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및 고정관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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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반
3. 세계사
3.1. 전근대
3.1.1. 선사 시대
3.1.2. 고대
3.1.3. 중세
3.1.4. 근세
3.2.1. 18세기
3.2.2. 19세기
3.2.3. 20세기, 21세기
4. 한국사
4.1. 전근대
4.2. 근대
5. 문헌
6.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아래는 편견 및 고정관념의 예시 목록. 예시들 중에는 완전히 틀린 새빨간 거짓말도 있지만, 거의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실제로 편견 및 고정관념에 해당하는 것도 있지만 단순 루머도 포함되어 있고, "오해와 진실" 류의 흔한 잘못된 통념을 반박하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실제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어라, 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싶은 항목도 있다. 그리고 전문 역사학계의 현장에선 학설은 10년만 지나도 오래된 것으로 취급되고 새로운 학설이 정설이 되는 등 변화가 심한데 일반인에게까지 전파가 잘 안 되어서 학계에선 이미 논파되고 너덜너덜해진 학설이 보통 상식으로 남아 있는 것도 많다. 심지어 역사학자들조차도 이 변화를 못 따라잡아서 대중서를 쓸 때 자기 전공이 아닌 경우 옛 학설을 그냥 써놓고 이게 그 역사학자의 권위에 기대어서 편견을 강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든, 나무위키는 개인의 주관이 반영될 수 있으며 온전히 전문적이지 못한 위키다. 이하의 목록은 단지 새로운 지적 탐구의 동기부여가 되어야 할 뿐이다. 더불어, 전문적이지 못하거나 도리어 엉터리에 가까운 거짓 해명이 실제 정확한 사실들 사이에 뒤섞여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 문서는 되도록이면 시대순으로 정리 바람. 그리고 적어도 20년 이전 일에 한정해서 서술하기 바람.


2. 전반[편집]


  • 인류의 발전은 일직선으로 나아가며 과학 발전과 사회 발전은 언제나 연관된다.
    • 이러한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 발전 5단계 설이지만, 현재 이러한 학설은 많은 사학과 개론 수업 첫 시간부터 까고 들어가기도 할 정도로 낡은 설로 취급당한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의 영향도 있다(...) 역사적인 '발전'에는 필요와 환경 등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들이 적용되며, 한 분야의 발전이 다른 분야의 발전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으로 여러 로마의 고대 도시들의 상하수도 시스템은 먼 훗날 유럽의 것들보다 발전되어 있었으며[1], 인류 역사에서 아테네민주주의 체제만큼 많은 인구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세기의 일이었다. 또 조몬 시대 일본은 다른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지표 중의 하나인 토기가 세계적으로도 이른 시기에 발흥하였으나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비견될 문화는 토기 개발 수천 년 이후에야 등장하였으며, 근세 동아시아의 인구 부양력은 현대의 일부 국가에도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근대적인 상업망의 형성(적어도 지리적 규모 면에서)은 근세 내내 서유럽을 따라가는 수준이 되지 못했다.[2] 또한 역사의 발전이 일직선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퇴보와 순환을 반복하는 경우도 존재하며, 국가의 발생이 늦은 지역이나 북아시아 초원/중앙아시아 사막 오아시스 지역처럼 정주 기반이 불확실한 지역에서는 일정한 수준의 정치체가 일시적으로 발흥한 이후 쇠퇴하는 것이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여담으로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오히려 사회인권의 발전이 아이러니하게도 퇴보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산업혁명조면기인데 조면기 같은 경우에는 이 항목을 참고.
    • 다만 고대-중세-근대 운운하는 시대구분론은 아직도 편의상, 그리고 여러가지 미묘한 이유로 계속 사용된다. 다만 이 경우에도 과학발전이나 인권 같은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시대구분론의 대세는 오래전에 경제체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 모든 전쟁의 원인은 종교다.
    • 편견 및 고정관념/종교 문서 참조. 20세기에 큰 전쟁이었던 제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종교전쟁이었는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이전 세기에도 경제적 동기와 영토 분쟁이 주 원인이었지, 종교 전쟁이라고 이름이 붙는 전쟁 중에서도 순수하게 종교가 원인이 된 것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이유에 종교를 끼얹은 형태 정도?

  • 과학과 종교는 언제나 대립하고 있었다.

  • 옛날부터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단일민족의 개념이 존재했다.
    • 특수한 케이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체가 전 세계로 퍼진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단적으로 특수한 사례의 예로 적혀있던 유대인은 현대로 올수록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강해졌으며, 워낙에 떠돌이 시기가 길어서 혈통적 단일성이 유지된 시기가 얼마나 될지도 의문일 지경이다.


  • 옛날 옛적에는 전쟁을 벌일때 그냥 인해전술로 닥치는대로 내보냈다.
    • 어디든, 할 수 있다면 제대로 된 진열을 갖추고 싸웠다. 다들 각개로 흩어져 아무렇게나 칼을 휘두르는 온갖 사극 매체의 무성의하고 무식한 묘사 탓에, 때문에 이런 편견이 더욱 굳어지기도 한다. 당장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장사진을 치다"라는 표현 자체부터가 이미 고대 중국의 군사 용어다. 장사(長蛇), 즉 긴 형태로 병사들이 한 줄로 늘어선 진형을 장사진이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4]
    • 옛날 옛적에도 제대로 된 진열이 여러 종류다, 방형, 장사, 학익 등등... 그리고 게릴라 특공은 옛날 옛적에도 있었는데 삼국지에서 감녕이 그걸 보여줬다.
    •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 칸나이 전투, 명량 해전 등 각종 전법이 효과를 발휘했던 전투가 많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에서는 아군의 희생을 줄이는게 제일 좋은 길이다. 비록 이겼다 하나 아군의 희생이 컸다면 다음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고 특히 농경사회의 특성상 병사 하나하나가 생산인구인 만큼 무턱대고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면 나라의 식량을 생산하고 세금을 낼 사람들이 사라지는 숫자가 많아진다. 국가 입장에서도 사람이 더 늘어나도 모자랄 판국에 닥치고 인해전술로 밀어붙였다가는 지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 세상에 1,000년을 간 왕조는 신라로마 제국, 고대 이집트밖에 없다.
    • 한국사에 대한 오해와 세계사에 대한 오해 둘 다 있다. 고대 왕국은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고, 많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또 아니다. 또한 신라도 로마도 고대 이집트도 저걸로 볼 수 없으니 결국 저 명제는 오류. 로마 제국 같은 경우 천 년은 고사하고 백 년 넘게 유지된 황조도 몇 없고, 신라 같은 경우 애초에 박석김이 돌아가면서 임금을 한 데다 천 년이란 근거는 삼국사기에 연대적인 오류가 없다는 걸 전제로 하기에 영 무리수다. 고대 이집트에는 왕조 교체가 있었으므로 우선 해당 항목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목차만 봐도 헛된 편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사실 이런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게,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국가는 유지하되 왕가가 교체되어 사실상의 국가 교체급 사건을 겪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덴노 혈통은 형식적으로는 기원전부터, 실질적으로는 한국사의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나 집권층과 통치 체제는 몇 번씩 바뀐 일본. 베트남대월도 있다. 단순히 ‘왕조’만 따진다면 일본은 2000년 이상 이어오는 왕조를 지닌 국가이며 물론 《일본서기》의 구라 때문에 역사가 연장된 측면이 있지만 불분명한 시기를 제외해도 일본 덴노 혈통은 1000년은 넘어간다. 이집트의 파라오 왕조 역시 2500년 넘게 이어진 혈통이다. 또한 프랑스도 방계나 외가로 이어져서 그렇지 혈통만으로 따지면 근세까지 지배한 부르봉 왕조의 조상은 샤를마뉴까지 소급된다. 게다가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부터 왕조 이름만 바뀌었을 뿐 계속 이어져 온 나라로 프랑크 왕국이 481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쪽도 1000년이 넘어가는 역사를 가진 나라다. 751년부터 집권한 카롤링거 왕조부터 1830년까지 집권한 부르봉 왕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왕실은 방계가 이어가면서 성이 달라져서 그렇지 전부 하나의 혈통이다. 나라 자체로 보나 왕조로 보나 역사가 1000년이 넘어간다.

  • 위인전에 나온 인물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 한국사이든 세계사이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거나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도 누구나 흑역사는 있으며,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비슷한 케이스가 있다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도 (이완용은 당연히 빼고) 모두 좋은 사람들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보기도 어렵다.
    •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옛날에는 다 했는 일들도 오늘날에는 부정적으로 보일 만한 일들도 있다. 그런 것을 포함하느냐 마느냐 좋은 사람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 일본과 중국은 전세계에서 역사왜곡이 제일 심한 나라이며 날조와 왜곡을 일삼는 민족이다.
    • 한국을 포함하여 그 어떤 나라도 역사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대체적으로 자유주의, 개인주의가 확립된 선진국일수록 역사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 하고, 학계가 조직적인 역사왜곡 시도에 저항하기 때문에 왜곡이 적은 편이다. 권위주의 문화가 뿌리깊이 박혀 있는 독재국가들은 역사를 정권의 입맛대로 왜곡하려 들 뿐 아니라, 자유로운 학술적 연구가 제약받는 경우가 잦다.

3. 세계사[편집]



3.1. 전근대[편집]



3.1.1. 선사 시대[편집]


  • 선사 시대 사람들은 거의 다 동굴에서 살았다.
    • 애초에 전 세계에 동굴의 수가 너무 적다. 대부분은 천막이나 오두막 등에서 살았다. 이런 고정관념이 퍼진 이유는 흔적을 보존하기가 동굴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 천막이나 오두막은 태풍 불고 벼락 맞고 하면 다 사라지니까. 대신에 '거주지 터'와 같이 지표면에 직접적인 흔적을 남긴 경우는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 다만 일정기간 이상 거주하는 경우에는 집터가 땅을 파고 지하로 들어가는데, 이게 당시의 불완전한 지상가옥 보다는 냉난방이나 건축 등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깊게 파는 경우에는 1m 이상 땅을 파고 들어가는데, 이러면 지상과 천장을 구성하는 부분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상가옥은 청동기 시대 이후에나 본격화 된다.

3.1.2. 고대[편집]


  • 피라미드노예들을 채찍질하면서 지어졌다.
    • 문서 참조. 보통 일반 노동자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직업이었다.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휴가도 신청할 수 있고, 심지어 파업권(세계 최초로 파업이 기록된 사례이다), 무료 의료 서비스, 사후에 자기가 지은 피라미드 근처에 안장될 권리도 보장되었다. 피라미드에 가끔 노동자들의 낙서가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이런 기록이 나온다. 노예에게 채찍질을 한 거라면 낙서가 존재할 수가 없다. 낙서를 하다 걸리면 더 많은 채찍을 맞았을 테니까. 심지어 채찍 역시도 노예를 패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찍으로 구령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얘기도 있다.

  • 하트셉수트는 백성이나 신하들이 자신을 깔볼까봐 남장을 했다.
    • 파라오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 갖춰야 하기 때문에 남장한 것이다.

  • 예수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 현재 학계의 정설은 예수가 구세주 및 신의 아들이었나 등등을 떠나서, 역사적으로는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다.예수/역사 참고.

  • 고대 갤리선은 노예들을 동원해서 노를 저었다.
    • 고대 갤리선의 노를 젓는 방식은 센 사일 방식이라 불리는 한 노에 1명씩 붙는 방식이라 노 젓다가 조금만 방심하면 노가 다 엉켜 난리법석이 일어남으로 갤리선의 노잡이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전문직이었고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철저하게 자유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드물게 노예들을 사용할 때도 자유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거나 약속 후 사용하였다.[5] 오히려 근세 이후로 스칼로치오 노 젓기 방식이 발명된 이후에 노예가 노 젓기 시작했고 이 경우에도 적어도 노하나당 한명의 자유민 숙련공이 필요했다.

  • 고대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한번 싸울 때마다 마지막 1명만 남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또는,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신분상 노예였다.
    • 초기의 경우 실제로 죽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유명 검투사의 경우 스타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인정만 받으면 자유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마지막 1명만 남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는 비슷한 사례가 있는게 콤모두스 황제는 검투사 두명이 머뭇거리자 열받아서 모든 검투사를 투입한 후 다 죽을때까지 싸우게 했다.
    • 노예 출신들도 있었지만 전쟁 포로나 범죄자들도 있었고, 나중에 인기가 좋아지면서부터는 일반인들도 서약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 귀족의 자제들도 심지어 황제도 검투 경기에 나가기도 했다[6].
    • 통일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노예 공급이 줄어들자 몸에 상처를 내는것으로 조건이 완화되기도 했다.

  • 로마 시대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에 설치된 기둥에 묶인 상태로 맹수들에게 뜯어 먹혀서 죽었다.
    •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두고 "순교자의 성소" 로 선포하면서 발생한 오해.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며 그 이전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콜로세움을 성소로 취급한 경우도 없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도 이런 장면이 그려져서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당장에 현 콜로세움의 상태를 보면 성지로 삼았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 다만 사형의 의미로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베스티아리(bestiari)[7]가 되게 하여 맹수들과 싸우게 한 적은 많다. 이는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형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사자들은 갑옷이나 무장도 없이 방치되고 맹수들은 한도 끝도 없이 투입되었다. 이런 형벌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폐지되었다.

  • 네로 황제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경기를 즐겨 관람했다.
    • 네로 황제 재위 당시에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당시 그곳에는 네로 거상이 있었고(…)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그걸 밀어버리고 거기에 원형 경기장을 지은 뒤 그 이름을 "콜로세움" 이라고 한 것.

  • 검투사 경기에서 관중들은 패자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1693년판 번역본에 따르면,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 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 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 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 라고 쓰고 있다.

  •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기를 즐겼다.
    • 스타디움의 입구를 보미토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진짜 토하는 곳으로 와전된 것이다.
    • 로마의 귀족들도 일단은 사람이다. 먹고 토하길 반복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즐긴 사람이 없진 않으나, 그랬다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으므로 사치를 자제하는 경향도 있었고[8], 또 이들 중에는 원로원의 의원으로 재직하는 사람도 있던 만큼, 공무에 치여사느라고 먹고 토하는 게 평생의 꿈인(...) 사람도 많았다.

  • 18로 제후조조의 격문으로 전체가 참가했으나, 화웅여포의 용맹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하고 유비군 혼자 분투하고, 조조가 서영에게 패배하고, 동탁이 완전히 낙양성를 버리고 빈 낙양성를 먼저 차지한 손견옥새를 발견한다.
    • 삼국지연의에서 창작된 것이다. 18로 제후는 전체 중 일부가 참가 안했고[9] 교모의 격문으로 일어났고, 적극적으로 활동 못한 이유가 동탁의 군세가 강하고, 제후 중의 한명인 한복이 맹주인 원소에게 군량을 안주어서[10]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한다. 또한 연의와 달리 유비군은 이때 당시 화웅, 여포과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조조와 같이[11] 서영에게 패퇴당하고 화웅, 여포는 이전에 서영에게 패퇴한 손견양인 전투에서 각각 화웅은 참했고,[12] 여포는 패배를 당한다. 더불어 동탁도 손견에게 패배를 당해 손견자체가 무섭다고 말하고, 천도하고, 남아있던 여포가 손견에게 패배하고 낙양성를 내어주었다. 옥새는 원술이 차지했다.

  • 헌제는 조비에게 반강제로 선양한뒤 그 직후 암살당했다.
    • 삼국시대(위, 촉, 오)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연의에서만 한정. 헌제는 제갈량과 태어난 해(181년)와 사망한 해(234년)가 동일하다. 또한 조비는 226년에 사망했으므로 헌제보다 8년이나 일찍 죽었다. 이같은 말은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것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 흉노훈족은 동일한 민족이다.
    • 발음유사성에서 나온 주장일 뿐 흉노와 훈족의 관계는 확히 알려진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한나라의 이간질로 분열된 북흉노 남흉노도 서로 다르다시피하다.


  • 예수는 생일은 12월 25일이다.
    • 실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로마시대에 당시 기독교인들이 태양신 축제에 대항해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날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이와 별개로 로마와 상관없는 켈트 교회, 동방교회등에선 독자적으로 크리스마스 날짜를 계산했으나, 4세기 무렵에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로 굳어졌다. 현대 정교회의 성탄절이 1월 7일이라고 하지만, 그 날짜는 율리우스력으로는 여전히 12월 25일이다. 그레고리력 반포 이후에는 서방교회가 그레고리력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다 보니 날짜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미 복음서에 예수 탄생시 들판에 양 치는 목동들이 있었다고 하므로, 복음서의 설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의 생일은 결코 겨울이 될 순 없으나, 당시 교회에서는 역사적 날짜가 언제인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무튼 이미 전통으로 굳었고, 상징적 날짜가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여겼다.[13]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미개하고 제대로 된 문명을 갖춘 적이 한번도 없다
    • 과거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서 나온 편견[14].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누비아 왕국, 악숨 왕국, 짐바브웨 왕국, 다호메이 왕국[15], 에티오피아 왕국처럼 나름대로 번성하고 어느정도 발달된 문명을 이룬 곳들도 많았다. 지금은 거의 다 망했지만...
    • 사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북아프리카유라시아에 비해 번성한 문명이 많이 없어 보이는 건, 북아프리카보다도 농사에 불리한 척박한 환경과, 유럽아시아 등의 타 대륙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나마 중동 지역과의 교류가 잦은 편이었던 동아프리카도 중동 이외의 아시아 지역과의 유의미한 접촉이 있었던 최초의 사례도 명나라정화가 이끄는 대함대와의 접촉이었고, 아랍, 베르베르 상인들과 접촉했던 일부 서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북부 일부 지역에 있었던 아가데즈 술탄국(지금의 니제르)들을 비롯한 투아레그 또는 베르베르족들이 세운 여러 나라들도 지금의 모로코와 모리타니를 비롯한 아랍계 또는 베르베르계 상인들과 교류하기도 했으며, 이게 15세기경에서나 있었던 일이다.[16] 그러나 아시아와 접촉이 없었을 뿐, 유럽이나 중동과의 접촉은 역사 내내 적지 않게 있어왔기 때문에 이는 올바른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동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한 이슬람 세력이 사하라 이남 지역까지 직접적으로 뻗어나갔기 때문에[17] 구세계와 접촉이 없어서라는 것은 올바른 분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과의 접촉 역시 로마동아프리카지역과 접촉이 있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이 유럽과 접촉한 것은 아시아유럽과 접촉한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다.(거리상 당연한 일이다.) 또한 구세계와 접촉이 없이도 고도의 문자/천문/건축 수준을 확보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케이스도 있으며, 폴리네시아 문명과 미크로네시아 문명처럼(문명은 아니지만 일부 멜라네시아 제족들도 항해기술은 발달했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한 지역도 있었다.

3.1.3. 중세[편집]


  • 유럽의 중세는 그야말로 인외마경의 암흑시대였다.
    • 고대 로마의 뛰어난 문물들이 상당수 유실되고, 반달리즘의 어원이 된 반달족의 침략을 감안할 때, 당시 서구 유럽은 동시대의 이슬람이나 중국 문화권보다 확실히 상대적으로 뒤떨어지긴 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사가[18]들은 중세시대가 문명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퇴보한 시대가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세 문서 참고. 그 시기에도 문명과 기술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으며, 중세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의식 수준이나 생활 여건이 딱히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고대 로마 시대보다 문명적으로 더 발전된 측면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한 동로마 제국은 나름대로 발전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암흑시대라는 표현이 유럽 외의 다른 지역들의 발전은 무시한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중세가 암흑기라는 주장은 학계의 보편적인 학설이 아니라 화이트나 드레이퍼 등의 극단적인 몇몇 역사가들이 펼친 주장에 가깝다.
    • 당장 '중세'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기간은 학자마다 약간씩 정의가 다르긴 하지만 팔백년에서 천년에 이른다. 인류가 천년 동안이나 인외마경의 암흑시대를 겪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살아남았다면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많은 지혜와 노력을 필요로 했을 텐데 그들을 미개하다고 매도할 수 있는가? 그들이 미개하지 않다면 중세가 암흑시대라는 말이 성립하겠는가?
    • 암흑 시대라는 개념도 유럽에서 먼저 나온 것인데, 이는 중세기 전체가 아닌 바이킹 시대를 가리키곤 한다. 대략 8세기 전후다. 이는 역사를 3분법 해서 고대의 문화가 바이킹과 북유럽에 의해 망해서 중세를 그냥 암흑기라고 본 거다. 르네상스는 문화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빛의 세계라고 본다.

  • 기독교가 중세시대에 고대 로마 시대에서 기껏 발전시켜왔던 유럽의 문명을 지체시키고 퇴보시켰다.
    • 반기독교쪽에서 지겹도록 써먹는 논리인데 마찬가지로 요즘 역사학계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한물 간 논리이다. 일단 위에도 적혀있듯이 중세가 과연 퇴보였을까라는 것도 요즘은 회의적이다. 오히려 지식 보존에 가장 앞장선 단체가 교회였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알면 알수록 좋다고 지식 발전을 권장했다. 다만 이 경우는 위에서 언급한 중세 시대 하면 뭔가 로마 시대보다 뒤떨어 졌을 것이다라는 편견 때문에 생긴 것이 1차 원인이기는 하다.
    • 교회 건축의 역사와 함께 발달한 고딕 양식만 봐도 기독교가 문명을 퇴보시켰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불과 2~3세기 전 로마네스크 양식보다 기술적으로도 미적으로도 훨씬 더 발전한 양식이다.
    • 이러한 관점은 대략 18세기 즈음 유럽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되었지만 정작 유럽에서는 이 시대에 관한 담론이 활성화 되고 재평가가 활발히 이뤄져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런 주장은 찾기 힘든 상황.

  • 중세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40살밖에 살지 못했다.
    • 평균 수명이 40세였던건 맞다. 하지만 이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평균이 확 내려간 것으로, 일단 어른이 되면 60-70살까지도 살았다.

  • 비잔티움 제국은 "자칭" 로마 제국이었을 뿐이다.
    • 분열기를 조금만 알아봐도 알 수 있지만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국가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될 때의 동로마 제국과 같으며, 기존의 로마와 차별적인 구분도 짓지 않은 채 로마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속해나간 나라이니 엄연히 로마 제국사의 일부인 국가다.

  • 나라 사람들은 상무정신이 없어서 약했다.
    • 그 몽골제국을 상대로 44년을 버틴 나라다. 실제로 신성로마제국보다도 뒤에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가 일어났다. 물론 혼덕공이 벌인 정강의 변이 있기는 하지만, 재건했다.

  • 바이킹들은 투구에 뿔 1쌍을 달았다.
    • 이러한 투구들이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히 발견되기는 하나,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인 수준의 크기나 장식의 화려함 등으로 인해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다고 추정되며 후대의 창작물들 때문에 더해진 오해로 보인다.

  • 몽골 제국은 무식한 야만인들이 숫자만 믿고 닥치는대로 정복했다.
    • 오히려 숫적으로 불리한 전투가 더 많았다. 몽골 제국이 계속해서 승리를 이루어 낸 것은 징기스칸수부타이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과 지휘관들의 철저한 계획과 전술 때문이다. 그리고 몽골 제국은 자기네 민족보다 점령지의 민족의 머릿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에 학살을 일삼았다.

