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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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호세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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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1 MLB 올스타전 로고.png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91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1 KBO 리그 출루율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2001 KBO 리그 장타율왕

보유 기록
한시즌 최다 볼넷
127개 (2001년)
한시즌 최고 출루율
0.503 (2001년)
최고령 타자 출장
만 42세 8일 (2007년 5월 10일/인천 SK전)
최고령 타자 홈런
최고령 타자 안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6번
미키 테틀레튼
(1984~1987)

펠릭스 호세
(1988~1990)


제임스 퀴크
(1990~1991)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14번
스톰 데이비스
(1988~1989)

펠릭스 호세
(1990)


프레드 만리케
(199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번호 5번
밥 호너
(1988)

펠릭스 호세
(1990~1991)


스탠 로이어
(1992~199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번호 34번
대니 콕스
(1983~1988)

펠릭스 호세
(1991~1992)


톰 우반니
(1993~1995)
캔자스시티 로열스 등번호 34번
헥터 와그너
(1991)

펠릭스 호세
(1993~1995)


짐 피트슬리
(1997~1999)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4번
박성기
(1998.6.5.~1998)

호세
(1999)


결번
뉴욕 양키스 등번호 45번
칠리 데이비스
(1998~1999)

펠릭스 호세
(2000)


라이언 톰슨
(200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4번
결번

호세
(2001)


이용훈
(2002~200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등번호 8번
라이언 크리스텐슨
(2001)

펠릭스 호세
(2002~2003)


맷 카타
(2004)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9번
김명성
(1999~2001)

호세
(2006~2007)


손아섭
(2008)




파일:2013년펠릭스호세시구프로필.jpg

도밍고 펠릭스 안두하르 호세
Domingo Félix Andújar José

출생
1965년 5월 2일 (58세)
산토도밍고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
display: none; display: 도미니카 공화국"
행정구
]]
|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신체
186cm, 100kg
포지션
좌익수, 우익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양타
프로입단
1984년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 (OAK)
소속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88~1990)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90~1992)
캔자스시티 로열스 (1993~1995)
아세레로스 데 몽클로바 (1997)
올메카스 데 타바스코 (1997~1998)
나슈아 프라이드[1] (1998)
롯데 자이언츠 (1999)
뉴욕 양키스 (2000)
롯데 자이언츠 (2001)
디아블로스 로호스 델 멕시코 (2002)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2)
디아블로스 로호스 델 멕시코 (2003)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3)[2]
디아블로스 로호스 델 멕시코 (2004)
게레로스 데 오아하카 (2005)
롯데 자이언츠 (2006~2007)[3]
페리코스 데 푸에블라 (2007)
랭커스터 반스토머스 (2007)[4]
캘거리 바이퍼스[5] (2008)
링컨 솔트독스 (2008)[6]
샴버그 플라이어스[7] (2009)
카녜로스 데 로스 모치스 (2007/08~2008/09)

1. 개요
3. 연도별 주요 성적
4. 논란 및 사건 사고
4.1. 그라운드에서의 난동 모음
5. 여담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난 부산 갈매기의 가사는 모른다. 하지만 노랫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2007년 KBSN과의 인터뷰 中[8]


도미니카 공화국미국 국적의 前 야구 선수로 선수 시절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메이저리그에서 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자랑했는데 특히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롯데 자이언츠에서 맹활약한 덕에 부산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스타였고 지금도 역대 롯데 외국인 선수 중에서 빠지지 않고 이름이 언급되는 선수다.


