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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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편덕렬.jpg
성명
편덕렬(片德烈)
생몰
1897년 1월 29일 ~ 1976년 12월 12일
출생지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마을[1]#
사망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상도2동[2]
매장지
경기도 양주군 영락 동산교회 묘지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편덕렬은 1897년 1월 29일 황해도 연백군 봉서면 현죽리 목동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위 친형인 편강렬과 함께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하자 중국 난징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했으며, 1919년 6월 경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하고 국경주재 연통 책임자로 선임되어 국내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1919년 9월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1월에 임시정부 국내실정조사원이 되어 황해도 연백군 일대를 내왕하면서 동정을 살폈다. 1920년 9월 군자금 모집 임무를 맡고 국내로 잠입해 서울에서 선만상보(鮮滿商報)를 경영하는 한준형(韓俊炯)과 김성환(金聖煥), 김덕영(金德榮) 등을 만나 군자금을 받은 뒤 귀환하던 중 평양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1년 4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동년 5월 23일 고등법원 항소심에서도 형이 확정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4년 3월 25일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형 편강렬과 합세했고, 의성단장(義成團長)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내에 돌아와 정보입수와 군자금모집을 담당하였다. 그 후 만주로 재차 건너가 활동했으며, 1928년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반감이 커져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반석현에서 중국에 귀화했다. 1929년 1월 16일 형 편강렬이 사망한 후 유언 대로 만주에 묻었고 무장독립조직에 가담해 일제에 항거하다가 1933년 5월 다시 국내로 들어와 조선일보사에 입사해 기자로 복무했다.

1934년 4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의성단을 거점으로 하여 조직을 강화했고, 1943년 7월 서울에 잠입해 김영희(金永熙) 등을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밀파했다. 그러나 김영희가 중도에서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나버렸고, 결국 편덕렬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 관악구에 거주하며 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1976년 12월 12일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영락 동산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편덕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선대는 대대로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의 절강 편씨 집성촌에서 거주했으나, 조부 대에 이르러 황해도 연백군으로 이주했다고 한다.[2]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분리된 것은 1980년이다.