  • 이슬람은 칼, 즉 정복을 통해 퍼진 종교다.
    • 상당지역은 평화로운 교역을 통해 퍼졌기 때문에 반만 맞는 말. 아랍 지역과 한참 떨어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이슬람이 국가들이 꽤 많은 것은 이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던 영역(더 정확히 말하면 국교가 기독교였던 고대 로마 제국의 영역)인 북아프리카, 팔레스티나, 아나톨리아 반도, 일부 동유럽과 힌두교를 믿던 영역인 남아시아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는 침략을 통해 퍼진 게 맞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기독교도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 그리고 오세아니아에는 침략을 통해 퍼졌다. 여담이지만 반대로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종교를 받아들인 사례가 있는데 티베트 불교가 대표적이다. 몽골 제국티베트를 복속한 후 티베트인들이 믿던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으며, 만주족청나라 또한 몽골 제국을 복속한 후 몽골족이 믿던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 십자군 전쟁에서 유럽은 일방적인(혹은 먼저 침공한) 침략자였다.
    • 이슬람 세력 측도 만만찮게 기독교 세력에 대한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다. 남유럽을 약탈하고 시칠리아와 바리를 위시로 남이탈리아에 에미르국을 세우기까지 했고, 이슬람 본류는 서고트 왕국을 일방적으로 쳐들어가서 점령한 후 서고트족을 노예로 판 일도 있었으며, 동로마와 전쟁을 할 때에 약탈, 학살 등을 상시적으로 행했다.
    • 십자군 전쟁 이전의 영역을 기준으로 하여도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십자군 전쟁이란 1차 십자군 이후 9차 십자군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일어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의 전쟁을 일컫는 말인데, 십자군 전쟁 이전의 영역 대부분이 이슬람 영역이었던건 맞지만 아닌 곳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에데사 백국으로 여기는 원래 정교회를 믿던 곳이었지만 이슬람측인 이마드 딘 장기가 에데사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학살한다.
    • 선공을 가한 쪽도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이슬람 세력이 비잔티움 제국을 침략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고 교황이 여기에 응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 지즈야이슬람교에서 타 종교인들의 개종을 강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세금이다.
사실 타 종교인들은 동시에 병역의 의무 및 무슬림들이 지켜야 하는 몇가지 의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보호비인 면이 더 강했다. 물론 실제로 개종을 강요하기 위해 빡세게 문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무슬림들보다 적은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 지즈야로 거두는 세금이 많아서 외려 이교도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걸 꺼리기도 했다고 한다.주객전도 알라도 알라지만 돈도 중요했나보다.

  • 기사사무라이는 의리를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는 명예로운 집단이었다.
    • 그런 기사나 사무라이들도 많았겠지만 동시에 폭력을 일삼고 약자를 착취하는 사실상 깡패와 다름없었던 이들도 많았다. 애초에 이들이 기사도무사도를 지키지 않았기에 기사도와 무사도가 생긴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기사(역사) 문서와 기사도 문서 참고.
    •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들은 같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대라면 비교적 명예롭게 행동했다. 그들이 보호대상으로 삼은 '약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노예나 농노들,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부려야 할 대상이었다. 그들이 보호해야 할 약자란,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긴 귀부인,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군주의 어린 유복자, 악덕 친척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은 미성년 귀족자녀 같은 사람들이었다. 천부인권과 평등사상이 보급된 20세기 이후의 현대식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사실 중 하나지만,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던 시대의 약자와 오늘날의 약자가 그 의미가 같을 수는 없다.

  • 백년전쟁 등에서 영국 장궁은 플레이트 갑옷을 관통해 큰 활약을 했다.
    • 백년전쟁 초기에 프랑스 기사들이 많이 입은 쇠사슬 갑옷에는 잘 먹혔지만, 이후 플레이트 갑옷이 발달하면서 기사의 갑옷을 직접 관통하기는 어려워진다. 사실 위력은 쇠뇌가 더 좋았다. 다만 쇠뇌의 연사력은 1분당 많아야 3발이 고작으로, 장궁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장궁이 큰 활약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직접 관통되지 않더라도 어느정도 타격이 있었고, 말은 기사만큼 철저하게 갑옷을 두르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화살에 맞고 기사를 땅에 굴려버렸기 때문.

3.1.4. 근세[편집]


  • 마녀사냥은 중세의 사회현상이다.
    • 해당 문서 참고. 오히려 근세의 시대상에 가깝다.

  • 마녀사냥은 중세와 근세에 행해진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여성차별적 사회 현상이다.
    • 일부는 거짓이다. 물론 마(女) 사냥이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여성들, 특히 전 남편이 재산을 많이 남겨주고 죽은 과부들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 남성도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전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가령 십자군 전쟁 당시 활약했던 기독교계 기사단인 성전 기사단의 경우도 당연히 당시 기사단이다 보니 남성들이 주 구성원이었는데 성전 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을 탐낸 프랑스 필립 4세에게 마녀사냥의 일환으로(이 경우는 남자니까 마(男)사냥) 악마 바포메트와 공작을 했다는 억울한 말도 안되는 누명으로 결국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종교 재판 후 목이 잘려나갔다. 그 외에도 개개인적으로도 일부 극소수 남성들도 악마[19]와 쿵짝(?)한 죄로 사형당하는 경우도 드물기는 하지만 있었다. 더 자세한 것은 마녀사냥 문서에 들어가서 1.5 문항을 참조할 것.

  • 마녀사냥은 중세에 마귀를 숭배한 사람들을 주로 처형했다.
    • 물론 저 중에서 정말 신비주의적 이교도나 미신 같은 일환으로 마귀나 악마를 숭배했던 사람들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테니(지금도 그렇고 가령 사탄교나 일부 좀비약먹이고 하는 등의 문제가 되는 부두교 같은 경우) 그런 경우에 딱 걸려서 마녀사냥을 당했다면 정말 원 의도대로인 마녀사냥에 부합하는 개념이긴 하다만 역사가 늘 그렇듯 (의도는 좋았다, 아니 의도좋았다)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처음부터 순수한 마녀사냥이라는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것이 더 맞을것이다. 물론 당시 성직자 중 진실된 순수한 의미의 교리에 입각한 마녀를 사냥하자는 성직자들도 있었을진 모르겠다. 하여간 오히려 마녀사업/돈벌이이라고 봐야 옳을 지경이었는데 실상 알고 보면 정말 마녀가 아니면서 음해성 공작과 모략 등으로 억울하게 죽은 여성들이 절대 다수였기 때문. 물론 이유는 당시 교황청이 심각하게 부패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금전적으로) 그러다 보니 당연히 주 사냥대상은 뜯을 거 많고 만만한 금수저 부잣집 과부였다. 돈도 많겠다 거기에 기존 남편이 죽은 과부기 때문에 "너 남편 죽고 나서 외로워하다 결국 악마랑 그 짓 했지" 라고 누명씌우기 딱이기 때문. 역시나 부잣집 과부에게 악마와 검열삭제했다는 자기들 마음대로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온갖 고문을 해 죽였는데 더 어이없고 황당한 것은 이 과정에서 마녀 혐의자에게 온갖 구실로 요금을 징수했다는 점이다. 고문도구 사용료, 고문기술자 급여, 고통세(…), 할말이 없다 고문 장소 임대료, 화형에 처할 때 사용하는 장작요금 등등 갖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요금을 부과했고 마녀혐의자에게 맨 마지막으로 가해진 처벌이 전재산 몰수형이였다. 이 마녀사냥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지난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녀사냥에 대해 전세계적으로 대대적으로 사죄했다.

  • 마녀사냥의 광기가 유럽 전역에서 휘몰아친 결과 800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 오늘날까지 무비판적으로 인용되는 저 800만이라는 수치는 아무 근거가 없는 유사역사학적인 수치놀음이다. 도대체 당시 유럽 인구가 몇인 줄로 생각하고 800만을 주장하는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이와 같은 선동적인 가짜 데이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의 잔인한 면만을 부각시키려는 반기독교 심리, 그리고 중세 마녀사냥이 여성차별의 역사라고 생각하여 어떻게든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당한 차별에 대한 수치를 더 과장시켜 여성차별에 근거로 잘 써먹으려는[20] 꼴페미 여성 집단의 부풀리기식 조작에 기초하고 있다. 실제로는 6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확인되는데, 물론 이 역시 결코 적은 수가 아님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800만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드립보다는 훨씬 신뢰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중세에 마녀사냥이 성행했다고 하는데 흑사병이 유행한 14세기 중엽의 사상자는 7500만~2억(30~50%)으로 추산되는데 이걸 토대로 하면 2억 초~4억 가량이 된다는 소리다. 이걸 영국,네덜란드,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포르투칼,비잔틴,불가리아,유고 연방(세르비아) 로 10개국으로 완전 분배 한다면 이들 국가는 각 2천만~4천만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이 시대에 수만에서 수십만이 죽었다는건 도시 몇개가 사라졌다는건데 14세기 조선 인구가 30만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말이 되는가?[21] 단순히 도시 몇개가 사라졌다는거로 끝나지 않고 곧 군사력과 경제력의 약화로 이어진다. 어떤 병이든 당연히 노년층보다 젊은층(정확히는 15-65세 가량의)에서 원활히 일어난다. 아니 그냥 멀리갈거없이 당장 대한민국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북한에 사회 각계에서의 국가 기밀 정보(상하수도,군사 관련 정보등)를 넘겨줬고 증거가(CCTV든 뭐든지) 매우 확실하다고 하고 사형 선고 받았다고 치자. 실제로 진짜 간첩이여도 사회적으로 그게 문제가 안될까? 그리고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중세시대때 어떤 것이든지 기록이 남아야한다. 하다못해 비석이나 당시 영주들의 자필이던가 뭔가로 남았어야한다. 그런데 중세시대에 마녀사냥이 집행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근세로 가정해도 말이 안되는게 18세기 까지(아메리카 식민지 포함) 인구 5억도 못넘겼다.. 흑사병 당시 인구가 2~4억으로 추산되는데 그때부터 자원 문제로 이렇다할 인구적 증가를 누리지 못했다.

  •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이뤄졌는데 도미니코회 수도자의 1485년 마녀재판책이 그당시 20쇄나 찍을정도로 팔려서 성행했다. 대부분 종교를 빌미로 한 돈 많은 과부를 노린 경제적 이유였다. 남유럽의 경우 마녀사냥할 겨를이 없었는데 마녀사냥보다 더 극악한 종교재판이 성행했기 때문이다.[22] 이들에게는 마녀보다 무서웠던 것이 이단이었던 거다. 종교면에서 남유럽보다 북유럽이 더 관용적이어서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살아남은 스페인계 유대인들이 북독일 한자도시로 많이 정착했다.

  • 가톨릭 교회와 그 수뇌부인 교황청은 / 또는 개신교와 그 종교개혁가들은 마녀사냥의 폐단을 지적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마녀사냥을 부추겼다.
    • 완전히 옳지만은 않다. 물론 제목에 나온 "폐단을 지적하기는 커녕”이란 부분만 놓고 보면 또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실제로 마르틴 루터 등은 출애굽기를 근거로 '무당과 어린이들에게 마술을 거는 자와 점치는 자'들을 살려둬선 안된다는 근거로 마녀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굳이 루터나 종교개혁가들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라, 그 당시 중세, 근세 유럽 사회에 만연한 인식이었다. 따라서 ‘가톨릭만큼 개신교 사회에서도 마녀사냥이 상당히 팽배해있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을 수 있어도, 특정 종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함부로 주장할 수는 없다. 이는 보통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간에 서로를 모함하려는 의도에서 많이 사용하는 레토릭이다.
    • 당시 독일은 개신교이든 가톨릭이든 간에 서로 종교가 다르면 박해의 대상이었다. 이 와중에 마녀사냥이 종교재판과 결합된 것이고, 이는 종교 권력과[23] 세속권력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루터나 칼뱅은 보다 포괄적인 영역에서 정말 악마숭배가 자행되었는가를 따졌고, 따라서 정말로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마녀 사냥이 행해진 것이라고 봐야지, 중세 가톨릭에서처럼 마녀의 망치 따위의 책을 써가며[24] 마녀에겐 무슨 털이 나있다든가 물에 담그고나 불에 태우면 어떻게 된다거나 하는 요소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순 없다.[25]
    • 가톨릭 역시(최소한 교황청의 공식 입장으로는) 마찬가지였다. 이미 교황 그레고리오 7세덴마크왕 Herald 3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폭풍우나 병충해 등의 책임을 마녀(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전가하여 이들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고, 리옹의 주교 Agobard는 저서 ‘우박과 천둥에 관한 어리석은 미신에 대하여’에서 이러한 마녀 사냥 행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의 사례가 있었다. 애초에 로마와 에스파냐의 종교재판소에선 소위 마녀라고 하는 이들의 소행(으로 위조되고 모함되는 일체)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녀사냥을 최초로 법적으로 금지한 단체 중 하나가 종교재판소였다. 물론 독일 중부와 남부 지역의 가톨릭 주교들에 의해 마녀 학살이 자행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당시 가톨릭의 입장은 “사탄 숭배하는 마녀들 있으면 때려잡는건 맞는데 뭔 불쏘시개 써가며 너무 난리치지는 마라”이고, 다만 지역 교회에서 이를 무시한 것이 된다.

  • 조르다노 브루노는 이성을 탄압한 종교 권력에 대항하여 과학을 수호한 과학자였으며, 과학적 진실의 전파를 두려워한 성직자들에 의해 10년 동안 투옥당했다.
    • 이는 어설픈 계몽주의의 또 다른 잔재이다. 브루노는 애초에 과학자가 아니라 수도사였다. 그는 과학을 수호하지도 않았으며, 과학을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한 것이다. 그가 지동설을 신뢰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적 관찰에 입각한 신뢰가 절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그의 주장이 과학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그는 토트를 비롯한 이집트 신화에 푹 빠져 있었으며, 이런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태양느님이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했다. 또, 브루노는 그리스 신화에도 관심이 많아서, 연금술의 신이기도 한 헤르메스의 팬이기도 했다.(…) 거의 현대에 이름이 알려진 오컬트 총집합에 가까운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다. 이후 브루노는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서 신비주의의 한 분파인 헤르메티즘(Hermetism)이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했으며, 이후에 독자연구급 신학을 두려워한 교회가 그를 잡아넣었던 것이다. 물론 가톨릭 교회의 그러한 행각이 사상의 자유를 탄압한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소지가 있으나, 브루노가 무슨 과학의 투사인 것처럼 오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 브루노에 대한 이런 이상한 환상 덧씌우기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에서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여 브루노를 과학의 영웅처럼 포장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이후 이러한 조명은 닐 디그래스 타이슨도 반복한 바 있다. 그러나 칼 세이건과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역사학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기에 다소 과장한 측면이 있으며, 한편으로 이들이 브루노를 언급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라는 가치를 말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지 그가 과학을 사수하기 위한 순교자였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와 비슷하게 요하네스 케플러에 대해서도 칼 세이건은 약간 멋지게(?) 소개하는데, 사실 그의 신비주의적 주장까지 모두 옳다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라는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므로 비판적으로 사고하면서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생기는 이유는 칼 세이건이 다소 문학적이고 낭만적인 서술을 하기 때문인데, 무슨 위인전처럼 문자 그대로 다 사실이고 업적만 가득한 위인들을 나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잘못된 지식을 가지기 쉽다.

결국 이런 편견을 사수하기 위해 "칼 세이건이 그렇게 말했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흔히 말하는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며, 애초에 칼 세이건이나 닐 타이슨이 브루노를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 단순히 과학을 사수한 순교자를 소개하는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므로 상당한 문제가 있다. 참고로 칼 세이건이나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역사학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과장을 넘어서 아예 잘못된 통념을 전달한 적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애초에 이들의 주장 자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과학적으로 사고하자'는 것인데, 이들을 교조주의적으로 받드는 것 자체가 이들의 주장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이에 관련된 참고할 만한 곳: 가디언 지의 평론 (뉴스 페퍼민트 한국어 번역)

  • 갈릴레오 갈릴레이천동설을 주장하는 종교재판소에서 물러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독백했다.
    • 해당 문서 참고. 단순히 구전되는 일화일 뿐이며 후대의 작가가 임의로 추가한 대사다. 애초에 그런 위험한 소리를 남들 보는 앞에서 함부로 나불거렸다가 잡히면 짤없이 법정모독죄가 추가될 것이므로 갈릴레이가 함부로 입을 놀리기도 어려웠다. 사실, 남들 눈치를 보며 혼잣말을 한 것이 지금까지 과연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 비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후대의 창작이라는 답이 나온다.[26]

  • 중세 교회에서 판매했던 면죄부는 신자들의 죄를 사해 주는 기능을 한다고 선전되었다.
    • 죄 자체를 사한다기보다는 일정한 보속(satisfactio)을 통해 죄로 인해 받게 될 연옥에서의 벌을 면하게 해 준다는 의미였으며, 이 때문에 면벌부라는 표현이 더 옳다는 주장도 많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면벌부 항목 참고. 면죄부면 애초에 원죄가 있어서 태어나는 건 뭐라고 봐야 하는데

  • 서구 역사에서 사람들이 종교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비로소 해방되게 된 계기는 르네상스다.
    • 크게 보면 르네상스를 출발점으로 볼 수 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보아 실제로 일반 대중들의 생활규범이 종교에서 떨어져나오게 된 계기는 19세기 중엽의 세속화(secularization)라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 이전에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교회와 신앙이 어마어마한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19세기에 세속화가 어느 정도 진행 되면서부터 사람들의 생활은 점차 교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27] 그 이후로 기독교 전통이 유럽인에게 갖는 의미는 한국인에게 유교 전통이 갖는 의미와 비슷해지게 되었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최초로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하였다.
    • 11세기경 바이킹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이른바 빈란드설이 전해지다가 뉴펀들랜드 지역 유적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우유를 줬다가 유당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원주민들이 우유를 독으로 착각해서 쫓겨났다고. 이외에 이곳에서 나무를 베어 조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아메리카에 대한 바이킹의 지식은 널리 퍼지지 않았고,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콜럼버스의 항해가 계기가 되었다.

  • 오다 노부나가삼단철포의 발명자 / 삼단철포는 에도시대의 소설에서 창작된 것.
    • 일본의 군사사 연구가인 스즈키 마사야는 오다 노부나가의 3단 철포가 허구라는 주장을 폈으며, 그의 주장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삼단철포는 에도시대 소설에서 창작된 것이다"라는 이야기 역시 사실이 아니다. 임진왜란 중에도 선조가 "일본이 만약 조총을 3단으로 연속사격할 경우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若分三運, 次次放砲, 迭爲先後, 則何敢當哉)"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전투대형인 삼첩진에서도 조총의 연속 사격 개념에 대해 완전히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이같은 조총의 연속사격 시스템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오다 노부나가가 발명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전국시대 말에는 이미 삼단철포가 완성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조총 이전, 활을 쏠 때도 딜레이를 줄이기 위해 교대 사격을 행했으므로 장전시간있는 원거리 무기의 교대 사격이라는 개념이 조총에 적용되는건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 위 작성자가 오해한 듯한데 '삼단철포는 에도시대의 소설에서 창작되었다'는 말은 '삼단철포라는 신묘한 전술을 도입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천재적 발상'이라는 신화가 에도시대의 소설이 기원이라는 것이지, 화승총의 교대사격이 에도시대에 도입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일본 전국 시대에 이미 교대 사격의 개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 맞다. 이 설은 원래 에도시대의 통속소설에 쓰인 내용이 메이지 시대 육군 교과서에 채택되어 유명해졌다는 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 다케다 신겐은 기마병 전술의 달인.
    • 기마병이 아니라 기마보병이었다. 은 이동수단으로만 사용하고 전투시에는 말에서 내려서 전투했다는 것. 말안장에 앉아서 싸운게 아니라 말 등위에 서서 달리다가 싸울 때는 말에서 뛰어내려 싸우는 게 기마보병이다.

  • 중미 및 남미의 정복자들은 현지인들에게 "예언에 기록된, 피부가 흰 신들" 의 강림으로 받아들여졌다.
    • 사실은 백인우월주의에 입각하여 꾸며진 이야기라고 한다. # ##
    • 당대의 아즈텍 제국 측의 기록에는 스페인에서 온 콩키스타도르들을 보고 "웬 신처럼 행동하는 사람처럼 생긴 놈들이 우리나라 땅에서 얼쩡대고 있다."고 서술한 내용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을 진짜 신으로 섬긴 건 아니고, 대부분의 경우는 사람을 닮은 이상하게 생긴 괴물 정도로 생각했고[28], 아즈텍의 황제인 몬테수마 2세피부가 허여멀건 신기하게 생긴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 온 사절들이라고 인식했다. 이들이 사절이 아니라, 침략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추측은 반만 맞아 떨어진 것이지만, 어쨌거나, 이들이 신이 아닌 건 정확하게 알았다. 다만, 이때가 아즈텍의 신성한 신인 켓살코아틀을 기리는 해였던 만큼, 이리도 경사스러운 날에 멀리 외국에서 사신까지와서 겹경사가 났다고 좋아했다는 기록이 와전되서 저런 오해가 나왔다고 보인다.~~만일 진짜 신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정복자들은 더더욱 나쁜 놈이 된다.

  • 스페인에르난 코르테스의 침략을 받은 아즈텍 제국은 짱짱 센 정복자들에게 제대로 상대조차 되지 못하고 연전연패하여 멸망하였다.
    • 정복에는 3년 이상 걸렸으며, 아즈텍 인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또한 실제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슬픔의 밤.

  • 명나라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게 망했다.
    • 명나라의 멸망을 언제로 기준잡는가에 따라 다르다. 전통적인 관점을 따를 경우 명은 이자성, 장헌충 등이 주도한 농민 봉기에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죽으며 멸망했다. 청은 이자성의 난 시점에도 국경 관문인 산해관조차 넘지 못해 지휘관 오삼계가 투항하고 문을 열어준 뒤에야 들어올 수 있었다. 이후 입성한 청은 형식상 숭정제를 추숭하는 등 명의 권위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애초에 청의 홍보용 역사서인 만주 원류고만 보더라도 청의 건국명분은 명을 멸망시킨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삼번의 난 이후 남명과 복명운동을 진압한건 청이 맞는데 남명까지 명나라로 인정할 경우 청이 멸망시킨 것으로 된다. 또한 명의 멸망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만력제의 쓰레기같은 치세이며 "명은 만력제 때에 실질적으로 망했다"는 평가도 있다.

  • 중국이라는 칭호는 본래부터 사용되지 않았었다. 우리 민족인 만주족이 사용한 칭호다.
    • 환빠들에 의해 퍼진 주장인데, 훈민정음을 만들 당시에도 중국이라는 뜻이 사용되고 있었다.[29] # 의외로 유물 중심으로 확인하였을 때 조선이라는 명칭은 흉노처럼 중국인들이 우리가 살던 지역을 부르는 명칭으로 본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명칭일 가능성도 있다.그리고 만주족은 우리랑 다르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스페인 출신이다.
    • 스페인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제노바 공화국 출신이다. 이름도 본래는 크리스토포로 콜롬보[30]였는데, 스페인식으로 크리스토발 콜론, 영어식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퍼지게 되었다.