2. 선수 경력[편집]


펠릭스 호세의 선수 경력



3.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장타율
출루율
1999
롯데
132
462
.327
151
29
3
36
(5위)
122
(2위)
93
12
79
119
(3위)
.636
(4위)
.425
(3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장타율
출루율
2001
롯데
117
367
.335
(4위)
123
20
2
36
(2위)
102
(3위)
90
7
127
(1위)
72
.695
(1위)
.503
(1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삼진
장타율
출루율
2006
롯데
122
415
.277
115
21
0
22
(2위)
78
(4위)
59
3
84
(2위)
83
.487
(3위)
.399
2007
23
86
.256
22
4
0
1
12
5
0
14
12
.337
.360
KBO 통산
(4시즌)
394
1330
.309
411
74
5
95
314
247
22
304
286
.586
.437


4.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4.1. 그라운드에서의 난동 모음[편집]




파일:배트를 던지는 호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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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칭 호세의 난.

대구아재: 호세야! 출출하제? 여 라면 한사발 묵으라!!

펠릭스 호세: 대구아재요! 고맙심더! 방망이 좀 가가소!

샤다라빠의 만화에서 패러디가 된 내용인데, 사실은 대구아재들이 호세에게 컵라면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하자 화가 난 호세가 방망이를 관중들에게 던지는 장면을 비꼬는 대사다.#




KBS 스포츠에서의 호세 사건사고 하이라이트.

역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때 호세가 홈런을 친 이후 정신나간 삼리건 관중들이 컵라면 국물을 비롯한 여러가지 오물을 경기장에 투척했고[10], 이에 열받은 호세는 야구 방망이를 대구 관중들에게 던졌다[11]. 이 사건은 10년 후, 훌리건의 레이저 포인터 사건을 비호할 때 인용된다.

물론 호세는 퇴장을 당하고 선수단도 경기를 거부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롯데는 연장 접전 끝에 삼성을 무너뜨리고 1999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호세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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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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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영쑤! 돈 두 댓!"
(Hey, Yeong-ssu! Don't do that!)[12]


인터뷰상으로 많이 해 봤었는데 방송으로 처음 하는데 호세 선수랑 제가 다들 참교육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떻게 호세 선수하고 사건이 있어서 선수생활하면서 그때부터 조금 잘하게 됐어요. 그래서 팬분들께서 참교육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도 그 부분을 인정을 합니다.

배영수 인터뷰[13]

그 외에도 2001년 9월 18일 마산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배영수가 자신에게 거의 몸에 맞는 공을 던져 볼넷으로 거르고 후속 타자로 나온 훌리안 얀에게 몸에 맞는 공을 던지자 1루에서 빛의 속도로 달려와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린 사건[14]이라든가, 헤이 영쑤![15]


파일:c0007088_52edcf6fc898b.jpg


2006년 8월 5일 문학에서 SK 와이번스 신승현과의 결투에서 보여준 일련의 행동[16]도 호세의 불같은 성격을 뒷받침해주는 일화로 남아 있다.

이렇듯 그가 타 구단 팬들과 선수들을 상대로 벌인 일대의 호세 무쌍은 아직도 야구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배영수에게 죽빵을 날린 이 사건 이후 배영수의 에이스 포텐이 터진 사실이 주목받으면서 배영수에게 날린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야갤에서 참교육이라는 찬양을 받게 된다. 더욱이 호세의 벤클에서 달아난 신승현이 이후 추락하면서 호세는 야갤에서 완전히 참교육자가 되어 버렸다.[17]

훗날 2021년, 베이스볼 코리아와의 화상 인터뷰를 통해 해당 사건과 관련해 질문을 받았다.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 그 당시 KBO 리그는 이러한 불문율에 익숙하지 않은 프로 리그였었다고 회상했다.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었기 때문에 당시 했던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현재의 KBO 리그는 많이 발전했고 세련된 야구를 하기 때문에 그 때보다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배영수에 대해서는 그 당시 실력이 좋은 투수였다고 회상하면서 구속도 빠르고 좋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던질수 있던 투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영수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투수였다고 말했다. 기자가 재미삼아 '헤이 영수 돈두댓'을 해줄수 있냐고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기자가 부탁한 대로 말해 주면서 웃으면서 끝냈다.

