에도 축구 역사관련으로 저명한 RSSSF에서도 인정하지 않은 소스가 불분명한 정보이다. 하지만 1958년과 1970년에 만약 골든볼이 있었다면 펠레가 받을 가능성이 크다. 1998년 아르헨티나 언론 <클라린>에서도 소급적용한 역대 월드컵 mvp로 1958년 대회와 1970년 대회는 펠레가 뽑혔다.[14] 디에고 마라도나와 공동수상[15] 스포츠계 인물 중에서는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16] M: 메트로폴리타노, N: 나시오날[17] 펠레와 공동수상[18]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 전[19] 108,200명이 참여한 온라인 투표[20] 이 합산에서는 펠레가 1위를 차지하였으며, 비록 현역으로 뛰는 선수들의 평가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지만 마라도나는 메시에게 밀린 3위를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위 자료를 무작정 신뢰하는건 문제가 있다. 부트발 , 포포투를 제외한 대부분의 매체들이 공신력이 없으며 가장 중요한 부트발 , 포포투에서는 마라도나 > 펠레로 나왔기 때문. 그냥 참고만 하면 된다.[21] 단, 20세기 말은 마라도나의 도핑 적발 여파가 가시지 않아 그에 대한 평가가 박했다. 심하면 5위권조차 간당간당했을 정도.[22] 마라도나가 펠레보다 축구 3배 잘한다 이런 소리를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말하고 돌아다녔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를 또다른 측면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마라도나의 축구 실력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경이로웠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23] 펠레의 다큐멘터리 영상. 현존하는 펠레의 스페셜 영상 출처의 대부분은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쯤 펠레 에테르노에서의 펠레의 플레이가 아이러브사커 같은 축구 동영상 카페에 소개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24] 산투스 FC에서나 브라질에서나 펠레는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맡은 적이 그다지 많지 않다. 펠레는 4-2-4 포메이션의 최전방 공격수 2명 뒤에 위치했는데, 이를 현대적 관점으로 보자면 공격형 미드필더세컨드 스트라이커의 사이에 해당하지만, 당시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라는 포지션이 정립 되기 전이었다.[25] 다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펠레가 속했던 산투스는 유럽의 클럽들과 친선시합을 엄청나게 했고 대부분 압승했다. 유럽에서 나름의 부심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펠레 입장에선 당시 유럽 리그들이 브라질 리그보다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산투스보다 강한 클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유럽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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