3.2. 근대[편집]



3.2.1. 18세기[편집]


  •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하자 자유, 평등, 박애의 물결이 온 유럽에 파급효과를 일으켜서 자유주의의 시대를 열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선진 서구문화가 만들어졌다.
    • 반발심으로 인한 맹목적 자국 혐오로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서, "서양은 정조 시대에 이미 자유혁명을 일으켰는데 멍청한 조선은 유학에나 빠져서 일제가 침략할 때까지 손이나 빨고 있었다!" 와 같은 선전을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했을 때 온 유럽인들이 일치단결하여 "오오, 새로운 사상이다! 우리 모두를 더욱 선진화시키고 발전시킬 아이디어야!" 하며 잽싸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까워서, 그들의 왕인 루이 16세"감히" 처형한 프랑스를 그냥 냅뒀다간 큰일날 거라면서 온 유럽이 프랑스 하나 조지려고 동맹을 맺었을 정도였다. 즉 프랑스 국민공회 vs.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영국 + 네덜란드 + 스페인 + 나폴리 + 교황청. 이 때문에 큰 을 경험한 유럽사회는 1830년대부터 18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혁명을 반복해야 했다.
    • 물론 프랑스 혁명이 일으킨 물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그랬다면 대혁명이라고 불리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국 왕실이 대프랑스 동맹을 맺은 이유 중에는 자국에 끼칠 영향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혁명의 정신이 실제로 뿌리내릴 때까지는 길고긴 갈등과 혼란의 세월이 필요했고, 결국 '우리가 아는 선진 서구문화'가 유럽에 정말로 정착한 것은 사실 2차대전을 겪은 후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프랑스가 과연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을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 단두대는 기요틴이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결국 그 자신도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았다.
    • 단두대의 발명가는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이며, 기요틴은 단두대의 보급에 힘쓴 인물이다. 단두대의 초기명칭은 앙투안 루이를 따서 louisette로 불렸다. 앙투안 루이는 69세때, 기요틴은 75세때 사망했으며 둘 다 단두대랑 상관없이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단두대 항목 참조.[31]

  •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여러 오해가 중첩되어 만들어진 통념이라 볼 수 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문서 참조.
    • 사실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서양의 왕후가 이닌 중국 서진 왕조의 황제사마충이었다[32].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독살당했다.
    • 영화 "아마데우스" 에서 연출된 부분이고, 실제로 당대에 살리에리모차르트를 죽였다는 풍문도 있었으나, 당대의 존경받는 음악교육자이자[33], 모차르트 못지않게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성공했던 그가 굳이 모차르트를 독살할만한 동기가 없다. 오히려 작품성이나 인기는 살리에리보다 넘사벽으로 높았을 지언정, 받는 월급은 그보다 낮았던 모차르트가 열폭해서 살리에리를 죽이려 들었을거란 얘기가 더 그럴싸할 지경이다[34].
    • 그리고 당대의 의료 기록이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 모차르트의 증언에 의해 모차르트는 병으로 자연사했음이 확실히 입증된다.

  • 샌드위치는 샌드위치 백작카드를 하면서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만들었다.
    • 샌드위치 백작은 노름을 할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았고 백작의 취미는 폴로였다. 정작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이 남은 곳은 샌드위치 제도.
    • 샌드위치 마냥 빵과 빵 사이에 뭔가를 끼워 먹는 방식은 오래전부터 유럽을 비롯하여 빵을 먹는 나라들 사이에서 널리고 널렸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빵만 먹으면 맛이 없기 때문이다(...)[35]. 그래서 프랑스크로크 무슈를 포함해서 온갖 방식의 샌드위치가 나라마다 다양하게 만들어져 왔다. 그럼 왜 샌드위치에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이 붙었느냐면, 딱히 그 이유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다만, 본래 고위급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백작이 엄청난 양의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샌드위치를 즐겨먹었던게 그 이유였다는 민간어원설은 있다. 당장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이 하와이 제도의 별칭인 샌드위치 제도로 쓰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엄청난 워커홀릭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 하와이에 도달한 제임스 쿡이 당시 항해를 후원한 백작의 이름을 기려서 이렇게 명명했다고 한다.


3.2.2. 19세기[편집]


  • 에드워드 제너가 고안한 최초의 천연두 예방접종을 받은 제임스라는 소년은 도리어 20세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했다.
    • 반백신 운동가들이 열심히 설파하는 이 거짓말은 실제 "제임스" 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 턱이 없는 일반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문제의 주인공 제임스 피프스(James Phipps)(1788~1853)는 65세까지 살았다. 개중에는 제너의 아들이 21세에 천연두에 걸려 숨졌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맞지만 사실 병명은 폐결핵이다. 그리고 이 폐결핵은 제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로베르트 코흐가 발견했다.

  • 나폴레옹은 키 작은 루저였다.
    • 167cm 정도로 추정되나 그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키가 170cm 넘는 성인 남성들이 드물었다. 그러므로 당시 기준으로는 결코 작은 키가 아니다.[36]

  • 다윈은 죽기 전에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 이 감동적인(?) 돌아온 탕아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이는 당시 해군 제독이었던 제임스 호프 경의 미망인 호프 부인의 사기극이다.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그녀가 찾은 해법이 바로 그럴싸한 스토리를 만들어서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다니는 것. 그녀는 빚쟁이들에게 쫓겨다니면서, 종교인들에겐 자신이 다윈 일가의 추적을 받고 있다고 둘러댔다. 그녀의 창작 드라마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이야기가 사실인 듯 회자되곤 하지만, 속지 말자.
    • 설령 저 일화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과학 이론은 개인의 권위에 의존해서 신빙성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니 신경쓸 필요도 없다. 쉽게 말하면, 정말로 찰스 다윈이 죽기 전에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경을 인정했다고 해도 진화론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 미국에 끌려온 아프리카인 노예들은 거의 다 유럽인들이 납치해서 끌려왔다.
    • 물론, 납치당해서 끌려온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같은 아프리카인들에게서 팔아넘겨졌다. 참고로 당시 아프리카에는 부족들만 있던게 아니라 도시국가들과 왕국들과 제국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아프리카인" 이라는 동질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37], 서로 싸우면서 상대편 국민들을 사로잡아 유럽인 무역상들에게 팔아넘기고 돈을 벌었다.

  • 남북전쟁 직전의 미국 남부에는 아프리카계 노예가 흔했으며 누구나 대농장에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 실제로는 대다수 미국 남부의 유럽계 농민들은 아프리카계 노예 자체가 없었으며, 일부만이 1~2명 정도의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부렸고, 극소수의 대농장주가 아프리카계 노예들을 대규모로 관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민들은 노예제도의 존치에 찬성했다. 연구자들은 그들이 노예를 통해 직접적으로 경제적, 일상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예의 존재가 그들의 자존감을 채워주고 그들의 상대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최하층 계급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찬성한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한 바 있다.[38] 실제로 남북전쟁때 보면 남부는 백인보다 흑인이 더 많았는데도 끝내 흑인을 정규군으로는 쓰지 않았다.[39]

  •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완전히 이루었다.
    • 근대화의 시작은 메이지 유신이 맞았지만 근대화의 끝맺음은 메이지 유신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에 의한 전쟁 특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루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완전히 근대화를 이룬 것은 아니었고 이후 1차 세계대전에 의한 전쟁 특수가 생기자 이를 통해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룸으로써 1차 세계대전 이후 중진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 침탈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 전혀 사실이 아닌데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대표적 고정관념. 한국의 경우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그 결과 일본은 실제로 강국으로 도약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특히 이런 오해가 많다. 그리고 다른 사례로 영국의 대영제국 시절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해 영어를 국제 공용어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어가 국제 공용어 수준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영국이 많은 식민지를 확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 2차 대전 종료 이후 미국이라는 문명 등장 이래 지역, 시기를 불문하고 단연 역대 최강의 국가가 등장하며[40] 영어의 지위가 급속도로 상승했다. 실제로 미국의 영향을 장기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구 공산권 국가의 경우, 호텔에서까지 직원과 영어가 안 통하기도 한다. 한편 제국주의 국가들이 경제적 실익을 원했다면 목표 지역을 식민지로 만드는게 아니라 교역을 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뿐더러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원정비용도 안나오는 애물단지들이었다. 식민지 경영 자체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측면에서 내부불만 분산용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스마르크 같은 경우는 식민지 획득만큼 병신짓이 없다고 까다가 베를린 회의에서 마지못해 토고카메룬 등을 식민지로 삼기도 했다.
    • 식민지는 시장과 원료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도 메리트가 거의 없었다. 식민지는 채산성이 없어서 투자기피 대상이었던 것은 둘째치고 수익 창출 하부구조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프랑스의 예를 들자면 무역의 대부분을 유럽열강과 미국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교역량을 다 합쳐도 유럽과의 교역의 반의 반도 안됐다. 원료도 무역으로 얻으면 더 싼데다 산업 혁명의 원료인 석탄정작 유럽 지…
    • 정말로 이 오해가 옳았다면 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많은 열강들이 자기네 식민지들을 선뜻 포기할 수 있었는지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41] 가뜩이나 식민지 경영은 득보다는 실이 큰 실패한 사업이었는데, 식민지 시민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평등하게 운영하라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42] 예외적으로 프랑스알제리베트남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했는데 이는 100년 넘게 동화주의를 적용하면서 식민지에 대한 애착이 커졌기 때문.[43][44]
    • 그 외에도 제국주의 열강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을 "인간으로 교화시키거나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식민지를 확장시켰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45] 식민지 확대 자체가 경쟁국들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용도로 쓰였다는 해석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 16세기의 저 악명 높았던 에스파냐바야돌리드(Valladolid) 논쟁도 교화나 개종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짐승인가 인간인가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논쟁의 근본적인 이유는 원주민들을 가축과 같은 부류로 봄으로써 정복자들의 수익과 이로 인해 발생할 세금에 따른 에스파냐 왕국 예산의 문제가 얽혀있었기 때문.
    • 다만 그러면 왜 이런 오해가 퍼졌느냐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한데, 대략 세 가지 정도 요소가 중요하다. 첫째로 본국의 입장에서 거두어 들인 것은 경제 규모에 비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식민지에서는 그것이 생활을 파괴할 정도의 요소가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영국인도 제국에 수출한 면화 공업품은 본국에서 소모한 것에 비해 극히 적었지만 인도의 전통적인 면화 공업을 파괴하기에는 충분했다. 둘째로 통계상으로 경제 분야에 잡히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자유의 상실로 인한 기회의 박탈 및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여서 일본으로부터 떨어지는 콩고물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널리 알려지고 이로 인해 (중위소득은 일단 차치하고) 전체적인 조선인들의 소득이 올라갔다고 하면, 당시 친일을 하지 않고 차별을 당하던 조선인들이 이로 인해 간접적인 효과(일본이 중국 침략을 위해 세워놓은 철도 등의 건설으로 인해 일자리를 얻었던 경우 등)를 받더라도 기회의 박탈을 더욱 크게 느낄 것이다(물론 이에 대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 항목에서 설명하듯 실제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는 통계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이상의 예시는 당시 식민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위한 가정으로 받아들이자). 셋째로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자유주의 경제가 쇠퇴하고 블록 경제화가 진행되면서, 이전까지는 정치적 교두보 차원에서 확보했던 식민지에서도 내적 자급을 위해 자원을 짜내거나 통화 제도 등의 경제 제도가 본국의 의지에 의해 크게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개의 국가들은 이 시기를 겪은 세대의 주도로 독립을 얻었다. 가령 한국의 경우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극단적인 착취를 겪은 직후 일제의 지배로부터 풀려났으며, 그에 더해 블록 경제화에 의해 일본 및 만주와 연동하여 움직이던 산업이 원료 부족 및 공업 인력의 유출 등으로 인해 마비되면서 해방 이후의 경제 상황은 극한도로 혼란스러웠다. 당연히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에 있겠지만, 해방 이전의 조선 경제는 일본에 예속되어 끌려다니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제국주의 식민지 개척으로 인해 특별히 경제적 호황을 누리던 나라는 그 많던 식민 제국을 통틀어 일본이 유일하며, 하필이면 그 일본에 지배된 나라가 조선이었던 관계로 현대의 한국 사람이나 북한 사람의 경우 "식민지 = 수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본의 경우 성공적인 조선 착취로 인해 1920년대 일명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본 역사상 1980년대 거품 경제 시절 다음으로 제일가는 경제 호황을 맞게 되고, 그 이후에 터진 세계 대공황에서 식민제국들 중 가장 먼저 벗어나기도 한다. (물론 같은 기간 조선 사람들은 일본 권력에 성공적으로 빌붙은 부유한 앞잡이들과 그 이외 절대다수의 가난한 민중들이라는, 현재 북한의 특권층인 평양 시민 vs 그 이외 지역 거주민 수준에 버금가는 극심한 빈부 양극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일본이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게 된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에도 그 직후에 터진 한국전쟁 특수까지 맞물려 1980년대에는 세계 제 2의 경제대국의 위치까지 올라가기도 하지만, 그 이외의 식민제국들이 식민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국가의 자존심적인 측면이 더 크다.
    • 다만 바로 위의 일본이 식민지 개척으로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는 문장은 이견의 여지가 있다. 다이쇼 시기의 풍요는 1차 세계대전과 전간기의 호황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 당시 조선에 실시된 산미증식계획은 오히려 조선인 지주들과 일본인 유통업자들에게만 이득을 줬다. 일본 쌀값이 폭락해 일본 농가들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고. 조선인 지주들은 이렇게 얻은 재력을 기반으로 다른 사업까지 손을 뻗기 시작했다. 채만식의 소설 태평천하에서 만석꾼 윤 직원 영감이 괜히 "이 태평천하에!"를 외친 것이 아니다. 당시 조선인 지주들에게는 끝내주던(...) 시절이던 것. 조선 농촌의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지주들이 고율의 소작세를 걷은 건 사실이지만, 수탈의 결과로 다이쇼 일본이 풍요로워졌다고 말하긴 어렵다.
    • 하지만 식민지 경영으로 부를 안 누린 예가 아주 없는것도 아닌데 국가 차원에서는 몰라도 개인 차원에서는 유럽 국가에서 그런 사례가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를 자기 땅으로 만든 후 혹독한 착취를 통해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 그 부로 거대한 건축물도 몇개씩 지어댔을 정도

  • 제멜바이스가 최초로 손씻기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 카를 본 로키탄스키(Carl von Rokitansky)가 먼저 주장한 것이고 제멜바이스의 독창적 내용은 별로 없다. 제멜바이스는 이걸로 학계의 따돌림을 받았던 적도 없었고, 헝가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19세기 말의 많은 의학 문헌들에 인용되었다. 물론 제멜바이스의 노력 덕택에 산모 사망률이 극적으로 감소한 것은 사실. 관련자료(영어)


3.2.3. 20세기, 21세기[편집]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벨기에 등지에서 병사들은 오물과 흙탕물로 가득한 참호에서 서로를 총검으로 찌르고 육편이 튀기는 끔찍한 참호전을 벌여야 했다.
    • 참호전의 본질 자체는 끔찍하긴 하지만, 실제 전투의 양상은 훨씬 온건하게 흘러갔다. 당시 참전 장병들의 일기나 편지, 회고록, 그리고 군사 보고서 등을 토대로 하여 판단한 결과 당시 전선에서는 뜻밖의 호혜성의 논리가 작동했다. 야간에 군수 물자가 완충 지역에 뿌려지면 피아를 막론하고 전투 식량을 나르기 위해 참호에서 나섰다가 웃고 떠들면서 그것들을 가져왔고, 어떤 전장에서는 오전 8시~9시 사이는 자체 휴전 시간을 정해놓기도 했으며, 저격수에게서 안전한 지역을 만들어 깃발을 꽂아 표시했고, 서로 참호 밖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기습적으로 발포하는 것은 예의 없는 일로 여겨졌고, 심지어 양측의 휴식 시간 중에 눈치 없는(?) 포병대가 포격을 퍼붓자, 그쪽 부대에서 "빌어먹을 우리 포병대 때문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길 바란다. 미안하다!"(...)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자신들의 의례적인 공격의 규모와 종류, 강도, 시간, 목표를 예측 가능하도록 일정하게 하고, 심지어 이런 암묵의 룰은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퍼져나가서 높으신 분들이 "싸워 이기라고 기껏 총 쥐어 보내 놨더니 친목질이나 하고 있냐!" 같은 훈령을 시시각각 내려보냈을 정도였다. 가만보면 얘네들은 전쟁을 로맨틱하게 한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그럼 니들이 와서 싸워보든가!" 라고 할 거 같다.
    • 게임 이론의 권위자 로버트 액설로드(R.Axelrod)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를 두고 "목숨을 걸고 벌이는 죄수의 딜레마" 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일단 평화를 지향하되, 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면 즉시 확실하고 단호하게 보복하는 패턴을 보였는데, 이는 팃포탯(Tit-for-tat) 전략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각지의 전장 상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병사들이 죽음의 공포와 불확실한 미래에 시달리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 평화는 훗날 상관들이 상대편 참호를 대규모로 야습하는 명령을 반복적으로 내리면서 깨어졌지만, 정작 상관들이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 1918년 10월 러시아 혁명 때 분노한 민중들이 군인들과 합세해 몰아닥쳐 피로 혁명을 일구어냈다.
    • 실제로 당시 사망한 사람은 3명밖에 안된다. 거기다가 지키는 쪽도 대충 싸워서 점심 먹다가 돌아와보니 일이 끝나 있더라는 이들도 있었다(...)


  • 아돌프 히틀러는 비약적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독일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 겉으로만 보면 어느정도 맞지만,문제는, 일자리 창출을 한다는 명목으로 여자, 유대인 등을 일자리에서 빼버렸다. 무엇보다 일시적으로 경제가 향상된 것은 군사에다 국가경제의 모든것을 쏟아부운 것이 크며(아우토반이나 그밖의 건설에 투자한것도 있지만) 1936년쯤 되면 독일 GDP의 무려 10%를 군비 확장에 쏟아붇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상태에서 수출이 10%나 줄어들었다. 즉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망하게 되있었단 것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수학 성적이 뒤떨어졌다.
    • 아인슈타인이 1935년 프린스턴에 있을 때에도 그런 소문이 있어서 아니라고 직접 인증했다. 1886년 아인슈타인이 7살때 가톨릭 소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고 그의 어머니는 기록했다. 김나지움 교장이었던 H. Wieleitner는 아인슈타인의 라틴어 성적은 적어도 2등급(1이 최고 4가 최저), 그리스어 최종 성적은 2등급이며, 수학은 1과 2를 오갔으나 5년째부터 1을 기록했다고 증언했다.[46] 아인슈타인이 다닌 김나지움이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당하면서 관련 자료가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김나지움때의 수학 성적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중등 교육기관인 김나지움에서 우수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김나지움 자체는 웬만한 독일 도시라면 도시마다 한 개, 뮌헨이나 베를린 같은 큰 도시에도 2~3개밖에 없는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다. 그가 김나지움을 그만둔 이유는 학업 부적응 때문이 아니라[47] 그의 부모가 경영하던 가업이 망하는 바람에 이탈리아로 부모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끝내 김나지움 졸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부득이 외가 쪽으로 인맥이 있었던 헤어초크가 학장으로 있는 ETH에 수리물리교육과로 입학하게 된다. 처음에는 입학 조건이 안 되어 낙방했다가, 1년간 스위스에서 남은 공부를 마친 후에 다시 도전하여 손쉽게 합격한다. 이곳에서 전자기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루머도 있지만 이는 아인슈타인이 그곳의 물리학 교수 웨버에 대하여 "저 인간은 남의 험담만 하고 강의는 불성실하게 함" 이라며 까대던 것이 와전된 것이다. 정작 웨버는 ETH에 아인슈타인이 처음 낙방했을 때 그의 천재성을 강조하며 그가 자신의 강의를 청강해도 좋다고 배려해 주기도 했었다. 나중에는 서로 갈라서게 됐지만... 또한 아인슈타인은 거기 그대로 머무르며 차후 독일군에 징집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48] ETH에 낙방하고 아라우 주립학교를 다닌 시절의 아인슈타인의 수학 성적은 최고 등급이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세상과 담 쌓고 사회성이 부족한 부적응자였으며, 이는 어릴 때부터 보였던 자폐증 증세 때문이다.
    • 사회 부적응자라기보다는 그냥 괴짜에 가까웠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Geek 같은 인상으로 보면 대충 비슷하다(…). 그냥 이공계에 종종 보이는 특이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 대학교에서는 종종 교수에게 피곤한 질문을 던져서 미운 털이 박히기도 했지만, 김나지움에서는 수학 교사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하숙집 주인 가족들과도 원만히 잘 어울렸고, 가는 곳마다 친구를 만들어서 즐겨 어울렸으며, 평생 자신의 가족들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그는 까다로운 구석이 분명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 아인슈타인이 유년 시절에 말이 늦게 트인 것은 맞지만, 소년기 이후로는 자폐증 증세를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유전적으로 보아도 아인슈타인의 가계에는 비슷한 정신질환을 앓은 선례가 전혀 없었다. 그의 차남 에두아르트는 실제로 조현병 환자였는데, 이는 부인 밀레바 쪽의 가계에서 정신적 병력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설명되었다.
    •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그전의 신화들이 많이 깨진 이유는 과거에는 비공개로 전해지던 그의 개인 편지들이 90년대 무렵부터 공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과 맞서던 미국에서 "독일의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교육 시스템에 저항하여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었던 천재" 의 이미지를 아인슈타인에게 덧씌웠기 때문에 이런 신화가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다는 자성도 있다.
  • 제2차 세계대전추축국들은 모두 파시스트 내지는 군국주의 성향이었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전쟁범죄를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다.
    • 추축국이 정책적으로 저지르긴 했지만 구성원 중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없는 국가는 이세상에 없다. 특히 수많은 독일 및 점령지 여자들이 소련군에게 강간당한 일이 있다. 독일의 침공이 일어나면서 소련의 나라 상황이 개판이 된 나머지 동부전선 전역에서 도둑과 양아치가 들끓었고 기존의 소련군 장병들이 전투 중에 계속 사망하면서 이렇게 자질이 떨어지는 인원들을 어쩔수없이 징집해야 했던 소련의 위태로웠던 사정이 그 원인이다. 소련카틴 학살 같은 포로나 소수민족 학살, 굴라그 같은 강제수용소강제이주라던지. 미국에서도 일본인 강제수용소를 지어서 모조리 가두기도 했고, 또 드레스덴 폭격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같이 대규모 폭격 작전이나 벵골 대기근도 있다.[49] 연합국 역시 전쟁범죄가 다소 존재했지만, 전쟁을 먼저 일으킨쪽은 엄연히 추축국이었고, 추축국은 특별히 정책적으로 이런 전쟁범죄를 저질렀던게 전범재판에서 주목받았기에, 개별 인원이 엇나간 행동을 보였던 연합군의 범죄가 크게 주목받지 않는 것 또한(특히 소련 등) 문제가 되고 있다. 실제로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도 독일군들만 재판에 회부되었고, 소련군이나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은 그런거 없다.