이 사건으로 호세가 출장 정지를 당하며 시즌을 마감하자 우용득 당시 감독 대행은 더 이상 가용할 수 없게 된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하고 당시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 중던 어느 오른손 신인 선수를 호세 대신 1군에 처음으로 올리는데, 그 선수가 바로 이대호다. 그리고 그 해 이대호는 8타수 4안타 0.500을 기록했다. 간접적인 영향이지만, 호세의 참교육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롯데의 또 다른 레전드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최고의 시즌인 2001년에는 배영수 폭행 사건 때문에 고작 117게임(499타석)에 출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0.335, 36홈런, 102타점, OPS 1.198, 출루율 0.503의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해 기록한 OPS와 출루율은 각각 KBO 역사상 단일시즌 3위[18], 1위의 기록이기도하다. 하지만 이런 압도적인 성적에도 불구하고 폭행 사건으로 인해 KBO MVPKBO 골든글러브도 받지 못했다. 참고로 당시 지명타자로 골든 글러브를 받은 양준혁과 호세의 스탯을 비교하자면

양준혁 : 타율 0.355 / 출루율 0.449 / 장타율 0.510 / OPS 0.959 / 14홈런 / 92타점 / 12도루 / 80볼넷

호세 : 타율 0.335 / 출루율 0.503 / 장타율 0.695 / OPS 1.198 / 36홈런 / 102타점 / 7도루 / 127볼넷

양준혁이 못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타율, 도루를 제외한 모든 스탯이 호세가 우월하기 때문에 폭행 사건의 영향+외국인 차별로 골글을 못 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나중에 약물 복용이 밝혀지면서 위 스탯이 원래 실력으로 낸 성적이 맞는지 신뢰할 수 없게 된 게 문제.

다만 이런 불같은 성격과 그라운드 위에서의 거친 이미지와는 달리, 롯데 팬들, 특히 어린이 팬들에게는 정성스럽게 사인해 주고 놀아줄 정도로 친근했다. 종합해 보면 본래 성격은 그렇게 거칠지 않지만, 욱하는 성격과 매우 강한 승부욕이 간간이 발목을 잡았다고 볼 수 있다.


4.2. 금지약물 복용[편집]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를 떠난 이후 2003년과 2007년 멕시칸 리그에서 두 차례나 금지약물 복용이 적발되는 바람에 그동안 그가 거둔 성적의 신뢰성에 금이 가고 말았다. 게다가 적발 시기가 한국프로야구를 떠난 지 약 2개월 후였던지라 한국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동안 약을 했던 거 아닌지 의심할 여지가 충분히 있기도 하고 말이다.


5. 여담[편집]


  • 롯데 팬들은 그를 검은 갈매기라 불렀다.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롯데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마해영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시원하고 화끈한 성격, 그리고 그 성격에 걸맞은 호쾌한 장타 능력까지, 이른바 부산 스타일이 호세가 롯데 팬들에게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에 호세는 한국에서 시구까지 하는 등,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 뛰었던 또 다른 도핑 전과범인 다니엘 리오스에 비해 비난받는 정도가 덜한데, 리오스는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KBO MVP를 수상한 지 1년도 안 되어 도핑적발이 된 반면, 호세는 비록 도핑이 한국프로야구를 떠난 후 2개월이긴 해도 전성기 당시와는 꽤 시간차가 있었으며 MVP를 수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 리오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본 프로야구에서 도핑이 걸린 반면 호세는 멕시코리그에서 걸린지라 도핑 적발사실 자체가 잘 안 알려진 영향도 있다.

  • 파일:Y5D4xfE.jpg
2001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던 호세는 '하리수 문신'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해 8월 한창 인기를 끌던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에 반해 팔뚝에 '사랑해 하리수 호세'라고 새긴 적도 있었다. 사실은 문신이 아니라 그 당시 화제였던 하리수의 이름을 롯데 선수들이 매직으로 쓴 장난이다. 펠릭스 호세 → 하리수 호세.. 근데 기자들이 하리수 문신을 했다고 과장했다.