  • 제2차 세계대전 때 추축국 소속 군인들은 전부 양민 학살을 저지른 천하의 개쌍놈들이다.
    • 추축군이 끔찍한 전쟁범죄들을 많이 저지른건 사실이지만, 전부 그랬을 리는 없다. 애초에 무슨 다에시처럼 국가의 탈을쓴 테러연합도 아니고, 파시즘에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국가의 정규군들인데 전원 미치광이로만 이루어져 있다는건 말이 안되며, 군대라는 거대한 조직의 명령 체계와 군율에 묻혀 개개인의 성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50] 단지 국가가 정책적으로 학살을 일으켰던 데다가 미치광이들이 주목을 받아 유명해지고, 개념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을 뿐이다. 사실 안 미친게 당연한 거라서 그렇다
    • 혼란과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세계에서 어떤 군인, 부대가 전쟁범죄를 일으키지 않고 적국에 대해 동정적인 시각이나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찌되었든 결국 추축국들 자체가 군국주의/파시즘 체제를 띄고 있어서 독일인, 이탈리아인, 일본인들도 다들 국가의 전쟁에 반강제적으로 협력하던 중이었다. 공장에 끌려가거나, 노동자로 끌려가거나 등 그랬기에 연합국이 본토 침공/공습을 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해도, 국제사회에서 그들을 민간인으로 보는 시각은 약했다. 어쨌든 다들 군수물품/물자 생산에 동원되는 판이었고.
    • 다만 추축국 소속 군인 중에서 병신이 많았던 것은 부정할 순 없다. 특히 일본군은(...)[51]

  • 독일 국방군은 일본군과 자국 무장친위대와는 달리 전쟁범죄를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고, 전쟁범죄는 오로지 무장친위대가 저질렀다.
    • 독소전쟁에서 제대로 광기가 폭발한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만행들을 보면 절대로 그런 소리가 나올 수가 없다. 벨라루스 초토화작전도 국방군과 무장친위대가 같이 저지른 전범 행위다. 나무위키나 한국 위키피디아에는 독소전쟁의 참상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모자라므로 외국 자료에서 찾아보는 게 좋다.[52]왜 독소전쟁이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친위대에 속해있었다고 모두 광신도에 양민학살자는 아니었고 전쟁범죄에 대놓고 반기를든 인물들도 있었다. 나찌친위대라는 특성상 국방군보다도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 호의적이었지만, 파울 하우서나 빌헬름 비트리히 같은경우를 보면, 저소리 안나온다.
    • 일본군도 마찬가지 삼대오물로 욕먹는 무타구치 렌야,도미나가 교지,스기야마 하지메의 경우 놀랍게도 인성인 비교적 정상이었다(...) 셋 다 각각 멍청이, 겁쟁이, 바보라서 문제였지 무타구치는 학살에 대해서 반대를 했고 도미나가 교지는 세균전에 반대했고 스기야마는 이렇다 할 학살 경력이 없다. 그리고 일본군/인물 문서를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정상인도 많았다. 단지 정상인은 중용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쯤 되면 삼대오물은 어째서 인성은 정상인데도[53] 꽤 올라갔는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이 셋은 인맥빨이 있었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고 항복하였다.
    • 엄연히 틀린 사실. 유럽 전선은 독소전쟁을 빼면 이야기 자체가 안 된다. 실제로 유럽의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것도 쿠르스크 전투바그라티온 작전이 더크다고 평가받는다. 당장 노르망디 상륙 이후에도 몽고메리의 삽질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아주 죽을 쑤었다. 러시아인들은 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간다고. 애초에 독일 국방군은 사망자 중 80% 가량이 소련군과 싸우며 전사한 것이다. [54]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에서도 서방권 연합국(미국/영국/네덜란드/호주 등)들만이 조명받는 편인데, 2차 대전 기간 동안 일본군의 사망자중 절반가량은 장제스국민혁명군이 낸 성과이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중일전쟁을 제외하고도 중국군은 태평양 전선까지 내려오며 일본과 싸웠다. 2차 대전 후 냉전 하에서 소련중국공산주의 진영에 서게 되고, 한국인들의 기억에 끔찍하게 남아 있는 한국 전쟁의 원흉인 북한을 그들(소련/중국)이 지원하였기에, 전후 한국에선 반공/친미 분위기가 지배하며 중국과 소련은 과소평가되는 면이 컸다.


  •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숫자는 크게 과장되었다.
    • 주로 반유대주의자들이 선동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유대인들의 숫자가 더 적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노엄 촘스키(유대인이다)나 마이클 셔머 같은 경우.

  • 유대인 절멸을 향한 나치 독일의 광기와 비합리성이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다.
    • 도리어 유럽의 많은 역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극도로 근대적이고 체계화된 체계가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다" 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풍조도 바로 홀로코스트라는 된서리를 맞아 수그러들었고, 또한 "Anything goes!" 로 흔히 일컬어지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도 홀로코스트와 무관하게 일어났다고 보긴 힘들다. 독일학자들은 유대인의 객관적 열등함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고 연구했으며(그당시 반유대주의 정서를 생각해보면), 현대적 관료 시스템이 천만에 달하는 유대인들과 집시, 성 소수자들을 추적, 분류, 등록하게 했고, 소위 "컨베이어 벨트" 에 비견될 만한 체계적인 절멸 작업이 착착 진행된것 역시 지나칠 정도의 냉정한 합리성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참고자료


  • 진주만 공습 이후 열받은 미국은 대규모의 군수산업을 풀가동하여 함선들을 미친듯이 찍어내기 시작했고, 그 첫 결과물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을 통한 전세역전이다.
    • 미드웨이 해전 당시 참여했던 함선들은 진주만 공습 당시 요행히 살아남은 소수였으며 새로 진수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중에서는 반쯤 못쓰게 된 것을 어찌어찌 수리해서 전쟁터로 다시 등 떠밀어 보낸(…) "요크타운" 같은 케이스도 있었다. 미군의 분노의 쇼미더머니가 그 결실을 맺은 것은 적어도 과달카날 전투 이후부터다. 사실,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이 가장 취약하던 위기의 순간에 벌어진 해전이었으나, 그들이 (그나마의 남은 함대만을 가지고) 승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자원을 동원한, 필사의 총력을 다해 준비한 해전에 가까웠다. 전투에 임하는 양과 질이 달랐던 게 아니라,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던 것.
    • 과달카날 전투 당시에는 전황이 더욱 기울어서, 전투 초기 사보섬 해전에서는 미 해군이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발렸고, 심지어 산타크루즈 해전을 치른 뒤에는 일시적으로나마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운용 가능한 항모가 한 대도 없던 순간도 있었다. 당시 그나마 운용 가능하면서 일시 수리를 받고 있던 항모가 바로 그 유명한 "엔터프라이즈" 다. 그 이후에도 미군은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순양함 함대가 물자를 수송 중인 구축함에게 역으로 털리는 망신을 당한다.[55]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이 그 이후로는 미군의 물량 공세를 도저히 당해내지 못했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미국이 진주만에서 기습을 당한 후, 미드웨이 해전부터 줄곧 멍청한 일본군을 떡실신시키며 승승장구했다" 의 상황까지는 아니었다는 것. 이 시기 일본은 중국과 끝없고 부질없는 전쟁을 한 지 4-5년이 되었기에 나름대로 단련되어 있던 시기고,[56] 미국은 전면전 경험이 없어서 초반에는 상당히 고전했다. 다만 위에서 말했듯이 물량/공업능력/인력 자원 면에서 미국/소련/중국은 추축국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2차 대전 중후반에는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한계가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 애치슨 선언을 통해 미국은 일본만을 지킬 것이며 는 미군이 안 지키는 지역이니 아시아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국제사회에 신호를 보냈다.
    • 애치슨 라인은 추후의 국제분쟁 발생시 미 육군이 투입되는 한계를 설정한 것이며, 애치슨 라인 밖의 비공산권 국가들이 군사적 위협을 받을 경우 지상군 투입을 제외한 다른 방식으로 돕겠다는 의지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군비축소를 위해 고심하고 있었고, 향후의 국제분쟁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히 낙관적이었다고. 자세한 내용은 애치슨 라인 참고.
    •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한에서는 진짜 그렇게 여겼기에 애치슨 라인이 한국전쟁과는 관련이 있긴 하다. 실제로 에치슨 자신도 결국 에치슨 라인 때문에 비난받기도 했다.

  •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계속된 사죄로 모든 피해국들이 깔끔히 독일을 용서하고 지난일을 완전히 잊었다.
    • 과거 일에 의한 독일에 대한 반감 자체는 여전히 남아있다. 증오까지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독일에 아직도 부정적인 인식이 긍정적인 인식보다 강하다는 설문조사가 있었고[57], 나치에게 가장 호되게 시달린 유럽국가들인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과 동유럽 지역에는 아직까지도 반감이 많이 남아있다. 이들 나라들은 사실 전쟁 이전부터 사이가 안좋기도 했고.. 지금은 나치보다는 EU에서의 영향력이 유럽에서 반 독일감정을 부추기고 있다.

  • 세계대전 전후 유럽 사람들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는 민감하게 반응했지만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에는 무관심했다.
    • 그렇지 않다. 지난 1971년 일본 쇼와 덴노고준 황후 부부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일왕을 잡아다가 전범재판에 넘기라!!" 는 격렬한 시위를 한 적도 있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고. 애초에 미국 국민들이 일본에 증오를 품게 된 이유도 노골적인 포로학대 등 때문이었다. 다만 도쿄 전범 재판이 뉘른베르크에 비해 훨씬 느슨하게 진행되었고 나치에 대해선 발악을 하면서도 일본군에 대해선 그래도 반감이나 관심이 덜한 것은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 그리고 일본의 전쟁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경제력과 국제적 위상이 크게 늘면서, 일본 제국이 저지른 만행이 대대적으로 재조명받고 있고, 이에 따라 서구권에서 반일 감정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당장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에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공약 중에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강력하게 규탄하는 것이 있었던 것과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 만화 페스티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부인주의로 일관하는 내용의 일본 만화가 치워져버린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 독일에서는 개막장 극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 아돌프 히틀러를 악마 취급하지만, 일본에서는 도조 히데키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
    • 일본독일에 비해서 극우 세력의 깽판이 좀더 노골적이고 공개적이다 보니 이런 오해가 생긴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개막장 극우들을 제외하면 도조는 좌우를 막론하고 악마 취급받고 인간 쓰레기 취급받는, 히틀러와 별 다를바 없는 처지다. 실제로 도조는 연합군의 간섭 없이 일본 내에서 자체적으로 전범 재판을 했어도 십중팔구 처형당했을거라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의 전반적인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나마 베니토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도조에 비해 이탈리아 내에서의 인식이 긍정적인 편. 이탈리아도 엄연히 아프리카 대륙을 침략해 2차대전을 일으키긴 했지만 전쟁범죄 부분에선 독일/일본뿐 아니라 헝가리 등보다도 훨씬 미미했다. 연합국의 2차대전 프로파간다 포스터에서도 처음엔 히틀러, 도조와 함께 악마 3인방으로 나왔으나, 나머지 둘에 비해 악명도 덜했고, 이탈리아 자체가 빨리 항복하였다.
    • 다만 일본에서도 비정상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식인종을 기리는 신사가 있다든가(...)

  • 독일에서 나치관련상징은 무조건 금지된다.
    • 무조건...은 아니고, 조건이 생각보다는 널널하다. 독일형법 86조 제2항에서는 '제1항에 의한 선전물은 그 내용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및 국제적 이해와 합의에 반하는 문서만으로 한정한다'고 되어 있고(즉 나치 시절에 만들어진 표현물이라 하더라도 나치주의가 옅거나 없으면 금지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제3항에서는 '선전물 또는 선전행위가 국민계몽(예를 들어 '나치는 나쁘다'고 홍보하는 경우), 위헌적 계획의 저지, 예술, 학문, 연구, 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관한 보도(예를 들어 당대의 사건을 다룬 작품), 기타 이와 유사한 목적에 공하는 경우에는 제1항이 적용되지 아니한다.'라 되어 있다.
    • 독일 정당 중에서 실제로 나치당이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의 의의만 있을 정도로 군소정당이며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대한애국당 이하의 입지를 가진 초약당이다.

  • 독일의 과거사 반성에 대해서 일본이 본받아야 한다.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는 반면 독일은 철저히 사죄하고 배상했다.
    • 일단 일본 또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식민 통치의 강압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했다. 배상문제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문제는 한일기본조약에의하여 끝난 상황이다. 문제는 일본이 지불한 배상금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당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다른 용도로 써버렸고 이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아서 사람들이 이 사실 자체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 철저하게 사과한것은 유대인 학살등 2차 대전에 저지른 전쟁범죄에 한정된다. 물론 2000년 대에 들어서 독일 정부가 과거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 사과하기는 했으나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과거 식민지에 저지른 잔혹행위들을 사과하는 움직임이 생겨나자 여기에 따른것 뿐이다. 게다가 독일은 집시 학살에 관해서는 거의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언급을 할 때도 집시는 명확한 언급 없이 '그외 기타 등등' 정도로 언급된다. 그리고 동방 정책을 언급하며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한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동방 정책의 주된 목적은 과거사 청산이 아니라 냉전을 극복하고 동독을 비롯한 공산권과 교류하는 것이였다. 결과적으로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어 소련의 보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소련과도 교류를 했으나 이건 양국의 높으신 분들끼리 정치적으로 합의한 결과였지 절대로 동유럽권에게 빈틈없고 깨끗하며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하여 이뤄낸 결과는 아니였다. 오히려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동방 정책은 독일이 동유럽을 침략하여 큰 상처와 피해를 준 국가라는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독일의 이미지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사과와 배상까지 잘 해놓고 총리라는 인간들이 각종 망언을 일삼아서(...) 이미지를 신나게 깎아먹고 있다.

  • 프랑스는 전후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하게 단죄했고 이는 한국도 본받았어야 한다.
    •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거의 학살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모습이 좋지 않았다. 비시 정부 수뇌부의 일부가 포함되기는 했지만, 처벌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독일군을 애인으로 둔 여자들, 정치적 노선이 다른 레지스탕스(!)들, 저항하기 힘든 사회적 약자들로, 만만한 사람들을 잡아다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고 봐도 될 정도. 비시 정부에는 85만 명의 공무원들이 있었지만 징계조치를 받은 사람들은 3천 명에 불과했으며, 거꾸로 레지스탕스들이 비시 정부에 종사한 이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봉기했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관련 포스트공식적으로 처벌된 인원은 총 4만 명인데, 이들조차도 1951년에 국가재건을 명목으로 국민투표(!)를 거쳐서 대부분 사면했다고 한다. 애초에 일제강점기나치 치하의 프랑스를 비교하는것 자체가 양립하지 않는다. 일본 제국은 한국을 식민지로서 36년동안 지배했으며,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지로서 짧게 4년 지배하였으니 그 2가지가 양립할리 없고, 만약 그렇다 쳐도 프랑스처럼 친일파를 청산하면 일본은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한 기간보다 9배나 긴 기간(36년) 동안 지배했으니 그런식으로 친일파 청산을 하면 처벌 받은 친일파 수는 처벌받은 프랑스 나치 부역자들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 미국은 쿠르트 발트하임과 같은 국제인사라도 나치와 관련되면 얄짤없이 대했다.
    • 미국은 쿠르트 발트하임이 과거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국방군 장교란 이유로 입국을 불허했지만 우습게도 그보다 더한 짓을 저지른 나치 과학자들을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빼돌려 집도 주고 차도 주고 극진히 대접했다. 순전히 쿠르트만 저렇게 대우한 것은 단지 보여주기란 냉소적인 비판도 상당하다. 오히려 이러한 점을 들어 미국이 주장하는 인권의 이중성을 논하는 경우도 많다.

  •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자다.
    • 이스라엘인들 중 골다 메이어 싫어하는 사람도 꽤 있다. 무엇보다도 골다는 히틀러 못지 않은 인종차별주의자로 만약 충분한 지원과 국제사회의 침묵이 있었다면 아랍인들을 상대로 홀로코스트를 실행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아랍인 학자들도 상당하다. 실제로 그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문서 참조. 오죽하면 이 사람이 죽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좋아했을까[58] 애당초 또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비록 기습당했다고는 하나 이스라엘이 영혼까지 털렸는데 제3차 중동전쟁에서만 해도 기습했다곤 하나 아랍군을 탈탈 털어버린걸 감안해보면 절대 최고의 지도자라 할 수 없다.
    • 더더욱 큰 문제는 이것이 타민족에 대한 태도이기만 하다면 그냥 평범한 인종차별주의자에 그칠 지 모르나 골다 메이어는 같은 유대인끼리도 차별했다. 세파르딤을 무려 아랍인과 동일시 했을 정도 유대인이 아랍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보면 이런 멍청한 생각도 따로 없다.

  • 중국이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사해 운동 때문이다.
    • 단정짓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제사해 운동보다 토법고로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원인중 하나는 맞다. 토법고로+제사해 운동+첸쉐썬의 농법[59]이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서 망했기 때문

  •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우주로 나간 유리 가가린은 "우주에서 나는 어떤 신도 보지 못했다" 라는 말을 남겼다.
    • 정작 가가린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다. 이 오해에 대해서는 흐루시초프가 당 위원회에서 가가린을 무신론자처럼 표현하는 잘못된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는 증언이 존재한다.


  •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퐁니퐁넛 학살등 전쟁 범죄를 일으켰고 베트남을 침략한 침략국가다.
    • 해당 주장은 구수정 개인의 근거없는 망상에 가까우며, 한국군은 엄연히 미군의 남베트남 내부의 치안 담당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을 뿐, 북베트남과 교전한 적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베트콩과 교전했다. 상기한 퐁니 퐁넛 학살도 구체적인 증거를 갖고 있는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명백한 전쟁범죄가 아니라 미군 한명의 근거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며 오히려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주장이 더 많다. 자세한 사항은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참조.]

  •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전한 것은 베트콩이 미군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 사실 군사적으로는 북베트남군이 절망적이라 할 정도로 미군에게 확실히 밀리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이유에서 미군의 철수가 결정되었던 것. 이후 이미 오래 전부터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 남베트남 수뇌부의 대규모 삽질로 인해 북베트남이 남침 통일에 성공했다.[60]
    • 무엇보다 절대적 강세에서 베트콩이 미군보다 강했을 리도 없다. 그랬다면 북베트남은 미군을 영혼까지 털어버린 후 전쟁배상금이고 뭐고 받고싶은대로 요구했을 텐데 단 한푼의 전쟁배상금을 받아내지 못했다.

  •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 패전한 것은 베트남 사람들의 안보의식과 반공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 당시 남베트남은 심각할 정도의 도덕적 부패를 보였으며, 이는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사건에 대해 통칭 "마담뉴" 라고 불리는 쩐레쑤언(Trần Lệ Xuân, 陳麗春)이 망언한 저 유명한 바베큐드립으로 적나라하게 대표된다. 나라가 부패하자 사회 각계각층이 썩어가기 시작했고 이런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들의 사기가 높을 리 없었다. 애초에 남베트남은 그 잘난 반공정신 말고는 국가로서 제대로 된 행정력, 공권력 등을 처음부터 보여주지 못했다. 와중에 소위 핑퐁 외교라고 불리는 친중국 노선으로 미국이 갈아타고, 일단 미국이 파리협정을 통해 손 털고 나가자 그간 미국만 믿고 버티던 남베트남 군대는 졸지에 당나라 군대가 되어버려서 온 사방에서 명령거부와 전장이탈, 자멸, 지휘계통 붕괴 등이 벌어지면서 한순간에 폭삭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한국군이 작전하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한국군이 철수한 뒤 곧바로 밀려버렸다(…). 그 와중에도 수도 사이공에서는 정쟁과 쿠데타 음모가 난무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남베트남의 사례는 무너질 만한 나라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가 남베트남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반공정신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오히려 남베트남이 반공정신이 부족해 무너졌네 마네 하는 얘기를 더 경계할 필요가 있다.
    • 남베트남 사람들의 반공의식이 정말로 부족했다면, 이 사람들은 대체 뭐 때문에 대책도 없이 바다로 뛰쳐나왔던 걸까?
    • 무엇보다 남베트남 사람에게는 북베트남이건 남베트남이건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외에 남베트남의 패배 원인에 대해선 문서 참조


  • 일본은 아직까지도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자고 한국 측에 지속적으로 제안해 오고 있지만, 한국은 지금껏 그 셀 수 없이 많은 요구들을 모두 묵살해 왔다.
    • 독도 문제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 상당수까지도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이 한국에 정식으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요청한 건 아직까지 딱 3번 뿐이다. 그것도 최근의 일이 아니라 1952년, 1962년, 1965년밖에 없다.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후로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은 단 한 차례도 더는 회부를 요청할 수 없었다. 당시 조약 내용 중에 "한일 간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외교상의 조정 또는 제3국에 의한 조정을 통하기로 한다" 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 일본 외무성 발간 자료 등에는 마치 "1952년, 1962년, 1965년 이래로 일본은 계속..." 과 같이 요청이 많이 뒤이어 온 것처럼 쓰이긴 했지만, 자기네들도 대국민용으로 "회부를 검토하겠다, 회부 요청을 고려중이다" 식으로만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즉 한국은 이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고, 독도에 군대를 주둔한다거나 분쟁지역화를 한다거나 하면 도리어 유리한 위치를 잃게 될 위험이 있다.

  • 2차대전 당시 생체실험은 추축국만 했으며 연합국은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체실험 대상은 식민지인이나 전쟁포로들에게만 행해졌다.
    • 연합국 소속인 프랑스알제리인들을 대상으로 끔찍한 생체실험을 저질렀다. 그것도 추축국보다 먼저. 그리고 추축국 내에서는 식민지인이나 전쟁포로뿐만 아니라 자국 내의 정치범들도 잡아다가 실험체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 2차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국민들은 매우 잘 살았으며 대우도 아주 좋았다.
    • 대표적인 추축국 국가인 독일-이탈리아-일본은 하나같이 파시즘, 군국주의 국가여서 국민들이 죄다 군대로 끌려갔다. 독일이나 일본을 예로 들면, 40년대에는 남자란 남자는 모두 군대로 끌려가고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고, 군대로 끌려가는 게 아니면 군수공장에서 착취 수준의 노동을 해야 했다. 일본이 조선인을 징용하고, 노동력으로 끌고가고, 금품이나 금속 등을 뺏어간 건 이미 자국에서 일본인들에게 털어먹을 대로 털어먹은 후여서 엄청 쪼들리는 상황이었던 것도 있다[61]. 이 시기엔 분명히 동남아, 태평양, 중국 대륙에서 시작한 전쟁이었는데 연합군 공군이 일본 본토에 심심하면 폭격을 할 정도로 전황이 최악이었다. 이런 오해가 나오는 것도 사실 틀린 건 아닌게, 독일이나 일본 등은 자신들이 지배/점거한 국가에서 현지 국민들을 혹독하게 다루고 차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들이 들고 나온 논리 자체가 민족주의, 우월주의이기도 했고. 즉, 2차대전 시기 독일인, 이탈리아인, 일본인들의 삶은 시궁창 수준[62]이긴 했지만, 그들이 침략하여 지배한 국가의 국민들에 비하면 나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았던 건 아니었다. 다만, 이는 잘 살았다는 기준이나 시점이 문제다. 따지고보면 그 미국도 2차대전 당시에는 물자를 통제했다.[63] 영국도 유보트 때문에 스팸으로만 연명하다시피했다. 유럽 대륙은 부유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나치에 점령당해서 착취당했고. 이런 식으로 따지면 미국 빼고 잘 살았다는 지역은 스위스, 스웨덴과 같이 중립을 선포한 일부 북유럽, 독일권 소국들만 해당된다. 대략 1인당 GDP 순서대로 놓고 본다면 1990년대 실질 기준으로 WW2 전후동안 대체로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소련>중국이다. 물론 적국이 해당국을 완전히 항복시켰거나 아니면 주요 산업시설을 마비시킨 경우는 때에 따라 경제적 여건이 특별히 안 좋았던 적도 있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중국과 티베트면 모를까일본제국식민지조선의 관계와 같고 하마스파타는 조선독립운동가와 같다.
    • 어디까지나 강자와 강자에게 시달리는 약자의 관계라는 점만 비슷해 보일 뿐, 틀렸다.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셀수없이 많은데 이게 모두 양상이 같을까? 소위 기레기들과 친팔레스타인 성향을 지닌 참여연대의 친팔레스타인성 보도가 와전되어 일제강점기처럼 보인것의 영향이 크다. 실상은 전혀 다르다. 일제강점기의 경우, 뚜렷한 민족성을 갖고 있던 민족수천년간의 주권을 갖고 있던 국가를 강제로 침탈한 명백한 침략행위인 반면, 이스라엘은 주권도 민족도 없었던 땅벨푸어 선언맥마흔 라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던 거주민들과 유대인들이 나눠가진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남북한 건국과정과 비슷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지역에 유대인들의 국가를 세운것에대해 아니꼬왔던 아랍이 제1차 중동전쟁을 일으킨것에 가깝다.[64] 오히려 친이스라엘 성격이 있었던 옛날에는 오히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지역국가들을 일본 또는 일제로 비유하고, 이스라엘이 한국과 공통점이 많다고 언급한 적도 많기도 했었다.
    • 거기에다 파타면 그나마 독립운동가와의 성향이 비슷할 지라도 하마스는 전혀 다르다.[65] 마치, ISIS이슬람 제국의 독립운동가라고 지칭하는것과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스라엘의 민간인 학살이나 폭격의 원인은 99% 하마스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마스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였으며 그들의 이슬람 극단주의성향을 그대로 계승했다. 하마스는 구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자신들의 국제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 일부러 희생을 방치하거나 대놓고 총알받이로 삼기도 했다. 오히려 이들이 1억 총옥쇄를 주장했던 일본 제국 군부와 비슷하다. 물론 하마스라고 모두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겠지만(그래도 극소수이다) 이는 많지도 않으며, 어느 단체든 뜻있거나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만약 하마스가 옛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처럼 되려면 소수인 양심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아서 하마스의 성향을 개혁하거나 하마스가 해산될 수 밖에 없는게 더 답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리고 굳이 옛 한국으로 비유한다면 하마스를 비롯한 정치적 극단주의 단체들이 아닌 안티파다를 했었던 팔레스타인인들 또는 테러를 하지 않은 몇몇 팔레스타인 독립주의자들이 조금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아르헨티나후안 페론이 너무 서민 위주의 포퓰리즘 정책을 해서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 이건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에서조차 박사모밖에 맹신하지 않는 논리이며 후안 페론은 되려 빈민율을 4%까지 줄여놓았다. 박사모가 후안 페론 때문에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망했다고 주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후안 페론박정희의 안티테제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은 후안 페론이 아니라 호르헤 비델라와 그 떨거지인 레오폴도 갈티에리이다. 호르헤 비델라는 자국의 기업들을 미국 등 외국에게 팔아치워버려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그렇게 얻은 돈으로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를 개최해서 온갖 방법으로 부정행위를 저질러 결국 억지로 우승시키는 데에 탕진했다. 참고로 똑같은 아르헨티나가 후안 페론이 집권할 때는 빈민율이 4%였던 것이 호르헤 비델라 치세기간에는 38%로 폭등했고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하던 시점에는 전 국민 중 절반이 빈민인 어처구니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후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되도 않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아르헨티나라는 나라 자체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무엇보다도 후안 페론 이전에도 아르헨티나는 많이 망가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후안 페론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망했다 쳐도 그것은 후안 페론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아르헨티나는 병들어 골골거리고 있었으니까

  • 아랍의 봄은 완전한 민주화 운동을 원했던 혁명이었다.
    • 2010년, 2011년 초기 정도만 한정. 튀니지, 이집트, 예멘, 바레인 정도만 민주화운동을 원했고, 리비아는 지역감정으로 인한 부족 갈등으로 변한 내전도 있었다. 그리고 예멘과 바레인도 부족, 종파로 인한 분쟁들이 나타나기도 했고, 이는 바레인에서는 민주화운동의 실패로 이어지거나 예멘에서는 내전으로 변하게 되었다. 시리아도 처음에는 민주화운동이었지만 후반에는 내전으로 변질되었으며 시리아 반군들도 초기와는 다르게 극단적으로 변하여 국제적으로 시리아의 아사드 독재정권과 더불어 비난받는 상황이다. 아랍의 봄 이전의 이라크, 레바논도 자주색 혁명(2005년 이라크), 삼나무 혁명(2005년 레바논)이 있었지만 이 때만 한정하여 민주주의가 나타났을 뿐, 또다른 독재로 이어졌다. 이라크의 경우는 미국, 영국 덕분에 민주주의가 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당연히 영국과 미국은 2003년 이라크 전쟁에 한정하면 침략자에 불과했다. 물론 이라크도 잘한 건 없지만) 오히려 이라크 국민들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라크는 이후로 반미/반서방 및 미군철수를 주장하며 이라크 점령 하의 미군에게 저항했던 반군[66]과 투표로 정치인이 되었지만 동시에 독재자로 변한 정부군(주로 사담 후세인 시기에 차별을 받았던 시아파, 그리고 친미&친서방 세력)과의 분쟁이 이어졌고, 미군 철수 이후에도 또다시 독재, 부정부패 등을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있었지만 다에시가 나타나면서 한동안 상황이 심각했었다. 레바논 역시 이라크와 비슷한 상황으로 이어졌으며, 심지어 남쪽 국경으로는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게 된다. 2015년에도 반정부 시위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다시 조용해진 상황. 이들 국가는 독재자가 유지되거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처럼 성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재 시절이 그리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67]


4. 한국사[편집]



4.1. 전근대[편집]


  • 우리 민족은 타 민족을 침략한 적이 없으며, 수천 년간 침략만 당해온 평화적 민족이다.
    • 많이들 믿고 있는 편견. 아마 한민족의 역사에서는 타민족 국가를 직접적으로 멸망시킨 적이 없어 보이는 점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일 것이다. 물론 현존하는 민족의 나라가 아닌 이미 멸망해 없어진 민족들은 수도 없이 한국계 에게 정복당하고 동화되어 사라졌다.
      • 사실 실제 한국의 역사를 보면 우리가 두들겨 맞은 적도 많지만 먼저 공격을 가하거나 신나게 두들겨 팬 경우도 있다. 고대에는 고구려한반도 북부의 한나라 군현낙랑군 등을 축출해버리고,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등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했다. 고수전쟁도 고구려가 선빵날리기도 했다. 통일신라때는 왜구가 아닌 신라구가 들끓어서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주기도 했다. 고려 또한 17만에 달하는 병력을 새로 편성해가면서까지 여진족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시도하여 동북9성을 구축한 전적이 있으며,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여진족이 약탈 등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을 명분으로 여진족을 응징한 적이 있으며[68], 청나라와 영토 분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의외로 한국의 왕조들은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깡패 국가로 존재해왔다. 어째 폴란드랑 비슷하다[69][70]
    • 이와 같은 "외침의 역사" 이야기를 부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심지어 마크 피터슨 한국학 교수는 "한국의 역사는 유례 없이 평화로운 역사" 라면서, "한국 역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침략' 은 원나라의 침입과 임진왜란단 두 번뿐" 이며, 정묘호란병자호란의 경우에도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우방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당 인터뷰

  • 내분만 없었으면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았다. 내분만 없으면 무적이다.
    • 이게 좀 어이없는 말인데 세계사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한반도의 나라들보다 더 심한 내분이 벌어졌던 나라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분이 말다툼 수준을 넘어 대규모 군사 반란까지 일어나 멸망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나라들도 상당히 많았다.[71] 중국, 일본 같은 옆나라들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중국은 심심하면 일어나는 것이 반란이었고 일본은 명목상의 최고 권력자만 바뀌지 않았을 뿐이지 실권자들끼리는 피터지게 싸웠다[72]. 아예 사람들이 벌이는 내분을 넘어 엄청난 자연재해까지 덮쳐 허구한 날 난리나던 나라들도 있었다.
    •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시대가 엄청나게 이례적인 시대 취급을 받을 정도로 역사의 시종일관이 싸움박질의 연속이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너무 싸움에 미친 나라라서 그걸 주체하지 못해서 일으킨 게 임진왜란이라고 하기도 한다.

  •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속국을 자처한 한국의 역사는 굴욕적이다.
    • 일본같은 섬나라라면 모를까, 삼국시대 고구려[73]·백제·신라부터 고려·조선같이 중원에 가까운 나라로서의 중국과 이런 관계를 가진 건 지극히 당연했다. 생존을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한건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게다가 중국 왕조도 북방 유목민족에게 조공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74]. 뿐만 아니라 이 외에도 실익성이 있기도 하였고. 조공사대주의 항목을 참고. 또한 여송관계에 있어서도 고려국왕이 송사를 맞이하면서 공복을 입고 숙배례를 행하고 무도를 하는 것은 물론, 궁궐전각 명칭의 경우 선(宣)자가 들어가는 것이 참람되다며 바꾸거나 왕의 명령을 조칙에서 교로 바꾸는 등의 의례적 제스쳐를 취하는데- 이는 대외외교에 있어서 고려가 제후의 의례를 취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우리 민족은 동이족(東夷族)이다.
    • 동이족은 단순히 ‘중국’에서 보기에 동쪽에 존재했던 민족들의 집합에 불과하며, ‘한민족’은 거기에 속했던 것뿐이기에 우리 민족 = 동이족 식의 사고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75] 그나마 동이족이란 단어는 본래 은주 시대에는 산둥 지방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후대에는 계속적으로 변화한다. 동이 문서 참고.
    • 심지어 이 동이족이란 호칭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이 동이라는 호칭은 오늘날로 치면 가오리방쯔급의 비하명칭이다.

  • 우리 민족은 반만년 역사를 갖고 있다.
    • 이 주장은 환빠들의 헛소리, 사실상 세계에서 반만년 역사는 이라크이집트밖에 없다. 신화상 연대단군기원의 원년인 기원전2333년[76]으로 따져도 5000년보다 4000년에 가까우며 2167년 이후에는 이 문구 수정바람 실제 고조선이 역사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높이 쳐서 기원전 7 ~ 8세기부터[77]이니 5000년의 3분의 2밖에 안 된다. 청동기시대를 기준으로 삼아도 무리수이기는 마찬가지. 덧띠무늬새김토기 등의 발굴 이후로 기원전 20~15세기를 청동기에 편입하려는 학자들도 있지만 토기가 바뀌었다고 청동기가 열리는 게 아니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현재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청동기가 발굴되는 것은 실제 ‘청동기 시대’로 불리는 시대 중에서도 후반부이며 이 때문에 ‘한국사에서 청동기시대를 굳이 산정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식민사관의 청동기 부재론과는 다른 문제이다. 가뜩이나 세계사에서 청동기시대의 비중이 줄어가는 추세라…… 하다못해 베트남도 기원전 2919년이 기원이라고 한다.

  • 개마무사는 허구이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 과장되게 그려진 산물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말이 갑옷 무게를 버티지 못한다.
    • 북한 지역은 아니지만 1992년 6월6일 경남 함안군 가야읍 해동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실제로 마갑이 출토된 바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처럼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을지는 미지수.

  • 서동요의 내용은 사실이다.
    •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금제사리기(金製舍利器)와 함께 발견된 금판에는 서동요 내용과 상반되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때문에 현재 논란중인 상황. 부인이 여러명 있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고, 완전히 설화라는 주장도 있다.

  • 일본 왕실과 가장 먼저 연이 맺어진 것은 백제 왕실.
    • 실제로는 신라 내물 마립간의 아들 미사흔이 가장 먼저 일본 왕실과 연이 맺어졌다.[78]
    • 다만 일본서기의 기록을 삼국사기와 조합해보면, 외교적으로는 근초고왕 때 백제가 먼저 접촉했다.[79] 왕실은 아니고.

  • 의자왕의 삼천궁녀 설화는 의자왕을 깎아내릴 목적으로 일본에서 지어낸 것이다.
    • 국내에 생각보다 정말 많이 퍼져있는 편견. 헌데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딱 봐도 말이 안된다는걸 알 것이다. 애초에 백제와 가장 친한 국가가 일본이였으니 말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지어냈다고 하면 말이 안되는건 아니다. 간혹 일본이 아니라 신라에서 지어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은 아무도 지어낸적 없다.(…). 조선 시대 문인들이 의자왕 관련 소설을 집필할때 사용한 표현을 현대의 우리나라가 잘못 해석하여 생겨난 오해다. 자세한 것은 의자왕 문서 참조.

  •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인 민족반역자다.
    • 현대의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보니 생기는 오류. 사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어느정도 동질성이 있긴 했지만 같은 민족이나 운명공동체로서의 의식은 대단히 희박했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민족공동체 의식이 있었다면, 이 세 나라와 "고대 일본" 도 거의 민족공동체 의식을 공유했다고 봐야 한다.사실 최근에는 어느정도 민족 공유의식이 있었다고본다. 삼한일통이라는 단어 같은 걸 봐도, 그렇다고해서 무너뜨리지 말아야할 대상은 아니었다. 김춘추가 당나라와 연합한 이유는 단순이 신라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 아무리 일찍이라도 몽골 침략기 늦으면 근대 이후에나 정착된 민족이란 개념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무시한 채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분명한 논리적 오류다. 이런 논리로라면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존속한 남한은 민족 반역자들의 국가라는 소리가 된다. 물론 중공과 소련을 끌어들여 남한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김일성도 민족 반역자가 된다.사실 김일성보고 민족반역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긴하다.
    • 좀더 간단한 예로, 우리나라가 미국과 힘을 합쳐 북한을 멸망시켰을 때 후대의 역사가들이 우리를 외세를 끌여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시킨 민족반역자로 그린다면 대충 우리 기분이 어떨까? 북한은 개막장 국가라 경우가 다르다고? 수백년간 치고받고 싸운 나라끼리의 이미지가 과연 북한보다 못했으면 못했지 나을까?

  • 삼국사기는 사대적이고, 삼국유사는 자주적이다.
    • 애초에 삼국사기는 설화집이 아니고 삼국유사는 정사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무리지만, 삼국사기 자체로도 사대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고려사가 고려의 왕들을 세가에 기술한 데 반해 삼국사기는 삼국의 왕들을 본기에 기술에 놓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80] 다만 김부식의 혈통 때문인지 신라를 띄웠다는 소리는 듣는다. 김부식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반대하고, 금나라에 사대주의적이라는 이미지가 박힌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도 자주적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내용이 자주 나온다. 승려였던 일연은 대놓고 연개소문을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 멸망을 위해 환생한 존재라며 디스하기까지 한다. 두 역사서 모두 고구려나 발해 등의 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할 수 없었던 탓도 있긴 하지만…… 사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최대한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작성했다.[81]

  • 발해의 소수 지배층은 고구려계, 대다수 피지배층은 말갈계였다. (그러므로 발해는 고구려 계승 국가다 / 말갈계 국가다)
    • 일본 사서 《유취국사》의 기술을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해당 사서의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운운은 전후 맥락을 보아 촌락 지역의 상황을 나타낸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발해 전 영역의 보편적인 현실이라고 볼 만한 근거도 없다. 이를 제외할 시 발해 국가 체제에서 각 민족/종족의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 명시한 사료는 전무하다. 옛 고구려 땅인 북한 및 중국의 랴오둥 반도 지역에는 고구려계가 다수였을 것으로, 그밖의 지역에는 말갈계가 다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막연한 추정일 뿐이다. 또 발해 지배층=고구려계라는 단순 도식과는 상반되게 창업주인 대조영부터 말갈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일본과 공무역에 '말갈 수령들'이 참여한 기록도 존재한다.
    • 애초에 고구려인과 말갈이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인지부터가 의문이다. 고구려 유민과 더불어 발해의 건국을 주도한 세력인 속말말갈부여, 옥저, 동예, 옛 한사군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존속 당시 그 나라의 동원 체제에 속해 있던 집단이었다. 발해의 족원 내지 민족 구성을 언급한 대부분의 문헌 사료는 고구려적 기원과 말갈적 기원에 관한 내용을 섞어서 적어 놓았을 뿐, 양자를 대립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발해 국민의 이원적 구성을 암시하는 사료는 《유취국사》가 유일한데 그나마도 다수 말갈을 지배하는 세력을 토인(土人)이라 칭했지 고구려인이라 칭하지는 않았다. 쑨진지(孫進己)와 같은 학자는 발해의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후기에는 '발해인'으로 통합이 되었다고 보았다. 고려의 원형을 패서호족(浿西豪族) 등 고구려계가 중심이 된 태봉으로 보는 동시에 고려를 실질적으로 통일신라를 계승한 왕조로 파악하는 것이 하등 모순이 될 것이 없는 것처럼, '속말말갈이 주도하는 고구려 계승 국가', '말갈 7부가 고구려 유민 세력 중심으로 통합된 국가'의 개념도 얼마든지 유효할 수 있다.
    • 동양사학자 김한규는 자신의 저서 《요동사》에서 전통적으로 한국의 고대사 영역으로 간주된 동시에 동북공정에 의해 중국사에 편입되기도 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의 예맥계 국가들을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요동 역사공동체'라는 독자적인 영역에 속한 것으로 파악했는데, 특히 발해에 대해서는 전신인 고구려보다 '요동 국가'의 성격이 더 강한, 다시 말해서 한·중 역사와 더 확연히 구분되는 국가로 설명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발해 왕실이 고려별종이었니 속말말갈이었니 하는 문제는 그저 '요동 국가'의 주도권을 누가 쥐었는가의 문제에 불과해지며, 한국 또는 중국에 대한 역사적 귀속성을 논하는 데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이라서 흰 옷을 입었던 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에서 흰 옷을 입었다.
    • 고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흰 옷 좋아했다는 기록이 멀쩡히 남아 있고, 정부에서는 ‘동방이니 청색 입어야 안 되냐’고 하면서 청색을 입히려고 자주 시도했지만 실패.[82]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의금지령까지 내린 기록이 나온다. 그 당시 섬유 제조 기술 및 양, 세탁 기술을 감안해서 때 타기 쉬운 흰 옷이 얼마나 번거로웠을지 생각해 보자. 게다가 백색 안료는 원래 귀한 탓에 염색 비용도 비쌌다. 이런 옷을 좋아한 게 아니면 왜 굳이 입었을까? 애당초 삼베, 모시를 뽑으면 상아색 가까운 색이 나오지 순백색이 나오지 않는다. 누가 염색 기술이 없어서 흰 옷을 입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삼베,모시나 이후 면화 등 천연섬유의 색상은 원래 백색이 아니다. 베이지색 정도가 원래 색이다. 즉 백색 직물은 '염색'한 것이라는 것. 이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흰색 셔츠 등은 표백제 등을 이용해서 표백한 것이며 형광 물질이 없을 수 없다.
    • 上曰:“玉色, 國初所尙, 然高麗人好着白衣之言, 見於中國史傳。……”(임금이 말하기를, “옥색은 국초(國初)에 숭상하던 것이나, 그러나 고려(高麗) 사람이 흰옷을 입기 좋아한다는 말이 중국의 사전(史傳)에 보이고……”) - 세종실록 91권
    • 令朝官士人, 着黑色衣, 禁白色衣。 東方之人, 自古尙白, 國典雖有白色之禁, 而因仍成習, 莫之變, 上思以易之, 遂定是制。(조정의 관리와 사인(士人)으로 하여금 검은 옷을 입게 하고 흰 옷을 입지 못하게 금하였다. 동방 사람은 예로부터 흰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국법에 흰색을 금하는 법이 있기는 하나 그대로 습속이 이루어져서 바꾸지 못하였는데, 상이 바꾸고자 하여 이에 제도를 정한 것이다.) - 현종실록 19권

  • 성리학자들이 세운 조선사대주의에 찌들어 옛 한민족의 자주적인 기풍을 말살한 수구 꼴통, 유교 탈레반 국가이다. 적어도 초기부터 그랬을 것이다.
    • 조선 개국으로부터 600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개국 초기의 유학자들이 매우 수구적이고 뜬구름만 잡는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반도의 성리학자들이 등장한 고려 말에는 기존 고려의 지배층이나 거기에 빌붙어 살던 구 유학 세력, 불교 세력보다 훨씬 개혁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세력으로, 여말에 가장 성공적인 개혁을 완수한 것도, 종국엔 500년 간 존속하던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것도 이들이였다. 당시는 중국이 동아시아의 패자로 자타공인되고, 그 문화는 동아시아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시기였다,
    • 조선은 태생부터 성리학 국가였던 탓에 성리학에 반하는 사상을 억제하고, 이 과정에서 몇몇 큰 사건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큰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단순히 사상의 충돌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 겹쳐 있는 것도 볼 수 있는데, 숭유억불의 경우 고려 말기 사찰의 타락이 영향을 미쳤고[83], 가장 큰 가톨릭 박해였던 병인박해의 경우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상황과 큰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덤으로 여기서 불교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의 활약으로 인식이 나아져[84] 조선 후기 사찰 건립에 관과 지방 사족들의 협조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라에서도 중들을 부려먹었고 불교 탄압 정책도 태조때 도첩제를 시행해 그나마 중이 될 길을 열어주긴 했고 이것을 폐지한것도 100년 후 얘기다. 그리 심각하기만 한 수준은 아니라는 얘기.
    • 그 '성리학자들'이 세운 조선 왕조의 초기에는 주원장의 땡깡에 대노한 정도전이성계에게 명나라를 공격하자며 길길이 날뛴 바 있었고, 그 '사대주의자의 나라'에서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해서 한반도로 넘어온 한족들에게 강제로 조선식 상투를 틀게 하고 한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해버렸으며, 중종 때는 그 '유교 탈레반'인 조광조 일당을 철저하게 개발살내버린 일도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나온 소중화라는 말도 '명나라가 망했으니 이제 동북아시아의 적통은 우리가 책임진다!'는 식의 자부심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생각보다 조선은 꽤나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도 강했었던 나라다. 물론 진짜로 조선이 수구꼴통이 된 건, 사림 집권 쯤의 이야기다.

  • 우리나라가 일본에 뒤쳐진 것은 조선의 책임이다.
    • 일본의 혼슈지방만 해도 단순한 면적 뿐만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연속적인 평지, 습지 면적 또한 한반도와 비교해 넓고, 기후대 또한 농사에 더욱 유리하다. 이런 요인들이 점점 누적되면서 근세에 결국 일본 열도의 경제력이 한반도를 추월한 것이지 조선 위정자들의 실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인구 면에서도 조선의 인구 증가률은 일본보다도 낮았다.[85]
    • 에도 시대 이전에는 일본에선 통일된 정권이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오래 간 정권이 없었기에 섬 안에서 싸우기 바빠 생산성이 충분히 발휘 되지 못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고 260년 동안 평화가 지 되어 인구가 크게 늘고 한반도보다 넓은 땅과 좋은 기후의 진가가 발휘 되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일본 열도의 경제 생산력 자체는 이미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한반도를 넘어섰다는 연구도 적잖게 등장하고 있다. 다만 이를 하나의 국가로 묶을 구심점이 없었을 뿐.

  • 언문(諺文)은 양반층이 훈민정음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 그저 한문을 그 이상으로 중히 여겼을 뿐 언문이란 말 자체에 비하 의도가 포함되었다고 여기긴 힘들다. 세종부터 훈민정음을 언문으로 지칭했으며 양반층이 훈민정음을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참고로 중국어 위키백과에서의 '한글' 문서 공식 항목명이 언문이다. 바로가기

  • 조선시대 양반들은 주로 기와집에서만 살았다.
    • 의외로 청백리(淸白吏)나 빈자를 자임하거나 원래 가난했거나 몰락한 양반들은 초가집에서 살았던 경우도 있다.