  • 호세가 홈런을 치거나 롯데가 승리를 거두는 날에 부산광역시의 유흥가는 매우 떠들석해지며, 일명 "호세 효과"라 불리는 유흥주점을 중점으로 긍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사람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손을 흔들며 보답하기도 했단다. 훗날 본인이 회고하기를 "부산에서 내 돈 내고 뭐 사먹은 적 한 번도 없었다." 라고 한다.

  • 부산에는 호세한의원이라는 한의원이 있다. 진짜 있고, 사직 야구장 옆에 있으며 어원은 이 항목의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받은 상들은 잃어버리거나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KBO 골든글러브인것 같은데 이 링크의 게시자는 선물받았다고 하고 어느쪽이 맞는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롯데 수석 트레이너의 인터뷰에 따르면, 골든글러브 상은 호세가 사실 잊어버렸거나 도난당했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골든글러브 사건 이전에도 호세가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팬들 호응에 응대해주는 사이 종종 자기 물품을 도난당하기도 했다고. 이 인터뷰에서 수석 트레이너는 골든글러브를 유흥주점에 공짜로 주었거나 선물했다는건 루머라고 일축하였다. 뭐 진실은 호세만이 알겠지만.

  •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원정 유니폼 하의가 회색이었는데 원래 유니폼 대신 2000년 입었던 뉴욕 양키스의 원정 유니폼 하의를 양해를 얻어 입고 뛰었다.

  • 롯데에 있었을 적에 조경환은 호세가 롯데를 떠난 후 급격하게 성적 부진에 빠졌다고 한다. 결국 2002년 7월에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

  • 메이저리그도 겪었고, 대한민국에서도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어가서인지 조국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도 부러움을 받던 인물이기도 했다. 2000년 초반 그가 대한민국에서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 기자들이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그의 집을 취재했었는데, 200평이 넘는 넓은 집과 역시 넓은 마당이고 심지어 개인 야구장에 수영장까지 갖추고 외제 고급자동차도 5대나 있으며 수십여 명 경비원과 메이드들까지 고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롯데 시절 후배로 온 에밀리아노 기론도 그래서 호세를 우상으로 여기고 잘 따른 거라고, 고향 선배에 메이저리그와 한국에서 성공했으니 우상일 만하다.



파일:/image/109/2013/06/21/201306211009771980_51c3a817eeb3d_59_20130621101702.jpg
헤이, 영쑤! 아임 백! 롱 타임 노 씨! 야구팬들은 참교육을 시킬 아이들이 많아졌다고 성화다.
파일:/image/382/2013/06/21/56024513.2_59_20130621183102.jpg
바지색이 피부색이랑 비슷할 뿐이다.


그리고 2019년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배영수와 함께 두산 베어스로 오게 되어 원조 호세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그는 초반부터 안타수 단독선두를 질주하면서 안우진을 상대로 진짜 참교육을 시전하였다.

  • 정수근박명환의 유튜브 채널 박명환야구TV에서 회고하기를, 팀원에게는 천사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일례로 호세가 지각을 자주 하자 형들이 '저 씨발새끼 지각하지 말고 말 좀 잘 들으라고 해' 라고 하여 정수근이 빠따 들고 그대로 욕을 하자 어버버하며 알았다고 했다고 한다(...). 아무리 외국인이지만 송진우와 동갑이자 롯데 대선배인데 정수근이 빠따를 들고 위협하는데 안 무서워하면 그것도 문제가 있다.[19]

  • 전지훈련 도중 온천을 들렀다가 한자를 읽지 못하여 여탕으로 잘못 들어간 에피소드도 있다. 실은 핑계일지 모른다.