  • 조선시대 양반은 죽을 때까지 양반 계급일 것이다.
    • 조선시대는 이론적으로는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등한 양천제였다. 애당초 양반이란 말 자체도 원래는 과거에 합격해서 문반이나 무반이 된 관리들에게 붙은 칭호였다. 즉, 근원적인 의미는 문무양반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평민도 과거에 급제를 해서 관직에 오르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대역죄 등으로 몰락한 경우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후손도 천민 계급으로 격하되는 건 물론이고,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사람이 없거나, 돈 없으면 평민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았다. 박지원양반전을 보자. 괜히 족보를 샀을까?[86]
    • 양반 가문에서 3대째까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단 1명도 없으면 양반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래서 양반들이 과거에 목숨을 건 것이다. 초시라도 붙어야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87]

  • 조선시대 양반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 냈다. 학생들과 관료들은 군역이 면제되었다는 사실이 와전된 사례. 흥선대원군의 개혁책 중 하나인 호포제 또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징수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 양반들의 경우는 저 법률을 악용해서 세금을 안내려고 하기는 했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긴 했다. 단적인 예가 서원향교에 학생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원래 과거 응시생 보호책이지만, 나이 80에도 과거 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죽을 때까지 향교와 서원의 학생으로 지내곤 했다. 제사를 지낼 때, 위패 대신에 쓰는 지방을 보면 '벼슬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는 '현고 학생부군 신위 顯考 學生父君 神位'라고 적히는데[88], 저기서 학생이 바로 향교의 학생이라는 의미다. 때문에 만일 벼슬을 했다면 관직명이 적힌다. 만일 영의정을 지냈다면 현고영의정부군신위가 된다. 현대에는 공무원에 해당하는 직책을 역임한 경우에는 그 직책명이 적힌다. 예를 들면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면 현고서울대학교교수부군신위가 되고, 공무원이면 '사무관', '서기관', '주사보'처럼 직급명으로 적는다.

  • 조선시대 평민이나 천민들은 모두 문맹자(文盲者)들이다.
    • 조선 시대의 평민들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었다. 한 프랑스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웬만한 평민들의 집에는 책이 있어 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물론 양반들만큼 숙달된 한문사용자들은 아니고, 천자문이나 소학 정도 수준을 읽는데 그쳤을 것이다.[89] 다시 한번 세종대왕님께 고마움을 느끼도록 하자
    • 문맹은 커녕 학식이 매우 뛰어난 노비도 존재했다. 이런 노비가 어떤 용도로 활용되었냐 하면 과거 시험 대리 응시에 활용되었다. 자기가 시험치고 급제한 뒤 관직은 주인님이 오르는 방식이었다. 물론 걸리면 구족을 멸했다.

  • 조선시대 암행어사들은 한번 출도하면 대규모 병력이 들이닥치며 "암행어사 출도요!" 를 요란하게 외쳤다.
    • 사실 이런 사례는 오히려 적었고, 대부분의 경우 간단히 신분을 증명한 후 즉시로 동헌의 자료를 전부 받아서 감사를 수행하곤 했다. 또한 부랑하는 민간인을 만나면 즉시로 신분증을 까고 임금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역할도 맡았다. 정말 악질 탐관오리이거나 지방 관리가 암행어사를 상대로 농성 등 전투태세에 돌입한 것이 아니라면 그처럼 요란스럽게 들이닥치는 사례는 적었다.문화재청 참고자료
    • 조선시대의 암행어사의 역할을 현대에 대응시켜보면, 비밀리에 감시하는 국정원 요원의 역할이 아니라, 대놓고 활동하되 불시에 감사를 나가는 경우가 많은 감사원 직원이나, 특검 수사팀의 팀원에 더 가깝다.

  • 훈민정음세종대왕집현전 학자들과 힘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 세종대왕 거의 혼자서 만들었다. 집현전은 훈민정음 반포 후 해례본을 만들었을 뿐이다.

  • 붕당은 단순한 파벌싸움이다.
    • 정치싸움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붕당 문서 참조.

  •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게 조총은 본 적도 없는 신무기였다.
    • 16세기 중반부터 조총으로 추정되는 총포를 접한 기록이 나온다. 물론, 반짝 관심 정도로 지나갔기에 임진왜란 초기에 그렇게 고생한 것은 맞다. 만주의 여진족들도 자주 사용해서 신립 장군은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신립탄금대 전투에서의 패배는 여러 삽질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과부적의 영향이 크다. 아니, 그러기보다도 임진왜란 직전 서애 류성룡과 신립의 회견에서 류성룡은 ‘우리도 조총을 쓰자’고 말하지만 신립은 ‘그거 쏘면 맞는다요?’라면서 조총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무엇보다도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사신으로 오면서 선물을 줬는데 그중에 조총이 있었다.[90]

  • 사실, 조선조총을 쓰지 않은 이유는 조총보다 더 화력이 강한 승자총통이 있었기 때문이였다.[91] 다만, 단발 화력은 강해도 실용성에서 현저히 뒤쳐져 나중에는 조선도 조총으로 전부 갈아탔다. 조총이 성능은 구려도 대량 생산에 용이하고, 사용법을 익히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철기 시대 초기의 인류가 청동기보다 나을 것이 없던 초창기의 철기를 굳이 택한 것은 그저 청동기보다 철기가 대량으로 생산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인 걸 보자.[92][93]

  • 임란 개전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조총에 의해 무너졌다.
    • 엄연히 말하자면 틀린 말이다. 임란 당시 쳐들어온 15만의 왜군 중 조총 부대의 비율은 16%에 불과했다. 심지어 명나라에서 온 4만의 원병 중 왜군보다도 더 많은 비율의 명군이 조총을 사용했다.
    • 개전 초기에 조선군이 연패를 거듭하던 이유는 복합적인데 일단 일본군이 전국시대가 끝난 직후라 조선군에 비해 전투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거기에 사이가 나쁜 고니시와 가토를 선봉으로 삼아 전격전을 유도했고, 징집병이 모이면 파견된 지휘관이 지휘를 하던 조선에서는 지휘관이 도착하기 전에 오합지졸인 징집병이 먼저 격파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여기에 전쟁 위협은 감지했지만 규모를 오판한 조정과 일부 자기 살 궁리만 하거나 전투 수행능력이 일본군 지휘관들만 못했던 지휘관들도 원인 중 하나다.

  • 행주치마라는 말은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의 일에서 유래한 것이다.
    • 최초의 기록은 1517년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로, 행주 대첩이 있기 76년 전 이야기다. 사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행주대첩 당시에는 민간인의 참여가 전혀 없었고, 오직 군인들끼리만 전쟁에 임했다고 한다[94].

  • 조총을 최초로 개량하여 전술에 응용한 인물은 이순신이다.
    • 항왜 김충선의 건의로 조총이 전투에 활용되었다. 이후 개조와 생산을 거쳐 제식 무기로 투입된다.

  • 북인들은 중립 외교 정책에 찬성했다.
    • 북인들은 중립 외교 정책에 반대했다. 대북의 수장 이이첨은 아예 후금 사신의 목을 치자는 주장까지 했다.[95] 오히려 서인쪽이 젊은층을 제외하면 광해군에 가까웠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이이첨은 대북의 인물이다. 전 항목에선 유희분이 대북이라 적어놨는데 유희분은 소북의 수장이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본사 여러 신하들의 헌의를 보니, 상경(常經)을 지키고 권도를 행하는 것과 붙들어 두고 단절하지 않는다는 뜻에 있어서는 대체로 동일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의 헌의는 ‘명나라에 품윤을 하지 않고 대국의 원수와 사사로이 서로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고 하였고, 유희분(柳希奮)의 헌의 또한 ‘너희들이 만약 지난 일을 깊이 사과하고 명나라로 귀순한다면 양국의 옛 호의를 서로 길이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변방 장수에게 글을 만들게 하소서.’하였습니다. 이 두 신하의 헌의가 서로 다른데 저희로서는 감히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몰라 주상의 재가를 여쭙니다.” - 광해군일기 139권

  • 홍길동, 임꺽정은 의적이다.
    • 홍길동은 연산군 때 존재하기는 했으나 그를 의적으로 볼 어떤 근거도 없으며 오히려 절대 의적이 아니다. 하지만 홍길동이 도적질을 하던 시기의 임금이 하필이면 그 연산군이라서 폭군 시대에 활약한 의적이라 하여 오히려 홍길동전에서 버프를 받게 되었고 그런 홍길동전의 영향으로 현재와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임꺽정 또한 홍명희의 소설에서 의적으로 각색되지만, 기록상으로 보이는 행동은 방해가 되면 민간인도 쉽게 쳐죽이거나 권력자에 간접적으로 빌붙는 모습을 보인다.[96] 다만 임꺽정이 홍길동과는 달리 백성들을 생각하는 면모를 약간 보인 것은 사실. 홍길동은 자신을 숨겨준 백성조차 기밀 유지라는 이유로 얼굴가죽을 벗겨 죽였고 당대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욕이 "이 홍길동 같은 놈아!"였다.[97] 임꺽정도 물론 잔인한 짓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 위치를 가르쳐 준 상대로 한거니 홍길동과는 다르다.

  • 조선 500년은 허송세월이였다. -
    • 사림파가 집권하기 이전까지는 동시대 서구국가들과 중국.일본의 눈부신 발전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겠지만, 전근대 한민족 국가 중 몆 안 되는 제대로 된 형태의 나라였을 뿐더러, 내부적으로도 많은 변혁이 있던 시기다.
    • 사실 조광조같은 또라이를 제외하면, 이후의 사림 세력들도 바보가 아닌 지라, 자기들 나름대로 실리 위주의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퇴계 이황이 문중 내에서의 적서 차별을 금지했다는 기록이나, 실학자들의 학문적 기반이 여전히 성리학이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98].

  •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 이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은 일부일처제 국가였으며, 다만 일부일처제와 처첩제가 공존한 것일 뿐이다. 즉, 양반들은 다른 양반 집의 자녀들과 자신의 자녀들을 정식으로 혼인 시켰으며, 이후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보인다면 그녀를 첩으로 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지나친 문자적인 해석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부다처제'의 사전적 정의는 "한 남편이 동시에 여러 아내를 두는 혼인 제도"이므로 여기서의 '처'는 신분으로서 ''과 구별되는 정실이 아닌, 단순한 여성 배우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즉 처첩제는 일부다처제 중에서 여러 아내들의 권리와 지위가 다른 하위 종류일 뿐이며 엄연한 일부다처제의 일종이다. 심지어 처첩제의 경우에도 공식적으로는 제약이 있어서 선비는 일처일첩 경과 대부는 일처이첩까지만 허용되었다.

  • 천방지축마골피는 조선시대 천민들의 성씨다.
    • 그렇지 않다. 천민들에게는 애초에 성씨가 없었으며,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도리어 중인 명문가들의 성씨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골씨와 축씨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성씨다.#[99]
    • 이순신 장군의 장인은 방씨였고, 태조 이성계의 사돈은 지씨, 인조의 사돈도 지씨였다. 조선시대 이조참판 중에는 방씨가 있었으며, 영의정 중에는 마씨가 있었고, 병조판서 중에는 피씨가 있었다. 자… 누가 천민 성씨라고?

  • 조선이 500년 내내 왜구[100]한테 시달렸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린 적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없었다. 17세기 들어서 왜구 자체가 사라졌다.
    •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도 세종 때 일어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왜구의 침입이 비교적 전대에 비해 크게 줄었다.
    • 또한 이 주장대로라면 왜구가 19세기말까지 존재했겠지만 왜구 자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해적금지령 등으로 인해 적어도 17세기 초 이후에는 확실히 사라졌다.
    • 물론 초기에 임진왜란 이전에는 조선이 왜구한테 시달린 적이 간간히 있었다. 하지만 500년 내내는 절대로 아니며 이유는 상술했다.


4.2. 근대[편집]


  •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흥선대원군에 의해 옥사했고 지도 목판은 모두 소각됐다.
    •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당대 기록도 없을 뿐더러, 김정호의 지도 제작에 큰 도움을 준 신헌과 같은 조정 관료들이 이 때문에 처벌당했다는 증거도 없다.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기록은 일제강점기부터 나오기 시작하며 대동여지도 목판은 대량으로 발견됐다. 이 떡밥은 최남선의 글에서나 시작된다. 그리고 일제가 그걸 교과서에 실어서 ‘대원군이라는 양반이 워낙 꽉 막힌 양반이서리……’운운하며 날조했다. 대부분 위인전에서 이를 다시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도 문제.


  •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은 굳건한 수비력으로 미군을 격퇴했다.
    • 무너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히. 다만 흥선대원군의 완강한 태도와 미국 국내의 사정 등으로 인해 미군은 퇴각해야 했다. 병인양요도 다르진 않았지만 신미양요가 좀더 심했다. 이건 그냥 미국이 실용성이 없다 판단하고 철수한 것이지 물리친게 아니다. 프랑스와 영국 경우에도 거문도를 점령하거나 철수하는 등 자잘한 전투를 벌이면서 조선에서 실익이 없다 판단하고 철수한 것이다.

  • 갑오개혁와 동시에 신분의식도 완벽히 철폐되었다.
    • 신분의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한국전쟁과 산업화 때였으며,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백정들이 형평운동을 벌였던 것을 상기해 보자.

  • 고종명성황후 민씨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자주성을 위해 노력했다.
    • 해당 문서 참조. 확실한 건 2000년대 일반인들의 시각에는 판타지가 많이 덧씌워져 있다는 것이다. 대중 매체가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보여주는 사례.

  • 구한말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과 의사들은 한국을 사랑했으며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다.
    • 위의 고종과 다소 비슷한 사례. 게다가 이쪽은 특히나 개신교계에서 밀고 있는 것이기도 해서…… 사실 호러스 뉴턴 알렌 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이 사람들도 직간접적으로 제국주의적 침탈에 함께한 바가 있다.
    • 흥미롭게도 무슬림의 시각에서 기독교 선교사들을 바라보고 평가한 글이 발견되었다. 이희수 교수가 쓴 책 《이슬람과 한국 문화》 에 한 무슬림이 쓴 조선 여행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1913년 투르키스탄 출신의 압둘라쉬드 이브라힘(Abdul-Rashid Ibrahim)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던 한국을 방문하고 그의 여행기 《이슬람세계》(Alem-i Islam)에 적은 내용에서는 '...기독교의 만연도 국민의식의 마취에 일익을 담당하는것 같다. 사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의 선교를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 무기는 주류인것 같다. 평생 술을 입에 대보지도 않은 사람도 기독교인이 됨과 동시에 적어도 한 차례는 성 예수의 신성한 피가 담긴 포도주라 하여 의무적으로 음주를 하게 되는 것이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의 피니, 성령이 담겨 있는 것이니 하여, 인간의 참다운 이성의 힘과 판단력을 종교의 힘으로 상실시키는 것이다. 기독교 학자들이 한 국가의 도덕관을 자기네들의 종교적 신조에만 의거해서 판단하고, 유도하는 이상, 참다운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종 주류의 범람과 그들의 과도한 음주 기질이 도덕성의 파괴를 촉진시키고 있다...전국 어디를 가도 술병을 손에 든채 취기에 빠져 있는 한국인을 볼 수 있다...어느날 저녁, 한 선교사는 한국인 남녀를 한 장소에 모아 놓고는 우선 술잔부터 돌리면서 선심을 쓴다. 원하는 대로 술을 마시게 한다. 모두가 취기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에는 또다른 한국인들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줄을 선다. 한 잔의 술을 얻어 마시기 위해, 입교한 자는 등록 카드에 기록이 되고 곧 바로 술이 나온다. 이 보다 더 입교에 쉬운 종교가 어디 있으랴...한국인의 경우는...(기독교로의)개종에 비례해서 악행의 만연도 심해지고 있다...'# 라며 선교사들이 성찬식을 핑계로 술을 마셨다고 쓰기도 했다. 구체적인 종파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술을 예수의 피라고 믿으며 의무적으로 마신다는 점에서 정교회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가톨릭성체성사 때 성체(빵)만 받아먹는 경우가 많고[101], 개신교는 술이 예수의 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다만 이브라힘이 기독교 종파의 차이에 대해서 무지하여 개신교의 성찬식을 '아 저놈들 예수의 피라고 믿고 마시는 구만'이라고 오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개신교 자체가 수많은 종파들의 통칭이다. 즉 종파마다 신학적 스팩트럼이 다양하며 한국에는 음주를 허용하는 종파 역시 당연히 있다.
    • 물론 모든 선교사들이 전부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던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 중에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석호필, 한글을 개량하고 헤이그 특사를 준비하는 데 협력했던 호머 헐버트 같은 분들도 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 방곡령을 선포한 조병식은 일제의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인물이었다.
    • 오히려 이런 탐관오리였다. 사실 그의 행적에서 방곡령이 오히려 뜬금없어 보일 정도. 본인이 수탈할 곡식을 일제가 가져가서 그런 게 아니냐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 고종황제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위대하다, 거대하다, 존귀하다" 의 의미로 국호에 대(大)자를 넣었다.
    •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합한 한(韓)이라는 의미를 기려 대한제국이라 한 것이다. 이하의 실록 내용도 참고.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 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 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가 개통된 도시는 다름아닌 서울(1899)이다.
    • 광무개혁 항목 참고. 흔히 도쿄보다 빨랐기에 동아시아 최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교토가 더 빨랐다(1894, 시치조~후시미 노선). 물론 이 시기에는 노면전차 자체가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최첨단의 교통수단이기는 했지만.

  • 이완용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나라를 팔아넘겼다,
    • 사실 이완용은 고종의 충신이나 다름없었고 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는 어떻게든 조선 왕실을 보존하려고 온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도저도 안 되자 결국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기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 사실 고종이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는 것이 원치 않았으면 남한산성에 들어가거나 숭정제처럼 자살해서 이 조약을 막으려 했어야 했는데 고종이 이완용에게 을사조약을 하라고 눈치를 줘서 결국 국권피탈을 당하게 된 것이다,[102] 물론 이완용도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종 역시 경술국치의 원흉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일제 강점기 이후 고종을 비롯한 조선 왕족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에 의해 온갖 특권을 누리며 살았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완용을 두고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하는 건 완전히 틀린 얘기다. 비록 존폐 위기에 몰린 조선 왕실을 지켜내려고 동분서주한 건 사실이나, 그 와중에도 일본 제국통감부 및 그 후신인 조선총독부로부터 갖은 특혜를 받고 치부하면서 그들에게 부역한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이다. 괜히 이놈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명사가 된 게 아니다.

  • 3.1 운동은 종료 시까지 비폭력 무저항 평화 운동으로 일관하였다.
    • 폭력 시위의 양상도 확인되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대규모로 일어난 시위인 데다가, 일본 헌병의 강경 진압도 있었는데 비폭력 일관으로 진행되었다는 말 자체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이 한국 입장에서도 별로 바람직한 역사 인식은 아니다.
    • 시위가 무르익고 각 농촌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시위는 더욱더 과격해졌다. 또한 일제의 학살에 가까운 진압에 의한 반작용 역시 원인이 되었다. 농촌에서는 일본 헌병들이 린치를 당하고, 경찰서, 관공서 등이 불타는 등의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 3.1 운동은 국내의 개신교 지식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 개신교 지식인들은 불교계와 함께 나중에 합류했으며, 최초 주도는 천도교였다. 1918년까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전에는 대종교가 있었다.

  • 3.1 운동 때 구호는 ‘대한 독립 만세’였다.
    • 해당 항목 참고. 오히려 ‘조선 독립 만세’가 더 많이 쓰였다.

  •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탑골공원에서 낭독되었다.
    • 원래는 탑골공원에서 낭독하려 하였으나, 이후 태화관으로 장소가 변경되어 그곳에서 낭독되었다. 그러나 33인 민족대표가 오지 않는다는걸 확인한 후에는 탑골공원에서도 학생 주도로 자체 낭독식을 갖기는 하였다.

  • 민족대표 33인의 32명이 3.1 운동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했다.
    • 해당 문서 참고. 확실히 변절하였다고 확인된 인물은 단 3명에 불과하다[103].

  •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투척했다.
    • 지금까지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공원에서 쇼와 일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장에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KBS2 스펀지(KBS) 197회 방송분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통 폭탄을 던졌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도시락 폭탄은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서 따로 제작한 자폭용 폭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이전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사(爆死) 미수 때도 폭탄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왕이 살아남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기본 폭탄은 물통으로 개조하고 도시락 폭탄은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 자폭을 하도록 따로 제작했으나, 실제 현장에서는 불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제는 우리나라의 민족정기를 풍수지리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백두대간에 박아놓았다.
    • 역시 해당 문서 참고.


  • 일제는 태평양 전쟁 당시 식민지엿던 우리나라를 철저하게 착취했다,
    • 태평양 당시 일본 열도 본토에서도 똑같이 사람 끌려가고 밥그릇을 비롯한 철기들을 집집마다 싹 공출햇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석유까지 바닥나서 일본의 소나부들을 모조리 베어다가 항공유로 썼다, 조선에서 실어다 본토에 나를려고 해도 미 해군에 의해 모두 격침당해서 베어진 나무의 숫자는 일본이 더 많았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에 겨운 국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며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흔들었다.
  •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8월 16일의 얘기다(…). 8월 15일 당일에는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전해 줄 라디오 설비 자체가 열악했기에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지 못했으며[104], 항복 직후 곧바로 그날 중으로 군대가 다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평온했다. 일본군이 빠져나가고 일제 패망의 소식이 전해져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 지나서였다.

  • 북한친일반민족행위자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우리나라 정부 초대내각은 친일파들로 득시글거렸다.
    •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문서 참고.
    •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에는 독립운동가 출신도 바글바글했다. 당장 대통령이었던 이승만부통령이었던 이시영부터가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신성모국민방위군 사건의 병크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렇지(...) 일단 독립운동을 하다 온 사람은 맞았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한남한보다 친일파 청산을 더 안 했다[105].

  • 경상도, 특히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은 원래부터 반공, 우익 성향이 강했다. 그리고 평양을 비롯한 북한 지역은 원래부터 공산주의,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
    • 요즘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1940년대까지만 해도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고,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렸다고 한다. 즉, 평양일제강점기기독교인들이 많았고, 대구일제강점기공산주의사회주의 활동이 왕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별칭들이 붙여졌다. 특히 공산주의자 중에서 꽤 메이저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박상희. 훗날 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박정희의 형으로 사실 대구는 박상희 하나만으로 공산주의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두 도시들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래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자세한 것은 대구 10.1 사건 참고.
    • 영남권에 속하는 부산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야당 지지 성향이 꽤 강했던 곳이었다.[106] 현재는 새누리당 텃밭인 대구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는 야당 후보가 절반 가까이는 당선되었다.

  •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실제로 제헌헌법을 뒤져보면 이승만 전 대통령은 오히려 통제계획경제 모델을 채택하였다. 그가 이것을 폐지하고 자유시장경제를 채택한 건 사사오입 개헌 때에 이르러서다.
    •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주장은 주로 자유기업원이나 뉴데일리와 같은 뉴라이트 진영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는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고 명시해놓은 제헌 헌법과 현행 헌법, 나아가 건국 강령에까지 반하는 주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절 참조.

  •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이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아닌 우창 신석우(1894-1953) 선생이다. 흔히 이 전 대통령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 일제에 빼앗긴 국호를 되찾아야 한다" 고 강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거 사실 고스란히 신석우 선생의 발언이다(…). 해당 국호를 제안할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 전후 일본은 한국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일체의 보상금/배상금을 오늘날까지도 지급하지 않았다.
    • 한일기본조약으로 일종의 보상/배상 자체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보상/배상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사죄 명목이 아닌 독립축하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국제법상 '식민지배 배상금'이라는걸 받아낸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웃국가의 독립을 축하하는 독립축하금'이라는 명목상의 이유를 내걸고 배상금을 받아낸 것.[107] 천황이나 정권 일각에서 공식적인 사죄도 수차례 있었으나, 전후거품경제가 꺼지고 정치사회적인 우경화가 진행되면서 집권세력인 강경우파가 국민의 내부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식민지배 사죄를 뒤엎는 발언과 도발행위를 국내외적으로 벌이는 통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 6.25 전쟁이오시프 스탈린김일성에게 시켜서 일으킨 전쟁이다.
    • 처음에는 그와는 완벽하게 정반대다. 오히려 이오시프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괜히 전면전을 일으켜서 미국과 연루되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모스크바에도 똑같이 원자폭탄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 김일성의 남침제안을 48번이나 반대했다가 애치슨 라인때문에 허락했다. 그 이후에는 소련이 공식적인 관여를 하지 않는 선에서 지원해주었다.[108] 사실 중국 등 떠밀어서 생색낸 거지만…

  • 에티오피아6.25 전쟁에서 한국을 지원해준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6.25 전쟁 당시 한국에 공군을 참전시켜 지원해주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내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심해져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왕따가 되자, 한국 내에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6.25 지원이 자동적으로 흑역사화되어버려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던 것이다.
    • 하지만 지상군을 지원한 국가 한정으로 보면 어느정도 맞는 말이다.

  • 6.25 전쟁 당시 국군은 자유민주국가의 수호를 위한 굳건한 신념으로 뭉쳐서 적의 침공을 격퇴하였다. 또는, 전쟁 당시 국군의 무용과 임전무퇴의 기상은 유엔군더글러스 맥아더 등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 무너졌다. 그것도 아주 처참히.(2) 전쟁 중에 제대로 부대를 통제하면서 후퇴라 할 만한 후퇴를 보여주었던 부대는 1사단 이외에는 거의 전무했으며, 대치 시에도 주로 유엔군의 측면 방어를 담당하다가 적의 공세가 시작되면 허무하게 무너져서 동맹인 유엔군을 고립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점을 너무나 잘 알았던 북한군과 중공군 역시 공세를 펼칠 때는 늘 의도적으로 국군 방어선부터 공격해 무너뜨린 뒤 이를 바탕으로 유엔군 방어선을 포위 섬멸해 버리는 작전을 즐겨 썼다. 그 때문에 전쟁 내내 유엔군은 국군과 합동으로 전선을 지키는 것을 마뜩찮아할 만큼 국군을 믿질 못했다. 매튜 리지웨이의 경우 유엔군 휘하 장교들에게 작전을 세울 때 국군은 전력 외로 취급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에서, 미군 장교가 국군은 글러먹었다면서 마구 짜증을 내는 장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사실 이는 긴급히 무차별적으로 징병한 인원들에게 제대로 된 훈련을 시키지 못했던 탓이 크다. 당시 한국 정부는 정규군 이외에도 미성년자들로 구성된 학도병에다 무장경찰들, 반공청년단 등을 닥닥 긁어모아 전선에 투입했는데, 말이 좋아 군인이지 그 태반은 사실상 민간인보다 나을 바 없는 멘탈리티와 전투력을 갖고 있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아예 작정하고 밀고 들어오는 적 정규군과 제대로 싸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다. 그래도 좋게 볼 만한 것은, 전투 중에 실종자가 나올 때마다 유엔군은 이들을 탈영병 내지는 도주자로 간주하고 짜증을 냈지만, 사실 이들 중 상당수는 단순히 길을 잃거나 자기 부대에서 낙오했던 것이어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저마다 속속 본대로 복귀했다는 것. 즉 훈련의 부족으로 부대 통제가 잘 되지 않다 보니 유엔군 입장에서는 군기문란이 과대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1960년대 이전에 대한민국은 최빈국이었다.
    • 실제로는 최빈국이 아니었다. 1인당 실질 GDP가 세계 46위였기 때문이다.

  • 1960년대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던 필리핀이 우리나라에 기술자를 보내 장충체육관을 지어 주었다.
    • 물론 당시에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으며, 기술자들도 많이 보내준 것은 사실로 당시 필리핀 기술자들이 지어 주었던 건물은 구 문화체육관광부 청사(現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한미국대사관 등이다. 그러나 장충체육관은 엄연히 한국에서 만들었다. 디자인은 건축가 김정수 선생[110]이, 설계는 최종완[111]이 담당했다.

  •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유신 독재 시절에도 모든 경상도민들은 정권에 아부하면서 어떠한 민주화운동도 한 적이 없다.
    • 그럼 도대체 이 사건은 어디서 일어났단 말인가?(...)
    • 개발독재 기간에 경상도가 경부축 개발과 고속도로 건설, 남동임해공업지역 유치 등으로 경제적인 혜택을 입기는 했을지언정, 민주주의의 파괴로 인한 피해는 모든 국민들이 동일하게 고스란히 받았다. 단지 이쪽은 이슈가 덜 되고 조명도 덜 받았을 뿐. 은근 오늘날에도 자주 보이는 잘못된 생각인데, 경제적으로 발전한다고 해서 비민주적인 정치로 입는 피해가 보상되는 것이 절대 절대 아니다.
    • 아이러니하겠지만 박정희가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때는 외려 전라도에서 지지도가 높았다. 이유는 상대방인 윤보선이 색깔론을 내세워서 이게 반작용을 일으킨것

  •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 측 혹은 진보 측이 만든 편향적인 단어다.
    • 원래 광주 측은 민중항쟁, 의거 라고 했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은 쓴 적도 없다. 실은 저 단어는 노태우 정권이 만든 것이다.[112]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의 안전과 존립을 위협할 폭력을 벌인 과격 봉기(uprising)이다.
    • 여기에는 5.18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5.18은 공수부대의 살육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를 무장하고 저항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저항권" 을 이유로 폭력을 쓴 것. 관련 내용은 김영택 문서도 같이 참고.
    • 이러한 혼동이 악의적이지 않을 경우, 거의 대부분은 "전두환 정권은 헌정사적 정당성이 확보된 정권이다" 라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국민의 대표로서(?) 정당하게 선출된 신군부 세력에게, 일부 내란세력이 반발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는 설명밖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도리어 전두환 정권은 부당한 폭력적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국민의 민주적 정치참여를 또 다시 유보시킨, 정당성을 얻기 힘든 내란세력이며, 이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은 반헌법적 내란세력에 대항하여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함으로써 헌법정신의 회복을 도모한 시민 무장투쟁이라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위의 정리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면 이하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어볼 것. 이미 역사의 판단은 내려진 상태이고 더 이상 재론의 여지 자체가 없다. 전두환이 일체의 대통령 예우에서 제외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대법 1997.04.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문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피고인들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시국수습 방안의 실행을 모의하고, 모의할 당시 그 실행에 대한 국민들의 큰 반발과 저항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강력한 타격' 의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하도록 평소에 훈련된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한 후[113], 이에 따라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진압봉이나 총개머리판으로 시위자들을 가격하는 등으로 시위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도망하는 시위자를 점포나 건물 안까지 추격해 대량으로 연행하는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였으며, 이와같은 난폭한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함으로써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114], 그 후 일부 시민의 무장저항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계엄군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귀중한 국민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시급하게 재진입작전을 강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상황이나 또는 광주시민들이 급박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있다고도 볼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115], 그 시위를 조속히 진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계엄군에게 광주 재진입작전을 강행하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시민을 사망하게 하였다.[116]||

  •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재조사가 필요한 사안이다.
    • 우리나라 역사에서 5.18만큼 조사를 많이 한 사건도 없다. 1980년 계엄사, 1982년 국방부, 1985년 안기부, 1988년 정부, 1988년 국회, 1995년 검찰, 1996년~1997년 사법부, 2005년~2007년 국방부, 2012년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에서 9번이나 조사했다. 33년 동안 매 정권마다 조사 안 한 적이 없는 사건이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의 조사에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사태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했다.
    •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그 민주사적 가치를 공인한 바 있으며[117], 각 정권에 걸쳐서 33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재조사를 실시하여 그 내막과 전말이 충분히 알려져 있다. 따라서 5.18에 대한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제기하거나 뜬소문을 신봉하는 것은 대한민국 3부의 판단과 역대 각 정권들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대한민국 정부의 합당한 권위와 정당한 판단을 위협하는 언행이 될 수 있다.
    • 현정부 들어서 5.18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재조명이 이뤄지는 분야는 5.18 당시 군부에 의한 헬기 총기사격, 그리고 더 나아가 5.18이 단순히 광주의 시위를 진압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태가 아니라 이미 그 전에 군부에 의해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 계획되었다는 의혹에 대한 검증, 발포명령자조차 공식적으로는 불분명한 상태로 남겨졌던 기존의 시각을 넘어 화려한 휴가 자체가 전술된 민간인 학살계획의 실행으로서 이뤄진 작전이라는 혐의에 대한 확인 등이다. 어느 점을 보아도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에 의해 확립된 5.18에서의 광주시민들의 정당성과 신군부의 부당성 및 위법성을 더욱 뒷받침하는 논의들이다. 5.18 재조사 운운하던 이들은 실제로 재조사가 이뤄지는 걸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외환위기(IMF)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사치스러운 풍조와 흥청망청 돈을 낭비하던 허랑방탕한 소비생활의 결과물이다. 대한민국은 번영에 눈이 멀어 함부로 샴페인을 터뜨리고 근검절약을 하지 않은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들, 심지어 당시의 일부 만평들도 그런 식으로 묘사하곤 했다. 집집마다 밍크코트가 한 벌씩은 있었다느니, 서민들이 분수에 안 맞게 백화점에서 돈을 펑펑 써댔다느니, 일용직 노동자들이 큼지막한 세단을 굴렸다느니 등등... 물론 그런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중산층의 소비생활에 익숙하지 않던 관점에서 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중산층들은 먹고사는 문제나 미래에 대한 대비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헬스, 문화, 여가, 스포츠, 레저, 자기개발, 자기실현 등의 새로운 소비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소비활동은 가히 대한민국 역사상, 아니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위와 같은 편견대로라면 그런 탐욕스러운 국민들이 어떻게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일부 교과서, 참고서에선 외환위기의 주된 이유 중 하나를 "국민들의 과소비" 로 서술하여 사실상 경제위기의 책임이 국민에게도 있다고 한 반면, 교과서에서 국민들이 단합하여 사회를 구하는 모습에 대한 서술을 "금모으기 운동" 이라 함으로써, 탐욕스러운 국민에 의해 벌어진 위기를 그 원인인 탐욕스러운 국민이 금고를 털어 해결한다는 굉장히 기형적이고 모순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118]
    • 대조적으로, 전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에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200여 톤이 넘는 금을 모으는 동안, 높으신 분들은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거나 국적포기를 하는 등 추태를 보였다. 또한 국민들이 기부한 금조차도 대기업 탈세에 이용되었는데, LG상사, 삼성물산, SK상사, 현대종합상사, 한화 등의 재벌그룹은 종합상사를 통해 금을 헐값에 판뒤 10%의 부가세를 환급받는 형식으로 약 2조 원 가량의 탈세를 저질렀다,


  • 대한민국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제대로 했더라면 사회의 부조리함과 악습이 없고 국민들이 살기 좋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 사람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주도했고, 오히려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이 빨치산 토벌 때 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사과했고 주민의 안전을 우선시했다.[121] 또한 일본군 소위 출신이였던 김익렬은 제주 4.3사건 당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협상을 했지만, 조병옥은 협상을 깨고 강경진압을 명령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이와 같은 예시를 봐도 이제껏 사회정의를 어지럽히는 대상들은 단순히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만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알제리는 독립후 친프랑스파 30만명을 강제 추방 했으나 나라가 개막장이 되었다. 오히려 프랑스가 구축한 근대적인 시스템이 붕괴되어 사회 전반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 백범 김구 선생의 손자들도 뇌물 받고 방산비리 저지르다 쇠고랑 찼다. 친일문제에서 가장 깔끔한 대한민국 해군은 비리가 엄청 심하다.[119][120]
    •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이런 사건들이 독립운동가 출신들의 손으로 저질러졌으면 용서할 것인가? 이 사람은 독립운동 조금 했다고 면죄될 것인가? 단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생겨났던 기득권들[122]을 모두 절대악 취급하면서 생긴 편견일 뿐이다.
    •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에 열을 올렸던 국부천대 이전의 중국 국민당이나, 나치 독일의 부역자들을 굴라그로 보내버렸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무슨 평가를 받는 지를 보자. 친일파같은 파시즘 세력의 척결은 역사적으로 필요했던 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이런 부류의 인간들을 깨끗이 척결하고나서 남아있는 사람들도 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면 별 소용이 없다. 친일파 척결의 궁극적인 목표가 민주주의 원칙과 인도주의에 반한 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법적인 응징인데, 친일파 이외에도 이런 막장 인간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면 '친일파만' 척결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 위에서 언급한, 친일파가 아닌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무지막지한 피해를 입힌 최덕신, 이승만, 조병옥 등이 벌인 만행들을 보자.[123]
    • 물론 위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청산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쨌거나, 이들은 나라민족을 배신한 이들이기에 앞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범죄 집단인 일본 제국에 충성하고 협조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중에서 반성한 자와 반성하지 않은 자를 가려낸 것이다. 당연하지만, 자기 죄를 반성한 친일파는 까이지 않지만[124], 하판락, 노덕술, 노천명, 서정주 등은 죽을 때까지 친일파로서의 과거를 부정하려들거나, 심지어 미화하려고까지 해서 까인 것이다. 이런 언행들은 향후의 국가의 앞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친일 경찰들이 해방 후에도 살아남아서 갖가지 학살이나,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의 탄압, 친일 청산 방해에 앞장서는 추태를 보였고 당연히 이는 사상의 자유가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결론을 내리자면, 친일파이냐, 독립운동가이냐를 떠나서 자기 흑역사를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이를 위해 계속해서 선(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125]이 득세했어야 훨씬 더 정의로운 사회가 구축되는 것이고,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부조리의 대부분은 그렇 득세를 막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5. 문헌[편집]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 정확한 표현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다. 해당 문서 참고.

  • 병법 36계, 즉 ‘36계 줄행랑’이란 말은 손자병법에 나온다.
    • 적어도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란 말이 남북조시대 단도제가 한 말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누가 처음 제안한 말인지도 불분명하고,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도 아니다.


  •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등갑군등나무를 활용해 만든 갑옷을 입었다.
    • 오늘날 알려진 등(藤)과는 달리, 여기서 말하는 등나무는 외떡잎식물 계열의 끈 같은 나무를 말한다. 대나무 이상으로 질겨서 생필품을 제작하는 데 이용되는 식물로, 원래 藤은 이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등나무는 多花紫藤.

  • 《촉왕본기》 에 따르면, 소쩍새의 수많은 이름들 중 하나인 귀촉도(歸蜀途)는 촉한의 망국의 황제 유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소쩍새는 유선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촉 지역의 고대 국가를 통치했던 "두우" 라는 인물과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귀촉도 이야기가 나오는 《촉왕본기》 는 전한 시대의 책이다.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은 성경에 나온다.
    • 새뮤얼 스마일즈(1812~1904)의 《자조론》이라는 자기개발서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
    • 단, 표현만 다를 뿐이지 결과적으로는 "자조"(self-help)를 의미하는 구절은 몇몇 있다. 참고로 잠언 6장 5절의 "스스로 구원하라" 는 표현은 전후 맥락을 감안하면 자조의 의미가 아니다. 이 부분은 다름 아닌 보증 절대로 서지 말라는 대목이다(…). 성경에 써 있네~♬

  • 베트남의 호치민은 과거 박헌영에게서 받은 목민심서를 즐겨 읽었으며 그의 묘소에도 목민심서가 남아 있다.
    • 90년대 TV프로그램에서 언급한 것으로 시작되는 이 유명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가 생전에 목민심서를 읽고 감명을 받았는지도 불분명하며, 그의 시신 머리맡에 목민심서가 놓여 있지도 않고, 그의 묘소에 남아있는 12만 권의 유품들 중에서도 목민심서는 없다.#


6. 같이 보기[편집]