  • 한국 프로야구계에서는 드물게 팬 서비스가 굉장히 좋았던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롯데팬들이 호세를 아직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

  • 2021년 2월 4일 베이스볼코리아에 따르면 두산 베어스의 최고의 외국인선수였던 타이론 우즈와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 원래대로라면 펠릭스를 등록명으로 하려고 했으나 당시 LG 트윈스의 외국인 타자였던 주니어 펠릭스의 존재로 인해 등록명을 호세로 해야 했던 사연이 있다. 정작 주니어 펠릭스는 재계약 첫해 삽질을 거듭하다 애저녁에 떠났는데 호세 펠릭스가 오히려 장수용병이 되었으니 아이러니.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91년 4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칼 다니엘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펠릭스 호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데이비드 저스티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92년 5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배리 본즈
(피츠버그 파이리츠)

펠릭스 호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코리 스나이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 애틀랜틱 리그 소속팀[2]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는 호세가 2002년에서 2004년까지 디아블로스 로호스 델 멕시코 소속이였고 또한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소속이였다고 나와있어서 두 시기가 서로 겹치는데, 호세의 2002년과 2003년 메이저 출전 시기가 모두 시즌 말인것으로 보아 두 시즌 다 시즌 초반에는 멕시코에서, 후반에는 미국에서 뛰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 2007시즌 도중에 방출 당했다.[4] 애틀랜틱 리그 소속팀[5] 골든 베이스볼 리그 소속팀[6]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팀[7] 노던 리그 소속팀[8] 안타깝게도 그는 이 해에 방출당했다.[9] KBO에서의 성적만 기입.[10] 후에 스톡킹에서 최기문이 증언하길 그때 당시 칼이 발견되어 박영태 수비코치가 뒤로와!!!! 라고 외친걸 들었다고.[11] 후에 스톡킹에서 최기문이 직접 겪은 상황이라고 증언했는데 한번 말렸다간 그 힘에 나가떨어질거 같아서 참았다고 한다.[12] 실제로 펠릭스 호세 본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디시 야갤에서 나온 드립이다.[13] 그리고 2019년부터 그는 두산 베어스에서 다른 호세와 함께 하게 되었고 2023년에는 호세가 뛰었던 팀의 코치로 오게 되었다.[14] 당시 배영수가 얀을 맞히고 껄렁거리는 모션을 취했기 때문에 호세가 아니더라도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을 것이다.[15] 2001년 7월 24일 김명성 감독의 급사로 팀이 흔들리는 와중에, 이 사건으로 호세마저 잃으며 롯데는 4위와 불과 1.5게임차의 아쉬운 8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꼴데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후 기나긴 암흑기가 도래한다. 정말 2001년은 롯데 자이언츠에 마가 낀 한해였다.[16] 이 과정에서 최태원 코치와 공필성 코치의 살신성인이 나중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태원 코치에 증언에 의하면 백드롭으로 넘길려고 했는데 워낙 덩치가 만만치 않아서 그냥 뒤로 넘어졌다고 한다.[17] 다만 당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배영수의 성적이 엉망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닌게, 이미 배영수는 사건이 발생한 2001년에도 13승을 거둔 떠오르는 에이스였다. 오히려 그 다음 해인 2002년에는 겨우 6승을 거두며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고, 2003년부터 겨우 원래 실력을 나타냈다. 호세가 저 당시 그 정도로 화를 낸 것도 '배영수와 같은 선수가 저렇게 몸에 맞는 공을 실수로 던질 리가 없다. 저건 명백한 고의이다'란 생각 때문이었다.[18] 1위는 에릭 테임즈의 1.288, 2위는 원년 백인천의 1.237[19] 다만 이 부분은 다소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다. 정수근이 방송에서 언급한 이야기 중 일부는 걍 허구거나 사실에 허구가 더해져 부풀려진 것도 있기 때문.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같이 뛴 투수 이정훈도 비슷한 얘기를 한 것으로 보아, 자기 팀 선수들 한정으로는 천사같은 모습을 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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