[1] 로스트 테크놀러지 항목 참조.[2] 이러한 일직선적인 '발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문명의 일부 발전도를 들어 근대의 자생 가능성을 논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점 중 하나다.[3] 당연하지만 이렇게 오래 산 사람은 드물었기에 조선시대에서는 80~90살을 넘은 노인은 명예직을 제수하기도 했다.[4] 다만 동아시아권에서는 서양에 비해서 병법서나 역사서의 편찬이 정연하기는 하였으나 개별적인 전투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간략한 편이어서 대중들이 접하기에 쉽지 않은 점은 있다. 동양에서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 삼국시대만 해도 특정 전투의 세세한 부대 배치 등이 복원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반면 로마사에서는 비교적 그런 예가 많다. 물론 그냥 양덕이 무시무시한 경우도 있긴 한데 [5] 아테네의 민주정도 해군덕에 발생하고 유지된 측면도 있는데 갤리선에 탑승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민주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특권층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기에 해군에 비판적이었다.[6] 위에서 언급한 콤모두스 황제의 경우. 사실 이 사람은 극렬 검투 경기 덕후라서 이런 짓을 자주 벌였다.[7] 구경거리라는 의미도 있다.[8] 당장 로마 제정 초기부터 귀족이건 평민이건간에 사치부리는 자를 사회적으로 개망신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놀고 먹기만 하는 자를 색출해서 싹 발가벗기고 조리돌림했다는 기록이 있다.[9] 마등한수의 난에 한수의 편에 들어가서 동탁 이하 급의 역적이고, 공융, 도겸, 장양, 공손찬이 참가를 하지 않았다. 손견은 독립군벌이 아니라 원술의 소속으로 참가했다.[10] 이일로 인해 한복은 동탁급의 평가를 받았다.[11] 영웅기 주석 출처[12] 여기서 이전 문서에서 편견의 오류가 있는데 손견이 화웅을 죽였다고 하지만 참했다는 기록은 직접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휘하가 베었다는 뜻이다. 자세히 한것은 일기토 문서 참고.[13] 구판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그레고리력을 반포하며 성탄절 날짜를 확정했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레고리력을 반포했을 뿐, 교회가 지키는 축일들이나 기념일들은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단지 기준이 되는 달력이 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력이 되었을 뿐이다.[14] 다만 이것은 서유럽에서 출발한 편견만은 아니며, 모로코인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도 블랙아프리카 지역 문명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몇차례 등장한다.[15]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유명하다.[16] 사실 그 이전에 현대 마다가스카르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말라가시인의 조상인 인도네시아 지역의 말레이인들의 도래가 있었기는 하나, 그 뒤로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까지 중동 이외의 아시아 지역에서 도래한 이들은 없었다.[17] 송가이 제국도 이슬람을 받이들였다. 오늘날 나이지리아 북부가 이슬람세가 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8] 국제 과학사학회 회장 로널드 넘버스 등[19] 특히 여자 몽마인 서큐버스와 교제했다는 등의 이유[20] 최대한 학살당한 숫자를 늘릴수록 여성들이 더 많이 차별, 학살당했다는 유리한 근거가 되기 때문.[21] 다만 태조 2년인 1393년 조선의 인구가 30만에 불과하다는 기록은 그것을 기록하는 당사자조차 믿지 않았던 수치임은 감안해야 한다. 당장 개경에만 장정 십만 명이 있는데 말이 되는가? 하는 주석이 바로 옆에 붙어있을 정도.[22] 중세 왈도파 사냥으로 100만명 스페인 종교재판으로 개종한 무어인과 유대인까지 씨를 말렸다.[23] 여기서 종교 권력이란 가톨릭, 개신교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종파를 일컫는다. 당시에는 이미 교파화(confessionalisation)를 이루면서 종파마다 자기 세력권에서의 영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24] 정작 교황청은 이 책을 출판 금지시켰고 저자 토마스 크라머를 단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끌었단걸 보아서는 확실히 당시 사회가 집단적 광기에 빠진 거라고 볼 수 있다.[25] 출처는 《유럽의 마녀사냥》 텍사스 주립대 역사학 교수 브라이언 P. 르박(Brian P. Levack)著[26] 실제로 적지 않은 유명인들의 어록들이 그런 식이다. 목격자가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했던 말이 현대까지 이어졌다면 (본인이 "나 이렇게 멋있게 한 말씀 했다" 고 자랑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어떻게 검증될 수 있겠는가?[27] 바로 이 때문에 유럽의 지식인들은 종교에 반감을 갖고 있는 영미권 지식인들에 대해 "너네는 아직도 19세기를 살고 있냐?" 라 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세속 국가임에도 종교의 영향력이 상당한 미국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28] 옛날에는 백인, 흑인, 황인들끼리 서로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29] 세종대왕도 최만리도 중국이란 말을 사용했다.[30] 제노바에는 이 이름의 공항과, 호텔이 존재한다.[31] 오히려 단두대와 관련이 있고 단두대에서 죽은건 루이 16세이다. 우리가 아는 단두대의 칼날은 루이 16세가 고안했는데 기존에는 반달형 칼날을 사용했지만 루이 16세가 이걸 사용하면 사형수의 고통이 심할 것이라고 하여 바꾸었다.[32] 다만 이 사람은 고의로 국민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적 장애가 있어서 제대로 사리판단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33]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제자들 중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도 있었다![34] 참고로 왜 모차르트살리에리보다 궁정음악가로서의 월급이 낮았냐면, 충분한 돈을 받고 일하는데도 모차르트가 이것도 적다고 징징거리면서 '월급 올려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하고 땡깡을 부리다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에게 돈만 밝히는 싸가지없는 놈이라고 찍혀서 월급이 오르지 않은 것이다(...). 이때 모차르트는 당시 고위급 공무원의 8개월 치 급여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지만, 그럼에도 부인이랑 같이 사치스럽게 사느라고 돈을 흥청망청 쓸 만큼 경제 관념이 빵구가 나서 돈이 부족하다고 한 거다. 반면 살리에리는 무리하게 급여 인상을 요구하는 일이 없이 우직하게 일했으므로 알아서 월급이 오르다보니, 얼떨결에 인기는 자기보다도 많은 모차르트보다 돈을 더 많이 받고 일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35] 당장 끼니 때마다 반찬도 없이 밥만 먹는다고 생각해보자. 맛도 더럽게 없을 뿐만 아니라, 영양실조 걸리기가 딱 좋다. 매 끼니 때마다 아무것도 없이 빵만 씹어먹는다는게 이것과 같은 거다.[36] 노빈손 시리즈 프랑스 대혁명 편에서는 프랑스의 단위를 영국의 단위로 잘못 옮겨서(예를 들면 미터를 야드-파운드법으로 잘못 옮겼다는 식) 키가 10cm나 줄어서 150대 중반이 된것이라고 설명했다.[37] 현재도 아프리카인들은 동질감이 없다. 인종만 같은거지 민족은 백인, 동양인 등과 마찬가지로 다 다르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중국인,한국인,일본인이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큰 동질감을 가지는지 생각해보자[38] 무엇보다도 각 주의 자유와 권리의 상징으로 생각될 수도 있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는데 건국때부터 이 지역은 반연방주의의 텃밭이었다. 앤드루 잭슨도 "걔네들이 독립싶어하고 하는건 관세니 노예제니 하는게 아니라 그냥 나가고 싶어하는 것" 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39] 잘해봐야 노예 소유자들이 사병으로 쓴 경우[40] 과거 로마 제국이나 나폴레옹 황제 등극 시기의 프랑스가 역대 최강의 국가라는 오해가 있지만 이들 국가의 영향력은 오로지 유럽의 영토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포르투갈에스파냐가 있는 곳.)나 스칸디나비아 반도(현재의 노르웨이스웨덴이 있는 곳.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핀란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포함이 안 된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나 나폴레옹 황제 치하의 프랑스나 핀란드 지방을 지배하지 못 했던 것은 동일하다.)같은 곳에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냉전 시기에는 유럽 따위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넓은 제1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했고, 냉전 종식 이후에는 사실상 전 세계 위에 군림하는 나라라고 보면 된다. 세계의 모든 경제 관련 통계는 달러화를 기준으로 계산되며, 거의 모든 나라의 여행 책자나 안내 표지에는 미국식 영어가 자국어 이외에도 반드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세계에서 오직 미국만 쓰는 도량형 기준인 야드파운드법때문에 미터법을 따르는 미국 이외의 모든 나라들의 수출용 공산품에는 거의 대부분 온스(oz), 파운드(lbs), 피트(ft), 야드(yd) 등의 단위가 통상적인 미터법 단위(kg, km, cm 등등)외에 별도로 표기되어 있다.[41] 다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식민지 가지고 싸우다가 된통당해서 "아오씨 그냥 식민지 해방시키고 다시 시작해봅시다!" 라는식으로 해방시킨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완벽히 설명해 줄 수 없다. 이미 1차때 그렇게 당하고 2차는 왜 그런단 말인가?[42]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가 각지로 퍼져서 동남아만 해도 제일 늦은 캄보디아만 해도 1930년대 말에는 이미 민족주의가 들어와 있었다.[43] 사실 이 말도 좀 틀린게 베트남은 100년은 안된다.[44] 사실 식민지에 대한 애착보다는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기억때문에 식민지들을 자국의 자존심과도 같이 여겨서 포기하기를 거부한 것에 더 가깝다. 오스만 제국이 이런 이유로 알바니아, 키프로스, 에게 해 제도 등의 속령들의 독립을 거부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이들을 몽땅 잃었다. 포르투갈 역시 20세기 중반까지도 자국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인도고아 주모잠비크, 앙골라 등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을 막겠다고 애쓰다가 국제사회에서 반쯤 왕따가 되다시피 했고, 일본의 경우 다른 식민지는 잃더라도 한반도만은 일본 영토로 남겨야 한다며 연합국에게 주장했으며,(물론 연합국은 이미 한국의 독립을 다 결정해놨기에 당연히 씨알도 안 먹혔다.대신 류큐는 지켰다.) 영국 역시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던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에 사실상 자국의 최후의 식민지나 다를 바 없던 홍콩을 반환해내라는 중국 측의 요구에 대해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하면서 반환일을 최대한 늦추고자 했으나, 결국 1997년에 홍콩을 돌려주었다. 이런 일들은 식민지에 대해 무슨 애착이 있었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제국주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더 크게 작용한 결과에 더 가까웠다.[45] 진짜 그랬다면 남북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이 학살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이라 쳐도 문제가 되는데 타탕카 이요탕카 문서의 '우리는 가난하지만 자유롭다' 라는 부분에 있는 연설에서 기독교 전파를 명목으로 한 종교탄압이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뉴질랜드에서는 선교사들중 엉터리가 많아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심지어 무기 밀매까지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뭐...[46] Wieleitner, Heinrich. “Albert Einstein am Münchner Luitpold- Gymnasium.” Münchner Neueste Nachrichten, 14 March 1929. Einstein Papers 46번 각주 Einstein Papers 48번 각주 [47] 애초에 그는 나지움 9년 생활 중 8년을 별탈 없이 잘 이수했다.[48] 물론 보면 현명한 선택이긴 했다. 미치광이 히틀러 밑에서 유대인 병사란 조합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49] 다만 벵골 대기근의 경우 논란이 많은 편이다. 항목 참고[50] 물론 무장친위대 같은 자원 입대 인력 중에서도 정예부대인 다스 라이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등은 나치즘의 이념에 충실하다고 판단된 병력들로 구성된 부대로서 심각한 전쟁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리고 <나치의 병사들>이라는 책에 의하면 나치즘은 단지 어떤 두루뭉술하고 추상적인 정책 이념에만 그치지 않고 독일군 개개인에게 설득력있게 주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이 대전 기간 동원한 병력이 1천만 명을 능가하는데 이 1천만 명이 모두 살인광이라고 단정할수 있을까? '나치독일군'이라는 이름 하에 거대한 인원을 모두 포괄하려 하기에 범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오류다.[51] 별 이유 없이 식인을 한 장성이나 포로 참수 경쟁을 벌인 병사 등이 나온 군대다(...)[52] 번역서로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독소전쟁사>,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 <나치의 병사들> 정도가 참고하기 좋다. 수많은 미번역된 자료 중 참고할 만한 것으로는 가 있는데,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자행한 성범죄를 400페이지 가량으로 심도 있게 분석한 논문이다(제목 그대로 구글에 검색하면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53] 인성이 정상이어도 중용 못 되었다.[54]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것은 영국과 미국은 북아프리카를 제외하면 그이전까지 공중, 해상에서 싸웠기에 지상전에 비해서 병력의 규모는 작은게 당연하다. 그리고 추축국 공군과 해군의 등뼈를 꺾은건 영국과 미국이니 누가 더 기여했는지 싸우는것도 우스운 일이다. 단적으로 소련은 전쟁기간동안 11,000여대의 추축국 항공기를 파괴했는데 영국이 북아프리카에서 파괴한 항공기만 8,000여대이다.[55] 단, 이 해전 이전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의 결과로 과달카날 지역의 제해권 자체는 미군에게 넘어온 상황이기는 했다.[56] 거기에다가 진주만 공습이 이룬 전과가 (항공모함을 격침하지 못했다는 치명적 실수를 제외하고는) 미군의 전함을 대부분 반고자로 만들어 버렸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탓도 있다.[57] 뭐 사실 팔레스타인 문제 등 때문에 독일 내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은 그리 좋지 않다[58] 그 당시 지도자였던 네타냐후는 골다 메이어의 생전의 망언을 사과해야 했을 정도였는데 네타냐후는 강경적 인물인데도 그럴 정도니 얼마나 골다 메이어가 막장이었는지 보여준다.[59] 참고로 첸쉐썬은 본래 NASAJPL의 창설에 크게 기여했던 우주공학자다. 농학에 대해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농업에 대해 자문을 해줬다가 수천만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난 거다(...).[60] 게다가 미군의 잘못된 전략과 프래깅도 한 몫 했다.[61] 심지어 일본군 위안부도 본래는 부라쿠민과 같은 자국 내 하층민 여성들을 주로 끌고 가다가 이에 대한 반발이 나오자, 목표를 한국인을 포함한 점령지의 여성들로 바꾼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62] 연합군이 폭격하고 본토로 쳐들어오고, 국가는 국민들 끌고 가고, 식량/돈/생필품 징발에다 군수품을 위해 열악한 노동력으로 끌려가니[63] 오히려 행정이 개판이었던 독일, 소련보다 더 철저했다.[64] 일제강점기 이전에 수천년간 국가를 유지하던 조선과 달리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는 그들만의 민족과 나라를 갖춘적이 없었으며 팔레스타인건국은 불과 최근의 일이다.[65] 하마스가 독립운동가였던 시절은 딱 초반밖에 되지 않은데다가, 하마스가 다른 이슬람극단주의 테러 단체들에 비하면 나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좋다고 볼 수는 없다.[66] 이라크를 점령했던 미군을 포함한 다국적군에게 저항했지만 동시에 하마스나 이츠케리아 체첸군, 지금의 자유 시리아군처럼 테러를 저지른 반군들도 있었다. 그리고 과격한 테러를 저지른 반군들 중 일부는 알카에다계도 있었으며 훗날 이들은 다에시가 되었다.[67] 물론 독재자가 있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포기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중동 또는 이슬람 문화권은 한국과는 달리 민주화운동이 성공된지 얼마 안 된 시기이기 때문에 다시 독재로 회귀할 가능성도 부정하기 어렵다.[68] 여진족에게 응징하는 법이 매우 충격적인데, 직접 여진족 마을로 쳐들어가서 집을 불태우고 남자들을 학살한 뒤에 여자와 아이들을 끌고 갔으며 그들의 논밭에 소금을 뿌려서 황폐화시키기도 했다. 이 시기의 조선의 왕은 놀랍게도 세종대왕. 4군 6진 자체도 이때 여진족들이 학살을 피해 달아나면서 버려진 땅에 조선인들을 대거 이주시켜서 개척한 결과물이다.[69] 이쪽도 독일러시아에게 뜯어먹힌 불쌍한 나라라고 보기에는 먼저 이 둘을 괴롭히던 깡패 국가에 가까웠다. 실제로 뮌헨 협정에 참여한 국가중 하나가 폴란드였다. 그 전에도 이리저리 깽판을 치기도 했고[70] 다만 폴란드와의 1대 1 비교는 무리인 것이 폴란드에 비해서는 공격의 결과가 동북아 특유의 지형적 조건(과거 중국의 압도적인 위상 등) 덕분에 장대하진 않다(?)[71] 외적이 침공했는데 그 와중에 반란까지 일어나 반란군만 수만에서 수십만인 나라들도 있었다. 심지어 외적보다 먼저 정부를 멸망시킨 사례들도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중국/군벌 문서만 봐도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의 군벌 세력들이 뭐했는 지를 알 수 있다.[72] 그리고 얘들도 미국이 자국에게 나라 문 열라고 협박을 해서 나라가 막장 테크를 타는 상황에도, 막부파유신파로 분열되어 내전을 일으켰고, 그렇게해서 유신 지지로 여론이 모인 뒤에도 정한론을 두고 이에 찬성하는 파반대하는 파로 나뉘어서 또 내전을 일으켰다. 내전을 빨리 수습하고 개화를 서두르지 않았다면, 일본 역시 옆동네 조선이나 청나라처럼 열강들의 맛있는 먹잇감이 되었을 상황이었다.[73] 광개토 대왕때 후연까지 쳐바른 강자 국가임에도 후연이 몰락한 뒤 화북을 통일한 북위에게 조공했다.[74] 전한 시대에는 흉노에게, 당나라 초기에는 돌궐에게, 당나라 중기에는 회흘토번에게, 북송 때는 거란서하에게 조공한 바가 있었다. 한반도 왕조들이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조공을 했던데 반해, 이쪽은 진짜로 삥 뜯긴 쪽에 가까웠다. 전한 시대에는 더 안습하게도 자기들이 흉노한테 칭신까지 했다(...). 이때는 흉노묵돌 선우가 남편인 한고조를 잃고 과부가 된 여후에게 "나는 부인이 없고, 너님은 남편을 잃었으니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우자."라며 대놓고 섹드립을 치는 등의 무례를 범해도 끽소리도 못했을 지경이었다.[75] 뿐만 아니라 한민족 자체도 여러 민족이 죄다 섞였다. 그중엔 적지만 중국쪽이나 남방계도 섞여는 있다. 즉 한민족=동이족 공식은 완전히 틀리다는것[76] 애초에 이 년도가 단순히 ‘요 임금 즉위 50주년에…’라는 문구를 억지로 계산해 넣은 것이다.[77] 최근에는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상향해서 본다.[78] 사실 그 이전에 흘해 이사금때 일본 왕이 "당신네 나라 공주 좀보내주시오" 해서 보낸적이 있다. 사실 지리적으로 보면 일본과 가장 가까운 국가중 하나는 백제가 아니라 신라였다. 아얘 혁거세거서간~탈해이사금 시기에 있었던 호공은 일본인 출신이었다.[79] 마한을 공격할때 일본 병사를 부른적이있다고 한다.[80] 세가는 제후들의 기록이고 본기는 천자의 기록이다. 그런데 고려사는 조선 초에 만들어진 사서인데...?[81] 이는 그가 참고해서 쓴 중국 사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중국 사서를 참고해서 써서 내용이 아예 똑같은 부분들도 있는데, 몇몇 부분은 참고할 근거가 없어도 내용을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작성했다. 물론 가장 유리하게 작성된 나라는 신라다. [82] 공민왕때 기록.[83] 정도전불씨잡변에서 신랄하게 비판[84] 물론, 승려들의 노동 가치도 동시에 깨달아 여러 국가사업에 부려 먹히던 것도, 그럼에도 유학자들이 멸시를 거두지 않은 것도 사실.[85] 물론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정부에선 기술 발전시켜 생산성 늘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라고 했듯 위정자들의 실패가 한몫 하는건 맞다.[86] 다만, 벼슬길에 올라야 본인은 물론 그 자손들이 양반이 되므로, 양반 신분을 얻고자 족보를 사는 것은 그냥 스펙좋은 사람이 자기 조상님이라고 뻥튀기(…)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 족보 매매는 천민이 아니고서야 대개는 뒷말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같은 성씨, 같은 족보 내의 사람끼리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뮤지컬 시집가는 날에서 맹 진사가 조상들의 최고 스펙이 고작 과거 시험 1차 합격에 불과한 것에 열폭해서 10대조부터해서 영의정이니 성균관 대제학이니 하고 조상들의 스펙을 위조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쉽다.[87] 반대로 평민이 양반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는데, 양반전에 나오는 것처럼 남의 족보를 사는 개막장스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냥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것만으로도 양반 신분을 합법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허 생원이니, 김 첨지니, 김 선달이니, 맹 진사니 하는 칭호가 왜 무수히 많이 나오는 지를 보자. 되려 조선시대도 끝난 일제 강점기에나 양반이 혈통에 의해 저절로 되는 것인양 고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때는 양반이 되기 위한 합법적인 방법인 과거 제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88] 현은 '나타나다'라는 의미이고, 고는 위패와 제주의 관계를 의미하고(고는 죽은 아버지의 경우 부를 대신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부는 조고, 증조부는 증조고라고 적는다), 신위는 말 그대로 혼령의 자리라는 의미.[89] 다만 그들은 대게 좀 살만한 집일 가능성이 크다. 내일 먹고 살 걱정을 할정도로 가난한 집에서 책값+수업료에 일손 감소(아이들이 공부하러 가면 일 시킬수가 없으므로)는 타격이 커서 교육을 못시킨 사람도 많았다.[90] 외려 일본조선의 우수한 대포에 놀랐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일본도 대포가 있기는 했지만, 일본군이 대포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오히려 임진왜란의 종전 후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치세와 에도 막부 초기의 자국 내 내전에서의 일이다. 자국의 대포가 조선의 것에 크게 뒤떨어지는 사실에 한심함을 느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서양식 구포를 모방한 대포의 제작을 명했을 정도다. 참고로 이렇게 만들어진 일본제 대포의 시범 발사 결과 대포가 폭발하면서 개발살이 났다고 한다(…).[91]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최무선이 화포를 만든 이래 조선은 화포 개발에 열올렸다. 이순신이 사용한 천자총통 등은 선조때 개발되었다.[92] 이 청동기의 재료인 구리주석보다도 매장량이 월등히 많았다.[93] 조총이 대량생산하기 쉽고, 사용하기가 좋다는 점 때문에 가끔씩 웃기는 상황이 세계 곳곳에서 많이 연출되었다. 가령 17세기 북아메리카에서는 조총을 아메리카에 들여온 장본인들인 유럽인들이 정작 부족민 전원이 총기로 무장한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의 전쟁에서 총기 부족에 시달리는 통에 을 들고 반격한 사례도 있고, 역시 머스킷으로 대대적으로 무장한 서아프리카의 한 부족을 맞아 싸우던 스코틀랜드의 노예상들이 총이 부족해서 석궁을 들고 덤비다가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94] 당시의 행주산성 주변에는 민가가 하나도 없었다.[95] 물론 이때 자신이 폐모론을 주창해 유학자로서의 인망이 크게 떨어져버려 회복할 의도였다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전한다.[96] 관아에 숨기도 했는데 다만 이 일을 전달한 영의정 이준경은 "그러지 않으면 다 죽이기에 그런다고 합니다." 라고 왕에게 말했다.[97] 이와 같은 사례가 바로 김두한이다. 김두한도 제멋대로 몇몇 지역을 자기 나와바리라고 주장하면서 현지 상인들에게 보호세를 걷고, 타 조직과 이권다툼을 벌이던 영락없는 조폭이었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일제강점기나, 이승만이나 박정희같은 독재자의 치세와 같은 한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라서 그 와중에 크게 이름을 날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당대부터 엄청나게 미화가 되었다. 살인이나 마약 밀매를 밥먹듯이 하는 현대 미국의 갱스터들이 인종 간 다툼에서 같은 인종의 보호를 명목으로 앞장서서 총대를 메는 것을 보고 같은 인종들끼리 자기네 인종이 대다수인 갱스터 조직을 영웅시하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GTA 산 안드레아스칼 존슨과 그의 조직인 그로브 스트리트 패밀리가 미화되는 것과도 같다.[98] 조선시대 붕당의 역사를 따라가보면 실학자들의 뿌리는 엄연히 사림 세력이다.[99] 골씨의 경우 강화 골씨가 16c까지 존재했던걸로 확인되지만 그 이후 대가 끊겼다.[100] 이 문단에서 말하는 왜구는 일본의 정규군이 아니라 13~16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일본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을 말한다.[101] 양형영성체라고 하여서 성혈(포도주)까지 마시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게다가 20세기초에는 더더욱 드물었다. 설령 양형영성체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체를 포도주 찍어서 먹는 것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고 싶어서 들어가기에는 가톨릭은 영 좋지 않은 종교다.[102] 이완용은 이 와중에도 자신이 죽을 때까지 고종이 시켜서 조선을 일본에 넘겼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103] 박희도, 최린, 정춘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전 서술에는 이광수최남선도 언급이 되었는데, 이들이 변절한 것은 맞지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서의 신분으로 변절한게 아니다. 특히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때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33인 중의 한 명으로 분류되지 않는다.[104] 게다가 옥음방송 항목을 보면 알듯이, 당시의 일본 황실 내에서 쓰던 일본어일본인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서민들이 일상에서 쓰던 일본어와는 다소 달랐기 때문에, 일본어를 깊이 있게 배웠을리가 만무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알아듣기는 매우 어려웠다.[105]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려던 반민특위이승만이 개인의 권력욕때문에 박살낸 건 맞는데, 일단 자기도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일본독도에 대한 침탈 야욕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일본 함정이 하나라도 넘어오면 무조건 격침시켜라."라고 명령할 만큼 반일 성향이 강했던지라, 친일파 출신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만한 요직은 하나도 주지 않고 나몰라라하였고, 친일파 중에서 유능한 사람만 골라서 죽도록 공밀레를 하려고 했다. 반면, 김일성은 자기한테 충성하는 자라면, 그게 친일반민족행위자건 독립운동가건 간에 주요한 요직에 앉히고 우대했다. 어쩌면 정통성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김일성은 이승만보다 정통성에서 훨 떨어졌다.[106] 부마민주항쟁이 어디서 일어난 사건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5.18 민주화운동 못지 않게 피바다가 연출된 곳이었는데, 부산 시민들이 여당을 좋게 봤을 리가 없었다.[107] 실제로 당시에는 끼리끼리 뭉치느라 미국 같은 경우는 공산권에 대한 일체의 경제적 지원과 학문적 지원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었고 그걸 자기 진영의 나라들에게 강요했다. 식민지와 식민 지배국과의 관계도 매우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진영 자체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 과거 식민지로부터 '역청구권'을 주장하며 역으로 돈을 뜯어내려고 한 경우도 있었다. 냉전이 끝난 시대가 되어서야 과거 식민지들에게 사죄하는 움직임이 생기고있는 것. 단, 1세계와 2세계의 경우는 자기 진영의 국가들에게는 사과와 배상이 많이 이루어 졌다. 3세계는 사실 자기 진영과도 따로 노는 국가들이 많아서 [108] 공중 지원도 전투기 조종사를 비밀리에 파견했는데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조종사들에게 중국군 군복을 입혔으며 러시아어로 교신하는것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미국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소련과 마찬가지로 3차 대전으로 번지는걸 원하지 않아 모른척 했다.[109] 명동성당 앞에 있던 병원. 병원은 1986년 여의도로 이사했고(여의도성모병원), 병원이었던 건물은 현재 가톨릭회관으로 쓰이고 있다.[110] 명동성모병원[109], 종로 YMCA, 연세대 학생회관 등을 건축한 인물.[111]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112] 자세한 건 김영택 박사가 쓴 박사학위논문 내용의 일부 참고.# [113] 즉 우발적이거나 마지못해 군사력이 투입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는 뜻.[114] 즉 계엄군 측이 먼저 발포했다고 대법원이 인정했다는 뜻.[115] 즉 북한군의 개입이나 다른 안보위협 정황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대법원이 부정했다는 뜻.[116] 즉 광주에서의 학살이 국익이나 안보와 같은 대승적 차원에서의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도리어 전두환 개인의 권력욕에 방해가 되는 세력을 잔혹하게 제거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는 뜻.[117] 극우들이 그렇게 떠받들어대는 박근혜조차 5.18 민주화운동을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일으킨 숭고한 행위'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5.18에 대한 본인의 인식과는 별개로 발언한 것일 수도 있으나, 어찌됐든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5.18 민주화운동은 명명백백히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 반헙법적 내란세력에 맞선 저항운동이다인 것이다.[118] 비슷한 사례로 로마 제국의 멸망도 황제, 귀족, 백성들의 사치스럽고 탐욕스런 생활로 인해 멸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도 로마 제국 시대에는 금욕적인 생활을 권장하던 기독교스토아 철학의 전파로 인해 오히려 방탕한 생활을 배격하는 분위기가 짙어졌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애초 로마인들이 그런 식의 방탕한 생활을 지속했다면, 이미 초기에 멸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제 로마 제국은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방탕한 자를 색출하여 조리돌림을 시켜서 개망신을 주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 윤리적으로도 금욕주의적인 부분이 생각보다 많이 권장되었다. 세네카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언제적 사람인지를 보자. 심지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까지 했다.[119] 해군 비리의 규모가 유달리 큰 것은 해군장비가 워낙 비싼 경우도 있어서 그렇다. 그렇지만 거기서 거기.[120] 웃긴건 정작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시기에는 해군이 가장 청렴했다.[121] 단, 이 사람도 간도특설대에 대한 해명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비판 받고 있다.[122] 특히 친일파들 중 처벌받지 않고 살아남은 부류들[123] 심지어 국민방위군 사건의 원흉인 신성모도 독립운동가였다! 친일파건 독립운동가건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끼쳤느냐가 더 중요한 거다. 당장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에게까지 까임방지권을 얻은 이종찬 장군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다.[124]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을 통해 아버지의 죄를 폭로하려는 아들 임종국에게 "네 책에 내 이름도 집어넣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라고 했던 임문호나, 친일파임을 부끄럽게 여겨 군대로 출사하지 않으려다가 결국 6.25 전쟁때문에 억지로 장군에 임명된 뒤에는 북한에게 멸망할 뻔한 대한민국을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 된 이종찬 장군과 김석원 장군, 역시 비슷한 공로를 가졌으면서 일평생을 대한민국 공군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던 김정렬 장군 등은 자신들의 죄를 분명히 반성했고, 그에 더해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기에 친일파였는데도 불구하고 후세인들에게 두고두고 칭송을 받는 것이다. 똑같은 공로가 있는 백선엽이 여전히 까이는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의 과거를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 그이유이지, 단순히 친일파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까이는 게 아니다.[125] 오해할까봐서 쓰는 말인데, 여운형절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며, 오히려 어엿한 독립운동가였다. 마지막 링크를 여운형 문서에 걸어둔 것은 앞 링크의 주인공 세 명이 전부 친일파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출신인 여운형과 비견될 정도의 인격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